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근혜 정부의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에 관해 <노동자 연대>123호에 기사를 세 꼭지 썼다. ①노동부매뉴얼 전반의 정치적 맥락을 다룬 글, ②연공급제 중심으로 임금체계 논쟁을 다룬 글, ③마르크스주의의 임금 이론을 약술한 글 등이다. 각각을 한 글의 세 꼭지처럼 썼기 때문에 하나만 읽으면 불완전하거나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 있다.
이번 글의 쟁점은 노조에서 일하던 시절의 경험, 특히 직무급 도입 반대 투쟁 경험 등이 도움이 됐다. 본문 중 자주색으로 된 구절들은 지면 분량상 줄인 내용 중 내가 임의로 덧붙인 것들이 대부분이고, 일부는 추가로 코멘트를 단 것이다.
☞ 이 글의 원문 주소: http://wspaper.org/article/14291
임금체계는 나라별로 각자의 맥락에서 형성돼 왔다. 일본의 전후 재건 과정에서 시작된 연공급제는 1960년대에 한국에 도입됐다. 이 제도는 호황기에 평생고용을 전제로 성립된 임금체계다.
핵심 특징은 초임을 저임금으로 시작하지만 근속년수에 따라서 임금이 계속해서 오른다는 것이다. 저임금 미숙련 노동자를 입사시켜 회사가 직접 훈련시키켜 숙련도를 높이는 과정에서 점차 임금을 높여 주는 것이다.
경제가 지속 성장을 하던 시기에, 자본가들은 평생고용을 전제로 노동력을 확보할 유인책이 필요했다. 당장의 신규자에게 저임금 노동을 정당화하면서도 숙련 노동력을 붙잡을 수 있는 (신규자와 숙련자 둘 다에게 당근처럼 보일) 임금체계가 필요했다. 미숙련 노동자를 저임금에 입사시켜 근속년수가 길어질수록 임금을 점차 높여 주는 것이었다.
(※ 근속년수와 숙련도를 같은 개념으로 보는 오해들이 있다. 근속년수가 길어질수록 숙련도도 높아질 것이라는 기대는 연공급제 안에서 암묵적 가정이지, 핵심 취지가 아니다. 연공급의 핵심은 근속년수다. 직능급이 숙련도에 직접 대응하는 임금체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직무에 필요한 숙련도를 사측이 측정해야 하는 직무급은 노동자 개인들의 숙련도에 간접적으로 대응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제도는 재직 중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워 나이가 들수록 교육비와 주거비 등이 더 많이 필요해지는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패턴에도 부합했다.
나이가 들수록 임금이 오르는 이 제도는 재직 중에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키우면서 교육비와 주거비 등이 갈수록 더 많이 필요해지는 당시 노동자들의 생활패턴에도 부합했다. 특히 여성노동자들이 결혼과 함께 전업주부로 눌러앉는 것이 보편적이던 시절에는 남성 가장 노동자들의 임금이 근속년수에 따라 상승하는 것이 필수적인 조건이었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정년 보장과 중년 이후 임금 상승을 보상으로 삼고 미숙련 시절의 저임금을 장시간 노동을 버텨 온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일본에서건 한국에서건 노동조합들도 연공급제를 선호하며 이 제도를 지키려고 노력해 왔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 이후 그 노력의 결과가 신통치 않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제 세계경제 위기로 연공급제의 전제조건들이 무너지고 있다. 기업주들은 고용과 임금에서 유연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총 임금비용을 줄이고 노동생산성(착취율)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불황 때문에 노동자 삶의 패턴도 불가피하게 조금씩 바뀌고 있다.
그런데 한국 자본가들은 1990년대 후반 IMF 위기를 겪으면서 무작정 대규모 해고가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현대자동차 등에서 노동자들의 저항이 격렬했던 것이다. 가능한 조건에서는 대규모 해고보다 돈을 더 쥐어주고 내보내는 희망퇴직과 임금체계 개편, 비정규직 채용 등 간접적이고 단계적인 비용 삭감 방식에 주로 의존하게 된 배경이다. 그중 임금체계 개편의 핵심이 성과주의 체계를 도입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노동부 매뉴얼의 정신이다. 총 임금비용을 줄이고 노동생산성(착취율)을 높이겠다는 것이다.
자본가들에게 직무급ㆍ직능급ㆍ성과급 등 성과주의 임금체계의 가장 큰 장점은 개별적인 능력과 실적 격차를 보상한다는 명목으로 전반적인 생산성 압박을 강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개인 실적을 빌미로 노동자들끼리 경쟁을 시키는 차등 성과급제는 장기적으로 평균임금을 하락시키는 경향이 있다. 경쟁 기준이 계속 올라갈 뿐만 아니라, 노동자들끼리 제로섬 경쟁을 벌이기 때문이다.
직무ㆍ숙련도 등을 따지는 직무급ㆍ직능급도 사용자가 노동자들을 개별적으로 평가하고 배치한다. 직무ㆍ숙련도ㆍ실적 등에 따라 급여가 달라지므로 직무 배치(인사이동)나 인사평가, 업무 지시의 권한을 가진 사용자 권한을 강화시킨다. 또 직무 변동이나 실적에 따라 임금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은 임금 안정성을 약화시켜 노동자들이 생활을 계획적으로 꾸리기 어려워진다.
노동부는 병원 간호사 노동자들에게도 성과급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협력적으로 환자들을 살펴야 하는 간호사에게 성과급 비중을 강화하라니, 간호사가 환자들에게 한 대 맞을 주사 두 대 맞으라고 ‘영업’이라도 하란 말인가.(실제로 간호사가 환자를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곳들이 있다.) 이런 계획은 의료민영화 추진 계획과도 관련이 있을 테고, 사용자에 대한 노동자의 종속성을 늘리려는 것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이처럼 개인 실적을 미끼로 노동자들끼리 경쟁을 시키는 성과급제는 물론이고 직무•숙련도 등을 따지는 직무급과 직능급도 사용자가 노동자들을 개별적으로 평가하고 배치하는 것이므로 노동조합을 통한 집단교섭을 약화시키고 노동자들을 분열시키기 십상이다. 따라서 지금 박근혜 정부가 연공급제를 공격하는 맥락은 임금안정성을 파괴해 임금 수준을 전반적으로 하락시키려는 것이고, 현장에서의 세력관계를 기업주들에게 유리하게 바꾸려는 시도다.
이런 문제들 때문에 노동자들은 임금체계 개편 시도에 저항해 왔다. 적지 않은 기업들이 직무급을 도입했지만, 직무급을 호봉제처럼 운용하는 등 변형된 형태가 아직은 많은 이유다. 그 점을 고려해 노동부 매뉴얼의 예시안도 40대까지는 연공급과 유사하게 임금이 상승하게 돼 있다.
한편, 직무별로 급여를 달리하려면 직무마다 경제적 가치를 평가해야 하고, 직능급도 직무가치와 노동자 숙련도를 모두 측정해야 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직무가치 평가는 산별 차원에서 해야 (사장들의 직무급 도입이) 노동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동종 업계의 같은 직무가 회사마다 다른 평가를 받는다면, 더 낮은 임금 수준의 직무급은 수용성을 잃을 것이다.(이것은 지금의 대기업 임금 수준이 그런 것처럼 사장들이 애초에 피하고자 한 바, 높은 기업의 직무급이 상향평준화 압력의 목표점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산별협약
이런 맥락에서 노동운동 일각에선 직무급제가 보편적인 독일ㆍ스웨덴처럼 직무가치나 숙련도 평가를 산별 노사공동으로 수행하면 산별 내 동일가치노동 동일임금을 이룰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그러나 과거 스웨덴의 연대임금제는 기층 노동자들의 반발로 사실상 실패했고, 최근의 공공부문 산별협약에선 호봉제를 폐지하는 등 좋지 않은 결과를 낳았다.
2000년대 초반 독일 금속 산별의 신임금체계 협약이 노동계급 내부의 임금 격차를 줄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전 제도에 견줘 이 협약으로 임금비용이 순수하게 오른 기업은 4퍼센트밖에 안 된다는 통계가 있다. 또한 직무가치 평가를 노사공동으로 해도, 직무 배치가 사측의 권한으로 남겨져 있는 것은 큰 약점이다.
이들 나라의 사례에서 보듯이 산별 협약에 따른 동일노동 동일임금 도입을 ‘물신화’해서는 안 된다.
물론 직무급제에서도 노조의 투쟁으로 임금을 상승시킬 수 있다. 노동운동이 충분히 강력하다면, 부분적으로 호봉급을 포함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1987년 이전까지 한국 기업 대부분이 연공급제였지만, 임금 ㆍ고용이 지금보다 나았다고 할 수 없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게다가 지금 고용불안이 만연한 조건에서 연공급제의 형식만을 방어하는 것으로 문제가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고용보장을 받지 못하는 청장년 노동자들에게는 연공급제가 무용하거나 (초기 저임금 때문에) 해롭게 느껴질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연공급제에 포함되지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남의 일처럼 여겨질 것이다.
물론 고용보장에 대한 믿음이 없는 청장년 노동자들에게는 연공급제가 무용하거나 해롭게 느껴질 수 있다. 비정규직에게는 남의 일로 여겨질 것이다. 예를 들어 연공급제에서 생애임금의 평균이 월 2백만 원이라고 한다면, 고용불안을 느끼는 젊은 노동자들은 월 1백만 원에서 시작해 차근히 올라가는 것보다 처음부터 월 2백만 원을 받는 임금체계를 선호할 수도 있다.
(※ 그런 점에서 제도나 형식을 만지작거리는 것만으로 보편적 해결 방안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보는 사고는 공상적이다. 일종의 제도 물신주의인데, 탁상공론이란 표현이 딱 어울리는 사고 방식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한국의 자본가들과 박근혜 정부가 말하는 임금체계 개악의 방향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국 자본가들이 직무급제를 핵심으로 들고나온 맥락을 봐야 한다. 정규직 임금을 유연화시키는 것이 목표다. 자본가들은 그동안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동일노동 동일임금 요구를 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직무급을 강요하는 수단으로 바꿔치기해 왔다.
일부 기업은 정규직과 직무를 분리해 비정규직을 값싼 직무에 가둬 버리고 임금과 승진의 기회를 제한하는 데 직무급을 이용했다.(은행 분리직군제) 그래서 학교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호봉제를 요구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도 적지 않다.
이런 이간질과 역공이 통한 것은 노동운동 상층 지도자들이 정규직ㆍ비정규직의 단결을 통한 노동조건 방어와 향상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조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적 타협주의가 문제지, 제도(임금체계)의 문제가 본질이 아니다.
임금체계는 노동계급 대중의 실질임금 수준, 노동자 단결이란 기준에서 살펴야 한다. 사장들이 어떤 경제 조건에서 어떤 목적으로 제도 변화를 추진하는지 그 맥락을 짚어야 한다. 그 점에서 노동계급을 분열시키려는 성과주의 임금체계 도입 시도에 단호하고 일관되게 반대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노동자들의 필요를 반영하는 호봉제 요소를 방어하면서, (임금체계 그 자체에 매몰되기보다) 고용 보장과 충분한 고정급 인상 요구를 중심으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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