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아 2010년에 쓴 기사.(바로가기)
1979년엔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마다 10퍼센트 넘게 성장하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물가는 오일쇼크 탓에 22퍼센트나 올랐다.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투쟁과 10월 부마항쟁은 큰 충격이었다.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는 체제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요정에서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였다.
그때,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다. 그중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고, 김재규는 체포됐다.
이제 전두환은 유신 체제의 심장부에서 유일하게 권력을 쥔 채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10ㆍ26 직후에 일본 <마이니치> 신문(11월 1일치)은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전두환에게 힘이 집중된 것은 박정희 덕분이었다. 전두환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틀 뒤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지지 시위를 벌여 박정희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ㆍ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3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유신 체제를 지속하려는 전두환 일당의 의도와 달리, 최규하 임시내각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은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유신헌법 개정 계획을 공표했다.
전두환 일당은 12ㆍ12 쿠데타로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 일당이 장악한 신군부가 탄생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살아남았다.
이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1980년 봄, 계엄 확대 전까지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다. 유신 시절 전체 파업 수보다 많았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사북면 전체를 장악했다.
서울의 봄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자제하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시위 지휘부는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14일부터 3일간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 수만 명이 민주대성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계엄이 확대되면’ 도청으로 모이자고 결정했다.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를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로 봤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된다. 군부 통치의 시작인 것이다.
광주는 민주대성회에서 내린 대중적 결정으로 계엄 확대 뒤에도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더 깊은 배경엔 박정희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의도적인 지역 차별이 있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신군부는 시위가 잦아진 틈을 이용해 5월 17일 자정, 계엄 확대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이는 합법적으로 신군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광주에서 이에 맞서는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 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모인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새벽에 이미 학교를 점령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였다.
광주항쟁 최초의 시위가 시작됐다. 밀려난 이들은 광주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치며 시민들과 합세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이에 맞춰 “화려한 휴가”(광주 진압 작전명)도 시작됐다.
최초 사망자는 말하기도 듣기도 안 되는 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친구들 배웅을 나왔던 그는 왜 구타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뒤통수가 깨지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공수부대는 가정집까지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연행했다. 잡힌 사람은 발가벗겨 기절하도록 두들겨 팬 뒤 트럭에 던져 넣고 실어갔다.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19일부터 저항도 더 거세졌다. 이제 항쟁은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됐지만 저항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 3백여 대가 금남로 전 차선을 채우고 도청으로 향했다. 감격한 시민들 수만 명이 이 대열과 함께 행진했다. 이날, 시민 10만여 명이 밤샘 대치에 참가했다.
항쟁을 왜곡 보도한 MBC와 KBS 방송국이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금으로 키운 군인이 국민을 죽인 것에 항의하는 표시로 세무서 건물도 불태웠다.
아시아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내줬다. 증파된 병력의 광주 진입을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 동네별로 밥과 반찬이 시위대에게 전해졌다.
시위대가 요구한 계엄군 철수 시한은 21일 정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도청으로 향했다.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옥상과 헬기에서 조준 사격을 해댔다.
이제 저항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다. 나주와 화순 등에서 무기고를 찾아내 총과 탄약을 입수했다. 시위대는 차량으로 전남 각지를 돌며 항쟁 소식을 전하고 자원자를 태워 돌아왔다.
시민들의 놀라운 용기와 투지에 밀린 계엄군은 결국 21일 밤 전남도청을 내주고 도망쳤다.
그때 시신안치소 구실을 했던 도청 앞 상무관에는 대검에 난자당하거나 철심 박힌 박달나무 곤봉으로 구타당해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격에 머리통이 날아간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런 미확인 시신이 수백 구에 달했다. 당시 항쟁 지도부가 파악한 행방불명자만 2천여 명이 넘었다.
해방 광주
‘사냥개’가 물러간 곳에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참가하고 시민군에게 밥과 반찬을 지어 나르는 우애와 협력이 들어찼다.
22일부터 시민들은 도청 광장에서 날마다 민주대성회를 열고 항쟁을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시신 수습부터 치안까지 스스로 해냈다. 천대받던 밑바닥 노동자들, 여성들, 고교생들이 주역으로 나섰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매점매석도 범죄도 없었다. “해방 광주”는 저항과 자치에 관한 평범한 민중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도청에서 쫓겨난 계엄군은 광주를 포위하고 시외통화마저 끊었다. 이제 “해방 광주”는 고립무원이 됐다.
TV에선 ‘간첩이 일으킨 소요를 조만간 진압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는데, 다른 지역과 통화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감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시 외곽에선 밤마다 총소리가 울렸다. 불빛이 새 나가 총알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마다 창문에 솜이불을 치고 잤다.
광주 시민들이 믿었던 ‘민주주의 우방’ 미국도 학살자의 편이었다.
5월 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다.
지역 명망가들이 주도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가장 크게 동요했다. 이들은 수습위를 꾸리자마자 무기 반납부터 했다. 먼저 항복하면 선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쟁에 앞장선 노동자와 학생들은 신군부와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새로 항쟁 지도부를 꾸리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이들의 목숨을 건 무장 저항은 국가권력의 폭압에 굴복하지 않는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대변했다.
정규 군대를 끝내 이기지는 못했지만 광주항쟁은 국가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고, 민중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걸 웅변했다. 학살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을 새겼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27일 새벽 선무방송은 이들의 유언이 됐다.
부활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유언이 ‘살인마’보다 힘이 셌다. 장기 집권을 꿈꾸던 ‘살인마 전두환’은 핏자국을 지워 보려고 광주항쟁 구속자를 3년 만에 모두 석방하고, 학원 자율화 등 유화조처를 취했지만, 198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낸 한 세대가 급진화하는 걸 막지 못했다.
광주 정신은 1987년 6~9월 전국적 민중 항쟁으로 부활했다. 1987년 민중항쟁이 폭발하자, 군부는 물론이고 미국 지배자들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친미적인 전두환 정부를 보호하지 못했다.
광주항쟁 8년 뒤, 전두환은 산속 절로 쫓겨갔고, 그 8년 뒤엔 오히려 내란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됐다. 1997년엔 마침내 일당 독재가 끝났다.
그러나 당선하자마자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고, 노동자ㆍ민중의 생존권 대신 재벌을 배불리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협조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순 없었다.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연대, 국가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해방 광주”의 정신은 노동자와 학생,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다.
‘살인마’를 계승하는 자들이 집권한 지금, “해방 광주”의 정신이 거리에서, 작업장에서 부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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