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24일) 파시즘을 주제로 한 토론회에 참여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오셨더군요. 지난해 여름만 해도 이명박 정부의 “위로부터 파시즘화” 같은 논의들이 나오는 등 논쟁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없어서 별로 참가자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아마도 포럼 조직자들은 이명박=파시즘론이 민주대연합론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파시즘 논쟁의 맥락을 검토해 보는 게 최근 정치전략 토론에서 유용할 거라고 판단한 듯합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명박 정부는 파시즘 체제가 전혀 아닙니다. 나쁜 일을 하는 능력에서 이명박은 파시즘의 백 분의 일도 안 됩니다. 파시즘은 훨씬더 위력적인 반동 체제입니다.

히틀러에겐 자신에게 충성하고, 거리에서 목숨 걸고 노동조합원들과 좌파를 테러할 (심지어 침략전쟁에 나설) 열광적 당원이 수십만 명 있었습니다. 이명박에겐 다음 선거를 걱정하며 분열하는 다양한 분파의 여당과 관료 집단이 있고, '보수'받고 동원되는 보수단체들이 있을 뿐입니다.

파시즘의 가장 큰 특징은 그것이 중간계급이 중심이 된 반동적 ‘대중운동’이라는 것입니다. 파시즘은경제위기로 파산 위협에 몰린 중간계급을 반자본 반노동 반진보 대중운동으로 동원해 성장합니다.

파시즘의 계급토대가 중간계급, 즉 소자산가가 핵심 기반이라는 것은 이들이 금융자본을 혐오하고 독점자본을 강령상 공격할 때조차 사유재산이나 기업활동의 자유를 거부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게다가 중간계급은 독자적으로 체제를 구성하고 지배할 경제적 능력이 없습니다.

결국 파시즘 운동은 누군가 위에서 구원을 해줘야 왕좌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시즘의 집권은 극심한 공황기에 극도의 반동 체제가 아니면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보는 대자본이 反자본주의적 노동운동을 분쇄하려고 파시즘을 정치권력으로 선택하는 과정입니다.

제공황으로 고통받는 이들에게 온갖 분파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해 적당한 타협물을 내놓는 의회주의는 별 쓸모가 없습니다. 자유민주주의가 허용하는 노동계급의 정당과 노조도 체제를 폭력적으로 재편하는 데 걸림돌이 됩니다. 파시즘이 부르주아민주주의마저 파괴하는 이유입니다.

역사적으로 파시스트가 집권에 성공한 곳에서 반자본 강령은 허울이 되고, 반동적 대중운동이 (노동계급 조직의 결성과 정치 자유를 허가한다는 점에서 민주적인)부르주아 민주주의와 좌파·노동운동의 진지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게 주된 특성이 됩니다.

중간계급은 동네와 직장, 거리에서 노동계급과 밀착해 존재하므로 외부에서 감시·사찰하는 비밀경찰들보다도 더 노동계급 대중의 조직들을 - 진보정당과 노동조합, 진보적 시민단체와 학생회, 각종 토론·동호회 모임 등- 파괴하기 용이합니다.

역사적 파시즘이 이처럼 극단적 반동적 야만주의로 자본주의를 구출하려는 전략이라는 점 때문에, 反파시즘이란 것이 혁명 아니면 반동인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와 싸우는 투쟁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이 점에서 파시즘 운동의 계급 기반, 노동운동과 맺는 적대관계, 그리고 반(反)파시즘 운동에서 노동계급의 구실을 이해하고 분석하며 실천에 반영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파시즘 론은 이명박을 옳게 퇴진 대상으로 삼는 장점은 있지만, 이명박의 힘을 과장하는 바람에 오히려 선거심판론으로 빠지는 데 도움을 줬습니다. 운동이 활발하지 않을 때 적의 힘을 과장하니 비관론에 빠져 선거 심판론=민주당 의존에 기우는 요인이 됐습니다.

사실 이런 선거 의존 전략은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파시즘화란 대의민주주의가 무력해 졌다는 건데, 민주당을 가장 중요한 동맹 대상으로 삼는다는 건 의회제에 의존한다는 거니까요.

역사에서 배워야 합니다.
이명박보다 더 강력한 파시즘과 맞서는 데에도 자본가당들과 연합한 결과는 매우 재앙적이었습니다. 파시즘이 극단적으로 반동적인 자본주의 구출 전략이라는 점에서 反파시즘 투쟁은 좌파적 노동운동의 단결이 절대적 필요조건입니다.

△ 무언가 참고하려 뒤적일 때마다 감탄하는 책.《민중의 세계사》는 진보적 사회변화를 위해 미래를 전망하려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역사서. 제대로 돌아봐야 제대로 내다봅니다.

1930년대 파시즘이 문제가 된 국내의 자본가들이나 이른바 자유주의 민주주의 국가의 정부들조차 파시즘을 막기보다 파시즘과 맞서 싸우는 노동운동이나 국제적으론 소련을 더 경계했습니다.

독일에서 공산당은 스탈린의 멍청한 지령을 받고 종파적으로 反 파시스트 단결을 거부하다가 망하고, 사회민주당은 히틀러를 막는다며 우익 장군 힌덴부르크를 지지하다가 뒤통수를 맞습니다.

(그때 저명한 좌파 지도자 가운데서는 러시아혁명의 지도자이면서 당시 스탈린에게 박해받아 추방당한 상태였던 레온 트로츠키만이 이런 스탈린의 정치방침을 강력히 비판하면서 反파시스트 노동계급 공동투쟁의 중요성을 역설합니다. 그가 남긴 분석과 시야, 전망이야말로 ‘밤이 깊을수록 별은 빛난다’는 말의 표본입니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노동운동의 단결된 저항 때문에 파시즘을 약화시키고 인민전선이 집권했지만, 인민전선의 자본가당들은 사회당·공산당의 도움을 얻어 노동자투쟁을 잠재운 뒤에는 사회당을 팽하고 나찌 독일을 지지하는 정권을 스스로 세웁니다.

스페인 (인민전선) 공화국 정부를 주도한 자본가당들은 프랑코가 이끄는 파시스트 반란군보다 노동자들의 反 파시스트 저항을 파괴하는 데 더 열을 올렸습니다. 정부에 의존하지 않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무장해 싸우며 해방구를 형성한 곳에서만 파시스트 군대를 물리치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국제적으로 봐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와 영국 정부는 스페인 공화정부 지원을 거부합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프랑코를 정치·군사적으로 지원했는데 말입니다. 영국의 처칠은 히틀러의 체코 점령 등을 묵인해  전쟁 준비를 방치합니다. 

그리고 멍청한 스탈린은 독일에선 反 파시스트 단결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가 이제는 이따위 자본가 정부들과 무비판적으로 협력하라고 각국 공산당에게 명령했습니다. 유일하게 스페인을 지원한 소련의 고문단은 공화파 정부의 좌파 마녀사냥을 나서서 돕습니다.

이 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反파시즘 전쟁’이라고 광고하는 건 역겨운 짓입니다.

그래서 토론에 참가한 어느 분의 말씀처럼 파시즘의 성공은 단지 체제의 위기와 이에 따른 중간계급의 상태만이 아니라, 좌파가 부패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한편, 파시즘을 전체주의 국가 형태로 이해하고 파시즘 체제와 스탈린주의 체제를 비슷하게 보는데, 이것은 잘못된 시각입니다. 스탈린주의 체제가 나쁜 일당독재 국가이고 노동운동 등 저항운동이 억압하긴 했지만 파시즘 체제의 노동운동 궤멸 상태와 비교할 순 없습니다.

동구권에선 1953년 동독, 1956년 헝가리, 1968년 체코, 1978년(과 1989년) 중국 등 민주화 운동과 파업, 혁명이 주기적으로 생겨났습니다. 1989년엔 적지 않은 나라들이 대중 저항 때문에 정권이 붕괴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에선 1939년 내전 패배 후 거의 30년 동안 저항운동이 등장 못했습니다. 앞 세대가 (운동과 조직, 육체적 생명 모두) 절멸해 저항운동의 전통이 이어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나찌는 가장 발전한 자본주의 국가에서 나타난 야만주의이고, 스탈린주의는 선진자본주의를 단시간에 따라잡으려는 3세계 독재입니다. 그래서 스탈린주의 나라 가운데 어느정도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들에선 충분하지 않지만 나름의 보편적 복지가 노동계급에게 제공됐습니다. 파시즘 체제에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파시즘은 단지 기존의 진보르 파괴할 뿐입니다.

스탈린주의 강제수용소와 정치수 억압도 끔찍하지만, 수백만 명을 ‘죽이려고 죽인’ 홀로코스트에 비교하긴 힘듭니다. 그 악질성과 규모 면에서 말이죠. 

결국 자본주의 안에 내재한 광기가 이런 미치광이들이 집권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겁니다. 히틀러가 시작한 제2차세계대전은 독일자본주의가 세계대공황을 벗어나려는 (자본의 논리에서는) 합리적 선택이었습니다.

국제교역이 붕괴하는 상황에서 국가자본주의적으로 성장을 유지하려면 원료와 값싼 노동력을 확보해야 하고, 이는 곧 독일자본주의의 영토 확장을 뜻했습니다.


프랑스와 스페인이 인민전선 정부를 수립하기 전 좌파와 노동운동은 단결해 거리에서 파시스트 운동을 크게 약화시켰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이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며 발목 잡혔을 때, 파시스트에게 패배했습니다. 이것이 파시스트와 맞서 싸운 역사에서 우리가 얻을 교훈입니다.

오늘날 한국에서 파시스트 운동은 없지만, 파시즘을 낳을 요소들이 아주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유럽에서도 헝가리 등에서 최근 강성 파시스트가 성장했습니다. 경제위기의 고통, 신자유주의의 야만이란 배경적 요소는 존재합니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를 실행한 좌파 정부 탓에 좌파를 향한 환멸이 있습니다. 희망의 질식 상태가 파시즘의 가장 본질적 심리일 것입니다.

파시즘을 막으려면 파시즘을 낳는 이런 배경적 요소들을 청소해야 합니다. 파시스트가 쥐떼라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는 쥐떼가 서식하는 하수구입니다. 쥐떼도 막아야 하지만, 하수구도 청소해야 합니다. 좌파가 건설적 희망과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스페인의 프랑코 체제를 결국 약 40년 만에 무너뜨린 건 패배와 학살의 경험에서 자유로운 새 세대의 노동계급 운동이었습니다. 어떤 철권 통치도 자본주의 경제를 유지하려면 노동자들을 산업으로 집중시켜야 합니다. 그들을 다 때려 죽일 수도 없습니다.

파시즘 같은 광기의 체제를 막으려면 똘똘 뭉친 反자본주의 노동자운동을 건설하는 것이 답입니다. 대기업주를 대변하는 이명박 정부와 맞서 싸워 진보적 노동운동이 승리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에서 파시즘이 등장하는 것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길입니다.


※ 참고도서(추천)

《민중의 세계사》(크리스 하먼, 책갈피, 2004)
《히틀러》(1, 2) (이언 커쇼, 교양인, 2010)
《트로츠키의 반(反)파시즘투쟁》(L.트로츠키, 풀무질,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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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시즘2010 웹사이트 바로 가기 ☞ ‘맑시즘2010 - 끝나지 않은 위기, 저항의 사상’

맑시즘 포럼이 벌써 10년이 됐습니다. 2001년 겨울, 서울대에서 도전적으로 시작했던 행사가 여름 고려대에서 열리는 안정적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주최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였고, 명칭은 “3일 간의 토론광장”이었습니다. 주요 연사는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홍석천 배우, 손석춘 씨, 홍세화 씨 등 광범한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명사들이 많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 1년을 맞던 때이기도 했고, 홍석천 씨는 동성애자인 걸 언론이 폭로해 곤경에 처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통신과 국민·주택은행 파업 직후였으며,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여름(8월) 행사를 시작한 2003년은 반전운동이 한국에서 태어나던 시기로, 영국의 반전운동가들이 주목받는 연사였습니다. 박노자가 요맘때 인기 좌파 지식인이었습니다. 이 해에는 예년처럼 겨울에 했다가, 여름에 개최를 했는데, 겨울엔 명칭이 “변혁인가 야만인가”였고, 여름부터 “전쟁과 변혁의 시대”로 바뀌어 2006년까지 이 명칭으로 진행됩니다.


2004년 후엔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인기 연사였죠. 또 이때부터 국내 최대의 진보 토론회라는 홍보를 시작한 걸로 기억합니다. 연인원이 아닌 참가자 수가 1천여 명이 넘는 토론회는 유일했으니까요.

지금 막 KB금융지주 회장이 된 어윤대가 고려대 총장 시절에 행사를 물리적으로 막아 외대와 경희대에서 한 적도 있었죠. 경희대도 행사 허가는 공식으로 해주질 않아, 크라운 관에 거대 에어콘을 나르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땐 회기역에서 경희대 행사장까지 셔틀버스를 한 노동자의 도움으로 운영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은 한미FTA 등 신자유주의와 사회공공성이 부각되던 시기였습니다. 정태인, 우석균, 이강택PD 등은 신자유주의를 매우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전문가면서 참여적 지식인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강택 PD의 강연은 바닥에 앉아서 본 기억이 나네요.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의제로 부각돼 비정규직 관련 주제나 연사들이 인기있었습니다. 특히, KTX와 이랜드 등의 투쟁사례와 연설은 많은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영감을 줬습니다.

2007년 이때 지금의 이름(‘맑시즘20OO’)으로 행사 명칭이 바뀝니다. 이 행사가 예상을 깨고 성공하고 롱런하자, 고무적이게도 많은 진보 단체들이 벤치마킹을 하며 대규모 토론 포럼들을 열었습니다. 주최측으로선 구별되는 자기 색깔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긴 했습니다.

2008년에는 사그라들고 있긴 했지만 촛불항쟁 와중이라 촛불 청소년/청년 들의 참가와 발언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촛불항쟁의 리더들인 조계사 수배자 동지들과 이원 생중계로 개막식을 진행했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죠.

포럼 기간 중인 8월 15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계획돼, 맑시즘의 공식 일정으로 집회 참여를 넣기도 했습니다. 차 대절 얘기도 나왔는데 경찰에 '단체로' 낚시 당할 수 있어 개별로 가서 맑시즘 깃발로 모이는 방식으로 참여해 행진했었죠. 이 해 행사의 마지막은 윈디시티와 킹스턴루디스카, 두 우월한 그룹이 장식했습니다.
 
2008년부터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이듬해인 지난해까지 맑스주의 경제학 강연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행사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진 거죠. 그때 가장 중요한 투쟁이던 쌍용차 지원 집회 참가도 행사 프로그램으로 넣어서 맑시즘 참가자들이 경기도 평택까지 함께 간 기억이 납니다.

그날 정문에서 뛰느라 참 고생한 기억이 나는군요. 밤늦게 서울 왔더니 아직도 고대 앞에서 토론용(?) 뒤풀이를 하는 이들이 있던...ㅋ


그리고 맑시즘에 가장 많이 온 해외 연사인 고(故) 크리스 하먼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깊은 사상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직접 대화를 해 보진 못했지만, 웬지 선생님처럼 기억되는 분입니다.

그 기간 동안 논쟁에도 참여해 보고, 도우미도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엔 주로 사회과학 할인도서 판매장 도우미를 많이 했죠. ‘독서컨설팅’이라는 괴직업을 앞세워서요. ‘맑시즘’의 자랑인 탁아방과 문화행사들도 기억나는 것들이 많네요. 탁아방 꾸미기는 정말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토론하는 행사인 만큼 많은 동지(同志)들과 친구가 되는 게 젤 남는 장사이기도 합니다. 주최측도 그런 면에서 도움을 많이 주죠. 저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된 분들이 있습니다.


더많은 배움의 기억에 관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각주:1].


  1. 아, 11일 만에 올린 글이군요. 아, 6월은 슬럼프의 계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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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68일) 이스라엘 대통령 시몬 페레스가  한국에 온다

페레스는 깡패국가의 대통령답게 이번 팔레스타인 구호 선박 학살 사건[각주:1](☞ 관련 기사  /  /  / )이 “한국에 대한 북한의 도발과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호전적인 주변 국가의 도발에 대해선 엄중히 대응하는 것일 뿐”이라고 답했다

아울러 천안함 사태를 두고는 "명백한 군사도발에 대해서는 강력한 대응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매일경제> 63일치)

이래서 이명박은 페레스를 좋아한다. 이명박은 이미 올해 초 다보스포럼에서도 페레스와 회담을 한 바 있다. 이명박은 올 2월 따분하기 짝이 없는 국정홍보 라디오 연설에서 페레스가 해 줬다는 말을 자랑스레 소개하기도 했다.

이 뿐인가.
이명박 정부는 이번 구호 선박 사건이 나자, 6월 1일 책임 소재 언급 없이 “깊은 유감”과 “심심한 애도”를 표하는 애매한 외교부 논평을 낸 뒤, 6월 2일 이스라엘 정부를 규탄하는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안 투표에서 기권했다[각주:2]

한국 정부는 지난해 연초에도 비슷한 사건을 두고 유엔인권이사회 결의안 표결에서 기권했다

그때
이스라엘은 가자 지구를 무차별 폭격해 민간인 수천 명을 죽였다.(☞ 관련 기사) 유엔인권이사회는 이를 규탄하고 이스라엘 군 철수와 폭격 중지를 촉구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국은 두 번 다 결의안에 반대했다)

한국 정부는 이스라엘의 對 팔레스타인 정책(깡패국가의 짓)을 사실상 지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다.

이스라엘과 군사 협력 관계를 맺고 있는 한국 정부는 이번 방한을 무기 수출을 늘리는 기회로 삼으려 한다. 군수업체 기업주들을 위해서다. 전경련은 이를 위해 6월 10일 삼성 소유의 신라호텔에서 페레스 일행과 비즈니스포럼을 열 계획이다.

<
예루살렘 포스트>(528일치)를 보면, 페레스와 함께 오는 이스라엘 기업인들은, 주로 벤처 기업인들로 구성됐다는 한국 쪽 보도와 달리, 주로 엘빗시스템스, 이스라엘 에어크래프트, 엘타 등 이스라엘의 주요 군수업체 경영자들이다.[각주:3]

페레스는 방한 전 한국의 훈련용 초음속 제트기인 “T-50”에 관심 있다고 밝혔다. 아니나다를까, 페레스의 방한 보도가 나간 뒤, T-50에 부품을 납품하는 방산기업 삼성테크윈과 퍼스텍의 주가가 급상승세를 탄다는 주식 보도가 나왔다

양국의 전쟁광들이 무기와 이권, 외교적 지지를 놓고 거래하려는 게 이번 페레스 방한의 진짜 모습이다. 한국 정부는 혹시나 페레스 방한 반대 시위가 벌어질까봐 벌써부터 경찰 경호를 강화한다고 밝혔다.

반면에
애초 페레스가 방한 뒤 가려던 베트남에선 정부가 이스라엘을 비난하며 방문 일정을 무기한 연기했다.

이 정도만 봐도 우리가 페레스의 방한에 반대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Left21.com

 

 

ⓒ<레프트21> 33호 | 발행 2010-06-05 | 입력 2010-06-04

 이 글은 기사 원문을(http://www.left21.com/article/8213) 보충·변형한 것이다.

 

  1. 6월 5일에도 이스라엘은 아일랜드 국적의 구호 선박을 나포했다. 이번엔 천만다행이게도 인명 살상이 없었다. [본문으로]
  2. 한국은 부끄럽게도 유엔인권이사회 이사국이다. 이번 표결 관련 정보는 유엔인권이사회 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http://www.ohchr.org/en/NewsEvents/Pages/DisplayNews.aspx?NewsID=10095&LangID=E) [본문으로]
  3. “The business delegation includes CEOs from companies such as Elbit Systems, ECI Telecom, Israel Aircraft Industries, Elta, RAD Data Communication, and Naan, among others.”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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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광주항쟁과 민주화운동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정부가 두 차례 집권했지만, 사람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습니다. 대단한 민주개혁도 없고, 사는 건 더 힘들어지고, 오히려 정부 정책은 부자와 기업주만 이로운 정책이었습니다. 

민주주의 운동의 성과물로 집권했지만, 단순한 집권세력 교체는 일당국가를 해체했지만, 사람들이 바랐던 희망으로서 '진정한' 민주주의를 가져다 주지 못했습니다. 운동의 리더들이 민주당 등을 통해 기성 정치권에 진입했지만 그들은 기껏해야 기득권 질서의 얼굴마담이 됐을 뿐입니다. 

진정한 권력자들은 ― 대기업주들, 토지/금융 자산가들, 군부, 고위관료들 ― 선출되지 않습니다. 오늘날 이것이 더 분명해 졌습니다. ‘삼성공화국’이란 말은 요새 상식처럼 돼 있습니다. 그러나 대기업주들이 일방적으로 통치하는 건 아닙니다. 이들의 파워는 고위 관료와 언론, 법조계 등과 엮여 있습니다.

삼성을 지배하는 이건희 일가와 그 일당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지만, 한편에서 권력 유지를 위해 막대한 돈을 ‘뇌물’로 바쳐야 합니다. 최근 천안함 조사 등의 청문회에서 보듯, 고위 군인들이나 관료들이 청문회 등에서 국회의원들 다루는 태도에는 여전히 권위주의가 남아있습니다. 삼성 일방 지배가 아니라 대기업주와 대자산가들, 고위 정치관료(군인 포함) 들의 동맹 지배입니다.

민주당 정권이 실질적 민주주의를 진전시키는데 실패한 이유입니다. 이들은 늘 이 진정한 권력자들의 충실한 동료이거나 조력자였습니다. 그런 점에선 의회중심 진보정당 노선도 한계가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자본가계급을 대변하는 이명박이 제도적 민주주의의 절차를 우습게 만드는 걸 보면 ‘부르주아민주주의’가 불가역의 성과가 아니라 매우 허약한 것일 수 있다는 데에 생각이 미칩니다. 기업주들은 경제위기로 흔들리고 저항을 억누르는 게 일차 과제라고 느낄 때 (부르주아)민주주의를 거추장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들의 의도가 늘 관철되는 건 아닙니다. 이명박 집권 후 가장 약했을 때는 가장 정부가 강해야 할 선출 직후였습니다. 바로 2008년 촛불운동이 이들의 집권 플랜을 흔들어 놨습니다. 요새 보이는 이명박의 무리수는 모두 이때 중요한 우파 개혁을 시도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2008년 촛불운동은 정권이 힘있는 상태일 때, 전격 실행해야 할 인기없는 개혁들 - 공공서비스와 의료 민영화 등- 의 추진력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습니다. 

그런데 거대한 세계경제 위기가 터지면서 정책 수단의 폭이 매우 좁아 졌습니다. 그뒤 지난 2년간 경기부양에 중심을 두고 왔는데, 이젠 이 정부의 발목을 잡습니다. 감세 정책이 경제 위기로 지출을 늘린 재정 정책의 발목을 잡습니다. 재정을 늘려야 하는데 세수가 줄어드는 겁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이명박 정부가 숨길을 트는 길은 정권 반대파들의 민주적 권리를 억누르는 쪽으로 달려가는 것밖에 없는 듯 보입니다. 당근으로 노동계급과 서민 대중을 달래기 힘들다고 보기 때문에 민주적 권리를 빼앗아 저항을 억누를 수밖에 없는 겁니다.

문제는 혐오스런 이 정권을 촛불항쟁으로 맞이했던 사람들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촛불 트라우마를 용산과 쌍용차에서 만회하려 했으나, 지배자들 자신도 그 과정에서 상당한 트라우마를 입었다는 게 용산참사 총리 사과와 올해초 한진중공업의 정리해고 철회 등에서 드러났죠. 

막대한 북풍 여론 몰이와 엉터리 여론조사를 뚫고, MB 심판 의지가 드러난 지방선거 결과도 저들의 트라우마를 다시 키울 듯합니다.[각주:1] 

이처럼 아무리 부르주아민주주의라도 그 안에 피지배계급의 저항과 자치의 요소를 반영합니다. 국가에게서 자유를 획득한 영역,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과 집회로 표현하고, 그것을 조직으로 구현해 제도화시키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이 민주주의는 피지배계급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명박 정부가 사법부 마녀사냥으로 3권 분립을 해쳐 부르주아민주주의마저 무시하는 듯이 보였을 때도 그 본질은 노동계급의 조직을 약화시키는 것이었던 거죠.

주목할 것은 부르주아민주주의 안에 포함한 피억압자들의 자치 요소 가운데 중요한 하나인 노동계급의 권리들 - 노동조합 결성과 행동권, 노동계급 기반의 진보정당, 언론 등 - 은 쉽게 건드리지 힘들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미 한국에서 탄탄하게 형성돼서 저들도 쉽게 승산을 따지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명박 시대 민주적 권리가 축소된 게 사실이지만 그 공포와 후퇴 효과를 과장하는 게 잘못인 이유입니다. 일각에선 이명박 정부를 파쇼라 부르며 반한나라 대동단결을 외치는데, 이는 단견입니다. 왜냐면, 정권 뜻대로 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30년 전 광주항쟁의 투사들이 그랬듯, 민주주의란 피억압 대중의 운동이 억압적 권력과 맞서는 형국에 따라 앞으로도 뒤로도 갑니다. 그래서 1970년대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싸우고, 1980년대 후반부터는 노동악법을 없애라 하면서 싸운 겁니다. 제도가 아니라 계급 세력관계가 핵심입니다.

운동은 조직과 사상이라는 성과물을 통해 경험과 이론, 인적 연결망을 현재의 것으로 남겨 둡니다. 운동이 탄력을 잃고 재구성됐어도 쉽게 성과를 건드리지 못하는 건 이 성과들이 조직으로 구현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탄탄하고 지속적이며 힘을 갖는 건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입니다. 노동조합 뿐아니라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등 진보정당들도 여기에 해당합니다.

민주주의를 거꾸로 돌리는 반동을 한다는 것은 이 사회 지배자들이 피억압 대중에게 허용하던 정치적 시민권을 제약하고 억압한다는 말로, 이는 가장 강력한 피억압 대중의 조직과 운동인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 권리를 공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게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남다른 조직력과 투쟁력을 보유한데다, 이들이 실제로는 사회를 운영하는 노동을 하기 때문에 무작정 학살할 수도 없구요. 이 조직들이 반동에 맞선 저항의 보루 구실을 하게 되는 이유죠. 그 점에서 촛불항쟁이 노동계급 중심의 변혁 사상과 결합하는 수준으로 발전할 기회를 갖지 못한 것은 아쉬운 일입니다[각주:2].

광주항쟁의 한계는 바로 이런 운동과 조직이 아직 한국 사회에 등장하기 전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한계였다고 봅니다. 전국의 지지 파업은커녕 광주에서도 파업 같은 노동계급 고유의 힘을 동원한 항쟁 참여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어찌할 수 없는 한계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광주항쟁의 존재는 1980년대 운동이 도약하는 계기가 됩니다. 전두환 정권은 유신 독재의 연장이었지만, 이 정권은 경제 발전과 더불어 더 유연한 정책을 펴야 했습니다. 

△ 1987년 현대중공업 노동자들의 투쟁 모습.


첫째, 광주항쟁이 운동의 발전에 도약대가 된 것은 평범한 노동 대중이 저항과 사회운영 능력에서 잠재력을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독재에 반대한다 해도 지역 유지·명망가와 정치인·기업주들이 포함된 수습위원회가 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광주항쟁 당시에도 호남전기 여성 노동자들이 조직적으로 시위에 참여했다는 최근 증언이 있고, 아시아자동차처럼 현장 노동자들이 항쟁에 협조한 사례도 있습니다. 시민군 사망자와 부상자의 절반 이상이 하층 노동자들이며 항쟁[시민군] 지휘부의 다수도 노동자 출신이란 점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이런 운동의 성격에서 배우고, 잘못되긴 했지만 혁명적 스탈린주의를 채택한 다수 운동가들이 대중의 잠재력에 바탕한 권력을 봉기로 타도하는 급진적 정치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노동운동의 발전 수준은 어느 정도는 경제 발전 수준의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자본주의가 자신의 무덤을 파는 세력을 만들어 낸다는 마르크스의 분석적 예언의 위력을 살인마 전두환도 피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전두환 시절, 정권에겐 운 좋은 3저 호황이 대중적 노동계급 운동이 탄생하는 토양이 됩니다.

민주화운동의 성장과 1980년대 중반 3저 호황에 따른 노동계급의 전반적 자신감과 노동운동의 성장은 1987년 항쟁의 수준과 조건을 1980년과는 완전히 다르게 만들어 놨습니다. 1987년 6월 민중 항쟁은 뒤이은 7~9월 노동 항쟁으로 민주주의의 진정은 어느 정도 불가역적인 힘을 획득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하고, 제대한 군바리로 정권을 넘기고(노태우), 일당 체제 안의 민간인에게 넘기고(김영삼), 그 다음엔 아예 정권을 넘깁니다(김대중). 그리곤 1987년 항쟁의 투쟁적인 명망가 출신들이 정권을 잡습니다(노무현).

이런 진보가 이명박으로 뒤집힌 건 순전히 점차 왼쪽으로 바뀐 정권들이 대중을 만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 성장의 역사에서 민주당의 실패도 봐야 하고, 노동자운동의 구실도 봐야 합니다.

둘째, 경제위기에는 저항을 하는 쪽이나, 억압하는 쪽이나 격렬하게 나설 개연성이 큽니다. 사소한 요구에서 시작한 저항이 격렬한 항쟁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1980년 서울의 봄과 광주항쟁 뒤에는 심각한 경기침체라는 배경이 있었습니다. 

1979년부터 시작된 경제위기 때문에 박정희는 노동계급 궁핍화 정책을 폈습니다. 한마디로 공공요금과 생필품 가격을 올리고(물가가 20퍼센트나 오름), 임금과 일자리 등 노동자들에게 돌아갈 몫을 줄여 기업주들을 보호하고 위기에 빠져 나가려 했습니다. YH무역 투쟁의 요구도 일자리 보호였습니다.

1980년은 1998년 전까지 유일하게 한국 경제가 마이너스 성장을 한 해입니다. 1980년 봄에만 유신 체제 아래서 벌어진 파업 수보다 많은 9백여 건의 파업이 벌어졌습니다. 강원도 사북에서도 광부들이 읍 전체를 장악하는 ‘사북항쟁’이 벌어졌습니다.

지금 세계경제 위기와 한국경제의 장기 침체가 겹친 상황에서 우리의 민주주의 요구는 정치적 시민권과 경제적 시민권 요구를 결합시키고 있습니다. 저들은 우리를 배고프게 하는 정책을 비민주적으로 추진합니다.

셋째, "국가의 주인은 누구인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 하고 광주항쟁의 투사들은 물었습니다. 오로지 노동자와 민중의 힘이 국가의 물리력을 정치·도덕·경제적으로 압도할 때만(그래야 우리 편의 진정한 군사력이 발휘될 수 있습니다) 국가의 무장력은 우리 앞에 무릎 꿇을 것입니다.

△ 이 강력한 힘이 사회 변혁을 위한 다수의 저항을 이끌어야 한다.

이런 투쟁이야말로 민주적 대안 권력의 씨앗일 겁니다. 그래서 가장 잘 조직돼 있고, 이 사회의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구실을 하는 노동계급 대중을 설득하고 동원해 조직하는 것, 이들의 힘이 나머지 피억압 대중을 끌어들이는 것, 이것들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 교훈을 종합하면, 정치·경제 위기에 처한 국가권력의 도발에 단호하고 단결한 저항이 필요하다는 겁니다.

이런 저항 행동의 사사을 알리고 주도하며 조직할 투사들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는 겁니다. 특히, 노동자운동 안에서. 그래서 운동이 정치·도덕적으로 무장하도록 고무해야 합니다. 

광주항쟁을 돌아보며, 민주당이 말해 온 역사적 화해가 아니라 기층의 노동계급 대중의 저항이 진정한 오월 정신이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김대중 정부가 집권하자마자 전두환을 사면한 것은 이 정부들의 불철저함을 증명한 것이고, 이후 10년의 배신을 예고한 사건이었습니다. 김대중 정권은 정치·경제 모두에서 민주적이지 않았습니다.

지금 그렇게 살아난 전두환을 계승한다는 당이 정권을 잡고 온갖 악행을 저지르려 합니다. 항쟁을 폭도로 왜곡하고 매도했던 언론이 여전히 진실을 쓰레기통으로 보내려고 발버둥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말로 광주항쟁이 부활해야 합니다. 투사들의 유언대로 그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위대한 전통의 이름을 팔아 겨우 꾀죄죄한 민주당 밀어주기나 하자는 세력이 있습니다. 그건 항쟁 정신을 모독하는 비겁한 짓이고, 무엇보다 항쟁의 교훈을 망각하는 어리석은 전략입니다.

우리가 바라는 민주주의는 단순히 절차적 민주주의, 의회정치의 정상화 요구에 머물 순 없니다. 표현의 자유와 먹고 살 권리가 모두 보장되는 게 진짜 민주주의입니다. 진짜 민주주의는 그래서 민중의 권력입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저항 열망이 단호하고 더 결의에 찬 항쟁, 즉 노동운동이 주도하는 민중항쟁으로, 민중권력으로 발전하도록 기대하고 노력하는 것이 진정한 “해방 광주”의 정신을 계승하는 것입니다. 

[끝]

※ 조금 수정해 올리려고 바로 공개하지 않았는데, 엄청 밀렸네요. 안 그래도 늦었던 건데 ㅠ.ㅠ
5월 초에 기획해서 쓰기 시작했는데, 거의 한 달이 밀려서 끝났네요.

  1. 저들이 이 반발을 친노 세력의 것 정도로 파악하고 대책을 내놓는 한, 헤어날 길은 없습니다. 노무현 정권은 사후정당화된 것이죠. 지나고보니(이명박 정권을 보니) 그때가 나았다. 한마디로 구관이 명관이다는 정서입니다. 그래서 민주당 친노도 이번 선거로 부활은 했지만, 반사이익의 성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잘해서 부활한 것이 아닌 만큼 심상정처럼 친노세력과 통째로 진보연합 하자는 건 도리에 맞지 않는 연합 방안이라 봅니다. 진보좌파는 노무현 정부를 그리는 대중 정서의 합리적 측면과 소통하되, 이제와서 진보연하는 친노 정치인들에겐 평가를 냉정히 하고, 과오 반성을 요구해야 합니다. 그 과정 없이 하는 연합은 진보연합이 아닙니다. [본문으로]
  2. 그것은 촛불항쟁에 조직 노동자운동이 경제적 힘을 동원해 해결자의 모습을 보여줘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러나 촛불항쟁 기간 동안 화물연대 파업 말고 별다른 노동자투쟁의 기여가 없었습니다. 이 역설은 반MB 전선이 노동계급운동이 주도하는 진보연합이 돼야 진짜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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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백히 이명박 정부와 집권당을 심판하는 선거였다. 북풍도 反전교조/구 정권 심판 구도도 먹히지 않았다. 많은 이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고 있을 것이다.

2. 광역에서 기초까지 자치단체장들을 많이 잃어 권위주의적 국가기구 통제를 강화해 정권재창출을 하려던 집권당의 전략은 일단 좌절했다. MB식 교육도 거부당했다. 정몽준과 정정길은 사퇴하고, 오세훈은 "사실상 졌다"고 말했다. 사기가 떨어지면 내분이 생기게 마련이다. 박근혜는 당권 장악을 노릴 것이고, 친MB계는 박근혜 등 속죄양을 찾으려 할 것이다. 

3. 그럼에도 이명박의 적자재정 만회 정책은 본격화할 것이다. 국가 채무 증가가 심각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정치 면에서 일부 양보가 있겠지만, 공공부문 민영화와 구조조정은 계속 추진될 것이다. 그러나 힘은 딸릴 것이다. 정치적 입지가 좁아진 이명박은 힘이 딸릴 것이다. 그래서 더 모르쇠로 밀어붙이려 할 수도 있다.



4. 한숨 돌린 반대파들에겐 기회이자 시험대다. 이전보다 저항에 나설 대중의 자신감이 더 커질 것으로 보인다. 맞서 싸우기 더 좋을 것이다. 그러나 더 단호해야 한다. 궁지에 몰린 쥐를 더 조심해야 하는 법이다.

5. 민주당은 상당한 성과를 거뒀지만, 자력갱생의 성과라기보다는 '반사이익' 성격이 더 크다. 한명숙 지지율이 투표일 닥쳐서야 오른 것은 사람들의 지지가 썩 흔쾌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텃밭인 호남에서도 무소속과 민주노동당이 약진했다. 투표에서 이명박을 심판할 수단으로 민주당을 선택했지만 민주당은 썩 좋은 무기는 아니다. 이명박의 가장 나쁜 정책들에서 민주당이 별 차이 없기 때문이다.

6, 정몽준이 노무현을 불러내 과거 정권의 유산을 심판하겠다고 하는 바람에 광역단체장 선거에 친노 직계 후보들이 거의 당선했다. 사람들은 지금 정부가 하는 말은 뭐든지 싫어한다. 광역단체장 이변의 주인공들은 모두 친노 직계들이다. 친노 세력은 복권됐다.

7. 진보
양당은 2006년보다 당선자를 두 배로 늘렸다. 민주노동당은 인천·광주·전남·경남에서 당선자를 늘렸다. 울산 북구는 4년 만에 구청장을 되찾았고, 인천에선 반MB연합의 덕으로 구청장을 두 개나 차지했다. 그 결과, 2006년보다 당선자가 70퍼센트나 늘었다. 진보신당도 25명의 당선자를 냈다. 서울에선 자력으로 네 명이나 기초의원을 당선시켰다.(이중 당선자의 4분의 1이 민주노총 조합원 후보다. 만만치 않은 비중)

8. 교육감 선거는 민주·진보 단일 후보들이 약진했다. 단일 후보를 10곳 내서 6곳에서 당선했다. 서울과 경기에서 이긴 것이 결정적이다. 인천에서 전교조 후보가 불과 3천 표 차이로 졌다. 광주와 강원에서도 전교조 후보가 여유있게 이겼다. 교육감 선거는 진보의 대승리다.

9. 우파 집권당의 패배로 전반적인 정치 지형은 더 왼쪽으로 옮겨갈 것으로 보인다. 선거에서 개발과 성장보다 복지가 쟁점이 된 것이나, 천안함 사고를 이용한 냉전적 북풍몰이가 통하지 않은 것도 그 방증이다. 대중의 보수화 신화는 산산조각났다. 행동과 달리 말은 더 진보적으로 하는 친노 진영의 부활도 여기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10. 민주당은 당분간 포퓰리즘 태도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차지한 광역단체들에서 4대강·무상급식 등 공약한 여러 쟁점에서 검증대에 오를 것이다. 공무원노조 문제도 있다. 정부 재정 악화가 지방자치단체 재정에 영향을 줄 수 있다. 다수가 된 서울시의회에서 서울지하철 등 지방공기업 구조조정 문제를 막아달라는 압력이 생길 것이다. 주적이 한나라당이고 민주당이 反MB 정서의 수혜자인 점(대중의 기대감)을 고려하면 민주당에게 개혁 약속들을 지키라고 요구하는 방식이 유용할 것이다.

11. 노회찬과 진보신당이 받는 비난들은 부당하다. 진보는 늘 양보하란 말인가. 오세훈 당선은 안타깝지만, 어차피 단일화 압박 때문에 지지 표를 뺏긴 것은 한명숙이 아니라 노회찬이다. 그 정도로 밀어줬는데도 낙선한 것은 민주당 자신의 탓이 가장 크다. 서울에서 자기 당 구청장 표도 다 못 받았는데, 정권 심판 구도로 얻은 반사이익 말고 스스로 얻은 게 뭐 있는가.

12. 길게 보면, 실용주의적 승리보다 진보의 독자 성장이 더 중요하다. 오세훈 낙선도 좋지만, 민주당이 맘에 딱 드는 대안인 것도 아니다. 이명박의 가장 나쁜 정책들 - 공공부문 민영화와 노동계급의 생활수준 공격 - 에는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는다. 그들도 기업주에 기반한 당이기 때문이다.

13. 장기적으로 노동계급 기반의 진보정당이 성장하려면 기업주와 기득권 세력에 기반한 정당들을 약화시켜야 한다. 물론 그것이 한나라당의 당선을 돕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민주당 대안론에 줄기차게 도전해야 한다는 뜻이다. 선거 결과로 진보정당에게 일정한 기회와 공간이 여전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그러나 反MB민주연합 노선으로 계속 가면 더 나은 대안을 제시할 기회를 잃어버릴 것이다.

14. 물론 이 문제에서 진보신당이 1백 퍼센트 진지하다고 볼 순 없다. 자신들의 협소한 조직적 이해관계가 더 컸을 수 있고 진보의 독자적 성장 전략에 일관되지도 단호하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노회찬의 완주는 진보의 대의를 대표했고 대변했다. 그래서 노회찬을 변호한다.

15. 심상정이 사퇴 전 경기 지역당협 위원장들에게 던진 메시지는 국참당을 포함하는 정계개편이다. 노회찬도 비슷한 문제의식의 ‘지방선거 후 개편[각주:1]’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민주당이 큰 성공을 거뒀기 때문에 민주당을 왼쪽에서 쪼개는 정계 개편은 쉽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민주당이 흡인력을 발휘할 가능성도 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이런 야권 재편보다 민주당과 직거래에 더 흥미를 보일 것이다. 그렇다고 진보신당이 진보연합의 구심점이 되기엔 지도력과 조직세가 너무 취약하다.

16. 진보 양당이 서로 경합한 선거구에선 대체로 성적이 별로였다. 지금 양당의 전략이 계속 되면 조직 노동자들을 민주대연합(사실상 민주당)과 진보정당 지지로 분열시킬 게 뻔하다. 그것은 투쟁력을 약화시킬 것이다. 투쟁을 잘 하려면 정치 영역에서도 진보 좌파의 재단결이 필요하다. 그러나 진보 양당의 경직된 양 편향은 이 과제를 어렵게 만들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민주당이 재편의 대상이 되지 않을 것이므로 진보연합이 더 현실적이 될 가능성도 있다.

17. 민주당과 선거연합 전략이 성공했고, 앞으로도 계속 돼야 한다고 보면, [진보정당은] 동맹자(민주당)를 고려해 일관되게 노동자들의 저항을 지원하고 이끌 수 없다. MBC 파업의 갑작스런 중단에도 이런 배경이 있었다. 지난해 노동법 개악 때도 민주당의 의회 활동에 의존하다 투쟁을 제대로 조직하지 못했다. 민주당의 근본 성격 때문이다.

18. 그렇다고 진보 양당, 특히 민주노동당을 더는 진보정당(또는 노동자당)이 아니라고 비판하는 초좌파들의 비판이 정당한 것도 아니다. 이런 비판은 자신들의 혁명적(?) 기준에 비춰 미달하면 모조리 좌파가 아니라는 건데, 이것은 구제하기 힘든 엘리트적 종파주의다. 현재 노동자운동의 발전 수준에 비춰봤을 때도 황당한 얘기다.

19. 이명박을 증오해 민주대연합에 소극적 지지를 보낸다 해도, 여전히 약점 많은 진보정당을 지지한다 해도, 결국 이명박과 싸우고 기업주들의 공세를 물리칠 주역들은 이 노동자들이다. 선거에서 이명박을 심판하고 싶어하는 노동자들이 투쟁에서도 이명박과 싸울 주역들이다. 이 노동자들과 함께 싸우고 경험하면서 배우고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

20. 反MB 전선(또는 구도)가 문제라며 反MB와 反신자유주의(자본주의)를 대립시키는 이들이 있다. 어리석다. 지금 한국 자본주의의 총자본 대리인은 이명박이다. 어떤 反MB냐가 쟁점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치와 투쟁에서 모두 다시금 反MB진보(좌파)연합을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 이제 선거 심판을 한 마당에 더는 기다리지 말고 자신있게 이명박의 다가올 공세에 저항을 준비해야 한다. 투쟁 의제를 중심으로 단결을 시작해야 한다. 투쟁은 단호해야 한다.




  1. 사실 지난해 가을부터 노회찬이 제시한 ‘민들레연대’가 바로 이 구상이다. 민주당에 속해있지만 정체성은 진보적인 인사들이 민주당 밖의 진보와 헤쳐 모여 비민주 진보야당을 만들자는 구상이다. 노회찬은 임종인 등을 언급한 바 있다. 최근에는 폴리뉴스(4.6)와 CBS(5.10) 등의 인터뷰에서 이를 분명하게 제시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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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광주항쟁 진행 과정에서 발견되는 새로운 점은 공식 언론에 대한 불신과 분노였습니다. 무자비한 진압에 격분한 시민들이 MBC와 KBS에 연속적으로 항의성 방화를 하고, <광주일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린 일이 지금도 중요한 사건으로 전해 집니다.

특히, 지금은 이명박 정부의 방송 장악 시도에 끝까지 저항하는 민주 언론의 보루처럼 여겨지는 곳이 MBC라 놀랍기도 합니다. 그러나 당시 두 방송국 모두 철저한 계엄 통제에 따른 보도를 했습니다. 현지 취재 결과는 보도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보도 행태는 시민들이 눈 앞에서 목격한 현실과 다르다는 점에서 실망과 분노를 안겨줬지만, 나중에는 시외 통화가 완전히 두절됐기에 더 공포와 증오로 다가 왔습니다.

사진의 오른쪽 동아일보가 왼쪽 조선과 달리 ‘소요’가 아니라 ‘데모’사태라 표현한 것이 눈에 띕니다. 동아는 올해 창간 90주년 기획 때 이것이 자신들이 민주언론인 증거라고 우기더군요. 데모사태와 소요사태가 다르면 얼마나 다를까요?


그때 <조선일보>가 가장 노골적으로 계엄당국의 발표를 그대로 옮겨 말그대로 소설을 씁니다. 나머지 언론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물론, 10·26 이후 줄곧 검열을 당해야 하는 계엄상태인 점을 감안해도 한국 기성 언론들의 무기력은 한심합니다.

기성 언론을 향해 불만과 분노를 드러낸 이런 행동에서 대중이 어떻게 행동과 경험 속에서 기성 언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목격 하고 체험한 사실과 정부와 언론의 발표는 정반대의 사실과 결론을 보여줍니다. 둘 가운데 하나는 거짓인 겁니다. 이제껏 거짓이라고 믿지 않았기에 초반의 당혹스러움은 이제 “간첩·폭도”의 난동이라는 정부와 언론을 향한 총체적 불신과 증오로 발전합니다.

이 시비는 광주 망월동의 신묘역에서 구묘역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 여기에는 김남주 시인의 ‘학살’ 등 오월항쟁을 다룬 시비들이 여럿 조각돼 전시되고 있다.

당시는 계엄 하에서 모든 언론사들이 검열 제도 아래 있었기 때문에 진실을 알아도 보도할 수 없었습니다. 광주·전남의 지역 일간지들은 계엄 당국이 발행을 중단합니다. 그때 <전남매일> 기자들의 절필 선언[각주:1]은 오늘날 여전히 정부와 대기업 광고주의 눈치를 보는 주류 언론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각주:2]

그래서 큰 규모로 대중이 참여하는 투쟁에서 대중은 늘 기성 매체의 신뢰성 문제에 부딪힙니다. 즉 운동이 떠오르고 그 속에서 각성한 사람들이 주류 언론에 대한 불신을 표출하는 것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당연히 그것만으로 완전히 지배이데올로기에서 탈피했다고 할 수는 없죠.)

그래서 새로 각성한 대중 일부에서는 때때로 거짓 매체들을 배격해 새 매체를 지지하거나 만들어 냅니다. 2008년 촛불운동 때도 다양한 비주류 매체와 개인 매체들이 그 구실을 했습니다. 

광주항쟁에서 <투사회보>가 그 구실을 부분적으로 했습니다. <투사회보>는 매우 미약했지만 독특한 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도청에서 계엄군을 쫓아낸 뒤, 공식 1호로 발행을 시작한 이 매체는 8호부터 <민주시민회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됐습니다. 제작은 총 10호까지 했고, 안타깝게도 마지막 10호는 도청 진압으로 배포되지 못한 채 전량 압수됩니다. 

이 매체를 발행한 이들은 들불야학이란 곳의 학생인 청년 노동자들과 강학[각주:3] 등으로 구성된 윤상원 그룹이었습니다. 이들은 19일부터 팀을 나눠 유인물을 배포하기 시작합니다. 취재와 문안작성, 제작과 배포, 물자 조달 등 역할 분담으로 나름의 체계를 갖췄습니다. 이것이 도청 장악 후 <투사회보>로 발전한 것입니다. 

<투사회보>는 광주항쟁을 존경의 눈빛으로 돌아보는 수많은 이들의 찬사를 받았지만, 사실 이 매체를 이끈 사상과 조직(대중과의 매개로서), 기술[각주:4] 면에선 매우 초라한 수준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도청 시민군 사이에서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는 증언들도 있지만, 실질 영향력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 매체의 제작과 배포 과정을 살펴 보면 대중항쟁에 영향을 미치려는 상대적 소수의 그룹과 대안적 사회주의 언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몇 가지 힌트를 배울 수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사회보>는 타이핑도 아닌 필사본 A4 한 페이지 짜리 매체였고, 밤새 일일이 등사를 해야 겨우 5천 부 남짓 뿌릴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윤상원이 항쟁 지도부의 대변인을 맡고 나서 투사회보는 광천동 야학에서 도청 앞 YWCA에서 제작되기 시작하며 인력과 제작 환경이 좋아지면서 한때 한 호에 4만 부가 넘게 제작·배포되기도 합니다.

A4 한 페이지라는 지면 한계상 분량은 적었고, 내용과 구성은 단순 명쾌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취재 결과를 바탕으로 그날의 상황을 요약하고, 매우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간단히 논평하며 다음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수준은 별개로 하고, 어쨌든 대안적 저항 언론이 갖춰야 할 항목으로 뼈대가 짜이긴 한 거죠.

예를 들어, 도청 장악 다음 날 나온 <투사회보> 2호는 타 지역 연대투쟁 소식을 알리며 지지가 확산되고 있다는 논평을 합니다. 아울러, 시간대별로 계엄군과 시민군의 동향을 보도합니다. 그리고 광주 KBS를 접수해 항쟁의 정당성을 알리는 방송을 하자거나, 외곽도로 봉쇄 등 해방 광주 방어를 위한 나름의 행동 과제를 제시합니다. 

내용 면에서 <투사회보>는 두 문제에서 분명했는데, ‘계엄군과 당국을 믿지 말자’, ‘무장 저항 태세를 포기하지 말자’ 가 그것입니다. (그래서 <투사회보> 그룹은 항쟁파 vs 투항파 논쟁을 거치며 항쟁파들 사이에서 인기가 올랐다고 합니다.)

취재는 항쟁이 벌어지는 전역에서 이뤄졌습니다. 광천 공단 등 중소기업 노동자이들이던 들불야학 그룹의 노동자들은 시민군의 일원으로서 항쟁을 조직하는 일들에 참여했습니다. 참여와 조직 과정이 취재 과정이었습니다.(물론 정보량이라는 면에서 역사적, 물질적 한계를 극복할 순 없었죠) 물자 조달은 종이와 등사기 등을 구하는 일을 별도 팀을 꾸려 수행한 것입니다. 

들불야학을 이끌던 윤상원 그룹은 전남대 학생운동과 광주의 친노동 시민운동과 연계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을 책임감 있게 수행했습니다.

<투사회보>가 (인기를 끌었다고 해도) 진정한 항쟁파의 구심 노릇을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 한계와 항쟁의 조직적 정치적 구심이 미약한 상황에서 매체를 통해 윤상원 등이 대중과 소통하고 개입하며 지도하려 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습니다. 

항쟁 자체의 한계와 (사실상 여기에서 비롯하는) 주체들의 사상과 조직, 기술(필진 포함)의 한계 등으로 안타깝게 더 잠재력을 발휘하진 못했습니다. (어쩌면 윤상원 열사의 죽음이 그 역사적 한계를 비극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워낙 위기가 첨예한 정국이라 지속적 항쟁이 아닌 불꽃처럼 무장 저항으로 폭발했다가 불씨만 남기고 일단 사그라 들었습니다. 이 항쟁이 고유의 사상과 조직, 매체를 남기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런데도 그 짧은 기간에 이 위대한 항쟁은 그 자체의 매체를 지향하는 맹아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 매체는 그 이름 답게 투사들이 발행하고, 투사들이 받아 읽어보며 투사들 사이의 소통에 기여했습니다. 모름지기 저항 언론은 대중의 운동을 조직하는 매체로서 성장해야 그 본래 목적을 구현할 수 있습니다.

<레프트21> 같은 언론이 가려는 길이 이 길입니다. 물론 <레프트21>은 단순히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매체를 넘어서 국제 계급투쟁의 경험을 일반화한 체계적이고 일관된 사상(마르크스주의)을 [일상과 투쟁 모두에서의] 구체적 경험과 결합시켜 변혁을 위한 전략적 과제부터 전술 과제까지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매체입니다. 그 과정에서 가장 전투적이고 일관된 투사들의 소통 매체가 될 수 있겠죠. 

MBC노조가 보도 투쟁을 하겠다며 파업을 멈췄지만, 오히려 파업 중단으로 기세가 꺾여 뜻대로 보도 투쟁을 하지 못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진정한 민주 언론은 ‘직업(임금노동이란 의미의)으로서 보도’가 멈추는 시점에서 시작돼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투사회보>는 후배들에게 진실을 위해 싸우는 용기, 단순명쾌한 의사 전달 방식의 효용성, 매체가 운동의 조직자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 등을 맹아적 형태의 교훈으로 남기고, 체계적인 변혁 사상의 발전과 매체를 뒷받침할 조직적 준비가 필요하다는 바를 비극적 결말을 통해 과제로 남겼습니다. 

(다음에 계속)

  1.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려가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본문으로]
  2. 여기에는 삼성 문제로 실망을 안겨 준 오마이뉴스와 경향신문, 한겨레도 포함된다. 이건희 경영 복귀를 다루는 시사인의 기사는 실망스러웠다. [본문으로]
  3. 주로 대학생들로 이뤄진 야학의 강사들을 가리키는 용어. 들불야학을 주도한 박기순, 윤상원 등을 따라 전남대생이 많았다. 1980년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도 한때 이 야학의 강학이었다. [본문으로]
  4. 기술은 단순 기술의 문제만 있는 것이 아니다. 기술의 사용력은 매체와 그 운동이 현대자본주의 생산력을 대표하는 노동계급과의 유기적 연관도를 간접적으로 보여 주는 척도이기도 하다. 의도적으로 기술을 천대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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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이명박은 천안함 사고를 북한의 도발로 단정하고 경고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천안함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전혀 의문점을 해소하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사단 발표는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있다)

결정적 증거라는 게 파란 매직으로 쓴 파란 1번 글씨[각주:1] 뿐이라는 건 이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던 사람들을 참 허무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합동조사단의 조사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70퍼센트가 넘는 조사에서도 대북 강경 대응에 찬성하는 여론이 과반을 넘지 않고, 이 사건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권 후보를 지지하기로 맘을 바꿨다는 사람이 그 반대 경우보다 많지 않거나 오차범위 안에서 많은 정도입니다. 딱히 현직 단체장인 한나라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각주:2].

오늘자 내일신문에서도 발표 신뢰가 70퍼센트가 넘는데, 증거가 부족하다는 응답이 5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경향신문에선 조금 줄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선거에서 정권 견제 투표를 하겠다는 응답이 다수입니다. 동아일보 여론조사조차 지방선거 지지 후보 결정에 별 영향을 못 미쳤다가 70퍼센트를 넘습니다.

이는 이 발표가 정부가 노린 최소한의 효과, 즉 보수층 결집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고, 정부의 엄청난 호들갑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정부의 ‘안보 위기’ 과장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고 있다고 볼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한국에서 북한 문

△북한 최고 포털사이트로 추정됨.

제가 가진 특성상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도 합동조사단의 결과에 마지못한 신뢰를 보낸 것이라고 봅니다. 거리에서도 ‘안보 위기’의 긴장감 같은 건 찾기 힘듭니다. 인터넷의 다양한 패러디와 풍자는 덤이겠죠. (☞ 이미지 모음)

이러니 거짓말도 아주 크게 치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말이 전해져 오나 봅니다. 합조단의 발표는 꼼꼼히 읽어보면 모조리 '추정'입니다. (합조단은 잘 모르나 본데, 북한도 한글을 쓰는 국가입니다)

합조단은 북한 잠수정의 침투·탈출 경로도 설명 못하면서(파악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 북한 소행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이러니 전혀 북한 정권에 우호적이 아닌 사람들도 정부 발표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합조단 발표를 믿지 않으면 ‘친북’이라 합니다.

심지어 자기 말을 믿게 하려고 미군과 한국군의 해상 방위 능력을 완전히 ‘이뭐병’ 수준으로 만드는 ‘자해’도 서슴지 않습니다. 늘 실패한 국가라고 비웃던 북한의 무기 과학은 세계 최첨단 기술로 격상됩니다. 결정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딱 ‘자해공갈단’ 수준입니다. “쳐맞아서 자랑이다”는 인터넷 패러디물의 비아냥은 이명박 정부의 거짓말과 진실 은폐에 염증이 난 사람들 심정을 대변해 줍니다.

△ 알았어, 욕하지마, 안 찍을께!

민주공화국’이란 나라에서 선출된 정부가 증거도 없이 무작정 정부 발표를 믿으라 강요하고, 믿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하니, 이젠 정부 자체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정부는 천안함 사고의 진상과 관계없이 대북 호전주의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정부 스스로 이 문제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문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쟁점은 ‘이명박 정부의 신뢰도’입니다. 그래서 정부의 발표가 진실이라고 믿을 이유도 없고 믿어야 할 정당성도 없습니다.

천안함 사건의 진상이 무엇으로 밝혀지든 한반도가 군사적으로 불안정해진다면, 그것은 이명박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이럴 때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발표를 믿어주는 게 이명박에겐 매우 큰 힘이 될 겁니다. 미국마저도 인정한다면? 정부가 생거짓말을 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합니다.

그러나 미국이야말로 이런 조작의 원조입니다. 미국이 1965년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면서 계기적 명분으로 내세운 사건이 통킹 만 사건(1964년)입니다.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가 통킹 만에서 작전 중인 미군함 매독스 호를 어뢰로 공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각주:3].

이 사건은 나중에 미국의 조작(자작극)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작된 증거로 10년이나 베트남 민중의 삶과 영토를 유린하는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각주:4].

이런 일은 21세기에도 반복됐습니다. 2002년 미국 부시 행정부는 유엔조사단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숨겨져 있다고 뉴욕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린 9·11 테러의 배후에, 즉 알카에다의 배후에 후세인 정부가 있다고 단정했습니다.

부시가 거짓 증거로 유엔의 지지까지 받아가며 침략 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국이 승리해 이라크를 점령하자 역설이게도 그 거짓말이 드러났습니다. 미군이 장악한 그 땅에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지껏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계도 전혀 밝혀진 게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 세계의 인구 다수가 전쟁 전부터 부시 행정부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전쟁 전인 2003년 2월에 이미 3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압력 때문에 미군은 군사 작전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라크의 저항세력도 강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결국, 부시의 거짓말은 들통났고, 이런 정당성 위기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실패에 주요한 배경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여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두 경우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광들은 진실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전쟁광들은 진실이 알려진 뒤에도 전쟁 노력을 곧바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명박도 안보 위기 조장 시도를 당분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교훈이 중요합니다. 어떤 무시무시한 전쟁광도 진실을 다수가 알아채고 저항에 나서는 걸
막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선 1996년 북풍 사건이 있습니다. 그해 총선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한국군 초소를 향해 총격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거에 이용하려고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의) 김영삼 정부가 북한 군부를 매수해 총격을 ‘요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전례를 봤을 때, 이명박은 우리가 믿든말든 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언동을 계속 해댈 겁니다. 46명의 죽음을 이용해 훨씬 더 많은 죽음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전쟁 몰이를 선동하는 겁니다.

그럴수록 정부는 심각한 정당성과 신뢰의 위기를 확인할 뿐이지만, 이미 도박을 시작했기에 바로 그 신뢰의 위기 때문에 더욱 과장과 호전적 선동에 매달려야 하는 신세입니다.

저들의 호전적 선동은 저들은 한 톨 만큼의 정당성도 없습니다. 전쟁 몰이에 필요해 46명의 죽음은 부각하지만, 정부와 군부의 무능만 드러내는 금양호 선원들의 죽음은 외면합니다. 저들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간 ‘산업 역군’에게는 단 한번도 그런 관심을 보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말하는 안보는 ‘국민의 다수인 평범한 다수의 안전’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저들에겐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 지배체제, 통치 질서를 지키는 게 ‘안보’입니다. 글자 그대로 그들의 안보관으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안전, 평화가 ‘안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 일부 인사들이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대응을 비판하면서 (민주당 일부 인사를 따라) '안보 무능' 어쩌고 한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적절합니다. 그건 저들이 소유한 의제 안에서 싸움을 거는 겁니다. (약간 과장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차라리 “전쟁이냐, 평화냐[각주:5]하고 묻는 게 낫습니다.

요즘 한국 군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국지전 정도는 해 보고 싶다는 듯 들리는데, 북한이 강경하게 반응하니 실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남한 군부와 집권당은 남북한의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를 한껏 이용하려는 듯 보입니다. 

친북 낙인 협박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해서 천안함 진실을 계속 캐묻고 이명박 정부의 신뢰도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과거의 북풍 전력을 끄집어 내 저들의 추악한 과거=진짜 진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안보 위기’를
빙자한 민주적 권리 억압을 비판하고 경고하며 싸워야 합니다. 이명박이 천안함 관련해서 미국 정부의 협조를 받는 대가로 주려는 것들(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 등)에 반대해야 합니다. 천안함 소재로 한 정쟁 중단 따위를 합의하면 안 됩니다.

△1천3백 톤 천안함을 박살내고도 그을림 하나 없이 멀쩡한 어뢰 추진축, 그 어뢰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무적의 파란 매직 글씨.

‘Made in MB’인 군사적 위기 조성에도 반대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한반도 불안정이 커진다면, 남북 양비론이 아니라 순전히 이명박 정부(와 이에 동조한 미 오바마 정부[각주:6])의 탓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일부러 대북 긴장을 조성해 국내 권위주의 통치 강화에 활용하는 행태에 맞설 수 있습니다. 대북적대정책은 민주와 복지를 갉아먹는 주범입니다.

‘파란색 1번’은 일종의 코드처럼 보입니다. 남한산 파란 1번들이 우리에게 ‘북한산’ 파란 1번이 결정적 증거임을 믿으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북한산’ 파란 1번의 증거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남한산 파란 1번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1천3백 톤 전함을 침물시키고 살아남았다는’ 이 파란색 1번’과 한동안 싸워야 할 듯 합니다.




  1. 1번만 증거로 인정하는 더러운 정부!!! ㅋ 이 어뢰가 ‘11번가’ 쇼핑몰에서 구입한 건데, 앞뒤가 지워져서 ‘1번’만 남았다는 설(說)도 있군요. [본문으로]
  2. 야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딱히 오르지 않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민주당이 지난 10년 동안 정말 별 볼 일 없는 행적을 보인 게 젤 큰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으로]
  3. 미국 의회는 이 사건을 빌미로 통킹 만 결의를 하고 이듬해 2월부터 침략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1971년 뉴욕타임스가 미 국방부의 보고서(펜타곤 페이퍼)를 인용해 조작 사실을 폭로했고, 훗날 당시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가 조직 사실을 인정합니다. [본문으로]
  4. 이 전쟁에서 베트남 민중은 2백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미군도 수만 명이 죽었으며, 파병 한국군도 5천 명 넘게 죽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5. 선거로만 치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막판에 써먹어 효과를 좀 봤죠. 이번 선거에서 통할지는 두고봐야 알겠네요. [본문으로]
  6. 한국의 어떤 정당도 이명박의 황당무계한 결정적 증거를 인정하는 미국정부를 비판하지 않고 있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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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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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세금

기사들 2010. 5. 17. 17:53


최근 보편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보편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약과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 복지국가 유지 비용을 감당하려면, 누진세도 늘려야 하고, 세금 내는 사람의 숫자도 더 늘어나야 한다는 논리다.

<한겨레>가 14일 보도한 것(아래 표 참조)처럼, 70퍼센트가 넘는 많은 국민들이 보편적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보편 복지국가를 유지하려 내는 세금 비용보다 돌아오는 복지 혜택이 더 많다면 해 볼 만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즉, [개인들이 받는 복지 수혜 비용을 사회임금이라 부른다면] 세금(노동자들이 시장임금에서 내는) 순(純) 사회임금이 더 늘어나느냐 마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바탕해서 보편 복지를 위해 보편 증세가 필요하다는 논자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 사회임금 문제와 관련한 더 초벌적인 내 분석은 (http://enlucha.tistory.com/40)을 참조하세요.]

대표적인 사회임금 중시론자인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정책보다 운동 … 노동조합 나서야”(<레디앙>, 423)라는 글에서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실장은 이 주장을 위해 근거 두 가지를 댄다
.

첫째
, 이명박의 감세 정책이 부자에게만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 실장은 노동운동이 감세 운동을 했던 과거를 비판하며 감세가 부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인게 드러났으므로 이제 노동자를 포함한 증세를 요구하는 게 맞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둘째
, “보편 복지처럼 증세 주체도 가능한 많은 사람일수록 좋다 … 중간계층이 공공재원 마련에 참여하며, 이들이 부자들의 재정 책임 이행을 압박하는 주체로 성장”할 것이다. 의무를 이행한 만큼 권리의식도 높아질 거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로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최근 내놓은 사회복지세 도입 요구안도 비판한다
.

상위 5% 계층만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진보신당의 ‘사회복지세’ 방안에 대해선 재검토가 필요하다. … ‘내라’보다는 ‘내자’가 훨씬 강력하다.” 

진보신당이 내놓은 사회복지세 요구는 소득세와 법인세 등의 고액 납부자에게 납부세액에 기초한 추가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대상은 주로 5퍼센트 고액 납부 개인과 기업에 집중된다.

오 실장은
사회복지세의 납세 대상이 너무 좁게 설정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복지세의 수입 목표액은 이명박의 부자 감세액 규모다. 이명박이 부자들에게 깎아 준 만큼 부자들에게 도로 내놓으라는 것인데, 이를 비판하는 것은 부자 감세를 원상 회복해야 한다는 오 실장 자신의 말과도 모순된다.

물론 세금을 더 내서라도 복지 혜택을 받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열악한 한국의 복지 현실이 진짜 문제다
.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먼저 증세하겠다는 의지를 제안하자는 오 실장의 “내자 운동” 계획이 옳다고 할 순 없다. 오 실장의 계획은 기껏해야 “병[증세] 주고 약[복지] 주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첫째
, 순사회임금의 획기적 증대 없는 노동자 증세는 빈부 격차를 더 심하게 한다.

부자감세는 정확히 말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법인세와 소득세, 특별소비세 등을 감면하면서부터다. 그뒤 지금껏 소득세와 법인세는 다시 오른 적이 없다.(↘, 사실 법인세는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감면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2006
년부터 소득이 낮아 근로소득세가 면제되는 노동자 비율이 줄고 있다.(50→43퍼센트) 각종 세액공제 등 절세 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로소득세 총수입액에서 상위 10퍼센트의 비중은 5년째 늘어 2008년엔 64.3퍼센트가 됐다.

정부가 부자 세금을 깎아주고, 노동자에겐 절세 혜택을 줄여 근로소득세를 내는 노동자 수를 늘렸는데도 총 세금 수입에서 기업주를 포함한 상위 집단의 비중이 커진 것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전반적으로 하락했다는 뜻이다
. 불평등이 확대된 것이다.

임금 소득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일방적인 “보편 증세”는 빈부격차를 더 크게 할 것이다
. 오 실장이 이 점을 간과하는 건 시장임금과 대비한 사회임금만 강조하지, 진짜 중요한 순 사회임금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세금이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에서 나간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보편 증세로 세금이 늘어 시장임금이 줄어든다면, 사회임금이 늘어나는 것이 조삼모사일 수도 있는 것이란 얘기다. 또 이런 태도는 노동자들이 시장임금을 올리려고 벌이는 투쟁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당연히 노동자의 지지를 모으기도 힘들어 보편 복지를 쟁취할 동력도 만들지 못할 것이 뻔하다

둘째, 먼저 세금을 올린다고 정부와 기업주들이 양보할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 2002~2006년 사이에 건강보험 재정의 절반을 정부가 부담하는 특별법을 만들었지만, 이 기간 동안 정부 미납금액 규모가 37천억 원가량이다. 예상 보험료 수입액의 20퍼센트를 정부가 내기로 한 바뀐 법에서도 지난해까지 정부는 액수를 채우지 않았다.

전면 무상급식은 이미 예산이 있는데도 정부와 기업주들은 반대한다
. 무상급식이 다른 보편 복기 욕구를 자극해 부자 증세 압력으로 다가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기금 고갈론 사기극을 벌인 끝에 지급율을 낮췄다. 정부가 연기금에 기여해 수혜 대상을 늘려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노동자들이 먼저 선 증세를 결의한다고 해도 그에 걸맞는 복지를 받으려면 결국 정부와 기업주를 상대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각주:1]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내자” 운동이 압력을 넣는 효과를 낼 거라는 생각을 순진하다고 보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해도 여전히 거친 투쟁의 과정이 남는다면, 자진 증세의 뜻을 모으고 선언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오히려, 권리(복지)에는 의무(증세)가 따른다는 저들의 복지 회피 논리에 도움만 주는 자충수가 되진 않을까.[각주:2] 오  실장 등이 진지하게 답해야 할 문제다.

오 실장은 “국가와 자본을 향한 요구투쟁 …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문제는 “요구 투쟁” 방식이 아니라 “요구 투쟁”이 더 강력하지 못했던 것에 있다.

“복지는 권리”라고 단도직입으로 말해야 복지병이나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는 저들의 담론 틀에 휘둘리지 않고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 뭉뚱그려진 사회임금 인상이 아니라 순 사회임금을 올리는 복지국가를 제안해야 한다. 그럴려면, 시장임금 인상을 가볍게 취급해선 안 된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감당 못 할 지경이 될 때에야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개혁을 거부하면 혁명이 올 것 같을 때
, 보편 복지를 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불평등한 현실을 생생하게 알리고 노동자들이 단결해 정부와 기업주에게 “보편 복지(권리)”를 “요구”하며 싸우도록 고무해야 하는 게 좌파의 할 일이다. 노동자에겐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다.

 


※ 이 글은 <레프트21>31호에 실린 내 “복지국가는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가능” 기사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1. 투쟁 없인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 마련한 버스준공영제 같은 게 나올 수 있다. 버스준공영제는 환승할인 서비스로 편한 면도 있지만, 세금이 서민 교통료 절감이 아니라 버스 회사들 이익 보전을 위해 쓰인다. 완전공영제가 우리의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이 바로 1997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 블레어 내각이 내세운 논리다. 이들의 ‘제3의 길’은 결국 사회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포장된 버전(좌파 신자유주의)에 불과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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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지난해 쌍용차 진압을 보며 많은 이들이 5월 광주를 연상했습니다. 2001년 대우차 폭력 진압 사건, 2005년 전용철 농민 사망 진압 사건(이때 경찰청장이 지금 철도공사 사장인 허준영), 2008년 촛불 과잉 진압 사건 모두 1980년 광주 진압에 '비유'됐습니다.

그래서 어떤 면에서 광주항쟁은 광주'학살'로 기억되는 면이 큽니다. 실제로 공수부대의 만행은 지금 읽어도 정신이 멍해질 정도로 잔인합니다. 그때 공수부대의 진압방식은 광주 지역 경찰과 향토사단(제31사단) 소속 계엄군마저 혐오감을 느낄 정도였으니까요.


저도 그때 광주에서 살았는데, 5월 19일(월) 도청 바로 앞 YMCA회관에 있는 유치원에 갔는데, 정오에 마쳐야 할 유치원이 그날따라 밥도 안 주고 오후 세 시가 넘도록 아이들을 보내주지도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어느 집도 애들을 데리러 올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전날부터 "금남로가 피바다가 됐다", "청바지 입은 사람(대학생을 가리킴)은 집안까지 다 뒤져 잡아간다"는 어른들의 대화를 듣긴 했습니다만, 만 일곱 살짜리 애가 그게 뭔 뜻인지 얼마나 알았겠습니까. 그때 집집마다 대학생이나 젊은 자식이 있는 집들은 애들 숨겨야 한다고 난리가 났던 건 기억합니다.

그날 오후, 아는 경찰을 따라 어머니가 저와 제 친구를 데리러 왔는데, 함께 온 경찰이 계엄군에게 굽신굽신하던 모습, 건물 밖으로 나오지도 못한 채 건물 밖에 도열한 군인들과 눈을 안 마주치려고 우리 얼굴도 안 보고 땅바닥을 보며 인사하고 배웅하던 유치원 선생님들의 모습이 생각납니다[각주:1].


그때 온갖 소문이 돌았습니다. 진압 과정에서 술냄새가 심했다는 증언도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공수부대 출신인 아는 어르신도 출동 전에 양주에 환각제를 타 준 걸 먹고 투입됐다는 말씀을 하신 바가 있긴 합니다. 1988년 청문회에서도 다뤄졌는데, 뚜렷이 사실관계가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각주:2].

국민의 안정을 지키려 존재한다고 믿은 군인이 국민을 개처럼 물어뜯은 이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의 충격이 이런 소문이 퍼지게 된 배경이라고 봅니다. 21 밤 세무서를 태운 것도 이런 배경에서 충격과 공포가 분노로 전환된 사건이었죠.  

동네 뒷산에서 놀던 10살짜리 어린이부터 골목 어귀에서 남편을 기다리던 임산부, 자식들 살려보려던 노인들까지 무고한 희생자들이 넘쳐납니다.

공수부대의 기본 진압 방식은 일단 사냥개처럼 사람들을 쫓아가 개처럼 두들겨 팬 다음, 남녀 안 가리고 발가벗겨 트럭에 싣고 가는 것입니다. 발가벗기는 것은 저항의지를 무력화하고, (옷이 없어) 도망을 못 가게 하려는 거라는데, 어떤 학자는 타이의 진압 방식에서 배운 거라고도 하더군요.


그렇게 트럭에 실려간 사람들은 공수부대 주둔지였던 상무대/전남대 등지로 후송되는데, 일부는 구속돼 고문 받고, 일부는 시신으로 발견되고, 일부는 행방불명됩니다.

"왜 찔렀지, 왜 쏘았지, 트럭에 싣고 어디 갔지" 하는 섬뜩하고 간결한 “오월의 노래” 가사는 있는 그대로 그날의 현장을 옮겨 놓은 것이죠.


특히 계엄군이 도청에서 쫓겨난 뒤, 비무장 민간인 학살이 더 심해집니다. 화순 가는 길목의 주남마을에선 마을 앞을 지나던 시내버스를 매복중인 계엄군이 집중 사격해 시내버스 승객 모두 사망합니다.

어느 정도로 사격을 함부로 해댔냐면, 송암동이란 곳에선 계엄군끼리 오인 사격을 해 서로 죽는 일이 벌어질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유탄에 맞아 죽는 집들이 있었고, 창문에 겨울 솜이불을 치고 밤을 맞는 집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는 불빛이 안 새 나가도록 하면서, 만에 하나 날아올지 모르는 유탄을 막아보려는 시도였습니다.

21일 헌혈하고 병원에서 나오던 여고생은 병원 문 앞에서 헬기의 조준사격으로 사망합니다. 시신 처리를 돕던 한 여고생은 시신을 쌀 포목을 구하러 시외로 나가다 왼쪽 젖가슴이 잘려 나가고 하복부에 집중 사격을 받은 처참한 시신으로 발견됩니다. 그밖에 말로는 못할 억울하고 기가 찬 참혹한 사연은 흘러 넘칩니다.

이밖에 30년째 행방불명인 분들도 적지 않습니다. 적지 않은 시신들이 계엄군 주둔지 근처 야산 기슭 같은 곳에서 발견됐습니다. 죽도록 팬 뒤, 이들은 트럭에 싣고 사라졌습니다. 일부는 상무대로, 일부는 전남대로. 일부는 이름모를 야산 기슭으로. 사실 망월동 묘지도 애초 공동묘지이던 곳의 맞은 편 언덕에 계엄군이 트럭으로 시신들을 싣고 와서 매장한 것이 시초입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의 한쪽 면은 분명히 '학살'입니다(대량 학살 같은 건 물론 아닙니다). 그러나 광주항쟁은 단지 '학살'로만 기억돼서는 안 됩니다. 광주항쟁의 다른 면, 더 중요한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시위대가 해산한 뒤, 16일에도 시위를 이어간 지역은 수원과 광주 두 곳 뿐이었고, 여기서 계엄령 확대를 예상하며, 행동지침을 분명히 공표한 곳은 광주 뿐이었습니다. 따라서 5월 18일은 학살의 시작이었지만, 저항의 시작이기도 했습니다.

서울의 봄은 신군부가 장악한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를 향한 저항이었습니다. 전두환이 “박정희 없는 박정희체제”에서 새로운 박정희가 되려 했다면, 대중은 박정희(독재자)가 없으니 이제는 박정희 체제도 끝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지역과 형태는 미정이지만) 충돌 자체는 필연이었습니다. 더구나 신군부는 부마항쟁 때처럼 하면 진압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처럼 이번에도 공수부대를 바로 투입합니다.

공수부대는 수도경비사령부와 함께 박정희가 미국을 졸라 주한미군의 한국군 작전통제권에 포함되지 않도록 만든 독재정권의 친위부대입니다. 한마디로, 독재자의 사냥개로 훈련된 군대입니다.

그래서 전두환은 12·12 쿠데타 때, 육군본부만 습격(계엄사령관인 육군참모총장을 체포)한 게 아니라. 수경사와 특전사의 사령부를 점령합니다. 쿠데타 성공 후 수경사 사령관에 노태우, 특전사 사령관에 정호용이 임명됩니다.(특전사 작전참모엔 장세동) 그래서 12·12는 사실상 실권을 장악하는 쿠데타인 겁니다.

저항이 일어나면 강경하게 짓밟겠다는 뜻은 처음부터 분명했지만, 광주를 일부러 목표로 삼았다거나 하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봅니다[각주:3]. 광주가 살육과 저항의 현장이 된 가장 큰 이유는 5월 18일 유일하게 계엄령 전국 확대 조치에 반발하는 자생적 대중 시위가 일어났기 때문입니다[각주:4].

목적의식적 봉기는 아니었기 때문에 학생이 중심인 시위 형태의 저항이 민중 항쟁으로, 무장 항쟁으로 발전한 것은 구체적 사태 발전에 따른 결과들이었지만, 그 때문에 광주항쟁의 성격을 학살에 놀란 시민들의 우발적 저항으로만 보는 것도 부족한 해석이라고 봅니다.

정리하면, 어디선가 일어날 일이 광주에서 일어났다는 겁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광주의 특수성은 보편성(전국적 성격)과 통합된 실체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광주의 대응이 다른 점을 살펴 보는 건 특수성이 아니라 오히려 보편성(전국적 성격)을 주목하는 시도입니다.]
 
그때 전남 인구가 전국의 10퍼센트를 넘었지만, 전국의 5백 명 이상 대공장 가운데 2.6퍼센트만이 전남에 있었습니다. 1978년 광주공단 실태조사 보고서를 보면, 영세작업장이 대부분이고 평균임금은 전국 평균의 절반에도 못 미쳤습니다.

유신 체제를 향한 불만과 분노가 전남 지역에서 더 폭넓은 정서가 되는 데에는 
자본주의적 불균등발전 현상에 기초한 의도적 지역 차별 정책이 한몫 했습니다. 유신 정권의 지역 차별이 유신체제의 억압과 달라 보일 리 없습니다. 여기에 김대중마저 연행했으니 신군부의 5·17 조처는 억압의 연장이요, 절망의 연속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때 광주 민중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저항을 시작합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흔치 않게 도심 무장 저항을 벌였고, 일시적 승리를 거뒀으며, 계엄군이 물러간 도시에서 훌륭하게 자치 능력을 펼쳐 보입니다[각주:5].

부상자 치료는 민간 의원일지라도 무료였습니다. 부상자 운반과 헌혈, 시신 발굴과 처리 등은 시민들의 자발성에 바탕해 체계 있게 이뤄집니다.나중엔 완전히 봉쇄되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 고기, 기타 반찬거리들의 공급이 팍 줄었는데도 가격은 거의 뛰지 않았습니다.

양동시장 상인들의 주먹밥 공급을 시작으로 많은 시민들이 시민군과 시위대에게 식사 제공을 했습니다. 제가 살던 동네에도 시민군들이 짚차를 타고 와 동네 주민들이 이런저런 것들을 챙겨 줬습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 짚차가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었습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학살이면서 항쟁입니다. 그러나 본질은 민중 무장 항쟁입니다. 살육당했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거기에 맞서 싸웠다는 겁니다. 그래서 광주항쟁은 영원히 우리의 역사인 겁니다.

학살만 강조하면 패배적 해석(심지어는 일부러 광주의 저항을 유도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포함해)을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해석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항쟁의 주역들은 단순한 희생자들이 아닙니다.

항쟁의 측면을 강조하면, 우리는 이후 한국 현대사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게 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무장저항으로 불법무도한 군부권력에 맞섰던 항쟁의 주역들을 정당하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끝내 패배한 한계마저 실천적 교훈으로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다음에 계속)

  1. 그때 YMCA 회관 바로 앞에 전일빌딩으로 이어지는 횡단보도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치원(YMCA 회관)을 나오면 바로 횡단보도인 거죠. 그 횡단보도 양쪽으로 계엄군이 도열해 있으니 고개를 들면 계엄군과 눈이 마주치게 됩니다. [본문으로]
  2. 이 증언이 사실이든 아니든 사건의 본질이 바뀌진 않는데, 사실처럼 이 소문이 도는 것은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투입됐던 군인들도 그렇게 자신을 변호하지 않으면 양심의 가책으로 살기 힘들겠죠. [본문으로]
  3. 계엄 확대와 동시에 대학교 등에 계엄군이 진입·검거·주둔에 나선 것은 광주 만의 현상이 아니라 전국 동시다발로 이뤄진 일입니다. [본문으로]
  4. 이 배경은 링크한 레프트21 31호의 제 기사에 간략하게 제시해 놓았습니다. 참조하시길. 한편, 심약한 어떤 분들은 그래서 아예 저항을 안 했으면 비극이 안 일어났을 거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랬다면 더 오랜 기간, 더 많은 사람들이 군사독재의 위세에 눌려 살아야 했을 겁니다. [본문으로]
  5. 조정환 씨는 최근 ‘공통도시’라는 책에서 이런 자치공동체를 신자유주의에 대항한 제헌권력이었다고 평가하는데, 이는 관념적 과장이라고 봅니다. 당시 항쟁은 이념적으론 대단히 초보적인 수준이었고, 이념적·전략적 봉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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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5·18 광주항쟁 30주년 -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국가보훈처가 5월 18일 광주민중항쟁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식 식순에서 빼기로 했다는군요. 지난해엔 별도의 기념가를 공모하려다 취소하더니.


임을 위한 행진곡은 진정한 광주항쟁 투사들의 정신을 올곧게 실현하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불러 온 노래입니다. 민중의례라는 형식보다 정신이 중요하다 해도, 이명박 정부 따위가 기념식에서 배척할 노래는 아닙니다.

사실 불가피하게 저항에 밀려 5월 광주민중항쟁의 진실 규명과 복권을 더는 미룰 수 없게 된 1988년부터 한국의 지배자들은 그 과정에서 어떻게든 그 진정한 정신과 의미를 축소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처음 관련법을 제정할 당시 국가의 보상이냐 배상이냐가 논쟁됐습니다. 배상이란 자신의 잘못으로 일어난 일에 피해 비용을 지급한다는 것이고, 보상이란 자신의 잘못이 없는 상태나 쌍방이 실수한 상황의 권리 다툼에서 비용을 문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5월 항쟁의 피해자에게 국가가 배상하는 것은 진압 자체가 잘못이었다는 것이고, 보상이라면 정당한 진압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피해자가 나왔으니 일부 피해 비용을 주겠다는 겁니다.

이 차이는 계엄군의 진압 행위가 정당했냐는 논쟁으로 소급됩니다. 1988년 청문회 때도 논쟁된 사안인데, 이때 전 중학생이었습니다.

광주 문제였기 때문에 우리 학교는 수업 중단하고 선생님과 학생들이 함께 교실마다 있는 TV로 청문회 생중계를 봤는데, 당시 공수부대 여단장인 자들이 나와서 거짓말 해대는데 다들 욕을 하면서 봤습니다. 그때 노무현, 이해찬 등이 송곳 질문으로 인기를 끌었었죠. (정치인으로서 그들에 걸었던 기대감은 20대에 와서 실망감으로 바뀝니다)

보상을 말하는 이들은 합법적 진압 행위의 ‘정도’가 지나쳤다는 것이고, 배상을 말하는 이들은 신군부 자체가 불법 권력 찬탈 집단이므로 계엄 확대 자체가 불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훗날 전두환과 노태우 일당이 처벌될 때, 법적 쟁점은 광주 진압이 아니라 12·12를 내란죄로 판결하는 문제였습니다[각주:1]. 기사에서 지적했듯이, 12·12에서 5·17계엄확대/5·18항쟁은 연속선 상에 있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내란죄 해석에 따라, 광주 항쟁은 비록 민주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나마 국가기념일, 국가유공자가 되고 신묘역은 국립묘지가 됐습니다.

저는 내란죄 해석을 지지하면서도 무장 저항 자체는 어느 경우에도 옳았다고 봐야 한다고 봅니다. 계엄 해제와 민주화 일정 이행은 민중의 광범한 요구였습니다. 따라서 이 저항을 짓밟으려 한 계엄 확대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게 합법 권력이든 아니든) 용납될 수 없는 도발이었습니다.
 


그래서 명칭 문제도 중요합니다. 국가의 공식 명칭이 광주사태에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바뀌었지만, 다수의 5·18 관련 단체들과 민중운동 진영은 민중항쟁이란 명칭을 고수합니다.

국가의 군대에 맞서 무장 저항을 했는데, '민주화운동'이란 용어는 뭔가 좀 밋밋하잖아요. 민중항쟁이나 민주화운동이냐는 이 무장 저항의 정당성을 둘러싼 호칭 싸움입니다.

민주화운동이란 명칭에는 무장항쟁의 정당성과 필연성을 인정하지 않고 단순한 우발적인 ‘비극’으로 치부하는 해석이 깔려 있습니다.


국가권력이 민주주의를 힘으로 뒤엎으려 할 때, 민중의 자위적 무장이 정당하다고 보는 게 광주항쟁을 올바로 인정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의 신묘역 조성 과정에서도 논쟁이 있었습니다. 애초에 김영삼 정부가 1993년 특별 조치를 발표할 때, 당시 계엄군이 주둔했던 상무대(당시 전투교육사령부 부지터, 지금은 이전함)를 비워 그 부지에 기념공원을 만들려 했습니다. 망월동 묘지 확장도 공언했습니다.

그런데 망월동 묘지는 이미 광주항쟁 전사자들 뿐아니라 이한열, 강경대 등 민주화 열사들까지 묻힌 민주화의 성지처럼 돼 있었습니다. 그래서 신묘역은 상무대가 아닌 구묘역 옆에 조성됐는데, 대신 5월 항쟁 관계자만 이장토록 했습니다. 그래서 민주화 열사들과 광주항쟁을 분리시키려는 의도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았죠.

결국 5월 항쟁 사망자들이 이장됐지만, 대신 구묘역을 예전 모습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돌아가신 화물연대 박종태 열사, 2003년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외치며 분신하신 근로복지공단 이용석 열사 등이 여기에 묻혀 있습니다.

한마디로 망월동 구 묘역은 광주항쟁과 오늘의 운동을 연결해 주는 창 같은 구실을 해 왔습니다.
구 묘역에서 광주항쟁은 오늘의 역사인 반면, 신 묘역에서 광주항쟁은 어제의 역사이기 쉽습니다.

지난해엔 옛 전남도청 건물을 허는 문제가 쟁점이 됐습니다. 옛 전남도청 건물은 광주항쟁의 핵심 유적지이자 시민군의 정신이 담긴 곳입니다.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하는 시민들.


△지난해, 광주 메이데이 집회, 검은 천이 내걸린 곳이 옛 전남도청 별관. 노동자들이 든 팻말들을 살펴보면, ‘구 도청 사수’란 팻말이 보인다.(사진 왼쪽)


도청 앞 광장은 광주 시민들이 계엄령 확대가 일어나면 모여 저항하기로 결의한 장소이면서, (그래서 시위대는 학살 진압을 뚫고서 "도청으로, 도청으로" 향했던 겁니다)  “해방 광주”의 거점이자 심장부였습니다. 시민군과 저항 조직은 모두 이 곳을 중심으로 이뤄졌습니다. 최후 항전 장소도 바로 이 전남도청이었습니다.

지금은 도청 기능 자체는 전남 무안으로 옮겨갔지만, 이런 역사성을 볼 때, 도청 건물을 부순다는 것은 광주항쟁 정신과 역사의 보전에 대한 도전인 것입니다.

일단 지난해 철거 계획은 유보됐지만, 최종 해결이 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는 사적지는 원형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이 과정에서 광주지역 단체들이 분열했는데, 진보 양당도 의견이 갈렸습니다)

지금 사적지가 많이 사라졌습니다. 최초 시위 장소인 전남대 정문, 사상자가 많았던 시외버스 터미널(롯데백화점이 들어섰습니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상무대는 김영삼의 정부의 5·13 발표[각주:2](1993)로 광주시에 무상 제공돼 지금 신도심(새 시청과 번화가, 고층아파트가 들어선)으로 바뀌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기사에 작은 실수가 있는데, 5월 18일이 법으로 국가기념일이 된 것은 김대중 정부 들어서가 아니라 김영삼 정부 마지막 해인 1997년입니다. 죄송)

시외버스 터미널 앞의 잔혹한 진압 소식은 이날 이 터미널에서 전남 각지로 가는 사람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상무대는 당시 전투교육사령부가 있던 곳으로 전남 지역 계엄군 지휘부가 있던 곳입니다. 공수부대에 잡힌 사람들이 이곳에서 고문당하고, 구속되고, 살해당하고, 재판받았습니다.

투사회보를 만들던 금남로 전일빌딩 뒤편의 YWCA 건물도 철거됐습니다. 저는 이런 민주항쟁의 역사는 원형 그대로 보존해 후세에 그 현장의 치열함을 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망월동 신묘역이 국립묘지가 된 것은 당연히 광주항쟁 투사들의 승리고 정당한 귀결입니다. 한편, 어떤 면에서는 역사를 기억하고 기념하는 방식이 잘못되면 박제화될 위험도 새로 생긴다는 점은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 딜레마는 이런 데서 나타납니다. 5·18 국가기념일 기념식에 이명박이 오는 걸 어떻게 봐야 할까요? 오면 안 되는 놈인데, 안 오면 안 오는대로 또 괘씸한 일입니다.


이 딜레마는 5월 광주민중항쟁을 국가기념 행사로 단지 가둬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광주 민중 무장 항쟁의 정신은 법적 성과에만 머물러선 안 되고, 그 기초 위에서 더 많은 현재의 투쟁들과 연결돼야 합니다. 진정한 해방광주의 정신은 박제화된 기념이나 관제 국민통합 메시지가 아니라[각주:3] 저항과 연대의 투쟁 전통 속에서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에 계속)


  1. 이때 검찰이 그 유명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발표를 하죠. 나중에 대중투쟁의 압력에 밀려 검찰은 다시 기소를 하고, 1심에서 사형을 구형합니다. [본문으로]
  2. 김영삼은 집권 후 3월 망월동 묘지 참배를 시도합니다. 그러나 그때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시위로 이를 막았습니다. 김영삼은 유화 조처로 5월 13일 특별 담화를 발표해 △망월동 묘지 확장 △상무대 무상 제공 △관련자 전과기록 말소 등의 조치를 발표합니다. 그 대가로 추가 진상규명과 관련차 처벌은 넘어가자는 거죠. 저는 그때 학생들이 잘했다고 봅니다. 제대로 된 진상규명과 사후 처리 없이는 학살자들과 손잡은 대통령이 그곳에 발을 들여놓을 순 없는 겁니다. [본문으로]
  3. 학살자는 여전히 반성하지도 않고 제대로 처벌받지도 않았으며 그 자들을 존경하는 자들이 정권을 잡아 개판을 치며, 그때 왜곡보도에 앞장섰던 찌라시들이 아직도 왜곡보도를 일삼는 등 투사들이 바랐던 민주주의가 오지도 않았는데 웬 화합과 통합이랍니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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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복지국가는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가능


오늘(12일) 참여연대 느티나무홀에서 “보편적 복지와 6·2 지방선거”라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습니다.[각주:1]

제가 볼 때 이 토론회를 특징짓는 주요 쟁점은 세 가지였습니다.

첫째는 지금 '개발'에서 '복지'로 사회 흐름이 바뀌고 있다는 주장입니다. 
둘째는 재원 마련을 어떻게 할 것이냐 였습니다.
셋째는 보편주의 복지와 선별주의/잔여주의 복지와 관계 문제였습니다.


조원희 국민대 교수는 10년 넘게 급진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린 한국사회에서는 위기를 계기로 진보와 복지 쪽으로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고 주장했니다. 

고양에서 온 엔지오 활동가는 지방선거 공약 공모를 했는데, 예년과 달리 개발 공약은 없고 삶의 질과 관련된 공약이 다수였다고 증언했습니다. 이를 두고 사회자인 이상이 교수는 고양은 중산층 도시이므로 고양의 변화는 중산층의 변화를 보여준다고 덧붙였습니다.

<한겨레> 이창곤 기자는 최근 <한겨레>가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 지지 정당과 관계 없이 보편 복지를 바라는 여론이 다수였다고 밝혔습니다.(곧 기사로 나온답니다)

올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이 주요 선거 이슈가 되고, 전면 급식을 지지하는 여론이 압도적인 점과 그래서 민주당까지 나서는 걸 감안하면, 확실히 변화가 있는 듯합니다.

그동안 10년 가까이 위기의 깊이와 폭이 더 커졌다는 방증이라 봅니다. 보편적 복지국가를 지지하는 사람으로서 어쨌든 반갑고 힘이 되는 토론이었습니다.

둘째, 재원 문제는 누구나 중요하다고 인정했지만, 이번 선거 공약과 관련해서는 속시원한 해답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민주당 발표자(추경민)는 아동수당을 예로 들며, 만1세까지 주는 걸로 공약을 짰다고 밝혔습니다. 재원 때문이죠. 아울러, 한명숙 서울시장 후보가 내세운 무상급식·무상보육을 하려면 중앙정부가 떠안아야 할 몫이 있는데, 이를 거부할 경우 지방정부로선 난처해 진다고 말했습니다.

진보신당 발표자(장석준)는 역시 재원 문제 때문에 아동수당을 만 3세까지 주는 걸로 공약을 만들었다고 밝혔습니다. 건강보험도 보장성을 올리되, 재원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이를 위해 보험료를 함께 올리는 계획을 내놨다고 밝혔습니다.

민주노동당 발표자(고영국)는 아동수당 지급 연령을 만12세까지로 하겠다고 했지만, 대신 액수는 적게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습니다. 기존 예산에서 조정하는 게 쉽지 않다는 겁니다. 다만, 제도 도입에 상징적 의미를 더 두자는 차원에서 연령만 과감하게 올렸다는 겁니다.

저는 민주당 쪽의 설명을 들으며, "결국 제대로 하겠다는 의지보다 당선도 되기 전에 한나라당 때문에 하기 힘들다는 알리바이부터 대는구나" 하고 있었는데!! 뒤이어 발제한 진보정당 정책 담당자들도 별로 다르지 않았습니다.

더 아쉬운 것은 민주당의 책임회피식 자세를 비판적으로 언급하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심지어, 조원희 교수 등이 복지를 주장할 진보정치세력이 그동안 제로베이스에 있었다는 듯이 주장했는데도 반론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두 진보정당은 모두 부자 감세를 철회하고, 누진적인 증세를 해야 한다는 정책을 갖고 있습니다. 4대강 같은 토건 예산 가운데 상당액을 복지 예산으로 돌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동수당이란 것도 애초에 없던 것이므로 뭐 두 살이든 열 살이든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닙니다.

제가 우려한 건 복지제도 요구에 접근하는 이들의 관점입니다. 복지 요구에 재원 계획을 함께 내놓는 건 당연히 중요합니다. 이유는 그것이 복지에 드는 비용을 누가 부담해야 하느냐를 제시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진보진영의 재원 계획에는 부자들에게 책임을 묻는 논거와 요구가 포함돼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재분배일테니까요. 그래서 저들이 돈을 댈 여력이 있다는 것, 그 여분의 돈이 엉뚱한 데 쓰이거나 부자들 호주머니로 들어간다는 점을 선명하게 밝혀야[각주:2]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주류 집단(관료/언론/기업주 등)에게 책임(수권능력) 정당으로 인정 받으려는 목적이라면 오히려 진보정당의 발목을 잡을 겁니다.

이리 되면, 요구를 실현할 수단으로 재원 마련을 궁리하는 게 아니라, 있는 재원 안에서 요구를 조정하는 식으로 본말이 전도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석준 씨가 건강보험료 인상과 보장성 강화를 연결하는 설명이 딱 이랬습니다[각주:3].

지금 같은 기업주와 부자들이 금고를 꽁꽁 숨겨놓으려 하고 정부도 재정적자에 민감해지는 경제 위기의 시대에 재원 먼저 걱정하게 되면 제대로 요구를 내걸 수 있을지, 요구를 내걸더라도 제대로 싸울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앞서 살폈듯이 사회 분위기가 바뀌고 있습니다. 이 조건에서 민주당이 무상급식을 지지하는 쪽으로 옮겨온 것인 만큼 진보진영은 여기서 상황을 더 급진화할 수 있도록 하는 게 필요한데[각주:4], 진보 정치세력은 더 온건해지는 쪽으로 상황에 적응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앞서 인용했듯이, 한명숙, 유시민 모두 집권 시절 무상급식에 반대했던 양반들입니다. 민주당의 정책 실행 의지를 아직 완전히 믿기 힘들기 때문에 무상급식 하나만 봐도 진보정당의 독자적 구실이 필수적입니다.

그런데 진보 양당은 오히려 반mb 단일화란 명분으로 민주당과 보조를 맞추는 문제에 다들 걸려 넘어져 있습니다. 민주노동당은 이 길로 미친듯이 달려가면서 진보의 단결을 내팽개치고, 진보신당은 우왕좌왕 좌충우돌하면서 혼란과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이 두 당의 따로 놀기와 민주대연합 문제로 진보의 동력이 약화된 거죠.

이런 문제들이 복지가 화두인 선거에서 보편 복지 정책의 선두주자인 진보 양당이 거의 두각을 못 나타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론, 2000년 이후 이번처럼 진보정당의 존재감이 없는 선거는 처음입니다.

한편, 발제자 중 한 분인 인하대 윤홍식 교수는 보편주의/선별주의/잔여주의를 엄격히 구분해야 한다고 하셨는데 일리 있는 지적이라고 봅니다.예를 들어, 65세 이상 노인에게 지급하는 기초노령연금은 보편주의 제도지만, '65'라는 선별 조건을 부과하므로 선별적 보편주의 제도라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윤 교수는 보편/선별주의는 조합이 가능하며, 보편주의의 대립물은 선별주의가 아니라 자산조사에 기초해 특정 계층에만 복지를 지급하는 잔여주의 복지라는 겁니다.

잔여주의 복지는 권리로서 복지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굶어죽지는 마라 하고 주는 시혜성 복지 (철학이자 제도)로 오히려 복지의존성(우익들이 말하는 복지병)을 더 강화합니다. 경제적 자활 능력이 생기면 복지 혜택이 사라지니까요.

여기에 '잔여주의'란 용어가 어려워 대중이 쉽게 알아듣지 못하는 불편함이 있다는 이상이 교수 등의 반론 비슷한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에 윤 교수는 선별주의 대응이 효과적일 때도 있는데, 보편주의와 선별주의 관계를 잘못 이해하면 대응을 잘못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에게 (일반인에겐 그닥 필요 없는) 편의 시설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문제가 있습니다.(윤 교수가 말하려고 한 바는 신사회 위험으로 보이는데, 구체적 사례를 들지 않아 그냥 제가 이해하기 쉬운 사례로 들어봤습니다)

고무와 걱정과 유익한 정보를 함께 준 토론회였습니다.

※ 그밖에도 토론해 볼 만한 다양한 쟁점들이 있었는데, 이 한 편의 글에서 다 다루기는 힘들 듯합니다. 늘 그랬듯이 또 한번 미뤄야죠. 출구전략과 보편 복지를 연관짓는 시각도 흥미로웠구요, 복지국가를 사회정책+경제정책으로도 보는 시각도 사회투자론과 연결해 토론해 볼 만한 주제라고 봅니다.

  1. 주최 단체는 참여연대와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지역복지운동단체네트워크, 한국여성단체연합. [본문으로]
  2. "부자에게 세금을, 서민에게 복지를"이란 구호는 이런 정신을 반영한 구호였습니다. 이상이 교수가 이 구호를 진보적 잔여주의 구호라 비판하는 것은 왜곡입니다. 민주노동당이 이 슬로건을 내걸었을 때 요구한 것은 부유세를 만들어, 보편주의 복지제도인 무상교육과 무상의료를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본문으로]
  3. 이 계획은 국민들이 선 보험료 인상을 결의하자는 겁니다. 그러나 보험료를 올리는데 다수가 동의해도, 보장성을 높이려면 '보험료 인상 결의'를 무기로 결국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보장성 확대를 위한 '투쟁'을 '보험료 인상'으로 대체하려는 게 이 계획의 핵심으로 보이는데, 결국 투쟁이 필요하다면, 이 계획은 사람들을 설득하는데 모순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으로]
  4. 대중적 지지를 받는 무상급식을 민주노총 등의 투쟁 의제로 삼아 대중 캠페인을 건설할지, 아니면 무상급식보다 더 포괄적이고 급진적 요구를 제출할지 하는 논점이 있습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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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레프트21> 독자 연행의 배경 - 진실을 말한 죄?
연행된 김지태 씨의 글: 진실을 알리기 위해, 탄압에 굴하지 않겠다”
독자들이 보내준 응원글 모음: 연행자를 응원하는 <레프트21> 독자들의 목소리
사건 직후 첫 기사: 정부 비판적인 진보 언론에 대한 마구잡이 탄압


7일 강남역에서 <레프트21>을 판매하다가 연행되신 분들이 어제(10일) 밤 연행 47시간 만에 풀려 나오셨습니다.

서초경찰서는 유치장 안에서도 인권 침해를 수차례 저질렀더군요.
반말에 욕에, 변기가 막혀 직원 화장실 좀 쓰는데 빨리 나오라고 욕하질 않나, CCTV도 있는데, 캠코더를 유치장 방 앞에 세워놓고 찍질 않나. 참.

결국 첨엔 사상검증, 선거법 위반 어쩌고 씨부렁 거리더니 막상 조사에선 옹색하게도 '미신고 집회'를 초점으로 질문했습니다.


연행됐던 분들은 모두 오늘(매주 월/금이 정기 거리 판매일) 강남역에 다시 신문 판매하러 나가셨습니다. 오늘 저녁 강남역과 대학로, 신촌역 등 거리 판매대엔 연행 소식 들으시고 일부러 <레프트21>을 사러 오신 분들도 꽤 계셨답니다.(일부에선 사복경찰들이 여전히 판매대를 위협·방해하는 일이 있었다네요)

강남촛불, 구속노동자후원회가 연행된 분들에게 직접적으로 도와주셨습니다, NTM뉴스 김종현 기자 님도 연행 과정을 촬영해서 사건을 알리는 데 큰 도움을 주셨습니다.

유치장 안에서는 하루 먼저 잡혀 온 동희오토 노동자들이 유치장 항의에 동참해 주셨습니다. 민주노동당 이상규 서울시당 위원장 님은 면회도 가셨더군요. 그밖에도 수많은 익명의 네티즌과 트위터리안들이 무한RT와 펌으로 응원해 주셨습니다.

풀려나신 분들께 여러 ‘진보·민주 시민’들의 도움을 잘 전해드렸습니다. 앞으로 검찰이 기소한다면, 연행된 분들에게는 특히 이번 응원이 큰 힘이 될 것입니다.

기업 광고도 안 받는 독종 진보 언론에게 독자의 성원 만큼, 지지자들이 늘어나는 것 만큼 값진 무기는 없습니다.
새삼 결의를 다지고 말 것도 없이 늘 긴장감과 투지에 넘치는 신문사지만, 그래도 새삼 다시 한번 힘을 얻었습니다.


금요일 밤부터 오늘 낮까지 첫 속보 기사는 6천 건이 넘는 조회수를 기록했습니다. 경찰이 신경질적으로 문제 삼은 “안보 위기는 사기다”는 제목의 표지 기사도 조회수가 수직 상승했습니다. 오프라인 발행을 하기 때문에 평상시 사이트 조회수보다는 꽤 많은 숫자지요. 그밖에 다음 아고라에 올린 글이 조회수가 2만여 건을 넘었습니다. 트위터 RT는 다 세지 못했습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트윗은 5월 7일 밤에 올라온 "아까 강남역에서 신문 한 부 샀는데"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분은 조금만 늦게 그 곳을 지나셨으면 신문을 못 사실 뻔 했습니다. ㅋ

오늘 연행자 중 한 분인 김지태 씨가 아고라에 쓴 글도  순식간에 베스트로 올라갔고, 지금은 조회수가 4천 건을 향하는 군요. 중요한 것은 댓글 가운데,  이번 일로 <레프트21>을 알게 됐다, 한 부 사 보겠다, 볼 때마다 꼭 사겠다, 거리 판매 장소에 찾아가겠다, 1년 정기구독 신청했다 등 물질적 응원까지 해 주시려는 분들이 생겼다는 겁니다[각주:1].

사실, 기업 광고 없는 독립 언론에게는 신문을 구입하고(이왕이면 정기구독) 재정 후원하는 것, 좋은 글을 보내주고 주변 지인들에게 권하는 것, 이게 가장 확실한 지지와 성원 아니겠습니까.


<레프트21>이 좌파 안에서 보이는 영향력에 대면 대중적으론 아직 많이 알려진 신문이 아니라는 점에 비춰보면, 이런 지지와 성원은 이명박 정부의 민주주의 권리 침해에 많은 분들이 분노해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합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신문사 사무실은 괜찮냐고 물으셨는데, 사실 신문사 사무실은 평온했습니다. 결국, 일선 경찰서가 합법 정기 간행물의 판매까지 자의적으로 방해할 정도로 오버하는 행태가 많은 이들을 공분케 한 듯합니다. 이명박 정부가 아직은 의도적으로 (합법 간행물을 공격하는) 무도한 도박을 할 정도로 기세가 높지 않습니다. 반대로 그 정도로 궁지에 몰린 상태도 아닙니다.

첫 속보 기사 뒤의 후속 기사를 맡으면서 본의 아니게 주말에 기자들 취재 전화를 많이 받았는데요, ,저도 얼른 취재해서 기사를 써야 했는데도!! 알찬 취재원 구실을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노조 홍보부장 시절에 기자 응대 자주 해 봤지만, 간만의 변신이었으니...

중요한 건 적지 않은 기자들이 주말인데도 관심있게 취재해 줬다는 겁니다. 심지어 기대 못한 방송국 기자들도.(당연히 파업이던 MBC 빼고) zzz 글 쓰다 잠들었네요. 분명히 5월 10일 밤에 글을 쓰고 있었는데... 얼른 글 마무리하고 정식으로 자야겠네요. 의자왕은 의자에서 3천 시간도 잔다고는 하던데... 언론 탄압이 워낙 노골적이라 딱히 진보라 하기 힘든 매체의 젊은 기자들도  어느 정도는 적극적으로 다루려 한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각주:2].

사실, 서초서 유치장 인권 침해 문제로 아는 기자분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흔쾌히 도움을 주셨습니다. 인권침해 사실 제보에 대한 확인 취재를 통해 정당하게 서초경찰서를 압박해 준 거죠.(캠코더 철수에 저도 5퍼센트 정도는 기여한 걸까요?[각주:3])

시민들과 기자들의 태도를 볼 때,
 천안함 빌미로 안보 정국 만들기, 선거 앞두고 비판 언론 틀어 막기 등 이명박의 언로(言路) 봉쇄 시도는 (우리 편이 아주 멍청하게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계속 실패 중이고, 앞으로도 실패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불만만으론 저들을 괴롭힐 수 있을 뿐 그로기 상태로 몰고갈 순 없습니다. 저들을 녹다운시키려면 조직된 저항 행동으로 나가야 합니다. 이를 만드는 데 <레프트21>의 존재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싸워야 할 거짓, 써야할 진실이 다시한번 분명해 졌습니다. 대중 저항이라는 들불이 퍼지는 데 진실이라는 불씨가 될 것입니다.

탄압으로 진실을 잠시 가릴 순 있어도, 진실을 없앨 순 없습니다. 우리가 늘 그 증거가 될 것입니다.

<레프트21> 정기구독 신청
<레프트21>에 응원 글 보내기

<레프트21> 정기 거리 판매: 매주 월.금 저녁 7~8시

·강남역 6번 출구 1백 미터 파리크라상 앞
·신촌역 3번 출구 버거킹 앞
· 홍대입구역 4번 출구
·혜화역 4번 출구
·명동 예술극장 앞
·건대입구역 5번 출구

  1. 드라마 '히어로'의 용덕일보와 비교하시는 글이 있던데, 어느 정도 칭찬인 건가요? 기득권에 맞서는 삼류 신문 기자의 활약상 정도만 듣고 이 드라마는 보질 못해서요. [본문으로]
  2. ‘민중의 소리’(5.7)와 ‘미디어오늘’(5.10) 말고는 전통적 인터넷 진보언론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게 좀 의아하고 아쉬운 점이겠네요. [본문으로]
  3. 암튼, 취재 당하기와 취재하기를 병행하며 산만한 정신 상태를 유한 결과, 처음 사이트에 올린 기사에 코엑스가 서초구에 있다는 실수를 하기에 이릅니다. 바로 고치긴 했지만, 정신 없던 정신 상태와 강북보이 티만 팍 내고 말았네요.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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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해 진보 언론 <레프트21>을 거리 판매하던 독자들이 어제(7일) 밤, 서초경찰서 경찰들에게 연행됐습니다. 경찰들은 온갖 시비와 협박으로 이들을 두 시간 넘게 갈구다가 연행했다고 합니다.
합법 정기간행물의 판매를 가로막고, 신문의 사상 운운하는 것은 우파 정부 아래서 얼마나 경찰 나부랭이들의 완장의식이 얼마나 커졌는지 보여줍니다.
<레프트21>은 작은 시련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신문사 구성원들도 침착하고 여유있게 대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파 정부의 탄압은 진보언론에게 영광입니다. <레프트21>이 이명박 정부의 뜻과 달리 진실을 올곧게  말해 온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레프트21>을 응원해 주십시오. 진실은 우리의 모든 것입니다.


<레프트21> 독자 연행의 배경

‘안보 위기는 사기’라고 진실을 말한 죄?


57일 저녁 본지(<레프트21> 31) 거리 홍보를 하던 시민 독자 6명을 연행한(("<레프트21> 거리 판매자 6명 강제 연행!") 서초경찰서는 신문 거리 판매가 불법 집회라고 주장한다.

연행 독자들을 접견한 변호사와 면회한 지인들에 전하는 바, 담당 수사관들이 집시법 위반 혐의를 집중해서 캐물었다고 한다. 구호를 외치며 팻말을 들고 유인물을 배포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미 헌법재판소가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린 ‘야간집회 금지’를 들먹이는 것이다.

그러나 팻말은 신문 기사를 홍보하는 내용의 팻말이며, 경찰이 구호라고 부른 것은 지나가는 시민들에게 신문을 홍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레프트21>은 유인물이 아니라 지나가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구입하는 신문이다.

더구나 <레프트21>은 합법 정기간행물로 지난해 3월 창간 때부터 강남역 등에서 매주 정기 거리판매를 해왔다. 이 정기 거리 판매의 장소와 시간을, 신문은 매호 광고까지 했다.

처음 출동한 서초지구대 소속 이종순 경위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다’고 밝혔으나, 누구의 신고였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현재 담당 수사팀인 서초경찰서 수사과 지능팀은 현재 <레프트21>과 인터뷰와 통화도 거부하고 있다.

이번 사건은 명백히 진보 언론을 향한 정치 탄압이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확실한 물증도 없이 천안함 사고를 북한의 무력 도발로 규정하며 냉전적 공안정국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다.

이를 통해 보수세력을 결집하고, 정부 비판 세력을 위축시켜 지방 선거 패배를 막고 예고되는 노동자 투쟁을 억누르려는 속셈인 듯하다.

그래서 천안함 관련해 정부를 비판한 미국 브루킹스 연구소의 박선원 연구원을 고발하는가 하면, 정부 정책에 비판하는 주장들을 선거법 위반으로 처벌하겠다는 협박도 한다.

검찰은 명예훼손으로 고발된 박선원 연구원 건을 공안부에 배치했다. , 일선 경찰서에 천안함 관련 유언비어 유포 세력을 샅샅이 조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정보도 들린다. 최근 지하철 역사엔 정복 경찰들이 G20 띠를 두르고 21조로 짝지어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처럼 공안 몰이를 하는데도, 정부의 주장을 사람들은 잘 믿지 않는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천안함 관련한 정부와 군의 발표에 ‘신뢰가 안 간다’는 응답이 높은 수위를보이고 있다.

이런 상황에 비춰봤을 때, 이번 <레프트21> 31호의 “ “안보 위기는 사기다””라는 헤드라인과 기사들은 정부와 공안당국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진실을 정확히 지적했기 때문이다.

G20

따라서 7일 경찰의 <레프트21> 독자 연행 사건이야말로 “이[안보 정국조성]를 통해 정부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위축시켜,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할 지도 모르는 상황을 역전시키고 고통 전가에 맞선 노동자 투쟁이 활성화하는 것을 예방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레프트21> 31호 표지 기사의 주장이 맞다는 방증이다

천안함 사고의 풀리지 않는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언론의 당연한 책무다. 경제 위기의 고통을 전가하려는 정책을 폭로하고 비판하는 것도 진보 언론의 할 일이다.

그래서 “유언비어 색출” 운운하는 이명박의 냉전 몰이와 민주적 권리 탄압은 명백히 진보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이다.

정부와 선관위, 검찰·경찰이 “유언비어 살포”를 막으려면, 증거도 없이 북한 소행을 단정지으며 전쟁을 부추기는 <조선일보> 따위들부터 수사해야 할 것이다.

한편, 서초경찰서의 무리수에는 더 구체적인 배경도 작용한 듯하다

인근 코엑스(강남구)는 G20 회의 개최 예정지다.  연행 독자들을 접견한 담당 변호사는 이 G20 경비 때문에 서초경찰서가 더 강경하게 나오는 듯하다고 전한다.

서초경찰서는 6일에도 촛불집회를 하는 동희오토 노동자들 8명을 연행했다

이명박은 올해 1월 서초경찰서장으로 청와대 민정수석실 비서관 출신인 하상구를 내려 보냈다. 아마 자신의 치적으로 삼으려는 G20 경비 강화를 위해서였을 가능성도 있다. 서초구는 법원과 검찰, 대기업의 본부들이 몰려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껏 세 차례 열릴 동안 평범한 사람들을 경제 위기의 나락에서 구할 어떤 대책도 내놓지 못한 무능한 지도자들의 국제 ‘파티’를 위해 한국 시민들이 민주적 권리를 제약당할 이유는 전혀 없다.

경찰은 이번에 영장도 없이 귀가를 가로막고 두 시간 가까이 시민들을 협박했다. 심지어 한 경찰은 이 과정에서 <레프트21>을 보고 “사삼 검증해야 판매 가능” 운운했다고 한다.

8일 오전 이들을 면회를 한 지인들은, 서초경찰서가 유치장 안에서도 고압적인 자세로 독자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전한다.

심지어 비속어가 섞인 욕설을 해, 연행자들이 인권위 진정서를 신청하자 봉투도 없는 종이를 내밀었다고 한다. 진정서 내용을 자신들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조처에 항의하자, 이번엔 황당하게도 CSI가 써진 조끼를 입은 자들이 들어와 연행자들을 사진 찍고, 유치장 방 앞에 캠코더를 설치해 일거수일투족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오늘 오후, 동희오토 노동자들을 면회하러 간 구속노동자후원회 활동가들이 수사과장을 면담하고 항의해 시정 약속을 받았지만, 아직 실질적인 조치의 결과는 확인되지 않았다.

<레프트21>은 이명박 정부의 언론 탄압과 안보 위기 사기극에 굴하지 않고 계속 진실만을 보도할 것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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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서민들 중에 복지국가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도 복지국가를 내세우는 정당들이나 사회운동이 국민 대다수의 지지를 얻진 못합니다.

이유는 대체로 둘 가운데 하나일텐데, 하나는 그것이 가능하지 않아서 지지해 봐야 소용 없다는 생각 때문일테고, 다른 하나는 복지국가를 위한 비용 부담에 참여하기 싫어서일 겁니다.

그래서 복지국가, 달리 말해, 보편적 복지제도의 도입을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와 누가 그 비용을 댈 것인가에 답을 내놔야 합니다.

요즘 "역동적 복지국가"를 내세운 복지국가소사이어티는 세금을 더 늘려 복지를 하자고 합니다. 한국은 경제에서 정부 지출이 매우 낮은 나라인데, 이게 낮은 조세부담률에서 비롯한다는 겁니다.

게다가 아직은 정부 적자 수준이 OECD 평균보다 한참 낮아서, 재정 적자를 단기간에 늘리며 보편적 복지제도를 도입해 혜택을 맛보게 한 뒤, 세금을 늘려도 무방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단체는 최근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내놓은 사회복지세 도입 제안에 적극 찬성했습니다. 이 사회복지세는 복지 부문에만 쓸 수 있는 목적세로 하고, 대략 5퍼센트 정도 고소득자에게 추가로 세금을 물리는 방안입니다.

민주노동당 시절 부유세 정책과 비교하면, 세금을 매기는 대상이 자산에서 소득 중심으로 바뀌고, 기업에도 납세 의무를 부과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정책실장이 <레디앙> 기고 글에서 이 사회복지세 정책을 비판했습니다. 납세 대상을 너무 적게 설정했다는 겁니다. 이젠 노동자들도 복지 재정 마련에 참여하는 운동을 펼쳐야 가진 자들에게도 더 많이 내놓으라고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건호 실장은 "내라"에서 "내자"로 바뀌어야 사회적 설득력을 가진다고 설명합니다. 오 실장은 이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근거로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이라는 개념을 사용합니다.

노동시장에 참여해(고용되서) 일한 대가로 받는 노동소득'시장임금', 국가가 복지 등을 통해 제공하는 현금과 사회서비스 '사회임금'입니다.

문제는 한국의 사회임금이 OECD 평균에 한참 모자라는 8퍼센트에도 못 미친다는 거죠. 오 실장은 한국에선 사회임금이 시장임금의 매우 부차적인 보조 소득 정도밖에 되지 않으니 고용에 목 맬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런 현상은 기업과 부자들이 복지 재원을 부담하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각주:1]


그래서 오건호 실장이 사회임금의 재원을 둘러싸고 계급 이해를 부각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정확한 지적입니다. 사회임금을 둘러싸고도 계급투쟁이 벌어지니까요.

그러나 오 실장은 이와 모순된 결론도 내립니다. 조직 노동운동이 시장임금에만 집착해 사회임금 인상을 외면해 문제라고 말합니다. 마치 시장임금 투쟁이 이기적이므로 이제는 사회임금을 올리는 데 집중하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시장임금이야말로 계급 이해가 선명히 드러나는 계급투쟁인데 말이죠.

결국 모순된 두 얘기를 종합하면, 사회임금 재원 형성에 노동계급이 먼저 참여하고 나서야 한다는 겁니다. 첫째는 그게 실제로 필요하다는 것이고, 둘째, 먼저 양보해야 부자들에게 설득력을 가진다는 겁니다.

개인적으로 시장임금/사회임금 개념이 유용한지 잘 모르겠지만, 오 실장의 개념을 바탕으로 얘기하자면, 오 실장의 논리 전개에 중요한 다른 개념이 빠져 있다고 봅니다.

사회임금은 국가가 현금과 현물서비스로 지급하는 것이므로 세금을 주요 재원으로 합니다. 많은 노동자들이 소득세 등의 세금과 각종 사회보험료를 냅니다. 실업자나 면세점 이하 저소득 서민들도 세금을 냅니다. 상품 가격에 포함된 부가가치세(담배에 포함된 교육세도!) 등 소비세 성격의 세금을 냅니다. 아, 주민세도 내야죠.

즉, 사회임금은 시장임금과 완전히 구분되는 별도 소득이 아닙니다. 노동자들의 시장임금 일부가 직접세, 사회보험료, 간접세 부담 형태로 이전하는 부분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회임금 개념으로 말하자면) 중요한 건 순(純) 사회임금입니다. 세금과 사회보험료 등 사회임금의 재원에 노동자들이 부담한 액수를 빼고 순수하게 플러스로 지급받는 사회임금을 늘리는 게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2차대전 후 호황기에 복지 천국이라는 스웨덴 노동계급의 순 사회임금을 계산하면, 거의 '0'=제로에 가깝습니다. 낸 만큼 받은 것에 불과했다는 뜻입니다.

어쩌면, 복지국가의 역설이라 할 수 있는 것인데, 경기가 좋아 실업률도 낮고 소득도 높으면 (건강도 좋겠죠) 실제 복지 비용을 지출할 일이 사실 별로 없습니다. 반면, 조세에 바탕한 보편 복지를 명분으로 스웨덴 노동계급은 꽤 높은 수준의 조세 부담을 했기 때문에 막상 순 사회임금은 거의 없다시피 한 것입니다.

진짜 복지 지출이 늘어나는 것은 세계경제가 침체하면서 실업률이 높아지고 소득이 낮아지는 때입니다. 그러나 대다수 '복지국가'들은 경기 침체기에 늘어나는 비용 지출을 감당 못하고 복지 제도를 약화시킵니다.

예를 들면, 높은 보장 수준으로 유명한 스웨덴의 (국민)연금을 위해 호황기에 높은 비용을 부담했던 노동자들은 막상 자신이 늙었을 때, 더 열악해진 연금제도와 마주하게 됐습니다. 스웨덴에서 복지 지출이 실제로 증가한 것은 1970년대부터입니다. 이때 정부는 우파 정부였죠. 그뒤, 스웨덴은 좌우파 정부 모두 정부 수입에서 누진세를 약화시키고 역진적인 간접세 비중을 늘립니다.[각주:2]

덴마크의 실업수당은 원래 기간 무제한이며, 거의 실업 전 소득의 1백 퍼센트를 보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실업률이 올라가 실업수당 지출이 늘어나니까 무제한→9년→4년으로 후퇴했고, 이것도 다시 2년으로 줄이려 합니다. 실업수당 지급 요건도 강화됐습니다.

아래 표는 오 실장이 계산한 2005년도 사회임금인데, 스웨덴의 사회임금이 48.5퍼센트입니다. 그런데, 최근 스웨덴 개인 소득에서 납세로 가는 비율(개인 세금부담률)이 평균 42~43퍼센트라고 합니다. 얼추 비슷한 수준이면서, 순 사회임금이 소폭의 플러스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전후 호황기보다 나은 건지 정확히 계산하진 못했지만 '복지국가도 후퇴한다'는 우파의 선전이 과장된 그림이라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한국보다 비교할 수 없이 사회보장이 충실한 나라에서 일어난 이런 역설 때문에 사실 자본주의 아래서 노동자를 위한 복지 '천국'이 실제로 존재했는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반대로, 복지국가를 신자유주의가 완전히 해체한 것처럼 (그래서 더는 보편적 복지 확대가 유토피아적인 것처럼) 말하는 것도 잘못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복지국가가 이런저런 약점이 있고 '이상'에 못 미친다 하더라도 그것은 노동계급이 호황의 조건에서 투쟁으로 쟁취해 불황기에 싸우며 지켜 가는 하나의 역사적(=한계를 가진) 성과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위기에 내몰렸을 때조차 복지 후퇴에 대항한 대중 저항, 그리고 안정적으로 건강한 노동력을 수급 받아야 하는 자본의 필요가 더해져 교육이나 의료 부문 등은 크게 약화시키지 못했습니다. 복지 지출 수준 자체를 줄이는 것은 자본가들 입장에서도 쉬운 일은 아닙니다. 오늘날 복지 축소와 복지 유지를 위한 재원 확보 문제는 계급투쟁의 중요한 전선 중 하나입니다. 

그 나라들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든 보편적 사회복지가 늘어난다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일입니다. 문제는 그 모델의 내용과 역사에서 무엇을 배워 지금 실천에 적용할 것이냐 하는 것이겠죠.

이런 역사적 경험에서 볼 때, 오건호 실장이 사회임금 재원 형성, 증세와 사회보험료 인상에 노동계급도 동의하고 참여하자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 관련 <레프트21> 기사)[각주:3]

첫째, 지금껏 소득재분배 방식의 복지 비용 마련이 힘들던 이유는 기업주와 부자들은 가뜩이나 경제 위기인 시대에 자신의 주머니에서 비용을 지출하길 꺼려 했기 때문입니다.

즉, 노동자들이 먼저 양보한다고 해도 자신들의 주머니에서도 돈이 나간다는 것 자체는 바뀌지 않기 때문에 오 실장의 바람대로 그들에게 선양보론이 설득력을 얻을지는 여전히 미지수입니다. 

예를 들어, 오 실장은 건강보험료를 먼저 올려서 정부에게 보장성 확대를 압박하자는 캠페인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부터 이명박 정부까지 모두 법으로 정해진 건강보험 재정 지원분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법정 기여금도 내지 않는 정부를 어찌 믿고 내 돈부터 먼저 낸답니까.

이것이야말로 우파들이 복지를 세금폭탄 식으로 설명하며 반대를 조장하는 논리에 취약할 수 있습니다.

둘째, 시장임금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사회임금 증대가 필요하다 해도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이 사회임금 재원으로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여전히 노동소득에서 시장임금 비중이 결정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래서 시장임금을 보전하면서 사회임금을 늘리는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순 사회임금을 늘리도록 싸우는 겁니다. 그러려면, 시장임금 투쟁에서 잘 싸워야 합니다. 거기서 얻은 자신감과 조직력이 정치의식을 높이고 사회임금 투쟁에서 힘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셋째, 보편 증세론은 결과적으로 노동계급 안에서 소득 재분배를 하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내라"에서 "내자"로 운동의 요구와 실천을 바꾸자는 오 실장의 전략은 고소득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이 더 많이 사회임금 재원으로 가도록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논리대로면, 실업률이 높아지고 평균 노동소득이 낮아질수록, 면세점 이하 저소득층이 늘어날수록 대기업 정규직=상대적 고소득 노동자의 사회임금 부담은 늘어나야 합니다. 오 실장의 '사회연대전략은 노동소득의 하향 평준화를 불러 올 위험마저 있습니다.

현실은 '정의'롭지도 않을 뿐더러 '평등'하지도 않않습니다. 세계적으로나 한국에서나 2008년 이후 부자들의 재산은 늘었습니다. 한국은 서유럽 복지국가들과 비교하면, 조세 수입에서 소득세 비중도 작고, 누진율도 낮으며, 자산 과세나 기업 법인세도 비중과 세율이 모두 낮습니다. 간접세 비중은 훨씬 높습니다.

복지국가 요구는 이런 불평등한 현실을 바꾸자는 겁니다.
노동계급의 순 사회임금이 늘어야 합니다. 노동자들의 시장임금 대비 사회임금을 늘리자가 아니라, 부자들의 시장소득과 노동자들의 임금을 비교해야 합니다. 책임은 저들이 져야 합니다.

저들이
노동계급의 노동력에 의존해 부유해졌기 때문에 이는 역사적으로 경제적으로 정당한 요구입니다. 반대로, 우리끼리 소득 재분배하자는 건 '연대'가 아니라 진실을 말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한편, 보편적 복지국가의 사회안전망을 요구하는 일부 논자들 가운데, 사회임금을 높여 안전망을 만들면 해고를 둘러싼 갈등이 줄지 않겠냐(쉽게 해고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사회임금이 보장되면 시장임금의 중요성이 덜해질 거라는 논리는, 복지국가가 겪어온 역사 과정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스웨덴 모델의 근간이던 노사정 중앙교섭을 통한 연대임금제와 임금인상 자제는 노동자들도 스스로 거부한 정책입니다.

지금, 결과적으로 복지 지출 총액이 줄지 않았는데도, 자본은 줄기차게 복지국가를 공격합니다. 복지국가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완성된 모델 같은 게 아니라, 시장임금과 사회임금을 둘러싼 자본의 공세와 노동계급의 저항 속에서 끊임 없이 요동치는 '역동적'인 세력 관계의 산물입니다.

의회에서 주류 정치인들이 수용할 만한 정책을 설계하는 데 치중해서는 복지국가를 실제로 쟁취할 대중적 힘을 만들 수 없습니다. 차라리 부자 증세로 보편적 기본소득을 지급하라는 요구가 더 나은 면이 많습니다.[각주:4] 


중요한 것은 요구 자체보다 요구를 실제로 쟁취할 수 있는 대중의 운동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선제 양보론은 이 운동을 만들어 내는 데 무력합니다. 노동자가 양보하면 기업주들도 양보할 거라는 발상이야말로 비현실적 관찰이고, 주관적 소망이며, 가망 없는 공상입니다[각주:5]

'공상에서 현실로'. 그게 제 결론입니다. 



  1. 인용한 사진은 2007년 국정감사에서 폭로된 이명박의 건강보험료 납부 자료입니다. 이명박 소유 빌딩 관리인은 월급이 1백20만 원인데도, 이명박보다 더 건강보험료를 많이 냅니다. 복지 재원 마련을 하려면 이런 불평등을 바로 잡아야 합니다. [본문으로]
  2. 소비세 등 간접세는 누구에게나 동일한 세율을 적용하므로, 소득 격차가 반영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역진세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 1백만 원짜리 가재도구를 사는데, 10만 원 부가세가 붙는다면, 월 소득 1천만 원인 사람은 소득의 1퍼센트를 부담하는 것이지만, 월 소득 1백만 원인 사람은 소득의 10퍼센트를 부담하는 겁니다. [본문으로]
  3. 실제로 오건호 실장이 정책위원으로 있는 복지국가소사이어티와 진보신당 등은 건강보험료를 1인당 1만1천 원씩 올려서 건강보험 보장성을 확대하자는 계획을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법으로 정해진 국가보조금도 3조 원씩이나 지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보장성 확대가 법으로 선행되지 않고 보험료부터 올려서 보장성 확대를 요구하자는 것은 위험한 계획입니다. [본문으로]
  4. 어떤 분은 기본소득 등의 지속적인 복지를 위해 성장 정책도 제시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되려 성장과 분배의 딜레마에서 영원히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경제 위기도 저들의 탓이고, 저들의 부도 우리의 노동 때문이므로 복지 재원을 못 대겠다면 권력을 달라고 요구하는 방향으로 운동이 전진하는 길밖에는 우리 삶을 지킬 길은 없습니다. 기본소득 관련 글은 링크된 포스트를 확인하세요. [본문으로]
  5. 이들은 계급투쟁의 정치학을 포기하기 때문에 가장 비관적인 전제에서 가장 황당한 낙관주의로 치닫는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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