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폐 청산”인가 “정치 보복”인가
구 여권에 대한 정치 응징이 불충분한 것이 오히려 문제
다스 실소유주 의혹, 국가정보원의 정치 개입·공작, 국정원 특수활동비 등에 관한 수사가 꽤 진척됐다.(아직 수사 대상은 아니지만, 위험천만하게 군사적 자동 개입을 보장한 아랍에미리트(UAE) 군사협정도 드러났다.)
그동안 좁혀 오는 수사망에도 이명박은 오불관언이었다. 그랬던 이명박이 1월 18일 질문도 안 받는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정치 보복을 중단하라고 갈라진 목소리로 항변했다.
김백준 등 측근들이 줄줄이 소환·구속되는 반면, 내부자 구실을 한 옛 심복 김희중에게는 구속영장 청구조차 되지 않는 걸 보고 위협감을 느낀 듯하다.
이 기자회견에서 이명박은 자신에게로 향하는 검찰의 적폐 수사를 “보수 궤멸”을 위한 “정치 보복”이라고 규정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작자다. 부패한 파렴치범 주제에 보복 운운이라니? 군사 독재 정권이 물러난 뒤에 이명박과 박근혜 일당처럼 정치적 반대파를 야비하게 보복한 정권이 또 있었던가?
우파 야당들은 (진작부터) “정치 보복에 눈먼 정권”이라며 문재인 정부의 적폐 수사를 비난해 왔다.
구속 상태로 받은 1월 29일 재판에서 박근혜의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우병우조차 “정치 보복” 수사·재판이라고 강변했다.
가당치도 않은 이런 프레임 설정은 문제의 본질을 흐리고, 책임을 전가하며, 우파를 결집하고, 추한 비리 혐의를 물타기하며, 시간을 벌려는 책략일 뿐이다.
이런 저질 프레임 전쟁이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먹히게 하려고 우파는 집권 9년 동안 언론 장악에 그토록 힘을 들였을 것이다.
계급적 정의
그러나 이미 박근혜 퇴진 운동 초기부터 청산돼야 할 적폐로 촛불 대중에 의해 지목된 것들은 이명박근혜 통치의 알맹이였다. 반노동·친기업 정책을 밀어붙인 것들이 적폐 청산의 핵심 목록 속에 있었다.
성과연봉제 등 노동조건 후퇴 정책과 이를 위한 노조 탄압, 세월호 참사 구조 실패와 진상 규명 방해와 모욕·탄압, 친일 부역과 독재·초착취를 찬양하는 역사교과서 국정화 추진, 전교조와 전공노 탄압, 청와대-국정원이 중심이 되고 검찰과 법원이 협조해 벌인 전방위적 정권 비판 입막음 공작들(노동·좌파·언론 등에 대한), 국가 경영을 빙자한 이명박과 박근혜 일당의 부정 축재, 미·일 등 제국주의 강대국들과의 동맹을 위해 피해자와 주민들을 내쳐 버린 한일 ‘위안부’ 합의와 사드 배치 등등. 그밖에도 쌍용차 투쟁 폭력 진압, 용산 살인 진압, 강정과 밀양에서의 폭력, 4대강 비리, 백남기 농민 살인 진압 등등.
이 문제들은 권력자들이 친자본주의·친제국주의 기득권 세력인 자신들을 위해 평범한 민중에게 횡포를 부린 사례였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전가하고 정치·안보 위기에 직면해 노동자·민중을 잔인하고 야비하게 억누른 문제들이다.
따라서 애초에 적폐 청산은 피억압 계급의 정의를 실현하라는 그들의 요구였다. 우파 정권이 벌인 가혹한 통치의 적폐들을 바로잡고 그 범죄자들을 응징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구 여권 수사가 보복성이냐 아니냐가 아니다. 오히려 구 여권의 계급적 야만성과 가혹함에 대한 노동자·민중의 응징·복수 의지가 충분히 문재인 정부의 적폐 청산에 반영되지 않고 있다는 게 진짜 문제다.
그러나 국정교과서 폐기 말고는 촛불이 앞 순위로 꼽은 적폐들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고 있다. 세월호 참사만 해도 문재인은 해경 조직을 부활시켜 주면서, 세월호 참사 발생과 은폐에 기여한 자들을 다시 중용해 줬다.(그 결과 유골 은폐가 벌어졌다.) 이런 해수부와 해경에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성과연봉제를 폐기한다더니, 직무성과급을 도입하려고 한다. 상징적으로 원세훈과 김기춘 등은 구속됐지만(출발로는 좋다), 아예 조직을 해체하고 파면시켜야 할 기무사와 사이버사, 국정원과 그곳들에서 보안경찰 노릇을 하던 자들은 그대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새로운 통치자로서 문재인은 촛불의 눈치도 보지만, 지배계급 전체가 적폐 수사의 확대와 지속을 더는 바라지 않는다는 점도 고려한다. 특히 지정학적 위기를 두고 국민적 단합(사실은 지배계급의 단결)이 필요하다는 점도 그는 고려한다.
최초의 ‘민주’ 정부를 자임한 김대중은 당선 직후 내란죄 등으로 구속된 학살자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해 줬다. 김대중은 우파 언론도 공격하는 듯하다가 멈추고 타협했다. 이런 패턴은 노무현 정부 하에서도 반복됐다. 이는 우파의 기만 살려 줬을 뿐이다. 전두환은 지금도 1980년 광주 학살에 북한이 개입했다는 둥 고약한 헛소리를 지껄인다.
사실 1987년 이후 연이어 등장한 노태우 정부와 김영삼 정부 모두 과거 청산을 외쳤지만, 독재자들을 처벌하지 않으려 했다.(노태우는 본인이 학살자다.) 두 정부 모두 대중적 저항에 직면하고서야 비로소 전두환을 백담사에 보내고(노태우 정부), 전두환과 노태우를 구속해 실형을 선고케 했다.(김영삼 정부)
‘민주’ 정부를 자처한 자들이 군사 독재자와 그 하수인들을 엄중 처벌하지 않고 결국 사면해 준 것이야말로 오히려 우파의 사기를 높여 주고, 재집권한 뒤 우파가 정치 보복을 할 수 있게 해 준 주요인의 하나다.(더 중요한 다른 주요인은 군사 독재자와 마찬가지로 노동계급과 차별받는 다른 사회집단들을 천대하고 억압했다는 것이다.)
대중의 바람대로 우파 정권의 만행들을 샅샅이 들춰내고 강력하게 응징할수록 그들이 설사 다시 집권하더라도 쉽게 반동적 행태를 다시 벌이지 못할 것이다. 지금 우파 야당들이 헛소리들을 해대며 적폐 청산에 저항하는 행태도 어정쩡한 과거 청산 경험에서 배운 것이다.
따라서 고통받으며 멸시당해 온 노동계급 운동과 투쟁의 관점에서 보면, 적폐 청산과 복수와 응징은 한 몸이다. 진짜 쟁점은 “적폐 청산 vs. 정치 보복”이 아니라, 문재인 정부가 “정치 보복”을 매우 제한적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