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지만 현란한 2018년 예산안
12일 6일, 자정을 넘긴 지 얼마 안 돼 내년도 국가 예산안이 국회에서 통과됐다.
우파 언론들은 “큰 정부”로 역행하는 포퓰리즘 예산안이 통과됐다고 불평한다.
보수 야당들이 보편적 아동수당 도입에 반대하고, 노인 기초연금 인상(20만 원→25만 원)을 반대하거나 시기를 늦추려고 한 것은 역겨운 일이다. 복지를 늘리는 걸 막으려 했을 뿐 아니라, 순전한 위선이기 때문이다.
대선 기간에 2018년도 기초연금 예산을 문재인 당시 후보보다 낮게 제시한 건 바른정당 유승민 뿐이다. 자유당 홍준표는 2018년부터 30만 원을 지급한다고 했는데, 이는 문재인 공약보다 3년이나 이른 인상안이었다(그래서 약 3조 원 더 소요). 국민의당 안철수는 물론이고 바른당 유승민조차 하위 계층부터 단계적으로 30만 원을 올리자고 했다.
아동수당도 보편주의냐 아니냐의 차이는 있었지만, 저출산 대책으로 신설해 도입하겠다는 것은 모든 후보의 공약이었다. 공무원 일자리 늘리기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정부 예산안이나 통과된 예산은 기존 정부들과 별로 다를 게 없다.
국방 예산은 무기(주로 미국산) 구매를 위해 2조 8천억 원이나 인상됐다. 액수로는 역대 최고다. 군비 증강 문제는 애초부터 여야 간에 쟁점이 되지 않았다.(모두 군국주의 지지자들)
전임 정부들의 국정원 특수활동비의 청와대 상납으로 국민적 공분이 있었지만, 행정부 각 부처별 특수활동비는 별로 줄지 않았다. 심지어 국정원 특활비는 정부 제출안에서조차 동결이었다. 결국 겨우 302억 원이 줄어서 여전히 4628억 원 규모다.
그나마 의미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일자리 늘리기 예산도 불충분할 뿐 아니라 정부의 공무원 증원에서 가장 많이 배정된 것은 경찰이었다.
도로 건설 등 SOC 예산은 국회 협상 과정에서 근래 최고 수준으로 증액됐다(1조 3000억 원). 특히 영호남 지역 SOC 예산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십중팔구 내년 지방선거를 겨냥한 여야 간 거래인 듯하다.
정부 원안에서 건강보험 국고 보조금이 (법정 의무 부담분보다) 2조 5000억 원이나 적게 배정된 데다 추가로 국회에서 2200억 원 삭감됐다. 6500억 원 이상의 기존 복지사업 예산도 원안에서 빠졌다.(정의당 정책위원회)
정리하면, 정부의 예산안 자체가 “균형 재정”이라는 오랜 한국 국가의 예산 기조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니 정부 원안부터 복지 예산이 대폭 는 것도 아니었다. 최소한 균형 재정 하에서도 복지를 늘리려면 부자 증세를 대폭 해야 하는데, 이 점이 미흡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회의 여야 협상 과정에서 이를 더 약화시켰다. 보수 야당은 일자리 늘리기와 최저임금 인상에 따른 기업주 지원, 그리고 아동수당 신설과 기초연금 인상 등 복지 예산들과 법인세 인상안이 “반시장적”이라며 문제 삼았다.
물론 기업주의 자유에 정부가 개입을 강화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화될까 봐 반대한 것이지, 구체적인 정책 수단들에 원천 반대한다고 보기는 힘들다(그들이 대선 공약에 냈듯이).
결국 무기 구매, 불필요한 토목 예산, 의원 세비 등은 올리고, 복지 예산은 (정부안보다도) 삭감된 것이다.
이 점에서. (여야 예산 협의 과정에서 배제된) 정의당이 여야 합의안을 강력히 비판하면서도 표결에서 최종 찬성한 것은 아쉽다. 자유당이 반대하니, 그들과 비슷하게 보일 수 없다는 생각은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왼쪽의 비판이 있다는 걸 분명히 보여 줘야 한다. 그래야 문재인 정부의 우경화와 우파의 성장을 견제하고, 문재인 정부가 진보 개혁 염원 대중을 배신했을 때 그 대안으로 여겨질 수 있다.
우파의 줄기찬 공세에 숨겨진 노림수
여야 협상 과정에서 스스로 밝혔듯이, 우파가 위선적으로 예산안을 “포퓰리즘”이라며 물고 늘어진 건 지방선거를 앞둔 정략적 계산도 한몫했을 것이다. 문재인 정부가 공무원 일자리와 복지를 늘린 모양새가 되면 내년 선거에서 자기네 보수 야당들이 불리하다는 셈법이다.
그러나 이들의 목적이 단지 선거에서 표를 더 얻으려는 것만은 아니다. 더 근본적인 계급적 이해관계도 봐야 한다.
대중 운동으로 정권을 빼앗긴 우익 지배자들은 퇴진 ‘촛불 정부’를 자처하는 문재인 정부를 약화시켜서 아래로부터의 저항(의 자신감)도 누그러뜨리길 바란다. 노무현 정부와 2008년 촛불운동의 실패로 우파가 연속 집권의 기회를 잡았듯이 말이다. 장차 새로운 위기에 대비하면서 경제 위기 고통 전가 기조를 계속 유지하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밀린 세력 균형을 만회하려는 것인데, 공식 정치에서는 정부 임기 중간의 전국적 선거가 그런 구실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총선은 현 정부 4년차에 있다. 그러니 현 여권을 조기에 약화시킬 기회는 내년 지방선거인 것이다.
물론 현재의 지지율을 보면, 현 정부 약화는커녕 자신들의 생존을 더 걱정해야 할 것처럼도 보인다. 자유당이 예산안 잠정 합의를 했다가 뒤엎은 것이나, 우왕좌왕하다가 제한적인 법인세 인상조차 막지 못한 미숙함을 우파 언론조차 비판한 것도 이런 상황이 주는 강박과 관계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 경제는 세계경제 위기 국면 속에 있다. 위기의 심화가 운좋게 지연되고 들쑥날쑥하지만, 언제 위기가 확 심화돼 찾아올지 모른다. 그러니 소폭의 회복이 있어도 지배자들로서는 반신반의하고 조심스럽다.
또한 (세계경제 위기가 영향을 준)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위기는 시나브로 깊어져 왔다. 최근 한반도 상황에서 보듯이 순식간에 온 국민이 전쟁을 떠올릴 정도로 상황이 급변할 수 있다.
겉보기로 철옹성 같던 박근혜가 총선 이후 레임덕 대장정 끝에 쫓겨났을 만큼 정치 위기의 수준도 상당하고 폭발력이 있다. 그러므로 다섯 달 남은 지방선거를 현 시점의 세력관계로 미루어 예측하긴 어렵다.
사드 배치와 친미·친군국주의 행보, 별 볼 일 없는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 세월호 참사 문제 해결 부진 등 문재인 정부에 실망할 요인들도 계속 자라고 있다. 아니나다를까 적폐 청산 수사도 법원의 구속영장 기각, 고위 검사의 자살 등 우파적 반격 속에서 검찰총장 문무일은 12월 5일 조기 중단을 강력히 시사했다. 수사팀과 상의 없는 발표였다고 한다.
우파가 문재인 정부를 ‘좌파’로 몰며 비판하는 것은 그들의 편협한 시야 탓도 있지만,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니다. 점차 오른쪽으로 기울 것이 분명한 문재인 정부를 채근함으로써 시늉뿐인 개혁 언사라도 그것이 대중의 기대치를 높이고 자신감을 고무하는 것을 막으려는 것이다.
따라서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이 우파를 견제하고자 한다면, 문재인 정부의 개혁 조처를 그저 지지하고 협력하는 식으로 하다가는 오히려 큰 낭패를 볼 것이다. 여권의 왼쪽에서 독립적으로 대안이 건설되지 않는다면, 정부의 배신은 개혁에 대한 대중의 환멸을 자아내는 걸로만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운동은 이런 위험을 경계해 노동계급 자신의 독자적 대안을 건설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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