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 수사와 구 여권의 반발
이명박을 구속하라
적폐 청산 멈추지 마라
이명박근혜 정권의 국가정보원장들이 모두 감옥에 가는 기쁜 일이 생길 수도 있다. 특수활동비 40여억 원 청와대 상납, 국내 정치 공작 활동 등의 혐의로 박근혜의 국정원장 남재준, 이병호, 이병기 모두에게 구속영장이 청구됐다. 이명박의 국정원장 원세훈은 대선 등 정치 개입 등의 죄목으로 이미 구속돼 있다.
새누리당 정권 9년 동안 국정원이 야비한 우파 통치의 컨트럴 타워였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국정원을 매개로 국방부, 검찰 같은 다른 억압 기관들이 협력해 왔고, 정권의 비밀 활동비를 대 온 것이다.
국정원과 손잡고 사이버사령부를 만들어 여론 공작을 벌인 전 국방장관 김관진도 11월 11일 구속됐다. 김관진이 사이버사령부 확대나 민간인 채용 등 여론 공작 활동을 청와대에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는 증거도 폭로됐다.
이처럼 국정원과 국방부 등이 벌인 국내 정치 공작이 모두 이명박의 지시로 이뤄졌다는 증거들이 속속 나오고 있다.
2013년 검찰의 국정원 수사에 조직적으로 대응한 국정원 조직 ‘국정원 현안 TF’의 구성원들은 지금 (구속되기 전 자살한 변창훈을 뺀) 전원이 구속됐다.
구 여권의 국가기관 정치 공작에 관한 수사가 이 정도까지 온 것은 수사의 칼날이 당시 정권의 최종 결정권자들로 향하고 있음을 뜻한다. 박근혜는 이미 구속돼 있으니, 남은 것은 이명박이다.
이명박이 구속 수사를 받으면, 4대강이나 자원 외교 리베이트 의혹 등 더 큰 부패 의혹 수사도 더 쉬워질 것이다. 더 많은 혐의가 밝혀질수록 우파 정치 세력의 통치 정통성은 크게 훼손될 것이다. 이명박을 구속 수사해야 할 이유는 충분하다.
저항하는 적폐들
이명박 본인을 포함해 구 여권도 항거 태세다. 특히, 6일 국정원 수사를 받던 검사가 자살한 뒤에 더욱 그렇다.
이명박은 적어도 박근혜 퇴진 국면부터 수사에 대비해 왔을 것이다. 이명박은 이미 임기 중에 국정원과 연계된 국무총리실 민간인 사찰 사건, 내곡동 사저 의혹 사건에 대한 수사를 겪었다. 그때마다 치밀한 증거 인멸 등으로 칼날을 피해갔다. 그래서 그의 바레인 출국을 앞두고 검찰이 출국 금지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누릴 건 다 누리고 책임은 안 지려고 하는 점에서 이명박과 박근혜는 쌍벽이다.
변창훈 가택 수색을 두고 인권 운운하는 것도 우습다. 이명박의 경찰은 2009년 7월 정당한 언론 파업을 이유로 당시 언론노조 최상재 위원장을 (저항하지도 않았는데) 자녀들이 보는 앞에서 폭력적으로 연행했다. 그해 봄에도 담당 경찰과 이미 출석 조사일까지 합의한 YTN 노종면 노조 지부장 등을 출석 불응을 이유로 자택에서 긴급 체포했다. 정권을 비판했다고 해서 자녀 있는 기혼 여성인 배우의 나체 합성 사진을 직접 만들어 유포한 것도 국정원이다!
이명박은 12일 바레인으로 출국하면서 “정치 보복”, “감정 풀이”라며 신경질을 냈다. 조중동 등은 모두 이를 비중 있게 다뤘다. 정치 보복 프레임을 자가 발전시킨 것이다.
특히, 11월 6일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 방해 혐의로 수사받던 현 서울고검 검사 변창훈(2013년 국정원 법률보좌관으로 파견 근무, 검사장급 고위 검사)이 투신 자살한 뒤, 적폐 청산 중단을 요구하는 우파들의 목소리는 더 커졌다. 이미 10월 30일 국정원 정치 공작 문제로 수사받던 전 국정원 직원 (변호사) 정치호도 자살했다.(정치호는 “제가 다 뒤집어써야 하는 분위기”라고 억울해 했다고 한다.)
이에 우파는 “살인을 부른 무리한 표적 (기획, 보복) 수사”라는 비난을 한 목소리로 쏟아 냈다.
이를 의식해 법원은 비슷한 시기에 국정원 정치 공작 실무를 맡았던 전 국익정보국장 추명호의 구속영장을 한 차례 기각했고, 전 MBC 사장 김재철의 구속영장도 기각했다. 두 건의 담당 판사(강부영)가 박근혜와 이재용 구속영장을 발부한 판사라는 점이 시사적이다.(‘이만하면 됐다’는 신호?)
법원은 국정원의 지시로 관제 데모를 연 어버이연합 사무총장 추선희의 구속영장도 기각했는데, 이 건의 영장판사 오민석은 10일에 청와대 정무수석 전병헌의 전 비서들을 구속했다.
전병헌 측근 비리 수사가 확 불거진 시점이 왠지 수상하다. 구속영장 청구는 변창훈 자살 직후 이뤄졌다. 검찰은 15일에 공개적으로 전병헌의 소환 조사 방침을 밝혔다. 제3자뇌물죄의 피의자 신분임도 암시했다. 전병헌이 맡은 자리(청와대 정무수석)가 국회(야당)와의 소통 창구 구실을 하는 자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압박은 청와대의 일방통행에 대한 견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검찰은 우파의 반발도 신경 쓰일 것이고, 검찰 권력을 줄이는 검찰 개혁 논의도 불편할 것이다. 게다가 “적폐 청산” 수사가 자기 식구까지 건드린 것을 보며 검찰은 체제 수호 기관답게 구 여권 수사가 적정선에서 멈춰야 한다고 보는 듯하다.
바른정당 국회의원 9명이 자유한국당으로 복당한 일은 우파의 위협감에서 나온 단합 시도일 것이다. 박근혜를 출당시킨 홍준표는 친박 우두머리 서청원과 최경환의 출당 결정을 뒤로 미루고, 대신에 탄핵에 동조했던 바른정당 탈당파들을 받았다. 구 여권 청산 수사가 이명박에게까지 확대되는 듯하자, 당내 갈등을 일단 봉합해 공동의 파이를 먼저 지키자는 메시지일 것이다.(그런데 자유당 내에서 비박의 숫자가 늘어 내부 갈등 양상은 악화될 수 있다.)
적정선
검찰이 전병헌 측근의 비리를 캐어 전격 구속하고 전병헌 본인까지 압박하는 것은 촛불 대중이 바란 적폐 청산에 민주당 정부가 부응하기 힘든 이유를 얼핏 보여 준다.
상대적으로는 덜 썩었을지 몰라도 민주당과 친문 인사들도 지배계급에 기반을 두고 있다. 부패한 기득권 구조에 익숙하고 거기에 때가 묻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명박이 자신을 향한 수사를 “분열”로 몰아가는 것은 적폐 청산에 대한 지배계급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 아래서 검찰의 구 여권 수사나 국정원이나 국방부의 자체 조사(와 검찰에 수사 의뢰)는 현 정부의 이익을 근본적으로 건드리지 않는 정도가 가이드라인일 것이다.
가령 국정원 자체의 적폐 청산 TF가 부지런히 활동한 듯하지만, 국정원이 그토록 활개를 치고 다니도록 한 정치 구조와 계급적 성격은 건드리지 않는다.
세월호와 국정원의 연관성이 없다고 최근 발표한 것이 대표적이다. 청해진해운과 국정원 직원들의 조직인 양지회와의 관련성, 참사 당일 국정원이 청해진해운의 보고를 해경보다 빨리 받았다는 점, 배에서 발견된 국정원의 세월호 관리노트, 제주 해군기지―철근 과적―국정원의 삼각 의혹 등 어느 하나 속시원히 해명하지도 않은 채 세월호 관련 의혹을 부정해 버렸다.
아마 새 정부도 가장 공개를 꺼릴 내용은 세월호가 제주 해군기지 공사와 연관됐다는 점일 것이다. 노동 적폐에 아무 관심이 없는 것도 이 정부의 계급적 한계를 보여 준다.
물론 쫓겨난 전 정권은 물론이고 멀쩡하게 임기를 마친 전전 정권에 대한 수사와 폭로까지 이어진 것은 퇴진 촛불로 표출된 대중의 “적폐 청산” 염원이 그만큼 강력하기 때문이다. 이명박과 박근혜처럼 대중의 미움을 한 몸에 산 인물들이 있다. 그런 작자들이 대통령이 되고 권력을 휘두를 수 있게 한 구조도 바뀌길 촛불 대중은 바란다.
지금 수준에서 문재인 정부가 구 여권과 갈등을 봉합하고 수사를 멈추는 것도 그다지 쉽지 않은 이유다. 취임 후 문재인의 지지율은 우파에 타협하면 떨어지고 우파와 대결하는 모양새를 보이면 오르는 추세였다.
그래서 문재인 정부는 적폐 청산도 일부 시도하지만(또한 정치적 숙정의 수단으로), 경제·안보 위기에서 우파의 의제와 정책을 수용하고 있다. 좌우 압력에 줄타기를 하며 결국 우파를 살려 주는 것이 이 중도 정부다.
최근 안보 위기 해결을 국정 최우선 과제로 격상시키며 트럼프 국빈 초청, 한미간 군사동맹 강화 등 우파와 다를 바 없는 행보가 우파의 기를 살려 주고 강화했었다. 위에서 언급한 검찰과 법원의 최근 기류에서 보듯이 적폐 청산 행보가 계속되리라고 장담하기는 힘들다.
적폐 청산을 위해서 문재인 정부를 지지하며 침묵하고 기다리는 것이 해롭고 위험한 이유다. 일각에서 이런 수동성과 의존성을 고집해, 운동 안에서는 분열도 생겼다.
이 분열에서 정치적 존재감을 과시한 것은 온건 개혁주의자들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로부터 독립적으로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친노동운동의 목소리를 낸 좌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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