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민주노동당이 진보진영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볼 때, 당 강령 개정이 진보진영 전체에 미치는 효과가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실 당원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 지도부가 여러 이견들을 개방적으로 청취하기는커녕 당원들의 의견조차 제대로 듣지 않는 듯 보인다는 겁니다. 

아침 정책당대회 최종기획안 파일을 봤습니다. 어제 파일과 달라진 것이 있더군요. 바로 정책당대회 대토론회 중 강령 토론회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애초 1부와 2부를 나눠 1부는 발제와 패널 토론(2시간), 2부는 당원토론(2시간)으로 돼 있던 것이 그냥 전체 두 시간으로 축소됐습니다. 토론자가 줄어들지 않은 걸로 봐서 당원 토론 시간을 없앤 것입니다.

기획안은 이 토론의 취지를 강령개정안에 대한 대의원들의 풍부하고 깊이 있는 이해를 확보함.”“진지한 탐구와 토론을 통해 통합진보정당의 정치적 단결의 기초를 축성함.”이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 취지대로 강령토론회 프로그램의 변경(당원토론 시간의 삭제)을 판단하면, 개정안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것만 필요하다고 당 지도부는 생각하는 듯합니다. 지도부의 개정 의견대로만 따라가야 정치적 단결의 기초가 마련된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이렇데 되묻는 이유는 사실 토론회 기획 자체가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엄연히 지난 중앙위원회에서부터 당 강령 개정에 반대하는 의견들이 있었고, 지금 수백 명의 당원들이 연서명으로 강령 개정 반대 의견을 내고 있는데, 강령 대토론회는 현재까지 공개적으로 강령 개정에 반대하는 패널이 없습니다.

패널 구성도 이렇게 불공정한 상황에서 애초에 배정된 당원토론까지 취소하는 것은 당 지도부가 당원들과 소통하기보다 일방적으로 밀어붙이겠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민주적 과정으로는 당원과 대의원 다수를 설득할 자신이 없다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의결기구 개최를 앞두고 지도부의 원안에 대한 이견이 공개적으로 표출되면, 그 맥락을 귀를 열어 듣고 토론의 자세로 임하는 것이 민주적 지도력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동안 아무 문제도 일으킨 적이 없는 강령을 갑작스레 개정하려는 것도 문제지만 그 과정도 공개적으로 개정 취지를 설명하는 것 없이 이처럼 폐쇄적 태도로 일관하면, 어느 당원이라도 의구심과 불만을 가지게 될 겁니다.

저는 강령 개정이 명백한 후퇴라서 반대하지만, 강령이 설사 개정된다고 해서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이 더는 아니라거나 돌이킬 수 없는 배신의 길로 갔다고까지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현재 강령이 완전무결하다고도 생각하진 않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현재 개정안은 현재 당 강령과 비교해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한 약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상세 내용은 첨부 파입 참조하세요.)

첫째, 현 강령은 상직적 차원에서지만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을 계승한다는 지향을 밝힘으로써, 현 체제의 문제점이 자본주의 질서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고, 따라서 민중이 만들 새세상은 자본주의 이윤 논리, 경쟁 논리, 전쟁 논리를 극복하는 사회 원리에 바탕해야 한다는 기본적 가치와 기준을 제시했습니다. 이것을 뺀 개정안은 진보정당의 대안적 가치 지향에서 상당히 체제 내적으로 변질됐습니다.

둘째, 현 강령의 사회주의 이상과 원칙은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입니다. 단순한 친북도 아니고, 우경화한 유럽 사민당 뒤쫓기도 아닙니다. 이것은 모호하지만, 최신의 진보운동 조류를 반영한 것이면서 급진적이면서 개방적인 반자본주의적 대안체제에 관한 정치적 상상력을 추구할 여지를 두었습니다.

셋째, 기존 강령은 노동자 정치세력화라는 목표, 투쟁에 함께하는 당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지금 개정안은 민중의 투쟁에 함께한다는 표현이 없고, 당이 이렇게 해주겠다는 관점만 있습니다. 그래서 개정안의 노동 파트는 노동자정치세력화라는 목표를 삭제하고 ‘’노동존중사회”를 만들겠다고만 말하고 있습니다.(메이데이 집회에서 손학규가 했던 표현이죠) 개정안은 대중적 계급정당 노선에서 후퇴하는 것입니다.

넷째, 창당 강령은 당시 수준에서 진보대연합 강령이었습니다. 즉, 진보진영이 단결해 노동자정치세력화를 추구했다는 상징성이 있습니다. 민주당과 연립정부나 국민참여당과 통합 등을 염두에 두고 이를 훼손하려는 것은 함께 고난을 헤쳐 온 당내 좌파들을 공공연히 배제하겠다는 협박입니다. 저는 다름아니라 이런 게 패권주의 아닌가 생각합니다.

게다가 간단히 지적한 것처럼, 명백히 진보정당의 정체성에서 후퇴한 이 통합진보정당의 강령초안이 통합 정당의 강령 협상 때 민주노동당 쪽의 초안이 된다면, 통합 진보 정당의 미래 지향과 가치에서 기준점 자체가 후퇴한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진보적 민주주의 체제" 강령은 자본주의 분석도 담지 않고 있고, 계급, 노동해방, 소유 제한 같은 기존 강령의 표현을 거의 모두 삭제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령 개정에 반대합니다. 여러 당원들이 정견의 차이를 떠나 당 강령 개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내용과 당원들의 목소리에서 명백히 이 문제가 자주파 vs 비자주파 같은 낡은 구도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당의 투쟁성과 계급적 기반에서 후퇴하고 우경화하려 하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핵심입니다.

그래서 많은 당원들이 우려하는 것은 지도부가 야권선거연합과 [민주당과 함께하는] 연립정부 노선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강령 개정을 그들 입맛에 맞게 하려는 것 아니냐는 거죠. 그러다가 당 자체가 그들 수준으로 떨어지는 것 아니냐는 겁니다.

당장 예전이라면 한진과 유성 등으로 당원들이 달려 와야 한다고 하는 호소가 넘쳐나야 할 당에 그런 목소리가 적습니다. 노동 대중과 투쟁으로 함께 승리하겠다는 결의가 당 지도부에게서 보이지 않구요. 유시민이 진보정치를 능멸하는데도, 이정희 대표는 조승수 대표에게 보인 원칙과 결기의 잣대를 유시민에게 들이대지 않습니다.(저는 이것이 이 대표가 억울해 하는 진심을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비판 의견이 못마땅한 어느 당원들은 당게의 여러 글을 통해 대중은 관심도 없는데, 관념적 사상 경연을 하냐며 비꼽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중의 관심사에 호응할 것과 그러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한미FTA에 반대하며 위력적인 대중운동을 만들어 냈을 때, 처음부터 대중 여론에서 우리가 유리했던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상식이 된 반MB는 또 어떻습니까. 당의 성소수자위원회 위원들이 대중이 버리라면 성소수자도 버릴 거냐는 질문은 참 아픈 질문입니다.

강령은 그래서 현재의 대중 정서나 요구를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전략전술의 영역이고, 강령은 객관적인 체제 분석에 바탕해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가치와 대안체제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 강령의 후퇴는 운동 전체의 지향점 기준을 낮추는 명백한 우경화 행위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솔직하고 민주적으로 강령 개정과 당의 진로에 관한 토론이 이뤄지는 당대회가 되길 바랍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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