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이는 진보 양당의 지도부가 추진하는 방향이기도 하다. 당장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에서도 진보 양당은 민주당과 함께 공동조사단을 꾸려 울산 공장을 방문했다. 민주노동당은 야 4당의 의원 합동 총회를, 진보신당은 야 6당 공동대책기구를 제안했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도 23일 민주당 대표 손학규를 만나 ‘비정규직 없는 세상 만들기, 노동 관련법 전면 재개정을 위한 범국민본부’(이하 범국민본부)에 함께하자고 제안했다 2. 2012년 총선까지 염두에 둔 제안이다.
심 전 대표의 “상설”협의체 제안은 6·2 지방선거 이후 주장해 온 ‘연합정치’의 새 버전인 듯도 하다. 그는 지방선거에서 국민참여당 유시민을 지지하며 후보를 사퇴한 뒤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의 일부를 포함하는 연합정당 건설을 주장해 왔다.
진보신당 대표 선거 불출마 후 대외 활동을 자제하던 심 전 대표는 11월 17일 민주당의 이른바 486 의원 모임인 ‘진보행동’ 출범식에도 진보정당 인사로서 유일하게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386세대”란 말 대신 “87세대”라는 표현을 쓰자며 이들과 공통점을 강조했다. 그리고 “국민들은 민주당이 바뀌어야 한다고 요구하고 야권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 진보정당도 과감한 변화를 해야 하고 틀에 안주하는 진보가 아닌 공동의 실천과 행동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비정규직 의제를 중심으로 한 정치연합을 구성하자는 주장은 얼핏 진보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현안 해결에서든 진보대연합에서든 민주당과 차이를 흐리는 방식의 연대는 비정규직 투쟁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발목만 잡을 것이다.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노동자들의 투쟁 연대고, 파업 연대다. 이 싸움은 서로 계급을 대표해 싸우는 것이므로 계급연합으론 제대로 된 진지를 구축할 수 없다.
사진은 11월 22일(월) 금속노조 대의원대회 장소에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조합원들이 붙인 연대파업 지지 대자보.
무엇보다 민주당 자체가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기간제법, 파견법 등 각종 비정규직 양산법을 만든 당사자다.
따라서 비정규직 차별을 해소하려는 연합이 되려면 민주당이 최소한 기존의 악법을 전면 개정하거나 폐지한다는 입장을 가져야 할 텐데, 지금껏 민주당은 이런 악법 도입을 반성조차 하지 않았다.
임종석이 ‘진보행동’ 출범식에서
“노동”과 “복지국가”를 중심 가치로 삼아 연합하자고
주장했지만 공문구로 들리는 이유다. 지금 민주당의 누가 딱부러지게 “‘파업’을 지지한다. 정몽구와 기업주들이 잘못했다.”고 말하는가. 없다.
현대자동차 투쟁에서 보듯 비정규직 차별의 주범은 바로 대기업들이고, 민주당은 바로 그런 기업주들에게 후원을 받아 활동을 하고 정권을 운영한 정당이다.
노무현 정부 때인 2004년, 노동부는 현대차 울산공장에 불법 파견 판정을 해놓고도 현대차 사측을 징계하지 않았다. 검찰은 명백한 위법인 불법 파견을 처벌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무현 정부는 1조 원 가까운 비자금을 조성해 양재동 본사 비밀금고에 보관하다가 구속된 정몽구를 금세 특별사면·복권해 줬다.
지금 현대차 사측이 대법원 판결마저 거부하는 것은 ‘불법 파견’ 문제가 단사 문제가 아니라 다수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사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당은 그 속성상 대기업과 우파 언론들의 압력에 동요하다가 배신할 것이다.
민주당과 국민참여당이 지금 현대차 자본에게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법질서 준수’을 말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안전할 뿐만 아니라, 그 판결이 자신들이 만든 법을 문제 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은 야당 아닌가.
그러나 이들 말대로 “대화를 통한 해결” 방법을 믿고 투쟁을 자제했다가는 오히려 뒤통수를 맞을 수 있다.
우리 편이 옳고 세력을 늘려 보이게 하는 효과는 있지만, 교섭의 성사를 위해 우리 쪽도 투쟁을 자제하라는 압력을 담은 양날의 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에서도 야5당이니 야4당이니 하는 이름으로 진행될 중재 압력을 경계해야 한다. 3
얼마 전 KEC 점거 파업 때도 야5당은 민주당 대표 손학규를 앞세워 ‘대화를 통한 해결’을 말하며 중재를 자처했지만, 대화의 전제조건이라며 노동자들의 농성 해제를 종용해 결국 승리의 기회를 놓치게 만들었다.(☞ KEC 부지회장의 관련 인터뷰)
당시 이 과정에서 손학규를 도와 중재자 구실을 한 홍영표는 이번 현대차 울산공장에도 진보 양당과 공동조사단으로 갔는데, 사실 민주당을 대표해서가 아니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간사라는 중립적 자격으로 간 것일 뿐이다. 그는 참여정부에서 노동유연화를 더욱 촉진할 한미FTA 추진 실무를 맡은 바 있다.
그들이 와서 지지한다면 말릴 필요는 없지만, 그들을 절대 믿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들을 믿거나 그들이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진정성이 있는 것처럼 포장하는 걸 도와주면, 그것은 중장기적으로 노동자투쟁과 진보정치의 발목을 잡는 부메랑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들은 중재의 이름으로 농성 해제와 교섭을 맞바꾸는 제안을 내놓을 수 있다.
그 점에서 진보정당 지도자들이 그들과 협력해 중재에 나서는 시도는 매우 유감스럽다. 중재가 아니라 연대투쟁을 조직하라. 앞서 인용한 심상정 전 대표의 “비정규직 해결 야권 상설 협의체”는 범야권 정치연합 추진에 진보적 당의정을 입히는 구실을 할 뿐이다. 김영훈 위원장의 “제2의 87년 항쟁” 제안도 마찬가지다.
1987년 당시 이른바 ‘민주’ 야당 지도자들은 대통령 직선제를 양보받자마자 6월항쟁을 멈추자고 했고 7~9월 노동자항쟁은 외면했다. 이들은 진정으로 노동자 투쟁과 함께한 적이 없다.
오히려 되살려야 할 기억은 1997년이다. 그해 1월 민주노총은 대중파업을 벌여 당시 새정치국민회의(민주당의 전신) 국회의원 1백 명이 막지 못한 김영삼의 날치기를 철회시켰다.
그때 파업 노동자들은 집회에 찾아 온 노동운동 출신 민주당 의원들을 야유하며 쫓아 보냈다. 국회의원들보다 자신들의 집단적 힘을 더 신뢰했기 때문이다 4.
▲김영삼의 노동법·안기부법 날치기에 항의해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한 달 간 대중파업을 벌였다. 매일 파업 노동자들 수만 명은 서울 도심에 모여 집회를 하고 행진을 했다. 당시 한국 정치의 주인공은 이 파업 노동자들이었다. 한 달 동안 9시뉴스는 파업 보도로 시작했다. 결국 김영삼은 아들을 구속하며 대국민 사과를 했고 국회에서 날치기를 철회했다. 김영삼은 완전한 레임덕이 됐고, 산 권력의 중재를 받지 못한 신한국당은 대선에서 분열했다. 민주노총의 파업이 바꿔놓은 정치지형과 집권여당의 분열, 그리고 경제 위기는 5·16 쿠데타 이후 37년 만에 일당국가에서 벗어나는 배경이 됐다.
※ 이 글을 다듬고 축약한 글이 <레프트21>에 실렸습니다. 주소: http://www.left21.com/article/8953
- 전태일 40주기 추도식. [본문으로]
- 민주노총은 이를 11월 7일 전국노동자대회에서 김영훈 위원장의 대회사를 통해 처음 공개 제안했다. 이것이 진보정당들의 비정규직 야권연대 구상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더 지켜봐야 할 듯하다. [본문으로]
- 대화를 통한 해결이란 주장은 중재의 목적을 교섭 성사에 둔다. 교섭 결과는 당사자들이 알아서 할 문제라는 것이다. 문제는 교섭 성사를 위해 점거농성을 풀면 막상 교섭에서 사측을 압박할 가장 강력한 카드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반면 사측의 카드는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해고와 징계, 고소고발, 경제적 압박 등. 이것이 어려운 투쟁을 할 때 중재자들이 당장 고마우면서도 위험한 이유다. [본문으로]
- 대표적으로 유신 시절 민주노조운동을 대표했던 원풍모방노조의 위원장 출신인 방용석이 발언도 못 해 보고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밖에도 더 많은 의원들이 망신을 당했다. 노동자들이 그렇게 했던 배경은 두 가지였는데, 하나는 당시 국민회의가 말과 달리 노동자들을 위해 진정성 있게 행동하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무능한 야당 대신 스스로 개혁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컸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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