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임 대법원장 체제에서 벌어진 ‘재판 거래’ 추문의 한복판에서 이영주 민주노총 전 사무총장의 재판이 시작됐다.
노동 개악 반대 파업과 박근혜 퇴진 민중총궐기 투쟁 등을 주도했다는 혐의다. 이 투쟁들은 세월호 참사 항의 투쟁과도 연계됐었다.
이 투쟁들이 폭력 시위였다며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징역형 3년을 선고받았고 최근에야 만기 출소를 반 년 앞두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이영주 전 총장은 2년 동안 수배 생활을 하다가 지난해 말 구속됐다.
그러나 당시 투쟁이 정당했다는 것은 이미 정치적·사회적으로 판가름난 일이다.
민주노총이 앞장선 노동 개악 반대 투쟁, 세월호 참사 항의 운동 등은 박근혜의 중도 퇴진으로 이어지는 기폭제가 됐다. 승리한 촛불 운동은 노동 개악과 박근혜의 반(反)노동계급 정책들을 “적폐”로 판정했다.
이런 시위대의 저항이 아니라, 평화로운 시위를 가로막은 경찰의 강경 진압이 진정한 문제였다.
올해 5월 31일에는 헌법재판소조차 경찰이 법률 근거도 없이 최루액을 섞어 물대포를 쏜 것은 위헌이라고 판결했다.
2015년 민중총궐기에서 바로 그 위헌적인 살인 물대포를 맞아 백남기 농민이 사망했다. 민주적 권리를 깡그리 무시한 불법적 폭력에 두들겨 맞은 사람들이 도리어 ‘폭력 시위대’로 내몰려 죽고 구속되고 수배됐다.
바로 그런 작태들 때문에 박근혜가 쫓겨나 구속까지 된 것이다. 그런데 적어도 박근혜 적폐는 청산하겠다던 문재인 정부가 위선적이게도 한상균 전 위원장 사면을 거부하고 이영주 전 총장을 구속했다. 최저임금 삭감법을 개악하는 날, 한상균 전 위원장을 가석방해 치졸한 물타기나 하려고 했다. 이영주 전 총장이 당장 석방돼야 하는 이유이자 노동자들이 문재인 정부를 기다리지 말고 스스로 싸움에 나서야 할 이유다.
최근 우파 정권 아래서 자행된 반(反)노동계급적 적폐들의 한복판에 사법 적폐가 있었음이 폭로됐다. 해고, 임금, 노조 인정 등과 관련한 각종 반(反)노동계급적 판결이 정권·법원·재계 사이에서 조율되고 거래된 뚜렷한 정황이 드러난 것이다.
이 사법 적폐는 법을 이용해 사측·경찰·검찰이 탄압을 하고, 법원이 이를 정당화해주는 노동계급 억압 사슬의 한 고리였다.
그 고리들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2015년 11월 민중총궐기에서 살인적인 수압으로 최루액 물대포를 조준 발사토록 지휘해 백남기 농민을 사망케 한 당시 서울경찰청장 구은수가 6월 5일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재용을 포함해 노조 와해 공작을 한 삼성 경영자들, ‘갑질 조절장애’인 한진 조 씨 일가 등은 죄를 짓고도 풀려나거나 구속되지 않았다.
반면, 이영주 전 총장은 구속 상태에서 11일, 12일 재판을 받고 있다.
사법부는 이영주 전 총장에게 죄를 물을 자격이 없다! 사실 한상균 전 위원장이 형량을 다 안 채우고 석방된 마당에 이영주 전 총장이 구속 재판을 받아야 할 이유도 없다.
5월 21일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이 만기 출소를 반년 앞두고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조계사에서 구속된 지 2년 5개월여 만이다. 지난 1년 동안 노동계만이 아니라 종교계도 한상균 위원장 사면을 요구해 왔다. 박근혜의 악행에 맞선 투쟁을 조직하다 구속됐으므로, 박근혜가 파렴치범으로 탄핵된 마당에 사면·복권되는 게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이를 거절했고, 오히려 같은 죄목으로 2년 넘게 수배 생활을 하던 이영주 전 사무총장을 구속했다. 게다가 정부는 석방 당일 국회에서 최저임금법 개악을 시도했다. 대통령이 해외 방문으로 청와대를 비운 사이에 여당이 국회에서 개악을 시도하는 일은 박근혜 때 흔히 보던 일이다.
5월 21일 가석방으로 풀려난 한상균 민주노총 전 위원장[원본]ⓒ조승진한편, 이번에도 이석기 전 의원 등의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 구속자들은 가석방에서 배제됐다.
이 사건은 자주파 성향의 활동가들이 모여 자신들끼리 정치 토론을 벌인 것을 마치 봉기 준비 모임이라도 되는 양 왜곡·과장한 사건이다. 그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프락치 공작이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국정원이 공개한 강연 내용에 왜곡이 있었다는 것도 밝혀졌다.
결국, 당시 박근혜 정부가 국가기관 대선 개입 의혹과 임기 첫해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던 노동자 투쟁을 막아 보려고 상황을 뻥튀기해 여러 활동가들을 구속한 사건이었다. 물론 그 시도는 실패했다.
‘이석기 의원 내란음모 사건’ 피해자 한국 구명위원회에 따르면, 문재인 정부는 “유독 내란음모 사건 구속자들을 가석방에서[조차] 배제하고 있[다.]”
구명위원회는 정권이 바뀐 후 1년 동안 종단, 엔지오(NGO), 국제인권단체들이 줄기차게 노력했지만 납득할 만한 해명도 없다고 정부를 규탄했다. 양심수 석방 추진위원회도 현재 구속된 양심수 15명을 모두 특별사면으로 석방해야 한다고 논평을 냈다.
‘촛불 정부’를 자임하면서도 양심수 석방에 관심이 없는 일이야말로 문재인 정부의 위선을 보여 준다. 남북 화해를 추구하는 마당에 국가보안법과 (그에 준하는) 형법상 내란음모 조항을 이용한 탄압을 시정하려 하지 않는 것도 위선이다.
문재인이 내놓은 (노동 존중을 포함한) 기본권 확대 개헌안이 선거를 위한 정략적 보수 야당 폭로용에 불과하다는 것도 드러난다.
문재인은 1월 10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우리 국민들이 들었던 민주주의의 촛불이 국민들의 삶으로, 우리 사회 곳곳으로 퍼져가고 있다.”
7일에는 1987년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을 관람하고 이렇게도 말했다. “세상을 바꾸는 [잘난] 사람은 따로 있지 않다. 우리가 함께 힘을 모을 때 세상이 바뀐다.”
그런데 문재인이 생각하는 “민주주의 촛불”과 “우리”에 노동운동이 포함되지 않는 건 확실한 것 같다. 그는 12월 29일 정권 출범 후 첫 특별사면에서 민주노총 한상균 전 위원장을 제외했다. 오히려 그 다음날 민주노총 이영주 전 사무총장을 구속했다.
당시 이영주 총장은 수배 해제와 한상균 석방, 근로기준법 개악 반대 등을 요구하며 민주당사에서 9일간 단식 농성을 벌여 “도주 우려”는커녕 병원 입원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두 사람이 구속된 죄목을 보면, 누가 봐도 ‘박근혜다운’ 탄압이다. 노동 개악 저지 파업, 세월호 투쟁에 민주노총 조합원을 조직해 참가한 것, 박근혜 퇴진 위한 민중 총궐기 주도 등.
ⓒ이미진
그리고 ‘촛불 시민들’은 처음부터 민주노총의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을 지지했다. 촛불의 다수가 노동계급 사람들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상균 석방 요구는 너무 당연해, 거리 시위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논란거리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촛불 계승 운운하는 정부가 위원장을 사면하지도 않고 오히려 사무총장을 구속한 것은 빌려간 촛불에 침 뱉는 행위다.문재인 정부는 박근혜의 적폐를 이어받아 집행한 것이다.
민주당은 바로 지난달 주당 노동시간 정상화 요구에 역행하는 근로기준법을 개악하려 했다. 최저임금 무력화에도 길을 열어 놨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공약도 누더기가 됐다.
그러므로 문재인이 신년 기자회견에서 “우리 국민의 민주주의 촛불” 운운한 것은 위선이다.
한편, 한상균 사면 거부와 이영주 구속은 지난해 박근혜 퇴진 운동에서 인권 단체들과 참여연대 등 엔지오 지도자들이 보였던 지나치게 온건한 행태를 떠오르게 한다. 당시 그들은 민주노총의 발언 기회를 제약하려 하면서, 특히 발언 내용에 한상균 석방 주장이 포함되지 않도록 좌파와 민주노총에 압박을 가했다.
그들은 촛불 운동이 그저 민주당으로의 정권 교체를 지향하는 수준에 머물게 하려고 애썼던 것이다.
지금도 문재인은 이런 온건 개혁주의자들의 태도를 노동운동의 고유한 요구를 배척하는 데 이용하며 두 전직 민주노총 지도자들을 볼모로 삼고 있다.
문재인 정부가 내년 초 특별사면을 시사했다. 12월 6일 7대 종단 지도자들과의 청와대 오찬에서 시국사범 관련 사면 대화를 나눈 지 하루 만에 나온 입장 표명이다.
이 오찬에서 김희중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 설정 조계종 총무원장이 각각 한상균 민주노총 위원장과 이석기 전 진보당 의원의 성탄절 특별사면을 요청했다.
박근혜 파면의 결과로 등장한 정부라면, 박근혜가 저지른 악행으로부터 원상 회복부터 하는 것이 당연한 의무다. 파업으로 해고된 최승호 전 PD가 MBC 사장으로 복직해 첫 조처로 해고자를 복직시킨 것이 사람들에게 청량감을 주고 사기를 높이듯이 말이다. 문재인 자신도 지난해 재판부에 내는 한상균 석방 탄원서에 서명한 바 있다.
그러나 문재인은 종단 지도자들의 당연한 요구에 즉답을 피했다. 그리고 다음날 청와대가 내놓은 특별사면 가이드라인은 실망을 자아냈다. 특정일(성탄절)에 사면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 건 아니고, 시국사범 사면은 법무부에서 검토 중이라는 것이다. 시국사범 성탄절 특사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셈이다. 대신 정치인과 기업인은 사면하지 않겠다고 했다(당연한 걸 갖고 생색낸다).
그런데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시국사범을 사면하는 것은 촛불 민심이었고, 광복절·성탄절 등에 대통령이 양심수 특사를 해 온 관행도 오래됐다. 그러므로 광복절에 이뤄지지 않았던 특사를 성탄절에 기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정부의 답변은 촛불 염원에 은근히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특정 날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다면, 취임 후 지금까지 시국사범 사면을 언급조차 안 한 것은 대통령에게 그럴 의지가 없었기 때문임을 인정하는 셈이다.
ⓒ조승진
한상균·이석기 구속과 평화적 집회 참가자들을 범법자로 만든 일이 박근혜의 악행이라면, 그 문제들이 지금껏 해결되지 않는 것은 문재인 정부 탓이다.
시국사범들이 성탄절 특사로 풀려나거나 복권되는 것 아니냐는 기대는 정부가 불러낸 것이기도 하다. 11월 하순, 이명박·박근혜 정부 하에서 벌어진 주요 운동 참가자들 전원의 특별사면을 검토하라고 검찰에 지시했다는 사실이 일제히 언론에 보도된 것이다. 이때는 취임 후 문재인의 높은 지지율 유지의 일등 공신이던 적폐 청산 수사가 우파들의 여러 반격 속에서 주춤거릴 때였다.
대상은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집회 ▲경남 밀양 송전탑 반대 집회 ▲서울 용산 화재 참사 관련 시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반대 집회 ▲세월호 관련 집회 등 5개였다. 주로 이명박과 박근혜 정부의 강경한 추진과 과잉 진압 등으로 문제가 됐던 투쟁들이다.
공교롭게도 쌍용차 정리해고 반대 파업과 연대 집회 건은 빠져 있다. 사실 문재인 정부의 노동 적폐 청산은 거의 없거나 더디다. 전교조 법외노조 철회처럼 민주적 권리 문제이자, 대통령 지시로 간단히 해결될 문제에서도 그렇다.
자본가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지배계급이 합심해 박근혜를 지지·지원한 것은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을 강경하게 추진하려는 목적에서였다. 박근혜가 ‘쉬운 해고, 임금 삭감’의 노동 개악을 강행한 이유다. 그들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기 고조에 대응해 ‘내부의 적’도 단속해야 했다. 민주적 권리도 약화시켜야 했다.
한상균·이석기 구속의 정치적 목적들이 이것이다. 임기 첫 해에 국정원 대선 개입이 발각돼 정통성이 손상된 박근혜가 친북 경향을 제물 삼아 안보를 부각시키고 노동계의 좌파적 정치를 위축시키려 한 것이 진보당 해산 사건이었다.
한상균 위원장은 바로 이런 반동에 맞서는 투쟁을 이끌려고 했다. 결국 그가 구속된 후 성과연봉제 반대 파업이 도화선이 돼 퇴진 촛불이 터져나왔고 마침내 민중이 박근혜를 침몰시켰다. 그래서 저항의 지도자로서 또 국가 탄압의 피해자로서 한상균 석방은 퇴진 촛불의 광장에서도 광범한 지지를 받은 요구였다.(온건한 개혁주의자들이 한상균 석방 요구 채택에 반대하고, 한상균 위원장 자신이 자신의 석방을 내걸지 말라고 주문했지만 광장의 정서는 달랐다.)
결국 경제·안보 위기로 초조해진 지배계급이 가장 민감해 하는 노동 쟁점, 정치·사상의 자유 문제에서 문재인 정부가 그들의 눈치를 보는 것이 시국사범 특별사면이 지지부진한 이유일 것이다.
그래서 시국사범 전원 사면·복권을 믿기 힘든 것처럼 친노 정치인과 이재용 등의 사면이 없을 거라는 말도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오히려 이재용 판결이 확정되길 기다리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가질 만하다. 문재인 정부는 시국사범 특별사면을 자신들이 필요할 때 쓸 정치적 카드로 사용하는 역대 정부들의 고약한 짓을 재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12월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 등 5만여 명(주최측 추산)이 참가했다.
이들은 노동 개악 중단, 교과서 국정화 철회, 공안탄압 중단, 백남기 농민 진압 책임자 처벌 및 대통령 사과 등을 요구하며 서울시청 광장에서부터 대학로까지 행진을 했다. 행진은 주말 도심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에게도 호응을 받았다.
무엇보다 노동 개악 입법 시도에 맞서 16일 파업을 결정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이날 참가자의 다수였던 점은 시사적이다. 금속노조는 민중총궐기 본대회 전에 결의대회를 열었다. 노동자들은 12월 2일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지도부가 노동개악 관련 법안을 합의처리 하기로 야합한 것에 분노했다.
이밖에도 대학생, 청소년들도 꽤 규모있게 참가해 인상적인 행진을 벌였다.
바로 이틀 전까지 박근혜 정권과 경찰은 강도 높게 엄포를 가했었다. 이날 집회를 원천 불허할 것이고, 참가자 전원에게 색소 물대포를 뿌려 모두 검거하겠다고 협박했다.
복면금지법, 테러방지법 등의 도입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심지어 검찰청장 김수남은 복면금지법이 제정도 안 됐는데, 복면 시위대를 가중해서 구형하겠다는 ‘초법적’ 헛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했다.(대통령께서 초월적이시니, 뭐...) 정권이 일부 우익 조계사 신도의 협조를 얻어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모욕적인 위협을 가한 일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1차 총궐기와 파리 테러 참사 직후, 박근혜가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하며 강경 탄압을 지시한 뒤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강경 공안탄압 공세를 통해 박근혜 정권은 백남기 농민을 사경에 이르게 한 살인 진압의 책임을 면피하고, 하반기 노동 개악 등 각종 악법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노동자·민중 운동을 위축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정권의 이런 ‘오버’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사람들은 위기감 속에서도 큰 반감을 느꼈고 어떤 형태로든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어했다. 특히 노동 개악 입법이 코 앞으로 다가와 노동자들의 분노가 더 컸던 듯하다.
게다가 경찰의 집회금지 통고를 취소해 달라는 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 엄포를 놓던 경찰이 체면을 구긴 통쾌한 일이 있었다.
결국 이날 집회와 행진은 박근혜 정권의 협박에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피억압 대중이 위축되지 않고 반격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날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서 “2차 민중총궐기 그리고 국민대행진이 더 큰 민중의 항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은 총파업 투쟁으로 함께하겠다” 하고 약속해 큰 박수와 호응을 받았다.
이제 더는 새정치연합에 기대지 말고,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12월 16일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한 노동개악 저지 파업을 실질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처음 직선제로 치러지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서 핵심 의제는 단연 박근혜 정부의 고통전가 파상 공세에 맞설 투쟁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였다. 민주노총 정치 방침이 중요한 쟁점이긴 해도 부차적인 쟁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후보들의 정치 방침 정책에는 큰 차이가 확인됐다.
특히,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층이 연합한 전재환 후보 조는 진보대통합 정당을 만들어, 이를 지렛대로 정권 교체기에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구하자고 주장했다. 이 경우에는 진보대통합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필수적인 일이 된다.
그러나 노동계 진보정당들이 사분오열해 노동운동 안에서 분열ㆍ갈등하는 상황이다. 한상균 후보 조와 허영구 후보 조 등도 진보대통합 계획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를 대변했다.
△ 자본가들의 고통전가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해 파업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노동자 정치다. ⓒ이미진
민주노총 지도부가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가망도 없고 현명하지도 않다고 보는 이유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무리해서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결정하려 하면 노동조합의 단결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노동조합은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노동조건을 공동으로 방어하려는 조직이니 말이다.
한상균 후보 조와 <노동자 연대>가 주장한 대로 민주노총이 진보ㆍ좌파 다원주의를 정치 방침으로 채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 이유다.
진보ㆍ좌파 다원주의는 부르주아 정당들을 배제하는 조건에서 민주노총이 여러 진보정당과 좌파 정치단체 사이에 지지 대상을 열어 놔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동 정치는 의회와 정당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정치 방침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민주노총의 투쟁 노선과도 연결되므로 진보ㆍ좌파 다원주의 안에서도 어떤 정치를 민주노총이 추구하는 것이 옳은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 개념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정치는 정당 문제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국가권력을 획득하거나 사용하는 문제, 국가기관의 통치 행위에 대응하는 문제, 정치적 견해ㆍ사상ㆍ신념 문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쟁점과 단결 문제 등이 모두 ‘정치’에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법안 제정, 정리해고 요건 완화 같은 법 개악 저지 등을 위해 파업과 시위를 수단 삼아 대중투쟁을 벌이는 것도 ‘노동 정치’다. 기업주들의 ‘철밥통론’ 같은 이간질에 맞서기, 정규직ㆍ비정규직의 단결을 위해 주장하고 투쟁하기도 정치적 문제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정치 개념은 협소하다. 또한 그들은 정치와 경제 영역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의식적으로 분업을 추구한다. 노조는 작업장 문제(‘경제’)를 맡고, 정당은 선거와 의회 협상(‘정치’)을 맡아야 한다고 본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정치 방침 문제가 개혁주의 정당 건설로 곧장 환원되는 것도 이런 분업주의의 발로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상층 지도자들이 흔히 ‘정치(투쟁)로 해결하자’고 말할 때는 사실 사회적 타협(노사정위원회, 정당을 매개로 한 의회 협상 등)이나 사회적 타협이 가능한 정권을 세워서 노동 현안들을 해결하자는 뜻이다.
전재환 후보 조가 내세운 정치방침과 전략 노선이 전형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2015년을 준비기로, 총선과 대선이 있는 2016~17년을 투쟁기로 설정했다.
사실 진보 대통합 → 야권연대 → 정권 교체로 이어지는 이 구상은 최근 몇 년 동안 민주노총 상층 지도자들의 방침이기도 했다. 결국 정치로 해결하자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과 연대해 정권을 바꿔 노동 현안을 해결하자는 말이었다.
이런 전략은 노조 상층 지도자들의 소심함과 투쟁회피주의와 결합돼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이익을 지키는 전투적 투쟁을 기피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번 선거에서도 전재환 후보 조의 계획도 당면 투쟁 과제를 회피하는 계획이라는 정당한 비판을 받았다.
총ㆍ대선이 있었던 2012년이 최근의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정권 교체에 기대를 걸고 전략적 야권연대에 ‘올인’하며 선거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본 대중투쟁 건설에 소홀했다. 그러다가 총선 결과가 시원찮자 그나마 공언했던 총력 투쟁 계획마저 흐지부지됐다.
그 결과, 초기에 기세를 올렸던 언론 파업, 금속 작업장 투쟁들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 주목 받았던 쌍용차 투쟁에 대한 연대도 더 확산되지 못했다. 그해 총·대선에서 박근혜에게 연달아 패배한 것은 어느 정도는 노동운동 상층 지도자들이 자초한 세력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해 말 철도노조 파업 탄압과 민주노총 경찰 침탈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즉각 대중적 항의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정치권’(심지어 새누리당 김무성까지 나선) 중재에 의존했다. 결국 대중적 공분이 크게 일었으나 조직되지 못해 투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 노동운동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정치’ 자체가 아니라 보수적으로 투쟁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상층 지도자들의 온건한 ‘개혁주의’ 정치다.
노동 정치의 진정한 독립성
민주노총 정치 방침은 첫째, 노동자 ‘계급’의 정치라는 출발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는 계급으로 분단돼 있고, 이 계급 분단선이 이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다.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포퓰리즘과 선을 그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가피한 경우에 일회적ㆍ부분적 야권연대를 할 수 있다 해도, 연립정부 추진 같은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진하려고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이익을 유보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둘째, 노동자 계급 고유의 힘, 즉 작업장에서 자본주의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것도 노동 정치의 중요한 수단이다.
예를 들어, 진보 정당은커녕 대변할 의원 한 명도 없었던 1997년 1월, 민주노총은 대중파업으로 정리해고 법제화 등 개악을 막아 냈다. 민주노총이 정치 파업으로 노동자 계급 전체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이 파업 동안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한국 정치의 주역이었다. 2013년 말 철도 노동자들이 민영화 반대 파업으로 박근혜에 맞선 가장 강력한 야당 구실을 했듯이 말이다. 의회의 정치 협상은 노동자 정치에서 훨씬 덜 중요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작업장 안팎에서 계급적 단결을 추구해야 파업 같은 수단이 실질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부분 파업으로 진행되는 현대중공업 노조 파업이 진정으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정규직과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함께 파업을 벌여야 한다.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내국인·이주 등의 차이로 노동자를 이간질하고 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와 억압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정규직 양보론을 함축한 사회연대전략이 정치 방침으로 부적절한 이유다. 이 점에서는 허영구 후보 조와 좌파노동자회가 불안정노동자를 사회 변혁의 주체로 간주하거나 노동당 지식인들이 ‘포섭된 노동, 배제된 노동’ 식의 구분을 하는 것도 약점이다.
이들 모두 작업장 파업과 그것을 위한 단결의 중요성을 경시한다. 이런 입장들은 아무리 좌익적 언사로 포장해도 계급적 단결을 추구하는 데서 장애가 될 뿐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큰 경제적 힘과 조직력을 보유한 조직 노동운동이 앞장서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하도록 고무하고 촉구해야 한다.
셋째, 진보정당들이 전략적 야권연대를 염두에 두거나, 투쟁을 고무하기보다 협상이나 민주당에 의존하며 불필요한 양보를 하려 할 때, 노동운동이 정치적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조는 총선과 대선 선거 방침 같은 소시기 정치 방침에도 적용돼야 한다.
이것이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이 ‘정치조직’인 정당에게서 독자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대중조직이고, 노동조합도 정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의 부분을 대표한다.
독립성의 진정한 쟁점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가 다른 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 모두에 적용되는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