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보다 빨리
시작한 박근혜 정부의 위기가
길어지고 있다. 현재 위기의 효과와 수준을 과장해서도 안 되지만, 여러모로 살펴 보면 위기인 것은 분명하다.
정부조직법 통과가 안 돼 취임 후 20일이 될 때까지 “식물정부” 소리를 들었다. 얼마나 열을 받았는지 박근혜는 3월 4일 대국민담화에서 “주먹을 불끈 쥐고 부르르 떨었다.” 문제는 “부르르 담화” 이후에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성장’과 ‘안보’를 강조하는 우파 정부가, 그것도 경제와 안보 위기가 특히 두드러지는 시점에서, 경제부총리·미래창조과학부(신설)·국방장관·청와대 안보실장(신설) 등을 임명 못 하고 있는 것도 참 상징적이다.
북핵 위기를 띄우며 박근혜가 지하에서 “벙커 회의”를 하는데, 정작 국방부와 군 고위층은 골프장에서 “벙커샷”을 즐긴 일도 위기상의 한 단면이다.
지지율 하락과 불통 행보 때문에 집권당 내부와 우파 사이에서 불협화음도 드러났다. 우파적 인물들인 국무총리 내정자 김용준과 헌법재판소장 내정자 이동흡을 낙마시키는 데 결정적 공헌을 한 것은 우파 신문 <동아일보>였다.
이런 사태가 민주당 탓인가 하면 꼭 그렇지도 않다. 정부조직법 협상에서 줄곧 후퇴하는 양보안을 낸 건 민주당이었다. 도리어 “협박근혜”의 ‘몽니’ 행보에 부담을 느낀 민주당은 법무장관 황교안 등 문제 인사들을 인사청문회에서 모두 통과시켜줬다.
결국 박근혜의 초반 위기는 일차적으로 정치 양극화 속에서 우파 본색 드러내기가 자초한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정부조직법 통과 후에도 위기 요소들이 곧바로 물밑으로 가라앉질 않을 것이다.
박근혜의 첫 내각 후보 명단은 “걸레 경연대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부패 비리 복마전 에 ‘박정희 유전자’로 채워진 인물들을 대거 내놓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당선을 위한 책략으로 내놓은 ‘복지’와 ‘경제 민주화’ 구호가 취임도 하기 전에 하나씩 철회되고 뒤집혔다.
이것은 그렇지 않아도 대선에서 반우파 정서로 뭉쳤고 반감을 풀지 않고 있던 ‘48퍼센트’(대선 반박근혜 득표율)를 자극했다. 심지어 박근혜 투표층에서도 이탈이 시작됐다.
박근혜가 아무리 “새로운 성장동력을 만들어 … 좋은 일자리를 많이 … 만들겠다는 목적 이외에 어떠한 정치적 사심도 담겨있지 않다”고 해도 미래창조과학부의 방송 장악 의도를 의심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이미 공중파 방송을 대선에 톡톡히 활용했고, 우파 언론들에게만 종편을 허가해 준 새누리당 정권 아닌가. 게다가 정보통신과 전자정부 업무 등을 통폐합하면서 국민 개인 정보들이 미래창조과학부로 집적돼 통제된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또, NGO 단체인 ‘내가 만드는 복지국가’와 ‘노년 유니온’ 등은 박근혜와 복지부장관 진영을 사기죄와 허위사실공표죄로 고소했다. 통치의 정당성에 문제제기를 한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가 새누리당을 거수기 취급을 한 것도 악수가 됐다. 대신 박근혜가 택한 것은 대국민 직접 호소 방식의 여론 몰이였다. ‘부르르 담화’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대선 투표층에서조차 ‘속았다’는 말이 오는 상황에서 이 작전은 성공할 수 없었다. 복지장관이 ‘복지 공약은 선거 캠페인용’이라고 하는 상황에서 ‘새 정부를 야당이 정략적으로 발목 잡고 있다’는 말이 먹히겠는가. 오히려 유신 선포식 같았다는 비아냥만 들었다.(물론 민주당은 겁을 먹었고, 인사청문회에서 모조리 양보하는 선물을 내줬다.)
오히려 국회를 완충지대로 이용하는 책략을 피하면서 도리어 새누리당만 무력해졌다. 오죽하면, 떠오르는 실세 측근인 국가미래연구원장 김광두마저 “직접 나서면 보좌하시는 분들이 타협을 하거나 좀 더 좋은 아이디어를 낼 룸(공간)이 전혀 없어진다”고 한탄했을까.
결국 박근혜의 ‘몽니’ 행보는 민주당을 끌어들여 ‘국민적’(여야) 합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대신 날치기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산 넘어 산’이라고 이번엔 ‘국회선진화법’이 발목을 잡았다.
이 법은 지난해 총선에서 패배할 것을 우려한 박근혜 새누리당이 ‘날치기와 몸싸움을 막자’며 18대 국회에서 만든 것이다.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과반수가 되는 국회를 견제하려던 법이 박근혜의 날치기를 막고 있는 것이다. 결국 정부조직법 날치기를 하려면 국회선진화법 개정 날치기부터 해야 하는 신세다.
그래서 집권당 내분도 있다. 최고위원회는 “소수에 의한 국회 지배를 보장하는 것이 돼서는 안 된다”고 강경하게 말하는데, 일부에선 “자기가 낳은 자식이 좀 어눌하다고 해서 의사에게 내 자식인지 아닌지 판정을 해 달라고 하는 꼴”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물론 지난 5년간 봤듯이 집권당의 당내 분열은 주요 변수가 못 될 것이다. 오히려 집권당과 행정관료, 또는 국가기구간 갈등으로 표출되는 것이 주요 변수가 될 것이다. 물론 아직 그 정도까지 위기가 진척된 것은 아니다.)
사실 많은 경우에 부르주아 정당과 언론들 사이에는 임기 초 행정부에게 협조해 주는 불문율(“허니문”)이 있다. ‘그들만의 리그’다운 신사협정인 것이다. 또 임기 초에는 공약 이행에 대한 대중의 기대감도 대체로 올라간한다.(투표하지 않았던 사람들도 기대를 보내게 되므로) 박근혜는 역대 최강의 보수대연합이 밀어준 정부였다.
그런데도 박근혜 정부가 임기 초부터 지지율 하락과 집권당 이완 상황이 벌어진 배경에는 경제 위기와 동아시아 긴장 고조 상황이 있다. 이것은 박근혜가 선택한 환경이 아니다. 지금 객관적 정세를 규정하는 가장 근본 요소라 할 수 있다.
우선 경제 위기 조짐이 빠르게 나타나고 있다. 올해 1분기 경제성장률이 1퍼센트대가 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런 낮은 1분기 성장률은 1998년이나 2009년처럼 큼지막한 경제 위기 때 말고는 기록한 적이 없다.
또 용산 개발 사업이 “단군 이래 최대 헛삽질”이 된 것도 위기의 심각성을 보여 줄 뿐 아니라 경기 폭락의 불안감을 더 키우는 요인이다. 게다가 북한 핵 실험 이후 한반도에서 군사적 긴장이 급속히 고조됐다.
이런 상황들이 박근혜를 밀어줬던 반동적 지배자들을 조급하게 만들고 있다. 핵심 기반이 이런 상태니 박근혜도 취임 초에 이런저런 민심잡기 쇼를 벌일 정치적 수단이 줄어들었다.
결국 경제 위기 조짐, 안보 위기를 배경으로 정치 양극화가 깊어지는 정치 환경 속에서 박근혜 본인도 더욱 신속하게 측근과 핵심기반에 의존하는 것으로 기울게 될 것이다. 정당성의 위기가 커질수록 인사와 통치 방식의 우경화는 갈수록 선명해질 것이다.
벌써 안보 위기를 이용한 통합진보당 마녀사냥 조짐이 벌어지고 있다. 박근혜는 “4대악 근절”을 내세우며 “법과 질서”를 통한 권위주의 통치 방식을 강화하려 한다.
물론 최근 이마트 압수수색과 재벌 세무조사 등으로 ‘경제 민주화’ 같은 포퓰리즘 언사도 다시 동원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곳도 아닌] 공정거래위원장에 재벌 앞잡이 김앤장의 변호사 출신을 내정한 것이야말로 본심 아니겠는가.
그래서 박근혜 정부의 앞날은 ‘반동’과 ‘동요’가 주요한 특징이 될 것이다. 대중의 불만이 조직된다면, 집권당은 서로 부패를 폭로하며 분열할 수 있다.
세계경제 위기와 동아시아 군사 긴장 고조가 국내의 경제·정치 위기로 옮겨오고 있다. 반제국주의·반자본주의·반우파·노동자 투쟁이라는 기치 아래 주장과 행동을 배치하는 것이 중요한 까닭이다.
박근혜의 정치 위기를 ― 노동운동의 사기 회복에 도움이 되도록 ― 줄기차게 폭로하고 활용하면서 싸울 태세를 갖춰야 한다.
□ 4·24 재보선과 안철수, 그리고 진보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박근혜 위기 때문에 4월 재보선이 관심사로 떠올랐다. 결과에 따라 박근혜의 임기 초 위기가 더 심해질 수도 있다.
의도치 않게 박근혜의 위기를 촉발한 구실을 했지만, 민주당의 ‘발목 잡기’는 여전히 어정쩡하고 수줍다. 결국 첨예한 정치 양극화 속에서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민주당 모두 지지율이 하락했다. (반새누리·비민주당 지대의 공백이 커졌다는 뜻)
이처럼 행정부와 국회 모두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새 정치”를 앞세운 안철수가 4·24 재보선 출마를 선언했다. 반박근혜 비민주당 층에서 정치적 공백이 생기자 안철수가 이를 메우려 나온 것이다.
게다가 정치 양극화가 가속화하면, 양극화를 봉합하려는 경향도 생기게 마련이다. 안철수는 정부조직법 협상에서 “제발 빨리 협상해서 결과를 만들어내는 정치”를 하라고 주문한다.
그럼에도 공식정치에 대한 거대한 불신과 반새누리 비민주당 진영의 공백 때문에 안철수가 부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양극화 봉합’ 노선이 대안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 정부조직법에 관한 언급처럼 모호하기 그지 없다.
그는 기성 정치에 ‘비전과 대안이 없다’고 비판하지만, 정작 ‘고통 분담을 위한 제살 깎기로서 국회의원 정수 축소’ 말고는 별 다른 “새 정치 비전”을 내놓은 바도 없다. 오죽하면, ‘안철수의 새 정치는 안철수 본인의 당선 말고는 없다’는 비판이 나오겠는가.
게다가 서울 노원병 선거구에 출마하면서 부당한 사법 탄압으로 이곳의 의석을 뺏긴 진보정의당과 노회찬 대표에 대한 진지한 배려도 없었다. 그가 진보정당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반새누리·비민주당 정서의 오른쪽 정도에서 양극화 봉합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이런 행보들은 안철수 발 정계개편이 박근혜 정부의 실패에 대비한 지배계급의 플랜B 구실을 할 수도 있다는 걸 보여 준다.
진보정의당 노회찬 대표는 “새 정치를 하겠다고 했으면서 지금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국회의원 한 번 해보려는 것처럼 움직인다”고 안철수를 직격 비판했다.
결국 4·24 재보선 국면은 진보정치 세력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반새누리 비민주당 층에 정치적 공백이 있다는 것이고, 이 층의 왼쪽을 대변할 정치 구조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지금 이런 논의가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았지만 내년 지방선거 전에 조만간 문제가 제기될 거라는 것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흐름에서 원칙있는 단결과 급진적 대안을 대변할 축을 단단히 세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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