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는 취임 전부터 위기를 겪고 있다. 많은 경우, 이미 예측·경고했던 바다.(☞ 바로가기그러나 그것이 자동으로 진보진영에게 기회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도 촛불항쟁으로 취임 첫해부터 약해졌지만, 결국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바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세력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원칙을 훼손하고] 분열하면서 기회를 못 살렸기 때문이다.


지금 박근혜 세력은 노회찬 대표를 시작으로 김선동, 김미희 등 줄줄이 진보정당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하려 하고 있다. 이런 솎아내기에 단결과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그런데 진보정치 세력들의 분열과 반목이 전열 재정비 문제에서 걸림돌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진보정치를 재건할 진로 논쟁, 즉 노선(정체성)과 세력의 재편에 관한 토론이 중요하다. 최근 이런 토론들이 재개되고 있다.


진보신당에선 1월 당대표 선거에서 진보정치의 연대와 노동중심성 문제가 논쟁됐다. 반갑게도 상대적으로 진보세력의 연대와 노동중심성을 강조한 이용길 후보가 대표로 당선했다.


진보정의당에서는 최근 주요 간부 설문조사에서 절반 넘는 사람이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 수립’을 꼽았다.


이 조사에서 ‘현존하는 나라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나라 모델’로 91.6퍼센트가 스웨덴을 꼽았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지향점으로 꼽은 것이다.


사실 민주노동당도 민주노총 상층 지도부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 수준에서 부르주아 정당과 구분되는 좌파 사민주의 정당의 존재는 여전히 의미있다.


그러나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은 이런 좌파 사민주의보다 더 오른쪽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정치가 주변화된 상황의 돌파구를 주류 제도정치에 더 적응하는 것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도 나타난다.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이 “광화문이나 대한문 앞에서 집회나 농성을 하는데, 국민들 입장에서 …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각주:1]에서다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똑같은 임금을 준다면 비정규직, 파트타임(노동자)을 써도 되지 않겠나”라고 했다. 비정규직 철폐 요구에 매달리는 건 “근본주의”라는 말도 한다.[각주:2]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복지를 가져오는 주체로서 사회적 투쟁보다는 박근혜의 복지 공약이 더 두드러져 보이고, 또 그러다 보니 “박근혜 정부와 전략적 동맹을 맺을 준비가 돼 있다”며 중재기구를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대변자이자 조직자로서가 아니라] 국가기구의 최상층부와 협력해야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발상에서 박근혜와 동맹 같은 제안이 나오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이 후퇴인 까닭은 과거 민주노동당은 초기에 ‘거대한 소수 전략’(“대중운동이 중심이고, 의원은 그 스피커 구실을 해야 한다”)을 내세웠었기 때문이다. 비록 실천에서 이 방향이 일관되게 구현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은 ‘사민주의에 대한 낡은 금기’를 벗어나야 한다며 이런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에 “사회민주주의 한계 극복”이 들어간 맥락을 봐야 한다. 그것은 20세기 후반 유럽 주류 사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투항하면서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자는 생각에서 나왔던 것이다[각주:3].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후 상대적으로 장기간 지속한 서구 자본주의의 호황을 배경으로 한다. 여력이 생긴 자본가들은 노동 대중의 개혁 열망과 투쟁이 더 급진화하는 것을 막으려면 양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낡은 금기?


그래서 1951년 영국에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이전 노동당 정부 6년 동안 기틀이 잡힌 보편적 복지제도와 일부 기간 산업 국유화 노선이 후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세계적 경기 후퇴 속에서 자본가들이 태도를 바꾸자, 주류 사민주의 정당들은 연이어 신자유주의에 굴복했다. 자본주의의 성공에 기대서 개혁을 제공하는 전략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다.


이런 실패 때문에 근래에는 주류 사민주의를 비판하며 좌파 사민주의 정치세력들이 성장했다[각주:4]. 그리스 시리자, 독일 좌파당, 프랑스 좌파전선 등이 최근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주목해야 할 것은 주류 사민주의(사회 자유주의)가 간 실패한 길이 아니라 이러한 급진좌파 세력의 성장이다. (물론 이들도 좌파 사민주의이므로 근본에선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민족일보 웹사이트. 프랑스 좌파전선의 대선 후보였던 장 뤽 멜랑숑의 지난해 선거 유세 장면.



진보정당들이 민주통합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 기반 때문이다. 조직 노동운동 기반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투쟁들을 보자. 새누리당이 이를 골칫거리로 보고 민주당이 여야 협상의 거래가능한 쟁점으로 이를 다루는 것과 달리, 진보정당은 그 투쟁의 일부여야 한다.


이런 압력 때문에 진보신당 대표 선거에서도 조직 노동운동과 연대를 강조한 쪽이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보정의당 일각에선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에 기반’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진보정당이 더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대변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한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과 정의상, 진보정당의 길보다는 민주당 왼쪽방으로 가자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나머지 노동계급과 완전히 분리된 운동이 아니다. 설사 지금 당장 정치의식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해도 1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삶은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요구, 투쟁과 연관돼 있다. 


그러므로 [단편적 상식과는 달리] 목표(지향)와 실천, 기반에서 ‘계급성’, 즉 노동중심성을 확고히 유지해야 진보정치세력으로서 부활할 길이 열린다. 


사실 지금 진보정당의 존재감 약화와 주변화에는 조직 노동운동의 자신감과 투쟁 수준이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이라는 배경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운동의 약화에 노동계 진보정당의 잘못된 방향 추구와 분열이 한몫했다.


따라서 ‘조직 노동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주변화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정의당 일각의 ‘현대화된 생활정당’으로의 우클릭 시도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박근혜마저 대선에서 표를 얻으려고 좌클릭해야 했다. 이럴 때 진보정당이 제도정치권에서 받아들일 만한 온건한 정책과 노선을 추수해봐야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더 약화시킬 뿐이다.


진보정의당 지도자들의 이런 시도는 우리가 2011년부터 지적한 바, 유시민계와 연합해서는 진정한 진보의 원칙과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드러낸다.[각주:5]


그 점에서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이 <레디앙> 대담에서 유시민계와 민주노동당계ㆍ진보신당계는 “혈연관계”가 됐다고 말한 것은 시사적이다.


같은 대담에서 진보신당 김종철 전 부대표가 “민주당과 정책으로 구분되고, 장기적으로 독자적 대중 진보정당을 추구하는 세력이 되려면 자본주의 극복의 원칙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한 말이 옳다.


물론 진보신당이 이에 바탕해 연대와 단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 갈수록 박근혜의 모순과 정치 위기는 커져 갈 것이다. 진보진영은 원칙을 유지하며 투쟁태세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박근혜의 위기를 이용해 단결된 반격을 해야 한다


[진정한 좌파야말로 이 과정에서 원칙과 단결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하려면 유연하면서도 단호하게, 즉 효과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축약해서 <레프트21> 98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1. “자족적인 투쟁 구호를 외치고 노래(투쟁가요)를 부르는 것” [본문으로]
  2. 물론 근본적 요구만 되뇌이며 부분적 요구 쟁취 투쟁에 기권하면 오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주의라기보다 종파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근본적 목표에 비춰 부분적 요구와 투쟁의 위상을 설정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본문으로]
  3. 그래서 이른바 국가사회주의와 현대사민주의 모두 지양하자는 표현이 들어갔던 것이다. [본문으로]
  4. 물론 이 좌파 사민주의, 또는 급진좌파들의 ‘반자본주의’에는 모호함이 있다. 지금 운동의 발전 수준에선 급진성과 모호함이 성장의 한 요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원칙을 훼손하는 단결은 오히려 분열과 반목을 낳는다. 지금은 어려워도 원칙 있게 단결하고 싸워야 진정한 단결을 이룰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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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이 독자 대선 후보 운동을 ‘사회연대를 위한 2012년 대선운동’이란 이름으로 제안했다. 나는 기사에서 이미 이 제안의 의의를 [그 약점과 함께] 인정한 바 있다. 


어제(8.21) 진보신당 기자회견문은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는 하나다”는 말을 거대 조직노동이 자신들이 버린 ‘배제된 노동’을 향해 외칠 때 그것은 허위이다. 노조가입조차 배제된 버림받은 노동이 조직노동자들을 향해 그렇게 말을 걸기 시작하는 것, 우리는 그것을 새로운 진보좌파운동의 시작이라 부를 것이다.


노동자들은 이미 하나가 아니다. 오늘 우리가 지켜보고 있는 진보정치의 파탄에 근원적 책임이 있는 관료화된 조직노동은 새로운 진보좌파운동을 주도하는 주체가 결코 될 수 없다[각주:1]

 




조직 노동이 먼저 ‘노동자는 하나이므로, 단결하자’는 말을 사실상 하지 말라는 것이다. 홍세화 대표는 자본이 그동안 노동자들을 “포섭과 배제”로 분열시켰는데, “대기업 노조를 중심으로 한 정규직 노동을 대표하는 민주노총은 ‘포함된 자들’에 속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사실 “배제된 노동”을 노동 진보 정치의 주체로 세우자는 데 반대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좋은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그러나 이런 분석과 태도에 담긴 약점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진보신당 창당파(지금의 독자파 다수) 리더들은 민주노동당을 “민주노총당”이라고 비난하면서 탈당해 새 당을 만들었다. 2010년 조승수 의원이 대표가 될 때도 조직 노동운동을 비판하면서 ‘비정규직당’을 추구한 바 있다. 사실은 그 점 때문에 막상 실천에서는 모순과 혼란, 분열을 겪어 왔다. 


홍세화 대표는 조직 노동을 포섭된 노동으로 구분하며, 진보정치의 실패 책임이 자본에 포섭된 조직 노동에 있다고 말한다. 장석준 의장도 [《프롤레타리아여, 안녕》을 쓴 앙드레 고르즈를 인용하며] “현실의 노동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력 ‘때문에’ … 그 수인(囚人)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이 말인즉슨, 노동자들 생활 수준이 올라가서 체제에 안주하게 됐다는 뜻이다. 이런 진단의 결론은 “‘불안정한 보조직, 기간직, 구 기술의 노동직, 대체직, 파트타임 직을 수행하는, 지위와 계급 없는 사람들’[에게] 노동 운동의 미래가 … 달려 있다”는 것이다.


금민 옛 사회당 대표가 “좌파는 신자유주의가 생산한 ‘위험한 계급’인 불안정 노동자를 대중적 힘의 원천으로 삼고 정치적 주체로 세운다”고 주장하는 것은 비슷한 실천적 함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도대체 노동자는 배부르고 잘 살면 안 되는가?)


그러나 “배제된 노동”이란 존재 조건만으로 급진성이 보장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대학 등록금을 마련 못 한 대학생이 정규직 노조 파괴를 위한 폭력에 용역으로 동원되는 현실을 보라. 정부와 기업주의 반노동 테러 공세에 고통받으며 저항했던 쌍용차, 한진중공업, 유성, KEC, 에스제이엠 등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섭된 노동”으로 부를 수 없는 노릇 아닌가.


사실, 조직 노동을 포섭된 노동으로 규정하고 배제된 노동과 구분하는 논리는 조직 노동운동을 ‘노동귀족’이나 ‘정규직 이기주의’로 매도하는 ‘국민의 눈높이’ ― 사실은 여론을 지배하는 자본의 눈높이[각주:2] ― 와 구분되기 힘들 수 있다. 


‘포섭된 노동’의 욕망이 문제라는 관점에서는, ‘배제된 노동’의 욕망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 왜냐면, 포섭된 노동의 욕망이란 것도 결국 장기 불황 자본주의가 가하는 고통에서 자신의 삶을 보호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본질에서 ‘배제된 노동’의 욕망과 다를 리 없다. 많은 경우, ‘배제된 노동’의 욕망은 ‘포섭된 노동’의 자리에 비집고 들어가는 것(정규직화)이다. 


그래서 이들 방식의 구분은 그래서 오히려 억압적일 수 있다. 이타적 주체가 되지 않으면 포섭됐다고 간주해 버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도덕론이지 정치학이 아니다. 변혁 전략으로 낙제점인 이유다. 정확한 분석도 아니다. 포섭(=도덕적 타락) 자체가 사실은  배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부채로 유지되는 자산 거품 호황은, 노동자들의 임금 소득의 실질적 구매력을 훼손하게 된다. 이 상황에서 일부 노동자들이 울며 겨자 먹기로 빚 내서 집 사고, 주식 투자에 나서서 임금 소득의 구매력을 보호하려고 하는 일들을 비난할 수 있을까. 아니 비난해야 할까.


나는 그 욕망들을 문제 삼을 수는 없기 때문에, 문제의 핵심은 노동의 욕망을 실현하려는 대안이 개인적인 것이냐, 집단적인 것이냐라고 보는 것이다. 그 점에서 포섭과 배제를 가르며 노동계급 내부의 차이를 과장하는 방식의 개념이 약점을 노출하는 것이다.


집단적 해결책은 단결을 전제로 한다. 단결은 차이를 강조할 때가 아니라 공통점을 강조할 때 강화될 수 있다. 오늘날 노동과 자본의 사이,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 어디에 사회를 분열시키는 근본적 분단선이 있는가. 잘못된 구분선 긋기가 노동의 분열을 과장하고 조장할 수 있다.  


오히려 바로 그 분단선 때문에 현실에서 투쟁으로 권리를 쟁취하려는 “배제된 노동”에게 부족하나마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는 것은 “조직 노동”, 그 중에서도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이다.(2005년 순천 현대하이스코 투쟁이나, 2007년 이랜드 투쟁이 그 사례다.) 


미조직된 많은 노동 대중이 한나라당과 민주당에 투표하는 동안, 조직 노동이 노동계급 내 소수파지만 진보정당의 지지 기반이 돼 온 것을 봐야 한다. (사실 “조직 노동”에 대한 강력한 원망은 강력한 기대감의 반영물이기도 하다.) 


물론, 상층 노조 지도자들은 흔히 운동의 대의를 위해 투쟁을 건설하기보다 협상과 실리를 외치며 보수적 행태를 보이곤 하는 게 사실이다. 2005년 현대차의 류기혁 열사 투쟁을 외면한 것이나, 일부 정규직노조들이 비정규직을 확대하는 노사 합의를 하는 등으로.


이것은 개혁주의 노동조합 운동이 체제의 결과물과만 싸우기 때문에 생겨나는 문제들과 관계가 있다. 부문주의, 협상이 최종 해결 수단이 되는 것 등. 이것이 노조 상층을 협상 전문가들로 만들고, 이들은 웬만한 경우 기층 노동자들이 전투적 투쟁에 나서기보다 협상에 적당한 압력 수단 정도에 머물러 주길 바라는 관행과 태도가 자라난다. 


또, 일상적 시기에 노동조합의 원천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기층 조합원들은 부문주의적 의식에 머물곤 하기도 한다. 노동 대중이 총체적 인식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상황이 개혁주의의 근원적 배경이다. 여기에 노조 상층 지도자들이 부추기는 협상 우선 관행, 부문주의가 이런 개혁주의 의식 형성에 한몫한다.  


사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 안에서 모든 계급투쟁 사상의 원조격이라 할 수 있는 칼 마르크스는 결코 노동자들이 일상적으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에 구속되지 않는 존재라고 신비화, 이상화시킨 적이 없다. 그럴 수 있다면, 지배당할 일도 없으리라. 


마르크스는 [독일 철학의 용어를 빌어] 노동계급의 객관적 착취 관계에서 형성되는 ‘즉자적 계급 단계’와 스스로 계급 적대를 인식하며 해방의 주체로 나서는 ‘대자적 계급 단계’를 구분했다. 노동자들의 객관적 힘은 이미 즉자적 단계부터 존재하는 것이다. 


둘 사이 어디 쯤에 현실의 조직 노동운동은 존재하는 것이고, 좌파들의 과제는 노동계급 대중이 이 힘을 자각하고, 능동적이고 집단적으로 발휘하도록 [옛 표현으로는, 대자적 계급이 되는 일] 돕는 일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과제를 가장 잘 수행할 집단은 혁명가들일 것이고, 그 점에서 이들의 독자 당을 건설하는 것이 중차대한 과제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에 피상적으로 접근하거나, 노동운동의 좌파 지도자들에게 의존하던 일부 좌파들은 일부 상층 지도자들의 배신, 일부 노동자들의 후진성, 또는 일시적 사기 저하로 말미암은 전투성의 후퇴를 두고 도덕적 실망에 빠지곤 한다. 그 그 도덕적 분노와 좌절, 조급함이 조직 노동운동 자체와 거리 두기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패악을 끝장내려면 노동계급의 힘에 기대야 한다. 자본주의 권력의 원천인 이윤 창출을 봉쇄할 수 있는 객관적 능력이야말로 진보적 과제를 실현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힘이다. 따라서 상층 지도부와 기층의 분리 현상을 분석하고, 기층의 잠재력을 현실화할 이론과 전략이 중요한 것이다. 이 잠재력은 계급 단결로만 구현될 수 있다. 


(※ 그래서 노동계급 중심 전략 포기는 사실 총체적 반자본주의 전략을 포기하는 것, 많은 경우 모종의 혁명적 전략에서 개혁주의 전략으로 후퇴하는 것을 뜻한다.)


개혁주의적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으로 반영되지만, 노동계급 운동이라는 강력한 진지가 없이 사회운동에 의존하겠다는 전략은 2008년 촛불항쟁처럼 ‘로켓처럼 솟아 올랐다가 나무 토막처럼 떨어지곤 하는’ 사회운동의 특성 때문에 늘 불안정하고 낙관과 비관을 오락가락하는 형태를 반복할 가능성이 높다.(촛불이 꺼지고 그 열기 상당수가 급속도로 야권연대 선거주의로 빨려들어간 것도 그 방증이다.)


문제는 이런 전략이 노동계급 운동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려는 인내심 있는 전략과 실천을 오히려 경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향은 운동이 침체할 땐 우경화로 기울기 쉽다. 왜냐하면, 그런 분석이 명시적으로, 또는 암시적으로 제기하는 문제, 즉 변혁의 주체 문제 때문이다. 


자본주의 이윤의 생산기지에 진지를 치고 있지 않은 운동은 국가의 집요한 탄압에 지속적으로 맞서거나 활력을 유지하기 쉽지 않다. 더 열악한 조건의 불안정성은 체제의 협박 뿐아니라 유혹에도 더 취약하다. 그래서 유동적 미조직 대중을 주체로 사회운동에 의존하는 정치(전략)는 정세가 좌파에게 불리하게 될 때는 부문주의와 선거 정치로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장 의장이 우호적으로 인용하는 유럽과 미국의 신좌파 전통이 그랬다. 1960년대 신좌파는 환경 등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대변했으나 노동계급 운동을 불신했기 때문에 그에 기반한 총체적 사회변혁 전략을 채택하기 힘들었다. 


바로 그 때문에 그들은 막상 흔히 ‘68혁명’이라 부르는 격변의 시기에 주요한 구실을 할 수 없었다. 1968년 프랑스의 ‘5월 반란’ 직전인 1월 <소셜리스트 리지스터>에서 앙드레 고르즈는 [체제의 안락에 물든] 노동자 대중이 총파업을 할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당시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칠레 등지에서 체제를 뒤흔든 건 신좌파가 ‘일차원적 인간’으로 전락했다고 무시했던 노동계급의 총파업 등 집단적 저항이었다.


결국 서유럽과 미국에서 신좌파 전통은 1970년대 사회적 격변이 총체적 변혁으로 성장하는데 도움도 안 됐고, 오히려 이 열광이 가라앉자 비관에 빠져 엘리트주의나 부문주의, 선거주의로 후퇴했다. 


이런 주체의 딜레마가 바로 급진주의를 표방하는 신좌파 전통의 딜레마다. 선거정당으로서 노조의 돈과 인력 기반이 필요하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진보신당도 이런 조직노동과 거리두기를 고수하려 하면, 말과 말 사이, 말과 실천 사이에서 모순만 커질 것이다[각주:3].


노동자들의 힘은 단결에서 나온다.



따라서 개혁을 위해서라도, 좌파는 노동계급 전반의 힘을 동원하려 해야 하고, 계급 단결을 추구해야 하며, 그러려면 그 내부의 차이보다 공통점을 강조해야 한다. 보자. 정몽구·이건희와 노동자 사이에 있는 차이와 노동자들 사이의 차이, 어떤 차이가 더 크고,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의] 적대를 품고 있는지를. 


장 의장이 급진적으로 “금융 규제 강화나 복지국가 강화는 … [대안 사회를 위한] 필수적 구성 요소들[의] … 일부분일 뿐이다. 핵심은 … 전 지구적 수준에서 사회 세력 관계를 뒤집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현실로 되려면, 사회 세력 관계를 뒤집을 만한 힘이 있는 세력을 기반으로 하려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그들은 포섭된 노동이라고 배척하며 도덕적 비난을 가하거나, 아니면 노동자들 사이에 차이를 [지적하되] 부각해선 안 된다. 조직 노동이 전체 노동계급의 이해를 대표하도록 그들의 현재 의식과 실천에 어렵고 더디더라도 개입하려고 해야 한다. 


이런 방향은 공통점을 강조하며 단결을 강조하는 것, 조직 노동의 전략적 중요성을 고려하는 것으로 드러나야 한다. 단순히 계급 내부 차이를 덮고서 모른 척 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러 차이를 솔직하게 드러내되, 이를 어떻게 단결해서 해결할 것이냐 하는 방식으로 이 문제를 제기해야 하자는 뜻이다.


진정한 노동 중심성은, 천박한 노동자주의 같은 게 아니다. 자본주의라는 만악의 근원을 겨누는 강령에 기초해 노동의 힘에 전략적 중심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은 노동자들이 능동적으로 나서게 하는 다양한 개입과 전술로 구현될 수 있다. 


따라서 세계자본주의가 거대한 위기에 직면한 지금 좌파가 추구해야 할 전략은 “변혁적 노동계급 정치”다. 이것은 마르크스의 말을 단지 교조적으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 


유럽의 긴축 반대 투쟁과 아랍의 혁명에서 결정적 진지를 제공하고 있는 것은 조직 노동자들의 투쟁이다. 이처럼 진정한 의미의 ‘선도 투쟁’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배제”됐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럴 ‘힘’과 ‘경험(투쟁과 조직화의 전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에 의해서만 진지전의 기동전 전환은 가능할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 87호에 실린 내 기사에서 조직 노동과 배제된 노동 부분에 대한 내 나름의 보론이다. 87호 기사의 축약 전 내용은 여기를 보라.



  1. 이런 주장을 해놓고는 기자회견문의 말미에서, 자신들이 조직 노동을 배제하려 한다는 것은 모함이라고 하는 것은 솔직하지 못한 것이다. [본문으로]
  2. 컨택터스의 해명문을 보라. [본문으로]
  3. 그동안 조직노동운동을 비판하며 비정규직당을 표방했지만, 막상 선거에선 조직노동의 비자주파 부문에 기대려 했던 것이 말과 실천 사이의 이율배반이라면, 문제의 기자회견문 말미에서는 자신들이 조직 노동을 배제하려 한다는 말은 모함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나 기자회견 후 조직노동 배제가 본뜻이 아니라고 해명하는 것은 말과 말 사이의 모순이라 할 수 있겠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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