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첫 인사적폐청산 공약과 거리가 먼 인사


진정한 개혁과 진보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문재인 정부의 초기 인사는 실망스러운 것이다. ‘개혁적’이라고 호평을 받은 인사들조차 특권형 부패 의혹을 받고 있다.

문재인은 대선 운동 기간에 ‘인사 배제 5대 기준(원칙)’으로 “논문표절·부동산투기·세금탈루·병역면탈·위장전입”을 제시하며 이를 저지른 인물은 공직 인선에서 배제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개혁 인사’라는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김상조, 외교부장관 후보자 강경화, “탕평 인사” 성격이었던 국무총리 후보자 이낙연 등이 모두 위장 전입 문제에 걸렸다.

이들이 받는 의혹은 모두 특권층형 부패 의혹이다 왼쪽부터 강경화, 김상조, 이낙연

물론 위장 전입을 불법으로 규정한 주민등록법은 국가 통제적 법이므로 구체적 사정에 따라 판단해 볼 일이다. 하지만, 김상조와 강경화의 경우는 모두 자녀의 명문 학교 배정을 위한 특권형 위장 전입으로 보인다.

이낙연은 위장 전입 외에 뇌물 입법 의혹, 처(妻)의 그림 강매 의혹 등이 제기됐다.

강경화는 해명도 거짓이었다. 애초에 친척집으로 위장 전입했다고 했으나, 실제 위장 전입 주소지는 딸의 입학을 목표로 한 이화여고(강경화의 모교)의 재단 소유 아파트였다.

김상조는 위장 전입뿐 아니라 탈세를 위한 부동산 거래 허위 신고(다운계약서) 신고 의혹, 처(妻)의 부정 취업 의혹 등 다른 특혜 의혹도 번졌다. 재벌 개혁을 천명한 탓에 기업주들이 채근하는 ‘검증’ 시도가 혹독할 것임을 이해하더라도, 의혹의 성격이 전혀 개혁적이지 않고 해명도 부실하다.

국가정보원장 후보 서훈은 인사청문회에서 민주당 스스로도 “반민주 악법”으로 규정했던 테러방지법을 “[현행 법이므로 국정원이] 이행하는 것이 맞다”고 밝혔다. 문재인의 국정원 국내 정보 파트 폐지 대선 공약에 대해서도 “국내 정치와 관련된 수집 활동만 폐지하겠다”고 선을 그었다. 그조차도 국정원의 국내 대공수사권(사실상 국가보안법 수사) 폐지에는 반대했다. 그는 민주적 권리를 위협할 사이버테러방지법 제정에도 긍정적이다.

사실상 새누리당 정권 9년의 국정원 적폐에서 무엇이 청산되는 것인지 어리둥절할 뿐이다. 서훈이 문재인 정부 초기 인사 중 맨 먼저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것으로 주류 언론들이 예상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청와대의 반부패비서관실 이인걸 임명도 문제다. 공안검사 출신인 그는 가습기 살균제 사측을 변호한 경력이 있다. 반부패비서관실은 노조 파괴 공작 박형철을 비롯해 반개혁적 인물들이 집결하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 인사의 부패 행위들이나 공약 후퇴를 비판하는 목소리를 진보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미디어 오늘>은 <한겨레>의 이낙연 의혹 추가 취재가 보도되지 않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 취재 내용은 이낙연이 부패한 결탁을 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대한노인회의 간부에게 의료 사업도 지원했다는 의혹이라고 한다.

이런 문제들에 침묵할 뿐 아니라 심지어 덕담하기에 바쁜 일부 진보 인사들의 면면을 보면, 수년 전 노동운동의 정치적 독자성과 전투성에 해를 끼쳤던 “전략적 야권연대”가 “전략적 여권연대”로 변신해 등장한 느낌이다.

그러나 정작 문재인 정부는 진보·좌파, 노동운동과는 분명히 선을 긋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동맹에 충성을 보내고 있는 셈이다.


새누리당 출신자들은 입 닥쳐라

조중동과 자유한국당, 바른정당은 이낙연 총리 후보 등의 인준에 반대한다. 부패한 후보들이라는 것이다. 개도 웃을 일이다. 총체적 부패로 여당 지위를 뺏긴 지 겨우 두 달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내각 임명 당시를 돌아보면, 위장 전입은 기본이고 부동산 투기, 전관 예우 특혜, 탈세 등 “걸레 경연대회”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이명박 정부는 인수위 시절부터 지자체 공금으로 향응을 받기도 했다. 이명박 때는 총리 후보인 한승수와 환경부 장관 후보 박은경이 부동산 투기 의혹이, 복지부 김성이는 공금 유용 의혹, 통일부 남주홍은 부당공제 의혹이 터져나왔다.

해명도 뻔뻔했다. 박은경은 청문회에서 땅 투기 의혹에 “땅을 너무 사랑해서”라고 했다. 결국 고려대 총장 시절부터 오물 덩어리였던 교육부장관 후보자 어윤대와 박은경, 남주홍 등이 임명 전에 낙마했다.

박근혜 정부도 못지 않았다. 박근혜 정부는 초기 낙마자가 너무 많아 인수위를 두 달 넘게 하고도 취임 한 달 후까지 내각 회의를 열 수가 없었다. 박근혜는 정권 4년 동안 총리를 3명밖에 기용하지 않았는데, 인사청문회를 두려워했기 때문일 것이다.

전관 예우 특혜, 탈세, 직위 이용 축재 등 이유도 전형적인 특권층형 부패였다. 심지어 미래창조과학부 김종훈은 CIA 요원(첩자) 의혹을 받고 낙마했다. 이때는 새누리당이 국회 과반수 여당이었는데도 내각 임명이 뜻대로 안 된 것을 봐도 얼마나 썩었는지 알 수 있다.

심지어 초대 총리 정홍원은 세월호 참사를 책임지는 모양새로 물러났으나, 후임자가 낙마해 다시 돌아와야 했다. 이완구는 성완종 리스트로 두 달 만에 낙마했다.

문재인 정부 초기 인사에 진보 쪽 비판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보니, 이런 썩어빠진 정권 출신자들이 정의의 대변인인 양 떠드는 가소로운 꼴을 보게 된다.


전두환 미화·찬양 이낙연은 총리 자격 없다

현직 전남도지사인 이낙연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 출신으로 우파와도 우호적으로 지내 왔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민주당 정부 때 중용됐다.

김대중 정부 때 민주당에 영입돼 국회의원이 됐고, 이후에는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을 지냈다. 민주당이 쪼개져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으로 분리될 때 민주당에 남았지만, 노무현 국회 탄핵에는 반대 투표한 것으로 알려졌다(당시 무기명 투표).

호남 배려와 중도 성향, 노무현과의 인연으로 총리 후보가 됐다. 하지만 부패 의혹이 많아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한노인회에 세제 혜택을 주는 법안을 두 차례나 발의했다. 그 기간에 대한노인회 간부에게 정치자금을 받은 의혹도 풀린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낙연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전두환을 미화·찬양하는 보도들을 한 것이다. 하나만 예로 들자. 1981년 2월 5일 한미정상회담 등 전두환의 해외 순방을 평가한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한미 관계의 정상 회복 선언 자체가 큰 결실 … [우방] 국가들이 그동안 한국에 대해 보여왔던 굴절된 태도들은 이제 적어도 침묵되거나 아니면 선회하는 조짐이 벌써부터 나타나고 있다.”

서방 국가들의 “굴절된 태도”는 전두환이 쿠데타와 광주항쟁 진압이라는 위험을 무릅썼다는 뜻이다. 그래서 전두환 정부를 곧바로 한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 강대국들의 위선이고, 금세 인정하는 것으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이런 제스처 동참을 “전통 우방의 대한(對韓) 태도에 훈풍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할 일인가?

△언론인이 대량 해직될 때, 자리를 지키며 출세길을 열려고 한 이낙연의 전두환 미화·찬양 기사(1981.2.5)와 광주항쟁 당시 〈전남매일〉 기자들의 항의 선언문(1980.5.20)(사진의 비석은 광주의 광주항쟁 기념 묘역에 있다.)

또한 이런 “전비어천가”를 늘어놓았다. “전 대통령의 방미가 대외적으로 얻은 수확들이 국내에 투영했을 때 그 결과는 승수 효과로 나타나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고 보면 전 대통령 방미의 결산은 대외 계정보다 오히려 대내 계정에 더 큰 수치를 올려놓아야 할지도 모른다. 한미 정상회담으로 「생업이 즐거워졌다」는 일부 성급한 보도가 나올 정도이고 보면 이 같은 계산 방식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반체제 동포의 모국 방문을 보장하겠다”, “나는 군사 정부에 명백히 반대하는 사람이다” 등 재미교포들 앞에서 전두환이 내뱉은 흰소리들도 미화했다. “이 같은 발언들은 … 재미 교민들이 모국에 대해 갖고 있는 거리를 좁혀 「민족 대화합」을 이루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나온 것 같다.”

주류 언론들이 이런 기초적인 사실 관계를 확인하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런데도 우파 언론과 친민주당 포퓰리즘 언론들이 모두 나름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 사실을 외면하는 듯하다. 오히려 일부 언론과 문재인 지지자들은 이를 찾아내어 따지는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매도한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처사다. 이낙연의 이런 경력은 거대한 촛불 운동 뒤에 등장한 정부의 첫 총리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인물을 호남 총리라고 인정하는 것이야말로 5월 광주 정신에 대한 모독이다.


공약 뒤집기

주요 인선에 문제가 생기고 심지어 문재인의 고위 공직자 인선 기준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자, 26일 비서실장 임종석이 사과했다. “선거 캠페인과 국정 운영이라는 무게가 기계적으로 같을 수 없다.”

그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자 29일 문재인도 “양해를 당부[했다.]” “공약한 것은 그야말로 원칙이고, 실제 적용에 있어서는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 … [물론] 그때그때 적용이 달라지는 고무줄 잣대가 되어서도 안 될 것 … 인수위 과정이 있었다면 … 사전에 마련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말 모두 개혁적 공약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음을 함축한다. 그래서 인수위 과정 없이 출범해 시간이 부족했다는 문재인의 해명이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정부가 급히 마련한 새 인사 기준은 가령 위장 전입과 관련해 이렇다. 국무위원 전원에 대한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2005년 7월 이후는 위장 전입자를 후보자에서 원천 배제한다. 그 이전은 부동산 투기 건만 배제한다. 문제가 된 딱 세 명을 구제하는 내용이다. 세 명 모두 2005년 이전 건이고 자녀 교육 목적이었다. 애초 위장 전입이 주민등록법 위반 문제라면, 2005년 7월이 기준이 될 논리적 근거가 없다. 일반인들은 위장 전입이 들통나면 지금도 처벌받는다.

문재인 정부 인사의 이런 약점들은 이 당의 기반이 구 여권과 마찬가지로 지배계급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제1선호 정당인 구 여권에 비해 제2선호 정당이므로, 정도는 좀 덜해도 지배계급의 부패한 네트워크 속에 포함된 인물들인 것이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의 표를 얻으려고 낸 포퓰리즘적 공약들도 ‘국정 운영은 다르다’며 뒤집을 가능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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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항쟁 30주년을 맞아 2010년에 쓴 기사.(바로가기



1979년엔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해마다 10퍼센트 넘게 성장하던 경제가 추락하기 시작했는데, 물가는 오일쇼크 탓에 22퍼센트나 올랐다. 8월 YH무역 노동자들의 신민당사 농성 투쟁과 10월 부마항쟁은 큰 충격이었다.


국내 정보를 총괄하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이대로는 체제 유지가 힘들다고 판단했다. 김재규는 10월 26일 궁정동 요정에서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였다.


그때,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다. 그중 박정희와 차지철이 죽었고, 김재규는 체포됐다.


이제 전두환은 유신 체제의 심장부에서 유일하게 권력을 쥔 채 살아남은 인물이었다. 그래서 10ㆍ26 직후에 일본 <마이니치> 신문(11월 1일치)은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전두환에게 힘이 집중된 것은 박정희 덕분이었다. 전두환은 1961년 5ㆍ16 쿠데타 이틀 뒤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지지 시위를 벌여 박정희의 총애를 받기 시작했다.


박정희는 1979년 1월 국가비상사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ㆍ지휘하도록 조처했다. 그리고 3월,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했다.


박정희가 사망한 뒤 유신 체제를 지속하려는 전두환 일당의 의도와 달리, 최규하 임시내각과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등은 긴급조치 9호를 철회하고 유신헌법 개정 계획을 공표했다.


전두환 일당은 12ㆍ12 쿠데타로 대응했다. 이 사건으로 전두환 일당이 장악한 신군부가 탄생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살아남았다.


이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중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가 충돌하는 것은 필연이었다.


1980년 봄, 계엄 확대 전까지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다. 유신 시절 전체 파업 수보다 많았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에선 탄광 노동자들이 사북면 전체를 장악했다.



서울의 봄


그러나 김대중과 김영삼 등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확산되면 신군부에게 쿠데타 명분을 준다며 자제하라고 호소했다. 서울의 학생운동 지도자들은 여기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5월 15일 서울역에 10만 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그러나 시위 지휘부는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다. 14일부터 3일간 전남도청 앞 분수대 광장에서 시민 수만 명이 민주대성회를 열었다. 이 집회는 ‘계엄이 확대되면’ 도청으로 모이자고 결정했다.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를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로 봤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된다. 군부 통치의 시작인 것이다.


광주는 민주대성회에서 내린 대중적 결정으로 계엄 확대 뒤에도 계속 저항할 수 있었다. 더 깊은 배경엔 박정희 정권 아래서 벌어진 의도적인 지역 차별이 있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다.


결국, 신군부는 시위가 잦아진 틈을 이용해 5월 17일 자정, 계엄 확대 조치를 실행에 옮겼다. 이는 합법적으로 신군부가 정치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광주에서 이에 맞서는 저항이 터져 나왔다.


1980년 5월 18일 일요일 오전 10시 전남대학교 정문 앞. 계엄 확대 소식을 듣고 모인 학생들을 맞이한 것은 새벽에 이미 학교를 점령한 특전사 소속 공수부대였다.


광주항쟁 최초의 시위가 시작됐다. 밀려난 이들은 광주역과 시외버스 터미널을 거치며 시민들과 합세해 전남도청으로 향했다. 이에 맞춰 “화려한 휴가”(광주 진압 작전명)도 시작됐다.


최초 사망자는 말하기도 듣기도 안 되는 장애인 김경철 씨였다. 친구들 배웅을 나왔던 그는 왜 구타를 당하는지도 모른 채 뒤통수가 깨지고, 팔과 어깨, 엉덩이와 허벅지가 으깨져 죽었다.


공수부대는 가정집까지 뛰어들어가 사람들을 연행했다. 잡힌 사람은 발가벗겨 기절하도록 두들겨 팬 뒤 트럭에 던져 넣고 실어갔다. 맨몸의 시위대를 향해 화염방사기가 불을 뿜었다.


19일부터 저항도 더 거세졌다. 이제 항쟁은 영세 작업장 노동자, 택시 기사 등 평범한 노동자들이 주도했다. 공수부대가 추가 투입됐지만 저항의 확대를 막지 못했다.


20일 저녁, 버스와 택시 3백여 대가 금남로 전 차선을 채우고 도청으로 향했다. 감격한 시민들 수만 명이 이 대열과 함께 행진했다. 이날, 시민 10만여 명이 밤샘 대치에 참가했다.


항쟁을 왜곡 보도한 MBC와 KBS 방송국이 분노의 불길에 휩싸였다. 세금으로 키운 군인이 국민을 죽인 것에 항의하는 표시로 세무서 건물도 불태웠다.


아시아자동차공장 노동자들은 시위대에 장갑차 등 군용 차량을 내줬다. 증파된 병력의 광주 진입을 시민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막았다. 동네별로 밥과 반찬이 시위대에게 전해졌다.


시위대가 요구한 계엄군 철수 시한은 21일 정오.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도청으로 향했다. 애국가 방송을 신호로 무차별 사격이 시작됐다. 옥상과 헬기에서 조준 사격을 해댔다.


이제 저항은 무장 항쟁으로 발전했다. 나주와 화순 등에서 무기고를 찾아내 총과 탄약을 입수했다. 시위대는 차량으로 전남 각지를 돌며 항쟁 소식을 전하고 자원자를 태워 돌아왔다.


시민들의 놀라운 용기와 투지에 밀린 계엄군은 결국 21일 밤 전남도청을 내주고 도망쳤다.


그때 시신안치소 구실을 했던 도청 앞 상무관에는 대검에 난자당하거나 철심 박힌 박달나무 곤봉으로 구타당해 얼굴이 짓이겨지고 총격에 머리통이 날아간 시신들이 넘쳐났다. 이런 미확인 시신이 수백 구에 달했다. 당시 항쟁 지도부가 파악한 행방불명자만 2천여 명이 넘었다.



해방 광주


‘사냥개’가 물러간 곳에 부상자를 위해 헌혈에 참가하고 시민군에게 밥과 반찬을 지어 나르는 우애와 협력이 들어찼다.


22일부터 시민들은 도청 광장에서 날마다 민주대성회를 열고 항쟁을 민주적으로 조직했다.


시신 수습부터 치안까지 스스로 해냈다. 천대받던 밑바닥 노동자들, 여성들, 고교생들이 주역으로 나섰다.


누구나 총을 들고 다닐 수 있었지만, 매점매석도 범죄도 없었다. “해방 광주”는 저항과 자치에 관한 평범한 민중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그러나 도청에서 쫓겨난 계엄군은 광주를 포위하고 시외통화마저 끊었다. 이제 “해방 광주”는 고립무원이 됐다.


TV에선 ‘간첩이 일으킨 소요를 조만간 진압할 것’이라는 뉴스가 나오는데, 다른 지역과 통화할 방법이 없었다. 초조감과 공포감이 엄습해 왔다.


시 외곽에선 밤마다 총소리가 울렸다. 불빛이 새 나가 총알 세례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밤마다 창문에 솜이불을 치고 잤다.


광주 시민들이 믿었던 ‘민주주의 우방’ 미국도 학살자의 편이었다.


5월 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다.


지역 명망가들이 주도한 시민수습대책위원회가 가장 크게 동요했다. 이들은 수습위를 꾸리자마자 무기 반납부터 했다. 먼저 항복하면 선처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항쟁에 앞장선 노동자와 학생들은 신군부와 타협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들은 새로 항쟁 지도부를 꾸리고 마지막까지 도청을 지켰다.


이들의 목숨을 건 무장 저항은 국가권력의 폭압에 굴복하지 않는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저항 정신을 대변했다.


정규 군대를 끝내 이기지는 못했지만 광주항쟁은 국가권력의 주인이 누구인지 물었고, 민중의 뜻이 관철되는 것이 진짜 민주주의라는 걸 웅변했다. 학살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핏자국을 새겼다.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라는 27일 새벽 선무방송은 이들의 유언이 됐다.



부활


1980년 5월 광주항쟁은 군사적으로 패배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패배하지 않았다.


위대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유언이 ‘살인마’보다 힘이 셌다. 장기 집권을 꿈꾸던 ‘살인마 전두환’은 핏자국을 지워 보려고 광주항쟁 구속자를 3년 만에 모두 석방하고, 학원 자율화 등 유화조처를 취했지만, 1980년대 청년 시절을 보낸 한 세대가 급진화하는 걸 막지 못했다.


광주 정신은 1987년 6~9월 전국적 민중 항쟁으로 부활했다. 1987년 민중항쟁이 폭발하자, 군부는 물론이고 미국 지배자들도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친미적인 전두환 정부를 보호하지 못했다.


광주항쟁 8년 뒤, 전두환은 산속 절로 쫓겨갔고, 그 8년 뒤엔 오히려 내란죄로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됐다. 5월 18일은 국가기념일이 됐다. 1997년엔 마침내 일당 독재가 끝났다. 


그러나 당선하자마자 전두환 일당을 사면하고, 노동자ㆍ민중의 생존권 대신 재벌을 배불리며, 미국의 제국주의 정책에 협조한 김대중ㆍ노무현 정부가 광주항쟁의 정신을 이어갈 순 없었다.


평범한 민중의 용기와 연대, 국가권력의 억압에 굴복하지 않는 “해방 광주”의 정신은 노동자와 학생, 피억압 민중의 투쟁으로, 촛불항쟁으로 이어져 왔다.


‘살인마’를 계승하는 자들이 집권한 지금, “해방 광주”의 정신이 거리에서, 작업장에서 부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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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25년

마침내 기지개를 켠 노동계급의 힘과 전투성



1987년 8월 6일 현대중공업에 회장 정주영이 나타났다. 7월 울산 현대그룹 공장들에서 불붙기 시작한 노동자 투쟁과 민주노조 결성을 막으려고 ‘왕회장’이 직접 나선 것이다. 


노동자들은 정주영이 관리자들을 모아 놓고 훈시를 하고 있던 회사 체육관에 몰려가 담판을 요구했다. 위력에 눌린 정주영은 노동자 2만여 명이 모인 운동장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노동자가 정주영에게 흙을 뿌렸다. 정주영이 입버릇처럼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노조를 허용할 수 없다’고 말해 왔기 때문이다.  



△1987년 대투쟁 당시 울산 현대중공업 노동자들 이 투쟁으로 한국 사회에서 노동계급이라는 거인이 깨어났다. 노동자ㆍ민중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은 ‘87년체제’라는 한국사회의 전환점을 만든 진정한 동력이었다. ⓒ사진 출처 민주노총 울산지역본부



현장 노동자들의 이런 분노와 투지가 전국 곳곳에서 분출된 이 해 여름, 현대그룹은 물론이고 전국 곳곳에서 군부 독재의 공장 버전인 군대식 현장 통제가 무너졌다. 이 석 달 동안에만 민주노조 1천여 개가 새로 탄생했다.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은 더는 천대받는 ‘공돌이ㆍ공순이’가 아니었다. 관리자들에게 욕을 먹고도 찍소리 못 하는 바보가 아니었다. 더는 출근 때마다 정문에서 복장과 두발 검사를 받고 머리카락을 잘리는 일을 겪지 않게 됐다. 더는 점심 때 회사가 준 ‘쥐똥이 까만 콩처럼 섞여 있는 도시락’을 억지로 먹지 않게 됐다. 


이제 파업과 쟁의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개선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다. 그 결과, 그 해 가을에 노조 설립 요건을 완화하고 법정 노동시간을 4시간 단축하는 등의 노동법 개정을 쟁취했다. 이후 3년 동안 매년 10~30퍼센트에 이르는 임금 인상을 따냈다.


‘쥐똥’


사실 1960년대 이후 한국 경제는 독재정권과 기업주 들이 노동자와 민중을 쥐어짠 대가로 성장했다. 세계에서 가장 긴 노동시간과 저임금, 군대식 현장 통제, 사회적 천대가 이른바 ‘경제 기적의 시대’에 노동자들에게 돌아온 몫이었다. 


독재정권 아래서 노동자들은 자주적으로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하기가 쉽지 않았다. 삼성, 현대 등 대기업들은 이런 억압 덕분에 굴지의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말했듯이, “자본이 발전하는 것과 같은 정도로 …  현대 노동자 계급은 발전한다. …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노동자 계급)들을 생산한다.”


독재정권과 기업주들은 경제 성장을 위해 노동자들을 억누르고 쥐어짰지만, 그 성장은 더 많은 노동계급을 만들어냈고 도시로, 더 큰 공장으로 밀집시켰다. 


박정희 정권 초기만 해도 7백만 명 수준이던 임금 노동자는 1980년대 중반에 1천5백만여 명을 넘어섰다. 특히, 제조업 노동자 수가 꾸준히 늘어 같은 기간에 1백만 명도 안 되던 것이 약 4백만 명으로 늘었다. 중공업 노동자의 비중도 덩달아 높아졌다. 


이른바 ‘경제 기적’은 현대 자본주의의 또 다른 거인인 노동계급도 성장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1987년부터 한국 경제는 “단군 이래 최대 호황”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것은 양적, 질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들이 싸움에 나설 자신감을 갖출 수 있는 배경이 됐다. 


1987년의 민주화 항쟁이 4ㆍ19혁명이나 1980년 ‘민주화의 봄’처럼 군부의 반동으로 역풍을 맞지 않은 것은 마침내 이 거인이 기지개를 켰기 때문이다. 


사실 연초부터 6월까지 벌어진 항쟁은 자유주의 야당과 전투적 학생운동, 그리고 여러 사회 집단이 항쟁에 참여했다는 점에서 ‘국민적’ 투쟁이었다. 


당시 6월 항쟁 지도부인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의 대표단에 노동운동 지도자는 5퍼센트도 안 됐다. 전두환 정권이 1985년 대우자동차 파업과 구로동맹파업을 겪으면서 강력한 탄압 정책으로 돌아선 탓에 노동운동이 위축된 탓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항쟁 과정에서 개별 노동자들의 참가 비중이 갈수록 늘었다는 것은 경남의 제조업 공단 지대나 대도시의 구속자 중 노동자 비중이 늘어나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다.


독일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가 《대중파업》에서 지적했듯이, 군부 독재를 패퇴시키며 정치적(절차적) 민주화를 진전시킨 6월 항쟁(정치투쟁)은 노동 대중이 폭넓게 작업장 민주화를 위한 투쟁(경제투쟁)에 나설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남겼다. 


마침내 전두환 정권이 한 발 물러서자,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6월 항쟁에 개별적으로 참가했던 노동자들은 이제 거리의 민주화를 작업장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반면, 6월 항쟁의 일부였던 자유주의 야당들은 노동자 대투쟁과 거리를 뒀다. 


군부 독재 아래서도 조금씩 운동과 의식을 발전시켜 온 노동자들은 노동조건의 개선 문제를 일회성 투쟁이 아니라 자주적 노동조합 건설로 해결하려 했다.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은 민주노조 건설 염원을 이렇게 표현한 바 있다. 


“노동자들이 민주노조를 포기할 수 없는 건 그게 아니면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기 때문 … 그렇게 하면서 나도 노동자라는, 나도 인간이라는 선언을 비로소 할 수 있었습니다.”


결정적 계기는 7월 5일 울산의 현대엔진에서 민주노조가 결성된 일이었다. 무노조 왕국을 선포했던 현대에서 무노조 방벽이 뚫리자, 이후 현대미포조선, 현대중공업, 현대자동차로 민주노조 결성과 투쟁이 순식간에 퍼져 갔다.  


민주노조


현대그룹이 현대중공업에서 어용노조를 만들어 민주노조 결성을 방해하자, 울산 현대 노동자들은 8월 17일과 18일 연대 파업을 하고 울산 일대를 휘젓는 거대한 행진에 나섰다. 


샌드머신 등 중장비를 앞세우고 가족까지 동반한 6만여 명의 행진 앞에서 전투경찰도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행진의 종착지인 울산 공설운동장에는, 한때 울산에 위수령을 검토한다던 전두환 정권의 노동부차관 한진희가 ‘직접 교섭하자’며 기다리고 있었다!


억눌린 봇물이 터지자 노동자들의 전투성은 걷잡을 수 없이 발전했다. 7~9월 동안 하루 평균 30건 넘게 파업이 발생했다. 이것이 1970년대 중반 이후 발생한 쟁의를 모두 합한 것보다 많다는 통계가 있는데, 또 다른 통계로는 1961년 이후 모든 쟁의를 더한 것보다 많다. 


울산 현대그룹의 민주노조 결성을 주도했던 지도자 권용목마저 “조합원들이 통제를 벗어날까 봐 두렵다”고 해야 했을 정도였다. 


정부(경찰)와 사장들이 워낙 노동자들을 억눌러 왔고 또 그런 통제가 관행화돼 왔기 때문에 민주노조를 만들려는 노력조차도 작업장 농성과 파업, 경찰과의 거리 전투 등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87년 7~9월 대투쟁의 전형적 양상은 “선파업 후교섭”이 됐다. 이처럼 노동자 대투쟁의 가장 큰 특징은 아래로부터의 자발성과 전투성, 자기 조직화 역량이었다. 


대투쟁을 거치며 대기업 제조업 [남성] 노동자들이 민주노조운동의 주력으로 부상했다. 노동운동의 새물결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 시기 노동쟁의 총 참가자의 81퍼센트인 99만 명이 제조업 노동자였다. 특히, 노조가 없는 곳에서 벌어진 쟁의의 90퍼센트가 제조업 부문이었다. 


노동운동의 전통이 그나마 있던 수도권이 아니라 울산에서 시작해 부산, 마산, 창원, 거제 등 경남의 제조업 공단을 거쳐 전국으로 확산한 것이 그 방증이다. 대한조선공사(한진중공업), 대우조선 등에서 노동자들은 작업장 점거와 거리 전투로 위력을 보였다. 


물론 이 시기엔 전교조의 전신인 전교협(전국교사협의회)이 7월에 결성되는 등 더 폭넓은 노동자들의 조직적 진출도 이뤄졌다. 


정권은 8월 하순부터 강경 탄압 기조로 돌아섰다. 그 과정에서 대우조선 이석규 열사가 직격 최루탄에 맞아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노동계급이라는 거인은 이제 막 잠을 깨 경험이 부족한 탓에 국가 탄압에 맞서 전국적 조직이나 연대 파업을 곧바로 건설하지 못했다. 대투쟁은 9월 중순부터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노동자 대투쟁의 여파는 컸다. 그해 6월에도 군대를 출동시키려다 포기한 전두환 군사 정권은 결국 7~9월의 노동자 투쟁 물결을 보며 반동을 포기한다. 대투쟁이 만들어낸 민주노조운동은 절차적 민주화를 되돌리기 힘들게 만든 진보 운동의 강력한 진지가 됐다. 


투쟁의 교훈에서 잘 배운 노동운동은 더디지만, 전진을 계속했다. 이후 2년 만에 노동조합 5천여 곳이 새로 만들어졌고, 90만 명이 새로 노동조합원이 됐다. 전노협 등을 거쳐 1995년에 민주노총을 만들었다. 


민주노총은 1996년 말에서 이듬해로 이어진 노동악법ㆍ안기부법 반대 파업을 승리로 이끌었고,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추진해 2004년에는 의회 진출에도 성공했다. 물론 IMF 위기 이후 정리해고 도입에 합의하는 등 ‘정치적 약점’도 크게 드러냈다. 


지금 세계경제 위기를 배경으로 한 정부와 기업주들의 반동 공세에 시달리고 있는 노동운동이 25년 전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현상적으론 강점이던 전투성의 위기에 빠져 있는데, 사실 경제 위기 시대에 전투성은 정치를 통해서 유지할 수 있다. 그리스 사례를 보라.)


노동자들은 억압적 조건에서도 단결해 싸우는 것이 가능하고,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전투적 투쟁을 통해 노동자들은 노동계급 대중[파업] 투쟁(과 그 능력)이야말로 진정한 변화와 개혁의 동력이라는 것을 스스로 증명했다. 


필요한 것은 전국적 계급 정치였다.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인 오늘날, 대투쟁의 교훈은 갈수록 반자본주의 계급 정치를 발전시키는 문제가 되고 있다. 따라서 계급의 [집단적 투쟁과 승리의] 기억에서 교훈을 배우며 당면 투쟁에서 정치적 임무를 끌어내야 하는 사회주의자들의 과제와 조직 건설도 매우 중요하다.



※ 이 글은 일부 축약해 <레프트21> 88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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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정부가 두 차례 집권했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민주개혁도 없고, 사는 건 더 힘들어지고, 오히려 정부 정책은 부자와 기업주만 이로운 정책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운동의 성과물로 집권했지만, 단순한 집권세력 교체는 일당국가를 해체했지만, 사람들이 바랐던 희망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운동의 리더들이 민주당 등을 통해 기성 정치권에 진입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기득권 질서의 얼굴마담이 됐을 뿐입니다. 

진정한 권력자들은 ― 대기업주들, 토지/금융 자산가들, 군부, 고위관료들 ― 선출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더 분명해 졌습니다. ‘삼성공화국’이란 말은 요새 상식처럼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주들이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건 아닙니다. 이들의 파워는 고위 관료와 언론, 법조계 등과 엮여 있습니다.

삼성을 지배하는 이건희 일가와 그 일당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만, 한편에서 권력 유지를 위해 막대한 돈을 ‘뇌물’로 바쳐야 합니다. 최근 천안함 조사 등의 청문회에서 보듯, 고위 군인들이나 관료들이 청문회 등에서 국회의원들 다루는 태도에는 여전히 권위주의가 남아있습니다. 삼성 일방 지배가 아니라 대기업주와 대자산가들, 고위 정치관료(군인 포함) 들의 동맹 지배입니다.

민주당 정권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데 실패한 이유입니다. 이들은 늘 이 진정한 권력자들의 충실한 동료이거나 조력자였습니다. 그런 점에선 의회중심 진보정당 노선도 한계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이명박이 제도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우습게 만드는 걸 보면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불가역의 성과가 아니라 매우 허약한 것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기업주들은 경제위기로 흔들리고 저항을 억누르는 게 일차 과제라고 느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도가 늘 관철되는 건 아닙니다. 이명박 집권 후 가장 약했을 때는 가장 정부가 강해야 할 선출 직후였습니다. 바로 2008년 촛불운동이 이들의 집권 플랜을 흔들어 놨습니다. 요새 보이는 이명박의 무리수는 모두 이때 중요한 우파 개혁을 시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2008년 촛불운동은 정권이 힘있는 상태일 때, 전격 실행해야 할 인기없는 개혁들 - 공공서비스와 의료 민영화 등- 의 추진력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세계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정책 수단의 폭이 매우 좁아 졌습니다. 그뒤 지난 2년간 경기부양에 중심을 두고 왔는데, 이젠 이 정부의 발목을 잡습니다. 감세 정책이 경제 위기로 지출을 늘린 재정 정책의 발목을 잡습니다. 재정을 늘려야 하는데 세수가 줄어드는 겁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명박 정부가 숨길을 트는 길은 정권 반대파들의 민주적 권리를 억누르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밖에 없는 듯 보입니다. 당근으로 노동계급과 서민 대중을 달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적 권리를 빼앗아 저항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문제는 혐오스런 이 정권을 촛불항쟁으로 맞이했던 사람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촛불 트라우마를 용산과 쌍용차에서 만회하려 했으나, 지배자들 자신도 그 과정에서 상당한 트라우마를 입었다는 게 용산참사 총리 사과와 올해초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등에서 드러났죠. 

막대한 북풍 여론 몰이와 엉터리 여론조사를 뚫고, MB 심판 의지가 드러난 지방선거 결과도 저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키울 듯합니다.[각주:1] 

이처럼 아무리 부르주아민주주의라도 그 안에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자치의 요소를 반영합니다. 국가에게서 자유를 획득한 영역,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과 집회로 표현하고, 그것을 조직으로 구현해 제도화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주주의는 피지배계급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사법부 마녀사냥으로 3권 분립을 해쳐 부르주아민주주의마저 무시하는 듯이 보였을 때도 그 본질은 노동계급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던 거죠.

주목할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 안에 포함한 피억압자들의 자치 요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인 노동계급의 권리들 - 노동조합 결성과 행동권, 노동계급 기반의 진보정당, 언론 등 - 은 쉽게 건드리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한국에서 탄탄하게 형성돼서 저들도 쉽게 승산을 따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명박 시대 민주적 권리가 축소된 게 사실이지만 그 공포와 후퇴 효과를 과장하는 게 잘못인 이유입니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를 파쇼라 부르며 반한나라 대동단결을 외치는데, 이는 단견입니다. 왜냐면, 정권 뜻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광주항쟁의 투사들이 그랬듯, 민주주의란 피억압 대중의 운동이 억압적 권력과 맞서는 형국에 따라 앞으로도 뒤로도 갑니다. 그래서 1970년대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싸우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악법을 없애라 하면서 싸운 겁니다. 제도가 아니라 계급 세력관계가 핵심입니다.

운동은 조직과 사상이라는 성과물을 통해 경험과 이론, 인적 연결망을 현재의 것으로 남겨 둡니다. 운동이 탄력을 잃고 재구성됐어도 쉽게 성과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 이 성과들이 조직으로 구현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탄탄하고 지속적이며 힘을 갖는 건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입니다. 노동조합 뿐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반동을 한다는 것은 이 사회 지배자들이 피억압 대중에게 허용하던 정치적 시민권을 제약하고 억압한다는 말로, 이는 가장 강력한 피억압 대중의 조직과 운동인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 권리를 공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다른 조직력과 투쟁력을 보유한데다, 이들이 실제로는 사회를 운영하는 노동을 하기 때문에 무작정 학살할 수도 없구요. 이 조직들이 반동에 맞선 저항의 보루 구실을 하게 되는 이유죠. 그 점에서 촛불항쟁이 노동계급 중심의 변혁 사상과 결합하는 수준으로 발전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각주:2].

광주항쟁의 한계는 바로 이런 운동과 조직이 아직 한국 사회에 등장하기 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한계였다고 봅니다. 전국의 지지 파업은커녕 광주에서도 파업 같은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동원한 항쟁 참여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광주항쟁의 존재는 1980년대 운동이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 독재의 연장이었지만, 이 정권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더 유연한 정책을 펴야 했습니다. 

△ 1987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


첫째, 광주항쟁이 운동의 발전에 도약대가 된 것은 평범한 노동 대중이 저항과 사회운영 능력에서 잠재력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독재에 반대한다 해도 지역 유지·명망가와 정치인·기업주들이 포함된 수습위원회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호남전기 여성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는 최근 증언이 있고, 아시아자동차처럼 현장 노동자들이 항쟁에 협조한 사례도 있습니다. 시민군 사망자와 부상자의 절반 이상이 하층 노동자들이며 항쟁[시민군] 지휘부의 다수도 노동자 출신이란 점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운동의 성격에서 배우고, 잘못되긴 했지만 혁명적 스탈린주의를 채택한 다수 운동가들이 대중의 잠재력에 바탕한 권력을 봉기로 타도하는 급진적 정치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발전 수준은 어느 정도는 경제 발전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세력을 만들어 낸다는 마르크스의 분석적 예언의 위력을 살인마 전두환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두환 시절, 정권에겐 운 좋은 3저 호황이 대중적 노동계급 운동이 탄생하는 토양이 됩니다.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에 따른 노동계급의 전반적 자신감과 노동운동의 성장은 1987년 항쟁의 수준과 조건을 1980년과는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놨습니다. 1987년 6월 민중 항쟁은 뒤이은 7~9월 노동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진정은 어느 정도 불가역적인 힘을 획득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제대한 군바리로 정권을 넘기고(노태우), 일당 체제 안의 민간인에게 넘기고(김영삼), 그 다음엔 아예 정권을 넘깁니다(김대중). 그리곤 1987년 항쟁의 투쟁적인 명망가 출신들이 정권을 잡습니다(노무현).

이런 진보가 이명박으로 뒤집힌 건 순전히 점차 왼쪽으로 바뀐 정권들이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 성장의 역사에서 민주당의 실패도 봐야 하고, 노동자운동의 구실도 봐야 합니다.

둘째, 경제위기에는 저항을 하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이나 격렬하게 나설 개연성이 큽니다. 사소한 요구에서 시작한 저항이 격렬한 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뒤에는 심각한 경기침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1979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때문에 박정희는 노동계급 궁핍화 정책을 폈습니다. 한마디로 공공요금과 생필품 가격을 올리고(물가가 20퍼센트나 오름), 임금과 일자리 등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여 기업주들을 보호하고 위기에 빠져 나가려 했습니다. YH무역 투쟁의 요구도 일자리 보호였습니다.

1980년은 1998년 전까지 유일하게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 해입니다. 1980년 봄에만 유신 체제 아래서 벌어진 파업 수보다 많은 9백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강원도 사북에서도 광부들이 읍 전체를 장악하는 ‘사북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세계경제 위기와 한국경제의 장기 침체가 겹친 상황에서 우리의 민주주의 요구는 정치적 시민권과 경제적 시민권 요구를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배고프게 하는 정책을 비민주적으로 추진합니다.

셋째,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하고 광주항쟁의 투사들은 물었습니다. 오로지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 국가의 물리력을 정치·도덕·경제적으로 압도할 때만(그래야 우리 편의 진정한 군사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국가의 무장력은 우리 앞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이 강력한 힘이 사회 변혁을 위한 다수의 저항을 이끌어야 한다.

이런 투쟁이야말로 민주적 대안 권력의 씨앗일 겁니다. 그래서 가장 잘 조직돼 있고, 이 사회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노동계급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해 조직하는 것, 이들의 힘이 나머지 피억압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 이것들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교훈을 종합하면, 정치·경제 위기에 처한 국가권력의 도발에 단호하고 단결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저항 행동의 사사을 알리고 주도하며 조직할 투사들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노동자운동 안에서. 그래서 운동이 정치·도덕적으로 무장하도록 고무해야 합니다. 

광주항쟁을 돌아보며, 민주당이 말해 온 역사적 화해가 아니라 기층의 노동계급 대중의 저항이 진정한 오월 정신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전두환을 사면한 것은 이 정부들의 불철저함을 증명한 것이고, 이후 10년의 배신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정치·경제 모두에서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렇게 살아난 전두환을 계승한다는 당이 정권을 잡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려 합니다. 항쟁을 폭도로 왜곡하고 매도했던 언론이 여전히 진실을 쓰레기통으로 보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광주항쟁이 부활해야 합니다. 투사들의 유언대로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전통의 이름을 팔아 겨우 꾀죄죄한 민주당 밀어주기나 하자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건 항쟁 정신을 모독하는 비겁한 짓이고, 무엇보다 항쟁의 교훈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전략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적 민주주의, 의회정치의 정상화 요구에 머물 순 없니다. 표현의 자유와 먹고 살 권리가 모두 보장되는 게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그래서 민중의 권력입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저항 열망이 단호하고 더 결의에 찬 항쟁, 즉 노동운동이 주도하는 민중항쟁으로, 민중권력으로 발전하도록 기대하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끝]

※ 조금 수정해 올리려고 바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엄청 밀렸네요. 안 그래도 늦었던 건데 ㅠ.ㅠ
5월 초에 기획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거의 한 달이 밀려서 끝났네요.

  1. 저들이 이 반발을 친노 세력의 것 정도로 파악하고 대책을 내놓는 한, 헤어날 길은 없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사후정당화된 것이죠. 지나고보니(이명박 정권을 보니) 그때가 나았다. 한마디로 구관이 명관이다는 정서입니다. 그래서 민주당 친노도 이번 선거로 부활은 했지만, 반사이익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잘해서 부활한 것이 아닌 만큼 심상정처럼 친노세력과 통째로 진보연합 하자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연합 방안이라 봅니다. 진보좌파는 노무현 정부를 그리는 대중 정서의 합리적 측면과 소통하되, 이제와서 진보연하는 친노 정치인들에겐 평가를 냉정히 하고, 과오 반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 과정 없이 하는 연합은 진보연합이 아닙니다. [본문으로]
  2. 그것은 촛불항쟁에 조직 노동자운동이 경제적 힘을 동원해 해결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러나 촛불항쟁 기간 동안 화물연대 파업 말고 별다른 노동자투쟁의 기여가 없었습니다. 이 역설은 반MB 전선이 노동계급운동이 주도하는 진보연합이 돼야 진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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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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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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