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4일에 올린 포스트(철도파업 중단 소동과 <레프트21> 평가 기사 유감)와 <레프트21> 인터넷판 독자편지(전면 파업을 하지 않아 문제였다는 주장은 과도하다, 12.10)에서 <레프트21>의 철도 파업 평가 기사(노조 지도부가 기회를 붙잡지 못하다)를 비판한 바 있습니다. (저에 대한 재반론은 "철도노조 지도부가 불필요한 타협과 후퇴로 패배를 자초했다는 평가는 옳다")

그때 제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철도 조합원들이 전면 파업을 할 자신감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명박은 철도 파업을 온 힘을 다해 탄압했다.
철도노조 지도부는 탄압에 정치투쟁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철도노조 지도부의 파업 중단은 잘못이다.
그래도 파업 중단과 전면 파업 회피(합법주의)는 패배를 자초한 배신이라 볼 순 없다.
철도 파업은 패배하지 않았고, 지도부가 재파업을 약속했으므로 재파업 가능성이 있다.
민주노총이 12월 중순부터 총력투쟁에 들어갈 것이므로 연대투쟁에 기대를 걸어야 한다.

돌아보면, 시간은 제가 틀렸다고 판정했습니다.

철도노조 탄압은 계속되고 있는데, 철도노조 지도부는 재파업의 'ㅈ'자도 'ㅍ'자도 꺼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경찰에 자진 출두하며 꼬리를 내렸습니다. 민주노총의 총력투쟁도 흐지부지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전 투쟁을 회피한 철도노조 지도부를 순진하게 믿은 게 돼 버렸습니다. 그들의 소심하고 비겁한 행태를 옹호한 것입니다.

제 주장대로 하면, 조합원들이 전면 파업의 자신감도 없고 파업 철회를 나서서 비판하지 못했는데 재파업 동력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었을까요. 그래서 제 논리에 따라 보더라도 재파업 여부는 결국 철도노조 지도자들의 손에 달려 있었습니다. 

저는 노조 지도부의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보고 전망한 것입니다. 거대 노조 지도부들의 생리를 많이 경험한 제가 이렇게 큰 판단 실수를 했습니다.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요?

돌이켜보면, 저는 철도 파업이 사실상 '패배'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철도 파업은 간만에 노동 쪽 전선이 반MB 전선의 선두에 선 투쟁이었습니다. 비록 전면 파업은 아니었지만 꽤 파장을 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객관적 상황에 비춰 투쟁의 강점과 약점을 골고루 살피며 평가와 전망을 하질 못하고 심정적 기대감에 치우치다 보니. 갑작스런 후퇴에 당황해 냉혹한 현실을 회피하는 식으로 결론을 냈습니다.

실망스런 결과 자체를 부정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우스꽝스럽게도 싸우다 도망가는 철도노조 지도부의 "다음에 보자"는 말을 '믿으려' 했던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예를 들어, 더 깊숙이 취재하고 기대를 걸었던 쌍용차 투쟁은 결과가 실망스러웠지만 그렇게 엉터리로 평가하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그래서 제 생각의 전개를 더 파고 들어가면서 전 사실 철도 파업과 이를 둘러싼 상황을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보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겁니다. 전 처음부터 전면 파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명박 정부가 엄청난 탄압을 했습니다. 

총력을 다하는 투쟁이 아니면 이길 수 없는 상황에서 총력을 다할 수 없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결과적으로 이 파업은 이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저쪽이 10의 힘으로 덤비는데 이쪽의 3이나 4 이상의 힘밖에 쓸 수 없고 그게 당연하다면 누굴 탓하고 말고 할 필요도 없는거죠. 애초에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니 제 글이 국가 탄압의 효과는 과장했고, 우리 편에게 유리한 조건들은 무시하다시피 한 것입니다.
사실 기층의 투쟁과 대중의 잠재력에 확신이 없고 국가권력과 대결하길 두려워하는 노조관료주의와 개혁주의의 사고방식이 이와 똑같습니다.

그리곤 저는 거기에서 전 한번 더 도약(안 좋은 쪽으로!) 했습니다. 이길 수는 없는데 패배를 인정하긴 싫으니 현실 직시를 거부합니다. 안 그래도 상황이 우리 쪽에 어렵다고 보는데 철도 파업마저 패배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입니까.

비관주의가 늘 좌절감만 드러내는 건 아닙니다. 종종 현실을 외면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참모습을 감추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돌고돌아도 진취적 과제로 결론내길 회피한다는 점에서 결국 현실에 순응한다는 본질은 같습니다.

조합원들의 사기가 충분하지 않았더라도(당장은 전면 파업을 현실화 못 하더라도) 현실에선 투쟁과 연대를 더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며 정면 대결하느냐, 아니냐  둘 밖에 선택이 없었는데 말입니다. 파업 후엔 지도부의 후퇴에 저항하느냐, 마느냐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현실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전술 모형'을 그려 놓고 제3의 선택이 가능했던(또는 가능한) 것처럼 말했습니다. 마치 우파 지도자들의 약점을 비판하지만 실천은 비슷하게 하는 노조관료주의 좌파 버전 같은 결론을 내린 거죠. 
도망가는 지도부의 재파업 약속을 믿었다기보다 '믿고 싶어 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겁니다.


우습게 됐습니다. 대한민국에선 초등학생도 "다음에 보자는 놈치고 무서운 놈 없다"는 걸 아는데, 말입니다. (물론 와신상담의 고사가 있긴 한데, 이 고사에서도 오왕 부차나 월왕 구천이 닥친 현실을 회피하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던 건 아닙니다)

이명박 정부와 맞서는 운동들이 겉으로 지지부진한 것에 알게모르게 영향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쌍용차 투쟁의 여진이 제게도 있었다고 봅니다. 물론,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다고 꼭 이런 결론을 내리게 되는 건 아닙니다. 그에 맞게 과제를 내놓으면 될 일입니다.

예를 들어, 제3차 철도 파업의 가능성은 아직도 있습니다. 그러나 3차 파업에 가더라도 똑같은 문제에 다시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비관을 낙관으로 바꾸는 길은 단지 후퇴하는 지도자들의 뒤를 따라서는 갈 수 없는 길입니다.

그런데 저는 '내 안의 비관주의'에 맞서 싸우지 않고 순응했습니다. 이미 12월 하순에 제 철도 파업 평가가 잘못됐다는 결론을 내려놓고도 즉시 글로 정리하지 않은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돌아 보면, 단순히 전술 판단이 다른 문제가 아니었습니다.(그리고 그건 부차적인 차이입니다)  짧게나마 현실을 직시할 용기를 잃었던 것이라 스스로 배우는 바가 많습니다. 자존심 강한 저로선 <레프트21> 기자 명함을 달고 이랬으니 스스로 화가 나는, 창피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진짜 와신상담[臥薪嘗膽] 해야 겠습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