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진보당 위기 속에서 진보신당의 주요 활동가들도 통합진보당 위기를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대안들을 내놓으려 하고 있다. 홍세화 대표와 장석준 정책위원회 의장이 참여한 글 모음집 《지금 여기의 진보》도 그런 시도의 일부다.
여기서 홍세화 대표는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실패한 자유주의 정권의 복권을 위해 좌파 정치-운동을 ‘실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이 시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묻지마 야권연대’와 연립정부 노선을 비판한다.
홍 대표는 다른 글에서 “시야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이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면 할수록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 경계는 흐려질 것”이라고도 비판했다.
당연히 이 비판의 대상에는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신당권파의 주축인 심상정, 노회찬 등 옛 진보신당 지도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들은 “국민적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유로 무원칙한 통합에 함께했고, 통합진보당 분열이 기정사실화가 된 지금도 참여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유시민 등 옛 국민참여당 지도자들과 공동 행보를 취하며 분명히 선을 긋지 않고 있다. 1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도 <레디앙>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진정한 하나가 되겠다는 의지 없는 것 같다”며 선거적 이익을 주된 동력으로 삼았던 무원칙한 통합이 낳은 갈등을 꼬집었다.
그래서 홍세화 대표가 진보의 독자 대선 후보를 세우려고 제안한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에는 일부 타당한 구석이 있다. 2
최근 정치 상황을 보면 선거에서 진보가 독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박근혜가 위기를 겪는데도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은 ‘리틀 노무현’들로 비춰지는 민주당 후보들도 우파 정권의 대안으로서 매력을 못 주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위기 조짐이 커지면서 고통전가에 맞설 대안이 필요한 때다.
그러므로 대선에서 민주당과는 결이 다른 진보적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필요한 과제다. 그러려면 행동강령적 요구를 중심으로 최대한 개방적으로 결속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反박근혜 정서가 크다는 점을 감안해 反박 단일화 여부는 닫아놓지 않는 것이 대중과의 소통에 유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제시하는 ‘기본소득,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 화석·핵 에너지 전면 탈피’ 등은 진보가 단결해서 추구할 만한 괜찮은 행동강령적 요구가 될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의 점령운동에서 뉴욕의 상징적 운동을 넘어설 잠재력은 오클랜드에서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한 진짜 점령운동에서 드러났다. 사진은 오클랜드 노동자들이 항만을 점령한 모습.
아쉬운 것은 진보신당 지도자들이 여전히 진보진영의 폭넓은 단결에는 시큰둥하다는 것이다. 진보신당은 지난해 ‘통합해도 참여당 끌어들이기를 막을 수 없다’며 진보대통합을 거부한 바 있다.
그러나 진짜 속마음은 ‘종북과 패권’ 때문에 자주파와는 결코 함께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최근 더 강화됐을 것이다.
지난해 진보대통합 합의안만 해도 ‘참여당과의 통합에 대한 비토권’을 진보신당에게 준 안이었다. 패권주의 방지를 위한 진보신당의 요구가 거의 1백 퍼센트 반영됐다.
따라서 자신들이 개입해 사태를 다르게 만들 수도 있었던 기회를 차 버리고선,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사후정당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태도는 실천에서 자주파 리더들 뿐만아니라 이 경향을 지지하는 기층 대중과도 단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백 번 양보해도 노동운동의 단결까지 해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노동대중의 단결과 공동 행동 속에서 대중과 운동 전반을 올바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입증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홍세화 대표는 “2004년[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진보정치는 상층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 말고 무엇을 추구해왔던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이 시기에 진보정당이 “대기업노조의 경제적 이해를 해결해주는 ‘대리정치기구’” 구실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004년은 민주노동당의 당권과 민주노총의 지도부를 이른바 자주파 계열이 쥐게 된 해다. 운동에 대한 평가를 그 지도부의 이념으로만 평가한다면 사태의 한 면만 보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홍 대표의 진단은 사실과도 다르다. 예를 들어, 2005년 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에서,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에서, 연행과 구속을 마다 않고 가장 앞장섰던 연대 단체들 중에 가장 큰 세력은 단연 [그 내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역 조직들이었다.(급진좌파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다.)
결국, 진보진영 단결에 대한 진보신당 리더들의 이런 부정적 태도는 이들이 “조직 노동”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진보신당 창당파들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민주노총당에서 탈피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홍세화 대표는 심지어 자본이 노동자들을 “포섭과 배제”로 분열시켰는데,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정규직 노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은 ‘포함된 자들’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장석준 의장도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력 ‘때문에’ … 그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 생활 수준이 올라가서 체제에 안주하게 됐다는 뜻이다.
이런 진단의 결론은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 운동의 미래가 …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제된 노동”이란 존재 조건만으로 급진성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 못 한 대학생이 정규직 노조 파괴를 위한 폭력에 용역으로 동원되는 현실을 보라. (그래서 ‘배제된 노동 주체론’은 오히려 엘리트주의나 선거주의로 후퇴할 가능성을 크게 품고 있다.) 3
정부와 기업주의 반노동 테러 공세에 고통 당하며 저항했던 쌍용차, 한진중공업, 유성, KEC, 에스제이엠 등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섭된 노동”으로 부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현실에서 “배제된 노동”에게 든든한 등받침이 돼 주는 건 “조직 노동” 뿐이다.
자본주의의 패악을 끝장내려면 노동계급의 힘에 기대야 한다.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이윤 창출을 봉쇄할 수 있는 객관적 능력이야말로 진보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따라서 진보적 사회 변혁은 현실의 노동자들이 내 맘 같지 않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조직 노동”과 “배제된 노동”을 구분하는 태도가 아니라, “조직 노동”이 그 힘을 “배제된 노동”과의 단결을 통해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태도로만 가능할 것이다. 분리주의적 이론은 단결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개혁주의적 노동운동 안에서 노동조합 의식이 체제 안의 부문적 개혁에 머물게 되고, 노조관료층과 기층 사이에 정치·사회적 구분이 생기게 되므로, 좌파는 이를 극복해 현장 노동자들의 집단적 잠재력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이론과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직 노동” 대중을 단결시키는 일은 좌파가 야권연대 등 여러 문제 등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회피해선 안정적 기반을 획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단결을 해치는 분석들은 실천에서 기반의 협소함 때문에 고통받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안정적 조직 기반이 취약할수록 우경화 압력에 더 취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 총선에서도 진보신당이 야권연대를 비난하면서도, ‘진보신당은 야권연대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이정희 대표를 고소한 것은 이런 사정이 낳은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신당 독자파 리더였던 이재영은 <레디앙>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와는 함께할 수 없다면서도 “반성과 지분”을 조건으로 신당권파를 구성하는 참여당 지도자들과는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4
김종철 부대표는 “신당권파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인식되어 왔고 …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신당권파에 포함된 진보정치 세력에게 유시민 등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 계속 공동 행보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치 않게 종파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려다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실패하고, 진보신당이 이른바 통합파와 독자파로 분열한 것 자체가 사실은 이런 모순의 반영이다. 올해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믿는 구석은 거제와 창원의 일부 금속노조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전략이다. 연립정부 노선이 노동운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면, 진보정치 세력과 노동운동의 단결을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계급연합 노선과 싸워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87호에 축약돼 실렸다.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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