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 기사: 세계적 곡물 풍년 속에 10억 명이 아사 위기

             식량 위기를 둘러싼 신화 벗기기


어제 21세기의 빈곤을 두고 토론하는 포럼에 다녀 왔습니다.

한 대학생이 "이 심각한 빈곤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자선이나 구호 활동은 구체적인 도움이 되는 듯 한데 구조적으로 가난을 해결하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 말은 추상적으로 느껴진다"는 질문을 했습니다. 여러 참석자들이 이 질문에 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저도 자선단체 봉사활동을 해 봤습니다만, 봉사활동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분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마음은 준종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기부라도 어려운 이들에게 도움이 되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전 개인적인 자선 활동은 아쉽게도 결과도 소박한 게 약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굶고, 집이 없고, 아파도 병원에 못 가는 그런 가난의 문제를 '없애지' 못한다는 겁니다. 가난의 원인을 찾아 없애야 합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남의 가난한 살림을 도와주기란 끝이 없는 일이어서, 개인은 물론 나라의 힘으로도 구제하지 못한다는 말"이라고 뜻풀이가 돼있습니다.

요즘은 이 속담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지 투자를 소홀히 하는 정부를 변호하는 데 쓰이기도 합니다. 즉, "가난(한 개인)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거죠. 원인이 개인에 있든, 해결책을 개인이 찾아야 하든, 가난은 개인의 문제라는 겁니다. mb스런 발상입니다.

저는 이런 해석이 자본주의적 해석이라고 봅니다. 진짜 뜻은 옛 시대엔 정말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즉, "가난(한 사람이 너무 많아)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는 겁니다.

실제로 흉년과 홍수 등으로 기근 상태에 내몰린 농민, 소작농들이 왕이나 양반 지주에게 그나마 남은 식량을 다 빼앗기고 죽지 못해 사는 비참한 광경은 정약용의 책 등 여러 기록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이었던 자본주의 이전의 시대는 사회 전체를 먹여 살릴 정도로 생산력이 높지 않았습니다. 왕의 탐욕은 개인이 소비하고 누릴 수준, 더 많은 신민을 거느릴 군대 양성 목표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그게 자본주의에 와서 바뀝니다. 자본주의는 기업주 개인의 탐욕이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무한정 뽑아내려는 시장 경쟁의 압력이 생산을 추동하기 때문에 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합니다.

이미 1984년에 세계식량농업기구(FAO)는 당시 농업 생산력이 인구 1백20억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지금 인구로 쳐도 갑절이나 되는 양입니다. 오늘날에는 고기와 야채 등을 빼고도 곡물로만 전 인류에게 하루 3천5백 칼로리를 공급할 수 있습니다. 평범한 성인들에게 권장되는 하루 영양분은 2천5백 칼로리 정도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배고픔은 더는 세상에 먹을 게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이런 식량을 쌓아놓고도 이 지구상에선 오늘도 열 살도 안 된 어린이가 5초에 한 명씩 굶어 죽고 10억 2천만 명이 아사 위기에 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미국에선 지금 5천만 명이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6백만 명이 법정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돈으로 살아갑니다. 배고픔만 있는 게 아닙니다. 한국에선 인구 절반이 남의 집에서 살고 극빈층은 판자집이나 심지어 동굴에서 사는 사람도 있답니다. 부동산 1등이 집을 1천83채나 가지고 있는데 말입니다.

결국, 자본주의는 소수의 막대한 풍요 속에서 다수를 빈곤의 바다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선진국의 금융자본들은 어려운 후진국에 돈을 꿔주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이란 제시해 나라 전체를 외채 갚기에 종속시킵니다. 공기업을 팔고 정부의 지출을 줄이고, 산업의 초점은 당장 수출해서 갚을 달러를 만들 수 있는 단일 작물 재배나 천연자원 수출로 이어집니다.

이런 곤경에 처한 나라들이 많기에 공급 과잉으로 수출 가격은 하락해 다시 타격을 받습니다. 사탕수수 같은 몇몇 작물들은 물을 고갈시켜 환경 파괴와 사막화를 낳기도 합니다. 천연자원은 헐값에 고갈되고, 노동력과 돈은 수출 농업으로 몰려 산업 기반은 오히려 붕괴합니다. 1980년대에 IMF에서 돈을 빌렸다 국가경제의 3분의 1이 코카 잎 재배와 수출에 의존하게 된 볼리비아가 대표적 사례입니다.

반면, 선진국에선 후진국에서 오는 낮은 가격의 수입품을 배경으로 저임금 일자리를 늘릴 수 있게 되고, 후진국의 값싼 농산물과 경쟁하도록 자국의 다국적 농기업들에게는 막대한 보조금으로 쥐어줍니다.이 돈은 가난한 이들에게 쥐어짠 세금에서 나옵니다.

카길이나 몬산토 따위의 다국적 농기업들은 특허낸 종자로, 비료 공급 독점으로 이 피폐할대로 피폐해진 후진국 농민들을 다시한번 쥐어 짭니다. 후진국의 정부 관료와 부자들은 이런 다국적 기업들의 현지 법인 경영자 등 선진국들과 다국적 자본들의 앞잡이가 돼 떼돈을 법니다.그래서 선진국에서나 후진국에서나 친기업 정부들에 맞서 싸우는 운동이 중요합니다.

이렇게 국제 이자 놀이로 돈을 벌던 다국적 기어들은 제조업 등에서 이윤이 맘대로 나오지 않으니까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최근에 원료와 식량을 투기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최근의 식량값 폭등은 이 때문입니다. 식량은 기본 수요가 있기 때문에 안전한 투자 대상이라고 본 겁니다. 최근엔 식량을 연료로 쓰는 이른바 바이오 연료가 식량 가격을 올리고 먹는 용도로 가야할 식량을 축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이전에도 그랬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이름으로 보낸 지난 30년은 세계적으로 평범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아 부자들에게 주는 과정이 특별히 두드러지는 시기였습니다. 2008년 세계 경제 위기는 가난의 문제를 더 현실적인 두려움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위기에서 한숨 돌린 국제 지배자들은 다시 신자유주의로 뒷걸음질치고 있습니다. "쌀밥에 고깃국"을 제공하는 데 실패한 건 북한 정부만이 아니라 모든 자본주의 정부들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식량과 재화가 만들어졌지만, 그것들은 소수의 독점과 통제 아래에 있습니다. 인간 생존의 기본 요소인 식량이 상품으로 거래됩니다. 돈이 없으면 굶어야 합니다. 중요한 건 그 돈을 누가 통제하고 있냐는 겁니다.

자유시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유경쟁시장이 이런 재앙을 낳고 있습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시장 경쟁에 탈락자를 위한 배려 따윈 없습니다. 경쟁은 승자 독식 구조를 강화합니다. 경쟁이 독점을 낳고 사람들을 (시장 경쟁력이란 기준으로) 획일화하고 (공공을 위한 의사결정에서) 다수를 배제합니다. 독점기업들끼리 벌이는 피튀기는 경쟁은 국가를 끌어들여 끔찍한 전쟁을 낳기도 합니다.

한편, 자본주의 시장은 주기적으로 경제 위기를 낳습니다. 경제 위기는 가난한 사람들을 더 궁지로 몰아 넣습니다.

그래서 시장 안에서 정의를 찾아보려는 공적무역 운동은 좋은 의도에도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그 막대한 물건과 식량을 쌓아놓고도 일자리를 빼앗고 사람들을 굶기고 죽도록 내버려둡니다. 재앙적인 가난의 문제는 국내에서나 세계 차원에서나 자본주의 탓입니다. 그리고 이 질서를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국가권력입니다. 이들은 가난을 없애는 게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을) 도심에서 없애는 걸 더 선호합니다. 용산참사가 한 사례입니다.

그래서 이 가난한 현실을 극복하려는 모든 정의로운 노력들은 자본주의를 끝장내려는 운동과 만나고 엮여야 합니다. 이 노력을 효과적이고 헌신적으로 추구할 변혁적 정치단체는 필수 요소입니다.

자본주의가 문제라면, 이런 네트워크는 국경 안에서 이 자본주의 질서를 지키는 구실을 하는 국가권력과 맞서야 하고, 자본주의가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 '노동계급' 운동과 만나 이들이 스스로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제가 볼 때 21세기 자본주의에겐 두 천적이 남아 있습니다.

자연의 복수, 그리고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민중권력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오늘 한 대학교에서 학생들과 토론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주제도 주제지만 저보다 더 나이 어린 사람들과 하는 토론은 늘 흥미롭습니다. 세파에 찌들기 전이라 세상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기보다 의심을 많이 합니다. 질문도 기발한 것이 많습니다.

오늘 주제는 마르크스주의로 본 경제위기라는 제목으로 최근의 상황이 경기회복인지 거품인지까지 다루는 꽤 방대한 주제였습니다.

어려운 주제라 그런지 토론이 활발하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참가한 학생 중 한 명이 흥미로운 주장을 했습니다.

대강 요약하면, 인류 발전의 원동력은 '인간의 욕심'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심에 가장 부합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를 받아들여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옹호하는 가장 오래된 주장이기도 하고 가장 흔한 주장이기도 합니다.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욕구 실현을 외면하는 사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것이 체계적으로 가로막힌 상황을 바꾸려는 이론이자 전략입니다. 

그런데도 마르크스주의를 다루는 토론에서 이런 질문이 흔히 나오는 것은 사회주의를 자처했던 체제들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옹호론자들은 이 나라들을 인용해 마르크스주의의 신용에 흠집을 내고 싶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 소련의 가짜 사회주의가 인민에게 절제와 일방적인 이타심을 강요한 것은 체제가 인민들에게 충분히 풍족하게 해 줄 수 없었기 때문에 지배자들이 그렇게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거죠. 

그렇다고 이 가짜 사회주의보다 서방 자본주의 경제가 더 우월하다고 할 순 없습니다. 이 질문 하나면 충분합니다. 국가채무가 늘어나고 정부 재정이 악화돼 복지 지출을 줄이면서도 국방비 지출은 늘어나는 나라는 어디일까요. 미국과 소련, 남한과 북한, 본질에서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인간의 욕심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주장은 왜 자본주의에서 특정한 계급에 속한 사람들의 이기적 탐욕은 제도적으로 보장받고, 어떤 사람들은 기본적 욕구마저 무시당하고 심한 경우, 강제로 억압당하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업 수익성이 줄어 투자처가 마땅하지 않은 기업과 부자들은 자신들의 소득이 줄었기 때문에 세금을 깎아줘야 한다고 정부를 압박합니다. 그러나 그 세금이 깎인 것 때문에 25만 명의 결식 아동이 방학 중에 급식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됐습니다. 

월가의 탐욕스런 금융자본가들의 파생상품 투자가 왜 한때는 경제의 구원자였다가 지금은 저주 받을 행위가 됐는지 설명하지 못합니다.

기업과 부자들이 주식과 부동산 투기로 막대한 불로소득을 얻고 이를 독차지하는 반면,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가만히 앉아서 자신의 재산 가치가 폭락하는 손해를 보고 심지어 세들어 살던 집에서 쫓겨나게 되는 사정은 어떻습니까.

이처럼 자본주의는 경제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의 욕심은 구조적으로 무시하고 경멸하고 억압합니다. 어느 계급 소속이냐에 따라 어떤 이들의 욕심은 세상에 아무런 영향도 못 끼칩니다.

인간의 욕심 이론은 이처럼 아무것도 설명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단지 자본가들이 자기 탐욕을 정당화하려고 내놓은 변설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욕심론자들에게 왜 자본주의에서 사람들은 이기적인가라고 묻는다면 본래 이기적이니까라고 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만 한 해에도 수만 명의 신입생들을 받는 주류 경제학은 인간의 이기심이 경제 활동의 기본 동력이라는 이 엉터리 공리에 바탕한 학문을 가르칩니다.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말입니다.

인간의  인간의 기본적 욕구는 늘 변함 없었는데, 왜 인류 역사의 3분의 2가 공동생산 공동분배의  사회였을까요. 

그게 당시 인류의 잠재적 생산능력의 수준에 부합했기 때문이죠. 생산성이 너무 낮아 협력해 수렵과 채집을 해야 했고, 공동으로 식량을 구해야 했기 때문에 함께 나누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역사 발전을 설명하는 방식입니다. 자본주의는 특유의 역동성으로 생산 능력을 혁신했지만, 자기 모순 때문에 그 생산 능력을 스스로 파괴합니다.

주기적인 경제 공황이 바로 그것입니다. 자본주의가 위기에 빠졌을 때에도 생산과 분배에 필요한 핵심 요소들은 어디로 사라진 게 아니라 그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원료도, 기계도, 공장도, 일할 사람도 그대로 있습니다. 부족한 건 기업의 이윤입니다.

그래서 기업의 이윤이라는 기름칠 없이는 돌아갈 수 없는 자본주의란 체제는 영원불멸의 체제가 아니라 특정한 생산력 수준 하에서 이뤄졌던 일시적 체제인 것입니다.

자본주의는 이제 역사적 수명을 다하고 있습니다. 인류의 기본적 욕구는커녕 생존을 위협하는 체제입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마르크스가 경고한 것보다 더 위험한 세상이 됐습니다.

지구를 서른 번이나 없앨 수 있는 핵폭탄을 품에 안고서 평화를 보장받고 있다고 착각하는 광기어린 체제입니다.

한때 자본주의 발전을 이끌었던 석유 관련 기업들은 무작위한 CO2 배출이 환경을 파괴하고 지구 온난화에 영향을 미쳐 인류 전체를 절멸시킬 수 있는데도 당장 자신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CO2 배출을 억제하지 않습니다.

적게 투자해 많은 이윤을 남기려는 식품기업의 탐욕은 광우병이라는 재앙적인 질병을 만들어냈습니다.

마르크스의 역사유물론과 경제이론은 이런 광란의 경제 체제의 탄생과 변화, 실상을 어느 이론보다 훨씬 더 일관되게 설명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게 그 질문을 던진 학생이 제 답변을 듣고 어떤 고민을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 학생은 토론이 끝나고 나서 자신은 상위 20퍼센트에 들어야 하기 때문에 공부하러 가겠다고 했습니다. 

평범한 노동계급 출신 젊은이가 자본주의에서 개인적으로 성공할 확률을 반반으로 볼 수 있다면,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바꾸는 실천이 성공할 확률도 반반입니다.

확률이 같다면, 더 정의롭고 도덕적으로 가치있는 쪽에 서는 게 낳지 않을까요. 한 번 뿐인 인생인데 말입니다. 제가 볼 때 이건 로또보다는 훨씬 확률 높은 베팅입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정확히 77일이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이 해고에 반대하며 공장을 점거하고, 이 공장을 차지하기 위한 노-사-정의 다툼이 벌어지는 동안 우리 사회는 하나의 시험대에 올랐다.

파업이 보여준 격렬한 갈등과 분열은 우리의 양식에 질문을 던졌다.

왜 문제를 일으킨 사람과 책임지는 사람이 따로 있는가. 정의는 왜 공장 문 앞에서 멈추는가. 왜 법은 약자를 위해 그 육중한 몸을 일으키지 않는가. 이 갈등을 끝낼 대안은 없는가. 

사실관계 논란을 재탕하는 건 이제 시간낭비다. 진실은 명백하다. 민주적 절차로 선출됐다는 정부가 일자리를 지켜 달라는 노동자 ‘국민’에게 테러리스트 진압 특수 부대를 보냈다. 쌍용차를 망친 대주주 상하이차 경영진은 누구도 징벌을 받지 않았다.

지금껏 이 문제를 다뤄 온 이들과 약간 다른 각도에서 물음을 던져 보는 게 낫겠다.

맹목적 경쟁

쌍용차 사건은 수천 명의 직원과 수백 개 유관 기업을 거느린 대기업이 파산 위기로 내몰린 것이다. 경영을 맡은 대주주들의 부실 경영과 도덕적 해이가 위기의 직접적 계기였다.

그러나 지금 세계적으로 자동차 산업의 과잉 생산은 3천만 대에 달한다. 이는 한국 자동차 산업의 연간 생산량 3백80만 대(2008년 기준)의 약 8곱절이다.

지난해 6월 파산 보호에 들어간 세계 최대 기업 GM은 생산 설비의 거의 절반을 폐기해야 한다. 일본 도요타도 4백만 대를 생산할 설비와 인력을 축소해야 할 처지다.

기업들의 맹목적인 시장점유율 경쟁이 과잉 설비를 낳았다. 조율되지 않은 투자가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자동 균형을 이룰 거라는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은 파산했다.

결국, 정부가 나서야 했다. 시장자본주의의 본산이라는 미국에서 오바마 정부는 한국의 1년 국내총생산액보다 많은 돈을 부실 기업들에게 쏟아 부었다. 이명박 정부 역시 비슷한 용도로 올해 예산의 3분의 2를 이미 7월경에 다 써버렸다.

온 국민의 세금을 쏟아 붓고 기업들을 살리는 동안, 수익성 회복을 위해 부실 기업의 노동자들은 해고됐다. 고삐 풀린 시장을 비판하던 또다른 주류 경제학도 이 문제는 외면했다. 

요컨대, 쌍용차 파업은 “기업 수익성이 사람보다 우선”이라는 시장 경제의 공리에 대한 노동자들의 항변이었다. 게다가, 자유시장의 징벌은 늘 노동자들에게만 가해진다. 대주주와 대기업 임원들은 여전히 특권층의 지위를 유지했다.

대안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국가가 책임지고 공장을 친환경 대중교통 생산 기지로 전환하면 환경과 일자리를 모두 지키며 사회 전체에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조처는 사기업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 공공의 이익과 사기업의 이익이 충돌한다면 무엇이 우선일까.

미래를 의심하기

“아빠, 우리 이제 자가용 못 타요?” “응.” “왜요?” “회사가 어려워서 더 이상 월급을 받을 수 없거든.” “회사가 왜 어려워졌는데요?” “음, 자동차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그렇단다.”

너무 일을 열심히 해서 잘려야 하는 사회. 한 쪽에선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넘쳐나는데 다른 한 쪽에선 첨단 생산 시설이 고철덩이가 되는 사회. 식량이 너무 많이 생산돼 농민이 망하고 식량이 버려지는데, 수 억 명의 사람들이 굶어죽는 사회.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제 나라 국민들의 생존권을 앞장서 짓밟는 사회.

이 비효율적이고 낭비적인 사회가 우리 모두 수십 년을 더 살아야 할 세상이다. ‘이윤을 위한 경제, 판매를 위한 생산’이라는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법칙은 이미 역사적·도덕적 한계에 부딪힌 듯하다. 0.1퍼센트 부자의 길은 열려 있지만, 모두 함께 사는 길은 닫혀 있다.

쌍용차 파업은 우리의 미래가 어떠해야 하는지 진지하게 되묻고 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누가 봐도 친(親) 부자/기업 정부인 이명박 정부조차 친(親) 서민을 말합니다.이런 거짓말에 눈 뜨고 속을 이는 별로 없겠지만, 이 정부의 새 옷이 아니라 몸통의 지울 수 없는 악취와 속마음을 말하는 사람이 더 적어졌습니다.

오히려 지금 반대파에게 충고하는 듯하면서 이 정부가 하는 거짓말에 힘을 실어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진보적 반대파가 대안 없는 정권 퇴진을 외쳤기 때문에 이명박이 살아났다고 말합니다. 진실은, 기회가 왔을 때 [바로 그들의 방해로] 더 밀어붙이지 못하고 정권 퇴진을 못 시켰기 때문에 이명박은 살아난 것입니다.
 
요즘 반(反)MB 맹주를 자처하는 민주당 역시 집권당 시절, 법인세/소득세를 감면하고, 부동산 거품 조장을 허용하는 등 친(親) 부자/기업 정책을 펴왔습니다.

실로 이명박 정부로 오는 길은 전임 정부가 닦아 놓은 길입니다. 이 점을 각성해야 한다던 사람들중 적지 않은 수가 지금 침묵합니다. 전임 대통령 둘의 사망 이후, 이 문제에 관한 온갖 에두르고 감추는 말들이 넘칩니다. 

이처럼 말과 글이 겉도는 것은 진실을 가리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진실을 냉혹하게 직시하길 두려워 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사실과 소망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탄압에 맞서 진실을 소리 높여 외치는 사람들의 말과 글조차 사물의 본래 성격을 보여주지 못하고 단지 겉꾸밈의 수단이 되고 있습니다. 이미 정권을 잡고 실패한 사람들이 (변한 것도 없는데) 뭘 해 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시사人>이란 주간지의 최신호를 보면 정부 비판에 앞장서던 한겨레/경향/오마이/프레시안 등 '진보' 매체들이 광고 수익 때문에 정권과 관계를 재조정해야 하는지 고민이라고 합니다.

돈의 힘을 빌어 돈이 지배하는 세계를 비판한다는 것은 공상입니다. 생각과 행동이 제약되는데, 말과 글이 제대로 나올 수 없습니다. 


지금의 세계적 경제 위기가 자본주의의 실패가 명백한데도, 말과 글을 다루는 사람들은 이를 직시하길 두려워합니다. 어는 순간 “자본주의가 문제”라는 주장,  “계급이 중요하다”는 주장이 진보진영 안에서도 기피 대상이 됐습니다. “사회주의”나 “혁명”, “레닌” 같은 단어는 말할 것도 없고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본주의 계급사회이고, 우리는 착취와 억압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는 이윤을 위해 낭비적 경쟁을 강요하고 인간의 필요를 짓밟습니다. 경제 위기와 빈곤, 전쟁은 물론이고, 기후와 자원 문제로 지속불가능한 체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회주의로 체제를 전환하는 게 필요합니다. 세계적인 생산 협업은 직접 생산자인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권력과 실천을 통해 인간의 필요를 우선시하는 협력적 생산과 분배의 체계를 세울 수 있습니다. 우애와 협력, 지식과 자원 공유가 훨씬 더 효율적인 생활 향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말과 글이 사물과 현상의 핵심을 치르지 않고 겉도는 것은 앞선 예에서 보듯 말과 글의 원천인 생각과 행동이 진실을 향해 곧바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선덕여왕> 미실의 대사처럼,
"세상을 가로로 나누면 딱 두 부류,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 둘 밖에 없습니다"
미실은 덧붙입니다.
"(지배하는 자가 말하는) ‘백성들의 희망’이야말로 가장 큰 환상"이라고 말입니다.
미실은 지배하는 자의 편에서 세상의 본질을 말하고 있습니다. 덕만이 아니라 미실이 리얼리스트입니다. 실재가 아니라 캐릭터로서 미실이 덕만보다 더 우월해 보이는 이유입니다.

온갖 환상, 사실과 소망을 뒤섞어 놓은 잡다한 말과 글들이 이 엄연한 진실을 가립니다.

단도직입으로 본질을 향해 찌르고 들어가는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담하고 거리낌 없는 생각과 행동을 하라는 자기 주문 [呪文]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대담하게! 단도직입으로! 는 <레프트21> 기자로서 제 기사 쓰기의 구호입니다.

이 블로그는 이런 정신으로 <레프트21>에 실릴 기사들을 보충하고 지면 바깥에서 마찬가지로 단도직입의 방법으로 제 생각을 보태는 블로그가 될 겁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