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진보당 위기 속에서 진보신당의 주요 활동가들도 통합진보당 위기를 나름대로 평가하면서 대안들을 내놓으려 하고 있. 홍세화 대표와 장석준 정책위원회 의장이 참여한 글 모음집 《지금 여기의 진보》도 그런 시도의 일부다.


여기서 홍세화 대표는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실패한 자유주의 정권의 복권을 위해 좌파 정치-운동을 ‘실체 없는’ 존재로 전락시키려는 이 시도에 저항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라며 ‘묻지마 야권연대’와 연립정부 노선을 비판한다.


홍 대표는 다른 글에서 “시야를 생존의 벼랑 끝에 몰린 노동이 아니라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 하면 할수록 자유주의 정치세력과 … 경계는 흐려질 것”이라고도 비판했다.


당연히 이 비판의 대상에는 통합진보당 구당권파 지도자들 뿐만 아니라, 이른바 신당권파의 주축인 심상정, 노회찬 등 옛 진보신당 지도자들도 포함될 것이다.


이들은 “국민적 눈높이”에 맞춘다는 이유로 무원칙한 통합에 함께했고, 통합진보당 분열이 기정사실화가 된 지금도 참여정부에서 고위 관료를 지낸 유시민 등 옛 국민참여당 지도자들과 공동 행보를 취하며 분명히 선을 긋지 않고 있다.[각주:1] 


김종철 진보신당 부대표도 <레디앙>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은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려고만 하고 진정한 하나가 되겠다는 의지 없는 것 같다”며 선거적 이익을 주된 동력으로 삼았던 무원칙한 통합이 낳은 갈등을 꼬집었다.


그래서 홍세화 대표가 진보의 독자 대선 후보를 세우려고 제안한 ‘좌파연대 2012 대선운동’에는 일부 타당한 구석이 있다.[각주:2]


최근 정치 상황을 보면 선거에서 진보가 독자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해지고 있다.

박근혜가 위기를 겪는데도 지지율을 유지하는 것은 ‘리틀 노무현’들로 비춰지는 민주당 후보들도 우파 정권의 대안으로서 매력을 못 주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 위기 조짐이 커지면서 고통전가에 맞설 대안이 필요한 때다.


그러므로 대선에서 민주당과는 결이 다른 진보적 대안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은 필요한 과제다. 그러려면 행동강령적 요구를 중심으로 최대한 개방적으로 결속을 모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反박근혜 정서가 크다는 점을 감안해 反박 단일화 여부는 닫아놓지 않는 것이 대중과의 소통에 유리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장석준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의장이 제시하는 ‘기본소득, 노동시간의 획기적 단축, 화석·핵 에너지 전면 탈피’ 등은 진보가 단결해서 추구할 만한 괜찮은 행동강령적 요구가 될 수 있다.



지난해 미국의 점령운동에서 뉴욕의 상징적 운동을 넘어설 잠재력은 오클랜드에서 조직 노동자들이 주도한 진짜 점령운동에서 드러났다. 사진은 오클랜드 노동자들이 항만을 점령한 모습.



아쉬운 것은 진보신당 지도자들이 여전히 진보진영의 폭넓은 단결에는 시큰둥하다는 것이다진보신당은 지난해 ‘통합해도 참여당 끌어들이기를 막을 수 없다’며 진보대통합을 거부한 바 있다


그러나 진짜 속마음은 ‘종북과 패권’ 때문에 자주파와는 결코 함께하기 싫다는 것이었다. 이런 태도는 최근 더 강화됐을 것이다.


지난해 진보대통합 합의안만 해도 ‘참여당과의 통합에 대한 비토권’을 진보신당에게 준 안이었다. 패권주의 방지를 위한 진보신당의 요구가 거의 1백 퍼센트 반영됐다. 


따라서 자신들이 개입해 사태를 다르게 만들 수도 있었던 기회를 차 버리고선, ‘그럴 줄 알았다’는 식으로 사후정당화하는 것은 옳지 않다.


이런 태도는 실천에서 자주파 리더들 뿐만아니라 이 경향을 지지하는 기층 대중과도 단결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백 번 양보해도 노동운동의 단결까지 해치는 것으로 나아가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노동대중의 단결과 공동 행동 속에서 대중과 운동 전반을 올바로 이끌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입증받겠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홍세화 대표는 “2004[부터] 지금까지 8년 동안 진보정치는 상층 조직노동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 말고 무엇을 추구해왔던 것일까?”라고 반문하며, 이 시기에 진보정당이 “대기업노조의 경제적 이해를 해결해주는 ‘대리정치기구’” 구실로 전락했다고 비판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2004년은 민주노동당의 당권과 민주노총의 지도부를 이른바 자주파 계열이 쥐게 된 해다. 운동에 대한 평가를 그 지도부의 이념으로만 평가한다면 사태의 한 면만 보는 실수를 할 가능성이 크다. 


사실, 홍 대표의 진단은 사실과도 다르다. 예를 들어, 2005년 하이스코 비정규직 투쟁에서,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투쟁에서, 연행과 구속을 마다 않고 가장 앞장섰던 연대 단체들 중에 가장 큰 세력은 단연 [그 내부 정파를 가리지 않고]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지역 조직들이었다.(급진좌파들은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았다.)


결국, 진보진영 단결에 대한 진보신당 리더들의 이런 부정적 태도는 이들이 “조직 노동”과 거리를 두려고 하는 태도와도 이어진다. 진보신당 창당파들은 2008년 민주노동당 분당 때, “민주노총당에서 탈피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홍세화 대표는 심지어 자본이 노동자들을 “포섭과 배제”로 분열시켰는데,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정규직 노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은 ‘포함된 자들’에 속한다”고 주장한다.


장석준 의장도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력 ‘때문에’ … 그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노동자들 생활 수준이 올라가서 체제에 안주하게 됐다는 뜻이다.


이런 진단의 결론은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 운동의 미래가 …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배제된 노동”이란 존재 조건만으로 급진성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 못 한 대학생이 정규직 노조 파괴를 위한 폭력에 용역으로 동원되는 현실을 보라. (그래서 ‘배제된 노동 주체론’은 오히려 엘리트주의나 선거주의로 후퇴할 가능성을 크게 품고 있다.[각주:3])


정부와 기업주의 반노동 테러 공세에 고통 당하며 저항했던 쌍용차, 한진중공업, 유성, KEC, 에스제이엠 등의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섭된 노동”으로 부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나마 현실에서 “배제된 노동”에게 든든한 등받침이 돼 주는 건 “조직 노동” 뿐이다. 


자본주의의 패악을 끝장내려면 노동계급의 힘에 기대야 한다.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이윤 창출을 봉쇄할 수 있는 객관적 능력이야말로 진보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따라서 진보적 사회 변혁은 현실의 노동자들이 내 맘 같지 않다고 도덕적으로 비난하고 “조직 노동”과 “배제된 노동”을 구분하는 태도가 아니라, “조직 노동”이 그 힘을 “배제된 노동”과의 단결을 통해 극대화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태도로만 가능할 것이다. 분리주의적 이론은 단결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이 될 수 있다.


이런 경향은 개혁주의적 노동운동 안에서 노동조합 의식이 체제 안의 부문적 개혁에 머물게 되고, 노조관료층과 기층 사이에 정치·사회적 구분이 생기게 되므로, 좌파는 이를 극복해 현장 노동자들의 집단적 잠재력이 발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이론과 전략이 없기 때문이다.


사실, “조직 노동” 대중을 단결시키는 일은 좌파가 야권연대 등 여러 문제 등에 적극 개입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를 회피해선 안정적 기반을 획득할 수도, 유지할 수도 없다. 


그러므로 단결을 해치는 분석들은 실천에서 기반의 협소함 때문에 고통받거나, 아니면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달라지는 현실에 직면하게 된다. 안정적 조직 기반이 취약할수록 우경화 압력에 더 취약하게 되기 때문이다. 


올해 총선에서도 진보신당이 야권연대를 비난하면서도, ‘진보신당은 야권연대에 대한 의지가 없다’는 허위사실을 유포했다며 이정희 대표를 고소한 것은 이런 사정이 낳은 역설이라고 생각한다


진보신당 독자파 리더였던 이재영은 <레디앙>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 구당권파와는 함께할 수 없다면서도 “반성과 지분”을 조건으로 신당권파를 구성하는 참여당 지도자들과는 연합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각주:4] 


김종철 부대표는 “신당권파가 하나의 큰 흐름으로 인식되어 왔고 … 어려움을 겪으면서 함께 행동했기 때문에 … 다른 행보를 보이는 것은 좋지 않다”고 말한다. 신당권파에 포함된 진보정치 세력에게 유시민 등 자유주의 정치 세력과 계속 공동 행보를 취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의도치 않게 종파주의로 귀결될 수 있다.


민주노총과 거리를 두려다 2008년 총선과 2010년 지방선거에서 잇따라 실패하고, 진보신당이 이른바 통합파와 독자파로 분열한 것 자체가 사실은 이런 모순의 반영이다. 올해 총선에서 진보신당의 믿는 구석은 거제와 창원의 일부 금속노조 기반이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원칙을 지키면서도 노동자들의 계급적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전략이다. 연립정부 노선이 노동운동을 지배하도록 내버려두고 싶지 않다면, 진보정치 세력과 노동운동의 단결을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계급연합 노선과 싸워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87호에 축약돼 실렸다. ☞ 바로가기





  1. 이들은 박원석 의원이 주도한 새로나기특위 보고서의 우경적 혁신에도 우호적이다. [본문으로]
  2. 8월 21일 기자회견에서 사회연대 후보로 제안 명칭이 바뀌었다. [본문으로]
  3. 게다가 이런 구분 방식과 논리는 조직 노동운동을 ‘노동귀족’이나 ‘정규직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국민의 눈높이’ ― 사실은 여론을 지배하는 자본의 눈높이 ― 와 구분되기가 힘들다. [본문으로]
  4. “애들은 책상에서 자로 줄긋고 칼로 38선 팔 수 있지만, 정치세력은 마음대로 그렇게 하기 어려워요.”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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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공업의 정리해고는 노동자들이 1라운드 승리를 거뒀는데, 금호타이어는 회사가 정리해고를 강행할 기세입니다. 금호타이어 사측은 오늘 1천1백99명 정리해고를 신고했다고 합니다.

금호타이어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지키려면 양보안을 낼 것이 아니라 최대의 힘으로 싸워야 합니다. 금호타이어 부실에 노동자는 조금도 책임이 없습니다. 쌍용차처럼 점거 파업도 해야 합니다. (☞ 관련기사: 한진중공업 승리, 금호타이어 투쟁, 쌍용차 경험)

지난해 쌍용차 파업 당시 일부 친기업주 언론들이 덴마크의 노동정책을 배워야 한다는 기사들을 내보낸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한겨레>도 관련 기사들을 내보냈습니다. 고용을 두고 극단적 대립을 하지 않을 상생의 대안이라고 소개했습니다. (다 쓰고 보니 마침 덴마크 총리가 오는 10일 방한한다는 군요)

덴마크의 노동시장 정책은 황금 삼각 모델로 불립니다. ①해고의 자유와 ②관대한 복지(실업수당), ③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세 가지 정책이 균형을 이뤄 노사 모두 만족한다는 겁니다.

① 덴마크 기업에서 해고는 한국보다 쉽습니다.
② 실업 노동자에게 정부는  기존 급여의 70~90퍼센트 수준의 실업수당을 4년간 줍니다.
그런데 그냥 주는 게 아닙니다.
③ 1년은 그냥 주고 3년은 정부가 제공하는 재취업 교육과 직업 알선에 성실히 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노동의 유연안전성'이란, 안전망이 있으니 쉽게 자를 수 있다. 그리고 정부는 이들을 적극적으로 재취업시킨다는 것입니다.

학자들은 이를 사회민주주의의 신종인 '사회투자국가(이나 정책)'으로 부르거나, '제3의 길'의 한 변형으로 봅니다. 이념상으론 노동계급의 관점에서 정책을 세우는 게 사회민주주의인데, 이 정책은 기업주와 시장의 권리를 보장하는 관점에서 후속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노무현 정부도 이런 덴마크 모델을 도입하려 "사회투자국가(정책)"라는 담론으로 먼저 제시한 적이 있었고, 친기업주 언론들도 긍정적으로 언급해 왔습니다. 한국은 고용의 유연성 즉, 해고의 자유가 너무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한편에선, 온건한 진보 학자들 중에도 이 모델을 선호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유연성이 이미 높은 수준으로 되기도 했거니와, 실업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시대에 안정성이라도 확보해 보자는 취지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고용된 노동자 중 비정규직 비율이 절반을 넘어 이미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1997년 전과 비교하면, 취업 노동자 수는 그리 늘지 않았는데, 비정규직 노동자의 숫자는 몇 곱절 늘었습니다. 정규직이 잘린 자리를 비정규직이 채운 경우가 많은 겁니다. 고용 유연성이 이미 높다는 뜻입니다. 게다가 실직 후 소득안정성이 OECD 안에서 최악입니다[각주:1].

논리적으로 이미 유연성이 많이 확보된 나라에서 유연안정성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건 안정성 추구론자들이 적극 나서야 하는 문제인데, 이 나라에선 거꾸로입니다.

여기에서 우린 덴마크 모델의 허점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통상적 경기변동 대응력이 우수할 것 같지만 사실 덴마크식 유연안정성 정책의 가장 큰 허점은 경제 위기 때 드러납니다. 지금 같은 장기 침체기엔 더 심하겠지요.

경기 후퇴로 일자리의 절대적 규모가 줄어들 때, 이 모델은 무기력합니다. 해고가 쉽기 때문에 실업자는 늘어납니다. 그러나 이들이 재취업할 일자리는 적습니다. 2008년 말 시작된 세계경제 위기의 후폭풍으로 지난해 덴마크는 인구가 5백60만 명인데, 실업자가 70만 명에 이르렀습니다.

실업자가 빨리 해소되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실업수당을 줄 기금이 부족하게 됩니다. 실업 노동자들은 저임금 일자리를 강요당하게 됩니다. 이미 덴마크 정부는 실업수당 기한을 2년으로 줄이려합니다. 실업수당 액수 상한선도 생겼습니다.

이 모델에서 기업주에게 해고는 권리지만, 고용은 의무가 아닙니다. 고용을 위한 노력은 정부와 개인들이 합니다[각주:2]. 일자리 창출 의무가 누구에게도 없다는 점에서 이 모델은 안정성의 후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덴마크 정부가 1994년 이 유연안정성 정책(황금삼각모델)을 도입하기 전에는 실업수당을 무기한 지급했습니다. 수급 기한을 4년으로 줄인 뒤에도 처음엔 조건 없는 소득보장이었지, 조건부 지급이 아니었습니다. 명백한 복지국가의 후퇴인 겁니다.(유연성의 보상으로 안정성을 확대한 것이 아니라 안정성만 후퇴한 셈입니다.)

게다가 개인을 해고하는 게 자유롭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집단적 힘이 약화되고 개인들로 파편화될 개연성도 큽니다.

친기업주 언론들이 덴마크 모델을 찬양한 데는 이유가 있었던 겁니다. '유연안정성' 모델은 절묘한 균형 정책이거나 제3의 길이 아니라 신자유주의 정책에 복지국가의 포장을 씌운 것에 불과합니다.


기본적으로 복지 비용은 정부 재정에서 나옵니다. 정부 재정 수입 즉, 세금을 누가 많이 내느냐 하는 것도 복지정책의 진보성을 평가하는 간접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덴마크는 2004년 기준으로 총 조세 수입에서 소득 역진적 간접세인 소비세가 32.7퍼센트를 차지합니다. 그리고 개인소득세가 절반입니다. 법인세는 6.5퍼센트밖에 되질 않습니다. 노사가 분담하는 사회보험료에서 기업 몫이 4퍼센트입니다. 총 조세수입에선 0.1퍼센트입니다.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건 덴마크의 기업들은 해고는 맘대로 하고, 실업자에게 안전망을 제공하는 비용은 사회에 떠넘기고 있다는 겁니다. 법인세율 자체가 OECD 안에서도 낮은 수준입니다.(한국보단 살짝 높습니다)

정부 재정 수입에서 법인세와 재산세 비중이 낮고 간접세인 소비세 비중이 높은 것은 스웨덴과 덴마크가 유사합니다. 차이나는 부분은 덴마크가 개인소득세 비중이 높은 대신, 스웨덴은 연금 등 사회보험에서 기업주가 부담하는 몫이 크다는 겁니다.

북유럽 복지모델도 기업들에겐 상당한 수준에서 규제 완화와 이윤 보장이라는 편의를 봐주고 있다는 거죠.

결국, 유연안정성 제도 도입론은 노동자들에겐 사기극입니다. 덴마크 모델 찬성파들은 덴마크의 실업률이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매우 낮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시긴 미국발 거품 경제 때문에 수출 중심 국가들이 모두 외형적으론 성장을 하던 때입니다.

결론은 덴마크 모델은 대안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동자들은 해고 금지법을 제정하고 임금삭감 없는 노동시간 단축으로 일자리를 늘릴 것을 요구해야 합니다. 부도기업은 공기업화해 고용을 보장하도록 해야 합니다.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 등 진보진영이 '전국민고용보험제'를 실업 대책으로 내놓은 건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경제 위기 시대에 진보진영은 그 이상을 내놓아야 합니다. (☞ <레프트21>이 제시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

경제 위기 시대에 실업에 저항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권리입니다. 일자리를 줄이는 정책이 청년 미취업자들의 해결책이 될 수도 없습니다. 기업주의 이익과 노동자들의 삶이 충돌할 때, 노동자들은 과감하게 노동자들을 살리는 정책을 요구해야 합니다.

스스로 행동해 삶과 권리를 지키지 못하면 누구도, 친기업주 언론이 칭송하는 어떤 모델도 해답을 주지 못합니다. 노동자들은 삶을 위한 투쟁의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다수에 속하는 우리는 노동자들의 단호한 선택을 지지하고 응원해야 합니다.

  1. OECD가 최근 발표한 ‘2009년 고용 보고서’에 따르면 OECD가입국 중 비교가능한 29개 국가의 ‘순임금대체율(근로시 순소득에 대한 실직시 순소득의 비율)’을 조사한 결과 한국의 실직 1년차 순임금대체율은 30.7%로 세번째로 낮았다. 이는 29개국의 실직 1년차 순임금대체율 중위값인 52.2%에 비해 21.5%포인트나 낮은 것이다. 한국보다 실직 1년차 순임금대체율이 낮은 국가는 미국(27.8%)와 영국(28.4%)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경우 실직 5년차까지 순임금대체율 28.4%가 유지돼 실직시 소득 안전성은 높은 국가에 속했다. 반면 한국은 실직 2년차부터 순임금대체율이 0.3%로 급락해 실직후 혜택이 2년차 이후에도 지속된 26개국 중에서 가장 낮았다. 특히 실직 5년차까지의 평균 순임금대체율은 6.3%로 미국(5.6%)에 이어 29개국 중 두번째로 낮았고, 29개국 중위값 28.4%와 비교해 4분의 1도 되지 않았다. [본문으로]
  2. 기업의 해고비용을 정부가 대신 처리해 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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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기본소득 국제학술대회: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기본소득을


기본소득제도 도입

사람들에겐 최소한의 존엄성을 지킬 수단이 필요하다. 기본소득제도가 그 수단이 될 수 있다. 기본소득제도는 누구에게나 조건 없이 동일한 액수의 현금을 지급하는 제도다. 누진세를 강화하고 주식과 토지 등 불로소득에 세금을 무겁게 매기고 국방비를 줄이면 일정한 수준의 기본소득 지급이 가능하다.

출처: <레프트21>이 제시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


“<레프트21>이 제시하는 더 나은 삶을 위한 주요 요구들”에 기본소득제 도입이 추가됐습니다.

기본소득제는 모든 국민에게 조건 없이 적정 액수의 소득을 국가가 지급하는 제도입니다.주민등록이 된 모든 국민은 개인 통장을 국가에 등록하고 국가는 매달 이 통장에 기본소득을 입금합니다. 이는 국가가 모든 국민에게 소득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한국에서 기본소득제 도입을 지지하는 사람들[각주:1]은 대체로 부자 증세를 통해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할 것을 요구합니다. 이런 내용의 기본소득제도가 도입된다면 소득 하락으로 고통 받는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입다.

대기업주와 땅부자, 주식부자들은 일하지 않는 사람에 돈을 주는 건 노동의욕을 떨어뜨려 경제의 생산성을 낮춘다고 말합니다.

지금처럼 실질 실업률이 13퍼센트에 이르고 경제위기를 빌미로 대규모 해고가 벌어지는 상황에서 이런 말은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정당화하는 수작일 뿐입니다.

사 실 이들이야말로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엄청난 불로소득을 얻습니다. 한국의 부동산 부자들은 정부의 거품 정책으로 앉아서 돈을 법니다. 부동산 가격이 노동소득보다 빨리 오르면 집을 사려는 월급쟁이들은 가만히 앉아서 재산 손실을 보게 됩니다.

한국의 1백 대 주식 부자들의 74퍼센트가 재벌 2·3·4세들입니다. 이들 다수가 미성년자입니다.이들이야말로 소득을 창출하는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는데 평범한 노동자들 수백 명이 평생 모아도 벌지 못할 돈을 소유합니다.

아무리 큰 기업이라도 세계적 차원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는 협력적 노동의 기여 없이는 결코 부를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기업주와 부자들이 이 사회 전체 구성원을 위해 돈을 내는 것은 당연합니다.누구에게나 기본적인 생계를 유지할 권리를 보장하는 세상이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신체적 이유로 노동할 수 없는 사람들, 일자리가 없어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 가정주부와 어린이 노인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이들의 경제적 자립도를 높여 사회적 지위를 더 높이고 천대와 차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기본소득의 보장은 실업 상태의 노동자가 당장 생계를 위해 열악한 저임금 일자리를 순순히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에 저항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한신대 강남훈 교수가 기본소득 재원을 계산했습니다. 만 19세까지 30만 원, 만 39세까지 40만 원, 만54세까지 50만 원, 그 이상은 60만 원을 매달 지급하면 현재 인구 기준에서는 1년에 2백15조 원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무상 교육․의료 비용을 더하면 총 2백40조 원이 필요합니다.

강남훈 교수는 “모든 소득에 과세한다”는 원칙에서 이자와 배당 등 불로소득에 30퍼센트의 소득세를 매기고 토지세와 주식 거래 양도소득세를 도입하자고 말합니다.[각주:2] (한국은 주식 거래 차익에 무는 증권거래세가 0.3퍼센트에 불과함.)

진보 진영의 일부는 이 주장에서 기존 복지제도 일부를 기본소득 재원에 사용하자는 말에 반감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소수지만 기본소득 요구가 신자유주의 플랜의 하나인듯 말하는 단체도 있습니다. 그러나 국가복지가 턱없이 부족한 한국에서 이런 인식은 과도하다고 봅니다.

강 교수의 제안을 보면, 국민연금에 한정해 재원을 돌리자는 것인데, 그것은 국민연금 제도 자체는 개념상으로 기본소득처럼 보편주의 복지 개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기본 성격이 같기 때문에 더 포괄적으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주는 데 당겨쓰자는 겁니다. 전 합리적이라 봅니다.

한국의 국민연금은 현재 인구의 절반이 소득이 부족해 국민연금 미가입 상태입니다. 국민 절반이 연금을 받질 못하는 것이죠. 평균 소득이 1백50만 원 정도일 때, 이 소득 기준으로 20년을 납부해도 65세부터 월 30만 원을 조금 넘게 받습니다.(물론, 이 정도도 사보험보단 훨씬 높은 급여입니다)

이런 한국의 조건에서 지금 당장 모든 국민에게 40~60만 원 수준의 기본소득을 지급하려 기존 연금 일부를 돌리는 건 그리 불합리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그밖에 고용보험이나 기초생활보장법, 장애연금 등이 좀 중요한 현금지불식 복지제도라 할 수 있는데, 이 제도들은 그 지급액이 생계 유지에 도움이 되기에는 충분치 않습니다. 두 제도 모두 수급 자격을 심사하고 부정수급을 감시하는 데 시간과 비용을 낭비하며 수급자에게 사회적 모멸감을 줍니다. 기본소득은 조건을 따지지 않기 때문에 이런 제도에 비해 장점이 있습니다.(실업급여는 예외일 수 있겠네요)

물론 일부 기본소득 모델은 이런 제도까지 통폐합하자고 합니다. 이 점은 논쟁거리이며, 전 이 견해엔 반대합니다. 이런 '필요에 따른 지급'이라는 목표는 중요한 것이고, 이에 비춰 이 제도들은 지속돼야 할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실업을 개인의 문제라고 가르칩니다. 신자유주의는 '생산적 복지' 등의 이름으로 노동 여부/의지/능력과 복지를 연계시키려 합니다. 그런 점에서 기본소득의 아이디어는 신자유주의적 복지에 저항하는 효과가 있습니다. 

한편, 기본소득의 존재를 이유로 기업주들이 저임금을 정당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습니다. 모든 계층에 주는 소득제도는 소득 차이를 그대로 가져가므로 소득 재분배에 역행한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실업률이 높아지면 고용 노동자에 과도한 부담을 지울 거라는 지적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실업을 막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 기본소득을 도입하자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닙니다. 사실 자본주의에서 도입되는 모든 복지 제도(개혁) 안은 경기변동 탓에 후퇴할 위험을 안고
있습니다. 결국, 문제는 기존 제도의 비용 이전이나 불로소득 논란에 있는 게 아닙니다.

급진좌파가 개혁 요구를 낼 때, 제도의 완결성이나 (체제 안에서) 실현가능성을 판단 기준으로 삼아선 안 됩니다. 반대로 첫째, 돈을 어느 계급이 부담하는가를 제기하는가. 둘째, 요구가 노동계급의 의식을 발전시키는데 도움이 되는가, 셋째, 노동계급의 단결에 도움이 되는가 하는 점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될 수 있습니다.

즉, 개혁 요구는 싸워야 실현이 가능하므로 요구의 내용 자체가 이 싸움을 크고 강하게 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지제도를 다룰 때 늘 명심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제도의 세부 설계(와 그에 바탕한 실현가능성 판단)는 오히려 부차적일 수도 있습니다.

사진 출처: <레프트21> 6호 "부자 증세로 기본소득 쟁취해야"  ⓒ사진 제공 권문석 사회당 기본소득위원장

이 기준에서 한국 좌파들의 기본소득 요구를 보면, 재원을 자본가들이 져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모든 이에게 지급하지만, 그 돈이 부자들의 누진세와 불로소득에 매긴 세금에서 나옵니다. 과정 자체가 소득의 재분배를 향하고 있습니다.

이 점과 관련해 덧붙이면, 주식과 부동산 등 투기로 번 불로소득은 경제의 다른 부문에서 생산한 부를 약탈한 것에 불과하므로 불로소득에 세금을 무겁게 매기는 것은 정당합니다.

기업들에게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공급하려 사회와 개인들은 많은 비용을 들여 보육에서 교육, 복지를 실행합니다. 노동자들 덕분에 막대한 수익을 올린 기업들이 이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기업들에게 줘야 할 것은 '해고의 자유'가 아니라 복지 비용 부담 의무입니다. 

이런 점들에서 분명하다면 기본소득 요구는 꽤 쓸 만한 요구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혁신적인 요구가 단지 대화와 설득으로 채택되진 않을 것입니다. 이 제도 하나가 자본주의 체제의 시장 질서를 근본에서 바꾸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기본소득 요구는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를 어느 정도 거부합니다. 기본소득 지지자가 많아지는 것은 시장 논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 이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 폭넓게 단결해 싸운다면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변화의 가능성이 생겨날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진정한 권력자들인 대기업주들과 벌일 싸움입니다. 특히, 경제 위기 시대에는 대자본가들이 사회 전반에 경제 위기 책임을 전가하기 때문에 조직 노동자들의 저항이 매우 중요해 집니다. 기간 산업 등에 고용된 '조직 노동자들'이 사회 변화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지위를 갖는 이유입니다.

기본소득 요구는 이 점에서도 장점이 있습니다. 지금처럼 경제 위기 규모가 커 실업자가 늘어나는 때 조직 노동자들과 미조직 노동자, 실업자 등이  단결해 싸울 수 있는 요구입니다.

경제 위기 시대에 <레프트21>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대중행동의 요구로 기본소득 요구를 포함시킨 것은 잘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1. 한국에서 기본소득을 지지하는 대표적인 단체로는 사회당과 민주노총 정책연구원이 있고, 학자로는 한신대 강남훈 교수와 시립대 곽노완 교수 등이 있습니다. 이들 사이엔 약간 색조 차이가 있습니다. 기본소득 지지 단체와 개인들은 기본소득네트워크 (http://cafe.daum.net/basicincome)를 구성해 정보를 공유하고 활동합니다. 제가 취재한 기본소득 국제학생대회도 이 네트워크가 주축이 돼서 개최한 것입니다. [본문으로]
  2. 강남훈 교수가 재원 마련에 적용한 주요 기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음. ① 모든 소득에 과세한다. ② 근로소득세, 법인세, 부가가치세는 지금대로 유지. ③ 불로소득(이자·배당·증권양도소득 등)은 30퍼센트 과세. ④ 환경 관련 세금 통합해 환경세로. ⑤ 재산세, 종부세 등은 토지세로 통합해 3% 과세. ⑥ 250조원 정도 추정되는 지하경제 철저 과세. ⑦ 단계적으로 연금을 기본소득으로 전환.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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