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여권 수사와 박근혜의 ‘정치 투쟁’
문재인의 줄타기는 위험하다
노동운동과 좌파는 정부를 믿거나 의존지 말고 독립적으로 싸워야
6개월 구속 연장이 결정된 뒤 재판(10월 13일)에서 박근혜가 사실상 재판 불복 의사를 밝혔다.
박근혜는 구속 연장이 정치보복 재판이라는 증거라며, 재판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재판은 하나마나라고 했다. 그러니 박근혜 변호인단이 사임한 것은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지난 6개월 동안 재판은 주 4회 진행하는 등 빠른 1심 선고를 목표로 진행해 왔다. 그 과정에서 박근혜는 뇌물 등 혐의를 부인하고, 재판에 출석하지 않는 등 고의로 쟁점을 흐리고, 재판 지연 전술을 펴 왔다.
재판을 정치 보복처럼 보이게 만들어 최대한 옛 지지층을 복원·결집하려는 술책이었다. 부수적으로는 1심 선고를 질질 끌어 6개월 구속 기간 만료로 선고 전에 석방되길 기대했던 듯하다.
그러나 박근혜 구속은 연장됐고, 무죄가 선고될 가망은 없으며, 자유한국당에서는 ‘박근혜 출당’이 공식 의제에 올라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가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 때처럼 재판의 공정성을 문제 삼으며 재판부를 압박하고, 재판 결과에 정치적으로 불복하려는 포석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그때도 그랬듯이, 사악한 의도가 그대로 먹힐 것 같지는 않다.
까면 깔수록 죄가 나오는 ‘양파범’
틈만 나면 ‘법과 질서’ 운운하며 블랙리스트 통치를 행했던 자가 헌법재판소가 헌법을 위반했다고 판결한 자신의 부패 행위를 하급 법원에서 사실 무근이라고 주장하는 꼴은 우습다.
무엇보다 날이 갈수록 박근혜의 야비한 범죄 사실이 추가로 폭로되고 있다.
세월호 참사 인지 시점을 조작해 구조 실패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것이 밝혀졌다(그러니 이제 참사 당일 7시간 행적 의혹이 아니라 7시간 반 의혹인 것이다). 국감에서는 세월호특조위가 박근혜의 참사 당일 행적을 조사하는 걸 청와대가 막으려 한 것도 증언으로 확인됐다. 심지어 박근혜는 메르스 유가족의 조직화도 막으려고 사찰을 했다!
이제는 이명박 때부터 박근혜 때까지 청와대가 국정원을 통해 우익 단체들을 키우고 집회에 동원하며(관제 데모), 정부 돈뿐 아니라 기업들의 돈까지 지원한 일들이 드러나고 있다. 두 정권에 걸쳐 이런 일을 맡았던 국정원 국장 추명호가 체포됐다. 추명호와 허현준(박근혜 정부의 청와대 행정관으로 우익 단체를 관리·지원한 자) 둘 모두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국회와 헌재의 탄핵 직후 청와대 서버 총 82대를 폐기하고, 특검 수사가 시작되자 문서파쇄기를 스무 대 넘게 구입한 것도 드러났다. 그렇게 증거를 인멸하고도 남은 것들이 청와대 등 곳곳에서 발견된 것 아닌가?
박근혜는 헌재 판결이 정치 재판으로 잘못된 것이었으며, 법원에서 사실을 다투면 자신의 무죄가 입증된다고 해 왔는데, 이토록 증거 인멸에 힘써 온 것이다. 증거 인멸범 박근혜를 석방하지 않은 것은 잘 된 일이다.
적폐 청산 염원과 우파
박근혜의 재판 불복 선언이 재판부를 향한 협박이자 지지층에 대한 호소인 만큼 그것은 자유당에 대한 압박이기도 하다.
자유당은 16일에 당 윤리위원회를 열어 박근혜와 친박 핵심인 서청원, 최경환에 대한 징계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박근혜의 재판 투쟁의 여파로 일단 연기됐지만, 셋에게 탈당을 권유하는 결정을 하게 되면, 당사자들이 거부하더라도 자동 제명 처리된다. 사실상 출당 조처인 것이다.
이를 추진해 온 것은 당대표 홍준표다. 내년 지방선거 전에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성사시켜 보수당을 재건하려는 의도일 것이다.(물론 그 정도가 혁신으로 보일 리는 만무하고 통합이 원활해질 것 같지도 않다. 최근 국민의당 안철수가 바른정당과의 통합에 관심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그러므로 박근혜가 재판 불복 의지를 밝힌 것은 자유당 내 친박 지지층을 자극해 자유당이 자신을 버리지 못하게 하려는 계산도 있다. 이런 압박이 통한다면, 자유당은 더 치열하게 대결하며 문재인 정부를 몰아붙여야 한다.
그러나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가 아직 식지 않았고(그래서 자유당은 100석이 넘는데도 지지율이 형편없다), 국정원을 고리로 한 두 정권의 추악한 범죄들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BBK의 대주주인 다스에서 이명박 장남 이시형이 등기 임원으로 초고속 승진하고 중국 등에 설립한 다스의 알짜 해외 법인들 대표가 이시형인 것이 드러났다. 대형 사기 범죄인 BBK 건을 검찰이 수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그동안 이명박은 다스가 자신의 친형 것이고 자신과 상관없는 기업이라고 말해 왔다.) 친노 세력이 노무현을 모욕해 죽게 한 이명박에게 앙심이 큰 것도 사실이다.
이런 적폐 수사들에 자유당은 정치 보복이라고 반발하고 있으나, 별로 설득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 실제 부패 규모들도 크고 명백해 운신의 폭은 좁다.
그러다 보니 당장 할 수 있는 게 ‘너희는 깨끗하냐’ 식의 물타기다. 자유당이 노무현의 자살로 수사가 중단된 박연차 현금 수수 의혹을 재수사하라고 검찰에 고발한 이유다.
이 때문에 현재 검찰은 노무현-이명박-박근혜라는 연이은 세 정권의 권력형 범죄 혐의를 동시에 수사해야 하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와 구 여권 적폐 수사의 정치적 배경
현재 한국 지배계급에게 가장 첨예한 쟁점은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지정학적 위기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이다. 경쟁 지배계급인 북한 지배자들이 핵무장 수준을 더 높인 것은 한국 지배자들에게 위협감과 경쟁심을 부추겼을 것이다.
전통적인 국가 전략상, 이는 한국 지배자들이 한미동맹에 더 의존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친트럼프적 태도를 이해할 수 있는 배경이다.
그런데 이런 행태는 문재인 지지층이나 박근혜 퇴진 운동에 참가한 민중의 정서에는 부합하지 않는다. 대체로 현 정부에 우호적인 CBS노컷뉴스가 최근 문재인 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뽑은 기사 제목은 “지지층도 부글부글”이었다.
게다가 경제 위기 대응을 위해 박근혜가 칼을 휘두르며 추진하던 “노동개혁”(전체 임금을 절감하려는 고통전가 정책)이 박근혜 퇴진 이후 멈춰 있는 상황이다. 당장 경기가 심각하게 나빠 보이지는 않지만, 세계경제 동향에 민감한 한국 경제의 조건과 대(對)중국 관계의 불안감 등 때문에 기업주들이 초조해 할 만한 상황이다.
이런 개악을 실패한 박근혜와 다른 방식으로 성공시키라는 게 박근혜 파면을 용인한 기업주들의 여론(문재인 정부에게 바라는 바)일 테니 말이다.
문재인 정부로서도 사회적 대화 방식으로 임금을 줄이는 개악을 하려면 뭔가를 양보하며 노동자들을 달랠 시간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런 유화 조처들이 노동자들의 기대치를 높여 자칫 행동으로 표출될 수도 있다.
이런 경로를 피해야 하니, 당근도 매우 제한적이고 찔끔찔끔 내 줄 수밖에 없다. 이런 식의 속도 조절은 오히려 선진 노동자들을 실망시킬 위험도 있다. 순식간에 기대감이 실망으로 돌아설 수 있다. 반대편에서는 기업주들도 점점 더 정부를 채근할 것이다.(특히, 지정학적 위기가 그렇게 할 동기를 더 만들어내는 듯하다.)
지금도 당장 행정부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전교조·공무원노조 인정, 근로기준법 해석 변경으로 노동시간 단축, 구속자 석방 등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았다. 사드 배치는 절차를 신중히 거치겠다는 공약조차 대놓고 뒤집어 버렸다.
정리하면, 우익 지배자들은 경제·안보 위기로 신경이 매우 날카로워져 있다. 문재인은 이들의 눈치를 우선 보지만, (퇴진운동의 여파로 눈높이가 오른) 지지층의 눈치도 봐야 한다. 그런데 둘 다 만족시키기 어렵다.
그래서 한미동맹을 추수하고 공약에서 후퇴하거나 개악 조처들을 슬금슬금 내놓지만, 또 구 여권에 대한 적폐 수사도 해서 지지층 달래기도 하려 한다. 매우 불안한 정치적 줄타기를 하면서 정국을 주도하려는 것이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문재인이 우익의 손을 잡아 평범한 지지층에서 지지율이 떨어질수록 우익 지배자들은 사기를 점차 회복하며 문재인 정부를 더 날카롭게 공격할 것이다.
박근혜가 재판 불복 의지를 밝히며 지지층 결집을 시도하는 것은 훗날 이런 기회를 잡아보려는 포석이다. 이들의 전신인 한나라당은 2004년 노무현 탄핵 실패로 곤경에 빠졌다가 딱 그런 패턴을 거치며 회생해 9년이나 집권했다. 그래서 자유당이나 보수 언론들도 친박 세력을 완전히 내치지는 않을 것이다.(한나라당이 회생할 때 당대표가 박근혜였다는 게 아이러니하다.)
따라서 노동운동과 좌파는 구 여권의 적폐 청산을 촉구하되, 문재인 정부에 절대 기대지 말고 고유한 요구들과 결합해 정치적으로 독립적인 투쟁을 건설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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