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가 5월 6일 3차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합의문에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와 정책과제 20개가 담겼다. 주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 ‘민영화 반대’와 ‘보편적 복지’ 등 진보적 요구를 담고 있는데, 진보적 사회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흔쾌히 지지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합의문 원안에 있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라는 문구가 최종 논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의 삭제 요구를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와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 등이 수용한 것이다.
시민회의는 이 회의에서 “자본주의 극복”을 빼고 “자본주의 폐해 극복”을 넣자고 했다고 한다.
시민회의는 국민참여당을 진보진영
연석회의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자본주의 극복” 문구가 보수 언론에 이용될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고 한다.
결국 시민회의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 참가에 부담스러워 할 ‘너무 센’ 문구를 삭제하자고 한 듯하다. 명백히 오른쪽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 1
이처럼 개혁적이지만 친자본주의적 한계가 있는 정당까지 통합의 대상으로 삼으며 “자본주의 극복” 문구를 합의문에서 삭제한 것은 명백한 후퇴다. 2
물론 새로운 진보정당이 폭넓은
단결을 목표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중요한 진보적 가치가 훼손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극복’ 문구 삭제는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후퇴다
첫째, 상징적인 의미에서 후퇴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 문구는 연석회의 참가 단체들의 집행 책임자 회의에서 ‘다수안’으로 채택된 것이며, 이 잠정합의안은 이미 공개된 바 있다.
이 문구가 다수안이 됐던 것은 이미 기존 진보정당들이 이미 ‘자본주의 극복’을 기존 강령에 상징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을, 진보신당은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둘째, ‘반자본주의’라는 시대적 과제에도 안 맞다 3.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각해 지면서 도처에서 민중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
각국 지배자들이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려는 시도는 경제 위기에 책임이 있는 기업주들을 살리는 대신 세계적 물가인상과 복지
삭감, 실업 증가와 대중의 소득 축소를 낳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불러 온 전쟁과 핵 공포, 기후 변화의 위협은 또 어떤가.
이런 위기를 배경으로 중동에선 친제국주의적이며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민중 혁명이 터져 나왔다.
이처럼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더더욱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삭제한 것은 후퇴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이번 3차 합의문에 포함된 “토지 사회화”, ”보편적 복지” 등을 실현하려면 다소간 모호하더라도 모종의 반자본주의 목표와 수단을 진보진영이 채택해야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3차 합의문에서 추상적이나마 반자본주의 가치 지향을 담은 표현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진보진영 연석회의 3차 합의문 채택 과정은 진보대통합을 민주대연합의 부속물로 여기는 노선이 진보대통합을 우경화로 이끌어갈 위험성을 보여 줬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진보진영 지도자들 다수가 실제로는 ‘포괄적인 야권 연대와 연립 정부’를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급진적 가치를 문서화하는 데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올초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 삭제 시도 등도 같은 맥락이다.
그 점에서 연석회의에 참여한 진보교연, 사회진보연대(참관) 등 좌파들에게도 아쉬움이 생긴다.
시민회의가 제시한 “자본주의 극복” 대신 “자본주의 폐해 극복”을 넣자는 안이 다수의 지지를 받자, 좌파들은 “자본주의 폐해 극복”은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안 넣으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그래서 둘 다 빼고 “새로운 대안사회”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자본주의 극복”을 유지하도록 일관되게 주장하고 설득하는 것이 첫째로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힘든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폐해 극복”이라도 반영되도록 하는 게 더 적절했다고 본다.
대안사회라는 표현은 너무 모호해 지칭하는 바가 없다. “자본주의 폐해 극복”이 원안에서 후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반자본주의 지향을 담은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석회의 안의 좌파는 필요한 논쟁은 회피하고, 타협해도 될 문제는 과도하게 대응한 듯하다.
지금 3차 합의문을 두고 연석회의 참가 단체 중 사회당만 4차 합의문 작성 과정에서 “자본주의 극복” 문구 문제를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종합의문에서 또다시 불필요한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대의 요구’인 반자본주의 가치가 반영돼야 한다.
그러려면 연석회의는 다함께 같은 급진좌파들의 참가를 가로막지 말고, 논의를 개방해야 한다.
한편, 이번 3차 합의문은 진보신당과 사회당 등의 요구대로 북한의 핵개발과 3대 세습, 2012년 대선 방침, 패권주의 등 민주적 당 운영 등 핵심 이견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이를 5월까지 해소하도록 노력한다고 표현했다.
애초 3차 합의문이 4월까지 합의해 3차 대표자회의에서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5월 4차 대표자회의로 넘어온 것은 연석회의를 주도하는 세력들이이 쟁점 사항을 표기하자는 의견을 패권적으로 묵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연석회의 주도 세력은 사회당 울산시당이 4·27 재보선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이갑용 후보를 지지한 것을 문제삼기도 했는데, 연석회의가 야권연대를 합의한 바도 없는데, 왜 민주당과 연합한 민주노동당 후보는 지지해도 되고, 독자 출마한 진보 후보는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인가.
좌파들은 진보대통합 논의가 민주대연합 노선의 부속물이 되지 않도록 적극 참여하고 개입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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