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사회적 합의?
9월 13일 노사정 야합을 비판하는 입장들이 모두 견결한 파업 투쟁으로 저항하자는 것은 아니다. 일부는 노사정위원회가 사회적 대표성을 갖지 못한 합의를 했다며 ‘진정한 사회적 합의’를 촉구한다. 정의당이 대표적이다.
심상정 대표는 박근혜의 행정부 독주 스타일을 비판하면서 “노사정위에서 배제돼 온 비정규직과 청년들, 그리고 시민사회계까지 두루 포함한” 국회 내 사회적 합의기구를 제안했다. 이런 식의 국회 내 논의기구에 대한 기대는 민주노총 지도자들에게서도 나온다.
파업으로 박근혜 정부의 공세를 막아 내기 어렵다는 생각에 국회 내 논의기구를 구성해 속도전에 제동을 걸어 시간을 벌자고 생각할 법도 하다. 게다가 민주노총과 청년, 비정규직들이 사회적 논의기구에 포함된다면 정부와 기업주들의 갈라치기에 대응하기가 더 쉽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제안이 박근혜식 일방적 속도전 스타일에 흠집을 내는 것일 수는 있어도, “노동개혁”에 대한 효과적 반격이 되기는 어렵다.
이미 여권은 노사정위 야합 이전 7~8월에 민주노총의 ‘국회 내 논의 기구’ 제안을 거부한 바 있다. 이는 박근혜 정부가 그저 “노동개혁”에 노동계도 동참한다는 외피가 필요했을 뿐임을 보여 줬다.(그것이 꽤 유용한 수단이긴 했지만 말이다.)
공상
사실 경제 위기 때문에 노동계급에게 고통을 떠넘기려는 정부의 공격을 대화로 막아 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은 공상적 기대다.
국회 내 과반 다수당인 여권이 만일 국회 내 논의기구 구성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노동개혁”을 밀어붙이는 데 더 그럴듯한 외피가 필요해서지 진정한 사회적 합의를 위해서가 아닐 것이다. 그런 필요를 느낄 때는 지금의 “노동개혁” 공세가 강력한 노동자 저항에 부딪힐 때일 것이다. 결국 박근혜 정부와 여권의 태도를 바꾸게 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대중 투쟁이다.
문제는 국회 논의 기구에 기대하는 것이 노동자들의 견결한 투쟁을 구축하는 데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국회 내 논의기구 제안에 기대를 걸게 되면, 여권 내 동향과 새정치민주연합의 협상에 수동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그런데 새정치연합 소속인 은수미 의원조차 자기당 지도부의 여야 합의 가능성을 우려하는 상황이다.
또 지도자들이 아무리 말로 투쟁에 무게중심을 둔다고 해도, 둘을 병행하려고 하면, 정부와 기업주들이 협상에 임할 진정성을 증명하라고 압박하는 것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도 어렵다.
노조 지도자들이 이런 압력 속에서 좌고우면하며 주춤하는 것은 현장 조합원들에게 진지하게 파업을 건설하는 것인지 의구심을 줄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투쟁과 협상 병행론’은 조합원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기보다는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양보론이 돌파구를 열 수 있을까
9월 24일 민주노총이 주최한 토론회에서 <한겨레> 전종휘 기자는 ‘정규직의 일정한 희생 통한 감동을 줘야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임금 보전분을 청년고용 지원에 쓰는 식으로 말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이나 일부 노조 지도자들도 비슷한 제안을 한 바 있다.
흔히 이런 주장은 투쟁으로는 어차피 막아 낼 수 없다는 생각의 반영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양보론이 투쟁의 힘을 극대화하고 민주노총이 하반기 파업을 단호하게 건설하는 데 방해가 된다. 공공부문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를 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 전선을 흐리게 만드는 데 주요한 구실을 했던 것을 떠올려 보라.
게다가 양보론을 노동운동이 수용하면,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동안 미조직 비정규직 노동자들에 대한 차별 덕을 봤다는 우파의 분열 담론을 인정하는 꼴이 된다. 청년 실업이 조직 노동계급의 고임금과 고용안정 탓이라며 노동계급 내 이간질에 열중하는 박근혜 정부에 맞서 단결하는 게 중요한 데 말이다.
한국은 OECD 내에서 국민총소득 중 기업소득 비중이 가장 높은 나라다. 노동자들이 양보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민주노총이 조합원들뿐 아니라 더 큰 위험에 처한 미조직 노동자들을 대변해 싸움에 나서는 것이 진정한 노동자 연대다. 그럴 때, 더 큰 지지를 받아 낼 수 있을 것이고 노동자들의 사기도 오를 것이다.
좌파 포퓰리즘의 약점
노동운동 안에서 양보론과 비관론이 유포되는 것에 반대해 좌파들은 투쟁의 힘을 강조해야 할 것이다.
노동당은 “국회 내 사회적 기구 구성과 같은 출구전략을 짤 때가 결코 아니다”라고 옳게 강조했다. 노동자계급정당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는 <변혁정치> 10호(10.1.)에서 11·14 민중총궐기 투쟁을 특집으로 다뤘다. “투쟁 속에 답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저항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노동자 파업’에 대한 강조가 두드러지지 않는다. 노동당은 피해 대중이 거리에서 연대해서 싸우는 방식을 더 선호한다. 추진위도 재벌 이윤 환수 운동을 부각하면서 민중총궐기 투쟁에 기대를 거는 듯하다. 거리에서 민중적 저항을 구축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파업 같은 계급투쟁 방식에 토대를 두고 거리 항의가 결합될 때 진정으로 지배자들을 위협할 수 있다. 10~11월 총파업 투쟁이 현실적일 때 11·14 민중총궐기 같은 거리 투쟁도 더 힘을 받을 것이다.
따라서 좌파는 민주노총의 노동 개악 저지 파업 건설에 기여하는 것을 당면 과제로 삼아야 한다. 좌파들이 대체로 박근혜의 노동 공세를 ‘경제 위기 시대에 이윤 보호를 위한 자본의 총공세’로 분석하는 만큼 이윤에 타격을 주는 파업을 강조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일관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 조합원들 사이에서 선동해야 할 뿐만 아니라, 상층 지도자들의 소심함과 투쟁 회피 문제에도 정치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그런데 일부 좌파는 오랜만에 들어선 좌파 집행부를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비판을 삼가는 듯하다. 그러나 좌파가 침묵하고 기층의 압력이 약할수록 좌파 집행부가 현장 노동자들의 투쟁 열망에 부응하도록 하는 일은 더 어려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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