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사 ‘해편’이 개혁?보안경찰다운 위장술에 불과하다
9월 1일 국군기무사령부가 군사안보지원사령부로 이름을 바꿔서 출범했다. 인력도 축소하고 민간인 사찰, 정치 개입 등도 억제하겠다고 했다.
박근혜 정권 연장을 위한 촛불운동 무력 진압 모의를 기무사가 주도한 것이 폭로됐기 때문이다. 세월호 유가족 사찰, 쌍용차 해고 반대 파업장 침투 등 민간인 사찰 작태도 연이어 폭로됐다.
사실 군의 정치적 중립, 정치 개입 방지는 쿠데타로 집권한 과거 군사정권도 하던 말이었다. 물론 자기들이 정권을 잡고 있을 때는 자기 흉내를 내는 군인들이 없어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말이다. 그들도 장관, 국회의원, 공기업 사장 등의 자리에 앉을 때는 군복 벗고 민간인 신분으로 그랬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현역 기무부대가 민간인을 뒤지고 체포해 고문하는 일이 사라지진 않았다.
말이 아니라 행동을, 외관이 아니라 그 이면의 본질을 봐야 한다.
이번 개편은 문재인이 8월 초 직접 기무사 ‘해편’을 지시한 데 따른 것이다. 해편은 국어사전에도 없는 단어인데, 청와대는 ‘해체에 가까운 개편’이라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본질의 존속인 것이다. 기무사의 계엄령 준비 문건을 폭로한 군인권센터나 기무사 해체를 주장해 온 민주노총, 참여연대 등은 8월 14일 합동으로 “군사안보지원사령부는 기무사와 다를 것이 없다”며 이번 기무사 개혁을 “실패”라고 규정했다. 즉,
“법령이 부여하는 임무와 목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기무사가 민간인 사찰의 명분으로 들먹이던 ‘군 관련 정보 수집’ 항목도 그대로 존재하고, 불법 행위의 근간이 된 대공수사권에 대한 조정도 전혀 고려되지 않았다.”
한마디로 간판만 바꿔 달았다는 것이다. 나름 보안 수사·첩보 기관다운 위장술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인력 축소의 경우를 보자. 축소분 대부분은 인력의 자연 감소분(산하 사병 전역시 보충 안 함)이라서 언제든 다시 늘릴 수 있다. 일부 고위직은 계엄 논의나 세월호 등 민간인 사찰 등에 연루돼 어차피 옷을 벗어야 한다.
민간인 사찰과 연결되는 대공수사권 등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는 비판을 의식해서인지, 국방부는 민간인 수사권 중 남북교류협력법 위반이나 집시법 위반 부분은 ‘군사법원법’을 개정해서 폐지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조차 턱없이 미흡하고 기만적이다. 기무사(전신인 특무대, 보안사를 포함해)는 원래 민간인을 감시하고 수사하면 안 되는 것이다. 1990년 10월 보안사령부에 근무하던 윤석양 씨(당시 이등병)가 민간인 사찰 실태와 명단 일부를 폭로했을 때도 민간인 사찰은 불법이었다. 당시 일부만 공개된 사찰 명단에는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 이후 대통령이 되는 정치인들도 포함돼 있었고, 주로 야당·재야 인사들이었다.
그 명단이 1989년에 만든 청명계획이라는 계엄 대비(모의) 계획의 일부(예비 검속)였다는 건 나중에 밝혀졌다. 이번에 드러난 촛불 계엄 문건에서 국회의 계엄 해제를 막도록 야당 의원들을 미리 체포하려고 한 것과 같다. 1989년 당시에도 군부는 민주화 흐름을 반동적으로 뒤엎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노동자 투쟁의 고조기가 1987년 그해 몇달로 끝나지 않고 수년간 이어지면서 민주화가 대세로 자리잡았다.
이 흐름 속에서 폭로됐기 때문에 노태우 정부는 국방장관 사퇴, 이듬해 보안사 명칭 변경(기무사) 등으로 양보를 해야 했다. 보안사의 사찰 명단에 있던 김영삼은 집권하고 나서 안전기획부(옛 국정원)의 수사권을 축소하는 법 개정도 했다.
그러나 김영삼 본인이 경제 공황을 앞두고 안기부 수사권을 되돌리는 날치기를 했다. 기무사의 수사 관행도 바뀌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JTBC의 탐사보도 프로그램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26년 경력의 기무사 수사관이 제보자로 나왔다. 그는 윤석양 씨의 폭로 당시 상부 지침이 ‘민간인 수사를 하지 마라’가 아니고 ‘군(인) 관련성을 집어넣어서 하라’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이런 과거가 있는데도, 안보지원사를 먼저 출범시켜 놓고 수사권 축소는 향후 국회에서 한다는 것이니 어음으로 치면 불량 어음이나 다름없는 듯하다. 문재인이 국회로 미루고 외면해 버린 적폐 청산 과제가 한둘도 아니니 더욱 그렇다.
한때 전두환 군사정권 출범의 사령탑 구실을 했고, 안기부, 경찰 보안수사대 등과 찰떡 공조로(뒤로는 치열한 실적 경쟁을 하면서 말이다) ‘빨갱이’ 사냥을 하던 군사기관의 억압적 성격을 위축시키는 것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세월호 구조를 방기하고 실패한 책임에 대해 집중 조사받아야 할 해경을 박근혜가 해체해 버린 일이 떠오른다. 형식상 기구가 해체됐으니 적어도 해경 대상 수사에는 도움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박정희 군부 독재가 만든 중앙정보부가 그동안 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을 바꿔 왔지만, 지난 정부 동안 본질은 바뀐 게 없다는 게 드러났다. ‘안기부 X파일’ 간첩 조작, 쌍용차 개입, 세월호 개입, 대선 댓글 공작 등은 모두 선출된 민간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일들이다.
예상대로 박근혜와 군부는 퇴진 촛불 운동 초기부터 무력 진압을 고민했다. 가장 최근에는 기무사령관이 촛불 시위 초기부터 탄핵 당일까지도 박근혜 청와대를 들락거리며 소통한 일이 드러났다.
1987년 이후 최대 규모의 정권 퇴진 운동에 맞서 자기 선배들처럼 친위 쿠데타 모의를 주도했던 것이다.(1987년의 선배들처럼 힘에 밀려 거사를 포기해야 했다.)
이런 역사와 현실은 이 핵심 억압 기구들의 임무가 기존 국가를 아래로부터의 저항과 변화(개혁), 혁명적 도전으로부터 지켜내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필요할 때 반동적 거사를 일격에 성공하려면 이들의 일상도 그것을 위한 준비에 맞춰질 수밖에 없다. 그들이 지키려는 체제가 사라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니 자본주의적 민주주의가 자리잡은 일상적 시기에도 유사시를 대비한 준비와 훈련으로서 민간인 사찰과 수사 등의 임무를 포기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기구들 때문에라도 개혁가들이 몇몇 요직에 진출해 국가의 성격을 노동자·서민을 위한 개혁을 위해 바꿀 수가 없다. 아래로부터의 투쟁만이 국가를 움직이게 할 수 있고, 그조차도 어느 수위가 되면 이런 억압 기구들이 반동적으로 작동하게 마련이다(촛불과 친위 쿠데타 음모처럼). 자본주의적 국가의 민주화라는 신기루를 좇기보다는 운동 속에서 혁명의 현실성을 바탕으로 주장하고 실천하는 정치조직이 필요하다.
기무사의 반동적 역사와 실태
기무사는 미군정청 국방사령부의 정보과를 모태로 한다. 이 기구의 성격은 분단이 굳어진 1948년 대한민국 건국 후 군 내부 (반反이승만이나 좌익 성향 군인) 숙청을 담당할 육군본부 정보국 특별조사대와 방첩대로 이어지면서 확고해졌다.
권한과 기능, 실태·행태들에서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확대·개편된 특무부대(CIC)를 실질적 효시로 봐도 될 것이다. 특무대는 전시 민간인 학살(남한 전역에 걸친 보도연맹 학살 등), 정치 공작 개입(경남 산청·거창 등 민간인 학살 진상 은폐 공작 등) 등으로 워낙 악명 높아서 1960년 4월 혁명 이후에 새 정부 하에서 이름을 방첩부대(간첩만 잡는 부대라는 의미로)로 바꿔야 했다. 만주에서 독립군을 소탕하는 일본군의 앞잡이 노릇하던 김창룡이 이 특무대장을 지냈다.
1977년 육해공의 방첩 부대가 통합돼 오늘날 기무사인 국군보안사령부가 출범했다. 1979년에 박정희를 살해한 걸로 오늘날 유명한 김재규가 통합 전 육군 보안사령관을 지냈고, 이후 전두환, 노태우가 1979년에서 1981년까지 연달아 사령관을 지낸 걸 봐도 군부 실권자들의 억압 기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79년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 될 때 박정희는 자신의 유고시 중앙정보부 등 각종 정보기관을 통합 지휘할 권한을 보안사령관이 가지도록 해 놓았다.(그 덕분에 전두환은 신속하게 상황을 파악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체포할 수 있었고 수장이 체포된 중앙정보부 기구를 통제할 수 있었다.)
전두환·노태우가 정권을 잡은 뒤 보안사령관은 하나회 심복들이 주로 임명됐다. 광주항쟁 진압에 출동한 20사단장 박준병도 노태우 후임으로 보안사령관을 지냈다. 김영삼은 하나회 숙청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군 기반이 취약한 김대중은 군내 비주류인 호남 출신들을, 이명박은 TK 출신을 썼다. 박근혜는 자신의 친동생 박지만의 육사 동기이자 절친인 이재수를 기무사령관으로 임명했었다. 노무현은 군 인사에 적극 개입하지 못했던 것 같다. 기무사만이 아니라 노무현 때 군 요직을 맡았던 인물들은 훗날 박근혜 정부에서 중용된다.(김장수, 김관진, 남재준 등)
보안사는 군사 독재 시절에 중정·안기부 못지 않은 권력을 휘둘렀다. 민간인 수사는 기본이었다. 도청, 미행은 물론 열쇠를 따는 전문가까지 뒀다. 대학가에 보안사가 운영하는 술집을 낼 정도였다.(서울대 ‘모비딕’ 호프) JTBC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에 출연한 기무사 수사관은 항상 출발은 민간인 수사(내사)라고 인정했다.
그리고 이들은 사찰 단계에서 이미 기소할 혐의와 줄거리를 다 짜놓는다. 수사 과정은 혐의자가 이를 인정하게 하는 단계다. 고문이 필요한 이유다. 그리고 기소 단계에는 안기부(국정원), 검찰, 경찰이 모두 팀으로 협조하고 재판 단계로 가면 민간인의 경우 기무사는 빠진다는 것이다.
보안사 민간인 사찰을 폭로한 윤석양 씨는 학생운동 활동 중에 입대했다가 보안사(그 유명한 서빙고분실)에 끌려갔다. 고문 협박에 공포를 느끼고 학생운동 동료들의 명단을 넘기고 프락치(밀정)의 일원으로 일하게 됐다가 일부 문서를 들고 탈영해 폭로했던 것이다.
윤 씨는 “서빙고 분실에 의자가 있는데, [수사관들이] ‘의자 버튼을 누르면 그 의자 밑에 있는 바닥이 열리면서 한강으로 연결된다’고 협박했다”고 했다. 쥐도새도 모르게 죽어나갈 수 있다는 협박이었던 것이다.
재일교포 유학생으로 전두환 시절 보안사에 체포돼 (서빙고분실에서) 고문과 협박을 받아 유학생 간첩단으로 조작됐던 김병진 씨의 증언과도 일치한다. 그의 증언은 1985년에 출간·절판됐다가 2013년에 새로 나왔다.(《보안사 - 어느 조작 간첩의 보안사 근무기》, 김병진, 이매진, 2013)
김병진 씨는 간첩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구속 대신 보안사에 특채돼 수사 보조로 근무해야 했다. 그의 증언은 당시 보안사가 어떻게 민간인을 사찰하고 (특히 취약한 재일교포 모국 유학생을 상대로) 간첩을 맘 먹고 조작하는지를 구체적으로 잘 묘사했다.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는 김대중 집권기에도 비슷한 간첩 조작 사건들이 벌어졌고, 심지어 간첩 제보자가 간첩 혐의 유도까지 했다고 보도했다.
최근에는 ‘백야 사업’이란 이름으로 현역 병사들 중 2011년 반값 등록금 시위, 2014~15년 세월호 시위 등에 참가했던 이들을 감시하고 내사한 일도 폭로됐다. JTBC에 제보했던 기무사 수사관도 시위 전력자는 A급, 학생 임원은 B급, SNS 유저가 C급 정도로 분류된다고 증언했다.
징병제인 나라에서 사병들의 입대 전 활동을 체계적으로 감시하는 것도 크게 보아 민간인 사찰이다. 그러나 노무현 때 기무사령관 김영한은 2006년 국회에서 사병 사찰은 적극 인정했다. “지금은 이적단체 가입경력자들도 군에 들어오고 있다. 이들에 대해 평소에도 감시하고 있다. ... 대략 수백 명 되는데, 군내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소수다. 이들은 검찰에 넘기고 있는데 2000년부터 지금까지 20여 명 정도다.”
2009년 쌍용차 점거 파업 때도 기무사 요원들은 국정원과 함께 공장 내 침투, 공장 밖 연대 활동 감시 등을 했다. 당시에 평택역에서 연대 집회를 감시하던 기무사 대위가 집회 참가자들에게 발각되기도 했는데, 그는 쌍용차 투쟁에 연대한 민주노동당 당원들을 사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기무사·국정원 연합팀이 공장 안까지 들어간 건 이번에 새로 드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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