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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13.08.09 돌아온 김기춘과 1989년 공안정국

기무사와 대법원 문건이 보여 주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실체

기사들 2018. 8. 21. 17:09

기무사와 양승태 문건이 보여 주는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실체


  • 255호
  •  
  •  2018-08-14
  •  
| 주제: 
  • 공식정치
  •  
  •  주류정치
  •  
  •  국가기관

전 대법원장 양승태 체제 아래서 상고법원 신설을 위한 재판 거래가 있었음을 증명하는 문건들이 공개된 지 두 달이 지났다. 누구나 공개된 해당 문건들을 볼 수 있지만 정작 해결된 건 거의 없다.

문건들을 보면, 양승태 하의 사법부가 상고법원을 신설하려 한 이유는 현행 정치 구조 속에서 법원의 위상, 즉 지배계급 내 대법원 판사들의 위상을 높이려는 시도였던 듯하다. 상고법원은 대법원의 기능을 쪼개어 신설하는 것이므로, 대법관의 위상을 가진 고위 판사 수가 늘어나고 기존 대법원이 판례를 남길 재판에 집중하게 돼, 헌법재판소와의 위상 경쟁에서 유리하다고 본 듯하다.

그래서 재판의 결과와 시점 등을 상고법원 판사 임명권 등과 거래 항목으로 삼은 것이다.

ⓒ출처 4.16 연대

이런 거래 동기와 양상을 보건대, 양승태 주도의 재판 거래는 일각의 주장과 달리 3권분립을 유명무실하게 만든 게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소위 3권분립 구조를 반영하고 동질적 계급 이해관계를 기반으로 해 사법부의 힘을 키우려는 거래였다.

이는 박근혜와의 유착이 대법원보다 더 심했던 헌법재판소가 박근혜를 탄핵한 것이나, 법원과의 거래 능력을 잃은 박근혜·이명박 등의 구속에 법원이 동의한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이명박·박근혜의 청와대와 사법부 고위 판사들 사이에 계급적 이해관계가 동질적이지 않았다면, 이런 식의 재판 거래가 가능했겠는가? 게다가 법원조차 정부를 비판하는 민간인을 사찰했음이 드러났다. 그 기간에 벌어졌던 국가정보원이나 기무사 등의 민간인 사찰과 국정 개입도 같은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오히려 사태를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로 보면, 지금 판사 집단이 자기 보호를 위해 영장 기각 등으로 재판 거래 수사를 방해하고, 김기춘을 풀어 주는 등의 도발적 작태를 보이는 상황을 설명하기가 힘들어진다.(물론 김기춘 석방에 책임 있는 김명수를 문재인이 임명했고, 검찰이 김기춘 구속 연장을 더 강력하게 요구할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문재인에게도 간접 책임은 있다.)

최근 법원의 행태는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법원을 현행 자본주의 국가 구조(헌법으로 표상되는) 안에서는 민주적으로 제어하기가 어렵다는 걸 보여 준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3권분립과 사법부의 독립을 추구하는 것이 진보적 대안이 되기 힘든 이유다.

예컨대, 임명권과 인사청문회, 입법권과 위헌법률심사 같은 상호견제 시스템은 (재판 거래에서 보듯) 그 과정에서 더 많은 자본주의 정치인들과 관료들, 기업주들이 영향을 미쳐 서로 합의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본주의 국가를 운영하는 시스템인 것이다.

따라서 박근혜와 이명박에 대한 대한 사법부의 태도 변화는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운동으로 표출된 개혁 염원을 핵심 요인으로 보지 않으면 설명할 수가 없다.

지배자들끼리 벌이는 공개적 견제와 갈등은 대중이 저항에 나설 자신감을 고무하기도 한다. 그리고 대중의 커다란 압력이 지배자들끼리 벌이는 상호견제 과정을 심각한 분열로 이끌기도 한다. 집권당이 분열해 국회가 압도적으로 박근혜를 탄핵한 것이나, 2017년 초 이재용 등의 구속을 놓고 특검과 법원이 갈등을 빚은 것이 그런 사례다.

그런데, 바로 그런 변화를 강제했던 박근혜 정권 퇴진 촛불 운동에 맞서 군대를 동원한 무력 진압을 시도했던 일이 있었음이 드러났다.

선출되지 않는 권력기관들

두루 알다시피, 6월 말 기무사의 계엄령 검토 문건이 폭로됐다. 기무사는 대통령 탄핵 상황에서 통상적 검토 문건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7월 구체적인 실행 계획(검토) 문건이 새로 폭로됐다. 그러면서 기무사는 해체 압력을 받는 수준으로까지 몰렸다.

기무사가 세월호 유가족 등 민간인을 사찰했다는 점도 드러났다. 군사독재가 끝난 뒤에도 기무사는 도청·미행·연행 등 민간인 사찰을 이어 왔다. 김대중 정부 때도 도청 등을 했고, 이명박 정부 때는 민주노동당 당원 등을 사찰하다 들킨 적도 있었다.

이는 기무사가 한국전쟁 전후로 악명을 떨친 특무부대, 전두환의 보안사령부 등을 전신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공 수사권까지 갖고 있는 막강한 기관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기무사는 국방장관에 대한 항명을 불사하며 버티고 있다. 결국 문재인은 기무사 “해편”이라는 신조어까지 동원해 ‘군사안보지원사령부’라고 이름과 내부 구조만 바꾸는 기만적인 개혁을 용인할 태세다. 과거 안전기획부가 이름만 국가정보원으로 바꾸고 거의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을 떠오르게 한다.

올 3월부터 폭로된 군부의 문건을 보면, 청와대와 기무사뿐 아니라 수도방위사령부(수방사)와 국방부, 육군본부의 일부도 연루된(또는 묵인한) 쿠데타 모의 자체는 실재한 듯하다.

이들은 촛불 초기부터 군대 투입을 고민했으나 12월 초까지 촛불의 규모와 기세가 파죽지세로 성장해 순식간에 국회 탄핵 국면까지 가면서 기회를 못 잡았다. 이후 태극기 집회로 우파가 결집을 유지하고 규모를 키우면서 마지막 모험수를 생각해 본 듯하다.

문건은 어느 쪽이든 헌재의 탄핵 심판에 대한 반발로 치안이 마비될 때를 군대가 나서는 기회로 삼는다고 명시했지만, 실제로는 박근혜 파면으로 치안이 불안해질 개연성이 없었으므로, 사실상 탄핵 기각 시 항거에 나설 퇴진 촛불을 진압할 친위 쿠데타 기획이었던 것이다. 계엄을 당시 여당의 협조로 유지한다는 문건의 계획이 이런 성격을 보여 준다.(계엄령 선포를 공개 호소하던 우파가 헌재 탄핵 당일 경찰 버스 탈취 등의 시위 양상을 보인 것이 이와 관련해 시사적이다. 물론 당시 우파는 대중의 지지를 거의 받지 못했고 사기도 높지 않았으므로, 군부 출동의 명분을 줄 상황은 만들어 낼 수 없었다.) 

군부가 출동을 논의했다는 폭로가 나온 3월에, 본지는 촛불 진압을 위해 군부가 나섰다면 그것은 전격적인 유혈 쿠데타 시도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당시 촛불의 기세가 조성한 세력균형상 국회가 계엄령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고, 대중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므로, 처음부터 계엄 선포와 함께 국회 봉쇄, 방송국(언론) 장악, 집회 원천 차단 등이 전격적으로 이뤄져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7월에 공개된 계엄 실행(검토) 문건은 진짜로 전격적인 도심 점령 계획을 담고 있었다. 이런 무모한 계획이 필요한 이유는, 앞서 살펴봤듯이, 역설이게도 성공 가능성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과연 친위 쿠데타 모의 세력이 문건에 등장하는 부대의 지휘관들을 모두 사전 포섭했을지는 의문이다.

따라서 만약 박근혜와 군부가 오판했다면 5·16의 재판(再版)이 아니라 혁명적 상황이 됐을 거라고 보는 게 더 현실적인 추론일 것이다.

우파 친박 군부의 쿠데타 모의는 혁명적 수준에 전혀 이르지 못했던 촛불 운동이 군부의 주관적 오판을 계기로 혁명적 수준으로 고양될 수 있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세계적 경제 위기 조건에서 벌어질 대중 저항이 내포한 “혁명의 현실성”을 보여 준다.

또한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군부가 언제든 자본주의적 민주주의를 중단시킬 잠재적 위험 세력이라는 것도 오랜만에 보여 준다. 문재인 정부는 기무사 문건이 통상 2년마다 갱신하는 합동참보본부의 계엄실무편람과 다르므로 당시 구체적으로 기획된 문건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군이 늘상 계엄 실행 작전계획을 갖고 있고 주기적으로 갱신한다는 것 자체가 국내 억압 기구로서 군대의 성격을 보여 준다.

그런데 군부는 헌재의 결정과 자신들의 결행 의지를 연동시켜 놓았었다. 결국 헌재는 강력한 저항을 달래어 체제 안정을 이루려고 만장일치로 박근혜를 탄핵해 버렸다. 이런 실제 상황의 경과를 봐도, 군부 등 반동 집단의 음모를 막는 힘은 노동계급의 저항에 내재한 혁명적 잠재력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안착(또는 심화)을 전략적 목표로 삼고 노동계급 저항의 급진성과 전투성을 억제할수록 반동을 막는 힘은 오히려 약해진다.(이런 민주 개혁론과 맥락을 같이하는 인민전선 전략도 마찬가지 약점을 지닌다.)

이런 점에서 대법원 사법 농단 파동을 3권분립의 확립 등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개혁의 관점에서 보는 것의 부적절함도 새삼 확인된다. 법원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아래서도, 아래로부터 대중이 통제할 수 없는 권력을 쥐고 선출된 좌파 정부를 무시하거나 대중의 절절한 개혁 염원에 찬물을 끼얹을 수 있다.

개혁과 혁명

양승태의 재판 거래 문건과 기무사의 계엄 모의 문건이 공개된 것은 아마도 우선회를 시작한 문재인 정부가 우파의 위험이 여전함을 환기시켜, 지지층 이탈을 최소화하려는 시도일 개연성이 높다.

아마 법원과 기무사 측 모두 강력하게 몽니를 부리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기득권의 핵심 구조를 건드리지 않아 온 문재인 정부가 불리해지니 이중플레이를 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런데 사안 자체가 국가 기강을 흔든 문제로 커지면서, 문재인 정부의 책략이 꼬인 것 같다. 문재인 정부는 자신들이 풀어놓은 체제의 비밀을 감당하기 힘들어 한다.

적폐 구조와 세력을 건드리지 않고 적폐 청산(개혁)을 하겠다던 문재인 정부의 꼬인 스텝을 보면, 왜 개혁이 혁명보다 어렵다고들 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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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김기춘과 1989년 공안정국

내 기사 이야기 2013. 8. 9. 10:12



뻔뻔하기 짝이 없는 박근혜가 대통령 비서실장을 김기춘으로 교체했다. 


박근혜 후원 원로그룹 7인회의 일원인 이 자는 중앙정보부,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을 거치면서 공안수사의 총지휘자 구실을 하던 자다.


유신헌법의 기초 작업 실무를 관장해 박정희의 이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젊은 나이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직을 맡아 출세가도를 달렸다.(당시 그의 직속 상관인 중정부장도 정치검사 출신인 신직수) 그 시절, 각종 간첩단 조작 사건과 고문 수사가 판을 쳤다. 그가 87년 이후 공안검사들의 원조 격 취급을 받는 이유, 공작정치, 공안통치의 대가로 취급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정희와 표면상 차별화를 하고 싶었던 전두환 때 요직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노태우 때 초대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그는 1989년 공안정국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공안정국은 일선 경찰에 시위 대비용으로 총기가 지급될 정도였다.


김기춘이 주도한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이란 것도, 그 본질은 부산 지역의 시장, 경찰, 검찰, 안기부, 교육감, 기무사, 기업주 등이 모여 반동적 정치 공작을 음모한 것이다.


국정원이 선봉에 선 총체적 탄압 공작이 분노의 초점이 된 상황에서 총체적 공안 공작의 전문가를 정권의 컨트럴타워로 영입한 것이다. 유신 시절 대통령 휴양지로 지정한 저도에 가서 질낮은 저도의 추억억을 되새기더니 남들 다 하는 말로 유신의 추억을 되새기고 온 듯하다.


김기춘은 국무총리 정홍원과 법무장관 황교안의 검찰 내 고위 상관 출신이다. 이는 박근혜의 반동적 친정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애초 정홍원을 총리로 추천한 자도 김기춘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새로 임명한 민정수석 홍경식도 대검 공안부장 출신으로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법무부장관 황교안과 검찰총장 채동욱의 상관 출신이다. 검찰을 확실히 장악해 정권의 위기 탈출 수단으로 더 효과적으로 써먹겠다는 뜻이다. 


아니나다를까, 7일 검찰은 '사이버 명예훼손 사범 엄정처리지침'을 발표해 ‘악의’만 있으면 사실이라도 명예훼손을 적용하고 사이버 명예훼손도 구속 수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호 기자는 이를 두고 ‘박근혜식 긴급조치 1호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검찰이 판단하니 말이다. 



<한겨레> 8.1. 장봉군 만평.



박근혜는 임기 초 부패·유신 코드 인사로 위기를 겪었는데, 취임 다섯 달만에 더 노골적인 반동적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나이 80이 다 된 배후세력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강성우익의 본색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큰 압력은 대중의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7월말에만 전국 50곳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6월에 3백여 명으로 시작한 촛불이 지금은 매주 수만 명이 결집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기춘이 등장한 것을 보면서, 1989년 공안정국을 떠올려 보는 것도 도움은 될 듯하다. 


노태우는 당선은 했지만, 1987년 이후 고양된 대중운동, 특히 노동운동 때문에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88년 말에는 쿠데타 베프인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내야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군부 내 강경보수파들이 공개 반발하기도 했다. 여전히 경제호황의 여파가 있었지만, 좋은 시절은 정점을 찍고 끝나가고 있었다. 


1989년 3월 현대중공업 점거파업과 서울지하철 파업이 벌어지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했다. 이를 빌미로 체제 위협론을 들먹이며 노태우는 공안관계장관대책회의를 주재해 공안정국을 개시했다. 


곧바로 공안정국 아래서 일선 경찰에 총기가 지급됐다. 현대중공업에 경찰 병력을 쏟아부어 폭력 진압을 실행했다. 


이때 공안정국을 주도할 주체로 공안합동수사본부(공안합수부)라는 게 구성됐다. 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바뀐 이름)와 검찰, 경찰, 보안사 등을 모아 만든 이 기구를 사실상 주도한 것이 당시 검찰총장 김기춘이다. 


구성을 보면, 공안합수부는 이번 국정원게이트처럼 안기부가 정치와 탄압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것도 공개·합법적으로 말이다.(지금은 해도 몰래 해야 하는 처지다.)


이 공안합수부의 명목상 본부장이 김기춘의 직속 부하인 대검 공안부장 이건개였다. 이건개는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극우 공안검사 출신이다.(이건개의 아버지가 박정희의 군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장군 이용문이다. 이건개는 지난해 대선에 출마했다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 


김기춘은 공안정국을 시작하면서 평검사들을 모아 놓고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난다. 체제 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고 강조했다. 준 군사정권의 수호를 위해, 재벌 독재화의 유지를 위해, 민주화 반동을 위해 진보세력을 ‘박멸’하라는 것이다.


공안합수부는 결성되자마자 신문 1면을 연일 장식하며 당시 전민련 간부들(이재오, 김근태 등)과 리영희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들을 체포·구속하는 탄압 선풍을 일으켰다. 


전교조 대량 해직 사태 등 노조 탄압, 민주화 활동가 대량 구속, 노동·학생 운동가들의 의문사가 연이어 벌어졌다. 심지어 보안사령부는 계엄령을 검토하며 민간인을 사찰하며 체포 명단을 작성했다.(‘청명계획’)


이런 총체적 탄압과 공작은 보수대연합을 구성해 정권의 기반을 확대하는 정계개편으로 이어졌다.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이런 반동은 전노협 결성과 연대 투쟁, 1991년 5월 투쟁 등으로 우리 운동이 치열하게 맞선 결과, 반동적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합당시 3분의 2에 이르는 의석을 가졌던 민자당은 1992년 총선에서 과반수에 한 석 미달하는 수준의 결과만 얻었다. 


김기춘은 1991년 5월 투쟁 중에 이번에는 (승진해서) 법무장관으로 긴급 투입돼 유서대필 사건 조작 등을 배후에서 지휘하며 투쟁의 찬물 끼얹기에 한몫했다. 법무장관에서 물러나 뒤 1992년 12월에 부산에 가서 공작을 진행하다 사단이 난 것이 그 유명한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1997년에는 민주노총 총력 파업 후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평가받던 김영삼도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해 대선에서 일당국가 해체를 막을 순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례로 알 수 있는 것, 첫째, 박근혜는 집권 반 년만에 반동 본색을 드러낼 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둘째, 반동적 우파 정책을 수행하려면 박근혜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 셋째,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반동적 태도를 더욱 노골화할 수 있다. 넷째, 그러나 운동이 위축된 수세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박근혜는 겨냥하는 운동의 속도를 늦추거나 국정조사 따위에 운동의 잠재력을 한정하며 박근혜에게 시간벌기를 허용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다. (사실 이 글이 김기춘을 소재로 했지만, 김기춘만이 주인공인 글은 아니다. 왜 그런 내력의 인물을 전면에 세웠는지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고 경계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저들이 그토록 애를 쓰며 정권을 쥐려한 것은 그냥 청와대에서 근무 한 번 해 보고 싶어서, 예전에 살았던 집에 다시 들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권을 잡고 그 권력을 이용해 하려고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유린이고,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들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중적 불만과 시위가 박근혜의 반동에 맞서는 총체적 분노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스런 게 아니다. 이를 위해선 거리와 1퍼센트 지배자들의 눈치를 보며 두길보기 하는 민주당에게서 독립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거리의 촛불은 쟁점을 확대해 진정으로 힘을 가진 노동운동과 만나야 한다. 그 방향으로 전진해야 박근혜의 신경질적인 반동을 막을 수 있다.



저작자표시 비영리 동일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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