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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5.27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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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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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항쟁 진행 과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점은 공식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였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이 MBC와 KBS에 연속적으로 항의성 방화를 하고, <광주일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린 일이 지금도 중요한 사건으로 전해 집니다.

특히,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에 끝까지 저항하는 민주 언론의 보루처럼 여겨지는 곳이 MBC라 놀랍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두 방송국 모두 철저한 계엄 통제에 따른 보도를 했습니다. 현지 취재 결과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보도 행태는 시민들이 눈 앞에서 목격한 현실과 다르다는 점에서 실망과 분노를 안겨줬지만, 나중에는 시외 통화가 완전히 두절됐기에 더 공포와 증오로 다가 왔습니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일보가 왼쪽 조선과 달리 ‘소요’가 아니라 ‘데모’사태라 표현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동아는 올해 창간 90주년 기획 때 이것이 자신들이 민주언론인 증거라고 우기더군요. 데모사태와 소요사태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요?


그때 <조선일보>가 가장 노골적으로 계엄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옮겨 말그대로 소설을 씁니다. 나머지 언론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10·26 이후 줄곧 검열을 당해야 하는 계엄상태인 점을 감안해도 한국 기성 언론들의 무기력은 한심합니다.

기성 언론을 향해 불만과 분노를 드러낸 이런 행동에서 대중이 어떻게 행동과 경험 속에서 기성 언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목격 하고 체험한 사실과 정부와 언론의 발표는 정반대의 사실과 결론을 보여줍니다. 둘 가운데 하나는 거짓인 겁니다. 이제껏 거짓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초반의 당혹스러움은 이제 “간첩·폭도”의 난동이라는 정부와 언론을 향한 총체적 불신과 증오로 발전합니다.

이 시비는 광주 망월동의 신묘역에서 구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여기에는 김남주 시인의 ‘학살’ 등 오월항쟁을 다룬 시비들이 여럿 조각돼 전시되고 있다.

당시는 계엄 하에서 모든 언론사들이 검열 제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전남의 지역 일간지들은 계엄 당국이 발행을 중단합니다. 그때 <전남매일> 기자들의 절필 선언[각주:1]은 오늘날 여전히 정부와 대기업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주류 언론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각주:2]

그래서 큰 규모로 대중이 참여하는 투쟁에서 대중은 늘 기성 매체의 신뢰성 문제에 부딪힙니다. 즉 운동이 떠오르고 그 속에서 각성한 사람들이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당연히 그것만으로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서 탈피했다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새로 각성한 대중 일부에서는 때때로 거짓 매체들을 배격해 새 매체를 지지하거나 만들어 냅니다. 2008년 촛불운동 때도 다양한 비주류 매체와 개인 매체들이 그 구실을 했습니다. 

광주항쟁에서 <투사회보>가 그 구실을 부분적으로 했습니다. <투사회보>는 매우 미약했지만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도청에서 계엄군을 쫓아낸 뒤, 공식 1호로 발행을 시작한 이 매체는 8호부터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됐습니다. 제작은 총 10호까지 했고, 안타깝게도 마지막 10호는 도청 진압으로 배포되지 못한 채 전량 압수됩니다. 

이 매체를 발행한 이들은 들불야학이란 곳의 학생인 청년 노동자들과 강학[각주:3] 등으로 구성된 윤상원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19일부터 팀을 나눠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합니다. 취재와 문안작성, 제작과 배포, 물자 조달 등 역할 분담으로 나름의 체계를 갖췄습니다. 이것이 도청 장악 후 <투사회보>로 발전한 것입니다. 

<투사회보>는 광주항쟁을 존경의 눈빛으로 돌아보는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사실 이 매체를 이끈 사상과 조직(대중과의 매개로서), 기술[각주:4] 면에선 매우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도청 시민군 사이에서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는 증언들도 있지만, 실질 영향력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매체의 제작과 배포 과정을 살펴 보면 대중항쟁에 영향을 미치려는 상대적 소수의 그룹과 대안적 사회주의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몇 가지 힌트를 배울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사회보>는 타이핑도 아닌 필사본 A4 한 페이지 짜리 매체였고, 밤새 일일이 등사를 해야 겨우 5천 부 남짓 뿌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윤상원이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을 맡고 나서 투사회보는 광천동 야학에서 도청 앞 YWCA에서 제작되기 시작하며 인력과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서 한때 한 호에 4만 부가 넘게 제작·배포되기도 합니다.

A4 한 페이지라는 지면 한계상 분량은 적었고, 내용과 구성은 단순 명쾌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그날의 상황을 요약하고,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간단히 논평하며 다음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수준은 별개로 하고, 어쨌든 대안적 저항 언론이 갖춰야 할 항목으로 뼈대가 짜이긴 한 거죠.

예를 들어, 도청 장악 다음 날 나온 <투사회보> 2호는 타 지역 연대투쟁 소식을 알리며 지지가 확산되고 있다는 논평을 합니다. 아울러, 시간대별로 계엄군과 시민군의 동향을 보도합니다. 그리고 광주 KBS를 접수해 항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방송을 하자거나, 외곽도로 봉쇄 등 해방 광주 방어를 위한 나름의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내용 면에서 <투사회보>는 두 문제에서 분명했는데, ‘계엄군과 당국을 믿지 말자’, ‘무장 저항 태세를 포기하지 말자’ 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투사회보> 그룹은 항쟁파 vs 투항파 논쟁을 거치며 항쟁파들 사이에서 인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취재는 항쟁이 벌어지는 전역에서 이뤄졌습니다. 광천 공단 등 중소기업 노동자이들이던 들불야학 그룹의 노동자들은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항쟁을 조직하는 일들에 참여했습니다. 참여와 조직 과정이 취재 과정이었습니다.(물론 정보량이라는 면에서 역사적, 물질적 한계를 극복할 순 없었죠) 물자 조달은 종이와 등사기 등을 구하는 일을 별도 팀을 꾸려 수행한 것입니다. 

들불야학을 이끌던 윤상원 그룹은 전남대 학생운동과 광주의 친노동 시민운동과 연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했습니다.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진정한 항쟁파의 구심 노릇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한계와 항쟁의 조직적 정치적 구심이 미약한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윤상원 등이 대중과 소통하고 개입하며 지도하려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항쟁 자체의 한계와 (사실상 여기에서 비롯하는) 주체들의 사상과 조직, 기술(필진 포함)의 한계 등으로 안타깝게 더 잠재력을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윤상원 열사의 죽음이 그 역사적 한계를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워낙 위기가 첨예한 정국이라 지속적 항쟁이 아닌 불꽃처럼 무장 저항으로 폭발했다가 불씨만 남기고 일단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 항쟁이 고유의 사상과 조직, 매체를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기간에 이 위대한 항쟁은 그 자체의 매체를 지향하는 맹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매체는 그 이름 답게 투사들이 발행하고, 투사들이 받아 읽어보며 투사들 사이의 소통에 기여했습니다. 모름지기 저항 언론은 대중의 운동을 조직하는 매체로서 성장해야 그 본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레프트21> 같은 언론이 가려는 길이 이 길입니다. 물론 <레프트21>은 단순히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매체를 넘어서 국제 계급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상(마르크스주의)을 [일상과 투쟁 모두에서의] 구체적 경험과 결합시켜 변혁을 위한 전략적 과제부터 전술 과제까지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매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일관된 투사들의 소통 매체가 될 수 있겠죠. 

MBC노조가 보도 투쟁을 하겠다며 파업을 멈췄지만, 오히려 파업 중단으로 기세가 꺾여 뜻대로 보도 투쟁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민주 언론은 ‘직업(임금노동이란 의미의)으로서 보도’가 멈추는 시점에서 시작돼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투사회보>는 후배들에게 진실을 위해 싸우는 용기, 단순명쾌한 의사 전달 방식의 효용성, 매체가 운동의 조직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등을 맹아적 형태의 교훈으로 남기고, 체계적인 변혁 사상의 발전과 매체를 뒷받침할 조직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바를 비극적 결말을 통해 과제로 남겼습니다. 

(다음에 계속)

  1.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본문으로]
  2. 여기에는 삼성 문제로 실망을 안겨 준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 한겨레도 포함된다. 이건희 경영 복귀를 다루는 시사인의 기사는 실망스러웠다. [본문으로]
  3. 주로 대학생들로 이뤄진 야학의 강사들을 가리키는 용어. 들불야학을 주도한 박기순, 윤상원 등을 따라 전남대생이 많았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한때 이 야학의 강학이었다. [본문으로]
  4. 기술은 단순 기술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사용력은 매체와 그 운동이 현대자본주의 생산력을 대표하는 노동계급과의 유기적 연관도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기술을 천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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