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례 없는 좌우 양극화 투표 속에서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했다. 박근혜가 복지 약속 따위를 지킬 거라고 믿는 이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세계경제 침체가 한국 경제에 먹구름을 몰고 오는 상황에서 재벌, 고위관료, 조중동, 옛 군부세력 등 1퍼센트 반동적 지배자들이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해 똘똘 뭉쳐서 박근혜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와 한진, 쌍용차를 봐도 좌우 양극화 속에서 지배자들이 갈수록 참을성(인내와 양보 의지)을 잃어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사실 그것이 유례 없는 보수대연합의 배경 아니겠는가.]


박근혜는 당선 기자회견에서국민대통합을 강조했지만, 당선 직후 그가 만나 감사와 축하 인사를 주고 받은 이들은 정몽구 같은 재벌 오너들이었다. 탄압과 장기 투쟁에 지쳐 목숨을 끊거나 지금도 철탑 위에서 처절하게 싸우는 노동자들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


사실 박근혜 정치 기반의 뿌리는 박정희와 전두환 독재 정권이다. 정치 일선에 들어선 뒤에는 ‘TK+구 민정계+재벌+사학재단같은 반동적 기득권층이 그의 든든한 기반이었다.


2012년 시사만화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올해의 시사만화상 우수상 수상작.


박근혜 정부에서 내각이나 실세로 중용될 것으로 예상되는 인물군을 봐도이한구·진념·김광두·안종범 등 모두 강경한 신자유주의 우파들이다대통령직인수위원회 면면도 [일부 예외는 있지만] 대체로 마찬가지다.


이런 기반만 봐도 박근혜 당선은 명백히 친재벌 신자유주의(냉전주의) 강성 우파 정부를 예고한다국제적으로도 세계자본주의 지배자들은 2008년 경제 위기 직후 국가 개입과 경기부양에 돈을 쏟았지만, ‘긴축과 내핍 강요라는 신자유주의 기조는 여전히 공고하게 유지하고 있다.


우파 결집을 추구하면서도 말은복지·경제민주화등 포퓰리즘을 앞세웠던 박근혜도 선거 막판에는내가 말한 경제 민주화는 [5년 전] 줄푸세 공약과 다르지 않다며 속내를 드러냈다.


그러므로 박근혜 정부가 기본적으로 취할 방향은 분명하다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해 노동계급 생활수준을 공격할 것이다. 미국 중심의 친제국주의 정책도 유지할 것이고, 대북 문제 뿐아니라 국내에서도 냉전주의를 강화할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이 저항으로 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민주적 권리를 축소하고 사회 분위기가 오른쪽으로 옮겨가도록 시도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 성소수자, 좌파, 청소년 등을 마녀사냥하며 분열·지배 방식을 강화할 것이다. 이런 시도 때문에 한동안 상당히 불편한 시기가 될 것이다. 


2013년 예산도 신자유주의적 균형예산 기조로 확정했다. 그러면서도 제주 해군기지 예산은 전액 보전된 반면, 학비 호봉제 예산은 전액 삭감됐다. 군부는 박근혜 당선 직후 발간한 ‘2012 국방백서에 ‘NLL이 국경선’[각주:1]이라고 못박았다. 검찰은 해묵은 일을 끄집어내 국가보안법 마녀사냥도 다시 벌이고 있다.


청와대와 국회, 사법부 등 국가기구에서의 우위를 이 과정에서 이용하려 할 텐데, 이는 우파적 반동 시도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화 시도와 연결될 수 있음을 뜻한다. [이는 노동운동에게도 민주주의 쟁점과 투쟁이 중요하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박근혜 정부의 반동적 성격과 의도를 밝히는 것이 상황이 그들의 뜻대로만 흘러갈 거란 뜻은 아니다. 어떤 행위주체도 객관적 조건을 무시하고 의지만으로 세상을 주조할 순 없다.


지금껏 박근혜 정부와 지배계급의 반동화를 낳은 객관적 조건과 주관적 의지·방향을 살펴 봤으니, 이번에는 박근혜 정부의 반동성을 제약하는 조건을 따져보자. 첫째, 곧장 이 나라가 1987년 이전의 권위주의 체제로 회귀하기는 쉽지 않다


한국 민주화의 핵심 동력인 노동운동의 조직과 의식이 [투지가 아주 높지는 않아도] 전반적으로 건재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부르주아 학자들의 허구적 과장과 달리 부르주아민주주의란 노동계급의 투쟁과 조직의 성장 속에서 확장돼 왔다.] 이런 힘이 유지되면 우파 정부가 들어서도 함부로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박근혜 시대가 영국의 80년대로 가느냐, 한국의 80년대로 가느냐는 진보와 노동운동의 대응에 달려있다. 저들이 영국의 80년대로 가고 싶어하는 것이 분명해졌으므로.


둘째이명박 정부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와 친기업 정책에 대한 반발로 복지 요구가 강해져 왔다. 박근혜가등록금 부담 절반으로”, “교 무상의무교육 시대!” 같은 구호로 대선 현수막을 도배했던 까닭이다


또 지난번 대선에서 이명박·이회창·이인제가 얻은 표를 모두 더하면 총유권자의 약 40퍼센트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서 이들이 모두 결집해 박근혜로 모은 표는 총유권자의 약 38.9퍼센트다. 우파 지지층이 크게 확장됐다고 보기 힘든 것이다.


<한겨레>의 신년 여론조사에선 무려 60.1퍼센트가차기 정부의 정책 우선 순위를 묻는 질문에성장이 지연되더라도 복지와 분배가 우선해야 한다고 답했다. 5년 전보다 복지 응답은 늘고, 성장 응답은 줄었다[각주:2]더는 성장 담론이 예전처럼 일방적 우위가 아닌 것이다. 



이런 사회적 세력관계가 [격변에 가까운 사건 없이] 단번에 무너지진 않는다박근혜 정부는 사회적 분위기가 성장주의 같은 우파적 가치와 정책에 [이명박 초기보다도] 덜 우호적이고정치적 반대파도 더 강경하게 결집한 상황에서 임기를 시작하는 것이다.


셋째, 게다가 박근혜에겐 내핍 정책을사회적 타협방식으로 추진할 수 있게 해 줄 정치적 완충지대 기반이 거의 없다. 심지어 이명박조차도 [실패는 했지만] 한국노총 지도자들을 끌어들였는데, 박근혜는 그조차도 없다시피하다.
(※ 2015년에 필자의 추가 멘트: 노동운동 안에서 완충지대 기반이 거의 없다는 예측은 취임 2년이 지난 시점에서 돌아 보면, 다소 부정확했으며 기계적이고 일면적이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금 노사정위원회에 한국노총이 포함돼 있는 것을 봐도 그렇다. 노동운동 안에서 상층 노조관료주의의 발전, 한국노총의 전통적인 보수파 지도자 집단의 구실은 물론이고 그들과 개혁파 지도자들의 관계, 그리고 민주당을 매개로 한 연결 고리 등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박근혜 정부의 주된 통치스타일이 피억압 대중의 저항을 살살 달래기보다는 윽박지르는 강성우파 스타일일 수밖에 없다는 예측이 틀린 것은 아니다. 또한 체제 위기를 과장해 민주당을 압박하고 이를 통해 저항의 무마와 위기 탈출에 써먹을 것이라는 예측도 옳았다는 것이 거듭 증명됐다.) 


‘강제’(채찍)와 ‘동의’(당근) 두 축에서 동의 없이 강제에 주로 의존하는 통치는 당장은 편한 듯 보여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박근혜는국민적 합의란 명분으로 각종 개악에 민주당을 끌어들이려 할 것이. 의회 민주주의 자체가 하나의 완충장치이기 때문이다당분간 정치 쟁점과 사회적 의제의 우선순위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이데올로기 투쟁의 주요 무대가 국회와 공식 정치권이 될 것으로 보인다.(거리 투쟁조차도 그 요구와 대상은 대체로 정부와 국회가 될 것이란 점에서도 더욱.)


민주당을 끌어들여 국회를 완충장치로 활용하려한다는 것은 국가기구의 권위주의화에도 명백한 제약이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넷째, 박근혜가 표를 위해 내놨던 포퓰리즘 공약을 거둬들이는 것은 자신에게 투표했던 일부 하층 중간계급과 노동계급 후진 부위도 배신하는 것이다.


반대파가 완고한데, 정치적 완충지대를 못 갖춘 조건에서, 지지층이 이반하는 것은 재보선과 지방선거 등을 앞두고 집권당의 안팎에서 상당한 긴장을 낳을 것이다.


정권을 잃을까 봐 뭉쳤던 보수대연합은 경제 위기 본격화 국면에서 민심 이반이 가중되면, 통치 방식을 놓고 분열할 수 있다. 궁지에 몰리면, 박근혜가 부패덩어리인 이명박 일당을 속죄양으로 삼으려 할 수도 있다. 


이런 분열이 상호경쟁적 부패 추문 폭로를 부추길 수 있다. 이런 과정들은 억눌리던 민중에게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주기도 한다3당 합당(보수대연합)으로 우파 정권이 연장된 경우였던 김영삼 정부와 집권당이 1997년 경제 위기와 노동자투쟁의 압력 속에서 분열한 것이 이런 사례다


박근혜 세력 자체가 부패한 기득권 세력이므로 부패 문제는 계속 쟁점이 될 것이다. 벌써 인수위원회 임명자들의 각종 비리 전력이 폭로되고 있다


바로 이런 여러가지 이유들 ― 무엇보다 경제 위기라는 조건에서 나오는 상반된 압력 때문에 박근혜 세력은 인수위원회 인선 과정부터 최대한 말을 아끼며 신중하게 행보하고 있는 것이다.(조용한 인수위?) 박근혜 세력은 정치적 자본가로서 [대중의 요구를 수용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대중의 눈치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박근혜도 어떤 복지는 수행할 수 있다. 그러나 다급하게 뻥카를 날리느라 재원 계획이 비어있다. 게다가 경제관료, 재벌들을 중심으로 긴축(내핍) 압력이 커지고 있다. 저들이 내놓을 복지란, 체제 수호를 위한 최소한의 복지, 위 사진처럼 사람들의 삶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는 그런 수준에 머물 것이다.



물론 이런 전망이 반동적 공세에 경계를 늦춰도 된다는 뜻이 될 수는 없다. 객관적 조건은 모순된 압력을 낳고 있다. 지배자들은 자신들의 반동적 의지가 제약받는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저항의 기세와 의지를 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할테니 말이다


노조이기주의 담론, 종북 마녀사냥, 여성, 성소수자, 이주자 등 각종 소수자 공격 등 정치적 희생양을 만들며 노동계급을 분열·약화시키려 할 것이다


예를 들어, 1980년대 영국 총리 대처가 처음부터강성 노동운동을 진압한 철의 여인이었던 건 아니다전면적 저항을 피하려고 파업권 약화를 위한 법 개악도 집권 후 수 년에 걸쳐 단계별로 조심스럽게 추진했고, 인력 구조조정도 노동운동이 약한 부위부터 신중하게 시작했다


영국 노동운동의 핵심부대인 광원노조는, 이런 각개격파 속에서 어느새 고립됐고, 석탄까지 비축해 놓은 뒤 벌인 대처의 공격을 결국 이겨내지 못했다. 주력부대의 격렬한 전투와 유혈낭자한 패배로 영국 노동운동 전반이 침체하게 됐다.


지금은 지배계급이 반동화하는 경제 위기의 시대이므로 가랑비에 옷 젖는다고 야금야금 먹어오는 공격에 무신경하면 노동운동이 결정적 순간에 무기력해질 수 있다. 각개격파 시도에 계급적 단결과 공동 대응을 추구해야 한다.  


요컨대, 객관적 조건만으로 유불리를 말할 순 없다. 주관적 의지와 단결 면에서 일단 저들이 한발 앞서 나갔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반동을 막고 그들 처지의 모순을 이용해 상황을 노동계급에게 유리하게 바꿀 수 있는가는 조직 노동운동과 반우파 청년들이 투쟁 태세를 얼마나 잘 갖추고 단결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활동가들에게 가장 나쁜 것이 비관주의에 빠져 우경화하고 전선에서 이탈하는 것이라면현실 직시를 회피해 적을 과소평가하고 단결된 방어 전선 구축에 소홀한 것도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진짜 과제는 단결과 투쟁, 단호함을 얼마나 잘 촉진하느냐라고 할 수 있다


단기적으로 볼 때, [물론 점점 참을성이 없어지는 기업주들의 때이른 도발로 조직 노동운동의 한두 작업장 투쟁이 갑작스레 분출할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임기초 주요 양상은 작업장 투쟁보다는 정치와 이데올로기 투쟁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크다. 


미조직 청년들보다는 조직 노동자들이 먼저 각개전투를 벌일 것이다. 이런 투쟁들이 쉽게 이기진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투쟁에서 박근혜의 정치 위기 양상이 누적된다면, 국면은 점차 대중투쟁에 유리하게 바뀌어나갈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민주당 일부와 엔지오를 포함한 여러 종류의 개혁주의가 득세할 수 있다유감스럽게도 이번 대선 결과가 보여 주듯경제 위기 반동 시대에 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을 투쟁 속에서 단결시킬 수 있는[각주:3]] 일관된 대안을 내놓을 수 없다


그러므로 급진좌파가 민주주의 쟁점을 포함해서 단결과 공동 대응을 위한 이니셔티브를 발휘해야 한다. 독자적 폭로와 선전선동으로 박근혜의 모순을 위기로 바꾸려해야 한다. 박근혜가 필연적으로 맞게 될 정치 위기를 이용해 현장과 거리에서 실질적 투쟁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 경제 위기에 대한 급진적 대안도 선전해야 한다. 


정리하면, 개혁주의 지도자들로 하여금 반우파 공동 투쟁 건설에 나서도록 하면서도, 독립적이고 효과적인 비판과 대안을 설득력 있게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각주:4]. 노동운동의 정치적 지도력을 재구축하고 걸맞는 정치 구조물을 세우는 일도  중 하나다. 


※ 이 글은 일부 다듬고 축약해 <레프트21> 96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1. 이 주장이 왜 틀렸는지는 관련 주제를 다룬 이 블로그 글을 검색해 읽어 보시오. [본문으로]
  2. “일부가 희생되더라도 성장이 우선해야 한다”는 쪽은 36.8%였다. 비슷한 설문을 포함한 경향신문 신년 여론조사도 비슷한 결과를 보여 준다. 성장 담론이 힘을 잃었다고 할 순 없지만, 예전처럼 일방적 힘을 발휘하지는 못 하는 것이다. [본문으로]
  3.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대중투쟁만이 과제를 성취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강력한 대중투쟁의 힘을 보유한 조직 노동운동의 중요성은 더 커질 것이다. [본문으로]
  4. 경제 위기 시대에 맞서는 투쟁의 초점 구실을 할 수 있는 행동강령 같은 것을 내놓는 것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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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내가 대선 결과로 가장 충격받은 건 1987년과 1992년 대선 때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각각 중1과 고3이었다. 


87년이 ‘어떻게 군사정권의 정통 계승자인 노태우를 찍는 사람이 이렇게 많지?’ 하는 순진한 충격이었다면, 92년은 ‘투표로는 정권을 바꿀 수 없겠구나!’ 하는 절망적 충격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87년엔 그래도 반군부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과 김영삼이 받은 표가 노태우와 김종필이 받은 표보다는 많았다. 그러므로 순진하고 식견이 짧은 나로서는 3당 합당을 했으니 만큼 92년 대선에서는 87년에 김영삼을 찍었던 표가 대거 김대중에게 넘어올 거라고 생각했다.(그렇다고 내가 3당 합당을 종파적으로 환영한 것은 아니었다. 3당 합당 당시에 엄청나게 증오하고 분노했다.) 


게다가, 보수 세력은 김영삼과 정주영으로 분열하지 않았던가. 반대로 민중운동의 대표체라는 전국연합은 김대중과 정책연합으로 지지를 몰아줬다. 그렇다고 백기완이 많은 표를 가져간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87년보다 겨우 2백만 표 더 받았을 뿐이었다. 


87년 대선의 지역주의 투표는 각자 지역의 대표 정치인에게 쏠린 것이었으므로, 분개는 했지만 내 깜냥에도 아주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92년 대선의 지역주의는 반동적 성격이 누가 봐도 명백했고, 광주에 살던 내게는 충분히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지금 노태우 퇴임 이후 20년 만에 정통 군사독재정권 계승자가 선거로! 권좌에 돌아온 이 상황이 많은 사람들을 힘겹게 하고 있다. 이명박 심판은커녕 더 악독한 우파 정부가 들어섰기 때문에 크게 절망감과 낭패감을 느끼는 듯하다. 


요즘 기분.


나도 속이 쓰리지만, 돌아보니 87년 대선의 당혹감과 92년 대선의 절망감보다는 견디는 데 덜 힘든 듯하다. 그때보다는 [이번에 그 실력 발휘를 못해 낭패를 겪었지만] 노동 대중의 조직과 계급의식, 정치적 자원은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이 성장해 있기 때문이다. 


내가 92년 대선의 실망감을 딛고, ‘어리석은 대중’ 식의 환멸감에 빠지지 않은 것은 표피적 선거정치보다 더 깊고 넓은 정치적 전망과 분석을 제공하는 마르크스주의에 유혹당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나는 누구나 실망스런 선거 결과를 보며 하기 쉬운 생각―대중은 미련하다―에 빠지지 않고, 노동 대중의 자기 해방이라는 전망과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사람들은 진공 속에서 투표하는 것이 아니다. 물질적 이해관계를 놓고 그러듯이, 사람들의  생각과 취향을 둘러싸고도 치열한 [계급간] 정치적 전투가 벌어진다. 선거는 그 과정의 한 점일 뿐이다. 그래서 진정한 세력관계가 왜곡돼서 드러나기도 한다. 


이것이 당선한 우파 정부가 펼칠 반동을 우습게 여긴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우리가 선거 결과에 짓눌릴 때, 그 점은 우리의 한계를 설정하는 선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새로운 점을 찍고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겐 여전히 다양한 그림의 가능성이 있다. 우리의 의지와 선택이 영향을 미칠 영역은 여전히 미래에 남아 있다.


역사적 사례를 살펴 보는 것이 이럴 때는 도움이 된다.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이 제대로 단결해 대처하기만 하면 우파 정부가 쉽게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걸 보여 준다. (늘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는 건 아니다. 박근혜 정권 앞날에 대한 내 대략적인 예상은 ☞ 바로가기)


아마 올해 한국 대선과 비슷한 사례가 2004년말 미국 대선이었을 것이다.  그토록 인기 없고 혐의의 대상이던 부시가 재선하고 난 뒤, 많은 사람들이 충격과 좌절에 빠졌다.(지구적 규모로 멘붕이 온 것) 그러나 신디 시핸 등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훌륭한 새 투사들이 등장했고, 덕분에 미국의 반전운동은 고삐를 늦추지 않을 수 있었다


재선 임기 첫해인 2005년 9월 워싱턴에서 개최한 반전시위는 거의 1백만 명이 참가하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는 더 많은 부문에서 반부시 운동들을 자극했다이런 압력 때문에 민주당에서는 부시 탄핵 보고서가 발간되기도 했다. 결국 2006년 중간선거에서 집권 공화당은 참패를 하고 럼스펠드 같은 자들이 행정부에서 밀려났다. 


프랑스 사회당은 1981년 국유화와 복지 강화를 내걸고 집권했으나 자본가들의 압력에 굴복해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했다. 사회당을 지지했던 노동자들의 사기 저하와 환멸의 자리를 채운 것은 1995년 대선과 총선에서 모두 이긴 우파 공화국연합의 집권이었다


우파 정부는 자신감을 갖고 그해 11월에 공공부문 민영화와 연금 삭감 등을 담은 복지 삭감 계획을 발표했다.


그러나 프랑스 노동자들은 전면적 공격에 맞서서 단결하고 행동하는 길을 택했다. 12월 12일에 2백만 명이 참가한 행진을 했고공공부문 노동자들은 3주간 파리를 완전히 마비시킨 “뜨거운 겨울” 파업에 나섰다. 유럽을 중심으로 신자유주의 세계화의 흐름에 브레이크를 건 분기점 투쟁이었다. 


결국 우파 정부의 복지 삭감 계획은 완전히 철회됐고휘청거리던 우파 정부는 3년 뒤 다시 사회당에게 정권을 내줬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1964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은 1960년대 말부터 시작된 경기 침체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파업권을 억누르고, 완전고용보다는 균형재정 유지 정책으로 대응했다. 그 결과, 노동자들이 반발해 노동자 투표율이 뚝 떨어진 결과, 1970년 정권은 보수당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을 히스 내각이 더 강화하자, 오히려 노동자들의 불만이 폭발했고, 엄청난 투쟁이 보수당 내각을 강타했다. 노동자들은 승전보를 울렸고 히스 내각은 4년 만에 노동당에게 자리를 내줬다. 


(문제는, 다시 집권한 노동당이 사회적 타협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도입해 노동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것이다. 이것이 대처 정부를 낳았다. 그럼에도 대처 정권 초기인 1984년 광부 파업 같은 거대한 투쟁이 일어났다. 노동당과 노조 지도자들의 의기소침과 나약함이 투쟁이 승리로 갈 수 있는 가능성들을 막아 버렸지만 말이다.


아마 좀 더 복잡한 상황이 2000년대 중반 프랑스일 텐데, 2002년 집권한 우파 시라크 정부의 몇 가지 중요한 신자유주의 개악 조처가 번번인 대중투쟁에 밀려 실패했다. 


그런데도 진보진영이 선거에서 대처를 제대로 못하는 바람에 또 우파 사르코지가 당선했다. 이번처럼 인기없는 우파가 재집권을 한 것이다! 좌파가 연합해 단일 후보를 내서 신뢰있는 대안을 승리한 운동의 참가자들에게 제공하지 못한 것이다. 그 운동의 승리는 폭넓은 단결 덕분이었는데 말이다. 


사르코지는 훨씬 더 냉혹하게 연금 축소 같은 개악을 밀어붙였다. 그럼에도 2007년 이후 프랑스 노동자들은 투쟁으로 대응했고 2010년에는 3백만 파업과 시위로 발전했다. 유감스럽게도 이 투쟁은 개악 조처를 되돌리지 못했다. 대신 사르코지 정권이 올해 선거에서 임기만료 판정을 받았다. 노동자들은 달라진 조건에서 다시 투쟁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1987년 민중항쟁의 성과물로 실시된 직선제 선거에서 전두환 독재 정권이 낸 학살자 노태우가 당선했다많은 이들이 좌절하고 당혹감에 빠졌다.


그러나 민중항쟁이 열어놓은 공간 속에서 폭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민주노조운동과 학생운동빈민운동 등이 전투성을 유지하며 전진한 결과노태우는 5공비리와 광주학살 청문회를 생중계해야 했고자기 손으로 ‘베프’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내야 했다.


민주화 항쟁이 곧바로 자신을 대표할 정권을 세우지는 못했지만전국민 의료보험 도입노동시간 단축 등의 각종 개혁을 쟁취했고노동자들은 노태우 정부 초기 몇 년 간 해마다 20퍼센트를 상회하는 임금 인상을 쟁취해냈다.


소련 붕괴로 말미암은 이념적 혼란, 91년 5월 투쟁의 패배 등 민중운동 진영의 전반적 사기저하 속에서 치러진 92년 대선에서 패배한 것은 어쩌면, 올해 대선과 비슷한 사례일지도 모른다. 대중운동은 김영삼 정권이 초기에 불러일으킨 개혁에 대한 기대감을 이용하며 조금씩 성장했다. 


노동자들은 울산 현대그룹 투쟁, 지하철 파업 등에서 패배하면서도 조금씩 기운을 다시 차리기 시작했고, 95년 학생들이 먼저 시작한 전두환 노태우 투쟁은 엄청난 사회적 압력을 낳아 지배자들을 분열시키며 마침내 기소와 1심 사형 판결까지 이끌어낸다. 


그뒤 치열한 공방이 오가면서 김영삼이 반동으로 기울었지만, 기운을 차린 노동자들이 민주노총을 결성하고 1년 만에 노동악법·안기부법 날치기 철회 총파업으로 대승리를 거두면서,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초석도 놓았고 일당국가 해체도 앞당길 수 있었다.


[아마 이런 종류의 더 많고 풍부한 사례들이 있을 것이다. 다른 분들의 기여를 바란다.]


우리는 1분간 하는 투표에서 우파 집권당을 심판하고 연장을 막는 일에는 실패했다. 그러나 [더 크고 결정적인 중요성 때문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해 온 운동과 조직에서 패퇴를 당한 것은 아니다. 여전히 수백만 명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런 분노가 새로운 힘으로 축적되고 발현되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단결력을 강화하며 참을성 있게 저항을 건설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면 우파 정부의 연장이 꼭 반동의 미래를 뜻하지 않을 수 있다. 저항 운동의 정치적 표현체 구축도 중요한 과제로 다뤄야 한다.  


터미네이터2 엔딩신이었던가. 멋진 대사였다.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내가 덧붙이는 말은, “우리가 포기하지 않는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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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위한 반동적 지배계급의 총단결로 대통령이 됐다. 그래서 그가 선거에서 표를 더 얻으려고 한 사탕발림은 공수표가 될 것이다. 지지층마저 배신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파 정부의 큰 위기 요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참을성있게 단결하며 저항을 구축해 가면, 기회를 잡고 이 모욕과 수치를 되갚아 줄 수 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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