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진술은 고문, 구타, 협박으로 허위 자백을 한 것으로 인정되므로 증거능력이 없다.”

2007년 1월 23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3부는 32년 만에 열린 이른바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이하, 인혁당) 사건 ‘피고인’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자백이 유일한 증거였던 재판에서 자백이 허위라는 재심 판결은 인혁당 사건이 수사 단계에서부터 재판과 사형 집행까지 죄다 조작에 근거한 거짓의 살인극이었다는 걸 국가 스스로 인정했다는 것이다. 



사법 살인, 인혁당 조작 사건



야수적인 고문과 협박, 혐의를 조작하고도 모자라 판결 하루 만에 사형 집행,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시신마저 빼앗아 강제 화장, 이것이 유신의 야수 같은 인혁당 사건이다. 결국 그해 8월에는 인혁당 사건 유족들에게 국가가 6백37억여 원을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까지 내려졌다.


인혁당 사건은 196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5·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4년 당시 굴욕적인 한일회담 반대 투쟁이 정권 퇴진으로까지 번지려하자, 용공 조작 사건을 기획한다. 이것이 제1차 인혁당 사건이다. 그러나 검사들마저 증거가 없다며 기소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사건은 축소됐다.


8년 뒤, 박정희는 유신 체제를 선포하며 언론과 표현의 자유, 자유 선거 등 민주적 기본권을 말살하고 군사 독재를 영구화하려 했다. 


저임금에 기초한 초착취 체제를 유지해야 수출 경제를 계속 성장시킬 수 있는데, 그러려면 점증하는 불만과 저항을 뿌리부터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홍사덕이 말한 ‘1백억 수출을 위한 유신’이란 바로 한국 자본주의의 핏빛 진실인 것이다. 


이런 야만적 독재조차 민주주의를 위한 저항이 커지는 것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박정희는 민주화 운동 탄압을 위해 1974년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을 조작하고는 그 배후에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제2차 인혁당 사건이다. 바로 이 사건으로 여정남, 도예종, 서도원,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우홍선, 송상진 등 8인이 억울해 차마 눈감지 못할 죽음을 맞았던 것이다.


관련 구속자들에게는, 인간이라면, 인간에겐,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은 온갖 고문들이 자행됐다. 심지어 그 부인들까지 중앙정보부로 데려와 감금하고 협박해 “내 남편은 간첩”이라는 자술서를 쓰게 했다. 이 때의 자책감 때문에 김용원의 부인 유승옥은 일가족 자살 시도를 하기도 했다.



“박정희 죽을 때까지 사진을 씹고 또 씹었다”



유신 체제 아래서 군사재판이 공정할 리 만무했다. 변호사가 정부와 판사를 비판했다고 재판을 하다 말고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끌려나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일본 언론인마저 긴급조치 위반과 내란선동죄 등으로 구속할 정도로 보도 통제도 엄혹했다.


그러나 조직 사건의 실체는 없었다. 오직 고문과 협박으로 만든 허위 자백만 있었을 뿐이다. 수사가 얼마나 엉터리였냐면, 중앙정보부는 인혁당 피고인들의 배후로 ‘월북’한 김상한을 지목해 발표했는데, 수사 과정에서 김상한은 남한 정부가 포섭한 ‘북파 간첩’이란 게 드러난 것이었다.


그럼에도 결국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은 군사재판의 사형 원심을 확정했다. 다음날, 비통함 속에서 형무소를 찾은 유족들은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이미 새벽에 8명 모두 사형 집행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판결 18시간 만이었다.


야비한 독재 정권은 그것도 모자라 고문 흔적을 감추려고 시신마저 크레인을 동원해 가며 빼앗아 화장을 해 버렸다. 시신을 탈취한 차량을 막던 문정현 신부를 밀어버려 지금도 다리를 절게 만든 것도 이 때다. 유일하게 인도된 것이 이수병의 시신이었다. 등이 타고, 손톱발톱이 없는 시신 말이다. 


이런 폭압과 보도 통제 속에서 “빨갱이” 마녀사냥의 나팔을 불어댄 결과, 남은 유족들의 삶도 처참하게 부서졌다. 친구, 친지는 물론 형제들마저 왕래를 끊었다. 


심지어 “하재완의 3세 먹은 어린애를 동네 애들이 끌어다가 목에 새끼줄을 매어 나무에 묶어 놓고 빨갱이 자식이니 총살한다고 하면서 놀이를 한 일”마저 벌어졌다.




우홍선의 아내는 말로는 표현 못할 이런 억울함을 이렇게 털어놨다.


“남편이 사형당한 이후 신문에 나온 박정희 사진을 그가 죽을 때까지 이가 아프도록 꼭꼭 씹어서 뱉곤 했습니다. 남편 산소에 매주 꽃을 들고 찾아가서 하늘을 향해 ‘살인마 박정희 천벌 받아라’ 하고 외쳤습니다. 한번 외치면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꼭 세번씩 외쳤습니다.”


유족들이 “살인마 박정희”를 이 모든 악행의 주범이라고 본 것은 옳았다.


1,2차 인혁당 사건 수사 모두 박정희의 충복들인 신직수와 이용택이 진두 지휘를 했는데, 1964년에 이들은 각각 검찰총장과 중앙정보부 수사과장이었고, 1974년에는 중앙정보부장과 중앙정보부 제6국장이었다.


이용택은 훗날 “박정희 대통령도 인혁당 사건에 상당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한창 수사가 진행중일 때에는 신직수 부장과 내가 청와대에 들어가 직접 보고를 드렸다”고 털어놨다.


이런 사건의 진상이 정부 차원에서 처음 인정된 것은 2005년 당시 국가정보원의 과거사 진상 조사 때였다. 당시 한나라당 대표이던 박근혜는 이 조사 결과를 두고 “한마디로 가치가 없고 모함 … 코드 맞는 사람들끼리 우리 역사를 왜곡해 함부로 발표하는 것 자체가 과거사가 될 것”이라고 저주를 퍼부었다.


최근 박근혜가 인혁당 사건에 관해 “두 가지 판결” 운운한 것은 사실상 원심을 번복한 재심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인혁당 피해자들을 두 번 죽인 박근혜는 민주적 선거에 나설 자격도 없다. 살인마 독재 정치 계승자는 퇴출 대상일 뿐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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