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결국 ‘민심’의 회초리 앞에서 한 발 슬쩍 물러섰다. 노동자 증세안 발표 나흘 만에 “원점 재검토”를 지시한 것이다.
경제부총리 현오석이 13일 ‘증세 기준을 연간소득 3천4백50만 원에서 5천5백만 원으로 올리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러나 “부자 감세 유지, 노동자 증세” 기조 자체는 바뀌지 않았다. 소나기만 피해가려고 증세 대상 노동자 수만 4백34만 명에서 2백10만 명 수준으로 줄인 것이다.
노동자 유리지갑에서 돈을 꺼내 쓰려다 들키니 쥐었던 돈 일부만 도로 집어넣으며 사과하는 격이다. 반면, 재벌과 1퍼센트 부자들의 강철 금고는 여전히 건드리지 않고 있다. 결국 박근혜의 원점 자체가 ‘노동자 우롱하며 유리지갑 털어 재벌·부자 퍼주기’였던 것이다.
이런 징세 정신은 “거위가 고통을 느끼지 않도록 깃털을 살짝 빼내는 것이 이번 세제 개편안의 정신”이라는 청와대 경제수석 조원동의 말에서 이미 드러났다.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2013 세법개정안’ 해설 문서도 “소득·소비 과세 비중을 높이고, 법인·재산 과세는 성장 친화적으로 조정”하며 “과세 기반을 확대”하겠다고 노골적으로 말하고 있다.
심지어 “상속증여세는 … 높은 누진세율 체계 등으로 인해 경제행위에 미치는 영향이 큼”이라는 헛소리까지 하고 있다.
‘과세 기반 확대’는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세금을 내도록 하겠다는 말이고, ‘성장 친화적 조세’란 결국 기업과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말이다.
결국 ‘증세 없이 복지 늘린다’는 박근혜의 허풍은 ‘노동자 증세로 부자 감세를 유지한다’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박근혜 세제 개편안을 두고 대기업 과세로 보완하라는 식의 입장으로는 결코 복지를 위한 재원 마련이나 조세 불평등을 해결할 수 없다.
박근혜는 일단 세법 개정안이 통과되고 나면, 부가가치세 확대, 소득공제 비율 축소 등으로 조금씩 노동자 증세를 다시 늘려나갈 것이다. 경제 위기로 세수가 줄어들면서 증세는 필요해지지만, 조세 불평등의 뿌리인 부자 감세 철회와 증세는 건드리지 않을 테니 말이다.
사실 2000년대 이후 전체 국민소득에서 기업소득 비중은 늘어왔고, 근로소득은 줄어 왔다. 그런데도 정부는 노동자 소득은 유리지갑으로 만들어 놓고 필요할 때마다 맘대로 꺼내 써 왔다. 반면, 지난 10여 년 동안 법인세 등 부자 감세는 계속돼 왔다.
“2000년 대비해 2011년 법인가처분소득은 5백33퍼센트 늘었는데, 법인세 부담은 겨우 1백51퍼센트만 늘렸다. 반면 같은 시기 개인가처분소득은 86퍼센트 늘었는데, 소득세는 142퍼센트로 소득 비해 대폭 늘렸다.”(선대인경제연구소)
이렇게 걷은 돈은 정작 1퍼센트 특권 세력을 위해 펑펑 써 왔다. 올 상반기에만 세금 10조 원이 덜 걷혔다면서, 정부는 7월에 총 6조 원이 넘는 기업 지원책을 내놨다. 국방부는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을 고조시킬 첨단 살상무기 구입에 수십조 원을 쓰겠다고 한다.
국정원의 일베충 댓글 알바에 수천만 원을 쓴 게 드러났는데, 이런 범죄 행위에 총 몇 억, 몇십 억 원이 들어갔는지 제대로 알 수도 없다. 이건희의 상속세 탈세만 제대로 잡아냈어도 2조 원 넘는 돈을 걷을 수 있었다. 그 아들의 상속세는 또 어떤가. 범죄자 전두환의 불법 정치자금은 징수는커녕 더 천문학적인 부를 늘리는 종자돈으로 사용돼 왔다.
소득불평등에 더해 조세불평등까지 심각한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조세 저항’ 여론은 완전히 정당하다. 연봉 5천만 원 노동자보다 주식차익 5천만 원 불로소득이 세금을 더 적게 내는 사회에서 노동자 증세가 어떤 정당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기껏해야 수천만 원 연봉의 노동자들을 소득 기준으로 줄 세워 놓고 너 정도면 더 내도 되니 마니 하는 보편증세론은 틀렸다. 적나라한 불평등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침묵한다는 점에서 비겁하고 관념적이다. 1
조세도피처에 숨겨진 한국 돈이 9백조 원이 넘는다. 국세청이 뇌물 받고 깎아준 재벌 세금도 어마어마하다. 대기업 현금보유액만 1백조 원을 넘는다. 노동자들이 뭉쳐서 이런 돈으로 복지를 늘리라고 싸워야 한다.
□ 복지는 어떻게 늘릴 수 있는가
노동자가 세금을 더 내면 박근혜가 복지국가를 만들어 주리라 믿는 노동자들은 없을 것이다.
박근혜는 대선에서 표를 얻으려고 시늉이나마 복지를 늘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취임도 하기 전에 기초노령연금, 4대 중증질환 의료보험 보장 등 쥐꼬리만한 복지 공약마저 모두 후퇴했다. 표만 얻고 튄 대표적 먹튀 공약이 된 것이다.
자본가들은 경제 위기 때문에 자신들의 이윤이 줄어들까 전전긍긍하고 있다. 이들은 복지를 늘리는데 자신들의 돈이 들어갈까 봐 핏대를 세우고 복지 확대에 반대한다.
박근혜는 바로 이런 1퍼센트 특권 세력의 반동적 대변자인 것이다. 박근혜를 따라 집권당들과 고위 관료들은 이런 자본가들의 지지를 유지하려고 부자 감세에 열을 올리고,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에 일렬종대로 헤쳐 모이는 것이다.(그래서 민주당도 집권하면 그렇게 변해왔던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도 세금을 먼저 내는 것 그 자체로 무엇이 이뤄진다고 기대할 순 없다. 거대한 대중투쟁만이 경제 위기 시대에 복지 확대를 쟁취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스웨덴 등 잘 정비된 복지국가는 거대한 노동자투쟁이 자본가들이 겁에 질리도록 압박했을 때 세워졌다. “개혁을 주지 않으면 노동자들이 혁명으로 답할 것”이란 말이야말로 냉혈한 같은 자본가들이 양보에 나설 때 심정을 잘 보여 준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은 자본가들의 탐욕에 맞서 단결해야 한다. 부자 증세를 통한 복지 확대와 노동자 증세 반대, 경제 위기 고통전가 반대 같은 요구를 내걸어야 이런 단결을 이룰 수 있다. 보편증세론의 가장 큰 문제점이 이런 단결에 해가 된다는 것이다.
계급적 단결과 투쟁에 자본을 마비시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조직 노동자들이 앞장서야 한다. 또한 이런 투쟁은 국정원 정치 공작 규탄 같은 민주주의 투쟁과도 만나야 한다. 박근혜의 복지 후퇴와 고통전가, 노동자 증세 반동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이런 단호한 투쟁의 자세가 돼야 한다.
- 세금부터 올렸다가 박근혜가 복지 축소하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본문으로]
'내 기사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란음모 사건에서 드러난 정의당 개혁주의의 약점 (0) | 2013.09.10 |
---|---|
마녀사냥에 대처하는 촛불의 자세 (0) | 2013.08.29 |
노동자증세로 부자감세 유지하려는 박근혜 (2) | 2013.08.12 |
돌아온 김기춘과 1989년 공안정국 (0) | 2013.08.09 |
도둑질 들키니 강도로 돌변하는 박근혜 (0) | 2013.07.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