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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주의'에 해당되는 글 13건

  1. 2019.08.29 마르크스와 홍콩 시위 지지 논란
  2. 2019.08.28 조국 이슈와 계급 불평등
  3. 2018.05.21 워마드 식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4. 2015.09.03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비판적 검토
  5. 2014.09.22 《싸가지 없는 진보》서평 ― 민주당 실패가 좌파 탓?
  6. 2012.09.15 왜 노조 지도자들은 소심하고 보수적일까
  7. 2011.09.03 의회·정부를 통해서만 실질 개혁이 가능한가? 2
  8. 2011.07.06 마르크스 경제학의 자본주의 비판(기초) 요점 정리
  9. 2010.11.13 ‘공정 사회’와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단상 4
  10. 2010.10.18 보론 ― 착한 소비 대안들에 관한 비판적 검토 4
  11. 2010.10.15 착한 소비 운동의 딜레마: 마르크스주의 관점 2
  12. 2010.07.19 ‘맑시즘2010’ ― 왜 노동자운동이 희망인가? 2
  13. 2009.10.09 인간의 욕심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2

마르크스와 홍콩 시위 지지 논란

생각 좀 해볼까 2019. 8. 29. 14:21

마르크스가 혁명적 공산주의로 내딛은 첫발은 독일 슐레지엔 직공 반란에 대한 옛 동료들의 경멸적 태도와 결별하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대중의 현재 의식과 삶을 덮어놓고 찬양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추수주의가 대중의 의식이 발전할 가능성을 무시하고 현 상태에 머물도록 현혹하는 것이라며 경멸했다.

마르크스는  현재의 노동계급이 가진 온갖 낡은(후진적) 편견과 분열 상태를 비판했다.

그것은 마르크스가 노동계급 대중의 지적 역량과 해방 능력을 믿었기 때문이다.(비록 현재는 잠재력일지라도) 마르크스는 그래서 즉자적 계급과 대자적 계급을 구분했고, 후자로 가려면 그들 스스로 투쟁에 나서야 하고, 그럴 경우에만 필요한 계급의식을 쟁취할 수 있다고 봤다. 이 계급의식은 당연히 분열된 노동계급을 혁명적(해방적) 계급으로 단결시키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그가 관여한 조직들에서 그가 반복해서 핵심 기치로 포함시킨 것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였다.

마르크스는 슐레지엔 직공이 고용주들에게 일으킨 반란을 지지했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것이 노동계급이 장차 혁명의 주도적 계급으로 성장하는 계기가 되길 바랐다. 그의 옛 동료들은 반대로 몇몇 약점들을 잡아서 슐레지엔 노동자들을 비난했고, 무지하고 무도한 대중이 사회 변화의 선두에 서서는 안 되는 증거로 삼으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혁명적 공산주의자로 변모하는 데서, 슐레지엔 직공 반란 지지 문제를 놓고 옛 동료들을 격하게 비판하고 결별한 것은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물론 이 전환에는 영국과 프랑스의 선진적인 노동운동, 사회주의운동, 정치경제학, 정치철학 등을 접하고 무엇보다 엥겔스와 만난 것이 기여했지만 말이다.

 

👉 홍콩 송환법 반대 운동: 정부의 무력 위협에도 170만 명이 모이다 wspaper.org/m/22567

 

홍콩 송환법 반대 운동: 정부의 무력 위협에도 170만 명이 모이다

8월 18일 홍콩에 다시 대규모 집회와 행진이 벌어졌다. 집회를 공식 주최한 민간인권전선은 이날 홍콩 시민 170만 명이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한 현지 소식통은 실제 참가자 규모가 주최 측 발표보다 더 컸을 수 있다고 했다. 시위 당일 대중교통이 엉망이 돼, 많은 사람들이 여러 곳에서 자발적으로 행진했다는 것이다. 앞서 홍콩 정부는 8월 18일 행진을…

wspaper.org

👉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는 홍콩 시위 wspaper.org/m/22478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는 홍콩 시위

200만 명이 참가한 6월 17일 시위와 학생이나 학생-노동자 연합이 주도하는 그보다 작은 시위가 우후죽순 번지는 과정은 정말로 흥미진진했다. 이 시위를 촉발한 것은 홍콩 입법회[의회]가 통과시키려 한 ‘범죄인 인도 법’(송환법) 개정안이다. 이 법은 중국 당국이 홍콩 사람을 중국 본토로 송환하고 홍콩 형사 체계 전반에 더 많이 관여할 수 있도록 중국인민…

wspaper.org

영국과 중국을 가리지 않고 경제 급성장 과정(과거 아시아의 호랑이: 한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서 홍콩 노동계급에게 강요된 희생은 만만치 않았다. 홍콩 노동계급은 단 한 번도 행정부 수반을 직선으로 선출해 본 적이 없다.

 

이런 곳에서 노동계급이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 희생을 계속 강요하는 정부에 비판적이고, 현 수반(행정장관 캐리 람)의 퇴진과 직선제 요구를 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중국 정부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간단히 이 거대한 대중운동을 미국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놀라운 주장들! 한국의 민주화 시위도 미국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환상과 기대를 갖고 있었고, 정확하게 87년의 대통령 직선제 요구는 하고많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 중에서도 미국식 형태를 요구한 것이기도 했다. 이것도 미국의 사주일까?

 

이런 황당한 소리들이 마르크스주의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것을 보고, 마르크스는 어떤 생각을 할까. 사실 바로 이런 일들을 보고 마르크스가 말했던 것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라고.

 

계급사회에서는 민주주의조차도 계급통합적이지 않으므로 계급적 성격을 따져야 한다는 것은 옳다. 문제는 그 성격을 판단하는 게 누구냐는 것이다. 그 판단 주체는 중국공산당도 아니고 미국 첩보기관들도 아니다. 그것은 홍콩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초보적 이데올로기일지라도 저항에 나서고 있다. 이들의 편에 서는 것. 그것이 심층적이지만 또한 단순한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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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이슈와 계급 불평등

생각 좀 해볼까 2019. 8. 28. 15:29

권석천 칼럼은 이른바 진보적 자유주의 시각의 전형을 보여 준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서 이 정부의 이데올로기와 공명이 있었다고 본다. 이번 칼럼도 문재인 정부를 아끼는 마음에서 나온 고언인 듯하다. 물론 친문 진영이 귀 기울여 들을 것 같지는 않다. 여야 모두에게 조국 임명 문제가 총선과 정권재창출을 위 한 권력 투쟁의 최일선이 돼 버렸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25&aid=0002932551

 

[권석천의 시시각각] 문재인 정부의 변곡점

지난주 금요일(23일) 오후 6시, 기자는 서울 성북구 고려대 중앙광장에 있었다. 광장 뒤쪽에 학생들이 줄을 서서 학생증을 보여주고 손 피켓을 받아갔다. ‘우리는 무얼 믿고 젊음을 걸어야 합니까.’ 그들은 조국 법무

news.naver.com

그래서 이 칼럼의 지적대로 조국 쟁점은 "블랙홀"이 돼 버렸다. 답정너 식 확증편향과 요설이 난무하는 이유다. 문재인 정부를 통해 자기들 의제를 해결하려고 문재인을 지지해 온 진보측 일부도 이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 있다. 덕분에 이 쟁점에서 운동은 분열해 있다.


조국 쟁점의 핵심 진실은, 상류층 집단이 자신의 계급 지위를 물려 주려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온갖 거래를 벌이면서도, 서민들에게는 도덕과 준법을 설교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친문측 오피니언 리더들의 핵심 옹호 논리는, 누구나 신분 상승 또는 유지를 위해 허용된 제도 안에서 노력할 권리가 있고, 또 누구나 그렇게 하고 싶어하지 않냐는 것이다.


계급 불평등에 대해 심각할 정도로 무감각한 이 논리는 그저 이 친문 진영의 인적 기반이 평범한 서민층이 아니라는 것만 드러내고 만듯하다. 사실 누구나 이재용이 되고 싶어 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그래서? 뭐? 그건 박정희, 전두환 때도 보장됐던 권리다. 합법이라고? 서민은 그래서 더 열받는 것이다. 계급간 소통의 벽만 확인해주는 사람들에게 실망하는 게 죄인가? 이명박근혜의 가장 큰 죄가 (노동개악 같은 계급 문제가 아니라) “불통”이라고 해 온 건 민주당 인사들이었다.

 

결국 서민층 사람들이 민주당에게 묻는 건, 당신들이 자한당과 다른 게 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자한당은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냐고 묻는다. 공직의 자격을 묻는데, 상류층 개인들의 관행을 옹호한다. 정치에 문외한일수록 자한당의 기득권 정치인들과 민주당, 친문 셀럽들의 뻔뻔함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지는 이유이다. 


그래서 피장파장 프레임으로 갈수록 우파에게 유리해진다.(이것의 달인은 박근혜다. 이명박의 민간인사찰 폭로 나오자 박근혜가 자기는 이명박은 물론이고 노무현한테서도 사찰당했다며 물타기해서 우파 단결을 유지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지지층을 분열·와해시키는 민주당의 프레임은 박근혜에 비하면, 아마추어다.)


이제 검찰 수사로 조국 문제는 또 새로운 국면이 됐다. 당장은 조국에게 불리해 보이지만, 합법/불법 문제로 프레임이 옮겨지면 어쨌거나 방어할 전선이 좁혀져 덜 불리해질 수도 있다. 무엇보다 지금 같은 국면에서는 검찰 수사가 어디로 불똥을 튀길지 미리 알기가 어렵다. 더 확실한 건, 검찰 수사 개시로 말미암아 조국의 임명은 기정사실이 됐다는 것이다. 


조국 이슈는 당분간 계속 "블랙홀"일 듯하다. 저들에게는 권력투쟁 이슈라서 그럴지 모르겠지만, 서민층 청년들에게는 계급 불평등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야 모두 그것을 해결할 의지와 역량을 못 보여 주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런 상황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면 계급 문제를 중심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 이번에도 건져야 할 교훈인 듯하다. (8.27)

 

물론 개중 좀 민감한 인물들이 문제는 “(경쟁) 기회의 평등(과 경쟁의 결과는 각자 감수)”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이라고 뒤늦게 고백했다. 여러모로 뜻밖이다. 결과의 평등 추구론을 (제3의 길 노선에 입각해) 반대해 온 게 친노들이었기 때문이다.(“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가 바로 이 제3의 길 노선의 압축적 표현) “결과의 평등”론은 전통적으로 분배를 중시한 사민주의 담론이다.

 

지금 국면에서 결과의 평등이 문제라는 담론은 제3의 길식 기회 평등론보다는 진일보하지만, 원천적인 기회의 불평등(권력의 원천, 근원적 평등에 접근할 기회) 문제는 덮어버리자는 취지로도 들린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도 필요하지만 계급 문제는 근원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기회의 평등(마르크스주의적으로 표현하면 생산수단의 통제에 접근할 기회의 평등) 문제다.

 

결국 기회만이 아니라 결과의 평등도 중요하다는 최신 담론은, 진일보와 함께, 결과에서 좀 양보할 테니, 원천의 기회 문제(즉 조국의 위선과 합법적 특권 문제)는 덮자는 것이다. 얄궂게도 자신들의 실체가 폭로돼 위기에 몰리자 진일보한 담론을 내놓고 양보하겠다는 것이다.(8.29 본문에서 따로 빼서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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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마드 식 페미니즘에 대한 단상

생각 좀 해볼까 2018. 5. 21. 16:18

1.

어느새 운동 안에 개혁주의 분위기가 세졌네! 하고 생각한 순간, 원칙과 이론, 전략(정치)의 자리를 정체성정치나 감수성 등의 용어로 포장된 도덕주의가 채우기 시작했다. 여러 실수와 이론 취약, 사기 저하 등으로 새 페미니즘에 대응하지 못한 기존 좌파들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며 ‘운동권 사또 놀이’ 하려는 쪽에서 자신들은 도덕적 의무에서 예외인 듯 구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곳곳에서 분열과 불신을 일으켜 그나마의 긍정성도 까먹으면서도 돌이켜 성찰할 줄을 모른다. 자기중심주의와 분별없는 열정이 문제인데, 나이 문제도 아니다. 민주노총 여성부장의 해괴한 행태가 딱 그렇기 때문이다. 

워커스/참세상도 전통있는 좌파매체였는데 어쩌다 보니 참 이런 수준이다. 진정성있게 성찰하고 시정하려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굴수록 워마드 종류나 부추겨 결과적으로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들의 자아만 맹동적 분열적 혐오주의의 깊은 심연으로 삼켜져 버릴 뿐임을 직시했으면 좋겠다.(5.19)


2. 

홍대 건 수사가 이례적으로 빨랐다는 말은 동의하기가 힘들다. 남성 누드모델이 무슨 사회적 힘이 있다고(누드모델 보호에 무슨 실익이 있다고) 경찰이 그러겠는가. 게다가 일반 몰카와 달리 이건 수 명으로 용의자가 특정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용의자는 경찰에서 핸드폰을 버렸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구속 요건은 된다.

물론 피의자 입건과 구속은 다르긴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구속됐다기에는 전후 정황이 맞질 않고 경찰이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처리한 걸로 본다. 그러나 이게 진정한 쟁점이 아니므로 이렇게 논쟁이 되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적 발화/행동에 의한 프레임 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문재인이 한마디 거드니, 경찰청장까지 대(對) 여성 범죄 수사를 철저하게 한다고 한다. 이것은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과 위협에 대한 조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국가/경찰에게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라고 요구한 것이라는 점.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을 항구적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며 생물학적 남성 전체를 적(단일 집단)으로 돌리는 종류의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해방의 힘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국가와 동맹하고 국가의 통제력 강화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가기 십상이라는 게 새삼 입증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중간계급적 개혁주의와 ‘잘’ 결합되면 그 ‘국가의 여성화’(생물학적 여성의 고위직 진출 지지)에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는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들 스스로 표방했던 페미니즘의 희석이다.(5.21)


3.

오늘날 좌파와 진보가 이런 종류의 페미니즘과 대결하기는커녕 아부하기에 바쁘다는 건, 혁명이든 개혁이든 대중 스스로 단결한 행동으로 사회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대(大)전망에서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개개인들의 관계와 태도, 도덕성을 개선하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성해방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변혁과 개인의 혁신을 어떻게 관계 지으려 하는가? 마르크스는 일찌기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그 과정에서만 대중이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알맹이를 이루는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정신의 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집단적 실천, 혁명적 실천, 계급투쟁과 계급투쟁에의 의식적 개입 활동을 개개인들의 의식과 도덕성을 바꾸는 일과 대립시키고 경멸하는 일은 오해 아니면 의도적 기각 행위다. 둘 중 무엇이든 그 자신은 노동계급 대중이 스스로 자기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워마드가 남성 비하적 용도로 쓰는 단어들이 대체로 노동계급 남성을 비하는 것임도 시사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좌파가 이런 종류의 정치에 굴복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개혁주의로의 후퇴이고 따라서 정치의 타락이다.(5.21)


4.

메이드 인 다겐함은 꽤 괜찮은 영화다. 영국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화에 물꼬를 튼 걸로 평가되는 다겐함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묘사한다. (실제로는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는 법안을 발의하려 했던) 노동당 윌슨 내각의 노동부장관 바버라 캐슬이 미화된 게 아쉽지만 말이다.

그런데 변혁정치는 이 영화가 자본만이 아니라 남편과의 전쟁도 치르는 걸 보여 준 영화라고 평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가 바버라 캐슬을 좋게 묘사한 것에 페미니즘의 영향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파업 와중에 남편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식으로 영화를 평하는 것은 생뚱맞다. 도대체 파업 노동자의 현실을 알고나 하는 건지, 영화를 성실하게 본 건지를 의심스럽게 만드는 평이다. 영화의 주인공 가정의 갈등에는 (물론 남성적 편견도 전혀 없진 않겠지만) 무노동무임금이 적용되는 파업이 길어지고(생활고가 심해지고) 파업의 승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배경이 있다.

그러니 주인공 부부의 갈등은 남여 역할을 바꿔 놔도 흔히 벌어지는 갈등이다. 그걸 남성 파업 노동자가 나는 와이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파업을 했다고 묘사해야 하나? 아내의 파업이 승리하는 게 남편 노동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나??? 영화에서는 파업 승리가 불투명해지면서 여성 노동자들도 갈등을 겪고 이탈자도 생긴다. 그것을 여성혐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나?

뿐만 아니다. 영화에는 파업 여성 노동자들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좌파 남성 활동가가 비중있는 배역으로 나온다. 주인공의 남편은 부인의 고군분투를 직접 목격하고 사과하고 전폭적 지지를 표한다. 주인공 여성은 남편과 논쟁하면서도 남편을 투쟁하는 노동자의 관점으로 설득하려 하지, 너는 여혐이야 하는 식으로 내몰지 않는다. 다소 페미니즘 성향이 있더라도 영화 자체는 결코 남성(노동계급)에 적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영화평을 통해 노동자들의 현실과 투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도 미루어 짐작이 된다. 둘 다에 동의하기가 힘들다. 그런 편협한 관점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유쾌하고 감동적인 이영화에 고무되고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찬양할 수 있다. 사회변혁‘노동자’당을 표방했는데, 변혁당의 정치가 갈수록 수상해진다.(5.16)






※ 아래는 추천 기사(누르면 기사 전문으로 감)



홍대 누드 모델 몰카 범죄로 돌아본

워마드 식 페미니즘의 논리적 귀결

  • 정진희
  • 248호
  •  
  •  2018-05-17
  •  
| 주제: 
  • 차별
  •  
  •  여성
남성 일반을 여성의 적으로 여기는 근본적 페미니즘은 여성 해방은커녕 퇴행적 궤변과 피업악자들의 분열만 낳을 수 있다 [원본]ⓒ출처 워마드 웹페이지

최근 홍대 회화과 누드 모델로 일한 한 남성 모델의 나체 사진을 찍어 워마드 게시판에 게시한 워마드 회원이 구속됐다. 경찰 수사 결과, 동료 누드 모델 여성이 최초 유포자로 밝혀졌고 증거 인멸 시도가 발견돼 구속됐다. 피해자를 조롱한 댓글을 단 워마드 회원들과 사이트 운영자에 대한 수사가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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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비판적 검토

기사들 2015. 9. 3. 15:34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55호 | 발행 2015-08-31 | 입력 2015-08-29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항의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였던 ‘희망버스’ 운동 이후 ‘사회적 연대’는 노동운동의 유력한 전략이 된 듯하다.


사회적 연대는 조직 노동계급 밖에서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 듯했다. 게다가 이른바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이 (진짜 원인은 그 노조들의 소심한 지도자들 때문이지만) 노동자 연대에 소홀하거나 투쟁의 모범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는 이런 노동자 연대의 약점을 극복하는 신선한 수단처럼 보였다.


그 뒤로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 투쟁, 유성기업, 밀양 송전탑, 쌍용차 노란봉투, 스타케미컬, 부산 생탁 등 여러 곳에서 ‘사회적 연대’ 행동들이 조직돼 왔다. 사실 이런 투쟁들의 최근 원조 격은 2008년 촛불운동 참가자들의 연대를 호소한 기륭 비정규직 투쟁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쌍용차 투쟁에도 상당히 폭넓은 사회적 연대가 있었다.


이기주의·경쟁·소외가 만연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삶에 대한 환멸과 불신에 시달리고, 종종 이런 도덕적 위기가 특정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광풍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투쟁에 연대하는 ‘사회적 연대’는 고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연대들은 사안에 따라 지지와 연대의 규모가 달랐고, 결과도 각각 달랐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치·경제 상황, 주관적인 조직화 정도, 노동자 연대의 폭과 강도, 전술의 적절성 등 여러 요인들이 투쟁 성패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가 노동자 연대를 대체할 것이라거나, 더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결집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노동운동 일각의 생각에는 부족함이 있다.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올바르고 효과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이론과 경험 모든 면에서 숙고해 봐야 한다. 최근 떠오른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에 깔린 개념들과 전략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살펴보려는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노동자 연대> 지난 호에 실린 사회연대전략 관련 기사도 그중 하나다.(“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사회연대전략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은 본질적으로 복지국가를 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책임(재원)을 나눠 부담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함부르크 강령(2007)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강자와 약자, 젊은이와 노인, 건강한 사람과 병자, 일하는 사람과 실업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조직화된 연대”(《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한울, 2012).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사회적 가치로써 사회적 협력과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런 개념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강점이 있다.


노동 연계 복지


그러나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책임은 또한 ‘공동체’에 대한 개인들의 책임을 수반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연대 개념·전략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으로 ‘공동체’를 위한 책임(각종 세금, 사회보험료 등)에 참여해야 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대신 공동체의 책임(개인의 권리)을 기대한다. 따라서 소득에 따라 공동체에 더 기여(세금)를 하는 것은 ‘미덕’이다. 또한 이를 위해 소득을 얻는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것도 모두 ‘미덕’이 된다. ‘제3의 길’을 내세웠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늘날 복지 후퇴 과정에서 실업수당의 수급 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노동 연계 복지를 선호하는 이유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의무를 이행하라는 것이다. (공동체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 개인의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좌우가 갈린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납세자가 모두 동등한 연대적 기여를 한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 연대 개념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점을 흐리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의 (모호한) 범위에 지배계급(의 일부)이 포함되는 한편 이민자와 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집단들은 배제돼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계급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회 현실이다. 지금 박근혜와 우파는 ‘기업 경쟁력을 위해 정규직 과보호를 줄이자’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사업의 수익성이 (이것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삶이든 희망이든 또는 지구 환경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최우선 순위라는 것이다. 결국 상호 연대적이며 안정된 삶이라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자본가들의 우선순위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계급 간 분열의 엄연한 현실을 흐린다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요성도 기각된다는 뜻이다. 사회연대 전략가에게 계급투쟁은 공동체 내부의 상호 신뢰(화해불가능한 계급들 사이의 협력!)에 위배된다. 특히 연대적 기여를 위한 경제 활동에 방해가 된다. 전후 복지국가의 틀이 잡혀서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1946~51년 애틀리 정부 아래서 파업 노동자에게 18번이나 군대를 투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노동계급의 계급으로서의 동일성도 흐려진다. 사회연대전략이 계급 협력(특히, 복지국가를 위한 보편적 증세)을 위해 노동계급 일부에게 사실상의 소득 삭감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원리에서 비롯한다.


불안정노동론의 사회적 연대론


한편,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에 바탕해 사회연대전략보다는 더 급진적인 ‘사회적 연대’를 구성하려는 좌파도 있다. 예를 들어, 알바노조 구교현 위원장은 “없이 사는 사람, 다 모여!”를 내걸고 지금 치러지는 노동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구교현 후보는 좌파 정치가 “돈도 세력도 정치도 없이 사는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당이 “온갖국민운동본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치가 빈곤하고 불안정한 노동자들과 연대를 구축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려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쟁점은 어떤 방법(전략)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다.


이 점에서 같은 노동당 리더이자, 희망버스의 주도적 조직자였던 정진우 전 노동당 부대표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외부’를 향해 사다리를 내릴 수 있는 용기는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주었다. 사회적 연대는 ‘외부세력’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내부’를 ‘외부화’하는 과정이다. … 공장들이 실은 ‘내부’의 것이 아니라 … 언젠가는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기획하고 공유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좌파 재구성을 위한 연속토론회, 2013년 10월 28일, “주체의 재구성 - 한국사회에서 좌파정치의 주체는?” 발제문 중)


정진우 전 부대표의 주장에서 전략적 행위주체는 공장 외부의 사회적 연대 세력이다. 그래서 공장이 오히려 ‘외부’가 되고, 조직 노동자는 조연이며, 운동의 성공은 공장들이 ‘외부에 존재하는 자들의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는 대리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배제된 노동


정진우 전 부대표는 또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보다는 노동의 불안정성을 더 강조한다.


“‘포함된 노동’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의 구분 시점은 현재다. ‘지금은’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며, ‘아직은’ 포함되지 않은 노동이 아닌 상태다. 결국 시차를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배제된 노동’이다. 노동을 자본의 일부로 바라본다면, 역사적으로 모든 노동은 ‘배제된 노동’이다.”(《월간 좌파》, 2015년 8월호)


이처럼 ‘배제된 노동’을 자본주의 노동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단정하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희망버스 기획자인 정진우 전 부대표에게는 좀 억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포함된 노동’이 되려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별로 의욕적이지 않을 위험성도 있게 된다.


‘포함된 노동’이고자 하는 욕구는 과도한 욕구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용보다는 임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구교현 후보의 알바노조나 이와 연계된 좌파노동자회는 기본소득제 도입과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이라는 임금 요구는 대단히 강조하면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같은 요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언젠가는 배제된 노동이 된다는 말이 맞겠지만, 체제 전체로 보면 포함된 노동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 언제나 중추 구실을 한다.


노동계급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고, 그 때문에 판매 후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긴다. 이런 착취 과정이 고용 노동자들의 공통점이라면, 이것은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뒤집어서 보면, 자본은 오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잉여노동을 강제할 수 있을 때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자본에 의존하지만, 자본도 노동에 의존한다.


노동이 착취의 재료이면서 착취 체제를 해체할 힘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이중성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유례없이 집중되고 협력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칼 마르크스의 선언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정진우 전 부대표처럼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에는 큰 약점이 있다. 물론 이는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 자체에 내재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주의


불안정노동론과 이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론의 열쇳말은 ‘피해’, ‘배제’, ‘약자’다. 이들의 사회적 연대는 기본으로 ‘사회적 약자들(피억압 민중, 피해 대중)의 연대’다.


연대가 공통된 처지에 기반해 부분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이들의 공통점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없이 사는 사람들 다 모여라’는 것은 위기를 겪는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약자들이 모이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을 여러 피억압 계급들의 단순한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민중주의(좌파적 포퓰리즘) 정치는 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불안정노동론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 전략이 작업장보다는 거리 시위와 광장 같은 공공시설 점거에 더 우위를 두는 것도 이런 특징과 관계 있다. 서로 동등한 ‘연대적 민중(시민)’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좌파노동자회 대표인 허영구 후보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11월 노동자대회 총파업’을 해야 한다며 내놓은 계획은 여의도 노상 점거 시위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을 해결하려면, 고통과 분노를 넘어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객관적 잠재력이자 단결의 가능성)을 분석해야 한다.


노동계급 투쟁 중심성


이런 종류의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말의 뜻은 노동계급이 아닌 피억압 대중의 해방도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권력에 맞선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노동자 권력의 승리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대받는 민중도 노동자 권력을 지지하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때 노동계급이 할 일은 다른 계급이 갖지 못한 고유한 경제적 힘(이윤 생산을 멈출 수 있는 힘)을 발휘해 민중의 보호자이자 지도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를 노동계급(노동자 연대, 노동자 권력)이 주도하는 사회적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를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삼으려는 정치 경향들은 이런 전략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적 연대’는 일부 지배자들(가령 독점자본, 수구우익 등)의 압제에 맞서 사회의 나머지 모든 계급이(사회적) 뭉치는(연대) 것이다. 불안정노동론의 경우, 재벌에 맞선 알바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단결을 추구한다.


이런 포퓰리즘(좌파적일지라도) 전략을 따른다면, 노동계급이 고유한 방식(파업)을 사용해 싸우는 것을 주저하게 될 수 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같은 중간계급 동맹세력들을 소원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선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계급투쟁적 전략이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연대에 의존하는 것을 무시하고 힘 있는 대공장 중심주의에 머문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사실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곳들을 자세히 돌아보면, 그 작업장 내부의 노동자 연대가 봉착한 어려움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는 노동자 연대의 보완물이 돼야지, 그 대체물로 봐서는 곤란하다.


힘 있는 조직 노동계급의 투쟁이 활발해져, 더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도 뭉쳐서 싸우면 우리도 더 좋은 조건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가고, 그래서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되겠다고 움츠러드는 것이,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고무된 노동계급 내에서 연대투쟁과 계급의식도 발전할 것이다.


잠재적으로 조직 노동계급은 투쟁으로 나머지 노동자들과 피억압 대중에게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다. 이 객관적 잠재력을 공통점 삼아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을 채택해,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노동계급 중심성과 계급투쟁 전략이다.


사회적 타협주의의 압박


최근 노동운동의 일각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 방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재벌 개혁’ 같은 구호로 불리한 쟁점을 슬쩍 비켜 가면서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추구해 보자는 생각이 유포되고 있다. 다행히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계획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발상에는 노동계급이 계급투쟁 방식으로 고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투쟁에 나서면 사회적으로 고립돼 패배하거나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 암묵적으로는 노동 개혁과 재벌 개혁을 맞바꾸는 식의 사회적 타협으로 가고자 하는 전략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은 진보정당들이 민주노총에 사회적 타협을 압박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더 온건한 한국노총은 우파적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해 버렸다.) 8월 21일 정의당 노동시장개혁 똑바로 특별위원장이기도 한 정진후 원내대표는 민주노총을 방문해 한상균 위원장에게 “올바른 노동시장개혁을 위해서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며 민주노총 등 노동계, 재계, 원내 3당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정의당과의 합당을 추진하고 있는 국민모임의 김세균 교수도 최근 조선3사 공동 파업에 대해 노동자 양보론에 입각한 사회적 타협론을 주장했다. 회사가 수조 원 적자인데 파업해 봐야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이니, 임금 동결을 수용하고 대신 기업의 주식 출연으로 노동자기금을 형성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식의 대타협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4개 분야 20개 과제를 혁신 과제로 공개한 진보결집더하기는 이 중 6번째 과제를 “진보진영을 모두 모은 사회연대전략회의 구성”으로 꼽았다. 앞장서서 노동자 소득 양보론에 기초한 사회연대전략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힘이 밀어붙이거나 또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언저리에서 타협에 이른다.


그런데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자본과의 협상 · 타협이 목표이므로 그들은 협상의 의지를 보여 달라는 지배자들의 압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밀어붙이는 힘이 제약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그 압력은 협상 상대를 궁지에 몰 수도 있는 전투적 대중투쟁(특히, 파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개혁주의 지도부에게 체제 안전의 경계선을 넘지 않겠다는 다짐을 요구한다.


그럴 때마다 기층 노동자들의 투지와 요구는 뒤로 밀린다.그렇게 되면, 다음 투쟁은 더 어려워진다. 이것이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타협기구에서 매번 노동계급 측만 양보하는 결과가 나온 이유다.


사회적 타협주의는 단지 개혁 목표를 이루려는 속도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 · 목표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과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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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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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는 진보》서평 ― 민주당 실패가 좌파 탓?

책과 생각 2014. 9. 22. 22:10

〈노동자 연대〉134호 기사 보기 ☞ http://wspaper.org/article/14907


[서평]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1만 3천 원, 2014)


무례한 강준만 씨, 

민주당의 실패를 좌파 탓으로 돌리지 마시길



노동운동이나 좌파 활동가들이 어리석게도, ‘나만 옳다’든가 ‘내가 다 안다’는 우월감 따위로 자기 주변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강준만 교수(이하 직책과 존칭 생략)가 낸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의 제목만 보고 ‘그래 고칠 건 고쳐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진보 활동가들의 태도나 성품에 관한 조언을 담은 책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해, 강준만이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것은 사실 선명한 좌파 정치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유시민 등 새정치민주연합 안팎의 이른바 ‘강경 친노’ 그룹을 “싸가지 없음”의 주된 비난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강준만의 주된 관심이 민주당의 재집권에 가 있기 때문이다.(그는 새정치연합을 민주당이라고 부른다.) 물론 친노 그룹이나 486 등의 이중성, 위선을 꼬집는 것은 옳다. 


그러나 강준만이 보기에 “싸가지 없음의 원조는 좌파 진보”다. 


“자신만이 옳고 보수는 몹쓸 집단이라는 식의 태도 … 자신과 상대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과도한 적대의식을 보이면서,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하는 것”(107쪽)은 바로 ‘좌파 진보’의 습성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척결하자는 진짜 알맹이는 주류 지배자들, 당장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타협적인 좌파적 정치인 것이다.


강준만은 수년 전부터 ‘진보진영’의 ‘증오 상업주의’를 비판해 왔다. 우파 정부를 ‘적대’하는 정치가 힘을 얻으면서 정치 양극화를 조장하고 민주당이 중도 표를 얻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가 2012년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안철수를 지지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였다.


 “새 정치의 실천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새누리당과 대립하거나 새누리당을 적대시하는 프레임이다. …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243쪽) 


그의 대안은 선의의 경쟁과 협력에 기초해 정권을 주고받는 보수-중도(강준만은 ‘진보’라 부름) 양당 체제다. 따라서 강준만이 척결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런 부르주아 양당 체제 구축을 방해하는 좌파 정치인 것이다.



양극화가 ‘선악의 정치’ 때문인가


강준만이 보기에 ‘좌파 진보’의 ‘싸가지 없는 정치’는 기본적으로 선악의 정치다. 내가 선이고, 적이 악이므로 화해가 불가능한 타도 대상이다. 그리고 “반대 편에 대한 싸가지 없는 언행은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동시에 단합의 대열로 이끌 수 있다.”(51쪽)


강준만이 보기에 이런 정치는 ‘싸가지 없게 보여’ 중도적 유권자들을 새누리당에게 내줄 뿐이다.


“정치와 선거는 20퍼센트가 결정하는 싸움이다. … [진보와 보수의 고정 지지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보수의 분노’나 ‘진보의 분노’ 내용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들의 분노 표출 방식, 즉 태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다. 바로 여기서 싸가지가 문제가 된다.”(23쪽)


이를 납득시키려고 강준만은 진보적이지만 싸가지 없는 사람과,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데 대인관계의 매너가 좋은 사람을 대비시킨다. 중도적 유동층에게는 후자가 더 매력있게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저급한 실용주의적 발상이다.


그런데 정치적 계급 양극화가 벌어지는 것은 경제 위기 시대에 사회적 양극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를 쥐어짜기 바쁘고, 정부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으로 이런 기업주들을 돕고, 노동자ㆍ민중의 저항을 탄압하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이런 추세는 이 사회 자체가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들로 계급 적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다. 따라서 계급 양극화 시대에 계급 간의 합리적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지배계급을 대표해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해야 하는 박근혜 정부는 지배 질서에 흠집이 나거나 노동자 대중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양보는 한사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노동계급이 앞장서는 전투적인 대중투쟁과 선명한 좌파 정치를 필요로 한다. 이것들이야말로 (우파 통치에 맞서는) 현재의 운동에서 부족한 요소들이다. (물론, 강준만의 단순화와 달리, 좌파정치가 선악의 가치 판단 문제로 단순화되진 않는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강준만의 한탄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을 …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200쪽)는 온건한 개혁주의 정치의 영향력이 큰 것이 문제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운동에서도 원칙을 저버리고 유가족까지 배신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타협하려다가 운동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새정치연합과 주요 NGO들의 리더들이었다. 이런 식의 ‘타협’ 노력을 적극 지지했던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이 탈진영론을 내세우는 것은 시사적이다.


새정치연합의 리더십 위기는 온건 개혁주의가 운동을 지배하는 이런 현실에서 온 것이다. 새정치연합은 노골적으로 친자본주의적인 중도 정당으로서 기업주들의 이윤을 보호해 주면서도 이런 양극화를 봉합하려 애쓰는 가련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협 불가’라는 새누리당에 새정치연합이 매달리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다.


결국 강준만은 종로에서 뺨 맞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도덕의 부재?


책 곳곳에서 강준만은 진보측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싸가지 없는 태도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즉 목적이 도덕적이면 어떤 비도덕적 수단을 써도 정당하다는 스탈린주의의 도덕관을 마르크스 자신의 것인 듯 비난한다. 일종의 ‘허수아비 때리기’다.(그런 점에서 이택광이 진보는 도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준만을 비판한 것은 부적절한 반론이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표방했지만, 그 체제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적대적인 체제였다. 그러나 미국도 소련도 아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설사 마르크스주의 도덕 이론이 확고하게 정립돼 있지 않을지라도 스탈린주의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친노 정치인들은 물론이려니와, 강준만이 사례로 든 1997년 한총련 프락치 사망 사건이나 2012년 통합진보당 중앙위 폭력 사태가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지침을 따라 반탁에서 찬탁으로 선회한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적 오류’로 보는 비판도 난데없다.


마르크스주의 도덕은 계급 분단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로 분단된 사회에서 모든 계급이 공통 으로 미덕으로 삼아야 할 가치는 모호한 추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 선한 자세로 주어진 일에 충실한 것(“가만히 있어라”)이 미덕이라는 정적주의(quietism)가 파업할 때는 동료 노동자를 배신하고 파업을 파괴하는 악덕이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도덕에서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의식과 활동, 조직에 이로운 연대와 억압에 대한 저항 등이 미덕이 된다. 


반대로 개인에 대한 테러, 핵무기, 여성ㆍ인종 등에 대한 각종 차별 사상은 노동계급에게 미덕이 아니다.


정권 교체와 의회 협상의 파트너로서 새누리당을 존중하자는 강준만에게는 마르크스주의 도덕이 “싸가지 없음의 원조”로 보일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을 찍을 수밖에 없다?


강준만의 주장은 좌파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칼날로, 민주당 리더들에게 좌파진보와 더는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조언이다.


그런데 강준만은 자기 논리의 전제인 ‘어차피 30퍼센트는 민주당을 찍게 돼 있다’는 생각 자체가 “싸가지 없는” 발상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진보정당들이 죽을 쑨 6ㆍ10 지방선거에서도 진보정당들은 합쳐서 전국적으로 2백만여 표 정도를 득표했다. 이 투표자의 다수는 광역단체장 투표, 또는 2012년 대선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겠지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새정치연합이 이른바 중도적 유동 표를 잡으려고 지금보다 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때, 왼쪽으로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7ㆍ30 재보선에서 야권 심판이 일어난 것도 부분적으로 이 때문이다.


강준만의 계획대로 ‘중도’ 유동층을 잡으면서도 진보적 유권자들을 새정치연합의 고정 지지층으로 묶어 놓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것은 진보정당, 좌파정치세력들이 위축, 몰락하는 길이다.


그래서 강준만이 “싸가지 없는 진보” 담론을 통해 “좌파 진보”를 비난ㆍ고립시키려 하는 것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친자본주의) 보수-중도 양당체제를 구축하려는 프로젝트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좌파 진보를 경원시하면서도 굳이 새정치연합을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목적의식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의 비교 고찰에서 보듯, 노동자 대중정당이 제도권에 없는 것은 노동자 운동에 다소 불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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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노조 지도자들은 소심하고 보수적일까

기사들 2012. 9. 15. 17:05

적지 않은 이들이 현대차 노조에서 친사측 우파였던 전임 이경훈 지도부를 비판하며 등장한 문용문 집행부의 일방적인 노사 합의를 보고 실망했을 것이다.


올해 정부와 사장들이 전국적 규모에서 만도, 에스제이엠 등에서 노조 와해 공작을 폈고,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이간시켜 왔다. 그런데 현대차 노조 지도부는 부문적 시야에 갇혀 연대를 강력하게 건설하지 않았고, 민주노총 파업 기간에 단독으로 타결을 선언해 버렸다. 


왜 노동조합 지도부만 되면, 기대에 못 미치는 타협을 하려 할까. 단지 개인들의 개성 문제일까. 이 과정을 이해하려면 ‘노동조합 관료주의’라는 분석 틀이 필요하다. 


노동조합은 기업주와 정부의 공격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해 노동조건 등을 지키려고 만든 무기다. 그러나 노동조합은 노동자의 권익을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지키려는 기구라서, 착취 그 자체가 아니라 착취의 조건을 놓고 투쟁하고 협상을 하게 된다. 


이런 노동조합의 한계 때문에 아무리 전투적인 노조 투사라도 노조 상근 간부가 되면 노조 상층으로 올라갈수록 협상이 주요 임무가 되고, 투쟁은 보조적 수단으로 여겨지게 된다. 중재와 화해를 미덕으로 여기는 경향에 물들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측과의 교섭에서 협상력을 높이려면, 조합원에 대한 통제가 주요한 관건이 된다. 흔한 경우, 투쟁은 협상을 위태롭게 만들고 조직을 파괴할 수도 있는 골치아픈 일로 여기게 된다. 



△올해 5월 현대차지부와 사측의 교섭 상견레 ⓒ출처 금속노조 현대차지부



노조 상근 간부들의 소심함은 투쟁의 판돈이 커지면 커질수록, 계급 간 충돌이 첨예해지면 첨예해질수록 더 두드러진다. 중재자로서 이들이 취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노조 지도자들의 보수적 습성은 개인의 자질 문제가 전혀 아니다. 이런 습성은 그가 수행하는 구실과 사회적 위치에서 자라나는 것이다. 노동운동의  개혁주의 정치는 바로 이런 사회적 기반과 현상에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위치


이처럼 협상을 우선하는 태도가 현대차 노조 지도부로 하여금 불필요한 타협을 반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사내하청 정규직 전환과 주간연속2교대제 두 쟁점 모두에서 현대차 사측이 매우 완강한 태도로 나왔기 때문에 노조 지도부는 사측에 실질적 타격을 주는 투쟁을 조직해 첨예한 충돌을 감수하든지, 어떻게든 타협해 갈등을 봉합해야 한다는 압력에 처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차지부 집행부가 이번 협상에서 드러낸 문제의 본질은 비정규직 문제를 외면한 정규직의 태도 같은 게 아니다. 

노동조합 상층 지도자들의 보수주의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고 현장 노동자의 이익을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게 된 것이 문제의 본질인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정규직지부의 조합원이 아닌 구조를 이용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요구를 더 외면할 수는 있었다.

일부에선 주간2교대제를 정규직 쟁점, 사내하청 정규직화 문제를 비정규직 쟁점으로 구분하는 조야한 시각을 보이기도 하는데, 주간2교대제 쟁점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가리지 않는 공장 전체 노동자의 문제다. 심야에 정규직이 퇴근하고 불꺼진 공장에서 비정규직만 일할리는 없지 않은가. 그뿐인가. 사내하청 문제도 비정규직 고용을 보편화해서 결국 정규직의 고용까지 불안하게 하고 협박하는 소재가 되는 노동자 전체의 문제다.

무엇보다 집행부는 사내하청 문제 뿐만 아니라 주간2교대제 쟁점에서도 불가피하지 않은 여러 후퇴를 했다. 상층의 관료주의와 현장 노동자들의 이익 구분이 그래서 우선인 것이다. 


노동조합의 한계에서 비롯하는 이런 노동조합 관료주의 특성은 상층 지도자들의 시야를 자신이 속한 작업장의 경제적 문제들로 가두게 하는 데도 일조한다. 


물론 노조 지도자들은 기층의 투쟁 압력에도 영향을 받는다. 선출되는 자신의 위치 때문이다. 그러나 중재자라는 본연의 위치를 위협받지 않을 수준까지만 그렇게 하려고 한다. 


이런 식의 중재자 정치가 정치 영역으로 확장한 것이 자본과 노동의 이해를 의회에서 정치 협상의 방식으로 화해시키려는 사회민주주의 정치다. 사민주의 정당의 정치인들은 노동운동의 정치적 관료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독립적 좌파들이 노동운동의 양대 관료와 맺는 관계는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더 전투적인 지도부를 구성하는 것만으로 이런 반복되는 낭패감을 만회하려고 애쓰는 것은 진정한 대안이 될 수는 없다. 심지어는 새로운 노조를 만들려는 것도 이런 한계를 반복하기 십상이다.


올해 문용문 집행부가 바로 우파적인 이경훈 집행부를 대체한 민주파 아니었던가. 이경훈 집행부도 전투적 현장파인 윤해모 집행부가 투쟁을 회피하고 불필요한 타협을 하다가 사퇴한 결과로 선출됐던 것이다. 


노동조합 운동 안에서 진정한 구분은 현장조합원과 노조 지도부 사이에 존재한다. 


따라서 노조 지도부가 기층을 올바르게 대변할 때 지지하며 함께 싸우고, 지도부가 노동자들을 제대로 대변하지 않으면 현장 조합원의 자주적 행동을 건설하는 것이 작업장 안에서 독립적 좌파들의 올바른 지침이다.  


이렇게 되도록 하려면 기층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신감과 전투성을 끌어올려야 한다. 


경제 위기 시대에 올바른 계급 정치의 관점으로 현장조합원들 사이에서 각종 지배 이데올로기와 부문주의에 맞서 싸우며 조직하고 선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노력과 네트워크가 중요한 이유다.


※ 이 글은 일부 축약해 <레프트21> 88호에 실렸다.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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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정부를 통해서만 실질 개혁이 가능한가?

기사들 2011. 9. 3. 13:31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대표 취임 1주년 기자회견에서 “2012년 총선에서 원내교섭단체를 만들고, 대선에서 진보적 정권 교체를 실현하겠다”고 밝혔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진보 양당의 통합만으로는 이런 목표 달성이 힘드니까 참여당과도 통합해 덩치를 키워 민주당과 대등하게 연립정부를 추구하자는 것이 개혁주의 지도자들 상당수의 생각인 듯하다.

자주파 경향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국민참여당 8문 8답’이란 문건은 “2012년 … 진보개혁진영의 다수파 국회를 형성하여 … 각종 노동개혁입법을 통과시켜야 합니다. … [그것이] 노동운동의 어려움을 뚫고 나갈 전략적 돌파구”라고 주장한다.

진보신당 심상정 전 대표도 “대선을 통해 진보정당이 연합 정치를 할 때 공정거래위원장, 국세청과 같은 곳의 인사권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그래야 실제 개혁이 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참여당 대표 유시민도 최근 <레디앙> 인터뷰에서 “[진보 양당 통합으로] 무슨 현실을 바꾸는 일을 도모하겠는가”라며 “권력의 일부로 노동ㆍ사회 정책을 바꾸는 것이 싫다면 정치할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이런 주장들은 모두 의회나 정부에 진출해서 권력을 공유해야지 실질적인 진보ㆍ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물론 진보정당이 원내교섭단체를 이루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러나 이들의 주장은 의회나 국가기구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아래로부터 투쟁을 건설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관료 집단
 
이 때문에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참여당과의 통합이나 민주당과 연립정부 구성하기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의회와 정부에 진출한다 해서 그것만으로 사회를 뜻대로 바꿀 권력을 확보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면 왜 노무현이나 오바마는 정권을 잡고 의회를 장악하고 나서는 약속했던 개혁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정책을 추진했을까.

이에 관해 노무현 정부 내내 청와대 정책실장을 지냈던 김병준의 증언은 시사적이다. 

“관료집단 커뮤니티는 … 관료조직 외부의 이해관계자와 고객 집단까지를 포함[한] … 일종의 네트워크이고 … 커뮤니티의 정서가 때로는 대통령이나 집권세력의 철학이나 정책보다 우선합니다. … [예컨대] 정확한 자료를 필요로 하는데 … 기획재정부의 세제실이나 국세청이 쥐고 … 청와대에서 가져오라 해도 안 가져옵니다.” 

아무리 뛰어난 의원이나 대통령도 대기업과 관료, 보수 언론 등이 맺은 이 항구적 “네트워크”의 전방위적 압력과 노하우를 극복하기 힘들다. 국가기구의 포로가 되는 것이다. 

얼마 전 <한겨레21>이 인터뷰한 대기업의 고위 임원도, 지금은 한나라당마저 ‘좌클릭’하며 재벌을 욕하지만 “선거만 끝나면 다시 우리를 찾아와 앞으로 잘해 보자고 손을 내밀 것”이라며 “누가 집권하든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김병준은 “집권해도 세상 그렇게 못 바꾼다”고 솔직히 인정했다. 유시민도 올해 1월 한 토론회에서 “막무가내로 대통령이 의지를 발휘한다고 해서 실제 그것이 현실로 가는 게 아닙니다” 하고 집권 시절 경험을 털어놓은 바 있다.

노무현이 4대 개혁 입법 실패 후 ‘한나라당과 대연정’을 말했다가 퇴임 후에는 “깨어 있는 시민의 조직된 힘”을 강조하는 등 오락가락한 것은 이런 무력감을 배경으로 나온 것이다.

주류 지배자들은 선출된 정치인들이 의회나 행정부에서 추진하는 개혁이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한다고 여길 땐 그동안 구축한 “네트워크”를 동원해 가차 없이 선출된 권력을 무력화하려 한다. 

우파들이 타협적이던 노무현조차 ‘탄핵’하려 했던 것이나, 별 볼 일 없는 수준이던 노무현 정부의 종합부동산세조차 사법부가 위헌 판결을 내려 무력화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자기 제한
 
더 극단적인 역사적 사례들도 있다. 

1970년 칠레판 민주대연합으로 집권한 ‘사회주의자’ 아옌데 대통령은 비밀리에 주류 엘리트들에게 기존 헌법 준수 서약까지 했는데도 집권 내내 관료 조직의 사보타주와 기업주들의 파업, 언론의 마녀사냥, 군부의 쿠데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아옌데는 자신이 임명한 참모총장 피노체트가 일으킨 유혈 쿠데타를 통해 제거됐다.[각주:1] 

이런 사례들은 단지 의회ㆍ정부에 진출한다고 개혁이 가능해지는 게 아니라, 주류 지배자들의 비공식적 네트워크에 맞선 아래로부터 투쟁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그런데 위로부터의 개혁 노선은 “투표로 심판하자”며 노동운동이 선거 때까지, 또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될 때까지 참고 기다리라고 요구하게 되기 때문에 투쟁 방법뿐 아니라 투쟁 목표도 자기제한적으로 된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철회 요구가 야 5당이 주도한 희망시국대회에서는 국정조사 요구 등으로 낮춰진 것이 한 사례다.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 1997년 대중파업으로 노동자들은 당시 한국 정치의 중심에 섰다. 지배계급은 굴욕적으로 후퇴했고, 1년 뒤 일당국가가 해체됐으며, 노동자 정치세력화 운동이 본격화됐다. ⓒ사진 제공 금속노조

그러나 주류 지배자들은, 특히 경제 위기 시대에 오직 대중투쟁이 자신들을 위협할 수준으로 발전해 적당한 양보로 대중과 온건파 저항 지도자들을 달래지 않으면 훨씬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다고 느낄 때 양보에 나선다.

 따라서 법 개정을 통해 투쟁에 유리한 조건을 만든다는 생각은 앞뒤가 바뀐 것이다. 대중투쟁의 힘이 강력해야 악법을 막거나 개혁 입법을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1996년 민주노총이 민주적 노동법 개정을 위한 총파업 준비를 마치고도 국회 논의와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를 바라보며 파업 실행을 미루자, 김영삼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 정권은 도리어 그해 말 정리해고를 도입하는 악법을 날치기 통과시켜 버렸다. 

뒤늦게 투쟁에 나선 민주노총은 이듬해 1월까지 이어지는 대중파업으로 이미 국회에서 통과된 ‘정리해고법’ㆍ‘안기부법’ 등 악법들을 철회시켰다. 진보 국회의원 한 명 없이도 투쟁의 힘으로 대통령 사과를 받고 악법을 막아 낸 것이다. 

그런데 민주당 정권이 집권하자마자 그 노동악법들을 다시 통과시켜 노동자들의 뒤통수를 쳤다. 당시 민주노총 지도부는 민주당 정권에게는 강력한 반대 행동을 하길 두려워했다.(결국 불신임됐다) 

따라서 의회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것보다 대중투쟁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의원단이나 대통령이 아니라 조직노동자들의 투쟁이 사회개혁의 진정한 동력이다.

“아래로부터 쟁취한 개혁은 계급 조직을 강화하고, 그리하여 미래의 진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위에서 선사한 개혁은 수동성을 부추기고, 노동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시키는 경향이 있고, 따라서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을 억제할 수 있다”는 영국 사회주의자 토니 클리프의 경고는 경청할 가치가 있다.


※ 이 글은 <레프트21> 64호에 실렸습니다. (☞ <레프트21> 보러 가기

  1. 아옌데는 노동자들이 주류 지배자들의 쿠데타와 사보타주에 대응하는 자주적 기관을 공장과 지역에서 발전시켰으나 아옌데는 이 운동을 오히려 탄압했다. 헌정질서를 벗어나면 안 된다면서 투쟁을 억제시키고 자신의 개혁을 기다리라고 했다. 결국 우익 쿠데타에 맞서는 정치적 무장을 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민중운동 수만여 명이 쿠데타로 학살됐다. 빅토르하라도 이때 살해당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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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 경제학의 자본주의 비판(기초) 요점 정리

생각 좀 해볼까 2011. 7. 6. 16:46


자본주의가 수십년 만에 최대 위기에 봉착한 지금, 자본주의가 어떤 원리로 운영되고, 어떤 과정에서 위기로 빠져드는지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과정에서 혼돈과 공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사회를 위한 단초를 찾을 수 있다.

자본주의의 형성은 두 가지 역사적 분리를 전제로 한다. 하나는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 둘째는 생산단위 간의 분리(다수 자본의 경쟁) 이것이 자본주의의 고유한 특성과 모순을 야기한다. 두 가지 특성에서 자본주의가 일반화된 상품 생산 체제라는 정의가 가능하다.

즉, 모든 자본주의 생산은 판매를 위해 생산된다.(이윤을 위한 생산) 각각의 생산자들은 오직 판매 시장을 통해서만 관계를 맺는다. 이것이 자본주의 고유의 무정부성(시장), 소외와 상품물신성을 낳는다. 

자본주의 이전에도 존재했던 시장이 자본주의에서 지대한 역할을 하는 제도가 된 것은 이처럼 자본이 오직 다수자본으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한편, 자본주의의 모든 상품은 판매를 위해 생산되므로 상품의 물리적 특성에서 비롯하는 고유의 사용가치와 별개의 교환가치를 지닌다. 교환가치는 각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이다. 그런데 교환 가능하다는 것은 공통의 속성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상품 생산에 투여된 사회적 노동이다. 그리고 교환 과정에서 상품 생산에 투여된 구체 노동은 사회적 노동의 일부, 추상 노동으로 바뀐다. 이 추상노동은 맹목적인 관계 맺기 속에서 사회적 필요 노동량을 이룬다. 이것이 가치법칙이다. 

이 교환가치의 비교는 특정한 상품을 통해 가능하게 한 것이 화폐다.

자본과 임금노동의 분리는 노동력을 특수한 상품으로 만든다. 다른 생산수단들은 가치를 그대로 이전한다. 그러나 노동력은 그렇지 않다. 노동력은 생산요소 중 유일하게 자신에게 지불된 가치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상품이다. 노동력이 지불량보다 추가하는 가치가 바로 잉여가치다.

노동력 역시 상품이므로 기본적으로 노동력을 형성하는데 들어가는 사회적 비용(재생산 비용)에 의해 그 가치가 측정된다. 이것이 임금이다.

그리고 노동력은 그 가치(임금) 이상의 가치를 만들어 내므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을 위해 매일 잉여노동을 제공하는 것이다. 이것이 착취다.

이 잉여노동을 통해 새로운 가치가 창출된다.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전체에 대한 권리를 구매한 것으로 간주돼, 잉여노동의 양과 이 시간에 새롭게 만들어진 잉여가치에 대한 통제권을 쥔다.

결국 잉여가치는 자본이 그 자신(과 자신을 형성하는 사회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활동의 전제가 되므로 잉여가치(즉 착취)를 확보하고, 늘리는 것은 자본의 존재 이유가 된다.

그리하여 맑스가 말한 "축적을 위한 축적, 이윤을 위한 생산"이 자본의 특성이 된다.

노동자 관점에서 보면, 노동시간은 노동력 자신의 가치, 즉 임금에 해당하는 필요노동시간과 자본을 위해 일하는 잉여노동시간으로 구분된다. 이 잉여노동이 착취를 뜻하므로 착취에 저항하는 투쟁은 노동시간 투쟁이 된다.

자본은 오직 경쟁하는 다수 자본으로서만 존재하므로 자본간의 경쟁과 다툼은 필연적이다.(“자본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 그리고 자본의 존재 이유가 착취를 늘리는 것이므로 자본 간의 경쟁(시장 경쟁)은 결국 생산성(착취율=임금:잉여가치=필요노동:잉여노동)을 높이는 경쟁이 된다.

그런데 자본가들은 원료, 기계 등 다른 생산수단들에도 투자하므로 투하된 전체 비용에 대한 수익율을 자신들의 지표로 삼는다. 이것이 이윤율(전체 투자 자본:잉여가치=총노동시간:잉여노동)이다.

따라서 이 각도 저 각도에서 봐도 노동과 자본의 갈등은 노동시간을 둘러싼 투쟁이 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잉여노동비율을 줄여야 한다. 자본은 이 시간을 늘려야 한다.

자본에게 절대적 잉여가치 증대는 노동시간을 늘리 것이나, 물리적 한계가 존재하므로 노동생산성을 높이거나 노동강도를 높여 상대적 잉여가치를 높이는 방법이 더 보편화된다. 또, 자본 회전 속도를 빨리 하거나 특별 잉여가치를 획득하기 위한 수단들이 사용된다.


한편, 자본의 성장할수록 생산은 사회적 생산이 된다. 자본으로서 기능하기 위한 화폐 단위의 규모는 커져 간다. 이런 변화에서 주식회사와 신용제도가 발생한다.

생산이 사회적으로 이뤄진다는 것은 개별 생산단위의 생산물만으로는 생존할 수 없다는 것이고, 생산 과정 자체가 사회적으로 이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별 생산 단위들은 다른 생산 단위의 도움을 받아야 하고, 서로의 생산물을 소비해야 한다.

이 점 때문에 생산 부문의 이윤은 여러 형태의 이윤으로 재분배된다. 이자, 지대, 상업, 국가 등이 가치의 생산과 실현에 도움을 준 대가로 이윤을 재분배 받는다. 또한, 부문간 이윤율 격차는 자본 간의 이동을 초래해 이윤율을 평균화시킨다.

결국 자본은 자기 고용자에 대한 착취물을 대가로 가져가는 것이 아니다. 자본 간의 소득 분배는 집합적 자본으로서 집합적 노동자에게 착취한 양을 재분배하는 메커니즘이다. 이 체계 속에서 개별 자본과 노동자들이 '개인'대 '개인'이 아니라 '계급' 대 '계급'으로 대립하게 된다. 경쟁하고 분열해 있는 자본이 노동에 대항해선 합심단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자본은 서로 다투는 형제들”)

이처럼 자본은 상품자본-생산자본- 화폐자본의 형태로 운동하는 존재이며, 노동에 대한 잉여노동의 착취를 존재 조건으로 하는 특정한(역사적) 사회적 관계다.

한편, 자본 간의 경쟁은 노동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는 한 노동자가 처리할 수 있는 생산수단의 양, 즉 불변자본의 양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노동에 대한 자본의 가치 비율이 높아지는 것을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진다고 말한다. (단순한 수량 비율은 기술적 구성이라 한다. 그러나 수량 변화는 가격 변화에 따라 가치가 변동하므로 가격 변화를 고정시켜 고안한 유기적 구성의 개념을 사용한다)

노동력만이 새로운 가치(이윤의 원천인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에 자본 투자와 노동의 비율에서 전자의 비중이 높아질수록 즉, 유기적 구성이 높아질수록 전체 투자 비용에 대비한 잉여가치, 즉 이윤몫은 상대적으로 줄어드는 경향이 발생한다. 이것이 이윤율 저하 경향이다.

그리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는 것은 자본이 점차 과잉 축적되고 있다는 뜻이다. 생산성이 높아져 생산수단 자체의 가치가 하락하는 상쇄 효과도 존재하나, 자본에게는 애초에 투하된 자본에 대한 이윤 비율이 중요하므로 이 상쇄 효과는 한계가 있다. 이윤율 저하 경향은 공황의 기본 배경이 된다.

또한 자본간 경쟁 격화는 생산의 무정부성을 확대한다. 시장의 무정부성은 생산재를 소비하는 1부문과 소비재를 생산하는 2부문 사이의 불균형을 야기한다. 이 불균형을 사회적으로 조절하는 장치가 자본주의에는 원리상 존재하지 않는다.(세계적으로 시장 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한 그러하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더는 자본주의가 아닐 것이다)

이윤율 저하와 경제의 불비례 상황은 공황으로 이어진다. 공황이 발생하면 자본은 파산, 폐기 등의 방법으로 과잉 축적된 자본들의 가치를 파괴함으로써 유기적 구성을 낮춘다. 이에 따라 이윤율이 다시 회복되고, 생산은 재개된다.

문제는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개별 자본들의 규모가 워낙 커져 공황을 통한 가치 파괴와 호황의 재개라는 과정이 단순 반복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제는 높아진 집적과 집중은 개별 자본의 파산이 창조적 파괴라 부르기엔 지나치게 큰 충격을 주므로 국가가 개입해서 공황을 막는다.

이는 과잉 축적(유기적 구성의 고도화) 문제 해결을 지연시켜 폭력적 공황 이후의 회복이라는 패턴 대신 장기 불황으로 상황을 이끈다. 이윤율은 회복되도 이전 호황기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 장기적으로 이윤율이 하락하는 장기 불황의 시대가 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는 세계 경제 공황이 70년대 이후 세계 장기 불황 시기에 생산 투자를 못 하는 자본들이 여러 해법이 실패한 끝에 자산 투자로 거품을 유도했다 붕괴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목격했듯이 자본 구조조정보다는 자본 살리기를 위해 거품 유지 정책을 펴면서 과잉 축적을 해소하지 못하고 있다. 이전보다 더 심한 장기 불황에 빠져들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 봤듯이, 사회적 생산과 사적(=개별적≠개인적) 전유의 모순과 생산력의 발달이라는 결과는 여러 파생적 모순을 낳는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와 신용제도는 이런 모순의 현실 형태다. 두 제도는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제도다.

자본주의에서는 높아진 생산성이 생산력 파괴의 원인이다. 생산성을 높이려는 개별 자본들의 합리성이 체제 전체에는 비합리적 결과를 이끌어 낸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모순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호황과 공황의 반복은 자본주의에서 영원히 계속된다.

따라서 자본주의의 공황은 높아진 생산력을 자본주의라는 생산관계 또는 생산양식이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한다는 단말마의 비명이기도 하다. 진정으로 자본의 한계는 자본 그 자체다.



[출처]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 마르크스 경제학에서 본 자본주의의 경제적 측면 요점 해설|작성자 꿈동산 (2008.12.4)


※ 예전 열심히 돈 벌던 시절에 정리했던 글인데, 우연히 검색하다 걸렸다. 신기하고 기특해서 오타만 수정해 다시 올려 본다. 이 글에는 국가와 제국주의(전쟁), 기타 차별과 억압은 포함되지 않았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글의 취지가 경제 원리를 요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저작자표시 비영리 동일조건 (새창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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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사회’와 ‘정의’란 무엇인가에 관한 단상

생각 좀 해볼까 2010. 11. 13. 21:24

1. 올핸 ‘공정 사회’가 화두입니다. 오죽하면, 특권층만 대변한다고 욕 먹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만들겠다고 나섰을까요.

대통령이 공정사회를 말하면서 함께 언급한 《정의란 무엇인가》가 수십만 부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됐답니다.

‘따분한’ 대학 교재가 베스트셀러가 됐으니 실제로 우리 사회의 정의에 관해 많은 이들이 관심과 의문을 갖고 있다는 한 방증이라 할 수 있겠죠. 물론 따분하지 않고 흥미롭게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이 책이 많은 이들에게 내용 면에서 공감을 얻은 건 공리주의와 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정의 개념의 허점들을 짚어낸 것이었을 겁니다.

최대다수의 행복이나 능력에 따른 보상이란 게 실제론 공정한 게 아닐 수 있다는 마이클 센델의 지적은 많은 이들의 (머리가 아니라) 가슴을 달래 줬을 겁니다. 한국에서 가장 중요하고 강한 나라로 치는 미국, 거기에서도 최고 엘리트인 하버드 대학 교수의 말이니까요.

아쉬운 것은 그의 공동체론이 우리가 어느 공동체에 본질적인 정체성을 둘 것이냐 하는 점에서 그다지 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일 겁니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구속력 강한 공동체는 정치 공동체, 즉 국가니까요.

국가가 모든 이들을 포괄해 통치하고 유일한 공적 강제력으로 기능하지만, 그 국가가 지배하는 사회는 계급으로 분단돼 있습니다. 국가의 본질을 논하기 전에도 우리가 직관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데, 현실에서 국가는 자기 사회에 속한 모든 계급에게 공정한 존재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제와 어제, G20 모임이 있었고, 회담장 바깥에선 이 회의를 규탄하고 반대하는 시위와 행진이 있었습니다. 이 시위의 핵심 구호는 “경제 위기 책임을 전가하는 G20을 규탄한다” 였습니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서 국가들이 공정하지 않게 경제 위기의 책임을 배분한다는 것입니다. 

G20 홍보 포스터에 쥐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연행되지만, 그 G20을 개최하는 국가의 세금을 축낸 이들은 국가의 존중을 받습니다. 국가의 법을 어겨도 국가가 나서서 사면해 줍니다.

이처럼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직관적 통찰 때문에 ‘공정 사회’와 ‘정의’에 관한 갈구는 더 커져 가는 듯 보입니다.

2. 최근엔 방송 오락 프로그램에서도 공정사회와 관련한 코드들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적지 않은 이들이 <슈퍼스타K>에 관심을 보였고, 쉽지 않은 기회를 잡으려는 청년들, 특히 불리한 조건의 청년들에게 열광했습니다[각주:1]. 드라마 <성균관스캔들>에서는 여성과 중인, 소수 당파 유생 등 비주류 등이 주인공으로 나왔고, 여성에게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새로운 조선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두 프로그램 모두 프로그램 안에서는 공정한 기회가 주어진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중졸 학력으로 제대로 음악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던 허각이 우승해 그를 응원하지 않았던 사람들까지 감동시켰습니다[각주:2]. 성스에선 김윤희가 결국 남장 여자로 이중 생활을 계속 하는 결론을 제시합니다.

이런 환상적인 결론은 해당 프로그램에 동화된 사람들에게는 만족을 주겠지만, 현실을 정확히 반영하지도 않는 것일 뿐아니라 현실을 감추기도 합니다. 

허각의 성공이 가지는 역설은 두 가지인데, 첫째는 왜 허각처럼 재능 있는 청년이 제대로 된 음악 교육을 받을 수 없었는지 하는가 하는 것과 다수가 정당한 보상이라고 여기는 그의 우승이 바로 이 문제에 관한 관심을 덮어버린다는 겁니다. 대물 김윤식의 생존도 마찬가지인데, 임금의 벗이자 충신이었던 아버지의 존재와 개인의 재능이라는 우연적 요소로 문제가 해결됩니다.

결국 현실의 한 사람과 허구 속의 한 사람이 기회를 잡는 것은 구조적 평등이 아니라 재능과 노력에 바탕한 개인적 ‘행운’의 결과입니다.

한마디로 이 프로그램들은 의도했든 아니든 이 사회에서 ‘어쨌든 기회는 존재한다’는 것과 그 기회를 붙잡는 것은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생각을 심어줍니다. 그것이 행운이든 노력의 결과든 재능의 발휘든 아니면 실패하든 그 모든 것은 개인의 책임입니다. 


3.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성공할 기회가 똑같이 제공됐다면, 이 사회는 공정사회라고 말하죠. 기회가 주어졌다면 나머진 개인의 노력(과 재능) 문제일 테니 말입니다. “성공은 노력의 보상이다.” 내가 구멍가게를 차려 이건희와 사업 경쟁을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입니다[각주:3].

그래서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학자들과 언론은 눈물겨운 성공담을 찾아 내려고 늘 노력합니다. 자본주의가 공정하고 열린 체제라는 것을 보여 주려고 말이죠.

심지어 원래 상류층 출신으로 처음부터 우월한 자금력으로 경쟁자들을 인수하면서 성공한 빌 게이츠가 첨단 기술을 선구적으로 개발해 성공한 자수성가의 사례가 되기도 하고(부모가 백만장자였어도 지금 빌 게이츠는 억만장자이므로 크게 성공한 것은 사실이다) 최근엔 페이스북 창업자의 스토리가 영화화되기도 하고, 불우한 시절을 이겨 낸 운동선수와 예술가의 성공담도 이어집니다.

크롬도 파이어폭스도 이루지 못한 MS 사의 인터넷 익스플로러가 보여 주는 예술적 경지. 아마 많은 분들이 경험해 보셨을 듯. 마이크로소프트는 기술적 성공이 아니라 하드웨어 제조사들과 독점 체제를 구축해 돈을 번 것이다. 부자들의 기부는 재단 설립을 통해 이뤄지는데, 면세 혜택을 받는 이 표면상 복지재단 운영을 세습하면서 부는 덜 욕 먹고 세습된다. 록펠러, 카네기 재단이 대표적 사례고, 한국에서도 한 번도 돈 버는 일을 해 본 적 없는 박근혜와 그 동생들이 육영재단 덕에 지금도 먹고 산다. 빌 게이츠에 관해서 쉽게 아는 방법으로 팀 로빈스가 주연한 패스워드란 영화를 추천한다.

그러나 고교 평준화가 재력에 따른 학력 서열화와 성공의 계급적 차별을 막을 수 없는 것처럼, 결과적이고 형식적인 기회 제공만 가지고 진정으로 사람들이 바라는 공정 사회라고 말할 순 없습니다.

돈 벌기든 학문이든 예술이든 성공할 기회를 제공하는 게 공정하려면, 그 기회에 임하는 자격을 갖추는 문제에서도 공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이 필요한 문제와 연결되기 때문에, 이 사회가 진정한 공정 경쟁을 보장하려 한다면, 예를 들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가 상속을 금지시키는 일일 겁니다.

그래야 성공이 최소한 자기 재능과 노력의 결과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을테니까요. 재벌가의 자녀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스스로 공정한 경쟁으로 그 자리에 올라섰다고 결코 말할 수 없습니다. 게다가 성공에 대한 보상이란 것도 이 사회는 금전적 성공으로 획일화돼 있습니다.

문제는 상속 금지 같은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능하지 않다는 겁니다. 날 때부터 불평등한 현실은 사유재산이란 이름으로 보호되고, 이 불평등한 조건에서 사람들을 경쟁으로 내모는 일은 자유시장경쟁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될 뿐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단지 불공정한 중재자가 아니라 애초부터 계급지배의 도구인 것입니다.

오래된 농담처럼, 우리가 단무지에 라면 국물 먹고 클 때, 아무개는 인삼 깍두기에 녹용 국물을 먹으며 크는 현실에서 우리가 특정한 목표를 성취하려는 데에 필요한 모든 자원과 자격에 접근하는 과정에서 우린 경제적 조건과 국가의 보호라는 문제에서 모두 불평등한 현실에 직면합니다.

그래서 모든 국민이 법적인 자유 신분과 공평한 권리와 의무를 진다고 하는 자본주의에서 불평등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진정한 기회의 평등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일도 아닙니다. 왜냐면, 이미 특권을 쥐고 출발하는 이들이 규칙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현재 규칙 뿐아니라, 앞으로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게임의 규칙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국가를 지배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 앞에 직면한 현실은 구조화된 계급 불평등입니다. 지배 받는 계급(노동계급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속한 사람들에게 이 사회는 결코 공정 사회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마르크스의 말을 빌려 다른 각도에서 말한다면, 계급투쟁이야말로 진정한 ‘공정 사회’로 가는 길이라는 겁니다.


4. 그래서 공정 사회가 화두가 되는 현실은 갈수록 계급 불평등이 깊어지는 현실과 대중의 깨달음을 반영합니다. 결국 공정사회와 정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과 애착이 보여주는 것은 계급 불평등을 가리고 오히려 그게 당연하다고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대중적으로 의심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쉽게도 이런 현상이 곧바로 계급 불평등이라는 담론과 계급 정치의 강화로 나타나지 않고 정의 같은 추상적 담론과 가치, 도덕의 문제로 논쟁이 됩니다. 이것은 아직 마르크스주의 좌파가 세력과 이데올로기에서 열세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는 (비록 가짜 사회주의였지만, 다수가 진짜라고 믿어버린-참고글) 소련의 붕괴[각주:4]라는 세계사적 요인과 국제적으로 계급투쟁 부활이한동안 지지부진했던 배경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입니다. 대규모 경기부양으로 세계경제의 붕괴를 막은 것도 사회의 이념 지형이 더 급진화하는 걸 막는 부분적 효과를 냈을 겁니다.

요즘 한국에선 진보정당들이 민주대연합 수준의 개혁주의가 득세하는 데에 한몫 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노조 상층 지도부가 주도하는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 프로젝트로 출발한 이 당들은 상대적으로 노동운동의 투쟁 압력이 완화된 현 국면을 배경으로 계급보다 국민, 투쟁보다 중재[각주:5], 그리고 언론용 기자회견을 더 중시하는 실천을 하고 있습니다. 명백히 오른쪽으로 후퇴한 거죠[각주:6].

노동자운동이 아직 공세 국면이 아닌 단계에서 계급투쟁 정치가 주변화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단견이고 피상적 관찰입니다. 계급투쟁 상황이 영향을 미칠 텐데, 최근 상황은 불균등하지만 반전의 계기들은 마련되고 있는 듯합니다.

그리스, 프랑스 등 유럽 노동자투쟁의 부활도 국제적으로 주목할 만한 사건이구요, 중국도 심상치 않다고 봅니다. 한국에선 노동운동의 주력부대는 건재해 이명박도 본격적으록 공격을 못 한다는 게 드러났고, 최근엔 비정규직 투쟁이 전진하고 있습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특권층 정부와 재벌 기업에 대한 사회적 불만도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 단계에선 계급투쟁을 반전시킬 계기들을 폭넓게 주목하는 한편, 자본주의 옹호론과 (이 사상들과 근본에서 단절하지 않는) 개혁주의와 벌이는 이데올로기 투쟁이 매우 중요할 것입니다.


크게 두드러지진 않지만 당신의 수많은 제자 가운데 하나인 나도 당신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물론, 당신은 노동계급의 승리라고 말할 테고, 그것이 사실 맞는 말이고, 당신이 기초해 지금까지 생명력을 갖고 발전하는 사상의 정신일 것이다. 그 승리에 내가 기여했다고 말할 수 있는 말년을 맞길 바라면서 오늘도 바쁘게 산다.

5, 끝으로 마르크스주의는 정의를 어떻게 보는가. 저는 마르크스주의의 대가가 아니고 마르크스가 별도로 정의와 윤리학에 관해 저술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다분히 개인적 해석을 매우 단순한 수준에서 말해 보려 합니다. 

우선, 마르크스주의에서 사회적 정의의 기본 가치는 평등이겠죠. 

자본주의가 말하는 개인의 자유가 불평등한 조건에서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금전적 불평등만 문제가 아니죠. 그에 따른 정치권력의 독점도 존재합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 등 모든 영역에서 평등하다는 것은 사회적 생산과 분배를 결정하는 문제에서 모두 평등하게 권한을 가진다는 뜻이고 이것은 계급 불평등이 해결돼야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룰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근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는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발전 수준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인간 사회가 더 풍족해 지고 그래서 평등의 가능성이 커지고, 사회 전체가 고양될 때, 거기에 속한 개인들도 더 많은 발전의 가능성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지향이 행복, 자아실현 등을 뜻하는 자유라고 할 때, 그 자유의 전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진정한 평등입니다. 그런 점에서 자유를 실현하려는 조건으로서 평등은 결과의 평등보다는 (급진적 의미의) 기회의 평등이 아닌가 합니다.

그래서 자본주의 불공정 사회는 이제 인류에게 늙고 병든 짐일 뿐입니다. 이제 인간 사회의 경제적·문화적 생산력은 사회 전체를 민주적으로(평등하게) 계획하고 통제하는 것을 통해 사회와 개인들의 자유를 고양할 때 다시 도약할 수 있습니다.

그때 진정으로 공정한 사회를 이룰 수 있을 겁니다. 개인은 금전적 성공이라는 획일적 기준으로 자신들의 노력을 한정하지도 않을 것이고, 사회적 결정에 민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공정한 기회는 다양한 가능성의 추구라는 본질적 자유를 전례 없이 확장시킬 것입니다.


  1. 나는 본방으론 결승전 한 번 봤는데, 그뒤에 화제가 된 장면을 검색해서 보니 다들 저렇게 노래를 좋아하고 잘 하는데, 기껏해야 스무살 안팎인 청년들에게 탈락! 불합격! 같은 상처를 주는 게 너무 짠했다. [본문으로]
  2. 다른 참가자들은 대부분 따로 돈을 들여 실용음악학원에서 가수 준비를 하는 청년들이었죠. [본문으로]
  3. 이들은 이론상 단지 외교부 특채 같은 일만 없으면 공정하다고 말합니다. 늘 그렇듯 이들이 우리에게 훈계하는 말과 실제 삶은 다릅니다. 아주 많이요. [본문으로]
  4. 최근의 길지 않은 글에서 추천하자면, 본문에도 링크한 http://www.left21.com/article/7450의 글을 참고하시오. 국가자본주의론의 저작권자인 토니 클리프의 글. [본문으로]
  5. 정책 대안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건강보험하나로시민회의의 노동자 보험료 인상론이나 노동자 증세론, 국익론에 바탕한 한미FTA 재협상론 같은 게 투쟁에 해악이 되는 중재적 정책들이다. [본문으로]
  6. 이것은 민주대연합의 결속력이 완화되는 데에 계급투쟁 수위가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민주대연합 노선도 거꾸로 계급투쟁 활성화에 해악적 요소로 반작용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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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론 ― 착한 소비 대안들에 관한 비판적 검토

내 기사 이야기 2010. 10. 18. 18:26
관련 기사: 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관련 글: 착한 소비의 딜레마 ― 마르크스주의 관점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이 글은 부족하지만 위 글의 보론 성격으로 쓴 글입니다. 함께 읽어주세요~)

1.
오늘날 윤리적 소비, 즉 착한 소비 운동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나 “돈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표어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소비자운동만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와 관련해 매우 포괄적인 주제들을 다룹니다. 

소비로 기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사회 책임 투자를 촉구하는 운동이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선진 제국과 다국적 기업의 수탈적 무역에 대한 반대가 공정무역으로, 선진국 은행에 저축한 돈이 비윤리적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지역 화폐나 비영리은행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은행들에게 하는 저축이 이 은행들의 미국 채권 투자를 통해 미국의 전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 대만, 한국 등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채권 국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윤리적 소비운동은 참여하기도 쉽고, 의미도 가지는 운동으로 비춰지는 듯합니다. 저도 가능한 영역에서는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소비가 목표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2.
우선, 불매 운동과 윤리적 소비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친환경 제품을 사자는 것은 반환경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안적 소비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폭넓은 방식인 불매운동은 대체로 윤리적 소비운동의 가장 초보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소비운동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새 한국타이어[각주:1]와 이랜드, 조선일보 광고기업리스트, 미국산 쇠고기 취급 대형 마트 등 다양한 불매운동의 사례가 있습니다.  며칠 전엔 ‘삼성’과 정면 대결하자는 분들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굿바이삼성》이라는 책을 냈다는데, 이것도 한 사례입니다.

윤리적 소비가 불매운동이라는 초보 방법으로 되돌아 간 것은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을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가전제품, 핸드폰, 컴퓨터 등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의 경쟁기업들은 삼성보다 작아서 악행의 규모가 더 작은 기업들 뿐입니다.

무노조 삼성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야 하나? 윤리적 소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많은 분들이 고민했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윤리적 소비운동이 부딪치는 가장 딜레마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가장 나쁜 기업을 윤리적 소비의 어떤 방법으로도 혼내 주기 힘들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 즉 집적[각주:2]과 집중[각주:3]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정용진 때문에 쟁점인 유통업계를 예로 들면, 대기업 유통 마트 진입에 반대하는 동네 슈퍼들도 이전에 자신들끼리 이런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지금 대형마트 반대자들은 이전 경쟁의 생존자들인 거죠.

이것은 이론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이미 확인된 내용입니다. 대기업조차도 이를 피할 순 없습니다. 다국적 기업인 월마트, 까르푸가 실패해 떠났고 이랜드도 실패해 삼성에 넘겼습니다. 이 경쟁은 국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공정거래위와 국회를 동원합니다. 

이런 시장의 특성상 이마트가 싫어 다른 대안 유통업체를 찾아 봐도 나쁜 기업을 만나는 걸 피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다른 소비재 시장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3.
그래서 윤리적 소비 운동은 대안적 소비 운동으로 나가자는 분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대기업들의 소비 품목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 대형TV, 핸드폰, 보험상품, 주식투자, 비행기 여행, 패스트푸드 등.

안타깝게도 이것은 사회의 다수인 노동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소비 생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핸드폰 안 쓰겠다는 사람을 누가 고용하려 하겠으며, 오늘날 컴퓨터와 TV 등을 통한 매스미디어를 접촉하지 않고서 취업과 업무에 필요한 업무 지식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가용의 경우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콩나물 시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힘든 건 사실입니다. 패스트푸드 형태로 육식을 섭취하는 건 바쁜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화재보험 없인 자가용을 굴릴 수 없고 체제가 생존을 책임져 주지 않으므로 생명보험이나 연금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대안적 소비 운동은 근본주의적인 자급자족 소농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나쁜기업에 대한 생필품 의존을 인정하고,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품 소비에서 윤리를 찾는 온건한 형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기호품 소비는 시장이 작아 대기업들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부족한 상품들입니다. 

게다가 커피, 바나나, 초콜릿, 차 등의 기호품 소비는
선진국에서 20세기 들어서 대중적 유행이 됐는데, 이 작물들의 역사는 예전 남미와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노예농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풍족한 농업지대가 식민본국의 기호품 소비를 위한 단일경작 노예농장으로 바뀌는 겁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돈을 꿔 주고 엄청난 고금리로 이 돈을 갚도록 합니다. 외채의 덫에 걸린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 공급을 파괴하면서까지 선진국 시장에서 돈 되는 작물의 단일 경작으로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공정무역이 취급하는 기호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형식적 독립국인 지금까지 이 지역들은 만성적인 식량위기 상태입니다. (참조 ☞ 여기) 공정무역기업과 거래하는 제3세계 농민들은 거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농들입니다. 거대 커피농장 자체를 네슬레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경영하니까요. 

단일경작 수출은 농업 위기를 낳고, 변덕스런 국제 식량시장에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대중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커피의 경우 과잉 공급이 낮은 산지 가격의 주요 배경입니다[각주:4]. 근본에서 이런 수출의존, 수출용 단일경작체제를 바꾸지 않도록 하는 공정무역이 과연 정말 선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다국적 기업들보다는 더 많은 가격을 쳐 주니 상대적으로 훨씬 더 윤리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적 고비용은 기업 이윤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합니다. 시장 관계로 만나는 것이므로 이것이 진정으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관계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자본력이 약한 공정기업들을 밀어내고 대기업들이 시장을 나눠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무역도 세계 무역의 진정한 불공정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결론 내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수탈적인 세계무역구조를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대안적 소비 운동은 대기업의 시장 과점과 시장 구조 자체의 비민주성과 불공정성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다수 대중의 대안적 삶의 형태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소비 운동이 중산층 운동처럼 보이는 이유죠.  

생협과 로컬푸드 등도 대안적 소비라 할 수 있는데, 식품 안전이란 면에서 윤리적일 수 있고, 한국처럼 자영농이 많은 구조에서는 양쪽에 모두 이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 비용이 더 들고, 생산의 질을 유지하려면 보편화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소비는 되질 못합니다. 

이런 점들은 윤리적 소비가 생산자에 대한 자선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개인 소비의 질 향상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 바로 이 점이 소비(취향과 능력)가 생산(규율과 소득)에 매여 있는 또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 공정무역 매출은 매년 늘고 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공정무역마크를 단 대기업 상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기업으로선 손해보는 건 아니다. 공정가격을 산지에서 지불한 만큼 판매가격을 올려 받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에서 기업 이윤(잉여가치)은 판매차익이 아니라 “출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팻말이 붙어있는,가려져 있는 생산의 장소”(마르크스)에서생겨납니다.

이 곳에서 자본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에게 약속한 대가(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잉여노동)을 부과합니다. 이 잉여노동의 결과로 생겨난 추가적인 재화와 서비스가 잉여가치인데, 자본은 이를 이윤이라고 부릅니다.


즉, 전체 생산과정에 투자된 자본 가운데 원료는 그대로 생산품의 가치에 이전되며, 기계도 감가상각되어 생산품 가치에 이전됩니다. 노동만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취는 부당거래로 만든 차익이나 수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경제주체의 소득은 이처럼 노동자 착취에 바탕한 생산과정에 기여한 몫을 그 비율 만큼 배분받는 것입니다.

노동력 제공, 공장과 창고 등 토지의 대여, 현금 대출, 법과 경찰로 기업을 보호하는 국가, 생산품 판매와 배송, 노동력의 교육과 치료 등이 임금과 지대, 이자, 세금, 수수료 등으로 실제 이윤이 나는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와 나머지 자본, 그리고 국가에 배분됩니다.

나머지 자본과 국가가 가져가는 몫의 노동은 실제로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했으므로 이 노동자들은 이 배분되는 몫에서 임금을 받습니다. 이 노동자들도 잉여노동을 한 것이므로 착취를 받습니다.

결국, 이 소득 배분 과정은 잉여가치 생산과 실현, 배분 과정에서 구성된 자본의 연결망이 노동자들 전체를 착취하는 것, 즉 집합적 착취 관계의 형성을 보여줍니다. (한편에선 화폐 물신주의, 즉 화폐가 신비한 구매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마트의 힘은 싼 판매가격이 아니라 싼 구매비용에 있다는 겁니다. 싼 판매가격은 시장 점유율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싼 판매가격으로 시장을 과점해도 이윤을 남기려면 투자와 산출(매출)을 대비해 후자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본질이 단순한 유통과 판매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판매노동자를 저임금에 쓰고, 현금과 유통망의 힘으로 생산기업들을 압박해 더 높은 착취강도로 더 싸게 물건을 공급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각주:5]입니다.

이것이 대형유통자본에겐 있고, 동네 중소 상인에겐 없는, 대기업이 영세상인들을 몰락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은 사는 물건부터 사는 장소까지 우리가 자신을 피할 수 없도록 포위합니다.

한편, 중소기업도 생산비용을 낮출 수만 있다면 대체로 대형유통마트에 납품하는 게 매출을 늘릴 수 있으므로 이득이 됩니다. 소상인들도 경쟁하려면 구매비용을 낮추는 데 같은 이해관계를 가집니다. 더 싼 상품 공급을 바라는 거죠. 서로 싸우는 듯 보이는 대기업-중소기업-유통기업-중소상인이 한편에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 이유입니다. 

이 가운데 소비재를 취급하는 소상인들은 대기업과 싸우면서도 노동자투쟁은 환영하지 않고, 생산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라지 않으면서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랍니다.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란 바로 이런 겁니다[각주:6].



5.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한 또다른 이유는 소비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첫째, 노동자들의 전체 소득을 합해도 전체 생산 몫의 일부이므로 소비재 수요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 소득의 원천이 기업들의 이윤 생산 과정이므로 앞서 지적했듯이 소비행태 등 생활방식도 생산과 결부된 필요와 문화에 대체로 종속됩니다.

셋째,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누구를 윤리적 소비의 파트너로 택하더라도 경제의 근본 구조는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넷째 이 점도 매우 중요한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진정한 소비자는 생산과정에서 온갖 생산요소와 제반서비스를 구매하는 생산자본이라는 겁니다[각주:7].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투자가 수요를 창출하는 원리입니다.

좀더 부가하면, 바로 이런 자본주의 투자의 성격 때문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의 소비능력이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물보다 적은데도, 심지어 농민 등을 다 합쳐도 총투자액이나 총산출물에는 못 미치게 돼 있는데도 일반적으로 과소소비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나면, 소비로 기업 이윤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공상을 좇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선 노동력 판매, 즉 취업을 해야만 하는데, 반대로 인간의 노동력이 판매 대상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체제에서 소비 행위를 회피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때무에 오늘날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근본주의 대안은 상품시장과 노동의 소외를 폐지하는 반자본주의 노동자 혁명이거나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생산자급자족 공동체 밖에는 없습니다.

소생산자 공동체는 사실상 도시 노동자들이 귀농하자는 것인데, 막대한 식량과 재화, 서비스를 쌓아두고도 수억 명을 굶겨 죽이는 체제의 부정의를 바꾸는 것은 더 힘들어지는 대안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회피할 뿐아니라, 소생산 공동체의 경제력으론 대기업들의 경제력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결국 윤리적 소비 운동의 기업 비판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개혁주의 대안으로서 종합하면, 윤리적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상적인 작동이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근본에서 윤리적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사에서 썼듯이 나쁜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시장 경쟁 아래서 개별 기업은 경쟁을 위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노동자에게 더 일을 시키고 노동자 수를 줄이며, 다른 사회 책임 투자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책임 투자, 은행 이윤의 지역 재투자, 사회적 기업 등 착한 기업 만들기 프로젝트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하나의 이윤기계인데, 그 속성상 사회 책임 투자조차 직간접적이거나 장단기적으로 이윤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복지 투자는 중장기 시야에서 기업 이미지 마케팅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시중은행들의 막대한 수익과 경영자 고임금이 문제가 되자, 2006년경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은행들이 강조한다거나[각주:8], 아들 문제로 폭력 사건을 일으킨 김승연의 한화그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늘린 것이 대표 사례입니다.

가장 위선적인 것은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이겠죠. 이들은 일정액의 사회적 기부를 통해 법인세 감면 효과도 노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 국가 보조 없이는 운영이 안 됩니다. 이윤을 못 남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경쟁력 부족은 틈새시장과 국가보조, 개인 기부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기업이 이명박 같은 친(나쁜)기업 정부에게 의존하려는 이유[각주:9]인데, 이들이 스스로 이윤을 내서 독립적으로 생존하려면 지금보다 더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즉 이윤 확보를 가장 우선하는 경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기업의 업무 영역과 관계있습니다.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업무 자체가 복지 대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도시락 등이요. 그런데, 이런 복지는 조세를 통해 국가복지로 해야 합니다.

국가복지를 민영화하는 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 복지를 탈정치화하자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관료주의와 시장 효율성을 대립시키는 방식의 논리인데요, 본질은 복지비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겁니다. 

결국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적기업과 국가복지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왜냐면 해당 분야에서 국가복지를 강화하면 사회적기업의 영역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기업도 경영자본이 필요한 점에서 다른 기업과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를 억제하려면 자선에 의존해야 하는데, 자선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이다. 국가 보조와 개인 기부에 의존하는 것은 자생력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내보이는 일이다.



7.
그런데, 이 문제들은 비영리(NPO[각주:10]) 은행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자구책은 될지언정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둘째, 비영리 은행도 돈은 갚아야 합니다. 자급자족 공동체가 아니라면 사회적 기업은 비영리 은행의 대출을 받아도 앞서 그 돈을 갚으려면 앞서 지적한 경쟁=이윤 창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셋째, 결국 받은 돈으로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나가 돈을 버는 일입니다. 구조적으로 시장 경쟁은 모든 참가자에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지배하는 구조와 대결하지 않으면  뭔가 다들 부실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비영리 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건 소생산자(농민)들이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는 경우 정도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는 사회의 총체적 거부는 될지언정, 총체적 변혁 전략은 아닌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온존한다는 점에서 체제 거부 자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급자족 공동체조차 필수품을 구하려고 자신들의 농산물을 팔아야 합니다. 물론 유기 농산물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들도 시장을 통해 체제의 다른 생산자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자신의 삶은 바꾸지만, 사회 구조는 단 하나도 바꾸질 못합니다.

8.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막강한 소수의 기업들은 막대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배분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무정부적 시장에서 혈투와 같은 경쟁의 시험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업도 나쁜 기업이 돼야 한다는 압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쟁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위기를 낳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부동산 투기 거품을 부양하며, 이런 기업들이 경영에 실패해 노동자를 짜를 때면 경찰을 보내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때려 잡습니다.

그래서 나쁜 기업을 없애려면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소비 투표가 아니라 기업들을 민중적 민주적 계획 아래 종속시켜 민주적으로 생산을 결정해야 합니다.

□ 참고도서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알마, 2007)
《굿머니 ― 착한 돈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착한책가게, 2010)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

□ 참고기사
‘공정무역이 제3세계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 
‘사회적 기업 ― 시장도 국가도 아닌 대안?’ 

※ 지역화폐는 다루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아직까지 영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1. 이명박 사돈 기업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처벌받지 않는 죽음의 공장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2. 기업의 절대 규모가 커지는 것. [본문으로]
  3. 경쟁하는 기업의 수가 줄어드는 것. 즉 집적과 집중이란 시장 경쟁이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소수의 기업들의 지배로 바뀌는 현상. [본문으로]
  4. 옥스팜은 공정무역이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공정가격으로 5백만 자루(약 1억 달러)를 사서 폐기 처분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공정무역운동의 초라한 현실입니다. [본문으로]
  5. 대체로 축적된 자본의 규모와 이에 따른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이 힘의 크기를 결정한다. [본문으로]
  6. 사실, SSM이 들어오기 전까지 동네 슈퍼들도 그 동네 수준에서는 경쟁을 통한 집적과 집중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본문으로]
  7. 이 구매 과정이 아까 말한 소득의 배분 과정과 동일합니다. [본문으로]
  8. 서민 대상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이명박이 박원순 변호사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문제가 됐었는데, 이 사업을 애초에 후원한 하나은행은 비정규직 차별이 가장 심한 은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으로]
  9. 사회적 기업은 법인세 추가 감면 등 세제 지원과 국고 보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Non Profit Organigations. [본문으로]
저작자표시 비영리 동일조건 (새창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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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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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비 운동의 딜레마: 마르크스주의 관점

기사들 2010. 10. 15. 15:27

이마트가 동네 시장 품목까지 판매하면 되냐는 비판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이 “이념적 소비를 하느냐”고 조소하면서 “윤리적 소비” 논쟁이 불거졌다.(관련 글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조국 교수는 ‘윤리적[착한] 소비’ 운동으로 오만한 대기업에 본때를 보여 주자고 호소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또는 ‘착한 소비’) 운동가들의 목표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추구나 개인의 자기 만족만은 아니다. 이들은 공정무역, NPO(비영리은행),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기업, 생협, 지역화폐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들은 ‘나쁜’ 대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벌이는 불공정 거래와 착취ㆍ환경파괴 등에 분노한다. 이들은 기업 이윤보다 인권과 환경,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초콜릿 회사를 비난할 때, 그것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등의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아동들이 다국적 식품회사를 위해 노예노동을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들이 폐지 재활용 소비를 권장할 때, 그것은 다국적 기업이 브라질이나 칠레에서 막대한 삼림을 파괴해 지구 기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막으려는 호소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분노에 공감한다. 이랜드 등 ‘나쁜’ 기업의 노조 탄압에 맞선 보이코트(불매운동)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적극 지지하고 동참한 바 있다.

△ 삼성 불매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은 한국경제에서 핵심적인 시장들이다. 삼성과 그 아이들=나쁜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시장들이라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인 시장에서 불매운동하기 참 힘들다.


그럼에도 이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차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소비 투표”

이들은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결국 상품 판매에 성공해야 이윤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윤리적 소비”가 기업에 진정한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라는 말로 요약된다. (투표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경제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소비 투표”로 시장을 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방법의 차이는 대안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들이 ‘나쁜’ 기업을 길들여 만들려는 세상은 ‘윤리적(착한)’ 자본주의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점진적 목표를 이루는 데서조차 몇 가지 난점을 낳는다. 

첫째, 현실에선 ‘나쁜’ 대기업들이 필수적인 소비 시장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무노조 삼성의 가전 제품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는 것을 누구도 ‘윤리적 소비’라 부를 수 없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공정무역 등 윤리적 소비 품목이 대체로 커피, 초콜릿 등 기호품[각주:1]에 한정돼 있는 현실이 이것의 방증이다.(각주 꼭 보세요)

둘째, 이윤 그 자체가 목적인 기업들은 ‘윤리적 소비 시장’도 창출해 낸다. 창업자[각주:2]가 극우 시오니스트고 아프리카 커피농장 착취로 대표적인 불매 대상 기업이던 스타벅스가 겨우 전체 구매량에서 5퍼센트만 공정무역 커피를 쓰고도 ‘공정기업’으로 불린다!

△ 스타벅스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다. 윤리적 소비로 점진적 기업 변화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스타벅스의 조그만 변화는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를 후원한다는 의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이콧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억압에 맞서 이스라엘과 하는 모든 교역에 반대하는 국제 캠페인이다.


셋째, 윤리적 소비를 하려면 대체로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세계 정용진을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마트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김규항의 말처럼 “생존 자체가 숙제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착한 소비’를 촉구받는 건 공정한 일일까?”[각주:3]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소비 시장에서 누구나 품목을 선택할 순 있지만(윤리적 소비를 하려 할 수 있지만)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할 지 결정하는 기업주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자원을 배분하고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기호는 부분적 고려 사항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은 시장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쥐어짜고 산업안전이나 환경보호 등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나쁜’ 기업들은 이 ‘경쟁적 축적’ 과정[각주:4]의 필연적 산물이다.

윤리적 소비 운동가들이 대체로 대안으로 삼는 소생산자 경제도 이 시장 경쟁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도로 독점체들의 과점 시장으로 바뀔 것이다. 사실 소생산자나 소상인이, 또는 그 제품이 특별히 더 윤리적이라고 할 이론적 근거는 없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소비자는 바로 기업들이기도 하다. 기업의 투자가 수요를 창출한다. 원료(구입과 운송), 토지(또는 사무용빌딩, 물류창고 등의 부지 매입과 건축), 노동력 등을 구매하는 데 쓰는 비용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노동소득(임금)을 모두 합쳐도 총투자와 맞먹을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재에 대한 ‘소비 투표’가 기업권력을 통제하기에는 표가 애초부터 너무 적다. 

눈을 돌려 소비 시장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 거대 기업들의 이윤 활동은 전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활동에 의존한다. 이들의 노동은 자신의 임금몫 말고도 막대한 부를 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로서보다 생산자로서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 현대자동차 소비자 수백만 명을 모으는 것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4만 명이 파업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다[각주:5].

따라서 진정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소비’ 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이고, 그 주역은 원자화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이것만이 ‘나쁜’ 기업들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를 민주적 계획이 기초가 되는 사회로 바꿀 잠재력을 가진다. 

진심으로 기업 횡포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착한’ 소비에 머물지 말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이 투쟁에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글은 <레프트21> 42호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보충한 것이다.(그래서 간결한 속도감은 좀 줄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 운동은 세계무역부터 동네 소비까지 방대한 영역을 다루므로 짧은 칼럼에서 완벽히 다룰 순 없다. 그 점에서 이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논평할 계획이다. 우선, 이 기사의 부연 설명 글을 주말쯤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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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호품 공정무역은 또다른 중요한 논점을 낳는다. 제3세계 국가의 기호품 수출은 해당 지역 농업을 거대 농장의 단일 경작으로 바꿔 버렸고, 그것은 해당 지역의 식량 위기를 낳았다. 이런 식의 농업 구조 변화 때문에 커피 등 기호품 생산이 과잉돼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더 악화됐다. 이 플랜테이션 노예노동은 제국주의 수탈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기호품 공정무역은 이런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가격만 좀더 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잘못된 농업 구조를 영속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본문으로]
  2.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1950년대 뉴욕 빈민가 출신으로 스타벅스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자수성가 신화의 스타 CEO다. [본문으로]
  3. 김규항의 칼럼에서 이 구절이 가장 날카로운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4. 즉 자본주의 경쟁에서 소비재 판매는 부분적 본질이라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은 경쟁적 축적이다. 그래서 내부 시장이 금지됐던 소련 등에서도 자본주의 경쟁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5. 삼성을 두고 아직 이런 예시를 들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삼성 안팎에서 싸우는 모든 분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본문으로]
저작자표시 비영리 동일조건 (새창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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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0’ ― 왜 노동자운동이 희망인가?

생각 좀 해볼까 2010. 7. 19. 17:10


고대하던 ‘맑시즘2010’이 코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지난주엔 <한겨레>에 단신으로 행사 개최 소식이 실리기도 했습니다. 

행사 참가를 권유하거나 후원을 받으려 소개할 때, “맑시즘이 도대체 뭐냐”, “왜 맑시즘이라고 이름을 바꿨냐” 하고 물어보십니다. 아마도 한국에선 아직도 법적으로 껄끄러운 문제를 안고 있는 ‘맑시즘’을 행사 명칭으로 쓰는 게 신기하신가 봅니다.

워낙 유명한 연사들과 솔깃한 주제들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고 오래 된 행사기 때문에 단 한 명도 순전히 행사 이름 때문에 참가하기 싫다는 분은 보질 못했습니다.

올해는 2년 만에 잘 아는 한 노조에 찾아가 후원과 참가를 권유했는데요, 예전에는 그냥 후원해 주셨는데 이번에는 오랜만에 찾아가서인지 이것저것 물으시다가 “맑시즘을 한마디로 설명해 봐라” 하고 반농담 반진담으로 대답을 강요하시더군요.

저는 맑시즘=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서 노동자들이 집단적 힘으로 스스로 해방하자는 사상이라고 답했습니다.(그래서 진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소련과 북한을 사회주의로 볼 수 없다는 양념을 덧붙여서요)

마르크스주의가 자본주의를 분석해 위기의 메카니즘을 밝혀내려 노력하는 것은 단지 학술적(학문적 호기심) 동기에서만 그러는 게 아닙니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기해방이라는 이 근원적 목표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정치·경제적 잠재력을 파악해 이를 현실로 옮길 전략과 전술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 연구와 실천에 깔린 근원적 동기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늘 ‘실천에 도움이 되는 이론’, ‘이론에 바탕한 실천’을 추구하고, 그 이론은 수백 년 계급투쟁의 역사(경험을 일반화한 이론)와 오늘날 노동계급의 의식과 투쟁에 영향을 미치는 많은 쟁점을 다루는 생생하며 풍부한 사상과 실천의 전통입니다. 

그렇다면,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자들은 누구일까요. 마르크스주의에서 노동계급을 가장 넓게 정의할 때 기준은  ‘생계를 위해서는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쉽게 말해 인구 전체를 구분하는 것으로 노동자들의 가족까지 모두 포함되는 개념입니다.

이는 우리 사회의 압도다수를 차지합니다.
노동계급 가족의 일부로서 일자리를 구하는 사람(학생과 실업자), 다양한 이유로 노동력을 판매하는 게 어려운 사람(전업 주부와 아동, 노인, 일부 장애인, 차별 받는 소수자들 등)도 포함하니까요.

우리나라 노동자들을 1천5백만여 명으로 추산하는데, 이들에 가구당 평균 가족수 2.8명을 곱하면 4천2백만 명에 이릅니다. 물론, 이보다는 조금 못 미치겠죠, 부모자식이 모두 노동자인데, 자식이 아직 가구 독립을 하지 않았다면 중복계산이 될테니까요. 어쨌든 우리는 넓은 범위의 노동계급이 한국 같은 산업화된 사회에서 압도다수라는 건 대충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엄밀하게 보려면 좀더 좁혀 봐야 합니다. 실제 경제 활동에서 계급으로서 대립하는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실제로 마르크스가 분석한 계급투쟁의 실질적인 행위주체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생인 이건희의 손자가 직접 노동과정을 통제하고, 노조 탄압을 지휘하며, 정치권 로비를 하는 건 아니니까요. 

간단하게 이들의 구성을 경제활동인구로 파악할 수 있다고 보는데, 통계청 자료를 보면 그 수가 2천5백만 명 정도 됩니다. 이중 고위임직원이 30여만 명이고, 전문가로 분류되는 일부 상층 전문직을 제외하면, 1천5백만 명 정도가 임금노동자로 볼 수 있습니다. 이밖에도 자영업자가 4백만여 명, 농민이 2백만 명이 조금 못 되는 걸로 나타납니다.

자본주의에서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은 자본주의의 시작이자 끝인 기업 이윤 활동(생산과 판매, 유통)을 실제로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나옵니다. 이들이 이윤 활동을 멈출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산업 발전은 자본을 독점시키므로 노동자들도 집단으로 모여서 노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본질은 숫자가 아니라 그 힘에 있지만, 암튼 산업국가들에선 인구상으로도 다수파라는 거죠.(마르크스주의는 한국 같은 나라에서 매우 민주적인 사상인 겁니다~) 

암
튼, 노동자들의 경제적 힘은 주요 작업장이 파업을 할 때 잘 나타납니다. 현대차 공장에서 파업을 하면, 파업 참가자들의 파업기간 동안 임금 총액보다 수십수백 배 많은 돈이 손실을 봅니다[각주:1]. 철도 같은 운수노동자들이 파업을 하면  원료와 출근 노동자들 수송까지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칩니다.

파업 때 흔한 경제 손실 비난은 거꾸로 그 노동자들이 한국 경제에서 얼마나 큰 구실을 하는지 또 평소에 얼마나 많은 잉여노동을 기업주들에게 제공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노동자들은 조중동이나 정부가 이런 비난을 하면 앞으로 억울해 할 게 아니라 자랑스러워 해야 합니다. 그런 중요한 사람들에게 이따위 대접을 하냐고 큰소리 칠 일입니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개인으로는 이 힘을 발휘할 수 없고 노동과정의 집단성 때문에 집단으로만 이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노동계급으로서 이들이 정치권력을 잡고 경제질서를 바꿀 때 자본주의의 사적 성격을 분쇄하면서도 사회를 민주적으로 운영할 힘이 있는 겁니다.

그 결과, 노동계급은 자기 자신을 해방할 뿐 아니라 다른 피억압대중들을 해방시킵니다. 노동계급이 진지하게 자본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데 도전한다면, 그것은 자본주의에서 고통받는 모든 이들에게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노동계급을 “보편적” 계급이라고 불렀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면, 자본가들은 실제로 세상을 창조하는 일은 노동자들에게 다 시키면서 그 힘을 이용한 세상의 운영과 지배는 자신들이 독점합니다. 물론, 노동계급의 힘이 센 곳에서는 대의제 민주주의 형태로 조금 권력을 개방하기도 합니다. 물론 비혁명적 노동계급 진보정당들은 그 과정에서 많이 순하게 변합니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법과 제도, 군대와 경찰을 통한 억압과 함께 노동계급을 분열시키기 때문입니다.[각주:2]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노동계급(과 피억압대중)을 분열시켜 약화키는 각종 차별과 천대, 억압의 구조와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마찬가지로 이런 분열 시도에 맞서 노동계급을 단결시켜 혁명적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성공한 투쟁과 실패한 투쟁의 경험(조직과 이념)이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에는 녹아들어 있습니다.(노동계급을 억압하는 데 이용된 스탈린주의나 노동계급을 대신하려는 마오주의에서는 이런 교훈을 찾기 힘듭니다) 

추상적 가치나 원리가 아니라 살아있는 인간의 피와 땀이 얼룩진 역사 속에서 역사 발전의 일반적 경향을 찾아내려 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적’이라고 할 때 그것은 ‘이론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의 돌아보기는 그래서 이론(분석과 일반화)을 경시하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그 점에서 ‘맑시즘2010’의 많은 주제들이 당장 노동운동과 연관이 없어 보여도 사실은 노동계급이 삶과 투쟁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을 다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주의가 이럴진대, 맑시즘2010이 노동계급 문제를 중요하게 다룰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노동운동의 당면 과제들을 중요하게 다뤄야 합니다. 조직된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의 주역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진보포럼 맑시즘은 단순 학술행사가 아니므로 조직 노동운동과 그 안의 선진 활동가들이 하는 실천적 고민을 다루는 건 매우 중요합니다.

그래서 그동안 진보포럼 맑시즘에서는 노동운동의 쟁점 토론은 물론이고, 늘 당시 최전선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참가해 강연도 하고 연대의 장을 만들어 왔습니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 때는 비정규직 투쟁 사례 발표 토론이 인기를 끌었고, 행사 마지막 날엔 문화공연과 후원주점을 결합해 대형 행사를 치르기도 했습니다.

지난해엔 개막식에 쌍용차 가족대책위 대표가 눈물 쏙 빼는 연설을 해 주셨고, 참가자 가운데 신청을 받아 쌍용차 지원 집회를 다녀오기도 했구요, 2006년 개막식에는 KTX 비정규직 위원장이 감동적인 연설을 하셨습니다. 하종강, 김진숙 선생님들도 단골 인기 연사이십니다.

올해 맑시즘 2010도 다섯 개의 강연이 ‘노동계급과 투쟁’ 항목으로 준비돼 있습니다.(맑시즘2010 웹사이트의 연사/주제/시간표 메뉴에서 주제 소개로 들어가시오.)


김진숙·하종강 선생님의 강연은 무조건 추천입니다. 저도 여러번 강연을 들었는데요. 특히 세상을 더 많이 알고 싶은 초심자 분들께 특강추(특별강력추천)요. 다루는 대상에 애정이 넘치면 쓴소리도 달게 느껴집니다. 그게 생생함과 분명함과 더불어 두 분 강연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가슴을 열고 들으면 이 분들이 알아서 웃기고 울리고 합니다. 그래서 눈물콧물 흘리면서 듣다 보면 가슴에 묵직한 희망과 열정이 남습니다. 

정병호 씨가 다루는 주제도 마르크스의 계급이론을 알고 싶어하는 분들께는 매우 중요한 주제입니다. 앞에서 제가 수박겉핥기로 다룬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싶으신 분들께 추천합니다. 어조가 강약 변화가 적어 조금 졸리게 할 때도 있지만, 찬찬히 듣고 있으면 말 하나하나가 다 교과서입니다[각주:3]. 아주 가끔 섞어주는 농담과 그때 씨익 날리는 웃음이 매력적인 연사입니다.

나머지 두 주제는 좀더 전문적입니다. 당면 전략 과제들을 다루는 건데요[각주:4]. 패널 토론이라는 게 흥미로운 요소입니다. 노동운동의 전략 논쟁은 노동운동 안의 대표적인 급진좌파들이 모여서 하는 토론이라 흥미로울 듯합니다.

사노위를 대표하는 박성인 씨는 메이데이 출판사 대표도 했고 옛 <현장에서 미래를> 잡지에서 이론과 정세분석 글을 주로 쓰던 노련한 활동가이며, 박준형 씨는 공공노조의 활동가로 수년간 활동하고 계십니다. 전지윤 '님'은 무조건 추천[각주:5]입니다. 제가 볼 때 명료한 단어 선택이 정말 최곱니다.

다함께는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동안 정치적 노조운동을 당면 노동운동의 상(想)으로 제시해 왔는데, 이것이 사회진보연대의 사회운동적 노동조합운동론이나 사노위의 변혁적 노동운동론과 어떻게 다른지 비교하며 들어보는 게 토론의 포인트가 아닐까 합니다.

공공부문 선진화 관련 토론은 제목만 봐서는 따분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2008년 위기에 긴급 재정 투입으로 각국 정부들이 대응했기 때문에 재정 뒷받침으로 일어난 경기 회복과 정부의 재정 위기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부 재정위기와 밀접한 연관을 맺는 공공부문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 시대 매우 중요한 고리가 되고 있습니다. 경제위기와 노동운동을 결합해 고민하는 분들은 아마 피해가기 힘든 주제일 겁니다. 

조상수 씨와 정종남 씨는 공공부문 주제로 맑시즘에서 이미 패널토론을 한 적이 있는데, 조상수 씨는 공공부문 노동운동을 오랫동안 해 온 베테랑 활동가입니다. 정종남 씨는 쌍용차 파업 등에서 노동운동단체들과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으며 활동해 왔기 때문에 이론과 결부된 깊이있는 주제를 현장감 있고 흥미롭게 다룰 수 있는 능력자입니다. 

이 글을 흥미롭게 읽으신 분들이라면 맑시즘2010에서 새로운 만족을 얻을 거라 생각합니다. 맑시즘2010에 관심과 기대를 품고 오시는 분들이라면 그냥 그 장소에서 얼굴만 스쳐도 정겨운 동지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1.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바, 자본주의에서는 자본가가 노동자를 ‘착취’한다는 주장의 한 증거입니다. [본문으로]
  2. 사실 사병들과 말단 경찰은 대부분 노동계급 청년들에서 충원하므로 그 존재 자체가 노동계급의 분열을 상징한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한편에선 노동계급이 굴종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상품물신성 효과도 있다고 마르크스가 지적했는데, 중요하지만 그 자체로 너무 방대한 내용이므로 여기서는 그냥 패스~ [본문으로]
  3. 그래서 졸린가? [본문으로]
  4. 이 주제는 초심자들이 많이 선택하지 않을 듯하고, 초심자가 아닌 분들은 제가 뭐라 하든 신경 안 쓸테니 추천 글 쓰기가 좀 난처하군요. [본문으로]
  5. 사이에 ‘할 수밖에 없는 조건’을 넣어서 읽으시오. [본문으로]
저작자표시 비영리 동일조건 (새창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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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심이 세상을 움직이는가

생각 좀 해볼까 2009. 10. 9. 02:15
  
오늘 한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저보다 더 나이 어린 사람들과 하는 토론은 늘 흥미롭습니다. 세파에 찌들기 전이라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의심을 많이 합니다. 질문도 기발한 것이 많습니다.

오늘 주제는 마르크스주의로 본 경제위기라는 제목으로 최근의 상황이 경기회복인지 거품인지까지 다루는 꽤 방대한 주제였습니다.

어려운 주제라 그런지 토론이 활발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가한 학생 중 한 명이 흥미로운 주장을 했습니다.

대강 요약하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에 가장 부합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가장 오래된 주장이기도 하고 가장 흔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욕구 실현을 외면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체계적으로 가로막힌 상황을 바꾸려는 이론이자 전략입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토론에서 이런 질문이 흔히 나오는 것은 사회주의를 자처했던 체제들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이 나라들을 인용해 마르크스주의의 신용에 흠집을 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소련의 가짜 사회주의가 인민에게 절제와 일방적인 이타심을 강요한 것은 체제가 인민들에게 충분히 풍족하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그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 가짜 사회주의보다 서방 자본주의 경제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합니다.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정부 재정이 악화돼 복지 지출을 줄이면서도 국방비 지출은 늘어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 본질에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욕심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주장은 왜 자본주의에서 특정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이기적 탐욕은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어떤 사람들은 기본적 욕구마저 무시당하고 심한 경우, 강제로 억압당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업 수익성이 줄어 투자처가 마땅하지 않은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득이 줄었기 때문에 세금을 깎아줘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합니다. 그러나 그 세금이 깎인 것 때문에 25만 명의 결식 아동이 방학 중에 급식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월가의 탐욕스런 금융자본가들의 파생상품 투자가 왜 한때는 경제의 구원자였다가 지금은 저주 받을 행위가 됐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업과 부자들이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고 이를 독차지하는 반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재산 가치가 폭락하는 손해를 보고 심지어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사정은 어떻습니까.

이처럼 자본주의는 경제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욕심은 구조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하고 억압합니다. 어느 계급 소속이냐에 따라 어떤 이들의 욕심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칩니다.

인간의 욕심 이론은 이처럼 아무것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단지 자본가들이 자기 탐욕을 정당화하려고 내놓은 변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론자들에게 왜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이기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본래 이기적이니까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한 해에도 수만 명의 신입생들을 받는 주류 경제학은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 활동의 기본 동력이라는 이 엉터리 공리에 바탕한 학문을 가르칩니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늘 변함 없었는데, 왜 인류 역사의 3분의 2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사회였을까요. 

그게 당시 인류의 잠재적 생산능력의 수준에 부합했기 때문이죠. 생산성이 너무 낮아 협력해 수렵과 채집을 해야 했고, 공동으로 식량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자본주의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생산 능력을 혁신했지만, 자기 모순 때문에 그 생산 능력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주기적인 경제 공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생산과 분배에 필요한 핵심 요소들은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료도, 기계도, 공장도, 일할 사람도 그대로 있습니다. 부족한 건 기업의 이윤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이윤이라는 기름칠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란 체제는 영원불멸의 체제가 아니라 특정한 생산력 수준 하에서 이뤄졌던 일시적 체제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적 수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기본적 욕구는커녕 생존을 위협하는 체제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마르크스가 경고한 것보다 더 위험한 세상이 됐습니다.

지구를 서른 번이나 없앨 수 있는 핵폭탄을 품에 안고서 평화를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광기어린 체제입니다.

한때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던 석유 관련 기업들은 무작위한 CO2 배출이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미쳐 인류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데도 당장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CO2 배출을 억제하지 않습니다.

적게 투자해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식품기업의 탐욕은 광우병이라는 재앙적인 질병을 만들어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경제이론은 이런 광란의 경제 체제의 탄생과 변화, 실상을 어느 이론보다 훨씬 더 일관되게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게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이 제 답변을 듣고 어떤 고민을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학생은 토론이 끝나고 나서 자신은 상위 20퍼센트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평범한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가 자본주의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할 확률을 반반으로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바꾸는 실천이 성공할 확률도 반반입니다.

확률이 같다면, 더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쪽에 서는 게 낳지 않을까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말입니다. 제가 볼 때 이건 로또보다는 훨씬 확률 높은 베팅입니다.


저작자표시 비영리 동일조건 (새창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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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 인간이 만든 세상, 인간이 바꾸지 못할 이유가 없다.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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