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가을에 〈경향신문〉은 “아래로부터의 공안정국”이라는 주제로 진보적 지식인들과 활동가들을 의견들을 모아 보도했다.
그 기사에서 당시 한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국정원 일방이 아니라 민간이 동조해 자가 발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 사회가 맞는 초유의 상황 … 점점 더 경직된 사회로 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대중이 자발적으로 보수화한 것은 아닐지라도 전통적인 우익 지배자들의 전통적 지배 무기인 레드컴플렉스가 대중에게 먹히고 있다는 얘기였다.
이밖에도 그 기사에서는 “민주화 이후 스스로를 정립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약점을 국정원이 잘 파고들어, 정부 선전이 먹히고 종북세력에 대한 반감이 퍼지게 된 것”이라거나 “일반 시민들이 권력기관의 공안몰이에 자발적으로 반응하는 게 특이한 모습”이라는 몇몇 교수들의 견해들을 전했다.
이명박 정부를 지내고도 또 박근혜가 대선에서 이기자 진보 활동가들 사이에서조차 “아래로부터의 공안정국” 같은 비관적 담론이 유행하기도 했다. 일부 '여론조사'는 이런 담론을 뒷받침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얼마 뒤 철도노조 파업이 사회적 파급력을 보이며 박근혜에게 첫 위기를 안겼고, 3년 뒤에는 거대한 정권 퇴진 운동이 일어나 이런 비관주의가 완전히 틀렸음이 현실에서 입증됐다.
그리고 최근 박근혜 정부만이 아니라 이명박 정부에서도 청와대-국가정보원이 컨트롤타워 구실을 한 범정부 차원의 정치 공작과 블랙리스트 통치가 자행됐음이 연일 폭로되고 있다. 두 새누리당 정부가 한 짓이 너무 비슷해 특종 뉴스들의 앞머리만 가리고 보면, 이게 박근혜 정부 아래서 벌인 일인지, 이명박 정부가 벌인 일인지 헷갈릴 정도다.
결국 이명박 후반과 박근혜 초반 여론조차 대중의 보수화가 아니라 총체적 국가기관의 정치 공작(여론 조작 포함)이 주된 요인이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이명박에서 박근혜로
이명박이 블랙리스트 통치를 했음이 처음 폭로된 건 아니다. 2008년 광우병 촛불 운동 이후에 광우병대책회의 지도부 수배·구속,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구속, MBC <PD수첩> 수사, 집회·시위의 불허와 참가자 구속, 초강경 진압으로 인한 용산 철거민 참사, 민주노총과 다함께(노동자연대의 당시 이름) 등 좌파 단체들에 대한 사찰과 탄압 등등.
게다가 이미 “이명박의 남자” 원세훈이 국정원장으로 있으면서 “원장님 말씀”을 통해 심리전단을 운영하며 인터넷 여론 공작과 대선 개입 등을 실행한 사건은 재판으로까지 넘겨졌고, 최근 2심에서 국정원법과 선거법 모두 유죄를 받고 법정구속됐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관실을 통한 민간인 사찰 사건도 폭로된 바 있다. 당시 국무총리실 장진수 주무관의 내부 폭로가 큰 구실을 했다.
그럼에도 최근의 폭로는 두 가지가 특징적이다. 당시 국가기관이 총체적으로 동원됐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이명박 정부의 공작과 박근혜 정부의 공작 사이에 연속성이 있다는 점이다.
가령, YTN은 2012년 대선에 군 사이버사령부가 개입한 사실을 당시 국방장관 김관진과 이명박이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특종 보도했다. 2014년에 군 당국이 수사하면서 이를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군의 정치 공작 개입을 지휘한 국방장관 김관진은 박근혜 정부에서도 청와대 안보실장을 지냈다. 심리전을 사실상 지휘한 초대 사이버사령관 연제욱은 박근혜 청와대의 국방비서관이 됐다.
이명박과 박근혜는 티격태격 대다가 새누리당 정권 재창출을 위해 동맹을 하고 국가기관의 총체적 정치 공작 개입을 지시·묵인·은폐한 것이다. 이명박이 박근혜를 밀어 주고, 박근혜는 집권 후 이명박을 보호해 준 것이다. 이 둘을 묶어 준 것은 경제·안보 위기에 대처하는 지배계급의 이익이었을 것이다.
두 정부는 정치인은 물론이고, 진보·좌파 활동가, 언론인, 심지어 연예인에게까지 범정부 차원의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
그리고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을 방송이나 언론 등에 못 나오게 하거나, 진행·제작하던 프로그램에서 쫓아냈다. 가짜 온라인 뉴스, 댓글 등을 퍼나르며 해당 인사들의 평판을 떨어뜨렸다. 그리고 해당 인사의 SNS에 직접 댓글들을 달며 지속적으로 괴롭히고 고통을 줬다.
가령 2011년 국정원 문건은 MBC <PD수첩>의 최승호 PD가 보직에서 쫓겨난 것을 “핵심 성과”라고 보고했다. 2008년 촛불 때 “고대녀”로 유명해진 김지윤 씨의 경우에도 북한 인민군복을 입힌 합성 사진이 돌아다니는 등 조직적 온라인 괴롭힘을 당했다.
〈한겨레〉 단독 보도에 따르면, 국정원은 군 사이버사령부 심리전단 요원들에게 1인당 25만 원을 책정했다. 당연히 매우 세부적인 지시와 할당이 내려졌다. 가령 “댓글 1개당 625원” 식이다. 이를 계산하면, “한 달에 최소 댓글 1만 1520개, 블로그 포스팅 1200건, 트위터 1만 5840건의 댓글 공작이 벌어진 셈[이다.]”
이조차 빙산의 일각임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가령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화이트리스트도 운영했다. 블랙리스트와 달리, 정보를 제공하고 재정을 지원하는 등 정부가 우익 인사와 단체, 매체를 후원하고 육성한 것이다. 여기에는 이른바 넷우익만이 아니라 아스팔트 우파도 포함됐다.
그중 일부는 비례 국회의원으로까지 발탁하며 활용했다. ‘청년이 만드는 세상’이라는 우익 청년단체 대표를 맡아 청년 세대의 반새누리당 정서에 도전하는 데 이용된 현 자유한국당 의원 신보라가 그 사례다. 신보라가 활동한 단체, 〈미디어워치〉라는 형편없는 우익 매체와 변희재, 엄마부대의 주옥순 등이 모두 이 화이트리스트 멤버들이다. 주옥순은 최근 자유한국당의 간부로 임명됐다.
박근혜 청와대의 행정관 허현준이 태극기 집회 후원 등을 한 연결고리였다. 허현준의 출신 단체 ‘시대정신’이 입주한 건물에는 바이트, 청소년통일문화, 청년이 만드는 세상, 청년리더양성센터, 북한인권학생연대,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월드피스자유연합 등이 모두 있었다. 이 단체 사무실들과 신보라, 허현준 등은 모두 26일에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았다.
두 정부를 잇는 이 모든 행태들의 공통점은 우파의 장기 집권만이 아니라 그것을 위해 진보·좌파적 목소리를 차단하고 대중을 온갖 우익적 편견으로 분열시키려는 수작이었다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의 위기와 구 여권 수사
최근 문재인의 청와대는 자중지란을 겪었다. 국방장관 송영무가 청와대 외교안보통일 특보 문정인에 “학자 입장에서 떠드는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물론 둘의 공방은 일방적인 건 아니다. 송영무가 김정은 참수부대 운운한 것에 문정인이 공개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자, 문재인 정부는 급속히 우파와 다를 바 없는 호전적 언사를 쏟아 냈다. 사드 발사대 추가 배치, 이를 위한 경찰 폭력 진압 등 지지층의 여론과도 배치되게 행동했다. 미사일 탄두 중량 해제도 트럼프와 합의했다.
9월 23일 미군의 장거리 전략폭격기 B-1B 2대가 NLL을 넘어 비행을 해 위험천만한 상황이 발생했다. 국내에서는 한국 측에 사전 통보 없이 벌어진 일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정작 문재인은 (유엔총회 참석차 방문한) 미국에서 귀국하기 전에 미국 정부와 조율한 것이라고 무마했다.
이런 행보는 촛불정부를 자임한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지정학적 위기로 자유주의 정부의 입지가 협소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국에서도 불신받는 트럼프와 그렇게 찰떡궁합을 과시할 이유까진 없었다. 한마디로 문재인 정부의 최근 우경적 행보는 문재인 자신의 선택이기도 하다.
전교조·공무원노조 인정 등 해결해야 할 노동 적폐가 남았는데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 등 양심수 석방 같은 민주적 권리의 회복조차 감감무소식이다. 의료 산업화를 추진한 박기영이나 뉴라이트와 연관된 박성진 등을 장관급으로 임명하려 한 것도 불만을 샀다.
결국 촛불과 지지층의 염원을 멀리하고 우파의 어젠다를 받아들인 결과, 우파의 기가 살아났다. 그 상징적 사건 하나가 김이수 헌법재판소장 임명 부결이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문재인 정부는 쉬운 해고 등 박근혜의 노동개악 지침을 최근 철회했다. 그러나 박근혜 정권 퇴진 운동의 도화선이 된 것이 바로 이 노동개악에 저항하는 노동자들의 투쟁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일 뿐이다.
오히려 명령만 하면 되는 행정지침 철회를 대통령 취임 후 넉 달 만에야, 노동부장관 임명 후에도 한 달 반이 지나서야 한 것은 문재인 정부의 우선순위에 노동계급을 위한 민주적 권리 회복이나 친노동 개혁이 있지는 않다는 걸 보여 준다.
그나마 공공부문 임금체계의 성과연봉제 도입을 철회했지만, 문재인 정부는 직무성과급을 대안으로 내놨다.
이런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적폐 청산”을 강력하게 들고 나온 것이다. 검찰총장 임명 후 두 달이 지난 시점이니, 검찰 내 인사 정비가 어느 정도 된 것이 반영된 조처일 것이다.
박근혜와 이명박의 정치 공작만이 아니라 부패 혐의까지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 이미 7월에 감사원이 방위사업청과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의 비리를 발표하고 검찰에 수사를 의뢰한 바 있다.
구 여권의 부패와 반민주적 정치 공작들은 모두 철저히 파헤쳐 엄벌에 처해야 한다. 그것들은 공식정치에서의 정적 제거나 언론 통제만이 아니라 노동계급의 저항 운동의 예봉을 꺾는 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에서, 문재인의 구여권 청산 행보는 지지층 내 균열이라는 정치적 위기를 극복하는 수단으로 보인다. 노동계급 대중 사이에서 문재인의 오락가락 행보를 의심하는 마음이 서서히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안보 위기 속에서도 우파의 압력만 고려할 수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대중적 증오의 표적이 된 이명박과 박근혜의 부패를 다루는 것은 대중의 불만만 달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국회에서 협조하지 않는 구여권 야당들에 대한 압박이기도 하다.
그런데 촛불 대중이 강력하게 요구한 적폐 청산은 단지 구 여권의 불법 부패 행위로 환원될 수 없다.
또한 이명박과 박근혜의 정치·경제적 부패 수사 과정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또는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부패가 드러날 수도 있다. 그들도 지배계급 안에 기반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문재인 정부가 내년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를 삭감하지 않은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실제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대선 개입과 민간인 사찰 수사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노동운동 사찰 사실이 폭로되기도 했다. 아마 그런 일들이 민주당이 당시에 여권을 더 압박하지 않은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박근혜와 구 여권의 범정부적 정치 공작은 노동자·민중 운동의 민주적 권리를 명백하게 공격하고 위축시키려는 것이었다. 그것을 통해 운동을 분열시키고 좌파를 고립시키는 것은 경제·안보 위기 속에서 고조될지도 모르는 투쟁과 좌파의 성장을 사전에 예방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가재는 게 편이라고 문재인 정부가 정적 숙청 이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리라고 마냥 기대할 수는 없다. 박근혜 퇴진 운동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헌법이 보장한 권리조차도 노동계급 대중의 힘으로만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 줬다. 이것이 문재인 정부 아래서 개혁을 추구하는 자세가 돼야 한다.
반체제 저항의 성장을 막으려는 일상적 전쟁
“심리전”은 전시에 적국의 병사와 국민들을 교란해 사기를 떨어뜨리는 전쟁의 한 수단이다.
일상적 시기에도 경쟁국 간에 저강도 전쟁은 계속된다. 냉전 때를 생각해 보면 된다. 심리전은 국가정보기관들이 주로 수행하며, 전시가 아니므로 비밀스럽게 수행된다. 냉전 시기에 CIA가 운영한 “자유 유럽 방송”이나 “미국의 소리”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국가정보학에서는 이런 활동을 “비밀 공작”이라고 부른다. 비밀공작은 “선전 공작”과 “정치 공작”으로 구분된다. 심리전은 선전 공작을 달리 부르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이 중 한 형태인 ‘흑색 선전’은 요즘 말로 하면 “가짜 뉴스”라고 할 수 있다. 김지윤 씨에게 북한군 군복을 입한 사진을 군이 만들어 유포한 것이 전형적인 사례다.
“정치 공작”은 적국의 정치인이나 관료, 언론인 등을 상대로 한 매수·로비·후원·여론·암살·쿠데타 등의 방식을 통해 상대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블랙리스트들을 자리에서 쫓아내거나, 화이트리스트를 통해 우익 단체들을 지원하고 집회를 열도록 한 일들이 바로 정치 공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명박·박근혜 정부는 아주 노골적으로 범정부적 차원에서 민간을 상대로 비밀 공작을 총체적으로 벌인 것이다.
국가정보원·군부·공영방송 등 국가기관이 총체적으로 개입해 벌인 사찰과 공작, 괴롭힘은 선출된 정부가 국민을 상대로 저강도 전쟁을 벌인 것이나 다름없다.
물론 이 사회는 계급 사회이므로 이는 놀랄 일은 아니다. 자유민주주의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도 2001년 9·11 테러를 핑계로 부시 정부가 애국자법을 제정해 진보 인사와 매체들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공공연하게 늘렸다. 저명한 좌파 역사학자 하워드 진도 미국 CIA가 자신에 대한 수십 년치 사찰 파일을 갖고 있다고 한 바 있다.
문재인 정부도 이런 자본주의 국가의 억압적 기능을 거부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8월 28일 감사원 발표를 보면, 문재인이 정부의 특수활동비를 줄이라고 지시해 내년 19개 기관에서 특수활동비 718억 원이 삭감됐지만, 국정원의 특수활동비는 손대지 않았다.
따라서 총체적 정치 공작 문제를 단순히 우파 정부의 적폐 문제로만 봐서는 안 된다. 이런 문제를 근본에서 없애려면 노동자 민주주의, 즉 노동자 권력이 기성의 억압적 자본주의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