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신당 지도부는 118G20에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계를 위한 진보신당의 제언 ― G20 서울정상회의에 보내는 진보신당의 의제 제안서”(이하 제안서)를 보냈다.

제안서는 ‘금융거래세 도입’이나 ‘자본 건전성 규제 강화’, ‘환경 정의의 실현’, ‘더 좋은 일자리’ 등을 G20이 논의하고 합의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이것은 G20 회의를 규탄하고 반대하지만 말고, G20의 논의에 개입해서 의제를 제안하고 영향을 끼쳐야 한다는 진보신당 지도부의 생각을 보여 준다.

그러나 G20은 개입해서 진보적 의제를 채택하라고 요구할 기구가 아니다. 항의하고 반대해야 할 기구다.

지난 네 차례 회의의 결과는 G20이 상호 경쟁하면서도 경제 위기의 책임을 노동자와 빈민 들에게 떠넘기고 자본가들을 보호하는 기구임을 보여 줬다[각주:1]. G20 정상들이 각 나라에서 바로 이 일들을 하고 있다.[각주:2]

진보신당 지도부도 제안서의 첫 문단을 “신자유주의 광풍으로 세계경제 체제를 위기로 몰아 간 당사자들이 그 해결 대안을 만들어가는 것에 동의할 수도 없다”면서 시작한다. G20 회의에서 “신자유주의 세계금융체제를 극복할 가능성도, 민중들의 삶의 질을 개선할 구체적인 방안도 보이지 않는다”고도 지적한다.

진보신당 지도부는 G20이 대표성도 없고, 위기 해결 방안도 없다고 말하면서도 동시에 G20 회의가 금융규제 등을 합의하는 ‘좋은’ 회의가 돼야 한다고 주문하는 셈이다.

당 대표인 조승수 의원은 G20 정상회의 지지 국회 결의안에 반대 투표하지 않고 기권했다.

이처럼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실천은 진보신당 지도부의 개혁주의를 보여 준다. ‘책임 있는 공당’이 정책 대안 없이 ‘거리 정치’만 해선 안 된다는 생각 말이다.

그러G20 회의가 간단히 무시해 버리면 그만인 제안서로 위기의 나락에서 사람들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다.

만약 G20이 실효성 있는 회의가 될 수 있다면 우리는 규탄이 아니라 응원하며 회의를 단순히 지켜봐야 할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환상"을 조장하는 것이다.[각주:3]

그래서 투쟁보다 ‘명망’을 중시하는 개혁주의 정치는 일관되고 효과적 대안이 못 된다 .

지배계급이 진보적 요구를 마지못해 수용하게 만들려면 많은 사람들이 G20의 반동적 대안에 분노하고 항의하는 투쟁을 벌여야 한다. 저들이 거짓 선전과 무장 경찰의 위협으로도 우리의 저항을 막을 수 없다고 느낄 때, 바로 우리가 개혁을 쟁취할 수 있다.


■ 참고 기사

▶정부 홍보가 보여 주지 않는 G20의 진정한 실체

G20, 한심하지만 동시에 위험한 기구

“G20 합의는 세계 민중의 삶을 개선하지 못한다”

G20 비판의 입을 틀어막으려는 이명박 정부

내가 G20에 반대하는 10가G 이유

▶ 긴축도, 부자를 위한 경기부양도 위기 해결책 아니다

G20 대국민 토론회: G20의 성격과 운동의 방향을 토론하다

G20 ‘맞짱 토론회’: 정부 측 논리의 군색함과 위선이 드러나다


■ 관련 포스트: 진보신당 논쟁과 대표 선거 ― 실패한 전략 반복하기?


  1. G20은 세계자본주의의 최고 정치 리더들이 모이는 자리다.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에 책임있는 자들이 민중에게 고통을 전가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회의가 G20이다. 이명박은 G20 회의를 통해 국내적으론 레임덕 탈출 기회로 삼고 한국내 고통전가 정책의 명분을 구하려 한다. 국제적으론 한국 지배계급의 지위(국격)를 상승시키려 한다. 결코 국민 대중의 격을높이려는 게 아니다. 우리가 G20에 반대해야 하는 핵심 이유들이다. [본문으로]
  2. 게다가 G20은 이명박의 4대강 죽이기를 녹색성장투자라고 칭찬해 줬다. [본문으로]
  3. 진보신당은 11월 3일 논평에서 G20이 “우스꽝스런 수준”에 불과한데 이명박이 “환상을 국민들에게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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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20에 대한 모든 비판 목소리를 억누르려는 이명박 정부를 규탄하는 기자회견이 4일 오전 민주노총에서 열렸다.

민주노총 등 83개 시민ㆍ사회단체가 만든 ‘사람이 우선이다! G20대응민중행동’(이하 G20대응민중행동)은 기자회견에서 G20 회의가 가까워 오면서 일어나는 민주적 권리 억압 사례들을 폭로하고 규탄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G20 서울국제민중회의’에 장소를 빌려주기로 한 서강대 당국이 갑자기 장소 대여를 불허한 것이다.

이 행사는 G20대응민중행동과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가 공동 주최하기로 해 이미 10월말에 서강대 당국의 공식 허가를 받았고, 11월 1일에도 “서강대 강의실 운영계획에 민중회의 일정이 명시되어 있[었다.]”(G20대응민중행동이 서강대 이종욱 총장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그런데 11월 2일 서강대 이종욱 총장이 약속을 뒤집고 행사를 불허해 버린 것이다. “정치적 성격의 행사”라는 이유를 내세워서.

G20 정상회의가 ‘정치’ 지도자들의 회의인데, 이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행사는 정치적이면 안 된다는 것은 위선이다. 사실상 정부와 G20에 비판적인 목소리는 아예 틀어막겠다는 뜻이다.

서강대 당국은 11월 6일로 예정된 학생들의 학술행사도 “G20에 맞선”이란 표현이 들어간다는 이유로 불허 통보를 했다[각주:1].

서강대 학생 김윤영 씨에 따르면 마포경찰서가 총장과 학생회에 연락해, ‘토론회가 시위로 둔갑할 우려가 있어서 학교 안에 경찰을 깔겠다’고 했다고 한다.

G20 국제민중회의는 G20 정상회의가 열릴 때마다 해당 도시에서 열렸다. 세계경제 위기의 해결책으로 G20 정상들이 내놓는 것과 다른 대안을 모색해 왔다. 이번에도 국제노총과 비아캄페시나, 지구의 벗 등 다양한 단체와 해외 인사 들이 참여해 지구촌 빈곤 해소와 기후 대응 등을 논의할 예정이었다.

G20대응민중행동 박석운 공동대표는 “서강대 총장이 벌벌 떨 정도의 고위층 압력이 아니면 하지 못할 부끄러운 짓”이라고 규탄했다.

민주노총 정희성 부위원장은 그밖의 탄압 사례도 발표했다.

이명박 정부는 파키스탄과 네팔의 노동운동 활동가들의 입국을 불허했다. 특히 파키스탄 “여성 노동자의 전화” 칼리크 부슈라 사무총장은 “테러 연관 가능성 국가” 출신이라 불허됐다. 정 부위원장은 부슈라 총장이 미국과 일본도 제약 없이 방문해 활동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정 부위원장은 G20을 비판적으로 보도한 것(☞ 관련 기사 모음) 때문에 경찰이 G20경호특별법을 내세워 <레프트21> 거리 판매를 중단할 것을 통보한 사례[각주:2]도 발표했다.

내가 좋아하는 만평이다. 누구가 이해하기 쉽게 매우 쉽고 위트있는 용어로 G20에 반대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이밖에도 11월 10일 종로구 내자동에서 하려던 “론스타 투기자본, 삼성재벌 비호하는 김&장 규탄대회”도 G20경호특별법 상 경호안전구역이라는 이유로 불허됐다.

기자회견 참석자들은 서강대 당국의 불허 방침 철회를 요구했다. G20을 빌미로 기본적인 표현과 학술 토론의 자유마저 가로막는 작태를 전 세계에 알리겠다고 밝혔다.

G20과 이명박 정부의 반민주성이 곳곳에서 반감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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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쉽게도 학생들은 이 요구를 수용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2. 마포서는 홍대입구역 거리판매자들에게, 서초서는 강남역 거리판매자들에게 거리 판매 중단을 요구했다. 둘 모두 집회신고서를 제출해 놓았는데도 그렇다. 마포서가 압박이라면, 서초서는 경호특별법상의 경호안전구역이라며 정식 금지 통보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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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북한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 삼성과 <조선일보>, 대형 교회 등의 세습도 비꼬았다.

남한도 그러니 북한도 문제삼지 말자는 주장이 아니라면, 소수 지배자들이 권력과 부를 독점하고 세습하는 행태는 남북이 다르지 않다는 이런 통찰은 정확한 것이다.


그런데 자칭 ‘민주·진보’라는 사람들 일부가 이런 비교를 부당하다고 비판한다.

사회민주주의연대는 “정권의 세습이라는 문제와 기업 경영권이나 재산이나 직업의 세습이라는 문제를 같은 차원에서 뒤섞어 물타기하는 궤변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이 단체의 공동대표인 주대환은 이런 비교가 “더 나쁜 경우”라고 단정한다.

국민참여당 유시민은 “기업은 사적 권력”으로 “한 기업이 세습 때문에 망하면 다른 기업이 그 자리를 차지”하니까 간섭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이들의 주장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생각은 우리가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업은 ‘사유재산’이므로 이를 ‘상속’하는 것은 ‘공공의 것’인 정치 권력을 ‘세습’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들으면, 삼성과 <조선일보> 등이 그 이른바 사적인 권력과 부를 이용해 선출된 정치권력을 좌지우지해 온 일들이 떠오른다. 이들의 범죄는 단지 시장질서를 어지럽힌 데 있지 않다.

이들은 정치권력과 유착돼 있고 자신들이 로비로 만든 법을 위반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들의 지위에 도전하는 행위를 결코 ‘관용’하지 않는다.

삼성은 무노조 경영과 세습을 위한 불법을 가리고, 이른바 ‘자유로운 기업 활동’을 위해 수조 원대 비자금으로 행정·사법부 관료들을 관리해 왔다. 

<조선일보>는 상속세 폐지 등 꾸준히 부자 감세를 부르짖으며 보편적 복지 염원을 매도해 왔다. 면세 혜택과 신도 성금으로 덩치를 키운 대형 교회들은 진보 개혁에 반대하는 일에 신도를 동원한다.

이명박 정부는 이에 호응해 1백조 원이 넘는 부자 감세를 실시하고 부동산 부자를 위해 4대강죽이기를 강행하며 대기업을 위한 알짜 공기업 매각과 의료 민영화도 준비하고 있다.

이처럼 사적 권력들이 공공의 것인 권력을 사실상 사유화하려 온갖 방법을 다 쓰는 현실에서 시장과 사기업은 ‘사적 영역’이므로 공적 논의의 장에서 다룰 필요 없다는 주장은 부당하다[각주:1].

오히려 이런 분명한 사례들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에서 돈과 권력이 결코 분리돼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세습된다.

올해 7월 기준으로 억대 주식을 보유한 미성년자가 220명이다. 이 가운데 열두 명은 보유 총액이 각자 1백억 원을 넘는다. 모두 재벌가의 자식들이다. 이들이 재산을 세습하는 것은 그것이 보장해 주는 권력()까지 세습하는 것이다.

이처럼 주식도 주요한 세습 대상이란 점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이고, 주주들이 인정했으므로 삼성 세습 같은 일이 북한 세습과 다르고, 별 문제 없다는 주장도 틀렸다[각주:2].

사실 주주들은 배당금과 차익으로 투자의 대가를 모두 받아간다. 그러고도 세습 받은 주식으로 기업의 주인 행세를 한다는 건 불공정한 일이다[각주:3]

이처럼 소수 지배자들이 세습을 통해 평범한 다수를 지배할 특권을 대물림한다는 점에서 남한 자본주의도 북한의 정치·경제 구조와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기업주의 권력과 부를 사유재산이라는 이유로 문제삼지 않는 종류의 개혁주의 정치로는, 아무리 북한 세습을 비판해도, 막상 지금 여기에서 우리 삶을 개선하거나 기업의 횡포에 맞서 삶을 보호할 힘을 발휘할 수 없다[각주:4]. 주대환이나 유시민 등은 기껏해야 시장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 북한 세습을 비판할 뿐인 것이다[각주:5].

그것이 “권력은 시장에 넘어갔다”고 자조한 노무현 정부 수준의 개혁이 처참하게 실패한 까닭이다[각주:6].

물론 국가와 자본이 항상 유착하기만 하는 건 아니다. 삼성의 비자금과 로비, <조선일보>의 악다구니는 그래서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사적 세습 권력들이 단순히 정부를 지배하는 관계라면 뭐하러 그렇게 애를 쓰겠는가.

무엇보다 삼성 같은 거대기업들을 개인의 소유물로 인정해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오늘날 거대기업들이 조직하는 생산은 세계적 규모에서 협력적 노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이 과정에서 핵심 기능을 수행하는 것은 각 기업들이 고용한 노동자들이다[각주:7]

사실, 개인 소유로 감당할 수 없게 커진 경제단위당 생산력을 자본주의 방식으로 조직한 게 주식회사다. 마르크스는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생산양식 그것의 한계 안에서 사적 소유로서의 자본을 철폐하는 것”[각주:8]라고 말한 바 있다.

심지어 국민 세금으로 특혜도 준다. 2008년 한 해 삼성전자 혼자만 1조 원이 넘는 세금을 감면 받았다. 이 돈이면 1년간 서울에 있는 모든 유치원···고등학교에서 무상급식을 할 수 있다. 삼성그룹 자체가 파산 위협에서 국가의 도움으로 살아났다.

노동자의 노동과 국가의 보호가 없다면 이건희 일가는 할 수 있는 게 없다[각주:9]. 이건희 없는 삼성은 존재할 수 있어도, 노동자 없는 삼성은 그럴 수 없다.


기업과 경제를 세습의 대상이 아니라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적 소유와 민주적 계획의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 이 글은 <레프트21>43호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바뀐 글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기사 원문 주소: http://www.left21.com/article/8753)

※ 격주간 신문의 특성상 약간 뒤늦은 감이 있다. 지난 번처럼 이 글도 보론을 써 조만간 올릴 예정이다.



  1. 신자유주의의 탈정치화 논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인데, 형식과 달리 매우 보수적인 실천을 낳는다. [본문으로]
  2. 주주총회는 1주식 1표다. 얼마나 자본주의적인가. 즉 얼마나 비민주적이고 불평등한가. 재산 액수대로 표 수가 정해지는 ‘주주 민주주의’를 인정한다면, 북한 세습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 [본문으로]
  3. 세습받을 정도로 규모 있는 지분이 돼야 경영권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4. 경제 위기 시대에 보편 복지 도입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사유재산과 사유기업이 정치의 영역 밖이라면 무슨 수로 부자 증세를 할 것인가? [본문으로]
  5. 시장자본주의가 더 우월하다, 시장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 두 생각 모두 취지는 달라도 시장 자본주의가 최선이고, 이걸 벗어나는 체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들의 북한 비판은 시장자본주의 틀 안에 있다. [본문으로]
  6. 요즘 들어 좌고우면하며 우경화한 진보정당들이 대안정당으로 부상하지 못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7. 삼성전자의 거대 수익은 순전히 반도체 노동자들의 땀값, 목숨값이다. [본문으로]
  8. 사적 소유와 사회적 생산의 모순을 지적한 것으로서 발전하는 생산력이 갈수록 사적소유라는 자본주의의 형식(생산관계)과 모순(충돌)을 일으키는 것을 뜻한다. [본문으로]
  9. 국가의 보호라는 것도 상당수는 노동자들의 수행하는 노동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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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항쟁은 지금 노동자와 학생들의 투쟁으로 발전해 있다. 그러나 사르코지도 긴축 때문에 물러서지 않을 것이다. 결국 법안이 통과되면 운동은 정권 자체에 도전하려는 쪽과 사기가 꺾여 주춤하는 쪽으로 나뉠 수 있다. 마치 2008년 촛불항쟁 때 미국산 쇠고기 수입 고시가 발표된 뒤에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지금 판돈은 그 이상이다. 노령연금 축소로 촉발된 투쟁이 세대를 아우른 노동계급의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지금 쌓인 불만의 크기와 투지를 보여 준다. 

프랑스 노동계급은 이번 총파업 투쟁을 통해 싸울 수 있는 힘이 충분하다는 것도 보여 줬다. 이전에도 이들은 1995년 반신자유주의의 전환점이던 공공부문 총파업(‘붉은 겨울’) 때부터 최근 유럽헌법 부결과 CPE 폐기까지 상당한 승리의 경험을 축적해 왔다.   

운동이 갈림길에 설 때, 늘 중요한 것은 단호하게 투쟁을 계속 이어가도록 지도력을 발휘할 잘 준비되고 응집력 있는 집단의 구실이다. 

이 투쟁의 결말은 아직 알 수 없지만, 이 투쟁이 한국에 주는 교훈은 정부와 기업주들이 경제 위기의 책임을 평범한 사람들에게 전가하려 할 때, 가장 좋은 대응은 모여서 행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투쟁해도 소용 없지 않냐고? 그럼 투쟁해도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자들이 입 닥치고 있으면 우리 요구를 들어주겠나??? 침묵하면, 백 퍼센트 우리가 고통을 책임져야 한다. 투쟁하면 최소한 반반의 가능성은 생긴다. 

올해 그리스와 프랑스에서 노동자들의 거대한 투쟁들은 바로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투쟁하는 곳에서, 그것도 수백만 명이 한데 모여서 투쟁하는 곳엔 적어도 희망이 있다는 것이다. 경제 위기에 책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고통을 나눠 가질 이유가 없지 않은가.  

아래는 프랑스 반자본주의신당(NPA)가 올린 총파업 행진 동영상.(그 아래는 <레프트21> 번역 기사)

 


프랑스에서 연금 공격에 맞선 반격이 거대한 저항으로 발전했다.

노동자들은 노동자들의 연금 기여분을 늘리고 67세까지 일해야 연금 전액을 받을 수 있게 개악하려는 사르코지 대통령의 계획에 맞서 싸우고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의 계획은 경제 위기의 대가를 부자가 아니라 노동자들이 치르게 하려는 부자들의 의도를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화요일[10월 19일] 현재 대중 파업, 시위, 학생 반란은 최고조에 달해 있다.

프랑스의 정유소 12 곳이 모두 무기한 파업에 동참하면서 연료 부족 사태가 나라 전체로 번지고 있다. 프랑스 전체 1만 2천6백여 곳의 주유소 가운데 약 2천7백 곳에서 석유가 완전히 동났다.

캉, 라이시쉬테트, 덩커크, 생피에르데코의 석유 저장소 봉쇄도 계속됐다.

화물차 운전사들도 파업에 들어갔고, 주요 도로에서 거북이 운행을 하는 ‘달팽이 작전’을 펼쳤다.

프랑스 전체 4천3백여 곳의 중고등학교 가운데 거의 1천여 곳이 휴교했고, 그 가운데 6백 곳은 봉쇄됐다. 몇몇 지역에서는 고등학생들이 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경찰 공격에 맞섰다.

이와 같은 노동자와 학생 들의 반란은 긴축 공세를 중단시킬 힘이 있으며, 반란이 지닌 잠재력을 십분 활용하면 승리할 수 있다. 

기사 더 보기 ☞ 노동자와 대중의 힘을 보여 주는 프랑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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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자본주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좀더 능동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 보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난 폐허 위에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가. 아니, 만들 수 있는가?

대안 사회 논의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창조적 에너지의 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비루함이 오래될수록 우리 안의 독이 된다. 

대안 사회는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바로 그 탐욕의 철로 끝에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서 대안 사회의 가능성과 대안 사회의 원리들을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담지하는 집단인 노동자계급의 존재가 계급사회 발생 이후로 최초로 사회주의[각주:1]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최초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만한 부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비도덕성과 비민주성, 불평등이 만연했지만 말이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빈곤은 사회의 부(총생산)가 인구와 비교해 적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부가 오직 개별 경제주체들(기업과 개인 등)의 소비 능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해 자본주의 핵심 생산단위인 기업은 이제 소수 개인들 소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등장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의 개인 소유 원리를 부정하는 현상이다.

이런 경제 조건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전 다른 모든 피착취 계급과 달리 집단적 생산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시설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들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생산수단을 각자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길이다. 농민을 되찾은 토지를 나눠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눠 가질 순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은 이론상 사회의 [필요에 따른] 총수요와 아무 관계 없이 생산되며, 그 생산과 수요의 적절한 비율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된다. 이 경쟁적(=시장쟁탈적) 생산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의 경향을 낳는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분리에 바탕했기 때문인데, 하나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자의 분리이고, 하나는 생산이 경쟁하는 자본들로 분리돼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임노동-자본의 관계를 낳고, 후자는 무계획적 시장 경쟁을 낳는다.

그 점에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은 유용한 시도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생산과 소비의 계획 등 미래 청사진의 구체적 형상을 현재 자본주의 방식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는 평등과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등의 가치를 제시한다. 임노동-자본 관계가 낳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려고 사람들의 노동이 세심하게 고려된 균형적 직군으로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잘 팔릴 상품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모순을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생산계획과 소비계획이 경제 전체의 윤곽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잘 짜여진 그의 파레콘(참여경제) 계획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선 내게는 전반적인 계획에서 앨버트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꼼꼼하게 그의 저작을 살펴볼수록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계획경제 구상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식 관료지령경제로 귀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한 챕터를 할애해 중장집권계획경제를 비판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 조정자계급을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계급 체제를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물론이고 스탈린과 대척점에 섰던 트로츠키마저 그 전략과 전략 주체인 당이 스스로 조정자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중앙집권계획경제=스탈린주의=관료적계급체제=조정자계급지배경제인 셈이다.

문제는 계획경제라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가 그의 파레콘 계획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생산계획을 짜고, 지역의 소비자평의회가 소비계획을 짜서 반복 조절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평의회의 기초 단위는 개별 공장과 카운티(한국으로 치면 군 단위라고 함)라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가까운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중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이 점에서 드바인의 ‘협상조절모델’이 더 효과적이라고 평한다.

나도 캘리니코스의 견해에 동조하는데,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 취합해 가는 계획도 필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배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선, 사회 전체의 부가 흘러 넘친다 해도 자연적 총량은 한계가 있다. 생산과 소비에 관한 계획이 각 자율적 단위의 계획들을 취합하고 사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만으로는 지속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생산과 소비 수요의 충돌 문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남반구 국가들의 농업 문제(식량 위기)
는 지금의 식량 소비 구조를 바꿔야 하는 압력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비 계획을 자율적 단위들에게만 맡겨 두고 캠페인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각주:2].

게다가 특정 사안들은 사회 전체 차원의 결정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을 한다고 하면, 기존의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각주:3] 발전(전력 공급)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할지 아니면(수요를 당분간 억제해야 한다), 기존 수요를 고정한 채 자연력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과정부터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 단위들의 사후적 조절 메카니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모든 경제 단위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앨버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인 중앙 계획을 따라서 권위를 지닌 중앙 계획 기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각 촉진위원회는 순전히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데서 기술적 구실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무엇인가’로 대체하려는 핵심적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부정적 본질 가운데 핵심이 ‘무계획성’이다[각주:4]

그 점에서 앨버트가 단위 공장과 군 단위를 기초 평의회 단위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작동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군 단위의 노동자/소비자평의회가 서로 계획들을 내놓고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사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계획이 시장경제의 작동방식과 닮아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뜻이다. 협력적이란 뜻에서 사회적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에서 총생산(=총소비) 단위의 배분 계획과 그 계획을 수립할 민주적 기구와 작동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파레콘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중앙 차원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식 가짜 계획경제=관료적 지령경제와 다른 민주적이고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계획 메카니즘을 구성해야 한다. 

각 지역과 작업장의 민중의회들과 평의회들이 보낸 대표들로 구성되고, 이들에게서 수렴된 의사들을 집행할 대표기구이자 하급 평의회들에게 사회 전체의 필요와 조건을 판단해 결정한 계획을 지시하고 집행할 민주적 중앙계획기구가 필수적이다. 

내가 볼 땐, 파레콘의 자율적 단위들을 유지하면서도 위계적이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체계가 가능해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민주성과 효율성 면에서 우월한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적 계획경제론이 자본주의에 대해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쟁점은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비계획적인) 스탈린 식 지령경제와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특권도 없고,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이행기 단계의 국가를 전망했다. 이것은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목표다. 마르크스는 이 원리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배웠고, 역사는 20세기 동안 줄곧 이 목표가 현실화한 사례들을 남겨줬다. 

이 평의회 국가는 과거의 흔적 위에서 과거를 일소하면서 사회 전반의 계획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 세대의 상상력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 국가야말로 국가와 정치를 계급 지배 도구와 권력 투쟁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바꿔 놓는 구실을 하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관료제를 막으려는 계획기구 요원들의 추첨제도 이런 사회 단계에서는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우리도 공유하는 정당한 혐오) 때문에 이 과정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앨버트의 파레콘은 어떻게 이 참여경제가 현실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현실에 안착해서 작동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사회 구상인 민주적 참여계획경제는 기존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이행기 국가 단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자본의 최후 방어막인 국가기구를 타도할 집중적 행동 전략을 제시한다. 이 전략의 핵심 주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목표인 이윤 생산을 생산 과정에서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억압 대중들은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사고와 실천을 혁신할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행동은 그 체제에 물든 주체들을 혁신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전략적 투쟁의 힘만이 자본가들을 권력의 원천에서 무력화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해야 한다는걸 뜻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가 해소되는 순간, 앨버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동자국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저자: 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북로드
출판년도: 2003년

출판사 서평: http://www.yes24.com/24/goods/392270?scode=032&srank=1

<레프트21>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1102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책갈피

출판년도: 2009년

출판사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6839




  1. 마르크스 이전에도 사회주의라 부를만 한 사상과 운동은 존재했고,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칼 드레이퍼, 다함께, 2003) 참조 바람. [본문으로]
  2. 소농 중심의 지역 자급 농업을 중심에 둘 지, 집단 농장 형태를 중심에 둘 지도 고민거리다. [본문으로]
  3. 핵에너지도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 중단도 시급한 과제다. [본문으로]
  4.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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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 기사: 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관련 글: 착한 소비의 딜레마 ― 마르크스주의 관점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이 글은 부족하지만 위 글의 보론 성격으로 쓴 글입니다. 함께 읽어주세요~)

1.
오늘날 윤리적 소비, 즉 착한 소비 운동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나 “돈으로 세상을 바꾼다”는 표어를 내세웁니다. 

그래서 그것은 단지 소비자운동만은 아닙니다. 사회구조와 관련해 매우 포괄적인 주제들을 다룹니다. 

소비로 기업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사회 책임 투자를 촉구하는 운동이나 사회적 기업을 설립하는 것으로 발전합니다. 

선진 제국과 다국적 기업의 수탈적 무역에 대한 반대가 공정무역으로, 선진국 은행에 저축한 돈이 비윤리적으로 쓰이는 것에 반대하려는 생각이 지역 화폐나 비영리은행 운동으로 발전했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은행들에게 하는 저축이 이 은행들의 미국 채권 투자를 통해 미국의 전비로 쓰인다는 것입니다. 일본은 중국, 대만, 한국 등과 더불어 미국에 대한 채권 국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윤리적 소비운동은 참여하기도 쉽고, 의미도 가지는 운동으로 비춰지는 듯합니다. 저도 가능한 영역에서는 윤리적 소비를 하려고 합니다. 그렇다고 윤리적 소비가 목표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느냐 그것은 아닙니다.

2.
우선, 불매 운동과 윤리적 소비의 관계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엇을 산다는 것은 무엇을 사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친환경 제품을 사자는 것은 반환경 제품을 사지 않겠다는 의지를 대안적 소비 형태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폭넓은 방식인 불매운동은 대체로 윤리적 소비운동의 가장 초보적인 방식입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가장 높은 수준의 윤리적 소비운동을 표현하기도 합니다.

최근 몇 년 새 한국타이어[각주:1]와 이랜드, 조선일보 광고기업리스트, 미국산 쇠고기 취급 대형 마트 등 다양한 불매운동의 사례가 있습니다.  며칠 전엔 ‘삼성’과 정면 대결하자는 분들이 ‘삼성불매운동’을 제안하는 《굿바이삼성》이라는 책을 냈다는데, 이것도 한 사례입니다.

윤리적 소비가 불매운동이라는 초보 방법으로 되돌아 간 것은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을 대체할 수 있는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생명보험, 화재보험, 가전제품, 핸드폰, 컴퓨터 등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에서 삼성의 경쟁기업들은 삼성보다 작아서 악행의 규모가 더 작은 기업들 뿐입니다.

무노조 삼성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야 하나? 윤리적 소비를 일상에서 실천하려는 많은 분들이 고민했을 문제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것이 윤리적 소비운동이 부딪치는 가장 딜레마이자 한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럽히고 어지럽히는 가장 나쁜 기업을 윤리적 소비의 어떤 방법으로도 혼내 주기 힘들다는 것이죠.

자본주의 시장에서 독과점, 즉 집적[각주:2]과 집중[각주:3]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정용진 때문에 쟁점인 유통업계를 예로 들면, 대기업 유통 마트 진입에 반대하는 동네 슈퍼들도 이전에 자신들끼리 이런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지금 대형마트 반대자들은 이전 경쟁의 생존자들인 거죠.

이것은 이론상으로도 경험상으로도 이미 확인된 내용입니다. 대기업조차도 이를 피할 순 없습니다. 다국적 기업인 월마트, 까르푸가 실패해 떠났고 이랜드도 실패해 삼성에 넘겼습니다. 이 경쟁은 국가를 동원하기도 합니다. 양쪽 모두 공정거래위와 국회를 동원합니다. 

이런 시장의 특성상 이마트가 싫어 다른 대안 유통업체를 찾아 봐도 나쁜 기업을 만나는 걸 피하기 힘듭니다. 그것은 다른 소비재 시장도 거의 마찬가지입니다.

3.
그래서 윤리적 소비 운동은 대안적 소비 운동으로 나가자는 분도 있습니다. 대체로 우리에게 소비를 강요하는 대기업들의 소비 품목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간 생활에 본질적으로 필요한 물품이 아닌 경우가 많습니다.

자동차, 대형TV, 핸드폰, 보험상품, 주식투자, 비행기 여행, 패스트푸드 등.

안타깝게도 이것은 사회의 다수인 노동 대중들의 삶과 유리된 소비 생활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핸드폰 안 쓰겠다는 사람을 누가 고용하려 하겠으며, 오늘날 컴퓨터와 TV 등을 통한 매스미디어를 접촉하지 않고서 취업과 업무에 필요한 업무 지식을 습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자가용의 경우도 쓰지 않을 수 있지만, 콩나물 시루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이 너무 힘든 건 사실입니다. 패스트푸드 형태로 육식을 섭취하는 건 바쁜 도시 노동자들에게는 불가피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화재보험 없인 자가용을 굴릴 수 없고 체제가 생존을 책임져 주지 않으므로 생명보험이나 연금보험이라도 들어놔야 안심이 됩니다.

그래서 대안적 소비 운동은 근본주의적인 자급자족 소농 공동체운동으로 발전하거나 아니면 나쁜기업에 대한 생필품 의존을 인정하고, 커피나 초콜릿 같은 기호품 소비에서 윤리를 찾는 온건한 형태에 머물게 됩니다.
 

이런 기호품 소비는 시장이 작아 대기업들을 변화시키는 데 매우 부족한 상품들입니다. 

게다가 커피, 바나나, 초콜릿, 차 등의 기호품 소비는
선진국에서 20세기 들어서 대중적 유행이 됐는데, 이 작물들의 역사는 예전 남미와 아프리카의 플랜테이션 노예농장과 연관이 있습니다. 풍족한 농업지대가 식민본국의 기호품 소비를 위한 단일경작 노예농장으로 바뀌는 겁니다. 

20세기 중반부터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에 돈을 꿔 주고 엄청난 고금리로 이 돈을 갚도록 합니다. 외채의 덫에 걸린 가난한 나라들은 자국의 식량 공급을 파괴하면서까지 선진국 시장에서 돈 되는 작물의 단일 경작으로 농업 구조를 바꿔야 합니다. 공정무역이 취급하는 기호품들이 대체로 여기에 해당합니다. 

식민지 시대부터 형식적 독립국인 지금까지 이 지역들은 만성적인 식량위기 상태입니다. (참조 ☞ 여기) 공정무역기업과 거래하는 제3세계 농민들은 거대 플랜테이션 노동자들이 아니라 소농들입니다. 거대 커피농장 자체를 네슬레 같은 다국적 기업들이 경영하니까요. 

단일경작 수출은 농업 위기를 낳고, 변덕스런 국제 식량시장에 해당 지역 농민과 노동대중의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 커피의 경우 과잉 공급이 낮은 산지 가격의 주요 배경입니다[각주:4]. 근본에서 이런 수출의존, 수출용 단일경작체제를 바꾸지 않도록 하는 공정무역이 과연 정말 선한 것이라 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긴 합니다.

다국적 기업들보다는 더 많은 가격을 쳐 주니 상대적으로 훨씬 더 윤리적인 것은 분명하지만, 상대적 고비용은 기업 이윤을 감소시키는 게 아니라 소비자가 부담합니다. 시장 관계로 만나는 것이므로 이것이 진정으로 연대의 가치를 실현하는 관계인지는 의문입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자본력이 약한 공정기업들을 밀어내고 대기업들이 시장을 나눠 가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공정무역도 세계 무역의 진정한 불공정 구조를 바꿀 수는 없다고 결론 내닐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수탈적인 세계무역구조를 미화시키기도 합니다. 

결국 대안적 소비 운동은 대기업의 시장 과점과 시장 구조 자체의 비민주성과 불공정성 때문에 현대 자본주의 다수 대중의 대안적 삶의 형태가 되기에 부족합니다. 소비 운동이 중산층 운동처럼 보이는 이유죠.  

생협과 로컬푸드 등도 대안적 소비라 할 수 있는데, 식품 안전이란 면에서 윤리적일 수 있고, 한국처럼 자영농이 많은 구조에서는 양쪽에 모두 이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더 비용이 더 들고, 생산의 질을 유지하려면 보편화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구조는 전혀 건드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세상을 바꾸는 소비는 되질 못합니다. 

이런 점들은 윤리적 소비가 생산자에 대한 자선 효과를 노리는 것인지, 개인 소비의 질 향상을 기대하는 것인지 모호하게 만듭니다. 

다른 한편, 바로 이 점이 소비(취향과 능력)가 생산(규율과 소득)에 매여 있는 또다른 증거이기도 합니다.

△ 공정무역 매출은 매년 늘고 있다. 공정무역 시장이 커지면 공정무역마크를 단 대기업 상품들을 보게 될 것이다. 기업으로선 손해보는 건 아니다. 공정가격을 산지에서 지불한 만큼 판매가격을 올려 받기 때문이다.



4.
자본주의에서 기업 이윤(잉여가치)은 판매차익이 아니라 “출입구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라는팻말이 붙어있는,가려져 있는 생산의 장소”(마르크스)에서생겨납니다.

이 곳에서 자본가들은 자신이 구매한 노동력에게 약속한 대가(임금)보다 더 많은 노동(잉여노동)을 부과합니다. 이 잉여노동의 결과로 생겨난 추가적인 재화와 서비스가 잉여가치인데, 자본은 이를 이윤이라고 부릅니다.


즉, 전체 생산과정에 투자된 자본 가운데 원료는 그대로 생산품의 가치에 이전되며, 기계도 감가상각되어 생산품 가치에 이전됩니다. 노동만 유일하게 자신의 가치(임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말한 ‘착취’입니다. 즉, 마르크스주의에서 착취는 부당거래로 만든 차익이나 수탈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정상적인 생산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에서 모든 경제주체의 소득은 이처럼 노동자 착취에 바탕한 생산과정에 기여한 몫을 그 비율 만큼 배분받는 것입니다.

노동력 제공, 공장과 창고 등 토지의 대여, 현금 대출, 법과 경찰로 기업을 보호하는 국가, 생산품 판매와 배송, 노동력의 교육과 치료 등이 임금과 지대, 이자, 세금, 수수료 등으로 실제 이윤이 나는 생산 영역에서 노동자와 나머지 자본, 그리고 국가에 배분됩니다.

나머지 자본과 국가가 가져가는 몫의 노동은 실제로 이 부문에 고용된 노동자들이 했으므로 이 노동자들은 이 배분되는 몫에서 임금을 받습니다. 이 노동자들도 잉여노동을 한 것이므로 착취를 받습니다.

결국, 이 소득 배분 과정은 잉여가치 생산과 실현, 배분 과정에서 구성된 자본의 연결망이 노동자들 전체를 착취하는 것, 즉 집합적 착취 관계의 형성을 보여줍니다. (한편에선 화폐 물신주의, 즉 화폐가 신비한 구매력을 가지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줍니다)

예를 들어, 이마트의 힘은 싼 판매가격이 아니라 싼 구매비용에 있다는 겁니다. 싼 판매가격은 시장 점유율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 뿐입니다. 싼 판매가격으로 시장을 과점해도 이윤을 남기려면 투자와 산출(매출)을 대비해 후자의 비율이 높아야 합니다. (이는 자본주의 시장경쟁의 본질이 단순한 유통과 판매가 아니라 경쟁적 축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판매노동자를 저임금에 쓰고, 현금과 유통망의 힘으로 생산기업들을 압박해 더 높은 착취강도로 더 싸게 물건을 공급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각주:5]입니다.

이것이 대형유통자본에겐 있고, 동네 중소 상인에겐 없는, 대기업이 영세상인들을 몰락시키는 힘입니다. 그래서 대기업은 사는 물건부터 사는 장소까지 우리가 자신을 피할 수 없도록 포위합니다.

한편, 중소기업도 생산비용을 낮출 수만 있다면 대체로 대형유통마트에 납품하는 게 매출을 늘릴 수 있으므로 이득이 됩니다. 소상인들도 경쟁하려면 구매비용을 낮추는 데 같은 이해관계를 가집니다. 더 싼 상품 공급을 바라는 거죠. 서로 싸우는 듯 보이는 대기업-중소기업-유통기업-중소상인이 한편에선
 공통의 이해관계를 갖는 이유입니다. 

이 가운데 소비재를 취급하는 소상인들은 대기업과 싸우면서도 노동자투쟁은 환영하지 않고, 생산기업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라지 않으면서 소비자로서 노동자의 임금 인상은 바랍니다. 중간계급의 모순된 처지란 바로 이런 겁니다[각주:6].



5.
이 얘기를 장황하게 한 또다른 이유는 소비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는 걸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첫째, 노동자들의 전체 소득을 합해도 전체 생산 몫의 일부이므로 소비재 수요가 기업 이윤에 타격을 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둘째, 소득의 원천이 기업들의 이윤 생산 과정이므로 앞서 지적했듯이 소비행태 등 생활방식도 생산과 결부된 필요와 문화에 대체로 종속됩니다.

셋째,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누구를 윤리적 소비의 파트너로 택하더라도 경제의 근본 구조는 전혀 손상되지 않습니다.

넷째 이 점도 매우 중요한데, 자본주의 경제에서 진정한 소비자는 생산과정에서 온갖 생산요소와 제반서비스를 구매하는 생산자본이라는 겁니다[각주:7]. 이것이 자본주의에서 투자가 수요를 창출하는 원리입니다.

좀더 부가하면, 바로 이런 자본주의 투자의 성격 때문에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의 소비능력이 자본주의 전체의 생산물보다 적은데도, 심지어 농민 등을 다 합쳐도 총투자액이나 총산출물에는 못 미치게 돼 있는데도 일반적으로 과소소비 공황이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이해하고 나면, 소비로 기업 이윤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지만 공상을 좇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생존을 위해선 노동력 판매, 즉 취업을 해야만 하는데, 반대로 인간의 노동력이 판매 대상이 될 정도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체제에서 소비 행위를 회피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이런 거부할 수 없는 현실 때무에 오늘날 자본주의를 벗어나는 근본주의 대안은 상품시장과 노동의 소외를 폐지하는 반자본주의 노동자 혁명이거나 아니면, 자연으로 돌아가는 소생산자급자족 공동체 밖에는 없습니다.

소생산자 공동체는 사실상 도시 노동자들이 귀농하자는 것인데, 막대한 식량과 재화, 서비스를 쌓아두고도 수억 명을 굶겨 죽이는 체제의 부정의를 바꾸는 것은 더 힘들어지는 대안이 아닌가 합니다. 국가권력에 대한 정치적 도전을 회피할 뿐아니라, 소생산 공동체의 경제력으론 대기업들의 경제력도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6.
결국 윤리적 소비 운동의 기업 비판은 기업을 변화시키는 개혁주의 대안으로서 종합하면, 윤리적 자본주의를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정상적인 작동이 착취에 기초하고 있으므로 근본에서 윤리적 자본주의는 가능하지 않습니다.

기사에서 썼듯이 나쁜 기업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의 필연적 결과입니다. 시장 경쟁 아래서 개별 기업은 경쟁을 위해 생산비용을 줄이고, 노동자에게 더 일을 시키고 노동자 수를 줄이며, 다른 사회 책임 투자를 줄여야 합니다.

그래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 책임 투자, 은행 이윤의 지역 재투자, 사회적 기업 등 착한 기업 만들기 프로젝트는 한계가 뚜렷합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기업은 하나의 이윤기계인데, 그 속성상 사회 책임 투자조차 직간접적이거나 장단기적으로 이윤을 고려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복지 투자는 중장기 시야에서 기업 이미지 마케팅이 가장 큰 목적입니다.

시중은행들의 막대한 수익과 경영자 고임금이 문제가 되자, 2006년경부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은행들이 강조한다거나[각주:8], 아들 문제로 폭력 사건을 일으킨 김승연의 한화그룹이 기업의 사회적 책임 활동을 늘린 것이 대표 사례입니다.

가장 위선적인 것은 삼성이 또 하나의 가족이니 뭐니 하는 것이겠죠. 이들은 일정액의 사회적 기부를 통해 법인세 감면 효과도 노립니다.

요즘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도 마찬가지인데, 한국의 사회적 기업은 대부분 국가 보조 없이는 운영이 안 됩니다. 이윤을 못 남기기 때문입니다. 사회적 기업에서 일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고된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립니다. 경쟁력 부족은 틈새시장과 국가보조, 개인 기부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사회적 기업이 이명박 같은 친(나쁜)기업 정부에게 의존하려는 이유[각주:9]인데, 이들이 스스로 이윤을 내서 독립적으로 생존하려면 지금보다 더 비용을 절감하는 경영, 즉 이윤 확보를 가장 우선하는 경영으로 발전해야 합니다.

또 하나는 사회적기업의 업무 영역과 관계있습니다. 사회적기업은 대체로 업무 자체가 복지 대행인 경우가 많습니다. 행복도시락 등이요. 그런데, 이런 복지는 조세를 통해 국가복지로 해야 합니다.

국가복지를 민영화하는 것은 모든 것을 시장에 맡기자, 복지를 탈정치화하자는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이기도 합니다. 관료주의와 시장 효율성을 대립시키는 방식의 논리인데요, 본질은 복지비 부담을 누가 질 것이냐 하는 겁니다. 

결국 좋은 의도가 나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어느 시점에서는 사회적기업과 국가복지와 충돌할 수도 있다는 뜻인데요, 왜냐면 해당 분야에서 국가복지를 강화하면 사회적기업의 영역은 줄어들기 때문입니다.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사회적 기업도 경영자본이 필요한 점에서 다른 기업과 다르지 않다. 이윤 추구를 억제하려면 자선에 의존해야 하는데, 자선에 의존하는 것은 스스로 ‘기업’이라고 부르는 것과 너무 동떨어진 행동이다. 국가 보조와 개인 기부에 의존하는 것은 자생력 있는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스스로 내보이는 일이다.



7.
그런데, 이 문제들은 비영리(NPO[각주:10]) 은행이 있다면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째, 자구책은 될지언정 사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재원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둘째, 비영리 은행도 돈은 갚아야 합니다. 자급자족 공동체가 아니라면 사회적 기업은 비영리 은행의 대출을 받아도 앞서 그 돈을 갚으려면 앞서 지적한 경쟁=이윤 창출 압력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셋째, 결국 받은 돈으로 해야 할 일은 시장에 나가 돈을 버는 일입니다. 구조적으로 시장 경쟁은 모든 참가자에게 성공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시장이 지배하는 구조와 대결하지 않으면  뭔가 다들 부실한 대안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비영리 은행이 기여할 수 있는 건 소생산자(농민)들이 자급자족 공동체를 꾸리는 경우 정도입니다. 앞서 지적했듯이 이는 사회의 총체적 거부는 될지언정, 총체적 변혁 전략은 아닌데,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온존한다는 점에서 체제 거부 자체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경우, 자급자족 공동체조차 필수품을 구하려고 자신들의 농산물을 팔아야 합니다. 물론 유기 농산물인데, 이렇게 되면 결국 이들도 시장을 통해 체제의 다른 생산자들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이 공동체는 자신의 삶은 바꾸지만, 사회 구조는 단 하나도 바꾸질 못합니다.

8.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막강한 소수의 기업들은 막대한 재화와 서비스의 생산과 배분을 결정하지만, 그 결정은 무정부적 시장에서 혈투와 같은 경쟁의 시험대를 통과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어떤 기업도 나쁜 기업이 돼야 한다는 압력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경쟁은 주기적인 과잉생산 위기를 낳습니다.

국가는 노동자들의 세금으로 기업들을 지원하고, 부동산 투기 거품을 부양하며, 이런 기업들이 경영에 실패해 노동자를 짜를 때면 경찰을 보내 저항하는 노동자들을 때려 잡습니다.

그래서 나쁜 기업을 없애려면 국가권력에 도전하고, 자본주의 경제 질서를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소비 투표가 아니라 기업들을 민중적 민주적 계획 아래 종속시켜 민주적으로 생산을 결정해야 합니다.

□ 참고도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알마, 2007)
《굿머니 ― 착한 돈은 세계를 어떻게 바꾸는가》(착한책가게, 2010)
《천규석의 윤리적 소비》(실천문학사, 2010)
《나쁜 기업》(프로메테우스, 2008)

□ 참고기사

※ 지역화폐는 다루지 않았는데, 한국에선 아직까지 영향력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1. 이명박 사돈 기업으로 위험한 작업 환경으로 노동자들이 죽어나가는 데도 처벌받지 않는 죽음의 공장으로 불린다. [본문으로]
  2. 기업의 절대 규모가 커지는 것. [본문으로]
  3. 경쟁하는 기업의 수가 줄어드는 것. 즉 집적과 집중이란 시장 경쟁이 갈수록 덩치가 커지는 소수의 기업들의 지배로 바뀌는 현상. [본문으로]
  4. 옥스팜은 공정무역이 과잉생산이라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며, 공정가격으로 5백만 자루(약 1억 달러)를 사서 폐기 처분하자고 제안합니다. 이것이 공정무역운동의 초라한 현실입니다. [본문으로]
  5. 대체로 축적된 자본의 규모와 이에 따른 국가에 대한 영향력이 이 힘의 크기를 결정한다. [본문으로]
  6. 사실, SSM이 들어오기 전까지 동네 슈퍼들도 그 동네 수준에서는 경쟁을 통한 집적과 집중 과정을 거치곤 했습니다. [본문으로]
  7. 이 구매 과정이 아까 말한 소득의 배분 과정과 동일합니다. [본문으로]
  8. 서민 대상 마이크로크레딧 사업을 이명박이 박원순 변호사에게서 빼앗아 갔다고 문제가 됐었는데, 이 사업을 애초에 후원한 하나은행은 비정규직 차별이 가장 심한 은행 가운데 하나입니다. [본문으로]
  9. 사회적 기업은 법인세 추가 감면 등 세제 지원과 국고 보조를 바라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10. Non Profit Organigation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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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가 동네 시장 품목까지 판매하면 되냐는 비판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이 “이념적 소비를 하느냐”고 조소하면서 “윤리적 소비” 논쟁이 불거졌다.(관련 글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조국 교수는 ‘윤리적[착한] 소비’ 운동으로 오만한 대기업에 본때를 보여 주자고 호소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또는 ‘착한 소비’) 운동가들의 목표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추구나 개인의 자기 만족만은 아니다. 이들은 공정무역, NPO(비영리은행),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기업, 생협, 지역화폐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들은 ‘나쁜’ 대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벌이는 불공정 거래와 착취ㆍ환경파괴 등에 분노한다. 이들은 기업 이윤보다 인권과 환경,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초콜릿 회사를 비난할 때, 그것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등의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아동들이 다국적 식품회사를 위해 노예노동을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들이 폐지 재활용 소비를 권장할 때, 그것은 다국적 기업이 브라질이나 칠레에서 막대한 삼림을 파괴해 지구 기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막으려는 호소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분노에 공감한다. 이랜드 등 ‘나쁜’ 기업의 노조 탄압에 맞선 보이코트(불매운동)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적극 지지하고 동참한 바 있다.

△ 삼성 불매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은 한국경제에서 핵심적인 시장들이다. 삼성과 그 아이들=나쁜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시장들이라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인 시장에서 불매운동하기 참 힘들다.


그럼에도 이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차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소비 투표”

이들은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결국 상품 판매에 성공해야 이윤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윤리적 소비”가 기업에 진정한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라는 말로 요약된다. (투표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경제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소비 투표”로 시장을 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방법의 차이는 대안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들이 ‘나쁜’ 기업을 길들여 만들려는 세상은 ‘윤리적(착한)’ 자본주의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점진적 목표를 이루는 데서조차 몇 가지 난점을 낳는다. 

첫째, 현실에선 ‘나쁜’ 대기업들이 필수적인 소비 시장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무노조 삼성의 가전 제품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는 것을 누구도 ‘윤리적 소비’라 부를 수 없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공정무역 등 윤리적 소비 품목이 대체로 커피, 초콜릿 등 기호품[각주:1]에 한정돼 있는 현실이 이것의 방증이다.(각주 꼭 보세요)

둘째, 이윤 그 자체가 목적인 기업들은 ‘윤리적 소비 시장’도 창출해 낸다. 창업자[각주:2]가 극우 시오니스트고 아프리카 커피농장 착취로 대표적인 불매 대상 기업이던 스타벅스가 겨우 전체 구매량에서 5퍼센트만 공정무역 커피를 쓰고도 ‘공정기업’으로 불린다!

△ 스타벅스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다. 윤리적 소비로 점진적 기업 변화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스타벅스의 조그만 변화는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를 후원한다는 의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이콧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억압에 맞서 이스라엘과 하는 모든 교역에 반대하는 국제 캠페인이다.


셋째, 윤리적 소비를 하려면 대체로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세계 정용진을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마트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김규항의 말처럼 “생존 자체가 숙제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착한 소비’를 촉구받는 건 공정한 일일까?”[각주:3]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소비 시장에서 누구나 품목을 선택할 순 있지만(윤리적 소비를 하려 할 수 있지만)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할 지 결정하는 기업주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자원을 배분하고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기호는 부분적 고려 사항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은 시장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쥐어짜고 산업안전이나 환경보호 등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나쁜’ 기업들은 이 ‘경쟁적 축적’ 과정[각주:4]의 필연적 산물이다.

윤리적 소비 운동가들이 대체로 대안으로 삼는 소생산자 경제도 이 시장 경쟁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도로 독점체들의 과점 시장으로 바뀔 것이다. 사실 소생산자나 소상인이, 또는 그 제품이 특별히 더 윤리적이라고 할 이론적 근거는 없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소비자는 바로 기업들이기도 하다. 기업의 투자가 수요를 창출한다. 원료(구입과 운송), 토지(또는 사무용빌딩, 물류창고 등의 부지 매입과 건축), 노동력 등을 구매하는 데 쓰는 비용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노동소득(임금)을 모두 합쳐도 총투자와 맞먹을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재에 대한 ‘소비 투표’가 기업권력을 통제하기에는 표가 애초부터 너무 적다. 

눈을 돌려 소비 시장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 거대 기업들의 이윤 활동은 전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활동에 의존한다. 이들의 노동은 자신의 임금몫 말고도 막대한 부를 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로서보다 생산자로서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 현대자동차 소비자 수백만 명을 모으는 것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4만 명이 파업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다[각주:5].

따라서 진정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소비’ 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이고, 그 주역은 원자화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이것만이 ‘나쁜’ 기업들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를 민주적 계획이 기초가 되는 사회로 바꿀 잠재력을 가진다. 

진심으로 기업 횡포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착한’ 소비에 머물지 말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이 투쟁에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글은 <레프트21> 42호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보충한 것이다.(그래서 간결한 속도감은 좀 줄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 운동은 세계무역부터 동네 소비까지 방대한 영역을 다루므로 짧은 칼럼에서 완벽히 다룰 순 없다. 그 점에서 이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논평할 계획이다. 우선, 이 기사의 부연 설명 글을 주말쯤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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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호품 공정무역은 또다른 중요한 논점을 낳는다. 제3세계 국가의 기호품 수출은 해당 지역 농업을 거대 농장의 단일 경작으로 바꿔 버렸고, 그것은 해당 지역의 식량 위기를 낳았다. 이런 식의 농업 구조 변화 때문에 커피 등 기호품 생산이 과잉돼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더 악화됐다. 이 플랜테이션 노예노동은 제국주의 수탈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기호품 공정무역은 이런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가격만 좀더 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잘못된 농업 구조를 영속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본문으로]
  2.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1950년대 뉴욕 빈민가 출신으로 스타벅스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자수성가 신화의 스타 CEO다. [본문으로]
  3. 김규항의 칼럼에서 이 구절이 가장 날카로운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4. 즉 자본주의 경쟁에서 소비재 판매는 부분적 본질이라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은 경쟁적 축적이다. 그래서 내부 시장이 금지됐던 소련 등에서도 자본주의 경쟁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5. 삼성을 두고 아직 이런 예시를 들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삼성 안팎에서 싸우는 모든 분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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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사실상의 절독 선언을 했다[각주:1]. 진보정당과 개혁 언론의 충돌은 흔한 일이 아니다.

발단은 <경향신문> 10월 1일자 사설이다. 이 사설은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 이를 비판하지 않는 민주노동당도 함께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그 직전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3대 세습을 비판할 수 없다고 논평한 바 있다.

북한은 자본주의 계급사회

북한 지배계급은 수십 년 만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를 열어[각주:2] 김정일의 3남으로 알려진 김정은을 초고속 승진시켰다. 김정은은 북한군의 대장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 경력도 없고 서른도 안 된 인물이 사실상 최고 권력자의 지위 승계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주의는 원리상 단지 몇 년에 한 번 대통령을 뽑는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민주적이다. 정치는 경제적 결정을 다루는 과정이 될 것이고,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소비할지는 자유로운 대중들이 협력적으로 수요를 조사하고 토론하며 투표를 거쳐 결정할 것이다.

이런 권리들이 설사 외부적 요인으로 일시적으로 제약되더라도, 말그대로 그 제약이 일시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보장할 최소한의 기초적 권력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부와 권력이 애초에 불평등하게 배분돼 고착화된 사회다. 최고 지도자 지위의 세습은 두드러진 한 사례일 뿐이다.

명백한 계급사회인 것이다. 어떤 계급사회일까? 북한 경제는 국경 밖 자본이나 군사력과 벌이는 경쟁이 경제의 우선순위와 형태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원리상 자본주의다. 폐쇄적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체제는 핵과 인공위성, 중공업 같은 경쟁과 자본 축적의 필요가 인민의 배고픔보다 우선시된다.

이들 국가자본주의 경제는 한때 유행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그래서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남한보다 더 빨리 성장했고,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한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체제도 서방의 시장자본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각주:3] 자본주의에 생래적인 주기적 경제위기를 겪어 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취약해진 북한 경제의 경쟁력은 옛 소련의 붕괴 후 역내 시장마저 잃어버리면서 더욱 약화됐다. 대홍수로 식량 기근까지 겹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경제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볼 때, 김정은 권력 승계는 북한 지배계급의 호언장담과 달리 북한 체제가  지속적인 위기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한 지배계급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권위, 일당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그나마 경제와 생활수준이 성장하던 시기에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후광 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이 김정일이 주석 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유훈 통치’를 한 배경인데, 그 방식을 유지하려니 검증된 지도력이 아니라 그 혈통과 군부의 지지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선군(先軍)정치는 이번에도 강조됐다. 물리적 억압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번 당 대표자회는 이 때문에 조선노동당 규약도 손 봐야 했는데, 공산주의 등 명목상
용어 대신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을 공식화하고, 그에 대한 '계승성'을 강조”했고 “선군(先軍)혁명이 추가됐다.[각주:4]

주체 혁명은 이제 권력세습과 군부를 앞세운 선군정치를 뜻하는 것이 됐다.



북한 비난하는 남한 지배자들의 위선

이것을 한국의 우파들은 김씨 왕조의 권력 세습이라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매우 위선적인 상징 조작이다. 

북한을 봉건왕조로 묘사하는 것은 남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북한 ‘사회주의’(진실은 가짜 사회주의)보다 근본에서 더 우월한 체제라는 것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개인 왕조 체제인 것도 아니다. 북한은 관료적 자본가들의 집단 지배체제다[각주:5]

북한 모델이 진보적 대안 사회가 결코 될 수 없지만, 우파의 북한 비판과 선을 그어야 하는 이유다. 이 점을 혼동한 많은 좌파들이 냉전시대에 반공주의로 전향했다[각주:6]

그러나 권력과 부의 세습이란 점에서 남북이 다르지 않다. 대표 사례인 <조선일보>와 삼성재벌의 세습은 그것이 일개 기업이나 돈 더미 정도가 아니라 한국 사회 주류 중의 주류로서 보유한 권력까지 세습된다[각주:7]는 점에서 북한과 다르지 않다.

몇 년에 한 번 투표권이 있으며, 그나마 뽑힌 뒤 별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데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임기 채우기만 기다려야 하는 자유민주주의도 허술하고 비민주적이긴 마찬가지다.

남한도 진정한 권력은 세습되고 있다. 진정한 통일과 남북 닮아가기는 남북 고위층에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두 사회가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라는 공통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쪽 지배자들이 서로 상대 존재를 핑계로 내부 불만을 잠재워온 적대적 공생관계의 역사는 바로 지배계급이라는 공통적 속성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 주류의 비판은 반박꺼리일 뿐 진지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각주:8]그렇다면, 진보진영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 문제인데, 이 점에선 일단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논평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진보의 대안 될 수 없어

진보와 좌파의 보편적 기준에 북한의 권력 승계(외교적으로 좋게 표현하면)는 당연한 비판 대상이다. 무엇보다 그런 행위를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한다면 지나칠 수 없다. 좌파의 신용이 걸린 문제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다수 대중의 진정한 이익과 의견 참여가 반영되는 체제가 진보진영에서 대강 합의 가능한 대안적 민주주의의 모습이라면, 북한의 권력 체제가 이를 봉쇄하고 억압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논평에서 좀더 세련되게 내재적 접근론과 남복관계 고려론을 펴는데, 여기에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 우선 오직 북한 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만 내재적 접근론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북한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논평은 사실상 북한 체제의 비진보성에 눈 감겠다는 선언이다. 권력과 부의
세습이나 비민주성을 비판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안에서 체제 비판을 할 때 일관성의 문제가 생긴다. 삼성과 <조선일보>의 세습이 좋은 사례다. 한편, 국제적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할 때도 일관성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에게도 내재적 접근법을 써야 하나.

이정희 대표[각주:9]는 북한 최고 지도자를 비판했을 때 늘 대북 관계가 악화됐다며 이 논평을 정당화한다[각주:10]. 이 대표가 이 나라나 미국의 관료와 우익들이 평소에는 적대시하다가 북한 정권과 우호 관계가 필요할 때는 찬사를 늘어놓는 이율배반을 지적하는 것은 옳다[각주:11].

하지만 한반도에서 각 국의 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 요인은 미국의 패권전략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한반도 주변국들의 관계지, 남한 정당들의 태도가 아니다. 1994년 정상회담 추진에서 급작스런 전쟁위기로, 1998년 햇볕 정책 아래서 서해교전을, 2000년 냉각 국면에서 정상회담으로 등 이런 변화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주요 변수였고 남한 정권은 종속변수였다. 

또한 미국의 전쟁 협박 같은 게 아니라 진보적 비판을 이유로 북한 정권이 거칠게 나온다면 그것은 북한 정권이 나쁜 거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이명박이나 삼성 이건희 일가를 깐다고 그들이 권력을 동원해 억압하면, 그게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지 우리 탓인가.

미국 제국주의나 한국의 냉전 우익의 색깔 공세와 진보진영의 북한 비판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매카시즘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진보도 북한 체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쟁점이 된 <경향신문> 사설도 논점을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사설에서 4분의 3 정도는 북한 비판과 북한 체제를 비판 못하는 민주노동당 논평의 약점을 비판하는 데 할애돼 있다. 여기까진 사실 문제 없다.  

그러나 사설은 글 말미에서 민주노동당이 “북한 체제를 비호하고, 나아가 상부로 간주한다는 비판에 부딪혀 분당이라는 아픔까지 겪은 바 있다”며 ‘종북’ 쟁점을 꺼낸 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북한 비판을 거부하는 것은 “냉전적 사고의 잔재”라고 말한다. 

냉전적 사고를 보통 남(南) 아니면 북(北)의 편에 서서 상대편을 죽이려는 사고 방식이라고 본다면, 경향의 사설이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냉전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북한을 ‘상부로 간주하며’ 남의 체제와 대결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상 ‘민노당 종북론’인 것이다[각주:12]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입장을 바꿔달라는 경향의 호소는 마치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스스로 종북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것처럼 돼 버렸다[각주:13]. 이정희 대표는 분명하게 이 점을 이유로 내세워 자신은 말하지 않을 권리를 사용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반응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경향 사설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모든 비판을 싸잡아 반공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과도한 면(역편향)이 있다고 본다. 국가 탄압으로 촉발된 논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아마 예상 못한 3대 세습이 자주파 내부에서도 혼란을 일으킨 게 과도한 대응의 주관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유감스런 경향의 종북 공격

사실, 유럽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옛 소련의 정치적 국경수비대 구실을 한 역사가 있다. 남한의 자주파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의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옛 공산당들이 각국 진보운동의 자체 구조와 문화,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의 자주파도 남한 진보적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정치적으로 생존 가능하므로 친북 성향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남한 정치의 맥락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한의 자주파가 한미fta에 반대하고,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해 대중행동 건설에 참여했을 때, 그것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
(종북주의)이었나. 그렇다면, 비친북 좌파나 엔지오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행동에 부화뇌동한 것인가.

이런 논리적 귀결 때문에 자주파를 일방적으로 종북주의로 내모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하는 것이다[각주:14]. 종북이란 용어가 뉴라이트에게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북한 정권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문제라면 누구나 한마디 거들 수 있고, 비판하기 뭣 하면 입을 다물면 된다[각주:15]. 진보진영 안에서 외교적 고려가 우선이냐, 가치가 우선이냐 등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북한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정말 대안 사회의 자격이 있는지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종북론을 들먹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진보적 관점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자주파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레프트21>은 종북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북한 3대 세습과 자주파의 무비판적 태도를 비판했다.(☞ 관련기사 ①이것이 사회주의인가 / ②당대표자회의 정치적 배경 / 다음 호에도 추가 기사가 실릴 예정이다[각주:16])

사실, 민주노동당 안의 자주파 지도부가 3대 세습을 찬양하는지, 혼란스러워 하는지, 비판하는지 개개인들의 정확한 속내는 아무도 모른다. 민주노동당 당원 전체는커녕 범엔엘 경향의 내부 의견 분포도 정확히는 모른다.[각주:17]

그런데 <경향신문>처럼 당 전체를 싸잡아 “종북이냐, 아니냐” 묻고 증명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방식은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할 수도 있어 위험할 수 있다.[각주:18] 

내가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북한 체제와 그 옹호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북한 체제 비판을 무조건 매카시즘으로 몰아가는 자주파 일부의 대응 방식을 싫어하면서도, 경향발 종북 소동이 찜찜한 이유다.

남한에서 북한 비판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어떤 비판이냐다. 진짜 쟁점은 북한이 사회주의냐, 아니라면 무엇이냐, 진보의 대안 사회는 무엇이냐가 돼야 한다.




 

  1.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은 경향신문에 항의문을 보내고 보도를 시정하지 않으면 절독 운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이 논조를 바꿀리 없으니 울산시당은 이미 절독을 선언함 셈이다. 결과는 우려스럽다. [본문으로]
  2. 이번 3차 당대표자회는 1966녀 제2차 회의 이후 44년 만에 처음 열리는 회의다. [본문으로]
  3. 2차대전 시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서방까지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국가자본주의 형태가 큰 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1930년대 대공황이 자유시장이나 미약한 국가개입에 맡겨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드러났고, 세계대전으로 주요 국가들이 국가통제 전시경제로 가면서 실업과 과잉생산이 해서된 것 때문에 유행하게 됐다. 이 체제의 선구자는 1930년대 옛 소련과, 나찌 독일, 일본이었다. [본문으로]
  4. 통일뉴스 9월 29일치 기사 인용. ☞ 개정된 北노동당 규약 서문, '공산주의' 문구 빠져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61 [본문으로]
  5. 이 말은 김정일이 그랬듯이, 김정은도 북한 지배계급 핵심 집단에게서 최고지도자로서 검증과 인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6. 심지어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마저 그랬다. 이들 일부는 네오콘이 되기도 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교훈이다. [본문으로]
  7. 김정은은 아마 세습 선배인 <조선일보> 사주 일가를 보면 “방가방가” 하고 인사할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는 가계도 상으론 무려 4대째 세습이다. 2대 방우영/일영 형제는 사실 방응모의 양손자다. 김1성 가문이 3대 세습에 성공하려면 ‘남조선’의 ‘3성’ 가문을 보고 배워야 한다. [본문으로]
  8. 그들이 친미 독재 국가인 이집트나 싱가포르의 정권 세습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왕정, 후세인 시절 이라크, 중국 등을 이런 문제로 비난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심지어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대권을 강탈하는 걸 전 세계인이 지켜봤는데, 뭐라 한마디 했던가. 한국 주류 우익들의 북한 비난은 남한에서 좌파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매우 의도적인 위선이다. [본문으로]
  9. 이정희 대표가 다음 블로그에 쓴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 마디만 해 보라고?- 경향신문 9월31일자 사설에 대해” 라는 글이 논쟁이 되는데, 찬반을 떠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9월은 31일이 없다. 해당 사설은 10월 1일치다. (☞ http://blog.daum.net/jhleeco/7701325) [본문으로]
  10. 물론 이런 외교적 이유로 미국이나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는 가치 판단을 담은 논평을 내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이정희 대표의 견해는 자주파적이라기보다는 햇볕정책의 자장 안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본문으로]
  11. 예를 들어,동아일보는 주석궁에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보도한 기사를 황금본으로 만들어 가져갔다. [본문으로]
  12. 암튼, 친북과 종북 두 용어는 쓰는 쪽에서나 받아들이는 쪽에서나 그 맥락이 다르다. [본문으로]
  13. 민주노동당의 자주파 지도부도 이 점을 민감하게 느껴 강하게 반발하는 듯하다. 경향신문의 후속 기사 제목도 자극적이다. [본문으로]
  14. 이 자기얼굴 침뱉기를 피하려면 자주파를 진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면 된다. 종북론이나 반공주의를 수용하는 진보진영 일부가 자주파를 적대시하는 종파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런 논리의 귀결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15. 대한민국에서 북한 욕하기는 쉽다. 내가 진중권을 다룬 글에서 지적했듯 지배적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북한 체제를 명백히 비판하고 반대하는 좌파까지 처벌하는 것을 보면,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체제를 어떻게 비판하는가다. 북한을 비판할 때도 남한보다 못한 체제로 비판하는 것과 남한처럼 권력과 부가 독점 세습되는 똑같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본문으로]
  16. 박노자 교수도 10월 1일자 레디앙 칼럼을 통해 북한‘만’ 악마화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 후보도 맨처음 북한만 비판하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세습 문제에서 남북 모두 비정상국가라는 논리로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 물론, 그럼 정상국가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17. 내부에 있을지도 모를 혼란과 외부적 부담을 모두 고려해 북한 체제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8. 아니나다를까 후속 보도에서 경향은 북한 세습 비판을 이유로 민노당이 반발한다고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종북 낙인찍기에 반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절독 선언 같은 건 완전 에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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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 피자 출시에 항의하는 네티즌에게 신세계 부사장 정용진이 트위터로 한 말이 사화적 논쟁으로 번졌다. 그는 이 네티즌에게 “본인은 소비를 실질적으로 하시나요 이념적으로 하시나요?” 하고 물었다.

대량 구매로 대량 판매하는 대기업 할인 마트는 이제 소비 시장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제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월마트 등 다국적 유통기업들의산업 지배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중국의 저가 수출 성장은 이런 월마트 같은 선진국 대형유통자본의 성장과 공생관계다. 한국에서 대형유통업체들도 모두 굴지의 대재벌 계열사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듣는 이를 참 곤란하게 하는 질문인데, 대중의 반발은 바로 ‘이념’이란 단어에 있다. 정용진의 소비에 관한 생각도 공인된 시장주의 이념에 바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부유층도 이념적 소비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용진이 말한 실질적 소비는 기업 윤리라는 게 현실에 없다는 솔직한 토로라는 것이다.

우선, 그는 둘 가운데 어디 물건이 더 팔릴지는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더 싼 이마트 피자를 실질로 구분했다.
그러니까, 정용진은 주류 경제학이라는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념’에서 가르친 그대로 사람들을 가격 신호에 따라 소비를 결정하는 ‘합리적 개인’들로 본 것이다. 

물론, 평범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물가가 낮은 것이 좋다. 요즘 배추 파동처럼 식료품이나 생필품의 가격이 오른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소득은 앉은자리에서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단순히 가격 신호에 자동 반응하는 기계로 취급하는 주류경제학의 천박한 이해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각주:1].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와 필요, 이해관계를 습득하고 형성한다. 당연히 소비에도 이런 점이 반영된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대량해고 때 이랜드 전 계열사 불매운동이 전국에서 비교적 호응을 얻은 것도 그런 사례다. 이 투쟁의 외침에 공명한 많은 이들이 가까운 홈에버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내가 일하던 노조는 이랜드노조 관계 없는 한국노총 소속 노조였는데도 매년 6회나 조합원 행사를 치르던 속초 렉싱턴호텔을 피해 더 불편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공정무역 제품 소비가 늘어난 것도 작지만 분명한 사례다.

사실 정용진이 레드컴플렉스 가득 담아 이념적 소비라 표현한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윤리=가치 라는 것 자체가 개인마다 집단마다 다르게 형성되므로 그 형태와 목표도 다양한다. 예를 들어, 국산품 애용 운동 같은 ‘이념적 소비’ 운동은 결코 좌파적이지 않다. 일부러 미국산 쇠고기를 사 먹겠다는 정신나간 우익들이 몇 있었는데...

한편, 정용진이 속한 계급[각주:2]의 개인 소비는 실질적 소비일까. 부유층의 명품 소비를 보자. 누구나 알다시피 명품은 비싸야 명품이다. 아무나 살 수 없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는 바로 그 가치를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품으로 부러움은 사겠지만, 그것만으로 무엇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을리도 없고, 자동으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용 측면에서 명품은 완전한 낭비적 소비다.

그런데 정용진의 신세계그룹 스스로 고가 명품 마케팅을 하는 신세계백화점[각주:3]과 서민용 이마트를 분리 운영하고 있다. 부유층의 이런 소비는 이념적인가, 아닌가.

내가 볼 땐. 진정으로 이념적 소비는 바로 이것이다. 명품은 계급 구분을 명확히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명품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야 바로 앞에 서서도 구분 못 하겠지만, 그들은 간단한 악세사리만으로 상대의 계급 지위를 알아채는 ‘혜안’을 갖게 되는 것이다[각주:4].

아, 피할 수 없는 “이념적 소비”의 덫이여. ‘이것이 다 좌파들의 음모다!’


그렇다면 정용진이 4가지가 없어 완전히 협박성 구라를 친 걸까.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정용진은 무의식 중에 신세계 자본의 인격화로서 자본의 이해를 솔직히 고백했을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2008년 수입 재개 후 미국산 쇠고기는 소매 판매가 계속 부진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값싼 쇠고기 드립을 쳤는데도 그렇다. 서민들이 괘씸하게 좌파의 광우병 소동에 속아서 이념적 소비를 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막상 수입을 결정한 당사자들은 비싼 한우를 먹는다는 것이다. 청와대, 경찰청 고위직식당, 국회 식당, 조선일보 식당 등. 그러면 이들의 쇠고기 소비는 이념적 소비인가, 아닌가.  참 난감한 일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와 유통·판매 자본)는 판매자기도 하지만, 생산자본에게는 자신도 구매자=소비자라는 것이다[각주:5]. 기업의 처지에서 보면, 식품 안전이고, 공정 거래고, 지랄이고, 최대한 싸게 사서 시장 점유율을 높일 만큼의 수준에서 적당히 싸게 파는 것이 최고의 선이고 가치다.

그래서 이마트 같은 대기업 할인 마트들이 미국산 쇠고기도 팔고, 가끔 불량식품도 팔다 단속되기도 하며,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부려 먹고 쉽게 해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비자에 대한 고려 기준은 어느 수준의 판매 가격이 제일 많이 팔면서도 이윤을 늘릴 수 있냐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신세계 정용진이 트위터에서 한 말은 자기 가문이 소유한 신세계의 소비(구매) 원칙, 즉 신세계 자본의 화신(身)[각주:6]로서 자본의 목표를 말한 것 뿐이다. 특히 새로운 가치 생산 없이 가치의 이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는 유통자본에게는 구매비용의 감소(‘실질적 소비’)가 매우 강박적인 목표일 것이다.

종합하면, 정용진은 이 발언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속내 두 가지를 털어 놓은 셈인데, 하나는 자본의 노골적 목표이고, 하나는 지배계급의 레드컴플렉스다. 우리는 그가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를 이념적 소비라 바꿔 표현하는 걸 보면서 레드컴플렉스와 좌파에 대한 적의가 일부 몰상식한 이데올로그와 무식한 대중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최고 지배자들에게 뿌리깊은 사고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용진의 생각을 나름 해부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쟁점이 생기는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담론과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쟁점으로 조국·공병호·김규항 등의 논자들이 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기업과 시장의 자유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쟁점인 것은 정용진 말이 아무리 4가지 없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기업의 것이든 자본에게서 소비재를 구입해야 하는 현실, 소비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어딘가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문제는 곧이어 다뤄 보련다.

  1. 값싼 미국산 소고기 먹으라는 이명박도 이런 천박한 이해의 대표적 사례다. 공병호는 조국의 정용진 비판을 다루며 “친척 것도 싸야 산다”는 말로 조국을 비판했다. 사실, 주류경제학에서 이것은 공리다. 즉, 주류경제학으로는 정용진과 공병호의 논리를 비판하기 어렵다. [본문으로]
  2. 정용진의 이건희의 조카로, 이건희의 여동생인 신세계 회장 이명희의 외아들이다. 주류 중 주류인 것이다. 재벌 3세 치고는 사회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고현정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고현정은 이 왕귀족 가문에서 꽤나 박대를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역시 출신신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현정의 시누이들이 외국어로 대화하며 그녀를 따돌렸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한 소문이다. 소문의 시작이 하도 오래되서 출처는 기억도 안 난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얘기들이 지금도 사실처럼 떠도는 것은 사람들이 이 계급의 생활상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파는 물품과 가격, 인테리어가 완전히 다르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가보라. [본문으로]
  4. 가격 자체가 하층 계급의 접근성을 막는 도구다. 이들이 사는 주거지의 가격도 이런 구실을 한다. [본문으로]
  5. 제조업 대기업에게는 동맹과 경쟁을 오가는 관계겠지만, 이마트 정도 되면 더 약한 기업에게는 가장 무서운 소비자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대상의 정치·경제적 지위에 따라 강자·약자가 달라진다. 대형 유통 업체가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또는 시장 전체에서 나같은 저소득층 소비자는 판매자보다 약자다. [본문으로]
  6. 사전을 보면, 화신(化身)을 ‘어떤 추상적인 특질이 구체화 또는 유형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추상적인(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현실에서 실행하고 추구하는 인격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즉 임노동-자본의 관계에서 자본가는 자본의 화신으로 행동한다. 이를 거부하는 순간, 해당 개인 인격체는 임노동-자본 관계 또는 자본끼리 경쟁하는 시장 관계에서 더는 자본가로서 기능을 하기 어렵게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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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하게 우익을 조롱하고 비판해 인기를 얻어 온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 “앞으로 진보 같은 거 안 할 [것][각주:1]”이라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각주:2].

6ㆍ2 지방선거 후 진보신당 진로 논쟁에서 진중권은 민주대연합을 위해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를 옹호해 왔다.

그의 탈당은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심 전 대표 쪽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당 대표 출마를 접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진중권의 온건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한 근본 변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불신한다.

진중권은 이번 논쟁에서 진보신당의 위기 책임을 당내 좌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심상정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과 동떨어진 “이념적 깡패짓”이고, 진보정당의 정체성 논쟁은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진짜 참기름 구별하는 놀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덜 떨어진 사고방식”이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이런 방식의 좌파 속죄양 삼기를 “반공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진중권이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각주:3].

적대시

사실 급진좌파에 대한 진중권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비록 그가 속시원히 우익들을 공격한 덕분에 우익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중앙대, 한예종 등에서 해임되고 촛불집회 때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과도한 좌파 모욕 행위까지 인정할 순 없다.

그는 2004년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쥐자, 자주파를 비난하며 탈당했다. 그는 자주파를 거의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2008년 일심회 논쟁 때에는 <중앙일보>에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명분 [즉]… 북한이 … 인민의 낙원이라고 ‘헛소리할 자유’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기고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 관료와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이며 국가 탄압을 받는 자주파 활동가를 구별할 줄 몰랐다[각주:4].

자주파에 대한 혐오감으로 민주노동당 분당을 지지한 그는 진보신당 입당 후 당내 좌파인 ‘전진’ 그룹 등을 강경하게 비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각주:5].

진중권은 이런 급진좌파 혐오증을 ‘좌파도 상식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한다[각주:6].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에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진중권이 좌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식[각주:7]”은 때때로 지배계급의 흑색선전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한다.

냉전 우익이 만든 이 반공주의 ‘상식’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은 오늘날 진정한 위협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스탈린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는 국가체제로나 운동으로나 거의 소멸했지만(한반도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매우 취약해진 상태라서 좌우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부활의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급진좌파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관료적 억압과 반동성에 반대하며 그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주의 진영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똑같다고 취급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한 이 동일시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러시아혁명 자체가 독재였다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혁명 직후 이뤄진 정치·사회적 권리의 발전 폭과 제국주의 연합군의 반혁명 침략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한 동일시를 근거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지도(정치단체의 주도적 구실)와 대중의 자발성을 부당하게 대립시켰다.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는 전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발휘하려는 행위(지도) 자체가 대중 속에서 각 당파 사이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지도와 자발성은 원리상 대립되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8].

진중권이 대중의 자발성을 옹호하면서 “노마드적 대중”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각주:9] 맥락은 (급진적 자율주의라기보다)개혁주의의 급진좌파 혐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자발성 옹호는 지배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 나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외쳐 보세요. 돌 맞습니다” 하고 주장한다[각주:10]. 그런데 계급 착취가 여론조사로 확인될 일이던가!

그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아 보수화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 더는 실현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과 정치의식을 함께 높여 왔다. 오늘날 유럽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권리를 지키려고 파업을 하고 타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그의 주장도 피상적이다.

“상식”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산업 구조가 바뀜에 따라 노동계급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혁명’으로 발달한 인터넷 전산망은 통신시설을 만들고 설치ㆍ관리하는 2차 산업 발전에 의존하고, 인터넷 쇼핑은 배송 서비스라는 새로운 물질노동을 확산시켰다.

종합해 보면, 좌파를 적대시하는 진중권 정치의 핵심은 개혁주의에 있는 듯하다[각주:11]. 진중권 자신도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도 비판해 왔다.(그러나 노무현의 죽음 직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가장 먼저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중시하고 대중 투쟁을 경시한다. 불가능한 혁명 대신 체제 안 개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적 방식으로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 중심 전략은 결국 득표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존한다. 그가 유시민 지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서도 심상정을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정치 엘리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정치활동가, 즉 마르크스주의 등 급진좌파 정치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급진좌파가 온건좌파적 선거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성공회대 강연에서는 촛불항쟁이 이명박을 퇴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달랑 표 하나 던지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촛불항쟁 한복판에서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거나, 최근 신자유주의자인 한나라당 이한구를“여야를 통틀어 제 정신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각주:12]”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런 개혁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기사 원문 주소는http://www.left21.com/article/8626.
  1. 그렇다고 진중권이 진보 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본문으로]
  2. [추가] 최근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10월 9일 현재 탈당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9월 17일 트위터로 “탈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본문으로]
  3. 기본으로 김규항의 비판이 옳다고 본다. [본문으로]
  4. 흔히 냉전시대에 소련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 못한 체제로 보기 시작한 극좌파 출신, 개혁주의로 변신한 옛 스탈린주의자들, 그리고 냉전 체제를 지지하며 정치 생명을 되찾은 유럽 사회민주당 등이 반공주의를 적극 내세웠다. 진중권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친북 자주파를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급진 좌파 전반을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개혁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 상식에 도전하길 꺼리는 개혁주의의 습성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7. 상식은 누구나 그럴 법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보면 지배적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그람시는 그래서 상식과 양식을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식인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비상식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대체로 파편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지배적 사고방식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핏줄은 못 속인다든지, 전라도 놈은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 등 말이다. [본문으로]
  8. 그는 촛불항쟁 때 칼라TV에서 활동하며 지도가 아닌 중계 활동을 선보였는데, 칼라TV라는 매체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였고, 그의 중계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멘트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도 마찬가지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획득하려는 행위(지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진중권은 지식인이지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성향으로만 규정하기 매우 힘들다. 자기 논지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저것 유행하는 사조의 단어와 개념들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사실 김규항에게 지식 없이 지식인 행세한다고 비판하는 진중권이 이런 조야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물론 일관된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건 섣부르겠으나 이런 경험주의적 진술은 그가 대중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11. 진중권이 여러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김규항이 진중권의 정치를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본문으로]
  12. 이한구는 십 년 째 긴축 정책을 주장하는 거의 오리지날 신자유주의자다. 그의 주장이 가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가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을 비판하는 게 제 정신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소득이 줄고 서민 가계 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가계 파산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긴축을 못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자만을 위한 경기부양이라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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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가 침수 피해가 집중된 반지하 주택 공급을 억제하겠다고 합니다. 장기적으론 건축법을 고쳐 반지하 주택 공급을 불허하겠답니다.

트위터로 보니 항의가 많더군요. 아마도 하수관 등 배수시설 불량과 늑장 대응 등 정부의 책임을 엉뚱한 곳에 돌린다고 생각하는 듯합니다. 사실 배수시설이 엉망이라 물이 역류해서 벌어진 일인데, 주거 형태를 문제 삼는 게 생뚱맞기도 하죠. 

한편, 이명박은 어제 침수 가정 한 곳에서 “기왕 이렇게 된 거 편하게 생각하고”라고 말해서 또 엄청난 비난을 받았습니다. 하루라도 욕을 안 먹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 체질인가 봅니다.

이번 사건에서 드러난 문제점의 첫째는 단순한 행정 미숙이 아니라 배수 시설과 관리서비스에서 부자 동네와 서민 동네가 차별을 받는다는 겁니다. 그리고 사회기반시설 투자의 우선 순위가 사람들의 진정한 편의에 있지 않다는 겁니다. 

늘 서민에게만 반복되는 피해. 해결책은 무엇일까.



예를 들면, 강남구와 강서구의 21일 강수량은 같은 293밀리미터입니다. 그러나 강서구에선 7천 가구가 넘게 침수됐고, 강남구 피해 소식은 언론에서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나마 강남구에서도 고급 아파트 단지가 아닌 곳에서는 일부 물이 역류하는 사태가 있었다고 합니다. 

하수관, 펌프장 등 배수시설 전반에 관한 예산 등에 우선순위 차이가 있는 것이죠. 재개발이 되기 전 서울 금호동은 유명한 달동네였고, 제가 살던 외갓집은 그 산동네에서도 윗동네였으며 반지하도 아니었는데 폭우 때문에 집에 물이 찬 적이 있습니다. 집의 위치가 문제인 게 아닙니다.(배수가 안 된거죠)

제가 대학을 다니던 서울 이문동과 휘경동 일대는 상습 침수 지역이었는데, 서민 동네였습니다. 1998년엔가 새벽 호우로 여러 사람이 죽었는데, 반지하 주택인 사람들만 죽은 게 아니었습니다. 배수 시설이 엉망이라 중랑천이 범람하면 집 안(화장실, 싱크대 등)에서 물이 역류하니까 새벽녁에 폭우가 오면 1층 집에서도 자다가 죽는 일이 벌어진 거죠.

결국 반복되는 침수 피해를 참다 못한 주민들이 2001년 수해 후 1호선 전철 통행을 막는 등 격렬한 항의를 해 사건이 커지고 나서야 배수시설 전반이 개선·정비돼 상습 침수 피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투자의 우선순위를 바꿔야 하고, 지역별 차별적 시설 투자 관행을 시정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있습니다. 반지하 주택(과 여러 열악한 주거 형태들)이라는 주거 환경을 그대로 둘 것이냐 하는 겁니다. 그렇다고 오세훈 식으로 어설프게 하면 그나마 있는 집마저 잃을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반지하 주택이 좋아서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반지하 주택은 매우 비인간적인 주거 환경입니다. 지하인데다 햇볕도 잘 들지 않아 늘 습기에 차 있고, 집 안 공기도 탁합니다.(옷도 잘 안 마르죠) 도로보다 낮기 때문에 발코니 같은 여유 공간을 가질 수도 없죠. 오히려 타인의 시선 때문에 창문도 제대로 열지를 못합니다.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해로운 까닭입니다. 반지하에 자취하던 제 친구들도 늘 몸이 여기저기 안 좋았습니다. 여기에 상시적인 침수 위협은 화룡점정의 구실을 합니다[각주:1]. 이런 반지하 주택이 서울에만 35만 가구(서울시 주택의 10퍼센트)가 됩니다. 엄청난 땅값 상승의 이면에 가려진 비애입니다. 

반지하 주택 자체는 애초에 허가하면 안 되는 주거 형태입니다. 한국에서만 있다고 하는 이 비인간적 주거 형태는 최대한 좁은 공간에 최대한 많은 (가난한) 사람을 우겨 넣으려는 반서민 정책과 최대한 불로소득을 더 많이 만들어 내려는 가진 자들의 탐욕 . 그리고 집조차 사고파는 상품으로 만드는 자본주의 논리의 산물입니다. 구체적으론 주택 2백만 호 건설 공약을 지키려는 노태우 정부의 무리수였죠.

그래서 저는 단순히 반지하 근절 방침을 반대할 게 아니라, 오히려 반지하 문제를 거론하는 방식의 한계와 대책의 모순을 지적하면서 진정한 주거 환경(복지) 개선 대안을 쟁점으로 제기하는 것이 더 낫다고 봅니다. 인간적이고 안전하며 쾌적한 주거 환경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관점에서 말입니다. 

기본 관점에서 오세훈과 서울시 대책은 모순적이고 위선적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저지대의 반지하 주택이라는 '집의 위치'만 문제 삼습니다. 그것이 마치 우연인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그것은 반지하 아니면 웬만한 집을 구할 수 없는 ‘사람들’의 문제입니다[각주:2]

오세훈 대책이 제대로라면, 35만 가구 주거 복지의 획기적 개선 대책이 나와야 하죠. 그런데 내놓은 건 대대적이지도 구체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냥 반지하 공급 줄이고, 임대 주택 늘리겠다는 말뿐입니다. SH공사가 하는 시프트 전세도 말만 공공임대지 전셋값을 시세따라 한번에 5퍼센트씩 올려대는데 누가 서울시 대책을 믿겠습니까. 

결국 ‘계급’ 쟁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침수 피해는 천재가 아니라 인재이고, 인재의 핵심 쟁점은 자본주의 [주거] 상품화 논리와 사회·경제적 불평등입니다. 침수 피해는 ‘계급’이라는 잣대로 살펴 봐야 종합적으로 사건을 이해하고 올바른 대책을 요구할 수 있다고 봅니다. 

모든 주택지의 주거 환경 전반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야 하고, 안전하고 쾌적한 집에 부담 없이 살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사람들에게 제공돼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껏 해온 주택 정책을 봤을 때 오세훈의 반지하 주택 근절 정책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고 볼 순 없습니다. 서민 주거 지역의 환경 개선은 이번처럼 사건이 났을 때 반짝 계획을 내놓고는 예산이 없다며 질질 끌다가 또 피해 사고를 반복하는 일은 익숙한 광경입니다. 

정부와 부자들은 집을 소득을 올리는 자산으로 삼고, 투기 대상으로 만들었습니다. 기반시설의 투자가 동네마다 다른 것은 그것 자체가 주택의 가격에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주거 환경, 그들 사유재산의 가격이 우선순위를 결정한 것입니다. 

최근에는 1998년 분양가 규제 철폐 후 경기 부양 명목으로 부동산 거품을 조장했습니다. 부동산 가격이 근로소득보다 더 빨리 올라 집을 구하려는 모든 근로소득자들은 자신의 재산을 앉아서 강탈당하는 꼴이 됐습니다.

역대 정부와 마찬가지로 이명박 정부는 불평등의 상징이 된 부동산 거품을 역시 경기 부양이라는 명목으로 막대한 재정을 들여 떠받치고 있습니다. 집부자·땅부자들은 사유재산의 권리를 내세워 가난한 이들을 점점더 비인간적이고 열악한 주거 환경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반지하 주택을 없애려면, 계급 불평등을 없애야 합니다. 사람들이 더는 그런 집에 살지 않아도 안정적인 주거 생활을 할 수 있을 때, 반지하 주택은 만들 이유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려면, 정부 예산과 투자의 우선 순위를 사람들의 필요와 기본 의식주의 확보와 질 향상으로 돌리고, 주택을 상품화하는 자본주의 논리를 규제해야 합니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봤을 때 이런 조처 자체가 자본주의를 근본에서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사유재산과 상품화라는 자본주의의 고유한 논리 자체에 도전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한국과 비슷한 수준의 여러 나라들이 복지 등 정치적 필요 차원에서 토지공개념 등을 도입해 토지와 주택의 상품화를 규제합니다. 그래서 이런 투쟁에 이념적 덧칠을 하는 것은 정직하지 않은 짓입니다. 생존을 위한 요구가 좌파적이라면 주류 엘리트 우파는 가난한 이들의 생존을 싫어한다고 자백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사실 한국엔 부자 엘리트들의 의지는 빈약하지만 복지를 위한 재정은 넉넉합니다. (역대 정부 아래서) 단지 우선순위가 아니었을 뿐.

우리는 불평등을 줄이라고 요구해야 하고, 인간의 기본권을 상품으로 다루지 말라고 주장해야 합니다. 저들이 이 정당한 요구를 거부한다면 저들에게 권력을 쥐여주는 이 사회 구조 자체를 부셔 버려야 할 것입니다.

  1. 사실 이론적으론 배수시설이 완벽하다면 지하시설이라고 꼭 침수될 이유는 없습니다. [본문으로]
  2. 이런 본질을 외면하는 오세훈의 대책은 가난한 이들의 초라한 집마저 빼앗는 정책이 될 것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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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진보신당은 9월 5일 당대회에서 ‘선거평가 및 당 발전전략 수립을 위한 특별위원회’(당발특위)가 마련한 당 발전 전략()에서 새 진보정당 추진기구 조항을 삭제했습니다. 

당발특위 발전안(관련 기사 :  진보신당의 당 발전전략안 ― 진보신당의 모순을 보여주다)은 진보신당의 진로 ― 연합정치와 당 정체성 ― 를 두고 벌인 논쟁을 봉합하는 절충안이라고 평가절하돼 왔는데, 진보통합 추진기구 설치는 이런 발전안에서 몇 안 되는 구체적 실천 계획이었습니다. 

겉보기엔 문구상 질적인 차이가 없어 보이는데도 수정안 가결의 상징성이 큰 까닭입니다. 그래서 당 발전안 통과 후 연합정치 행보를 가속하려던 이른바 ‘통합파’의 입지가 당분간 축소될 것으로 보입니다[각주:1].
연합 지지파 안에서도 진보신당 상층부의 무원칙한 ‘연합정치’ 행보에 반감이 상당하다는 걸 보여줬기 때문이죠[각주:2].

그 결과, 심상정 전 대표는 대표 출마를 그뒤 고사하고, ‘독자파’ 출신 조승수 의원이 대표 선거에 단독 출마했습니다. 


2. 독자파와 통합파는 쟁점을 선명히 드러내는 명칭은 아닌데, 그 본질을 살피다 보면, 또 손쉽게 둘을 구분할 수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제 관점에서 보면, 통합파는 말그대로 통합정당을 추구하므로 진보신당 자체는 통합진보정당으로 용해되는 것이고, 독자파는 선거연합은 반대하지 않지만[각주:3], 진보신당을 유지하면서 연합을 하자는 것입니다. 결국, 진보신당의 유지 여부가 쟁점인 것이죠.

물론 통합파도 통합의 지분을 확보하려면 진보신당의 강화가 필요하다는 점, 독자파도 세력의 재구성을 해야 한다는 위기감이 있으므로 우선 당을 강화하자는 데에서는 사실 공통의 이해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 입장의 차이가 불구대천의 차이인지 사실 좀 의심스럽습니다. 다른 측면에서 바로 그런 당 강화에 걸린 양쪽의 필요 때문에, 논쟁 주제가 연합의 범위에서 진보신당의 존재 이유 즉 당의 정체성 문제로 바뀐 것이라 봅니다. 연합이 제기된 것은 이대로는 진보신당이 존폐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위기감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정체성 논쟁은 2년의 성공/실패 여부라는 평가 문제와 향후 진로 전망 문제를 모두 포함하는 쟁점이라는 겁니다. 

이렇게 보면, 논쟁 구도가 연합의 범위 문제로 시작해 당 정체성 문제로 간 것을 이해할 수 있고, 독자파의 핵심들이 민주노동당 선도탈당파인 점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연합의 범위 쟁점이 국민참여당·민주당에 머물지 않고 민주노동당 문제도 쟁점이 되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선도탈당파에게 재통합은 창당 실패를 인정하는 거니까요.

사실 이런 점들을 고려할 때, 진정한 차이는 진보신당 창당 기획을 포기할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 점에서 편의상 독자파와 통합파 용어를 그대로 쓰는 것도 그렇게 틀린 용어법은 아니겠다고 생각합니다.

3. 국민참여당은 노무현 정부 시절 청와대 비서진 중심의 실세 그룹들, 즉 유시민이나 천호선처럼 신자유주의 정책을 앞장서서 추진한 인물들이 주도하고 있고, 민주노동당은 최근 민주대연합 노선과 헌정회 지원과 인천 동구청장 사태 등으로 우경화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래서
통합파는 확실히 무원칙합니다. 그들은 진보신당의 위기를 선거공학에 바탕해 민주대연합에 가까운 통합 정당 노선으로 돌파하려 합니다.

국민참여당이나 민주당과 하는 통합에 반대하는 점에서 독자파가 더 올바른 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독자파가 사실 노동계급의 정치적 독립성 같은 애초 진보진영의 독자 정당 건설의 목표를 좌파적으로 되살리며 통합파를 비판하는 건 아닙니다[각주:4]. 그들도 마찬가지로 선거 논리에 기대고 있습니다.

첫째, 그들도 대부분 민주당을 포함하는 선거연합은 찬성합니다. 둘째, 진보 양 당의 재통합을 바라는 민주노총 조합원 등 진보 대중의 바람을 외면합니다. 셋째, 선거 기반이 거의 없는 사회당과 통합은 겉으로 보이는 이미지와 달리 사실 별 관심이 없습니다.(더 좌파적인 그룹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

그것은 독자파도 당 존립에 관한 위기감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다만, 통합파의 방식이 진보신당 주축 세력의 정치적 소멸을 낳을 수도 있다는 게 이들의 솔직한 심정일 것입니다.

‘도로 민주노동당’에 그토록 반감이 큰 것도 그것이 자신들의 분당/창당 기획의 실패를 인정하는 게 되는 것입니다. 실제로, 지난 2년간 자주파와 세력차가 더 벌어졌습니다. 제도 선거판에선 집권당 출신인 국민참여당의 세력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통합이든 연합이든 자기 기반이 확실해야 지분을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이 통합파의 아킬레스 건입니다. 통합파 리더들의 정치적(선거적) 상품성은 ‘진보정치’에 있기 때문에 진보신당이라는 기반을 버리고 개인적으로 통합 논의로 갈 순 없죠. 이 때문에 통합파가 당대회의 일시적 패배를 감수하고 독자파와 다시 동거에 들어간 것입니다.


4. 그렇다고 독자파에게 당장 실현가능한 뚜렷한 비전이나 기반이 있는 건 아닙니다. 조승수, 김정진, 한석호, 장석준 등 선도탈당파를 이뤘던 독자파들이 “주체의 재구성”을 이루자고 강하게 주장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통합파의 “세력의 재구성”에 맞서 독자파가 내놓은 “주체의 재구성”은 실패한 창당 기획의 반복에 불과합니다.

조승수 의원은 당 대표에 출마하면서 “재벌(=대자본)과 싸우는 당”이 되겠다고 했는데, 자본가 싸우는 당이 왜 노동자(계급 전체)당이 아니라 비정규직(계급 일부)당이어야 할까요.

장석준은 정규직(조직 노동운동의 주요 구성 집단)은 신자유주의에 포섭됐고, “20대, 여성 등의 비정규직”은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됐다고 말합니다. 배제된 사람들의 당이 되자는 거죠.

즉,
비정규직당” 노선은 노동계급 정당을 뜻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점에서 “비정규직당” 노선은 조직 노동운동과 거리두기라는 정치적 함의를 지닌 용어로 봐야 합니다.

독자파의 주요 인물들이 민주노동당 분당 전 정규직 노동운동의 정치·경제적 양보로 노동계급 복지를 늘리자는 사회연대전략 지지자들인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장석준은 최근 이른바 ‘비정규직당 노선’을 1960년대 유럽에서 유행했던 신좌파와 연관시키는 데, 당시 신좌파는 반스탈린주의나 환경 등 새로운 가치를 발굴하고 대변했으나 엘리트주의, 총체적 사회 분석의 결여, 종파주의 등으로 빠지기도 했습니다.


구 좌파와 비교해 가장 중요한 특징은 노동계급 기반과 유리되면서 총체적 사회변혁 전략을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막상 1968년 이후 세계적 반란 사태(흔히 68혁명이라 부르는)에서 주요한 구실을 할 수 없었습니다. 체제를 뒤흔든 건 그들이 일차원적 인간이 됐다고 무시한 노동계급의 집단적 저항이었습니다.

결국, 친노동 이미지는 유지하되 조직 노동자 운동과는 거리를 두겠다는 것이 “비정규직당” 노선의 실체인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창당 기획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이미 실패한 그 기획 말입니다[각주:5].



5. 장석준은 비정규직당 노선의 성공가능성을 386 유권자들의 가치 투표에서 찾습니다. 독자파도 마찬가지로 선거공학에 의존한다는 한 방증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저는 20대와 여성으로 상징하는 미조직 청년 집단이 매우 불균등하고 유동적인 집단인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진술이라 봅니다. 즉 수백만 명이나 되는 이 집단이 왜 자신들의 집단 투표가 아니라 386의 가치 투표에 의존해야 하는 걸까요.

이들이 신자유주의에서 배제됐다는 이유만으로 진보에 친화적일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신자유주의 경쟁 논리에 20대 청년층이 포섭돼 희망이 없다는 비관주의가 근거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구 좌파가 마르크스의 말을 좇아 노동계급에 기초해 계급 정치를 주장할 때, 그것은 단지 교조적으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계급’이라는 관계가 불가피하게 강요하는 것들, 즉 지배적 자본과 대립관계를 형성하고  스스로 작업장을 기초로 조직하게 되며 진보적 사회변화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는
객관적 조건들을 성찰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조건 때문에 계급 정치를 고수하는 것은 이들 말로 어느 정도 이념의 경직성을 지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경직성을 피하려 계급 의제를 버린다면  그것은 첫째 주관적 소망 때문에 객관적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며, 둘째, 안정적 진지가 없는 전략은 불안정하고 득표에 의존하는 선거정치로 후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결정적으로 기업과 사회를 운영하는 데 필수적인 그들의 노동은 이들에게 사회를 멈출 수 있고 사회를 스스로 운영할 수 있는 잠재력을 부여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문제에서 문제 해결 세력은 조직 노동운동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이야말로 사화 변혁의 핵심 주체 세력입니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문제 해결조차 열쇠는 정규직―비정규직 노동자연대에 있습니다. 장석준 등이 동희오토 투쟁을 강조하는데, 그 투쟁의 열쇠는 기아차(+현대차) 정규직 노조의 적극적인 연대 투쟁에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많은 나라에서 노동조합은 자본에 맞서는 매우 중요한 항구적 진지입니다[각주:6].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포기하는 반동을 선택하지 않는 한 노동조합을 와해시킬 순 없습니다.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혁명이냐 반동이냐 하는 선택의 상황이겠죠. 이때야말로 조직 노동계급의 저항이 결정적일 겁니다.

노동계급을 분할해 한쪽을 배타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이들을 분열시키고 내부 불신을 조장하는 것으로 우리 편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입니다. 20대 불안정 노동층 또는 진보·개혁 성향의 청년 대중을 조직하는 것이 꼭 조직 노동자운동과 거리두기에 바탕해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오히려 노동자들의 힘을 고무해 이 힘을 발휘하는 투쟁을 통해 청년들의 급진화를 이끌어내려는 전략이 (단기적으로는 힘들어 보여도) 장기적으로 더 효과적입니다. 이런 세력의 동원을 거부하는 건 자본주의의 근본적 대안을 만들겠다는 창당 목표와도 모순됩니다.

한편, 정규직 노동운동이 신자유주의자들에 포섭됐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도 정직하지도 효과적이지도 않습니다.

신자유주의 거품(부채) 호황에 정규직 노동자 개인들 일부가 관심을 보이고 하는 건 포섭의 결과가 아니라 노동소득이 자산 거품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벌어진 불가피한 선택으로 봐야 합니다.

한국에서도 주요 기간산업과 공공부문에 조직 노동운동이야말로 한국 지배자들에게 가장 위협적 존재입니다. 한국 자본가들이 노동운동에 한편에서 양보하면서도 한편에서 공격을 지속하는 것은 이들을 매우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국가운영과 경제(기업의 이윤활동)를 뒤흔들고 멈출 수 있는 유일한 세력입니다.

조돈문 교수는 2년 전 한국에서 가장 진보적인 집단이 민주노총 조합원 즉, 조직 노동자층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한 바 있습니다. 상시적으로 이명박의 신자유주의와 대결하는 조직된 집단이 바로 이들입니다[각주:7].

덧붙여, 신자유주의 노선이 2008년 위기 이후 그 신용을 잃고 각국 지배자들이 혼합 정책을 사용하는 상황에서 신자유주의 반대만으로는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기 힘들 거라는 점도 지적 대상입니다.

결국 조직 노동운동과 거리를 두며 유동적인 청년층에 기댄다는 것은 촛불항쟁 때와 같은 성장을 다시 한번 꿈꿔 보겠다는 것인데, 짧았던 황금시절의 추억은 다시 반복되지 않습니다.


6. 정치 지형 자체가 바뀌었습니다. 2007년 당시 이명박 당선 후 정치지형이 매우 우경화된 듯 보였고, 이런 보수화 흐름에 호응하지 않으면 2007 대선 72만 표에서 보듯 진보정당이 고사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컸습니다.

진보신당의 창당 기획은 기존 진보정당보다 우경화한 진보정당을 만들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는 미조직 청년층을 선거적 관점에서 조직하려는 플랜이었습니다. 이 선거주의적 우경화가 진보신당을 스타 정치인에 의존하는 당으로 만든 것이죠. 

이 기성정당 닮아가기가 진보신당 주도세력이 민주노동당을 탈당하면서 민주노동당에 새겨진 이미지, 즉 친북(대한민국 국가기구의 정통성)[각주:8]과 계급(자본주의와 적대)을 새 진보정당에서 지워버리려 한 까닭입니다. 중요한 쟁점이었지만, 이들의 비판 방식과 내용은 좌파적이지 않고 우파적이었습니다. 

그 점에서 진보신당이 촛불항쟁에서 성장한 것은 당시 정치 상황의 모순[각주:9](행동 수준과 이데올로기준의 격차)을 반영한 것이었는데, 진보신당 창당 프로젝트는 행동의 급진화가 아니라 사회의 보수화(우경화)를 예측하고 시작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뒤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촛불항쟁이 사그라들고, 대신 이명박의 거듭된 실정 때문에 온건개혁주의가 성장하면서 민주당의 주요 주자들마저 진보와 복지국가를 읊조리며, 친노 세력이 부활해 국민참여당을 창당해 진보세력 행세를 하고 있습니다.

민주노동당마저 최근 우경화했습니다. 큰 바다 같던 오른쪽 공백은 더 큰 세력들이 채우고, 왼쪽 특히 조직 노동자 기반은 스스로 거리두기를 해 온 탓에 진보신당의 입지는 매우 협소해 졌습니다.

그럼에도 조직 노동운동이 그 위력을 한껏 발휘하지 못하는 상태가 이어지면서 이들의 이른바 신좌파적 상상력은 성마른 미조직 청년층과 지친 노동운동 출신 활동가들에게 기대감을 일시적으로 줄 순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7. 이런 의미에서 진보신당의 창당기획이던 비정규직당 노선은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입니다. 그런 무정형의 청년세대 조직화에 성공도 해 봤고, 그들을 정치적으로 융화시키지 못해 곤란도 겪었잖습니까.

종북주의 비판도 대중적으로는 먹히질 않아 분당의 이유 즉, 존재의 이유를 대중적으로 설득하는 데에도 실패했습니다. 그 결과, 민주노동당에서 가장 유명하고 인기있는 국회의원을 둘이나 데리고 나왔는데도 의석 확보에 실패하고, 울산에서 민주노동당의 양보를 얻고서야 의원 한 명을 만들었습니다.

물론, 민주노총의 영향력이 요즘 약해지면서 노동계급정당이라는 사상이 당장은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선거공학이나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엄밀한 현실 분석과 전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2008년 세계자본주의의 심장부 미국에서 시작한 경제 위기는 근본적 시야와 근본적 대안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입니다. 즉 이 사회의 다수는 노동계급[각주:10]입니다.이명박 정부는 약화되고 있지만, 여전히 진보적 정치 대안의 부재로 하루하루 연명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변혁의 전망, 진보정치의 핵심 과제는 노동계급 정치를 강화
(단결과 투쟁력, 정치의식 발전)하는 것입니다. 이들의 단결된 투쟁만이 대자본가들의 권력을 위협하고 양보를 얻어낼 수 있고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비정규직 투쟁에 헌신하겠다는 것 자체는 매우 좋은 일이고, 사실상 차기 대표인 조승수 의원이 말한대로 재벌과 싸우려는 것도 고무적입니다. 진작 이랬어야죠. 사실 재벌과 싸우는 당이라는 기치는 창당 기획보다 진일보한 유일한 것으로 그나마 고무적인 변화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것이 제대로 결과를 내려면 계급 정치가 가장 효과적인 전략입니다. 문제는 이것은 또 피하려 한다는 거죠.
진보신당 스스로 강령에서 자본주의의 극복을 말하고 있다면 당내 좌파는 이 문제에서 더 진지해져야 합니다.

고통분담론에 분칠을 한 건강보험하나로 같은 양보론이 아니라 강력한 시장 통제와 소득 재분배(강력한 누진세와 기본소득 등 도입), 부실기업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보장 등을 내놔야 합니다.

덧붙이면, 좌파의 대안 강령과 정책은 이런 운동을 고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최근의 위기는 신자유주의 반대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진보대연합도 노동계급을 진보적으로 단결시키는 맥락에서 추진돼야 합니다. 이런 과제를 수행할 정치단체가 필수적이겠죠.

이것이 되려면 좌파는 ‘계급’과 ‘사회주의’라는 의제를 복원해야 합니다. 민주노총 지도부의 불충분한 태도를 비판하는 데서 멈추는 것은 의회 활동과 노동자 부문의 투쟁을 분리하고 노동운동과 거리 두기 하는 것을 정당화할 뿐입니다.

(10.2 최종 수정)
  1. 당분간은 이번 선거 출마에서 보듯 통합파가 양보해 분열을 막으려 할텐데, 대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 자기 당의 분열을 선택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울 수 있는데다가, 각 정당의 통합시 통합파의 리더가 발휘할 영향력과 챙길 수 있는 지분은 진보신당의 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2. 물론 표결 자체는 과반수에 3표를 넘겼습니다만, 원안을 지지한 사람들이 노회찬, 심상정 등 진보신당의 대주주라는 점을 고려해야죠. [본문으로]
  3. 사회당과는 통합을 하자는 독자파도 있죠. 또, 독자파들도 방법론은 분분하지만,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민주당을 포함하는 선거연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본문으로]
  4. 그들이 비록 대부분 PD좌파 출신이긴 하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5. 종파주의도 반영된 개념으로 볼 수도 있다. 즉, 진보신당을 지지하는 노동운동가들이 민주노총에서 소수파인 까닭에 정규직=민주노총=민주노동당 식의 개념짓기로 비정규직에 집착하는 면도 있다. [본문으로]
  6. 최근 유럽에서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에 맞서는 투쟁의 선두에는 노동계급이 있다. 엊그제 스페인의 1천만 명 총파업이나 프랑스, 그리스의 투쟁은 좋은 사례다. 물론, 이 투쟁들의 미래는 정해져 있지 않다. 다만 한국의 노동자 투쟁의 활성화가 이들에게 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G20 항의시위에 민주노총 조합원이 대규모로 참가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것이다. [본문으로]
  7. 어쩌니 저쩌니 해도 비정규직 문제로 집회도 하고 파업도 하는 유일한 사회세력은 다름아닌 민주노총 조합원들입니다. [본문으로]
  8. 자주파는 원래 북한 정부를 한반도 유일의 합법정부로 인정하므로 남한 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지금은 이 문제에서 많이 변한 듯하다. 원인은 따로 살펴보겠다. 문제는 이 점이 자주파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것이다. 1980년대 민중운동은 북한에 대한 태도와 관계 없이 일본 제국주의의 억압 기구를 물려받고 미국 제국주의와 결탁해 건설돼 군사독재로 유지돼 온 대한민국 국가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았다.남한에서 친북노선 비판이 자칫하면 남한 시장경제 체제의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으로 귀결될 확률이 높은 게 이 때문이다. 우리는 남북 양 체제에 모두 급진적 비판을 가해야 한다. [본문으로]
  9. 촛불항쟁은 정권 퇴진을 외치고 수도 한복판에서 1백만 명이 참가하는 등 매우 급진적인 대규모 투쟁이었으나 이 운동의 이데올로기는 온건개혁주의 수준에 머물렀다. 거기에는 이명박의 반동 때문에 사람들이 급진화한 데서 오는 효과도 있었다. [본문으로]
  10. 경제 활동 인구의 3분의 2가 임금노동자입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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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 신문을 판매했다는 이유로 벌금형을 받은 6인의 첫 재판이 916일 오전에 열렸다.

6인은 57일 서울 강남역 앞에서 <레프트21> 정기 거리 판매에 참여했다가 “사상 검증” 운운하는 서초경찰서 소속 경찰들에게 폭력적으로 연행된 바 있다.

그뒤 약식 기소된 6인은 미신고 불법 집회를 개최했다는 죄목으로 벌금형 총 8백만 원을 선고 받았다.

부당한 연행과 판결에 굽힐 수 없다고 판단한 <레프트21> 판매자 6인은 “<레프트21> 판매자에 대한 벌금형 철회와 언론 자유 수호를 위한 6인 대책위원회(6인 대책위)”를 꾸려 정식 재판을 청구하고, 각계 인사 1백여 명의 서명을 받아 항의서한을 제출하는 등 활동해 왔다.

오늘도 이들은 재판이 열리기 전인 940분에 법원 앞에서 “<레프트 21> 판매자 벌금형 철회·언론 자유 수호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이 집회는 미디어행동·민주언론시민연합 등 언론단체 뿐만 아니라 참여연대·다함께·민주노총·민주노동당 등이 공동 주최했다[각주:1].

“억지 수사와 반민주적 판결은 정부 비판적 목소리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

이 집회에서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레프트21>의 신문 판매는 기성 언론과 다르다. 우리는 판매 과정에서 독자와 소통하려 하므로 거리와 작업장, 대학에서 직접 대화하며 판매를 한다. 검찰이 이를 집회로 규정해 탄압하려는 것은 이런 네트워크를 가로 막는 것으로 이런 의견 교환의 자유마저 막는 것은 이 나라가 자유민주주의조차 안 된다는 뜻”이라고 주장했다.

민주노동당 정성희 최고위원은 “<레프트21>은 그동안 이명박 정부를 일관되게 비판하며 진실을 말해 온 신문”이라며 “세계적으로 빈익빈부익부를 만들려는 게 G20인데, 이 정부가 G20 개최를 계기로 민주적 권리를 심각하게 탄압하려 한다. 그래서 <레프트21> 탄압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민주노동당은 끝까지 함께 싸우겠다”고 말했다.

금속노조 동희오토지회 이백윤 지회장도 “<레프트21> 판매자들과 함께 연대하겠다”고 발언했다. 동희오토 조합원들은 56일 양재동 현대자동차 본사 앞 촛불집회 도중 연행됐다가 서초경찰서 유치장에서 <레프트21> 판매자들을 만난 바 있다.

결의문은 참여연대 공익법센터 이지은 간사가 대표 낭독했다.

이어 서울중앙지방법원 408호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6인대책위 김지태 대표는 검찰의 기소 내용을 하나하나 반박했다.(☞ 모두진술 전문 보기)

그는 검찰이 기소장에 정당한 신문 판매 행위를 집회로 규정한 것 자체가 잘못이며, 유료로 판매하는 신문을 유인물 배포로 묘사한 것은 명백한 사실 조작이라고 폭로했다.

김지태 대표는 독자와 소통하려는 <레프트21>의 판매 방식을 인정하지 않고 불법 집회로 규정하는 것은 사실상 정부 비판적인 언론을 탄압하는 정치 탄압이라고 비판했다.

서른 명이 넘는 방청객들이 김지태 대표의 통쾌한 주장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가운데, 형사22단독 소병진 판사는 갑자기 모두진술을 중단시켰다.

다른 재판도 진행해야 하니 시간이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앞으로 재판이 계속 될테니 그때 하고 싶은 말을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국가권력에게 부당하게 기소된 이들이 첫 재판에서 기소 내용 전반에 대한 반박 의견을 밝히는 모두진술과 재판 과정의 심문은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다. 더구나 모두진술권은 피의자에게 법적으로 보장된 권리이다.

판사는 자신의 법정에서 정부 비판적인 변론이 계속 되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듯하다. 결국, 판사는 모두진술 재개 1분 만에 발언을 다시 제지하고 항의하는 김지태 대표에게 퇴정 명령을 내렸다. 김지태 씨는 청원경찰에 의해 법정 밖으로 끌려 나갔다[각주:2].

이렇게 민주적 권리를 보장하지 않으면서 법의 권위가 설 리 없다. 결국, 판사는 변호인의 항의를 받아들여 다음 재판에서는 김지태 씨의 모두진술을 보장하기로 했다. 김지태 대표와 5인의 당당하고 단호한 태도와 많은 사람들의 지지가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다.

다음 재판은 1021일 오전 11시 같은 법정에서 열린다.






  1. 공동 주최 단체는, 6인 대책위, <레프트 21>, 미디어행동, 민주언론시민연합,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보건의료단체연합, 인권단체연석회의, 인권연대, 촛불네티즌 공권력탄압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 구속노동자후원회, 다함께, 참여연대. [본문으로]
  2. 불구속 재판에서 피고인을 퇴정시키는 것은 어찌 보면 판사 자체가 재판을 거부한다는 것인데, 참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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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과 종로통 일대는 주황색 풍선과 붉은 손팻말을 든 사람들로 북적댔다. 풍선과 팻말에는 “흘러라! 강물, 들어라! 청와대” “생명 파괴 민생 파괴 4대강 공사 중단”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날 시민사회·노동·종교·정당 등 단체들은 ‘4대강 공사 중단을 위한 국민행동’을 개최했다.

경찰청장 ‘조혐오[각주:1]’ 취임 후 첫 대중 시위였다. 경찰은 집회를 불허하고, 광화문 동아일보사 앞, 동화면세점 앞 등에 모인 시민들을 에워싸고 이동을 가로막았다. 광화문 우체국 근처에선 인간띠잇기를 하는 시민들을 방해했다. 물리적 충돌은 없었지만 항의는 넘쳐났다.

많은 시민들이 “집회의 자유도 없는, 이런 게 공정 사회냐”고 항의했다. 인터넷 공지를 보고 참가했다는 한 시민도 “이명박 정부는 수백억 원을 들여 홍보하고, 그것도 부족하다고 방송 장악한다고, PD수첩 막고, 낙하산 사장 보내고 하면서 우리는 모여서 목소리도 못 내게 한다”고 말했다.


산발 시위가 끝나고 시민들은 이날 유일하게 허가가 난 보신각 앞 문화제 장소로 모였다. 집회가 시작하자마자 비가 쏟아졌지만, 장소를 꽉 메운 시민 2천여 명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이날 야 5당 정치인들도 참가했다.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 민주당 사무총장 이미경, 국민참여당 대표 이재정 등이 연단에 섰다.

이들은 모두 국회 차원의 ‘4대강 사업 검증 특별위원회’(검증특위) 구성을 강조했다. 이것은 매우 정당한 요구다. 4대강 사업의 효과와 진행 절차가 모두 의혹투성이기 때문이다.

홍종호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는 최근 4대강 사업 적자가 투자 예산의 4분의 3이나 될 것이라는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각주:2]. 정부가 발표한 일자리 30만 개 창출도 실패했다. 현재 공사 시작 후 늘어난 일자리는 24백 개에서 13백 개(이 중 정규직 130) 사이로 추정된다[각주:3].

그러나 검증특위가 국회 내 기구라 해서, 야당의 협상에 맡겨 놓고 국회만 쳐다 보고 있으면 위험할 수 있다.

첫째, 검증특위 자체는 4대강 공사 중단 여부를 결정할 기구가 아니다. 오히려 한나라당 의원도 참여해야 하는 기구다. 따라서 검증특위 구성을 두고 한나라당과 벌이는 전투는 정부의 시간끌기에 이용되는 소모적인 양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각주:4].

둘째, 검증특위가 공사 중단을 결정하지 못한다면 검증특위가 구성돼 폭로를 효과적으로 하더라도 대중행동이 아니면 막을 수 없다. 이미 4대강 공사가 ‘대국민 사기극’이라는 것이 갈수록 분명해지는 데도 이명박 정부가 강행을 하는 것은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 말처럼 “4대강 사업마저 못하면 완전히 레임덕이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4대강 공사 반대 운동은 어떤 요구든 국회에 압력 넣기 수준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진보진영은 4대강 문제를 다른 운동과 연결시키며 운동의 저변을 확대해야 한다.

이날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4대강 예산] 22조 원이면 최저임금으로 고통받는 노동자, 임금이 체불된 노동자, 불법 파견 판정을 받은 노동자들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면서 4대강 예산을 비정규직 노동자 850만 명에게 사용하라고 촉구했다. 이런 방식으로 노동자운동 등과 4대강 반대가 결합되는 것도 필요하다.

민주노동당의 한 서울지역 당원은 “4대강 공사 반대 여론이 높지만 이명박을 막는 힘이 부족한 것은 반대 여론이 표출될 공간이 없어서인 듯하다”고 대중 시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한편, 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는 저녁 문화제 연단에서 4대강 모두에서 공사가 중단돼야 한다고 했다. 영산강과 금강을 관할하는 민주당의 전남도지사(박준영)와 충남도지사(안희정) 등이 4대강 공사를 찬성하거나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간접적으로 비판한 것이다.

민주당에게 분명한 태도를 취할 것을 좀더 공개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민주당의 모호함을 볼 때 진보진영은 4대강 사업 반대 운동에서도 정치적 독립성을 유지할 필요성이 크다.



  1. 나는 이게 그 자의 본명인 듯 느껴진다. [본문으로]
  2. 정부와 우익들은 정부 재정 적자가 커지는 것을 우려해 공공요금 인상, 공공부문 구조조정, 공기업 민간 매각 등을 추진해야 한다는 말을 흘린다. 그러나 진정한 예산 낭비는 이명박 정부가 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안그래도 부채덩어리가 된 수자원공사에 8조 원이나 되는 부채를 새로 안기는 것도 4대강 죽이기의 ‘성과’(?)다. [본문으로]
  3. 어제 집회에서 창조한국당 유원일 의원은 2천4백 개를 인용했고,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은 1만 3백 개를 언급했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새로 생긴 일자리가 3천여 개라고 밝혔다. [본문으로]
  4. 한나라당과 조중동 등은 검증특위를 받아들이지 않다가 상황 봐서 불리하다 싶으면 못 이기는 척 협상을 하는 척 하면서 지역 토호들의 압력에 야당 시도지사들의 입장이 후퇴하길 기다리는 방식으로 나올 공산이 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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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개각으로 인사청문회를 거치면서 고위 공직자들과 이 나라 기득권 엘리트들의 추한 일상이 곳곳에서 까발려졌습니다. 결국, 김태호 총리 후보 등 네 명이 자진 사퇴를 했죠.

뇌물, 투기, 위장전입 등. 네 명만 문제가 아닙니다. 경쟁교육=특권교육의 앞잡이인 이주호나 유일한 생계수단인 일자리를 빼앗지 말라는 노동자를 살인무기에 가까운 진압 도구와 작전으로 진압한 일을 ‘보람’으로 여기는 조‘혐오’ 같은 자들도 자리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며칠 지나고 나니 이젠 개각에서 유임된 유명환의 딸이 문제가 됐네요. 무단 결근하고 자기 부모 통해 해결하는 등의 일로 별명이 “외교부 3차관”(아버지인 유명환이 당시 외교부 제1차관[각주:1])이었다고 하죠. 이번 특채 응시에선 채용 자격 자체를 유명환 딸에 맞춰 바꿨군요[각주:2].

결국 방금 사의를 표명한 유명환은 민주당 찍은 젊은이는 모두 북한으로 보내야 한다는 막말을 했던 자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외교부 공무원 직을 세습하는 유명환이야말로 북한으로 가라고 하고 있습니다.

새로 임명할 자들만 문제가 있는 게 아니고 기존의 인물들 모두 문제가 넘치는 자들입니다. 진정한 이 나라 주류 특권층의 정당인 한나라당에서 쓰는 인재마다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그것이 계급사회에서 가진 자들에게 만연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서로 억울해 하며 감싸주기도 잘 합니다. 물론, 가끔은 대중의 불만이 너무 클 때는 나머지들이라도 살려고 다른 놈을 쳐 내기도 합니다.

그게 집권당 내분이나 여야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더 큰 시야에서 보면 둘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이번에도 최근 민주당이 제 식구 비리 감싸는 걸 보면 이 문제는 더 선명해집니다.

민주당은 뇌물 먹은 의원 강성종의 구속을 막으려고 한나라당과 방탄 국회를 해왔고, 지난 체포동의안 처리도 사실상 반대했습니다. 이때 한나라당 당론은 체포동의안 찬성이었는데, 당론 이탈표가 꽤 되더군요. 전북 고창군수 이강수의 성희롱 사건도 여태 미적지근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전남 여수의 뇌물 사건이 또 터졌구요.

민주당이 지금은 이명박의 반민주 정책 때문에 민주화 운동이 한창일 때 야당하던 흉내를 내지만 그들은 불과 3년 전에 10년을 집권해 온갖 호사를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그 권력을 이명박과 별 다를 바 없는 정책을 추진하고, 한나라당 엘리트들과 별 다를 바 없는 특혜를 추구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그들도 마찬가지로 기업주들의 후원에 기대는 기득권 정당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지배계급을 포함한 기득권 집단 안에서 더 주류인 당(한나라)과 조금 덜 주류인 당(민주당 등)의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김대중 정부는 1987년 이후 가장 많은 국가보안법 구속자를 냈고, 노무현 정부는 가장 많은 노동자를 구속했습니다. 반면, 살인마 전두환·노태우는 사면됐고, 수백억 탈세한 이건희는 아예 재판도 진행하지 않았습니다. 이명박 정부보다는 낫겠지만, 분명한 것은 우리 평범한 사람들이 바라는 정부는 아니었습니다[각주:3].

그래서 어느 분들의 예상과 달리 민주당은 이번 인사청문회에서도 별로 날카롭지 않았습니다. 민주노동당 한 보좌관은 트위터에서 전직 국회의원 지원 금지법안 발의 서명을 민주당 의원들도 좀체 하지 않으려 받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이런 자들이 국회를 점령하고 있는 것은 지금의 체제에서 삼권분립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보여줍니다. 출신과 정책 지향에서 그놈이 그놈이기 때문에 국회가 행정부를 진정으로 견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국회에서 위장전입 같은 건 합법으로 바꿔주자는 말이 나오겠습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1인1표는 현실에서 공평하지도 평등하지도 않습니다. 늘 뭔가 세상 돌아가는 데 불만이 있는 사람들을 주눅들게 하는 제도교육과 기성언론, 형벌제도는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이데올로기적 주도권을 쥐어줍니다. 

돈이 있기 때문에 늘 더 많은 선전수단을 사용할 수 있고, 더 많은 사람을 자신들을 위해 동원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그들은 자신들에게 유리한 기준들을 만들어 냅니다. 수권능력이니, 품위니, 학벌이니 하면서 자신들을 포장합니다. 급할 땐 지역감정 같은 것도 이용해 먹습니다. 그래서 돈과 권력을 더 많이 동원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더 많은 표를 움직일 수 있게 됩니다.

그 점에서 자기들끼리는 당연하게 여기지만 대중에게 알려지면 안 되는 욕망을 추구하고, 속마음을 교환하고 협력하며, 때론 경쟁하기도 하는 가진 자들의 네트워크가 진짜 권력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선출되진 않았지만 이들이 각 권부의 수장으로, 때로는 뒤에서 국가기구와 대기업, 조중동 등 언론 등의 연결망을 짜면서 도사리고 있습니다. 법보다 세다는 ‘삼성공화국’도 어쩌면 이 네트워크가 가진 다양한 이름 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역설적이게도 그래서 노동조합과 진보정당, 각종 사회단체들이 필요합니다. 가진 자들의 네트워크에 맞설 노동자와 없고 차별 받는 자들의 조직적인 네트워크가 필요합니다. 대중은 그런 네트워크의 도움을 받아 스스로 집단적인 저항을 할 때만 의식과 삶, 세상의 혁신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정당이 할 일은 민주당 꽁무니 따르기가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진보적 네트워크를 강화하는 일입니다.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겠다는 진보정당의 정치인들이라면 업무상 불가피하게 기존 기득권 정당들의 정치인들과 연관을 맺더라도 늘 경계하고 주의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자칫 근묵자흑[각주:4]되서 진보정당이 하는 기존 체제 비판, 요구와 대안이 모두 명분을 잃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 헌정회육성법도 그런 점에서 문제인 것입니다. 이정희 대표의 해명을 보면 이 대표가 법안의 성격을 몰라서 그런 판단을 했던 게 아닙니다. “이것까지 반대할 수 있나” 하고 판단했던 것 자체가 다른 당 의원들의 눈치를 봤다는 것이고, 그들의 기득권 구조에 대한 예리한 대립각을 스스로 무디게 하면서 그 구조적 문화에 ‘적응’해 간다는 표시인 것입니다.

이번에는 8월 31일 관보에 신규 선출직 공직자들의 재산이 공개되면서 민주노동당 소속 전북도의회 이현주 비례의원의 투기 의혹이 불거졌습니다. 

6·2 지방선거 때 전북도당 유세 모습.


이현주 의원은 보건노조 군산의료원지부 지부장으로 민주노총의 간부 활동가인 분입니다.노동운동 출신의 진보정당 공직자에게서 드러난 부동산 투기 의혹은 진보정당 지지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우파 언론의 물타기에 이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의원의 직장인 군산의료원에서 휴직 처리를 해 주지 않아 안팎에서 지방공기업 직원과 의원직을 겸직한다는 공격을 받고 있는 터에 이런 식의 도덕성 흠집내기는 지역에서 진보정당의 위세를 매우 약하게 만들 것입니다.

이현주 의원은 부부 명의로 아파트 네 채(각각 두 채씩)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중 두 채가 소아마비 장애인인 친동생을 위해 마련한 것이고, 친정 부모 명의의 다섯 채는 자신과 상관없는데 직계존비속의 재산을 함께 신고한 결과일 뿐이라고 해명합니다. 

진보정당 정치인이라고 무조건 가난해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원래 물려받은 재산이 많다면 그것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사느냐가 문제겠지요.

그 점에서 일부 언론이 자극적으로 아홉 채 보유 어쩌고 하는 건 좀 과장입니다. 자산가 집안에서 서로 명의를 주고 받으며 투기를 할 수준도 아닌데, 부모의 투기까지 정치적 책임을 묻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부모 앞으로 명의 돌려놓고 부모 명의의 재산은 신고하지 않은 작자들이 훨씬 많습니다.

여러 정황을 따져 보면 특권층 비리와는 명백히 다르고 탈세 사실도 없으며, 차익의 규모도 적은 듯합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자산 증식 수단으로 부동산 다주택 소유를 선택했다는 점 자체는 부인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 의원의 해명을 그대로 믿더라도 새로 삼학동 대우아파트로 동생의 거처를 옮길 때 처음 동생에게 사 준 나운동 주공아파트를 왜 처분하지 않았는지 의문입니다. 은행 대출도 총 1억 원 가까이 받았던데요[각주:5].

관보에 실린 아파트 내역과 군산 지역 언론, 이 의원의 해명을 종합하면(현재까지 사실로 밝혀진 바), 나운동에 소재한 아파트 두 채가 자산 증식용으로 구입한 것으로 보입니다[각주:6]. 굳이 살지도 않는 집을 적어도 두 채나 보유한 건 노동운동 간부 활동가로서나 진보정당의 공직자로서 적절한 처신으로 볼 순 없습니다.

이것은 노동자들이 어렵게 구입해 사는 집 한 채의 가격이 올라 자산이 늘어난 것과 다릅니다. 우리가 부동산 투기를 비난하고 진보정당의 공개적인 정책으로 1가구 1주택을 요구하는 것은 그런 의도적인 자산 투기가 부동산 가격을 올려 그 비율 만큼 따라 상승하지 못하는 노동자와 서민들의 자산을 사실상 강탈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분명하게 해서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시급히 사건을 판단하고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밝혀진 것으로만 보면, 특권층 비리와는 다르므로 의원직 박탈 같은 징계는 과도하다고 생각하지만, 정치적 비판은 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광역 비례 의원이면 전라북도 전역에서 개인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을 지지하는 표로 당선한 것입니다. 진보정당답게 판단하고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길 바랍니다.



  1. 외교부 제1차관은 인사와 기획조정을 담당하는 장관 다음의 실세. 차관 시절에 해고 걱정 없는 계약직으로 들어와 아버지가 장관되니 이젠 정규직으로... 정말 누구 말대로 유명환의 딸이 특채로 뽑힌 직무의 전임자는 왜 그만 뒀는지까지 궁금해지네요. [본문으로]
  2. 이쯤에서 복지부장관에 내정된 진수희가 자기 딸의 미국 국적 부분을 질타하는 여론에 “나라 위해 큰 일을 할 애”라며 안타까운 해명을 하던 일이 떠오릅니다. ㅋ 이 정부를 보면 그 큰 일 안 해주면 좋겠어요. [본문으로]
  3. 두 정부가 집권할 때 받았던 기대감을 생각하면 더 그렇습니다. 그 기대가 무너진 대가가 2007년 대선에서 높은 기권율과 이명박 당선이었습니다. [본문으로]
  4. 근묵자흑 [近墨者黑]: 먹을 가까이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검어진다는 뜻으로, 사람도 주위 환경이 어떠한가에 따라서 바뀌어 간다는 것을 비유한 한자성어임. 이 글에선 나쁜 무리와 어울리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릇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는 뜻으로 썼음. 좋은 사례로도 쓸 수 있음. 같은 뜻의 대구가 되는 성어로 근주자적[近朱者赤]이 있다. [본문으로]
  5. 이 의원은 당시 추가 대출을 4천9백만 원 받았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으로]
  6. 나운동 쪽 재건축이 많던데, 재건축 프리미엄을 염두에 둔 게 아닌가 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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