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노동자당건설현장투쟁위원회(이하 노건투)는 통합진보당을 “노동자 정치세력화 열망을 버리고 … 노동자 탄압에 앞장섰던 자들과 야합해서 만든” “‘야합퇴보당’”이라고 규정한다.
노건투는 통합진보당이 “브라질 노동당, 미국 민주당, 영국 노동당”과 마찬가지인 “자본가정당”이 됐으므로 “통합진보당에 대한 지지를 [민주노총의] 현장에서부터 차단하자”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에서 노건투는 통합진보당을 비판적으로 지지하며 개입하자는 다함께의 주장을 “기회주의”라고 낙인 찍고는, 다함께가 혁명적 사회주의의 ‘원칙’을 벗어났다고 비판한다 1.
“‘야합퇴보당’에서 다함께가 과연 일부라도 빠져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며 다함께의 목표가 “좌파 개량주의 당”을 만드는 것인양 왜곡하기도 한다
그러나 노건투의 주장은 차이점을 잘못 그으면서 진정한 논점과 건설적 논쟁을 방해하는 결과만 낳고 있다. 물론 잘못된 차이점 긋기는 잘못된 분석에서 출발한다.
통합진보당은 노건투의 주장처럼 ‘자본가 정당’인 것이 아니라 전형적인 개혁주의 정당이다. 이런 사회민주주의 당은 기본적으로 노동운동의 상층 관료층에 기반하고 있다. 이 관료층은 자본의 타도가 아니라 노동과 자본 사이에서 중재를 본업으로 하는 집단이다. 러시아 혁명가 레닌은 이처럼 노동운동에 기반했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개혁을 추구하는 당을 “자본주의적 노동자당”이라고 불렀다.
바로 그 때문에 영국 노동당이나 독일 사민당 등은 집권하면서 기존의 강령이나 약속을 뒤엎고 자본주의 옹호의 편에 서서 노동계급의 삶을 공격해 온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서구 사민주의 당들은 지지 기반과 당원 구성에서도 그동안 노동계급 비중이 약화돼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당들마저 단순히 ‘자본가당’이라고 보는 것은 정확한 분석이 아니다.
게다가 통합진보당은 서구 사민당과 달리 아직 노동자들을 직접 배신하고 탄압하는 집권당 위치에 서 본 적이 없다. 오히려 부르주아 양당 구조에서 배제되고 가끔은 탄압 받는 소수파 야당 신세다. 아직 대중에게 검증되지 않은 개혁주의 당을 단순하게 서구 사민당과 똑같다고 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런데도 한술 더 떠 노건투가 통합진보당을 명백히 대자본가들에 기반한 미국 민주당과 똑같다고 치부하는 것은 ‘원칙’적이라기보다는 ‘억지’이고 ‘비약’이다.
구체적
통합진보당의 계급 기반 문제를 민주당과 한국노총의 관계와 비유한 것도 마찬가지다. 당의 성격을 이루는 본질적 요소와 부차적 요소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민주당은 한국노총과 일부 NGO 지도자들을 영입했지만, 이 당의 주요 재정적·인적 기반은 여전히 기업주와 부자들이다.
반면 통합진보당은 비록 계급연합적 요소가 포함되긴 했지만 여전히 이 당의 핵심 구성요소는 노동운동 관료층이다.
따라서 구체성이 전혀 없는 노건투의 분석은 개혁주의에 대한 비개입주의적·종파적 태도를 뒷받침하려는 억지로 보인다. 노건투의 분석대로라면 통합진보당이 없고 한나라당과 민주당만 선거에서 겨루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개혁주의는 일상적 시기 노동자 투쟁의 자기제한성에서 비롯하고, 개혁주의 당은 이런 자기제한성을 직업적으로 표현하는 노동 관료들에 기반하므로 혁명가들은 개혁주의를 단순히 “자본가당과 다를 바 없다!” 하고 폭로하는 것으로 임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선 안 된다. 심지어 서구 사민당들조차 노동운동 기반 때문에 야당이 되면 운동을 대변하며 어느 정도는 지지를 회복하곤 했다.
20세기 초 영국 사회민주연맹(SDF)은 ‘개량’이라며 신노조운동이 [비록 의회주의 방식이었지만] 정치적으로 각성한 결과로 시작한 노동당 창당에 관여하길 거부했다. 그러나 좌파의 이런 종파적 기권주의 때문에 창당 후 노동당의 개혁주의는 오히려 강화됐고, SDF는 주변화돼 영향력 없는 종파로 전락해 버렸다.
노건투의 태도는 바로 이런 SDF의 사례를 좇는 듯하다.
그래서 노건투가 다함께가 혁명적 원칙을 버린 것처럼 묘사하는 것은 정확하지도 정직하지도 않다. 다함께는 노건투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 ‘수술’이 아니라 자본주의 폐지를 목표로 하고, 혁명가들의 독립적 당을 건설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실천해 왔다. 다함께는 옛 민주노동당에 가맹 단체로 활동했지만 독자적 주장과 조직, 기관지를 포기한 적이 없다.
따라서 진정한 차이는 혁명가들의 당을 어떻게 성장시킬까 하는 전술 문제다.
그런데 원칙만
내세운 노건투의 추상적인 통합진보당 반대 전술은
실제로는 개혁주의의 우경화 압력과 맞서 싸우기보다
그 힘을 과장하며 그 싸움에서 도피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노건투 등의 좌파들은 옛 민주노동당도 전혀 지지하거나 우경화 움직임에 반대하는 당원들의 캠페인에도 구체적으로 개입한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와서 우경화를 기다렸다는 듯이 논평적 반대만 한다고 진보정당의 우경화에 실망한 대중이 그들에게 갈 일은 거의 없다.
노건투처럼 통합진보당 전체를 진보정당이 아니라고 규정하면, 통합진보당 당원이거나 선거에서 지지하는 노동자들과 정치적 접점을 찾기 어려워진다.
이것이 문제가
되는 까닭은 노동 대중의 계급적 각성과 혁명적 변화는
자신의 집단적 경험 속에서만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통합진보당을 지지하지 말라고
혁명가들이 선포한다고 대중이 자동적으로 혁명적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레닌은 “대중이 있는 곳”에서 혁명가들이 작업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것은 “노동계급 다수의 견해에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는 혁명은 불가능하며 이러한 변화는 대중들 [자신의] 정치적 경험으로써 창출되는 것이지 선전만으로 생겨나는 것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레닌, 《공산주의에서의 좌익소아병》)
그러므로 모순된
의식을 가진 노동자들과 함께 투쟁하면서 그 경험을
공유하고 논쟁하며 개입해야 한다.
최근에도 투쟁 중인 풍산마이크로텍,
건설플랜트,
새롭게 조직화된 학교비정규직
등의 노조에서 조합원들이 통합진보당에 집단 가입했다. 사측의 현장 통제에 항거해 분신한 현대차지부 신승훈 조합원도 통합진보당 당원이었다.
투쟁하거나 노조를 만드는 과정에서
부르주아 야당을 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이런
노동자들을 배척해 버릴 것인가.
개입
그런데 노건투의 방식은 이런 개입 자체를 거부하고 포기한다. 심지어 통합진보당 당명으로 ‘노동’을 선택한 사람이 당내에 “24퍼센트밖에 안 된다”며 간단히 무시해 버린다.
이런 노건투 방식으로는, 3자 통합은 찬성했어도 노동중심성 후퇴에는 비판적인, 모순된 노동자들의 의식에 개입하기 힘들다. 이런 태도는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영향력에 무방비 상태로 대중을 내주는 것이다.
20세기 후반 주요 혁명을 살펴 보며 개혁과 혁명의 문제를 다룬 책《혁명의 현실성》에서 영국 사회주의자 이언 버철은 레닌의 말을 인용해 이렇게 지적했다.
“개혁주의의 강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약점 또한 운동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 이해한다면 이들을 단순히 비웃어 넘길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레닌이 말했듯이 ‘전위의 항상적인 임무를 잊어버리는 것이고 스스로를 기만하는 것이고 우리 임무의 무한함에 눈을 감아버리는 것이며 이러한 임무를 제한하는 것이다.’”
우경화한 통합진보당에 대한 종파적 반대로 반사이익을 얻고 성장하겠다는 생각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을 기회로 여기고 가동됐던 사노위 플랜의 실패에서 이미 그 한계가 증명됐다.
사실 노건투는 소그룹 몇 개가 모여 모호하고 절충된 강령을 선포하는 식으로 당을 건설하겠다는 식의 사노위 플랜에 합류하지 않았다. 혁명적 원칙을 중심으로 당을 만들겠다는 타당한 문제의식이었는데, 지금 보니 종파주의 때문에 대중속에 개입하여 혁명적 원칙을 유연한 전술로 적용시키지 못하는 것같아 안타깝다.
노동자들이 경험 속에서 배우고 성장하듯이 혁명가들도 실천에서 배워야 한다. 혁명가들은 개혁주의 지도자들과 협력해 공동 행동을 건설하면서도 독립적으로 주장하고 조직하는 기예를 익혀야 한다. 고립을 감수하겠다는 식으로 대중에게 최후통첩식 설교를 하고마는 것은 용기 있는 것이 아니라 과업을 포기하는 것이다.
- 타락한 개량적 기회주의라는 이미지를 주려고 그랬는지, 노건투는 노동자세상 23호에서 다함께 비판 기사를 이경훈 비판 기사의 꼭지로 넣었다. 그런 의도였다면, 솔직히 치사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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