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8] 이 토론에 대한 촌평은 좀 시간될 때 따로 하겠음.


김문성님이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한겨레 페북 관리자는 좀 자중하시라. ㄱ씨의 행동이 잘못인 건 맞지만, 그의 범행 동기가 왜 여성혐오냐고 물으면, 여성혐오 때문이라는 동어반복 말고 나올 답이 뭔가? 일종의 답정너 같은 것으로 현실에서도 논리로도 타당치가 않는 논법이다.
신자유주의가 사회 전체에 강요한 인간 타락의 문제를 여성혐오로 치환시켜서 도대체 보통 여성들이 얻을 게 뭔지도 생각해 보시고. 남성을 무찔러 여성 취업문을 넓히면, 그건 무한경쟁에서 탈출인가? 서로 남혐, 여혐 하고 싸우자는 얘기밖에 더 되나? 그런 상황을 누가 좋아할까?
글 쓰다가 올라가 버려서 다시 덧붙이면, 기사 말미의 신지예 후보측의 답변이 공식 답변이라면, 실망을 금할 수 없다. 대졸 무직자가 포스터를 찢은 게 남성 중심 기득권 정치의 공고한 단면이라니?!?! ㄱ씨는 그 공고한 남성 중심 기득권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된 사람이다. 나경원, 이언주, 이은재가 웃고 갈 노릇.

신지예 후보의 벽보를 훼손한 ㄱ씨는 “여성들이 잘 나가면 취업이 어려울 것 같아 벽보를 훼손했다”고 경찰에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것은_여성혐오가_맞다

HANI.CO.KR
대학 졸업 뒤 1년 간 중소기업에 다녔던 ㄱ씨는 현재 무직이다
댓글
장동엽 글쎄요. '타당치가 않는 논법'으로 만들기 위해 오히려 김문성 님께서 논법을 비틀어 버리시는군요. 기사대로라면, ㄱ씨가 밝힌 범행 동기 자체를 그저 '여성혐오' 라고 하는 거지요. '왜 여성혐오냐'는 질문 자체가 필요 없는 거지요. 물론 '여성혐오' 현상의 배경과 관해선 말씀하신 신자유주의 등 분석과 담론이 깔리겠습니다만, '여성이 잘 나가면 취업이 어려울 것' 이라는 피의자 ㄱ씨의 왜곡된 인식을 마치 여성들이 '남성을 무찔러 여성 취업문을 넓히자'고 주장하는 듯 말씀하시는 것이야말로 그릇된 논법이지요. 물론 제주도 예멘 난민 문제에서도 드러나듯 페미니즘 한 쪽에서 혐오를 들고 나오기도 합니다만, 적어도 그같은 주장이 다수이거나 신지예 후보가 들고 나온 적은 없습니다. 
“현재 한국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정서와 일맥상통하고 남성중심의 기득권 정치가 얼마나 강고한지 보여준다”는 신 후보의 멘트에서 '여성혐오 정서' 부분만 빼고 다루시는 것 또한 왜곡으로 가는 길이지요. ㄱ씨가 '남성 기득권 정치에서 철저히 배제된 사람'이라는 말씀이 어떤 뜻으로 남긴 말씀인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기존의 남성 중심 기득권 정치의 한계를 지적하고 이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해 온 페미니스트 후보의 포스터를 훼손한 ㄱ씨는 적어도 님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스스로 배제됐다고 생각하기보다는 그 체제를 지켜야 한다고 굳게 믿는 사람이라고 봐야겠지요. ㄱ씨가 가진 '여성혐오 정서'는 남성 중심 기득권 정치에 의해 재생산되고 있고, 그같은 기득권 정치는 ㄱ씨 자신도 속한 약자에 대한 배제나 혐오를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보여주지 않고 않습니다. ㄱ씨는 그 책임을 기득권 정치에 묻기보다 여성혐오로 답을 찾을 뿐이지요. 적어도 신지예 후보나 다수 페미니스트들은 '남성혐오'로 맞서진 않습니다. 여성 등 약자를 배제하고 혐오하는 남성들에는 굴복하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김문성 님의 댓글 자체가 이른바 여성혐오 현상을 여성혐오 현상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무엇을 반박하시려 하는지 모르겠네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김문성 기사에 인용된 사진을 보세요. 신지예 씨 왼편의 6번, 7번 후보도 여성 후보입니다. 왜 그 후보들의 포스터는 찢기지 않았을까요? 꼴통 우익인 7번 후보는 그렇다쳐도 심지어 6번 후보는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앞세웠는데요? 민중당도 기득권 남성정치의 카르텔입니까? 그렇지가 않잖아요.
현실에서 출발해야지, 담론에 빠져서 담론을 설명하려면, 누군들 자기 정당화를 못하겠습니까?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수정됨
장동엽 김문성 님의 이 말씀 자체가 이해가 안 가네요. 저는 ㄱ씨의 범행 동기와 배경 인식 자체를 '여성혐오' 라 정의하고 논쟁하고 있습니다만... ㄱ씨 같은 행동과 인식이 모이고 모이면 '여성혐오 현상'이 되는 것이겠고요. 이를 테면... 소아성애를 가진 남성들의 범죄를 '소아성애 범죄'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굳이 뭘 문제 삼는지 핵심을 이해할 수 없어서요. ^^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수정됨
김문성 네. 이해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정의가 결국 동어반복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는 겁니다.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장동엽 김문성 기사 인용 사진을 언급하시는 것이야말로 님의 논법이 그릇됐음을 드러내는 것 아닌가 합니다. 사실관계도 틀렸고요. 김진숙 후보도 여성이니 여성 관련 정책 공약들을 내걸긴 했습니다만, 적어도 포스터에 담긴 핵심 슬로건은 "비정규직 서울시장" "유일한 노동자 진보서울시장"이었습니다. 다른 여성 후보들은 선거 기간 내내 "페미니스트 서울시장"을 내건 신지예 후보와 달리 페미니즘 논쟁의 이니셔티브를 쥐려 하지도 않았고요. 뭐 굳이 ㄱ씨늬 범행동기를 '여성혐오'가 아닌 '페미니즘 혐오' 또는 '페미니스트 혐오' 정도로 표현할 수도 있겠니다만, 굳이 다른 여성 후보 포스터를 훼손하지 않고 신지예 후보 포스터만 곡 찍어 훼손했다고 해서 '여성혐오' 범행이 아니라 정의해야 할 까닭은 없어 보이는군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수정됨
김문성 (비문이 있어서 조금 손봤습니다.)
네, 조금 논의가 진전되는 것 같네요.제가 바로 옆 후보들의 포스터를 언급한 것도 생물학적 여성 문제만으로 ㄱ씨의 행위조차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을 얘기하려고 한 겁니다.
모든 생물학적 여성이 아니라 (오히려 님이 인정했듯이) 페미니스트 혐오라고 하는 게 일관성은 있어 보입니다.(물론 저는 그것도 과도하다고 봅니다만. 지금 페미니즘은 일종이 유행 흐름을 타고 있고, 정서나 담론이 확산되고 있으니까요. 기존에 눈에 띄지 않던 것이 흥할 때는 항상 반작용이 따르게 마련이죠. 그걸 여혐, 백래시라고 보는 건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어쨌거나 여성이므로 무조건 싫다고 한 게 아닌 것을 여성 혐오라고 규정하는 게 옳을까요? 신 후보 측이나 장동엽 님이 말하는 남성 기득권 정치 구조와 관련해 이 남성을 일종의 공모자 또는 그 구조의 일부처럼 보는 건 여성혐오가 만연하다는 뜻인데, 기사만 봐도 신지예 후보의 훼손된 포스터 27개 중 적어도 20개가 이 ㄱ씨 한 명이 훼손한 겁니다. 만연한 여성혐오라고 할 수도 없고요.
따라서 이 문제를 남성기득권정치의 발현으로 얘기하는 것도 설득력은 없습니다. 장동엽 님 말씀처럼 민중당 김진숙 후보가 여성 문제를 부각시키지 않아서 포스터 훼손을 피했다면, 님 논리대로면 김진숙 후보도 남성기득권정치로 비춰졌기 때문에 포스터 훼손을 피한 거라고 규정할 수가 있게 됩니다. 물론 장동엽 님이 그렇게 본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만.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모순이 생긴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네요.
이런 취지에서, 제가 신지예 후보측의 남성 기득권 정치 언급을 인용할 때 여성 혐오라는 앞부분을 굳이 인용하지 않은 겁니다. 저는 같은 현상을 지칭하는 걸로 보니까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수정됨
김문성 쉽게 말하면, 여성혐오가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현재까지 님의 결론인데, 장동엽 님의 주장을 인정해도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문제라는 것인데, 이를 한겨레 페북 관리자처럼 “여성혐오가 맞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게 저의 요지입니다.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수정됨
장동엽 김문성 님께서 듣고픈 대로 해석하시려는 듯하군요. 제 글에서 "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으로 해석하실 여지를 드리진 않았다고 봅니다. 제가 '여성혐오'와 '페미니즘 혐오'를 굳이 나눠서 말하려 한 게 아니라는 것도 더 잘 아실 듯합니다. 굳이 나눠서 봐야 할 까닭도 없고요. ㄱ씨의 범행 동기를 굳이 따로 해석할 까닭조차 없이 '여성혐오'로 봐야 한다는 게 일관된 주장입니다. '여성혐오' 개념을 행위로 보느냐, 인식으로 보느냐도 의미 없는 논쟁이고요. '여성은 싫어, 여성은 사라져' 라는 인식만이 '여성혐오'가 아니라, '여성이 잘 나가면 취업이 어려울 것' 이라는 인식도 다른 합리적 요인들 대신 자신과 경쟁할 대상에서 여성만을 끄집어내 적대시했다는 점에서 '여성혐오'인 거죠. 선거철 '페미니스트 서울시장' 후보의 포스터를 훼손하는 방식으로 보복행위(백래시)를 벌인 것고요. ㄱ씨 스스로 '여성'을 대상화했음을 드러낸 것만으로도 논쟁 여지가 없다고 봅니다만...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김문성 ㅋ 논쟁을 님이 어떻게 규정한다 해서 상대가 있는 논쟁의 성격이 그렇게 되는 건 아닙니다. 
ㄱ씨는 어쨌거나 제가 아는 수준에서 자기의 취업을 걱정했지, 남성의 권리를 걱정한 게 아니에요. 님처럼 아무데나 같다 붙이면 오히려 여성혐오가 의미없는 개념이 됩니다.
또한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하라는 집회에 미조직 대중 수만 명이 참가하는 시대에 백래시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한심한 일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장동엽 김문성 ㄱ씨가 자기 취업 걱정했다는 게 ‘여성혐오’는 아니라는 근거인지 의이하군요. 문제는 자신의 경쟁 대상을 여성으로만 규정했음을 핵심으로 말씀드렸습니다만... ‘여성혐오’를 굳이 저나 님이 해석할 까닭도 없는 사례입니다. 피의자 ㄱ씨 스스로가 규정한 응징 대상만으로도 충분히 설명이 된 듯한데요. 
님께서 말씀하시는 집회의 주최 측이나 참가자들의 주장이 페미니즘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순 없겠습니다만, 집회 참가자 수만 명이 얼굴을 드러내지 못 하는 까닭, 이 순간에도 여성 또는 페미니스트들을 향하는 보복 사례와 유형들을 모르시진 않을 듯한데 이 시대를 그리 규정하시니 오히려 당혹스럽군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수정됨
김문성 결국은 여성혐오니까 여성혐오라는 순환논법이라는 쟁점으로 다시 돌아왔네요. 모든 여성에 대한 혐오는 아닐 수 있다고 하시길래 논의가 진전되는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나 보네요.
신지예 후보측의 답변에서 제가 문제 삼은 건, ㄱ씨의 찌질한 행위를 ‘만연한 여성혐오’(남성 기득권 정치 구조)의 일부라고 본 것이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남성이 어쨌거나 여성이 내 취업에 방해되는 요소라고 생각했으니 여성혐오다? ㄱ씨가 남자들이 내 취업에 방해되는 요소라고 생각했으면 훌륭한 남성 페미니스트인가요? 아니죠? 그래서 저는 흑백 논리를 피하자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님 말씀대로 여성이 미움의 대상에 들어가면 모두 여성 혐오라는 주장을 저는 흑백논리로 봅니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는 거죠.)
불황에 취업 경쟁으로 내몰린 사람들의 저열하거나 모순된 의식을 죄다 혐오분자다라는 식으로 취급할 수 없다는 것이죠. 6번, 7번 후보의 포스터 얘기도 그래서 든 것이고요.
아마도 ㄱ씨가 발끈한 건 여성에 대한 일종의 어퍼머티브 액션 같은 것에 대한 반감일 가능성이 큰데, 그게 다 여성혐오인가요? 가령 미국에서 흑인에 대한 ‘어퍼머티브 액션’에 반감을 품는 것을 우리가 지지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그 주장에 우호적인 모두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부를 순 없는 거죠.
사실 지금 미국 진보진영 또는 민주당 안팎에서 이뤄지는 정체성정치 논쟁이라는 게 바로 그런 식으로 딱지 붙이기 한 결과, 열악한 처지의 백인 남성들을 공화당 또는 트럼프 지지로 몰아간 것 아니냐 하는 문제 아닙니까? 장동엽 님이야말로 이런 논쟁들을 모를 리 없을 텐데요.

그리고 집회와 페미니즘의 강세 얘기는 여성 차별과 천대의 현실을 부인한 게 아니라 과장하지 말라는 겁니다.(반작용 얘기는 오히려 제가 먼저 꺼냈죠.)
‘보복’(?)이 걱정 돼서 마스크를 쓴 분들도 계시겠지요. 그런데, 마스크를 쓰고서라도 수만 명이 실외 집회에 나오는 거에요. 그게 대서특필되고 사회적 압력이 되고 있습니다. 백래시를 상수라고 쳐도, 그걸 여성들이 이겨내고 있고 그 목소리가 사회에 영향을 발휘하는 게 현실인 거죠. 무엇이 지금 대세인가요? 그래서 백래시 개념에 대해서도 여혐 개념과 마찬가지로 ‘남용’하지 말자는 것이고요.
저라면, 여성들에게 당신들은 수동적 피해자가 아니라 권리를 요구하고 쟁취할 역량과 자격이 있는 존재라고, 많은 남성들이 여성들의 요구를 지지한다고, 그러니 스스로를 능동적 주체로 긍정하라고, 지각있는 남성들과 또 남녀가 함께하는 노동운동과 연대하라고 말하겠어요.
그것이 워마드나 인종차별적 난민 반대처럼 스스로에게 도움되지 않는 방식을 여성들이 굳이 항의의 수단으로 선택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는 것이고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장동엽 김문성 님과 처음부터 댓글 논쟁 시작하는 게 아니었나 싶어지네요. 님의 '순환 논법'이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여성혐오'에 대한 이해나 인식이 달라서인 듯한데, 님의 말씀에서 스스로 답을 갖고 계신데 자꾸 부정하시니... "찌질한 행위"라도 '여성혐오'인 거지요. 무슨 대단한 짓을 벌여야 '여성혐오' 범죄인 건 아닙니다. 여성 후보자 포스터를 죄다 난도질해놔야 '여혐'인 거 아니냐는 인식이라면 당혹스럽고요. 
"찌질한 행위"를 벌인 ㄱ씨가 성별로 나누어 볼 문제가 아님에도 여성만을 적대시해 범행을 벌인 것만으로 설명이 끝날 문제라는 뜻입니다. 님 말씀대로 장기불황과 취업경쟁에서 비롯된 그릇된 인식과 행동이라는 정의와 '여성혐오' 범죄가 굳이 나누어 설명할 까닭도 없지요. 성범죄들도 그 원인을 톺아보면, 사회경제적 요인들과 맞닿아 있듯이 말입니다. 
여성들을 수동적 피해자라거나 권리를 요구하고 쟁취할 역량과 자격도 갖추지 못한 존재라 보니마니, 워마드니 난민 반대니 갖고 오셔서 논점을 흐리고 계시는데, 그 정도 기본 인식은 갖추고 있다는 걸 전제로 논쟁하던 것 아닌가요? ^^ 그리고 저는 워마드나 난민 반대한다는 페미니스트들에 단 1도 동의하지 않기 때문에 제 글에서 의도적으로 '페미니즘 한 쪽'이라 일컫고 있는 거지요. 
"생물학적 여성만 참여하라는 집회에 미조직 대중 수만 명이 참가하는 시대에 백래시를 두려워하는 것처럼 한심한 일도 없다"는 님의 말씀이 담고 있는 인지 부조화가 그 뒤의 댓글에 담긴 설명으로도 헤소되진 않아요. 언론들이 좀 더 다루고 있다 해서 대세라고 보는 것도, 백래시가 사라졌거나 약화됐다고 보는 것도 우습고요. 
뭐 지나친 피해의식이라 보시는 듯합니다만, 사회적 주목도가 높아졌다 해서 '여혐'과 '백래시' 개념을 '남용'하고 있다거나 '여성 차별과 천대의 현실을 과장'하고 있다 말씀하시는 건, 객관적 지표들이 가리키고 있는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님의 '믿음'까지 바꿀 능력도 동기도 제간 없군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1일
김문성 “여성 후보자 포스터를 죄다 난도질해놔야 '여혐'인 거 아니냐는 인식이라면 당혹스럽고요. "찌질한 행위"를 벌인 ㄱ씨가 성별로 나누어 볼 문제가 아님에도 여성만을 적대시해 범행을 벌인 것만으로 설명이 끝날 문제라는 뜻입니다.”
문장 전체 인용입니다. 여기서 모순이 전혀 없다고 느끼신다면, 그냥 서로 개념과 인식이 다른 걸로 정리하지요. 님 입장에서 보더라도, 행위와 동기 모두에서 왜 특정 여성상만 반감의 대상이 됐을까를 성찰해 보셨으면 합니다. 신지예 후보가 보인 잠재력이 앞으로 더 잘 발휘되기 위해서도요.
인식의 지반은 달라도 최소한 진전되는 토론이 가능할 거라 보고 논의를 풍성하게 하려는 취지에서 제가 이해하는 한 이 논쟁의 밑에 깔린 논점들을 포함해 제기한 여러 문제들이 논점을 흐리는 수법이라니 할 말을 잃었습니다. 
어쩌면, 남성의 여성 대상 범죄니 무조건 여성혐오여야 한다는 확증편향적 입장이라면, 저의 제기가 논점 흐리기가 맞겠죠. 더 대화할 것도 없겠고요. 
그런데 자기들 주장 입증하려고 보통의 노동계급 남녀들끼리 일부는 남성이 여성에게 저지른 범죄만 강조하고, 일부는 여성이 남성에게 저지른 범죄만 강조하는 그런 우스운 상황이 계속되길 바라시나요? 최소한 진보를 표방하는 활동가들은 그러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닐까요?
관리
좋아요공감 더 보기
답글 달기20시간수정됨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12월 5일에 평화 행진을 한 것이 정권의 평화/폭력 프레임에 갇혀 집회의 실질적 요구가 오히려 부각되지 못했다는 평가를 봤다. 심지어 그 때문에 경찰의 평화시위 프레임만 강화시켜줬다는 것이다.


완전히 자기모순적인 단견이다. 정작 그 프레임에 갇힌 건 그런 평가를 하는 사람들이다. 우습게도 판단 기준이 평화시위냐, 아니냐에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당초 이 행진을 불허하려고 했다. 하지만 우리 쪽의 어리숙한 대응에 신나서 ‘오버’하다가 삐긋했고, 그 틈을 타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경찰의 단기 전술 목표는 실패했다.(물론 저들은 포기하지 않고 다시 보복할 것이다.)


언론 보도가 평화시위 프레임으로 보도하고 있다고? 폭력시위를 한 11월 14일은 그들이 우리 요구를 잘 보도해 주던가? 프레임 개념을 쓰는 많은 사람들이 특정한 프레임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서 ‘힘’이라는 요소를 무시한다. 그들과 돈과 권력, 언론을 가지고 있다.


집회·시위의 목적은 참가자들의 사기와 연대의식을 높이고, 더 많은 사람들에게 요구를 알리고 동참할 의지를 자극하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참가하지 않은 사람들의 사기도 진작하려는 것이다.


그 점에서 평화/폭력은 그 목적에 종속되는 부차적인 것이다.(사실 그 여부를 우리가 100% 선택하기도 힘들다. 폴리스라인 따라서 행진만 하든 물리적 대결이든 둘 다 물신숭배하지 말라는 얘기다.) 12월 5일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시 모이냐가 중요했다. 그것 자체가 위축되지 않았음을 과시하는 효과를 낼 것이었다.


이날 집회 진행이나 내용적 구성에서 여러 차례 짜증이 나기도 했지만, 그건 내용의 문제였지 형식의 약점은 아니었다. 사실 그날 물리적 충돌론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었을지 궁금하다. 박근혜도 없는 청와대로 돌진? 경찰의 살인진압을 부각시켜야 하는 때 이목이 집중된 집회에서 불필요한 충돌이 어떤 효과를 냈을까? 참가자 다수는 그렇게 할 준비가 돼 있었는가? 아마 일부가 그런 도발을 했다면 십중팔구 우리 편에게서도 욕을 먹었을 것이다.


사실 “노동개혁” 입법에 대한 박근혜의 재촉과 ‘노동계’의 반대 등에 관한 뉴스 보도가 (해당 매체의 가치판단을 떠나서) 계속 되고 있기 때문에 민주노총이 주도했다는 사실 자체로 노동 개악 반대라는 의제는 어느 정도 전달되게 돼 있다.(그러니 언론 프레임 때문에 대중에게 잘 전달이 안 된다는 점만 일면으로 강조하는 사람들은 대중의 지각을 무시하는 것이다.)


게다가 3만 명 넘게 평화행진을 했는데 그게 못마땅한 사람들은 이 집회로 사기를 얻은 많은 사람들을 무시할 뿐아니라, 사실상 법원의 집회 허가 결정이 문제라고 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바로 그것이 이날 동원 성공에 기여한 바가 있는데도 말이다. 맥락이 완전히 엉망진창인 것이다.


그래서 12월 5일 집회가 전투적이지 않았고 경찰의 손아귀에 놀아나서 문제라는 식으로 평가하며 현상적인 물리적 충돌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지금 박근혜의 개악 공세에 직면한 (그리고 반격의 계기를 잡을 기회를 이미 여러 차례 놓친) 노동자들과 피억압 대중에게 필요한 진짜 과제를 냉철하게(전략적으로) 돌아보지 않는다. 오히려 그걸 방해한다.


지금은 총궐기 같은 대규모 동원 집회는 중요하다.(특히 지금은 서울로 모이는 게 중요하다.), 다만 냉정히 말해 하루짜리 시위들을 몇 주 건너 한번씩 하는 수준으로는 박근혜 개악 공세를 막기 어렵다. 그것은 (우리 쪽 수단보다) 저들이 더 강도 높은 수단들을 필사적으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총 파업, 그것도 중요 사업장들이 적극 앞장서 기업들에 실질적 타격을 주는 파업이 필요한 이유다. 그래야 박근혜 정부가 움찔할 것이고, 지배계급 내부에서 지금의 막가파 강공이 효과를 거둘 수 있는지에 회의가 생겨날 것이다.


다만 객관적으로 필요한 이 수단을 사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럼 그렇게 가도록 하는 데서 무엇이 더 효과적일까.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행동에 더 동참하게 하면서 파업으로 갈 수 있는 자신감을 얻도록 노력하고, 그것을 통해 지도부의 진지한 파업 조직을 압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인가, 아니면 충동적이고 불필요한 충돌로 역습의 빌미를 제공해 한사코 전면 투쟁을 회피하는 일부 상층 지도자들이 투쟁을 미루는 일을 정당화할 수 있게 해 줄 것인가.


분명히 전자로 가는 길이 쉽지 않다. 어렵다. 시간이 촉박한데, 시간이 걸리는 과제다. 그렇다고 거칠 수밖에 없는 단계단계들을 의욕만으로 건너 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다시 말해, 지금은 단순히 ‘나가자 싸우자’만으론 부족하고, 잘 벼려진 ‘정치’가 중요하다. 시야가 협소하지 않고 계급 분석이 정확한. 수동(관조)적이지 않으면서도 조급하거나 경솔하지 않은. 그리고 책임성! 있는.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윤똑똑이들.

‘노동개혁=노동자 양보론’에 재벌 개혁(책임론) 프레임으로 맞선다? 재벌도 개혁해라, 돈 내놔라. 하면서 노동자 양보론에 대한 찬반을 회피하는 것이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레이코프 프레임론의 약점(물질적 현실을 담론이 움직이는 것으로 봄)은 그대로 수용하면서, 레이코프보다도 못하다. 레이코프는 적어도 자기 지지자들을 속이지 말고 자기 집단의 가치에 충실하라고는 했다. ”이중개념 의식” 개념을 사용해 진보적(물론 레이코프가 말하는 진보는 리버럴에 가깝다) 집단의 가치를 일관되게 활성화시키려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이를 노동운동에 적용하자면, 저들의 오도된 세대(충돌)론에, 계급(단결)론으로 맞서라는 것이다.(물론 레이코프는 좌파가 아니므로 저런 식의 사례를 들지는 않는다.)

노동자 양보론 vs 재벌 책임론 구도는,
 
‘노동자 양보가 아니라, 재벌 책임이 해결책이다’라는 얘기일 수 있다.
이 경우, 재벌 책임론의 전제는 노동자 양보론 거부가 된다. 결국 노동자 양보론(원형은 노동귀족론)에 정면으로 반박해야 한다. 회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1차 프레임은 ‘노동시장 구조 개악 반대’ vs 찬성이 될 수밖에 없다.

 ②노동자 양보보다 재벌이 우선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 우선순위론일 수 있다. 이 경우, 우선순위의 문제일 뿐, 노동자와 재벌이 쌍방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되므로 노동자 양보론 vs 재벌 책임론 구도 몰아가기는 기껏해야 사회적 타협론에 불과하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정부가 재벌 책임은 가려주면서 노동자 양보론을 입법화, 현실화하겠다는 것이므로 이 상황에서는 노동자 양보론 반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지 않고 양비론을 편다면, 박근혜 정부의 프로젝트를 도와주는 것일 뿐 반대로자로서는 어떤 존재 의의도 없는 셈이 된다.

게다가 책임의 우선순위라는 것도 결국은 현실에서 힘의 대결로 결판나는 것이므로 그 힘의 대결에서 밀린다면, 노동자 고통분담론은 현실에서 수용될 것이다. 재벌책임 우선순위론은 실패하는 것이 된다.

그런데 이 경우 힘의 대결을 이끄는 데서 노동자 양보론에 대한 정면 거부를 회피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힘을 극대화하는 데 도움이 되냐는 것이다. 노동귀족론을 거부하지 못하고서 조직 노동계급을 파업을 옹호할 수 있을까?

따라서 노동자 양보론을 수용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문제는 핵심 쟁점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의미있는 행위자로서 지금 국면에서 존재하려면 이 쟁점을 회피할 수 없다.

결국, 노동자 양보론(이것의 원형은 노동귀족론)을 반대하는 수단으로 재벌 개혁(책임)론이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논리적 자기 모순이 된다. 어떤 경우에도 노동귀족론에 대한 찬반을 빼고는 재벌 책임론이 역할을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노동자 양보론 vs 재벌 개혁론이 효과적인 대응 프레임이기는커녕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자기 기만이다.

이런 산수 같은 얘기를 노동운동 좌파들에게 해야 한다는 건 고약한 일이다. 정치가 틀어졌거나, 자신을 애써 속이고 있거나.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노동당 결집파 일부, 정의당 대표 선거에서 조성주 등 진보정치 일부에서 ‘낡은 이념정치를 버리자’는 얘기가 다시 나온다.


이념/이론은 한 개인 또는 한 집단이 세계를 일관되게 바라는 시각과 기준 즉 관점과 방법을 일컫는다.


이념/이론이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문제라는 말은, 각자 개인적/집단적 경험과 그 경험에서 유추한 부분적 통찰들, 사회의 지배적 상식들을 조합해 나름의 ‘세상보기틀’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일관된 체계를 갖춘 이론일 수도 있고, 짬뽕일 수도 있으며, 개인들의 개똥철학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나름의 이념/이론/세계관(인생관)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특정한 이념적 틀을 선호하거나 선택할 수도 있고, 이것저것 조합할 수는 있어도, 이념/이론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각 개인들이 최종 취사선택해 얼개를 짜는 특정한 사고 체계는, 우리 뇌가 외부의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벌이는 활동의 맥락에서 자신의 이념/이론(세상보기틀)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목적 실현에 유용한지를 검증할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념이 쓸모 없고 당장의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며 그래서 거추장스런 이념을 벗어던지자”는 것이 하나의 이념이다. 


이런 세계관을 좀 더 다뤄 보자면, 먹고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마르크스 유물론의 기본적 전제다. 문제는 첫째,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욕구 문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먹고 입으며 살아가는 방식이 현재의 사회에 어떻게 구조화돼 있냐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자기 삶의 조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계급 관계’에 기초해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놀라워서’ 자신의 계급관계와 인식이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념/이론은 객관적 사회관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 역사적 경험의 문제이고, 각 개인의 기질과 성격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념/이론은 그것이 각 개인의 계급 관계에 들어맞든 안 맞든 어느 정도는 각 개인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이념/이론은 인간 집단의 능동적/지적 활동들  속에서 복수로 경쟁하는 관념들이다. 우리 삶은 인식에서 실천까지 끊임없는 선택에 놓여있다. 많은 대중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보고 듣고 배운 세계관들의 모순된 조합을 이념/이론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다수는 기존 사회의 기성 질서에 무조건 순종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혁명적으로 거부하는 입장도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적인 것이다. 개김과 순응의 적당한 섞임. 그 배합 비율은 격변적 사건의 경험이나 계급 세력관계에 따라 매번 바뀐다. 또 개인마다 다르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가 지각 있는 인간이라면 이념/이론/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첫째, 이념 없는 정치는 없다. 없는 걸 하자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 아니면 무능한 인물일 것이다. 세계를 일관된 틀로 해석할 수 없는 정치가 미래 사회의 설계를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념 없는 정치는 전형적으로 흑묘백묘론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배부르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내가 왜 배고픈지를 알려고 해야 한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가도, 밥은 나오고, 부자들의 시종이 돼도 밥은 나온다. 굶어가며 투쟁하는 것도 밥을 위해서다. 


힘들고 지쳐도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을 팔고, 비굴하게 웃고, 때론 땡볕에 집회를 하고 밥새워 농성을 하고 심지어 공장을 점거하고 경찰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단식과 고공농성 같은 것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떻게 배를 채울 것인가도 중요하다. 작은 성과, 작은 승리의 경험 좋다. 지금보다만 나으면 좋은 거다. 그런데 그 밥은 계속될 수 있는가? 아닌가? 이런 걸 이념 없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너무 나쁘니까 유승민이 박근혜에게 이기면, 그 자체로 진보인가? 맥락은 진보되, 그 자체는 진보가 아니다. 유승민이 부상하는 게 어딜 봐서 진보인가. 박근혜도 망설이던 싸드 도입하자고 난리치던 인간인데. 


다만 맥락상 대통령 권력이 약화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맥락상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건 왜 좋은지, 왜 좋게 됐는지, 좋은 일이 계속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심지어 무엇이 정말로 좋은 건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판단의 기준이 될 이념(이것의 통속적 버전이 가치관/세계관) 없이 무엇으로 이런 걸 판단할 수 있다는 건지 도저히 알지 못한다.


사실 밥에 의존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솥도, 쌀도 없기 때문이다. 급진적 이념? 과격한 투쟁? 이 모든 게 세상이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생활수단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운 좋으면) 착취받는 노동에 평생 시달려야 하고, 그 자리를 더 좋게 하려고 조직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이념/이론이다. 


이것을 체계 있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론이고, 없는 사람이 더욱 더 이념/이론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노동자들은 여럿이 싸워야 막강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념/이론은 더 체계화돼야 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급돼야 한다. 이념/이론에 바탕한 조직이 필요한 이유다.


둘째, 그러니 없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이념을 배치시키는 것은 사실은 이념이론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이념/이론, 즉 계급투쟁의 이념/이론을 배제하자는 것이고, 투쟁의 고단함과 헌신을 버리자는 말의 그럴싸한 포장인 것이다. 


자력 해방을 위한 싸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투쟁 없이는 자기 몫을 정당하게 쟁취할 수가 없다. 자기 행동 속에만 대중은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투쟁을 소모적으로 보는 것은 자력 해방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그 가능성, 즉 노동계급 대중의 잠재적 자력 해방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중 스스로 해방적 이념/이론을 비교 검토하고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총체적으로 체계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노동자에겐 늘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념/이론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그러한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이해하고 변화의 길을 제시하는 이념/이론이 필요한 때다.


세계적 규모의 경제 위기가 국제정치의 향방을 한계 짓고, 국내의 임금, 노동조건, 복지 삭감을 추동한다. 이런 배경에서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되며, 각국에서 정치 위기와 계급 적대가 격화되고 있다. 즉 노동자 개인들의 삶을 옥죄고 밥그릇을 위협하는 것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위기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단협으로, 작업장의 관행으로 애써서 쌓아놓은 개혁 성과들이 반복해서 도루묵이 되기 때문에, 이 사회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만드는지, 항구적 개혁을 이루려면 사회의 무엇, 또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반면, 갈수록 주류 언론, 출판, 교육 등은 노동 대중의 이런 욕구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개혁을 주지 못하는, 심지어 개혁을 도로 빼앗는 개혁주의 조직[기구]들도 대중의 욕구에, 또는 새로운 이념 제시에 실패하고 있다.


넷째, 따라서 이런 때에 자칭 ‘진보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이념의 정치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우경화의 정당화, 책임회피, 무능 셋 중 하나라고 본다. 대부분은 셋 다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으며, 대중에게 뭘 바꾸자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인식 상의 선택 기준과 방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일관된 잣대 없이 그때그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념 배척주의가 실용주의인 이유다.


다섯째, 그래서 이들의 이념 포기 선언은 모든 이념의 포기 선언이 아니다. 사회를 변혁하자는 좌파 이념, 급진적 이론과 결별하자는 선언이다. 갈수록 하층민들을 나락으로 내모는 세상의 구조를 현상유지하면서 세탁질, 땜질에 그치자는 정치다. 그러므로 이것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선언인지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유럽판 진보정치의 대표주자인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위기는 단지 외부적 위기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환멸과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동자 대중이 이런저런 방식의 세탁질에 이제는 기대할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정치 위기, 좌우 양극화(극우/파시스트의 성장과 좌파개혁주의 정당의 부상) 등이 일어나고 있다. 다수의 ‘상식적 개혁주의’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변화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념이 대중에게 필요없다거나 대중은 이념적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 이면을 보지 않는 것이고 사실은 대중을 수동적 객체로 보는 것이다. 이념을 이해하고 검증해 자기 것으로 만들 대중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발부터 자기제한적인 것이다.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 대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잠재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구조적 잠재력이므로 이론(이념)적으로 이를 증명해야 하고, 둘째, 불가피하게 거듭 치러내야 하는 투쟁이 확대되고 깊어지며 스스로 힘을 자각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운동 정치에서 이념을 버리자는 말은, 노동계급 대중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그 잠재력을 부정함으로써 가장 유력한 길을 봉쇄하는 것이다.


이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실용주의 언사들이 실천적으로 뜻하는 바는, 선거에서 좋은 당선자를 내는 것으로 진보정치의 임무, 진보적 노동 대중의 임무가 끝난다는 것이다. 이념을 따지지 말거나 이념적으로 편향된 인상을 주지 않아야 일상적인 때의 선거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 배제론은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맺는 관계가 투쟁에서의 소통과 연대, 논쟁이 아니라 선거 시기에 표를 매개로 이뤄지는 관계가 돼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배신당한 유권자들이 다음 선거에서 사후 복수 하는 것 말고는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는 관계다. 거의 1백 년 가까이 개혁주의 정당들의 반복된 국제 경험이다.


때문에 실용주의의 자기제한적 발상으론 애초에 승리하는 싸움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아 ... 허무해라.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소련 체제 성격과 진영논리 실천을 둘러싼 노동자연대 김영익 기자와 박노자 교수 간의 논쟁 중 박노자 교수가 2차 반론을 폈다. 이 글에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자본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훅 치고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토니 클리프의 후예들이 국가자본주의론의 핵심을 보전하면서도 이론을 현실에 비춰 혁신해 오는 동안, 비판자들의 반론은 60년 전 토니 선생이 최초에 반박한 그 상태에서 변한 게 없는 듯하다. 한마디로 화석화된 비판이고, 논쟁 때 잘 쓰는 표현으로는 ‘동어반복’이라고 할 수 있다. 박노자 교수의 반론을 보고 든 생각이다. 


한편, 박 교수의 주장이 꼭 그런 것은 아닌데, 국가자본주의론 비판자들의 한 특징이 떠올라 재밌다. 마르크스주의의 혁신!혁신!, 또는 좌파의 혁신!하면서 국가나 계급, 정당 같은 혁명적 실천 이슈에서는 IST(국제사회주의 경향)의 혁명적 해석 고수를 낡은 교조주의(교조적 맑스주의)나 공상적 행태 같은 걸로 취급하는 사람들 다수가 유독 국가자본주의론 논쟁에선 자본론 '자구'를 들이대 이단 취급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박 교수가 근거로 내세우는 교환 형식으로서의 시장은 수천 년 된 경제 방식이다. 우리는 왜 자본주의에서 시장이 경제의 지배자 지위에 올랐는지, 또는 경쟁적 축적 강박이라는 구조로 재편됐는지 물어야 한다.(물물교환 시장에서는 그런 구조적 강박이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간 경쟁이라는 요소도 마찬가지다. 국가 자체가 자본주의 원리에 따라 재구성됐다.


이런 이론적 쟁점들을 해결하려면, 박 교수가 이론적 근거도 (심지어 예시나 논거도) 내놓지 않는 다소 당황스런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본질이 아니라고 일축하는 ‘축적’과 ‘착취’라는 범주로 들어가야 한다. 


(박 교수는 ‘이윤 경쟁’과 ‘이윤 축적’, ‘자본 운동의 장으로서 시장’이라는 각각의 범주를 연결고리 없는 낱낱의 개념들인 것처럼 취급하는데) 이윤을 위한 이 자본의 운동을 고려치 않고 어떻게 이윤 경쟁 체제를 설명할 수 있겠는가. 


단언컨대, ‘경쟁적 (이윤) 축적 강박’을 빼놓고서는 자본주의를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박 교수처럼 ‘축적이 아니라 시장’ 이라는 황당한 입론에서 출발하면, 다양한 특수 형식들을 자본주의 일반론 범주와 모순되지 않게 설명할 수 없다. 사실은 자본주의 일반에 대한 분석조차 해 낼 수 없다.(박 교수는 축적을 화폐의 축적, 즉 시장 경쟁/투자에서 빠지는 재산의 축재와 착각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소련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는 (별로 성공적이진 않은) 반증 시도만 있지, 소련은 물론이고 나치독일, 제3세계 국가자본주의, 제국주의 군사경쟁 등을 그 체제들의 내적 동력 분석에 기초해 하나의 틀로 설명하는 걸 볼 수 없는 이유다. 


그러니, 박노자 교수처럼 단순히 ‘시장이 존재하냐’로 정의하면, 분석이 혼란에 빠질 뿐이다. 체제수호적으로 시장을 초역사적 실체로 전제하는 부르주아 주류 경제학들과 차이가 모호해지는 것도 그 한 이유다. 


또한 그런 분석은 자본주의에 대한 개혁주의적 분석으로 갈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 아래서도 국가의 시장 규제는 1930년대 이후 흔한 사례니까 말이다. 심지어 신자유주이 세계화 시대라는 지금조차도! 사실, 바로 그 때문에 박 교수가 지금 진영논리에 친화적인 것일 테지만 말이다. 암튼 다음 글을 인내심 있게 기다려 보겠다.



※ 그나저나 아무리 두음법칙을 남발해도 '로동자련대'라니. 남의 ‘이름’을 갖다가 이렇게 장난질해도 되나. 고유명사인데. 력시 린터내셔널한 린텔리겐치아다운 ‘죄치’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주말에 노동당 전국위가 통과시킨 연금 관련 결의문은 모순투성이다.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투쟁은 정당하다면서도 정작 내놓은 방안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전제로 해서 기초연금을 늘리자는 것이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노동당 전국위 결의문은 ‘공무원연금 개악을 막아 이를 지렛대로 국민연금 개선을 주장하자는 논리에 반대하면, 논리적으로 국민연금 개선도 어렵게 만든다’는 예측이 옳았다는 산 증거다. 


다만 기초연금의 액수를 현재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의 20% 수준인 40만 원으로 올리고 보편적 지급을 하자는 것은 맥락과 관계 없이 지지할 만한 아이디어다.


그런데 이를 위해 또 다시 보편증세와 보험료 확충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보편증세를 통한 보편복지 확대는 공동구매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장하준 식 복지 개념에서는 효과적일지 모르나, 계급간 재분배를 모호하게 한다는 점에 약점이 있다. 보편증세로는 노동계급 내부도, 노동자들과 서민 대중을 단결시키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공무원연금 개악은 자본에서 노동으로 소득을 역분배하는 전략이다. 이를 막는 것에 일차 우선순위를 둬야 하는 이유다. 그런 점에서 공무원연금 개악 저지 문제를 흐리면서 기초연금이나 국민연금 등 공적연금 강화를 지금 의제화하자는 것은 어느 정도는 ‘정신승리’적 발상이라 할 수 있다.(새누리-새정치가 합의한 안이 얼마나 공무원연금을 개악한 것인지는 http://wspaper.org/article/15868를 보시오. 한마디로 공무원연금을 국민연금 수준으로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사회적 연대인가???)


그럼에도 노동당 전국위 결의문이 노골적으로 여야 합의(개악)안을 지지했던 정의당이나 국민모임의 입장과 같은 것은 아니다. 기초연금의 대폭 상향과 지급의 보편화나 연금 기금에 대한 기업·정부의 책임을 추가로 묻고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아래 링크한 글의 필자인 노동당원이 노동당이 새정치, 정의당 등과 유사한 입장이 됐다고 한 것은 조금 과한 듯하다.(맥락상 이런 비판이 이해는 가지만) 


같지 않다고 해서, 실천적으로 더 우수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결과적으로 노동당 전국위 연금 관련 결의문은 개악 저지에 바탕한 공적연금 강화 방안이 아니라는 점에서 실천적으로는 개악을 막으려고 (저들의 국회 일정상) 마지막 투혼을 발휘하려는 공무원·전교조 조합원들 발목 잡는 입장이다.


무엇보다 노동당 식의 기초연금 상향을 이룰 수 있는 진정한 사회적 동력을 오히려 약화시킨다는 점에서 자충수다. 자기 임금(노동자들의 연금은 지급이 미뤄진 임금이다!)도 못 지킨 사람들을 어떻게 기초연금/국민연금 투쟁에 동원할 수 있겠는가.(게다가 그 임금 삭감에 동조한 사람들이 그들을 불러낼 수 있을까?) 그러니 큰 틀에서는 정의당처럼 현재의 투쟁전선에서 이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래서 아래 링크한 노동당원의 글이 노동당 전국위의 결의문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고 (공무원연금을 지렛대로 국민연금을 상향시키자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는) 그 논거도 옳다.


노동당 전국위는 한마디로 모순된 태도를 내놓은 것이다. 경제 위기의 시대에 노골적으로 체제의 수호자 구실을 하는 우파 개혁주의와 달리, 좌우 양쪽의 눈치를 다 봐야 하는 수줍은 개혁주의, 즉 좌파 개혁주의의 모순을 보여 주는 듯하다. 


이런 모순과 동요가 노동당의 내분 사태에 깔린 정치적 배경이 아닐까 한다.


++++++++++++++++++++++++++

아래 결의문에 대한 노동당 당원의 비판

http://www.laborparty.kr/bd_member/1582440


++++++++++++++++++++++++++

[노동당 전국위원회 공적연금 강화 특별결의문]


기초연금 두배로, 공무원연금 통합, 국민연금 하나로

평등한 노후보장과  공적연금 강화 실현하자!



공무원연금 개편논의가 오리무중에 빠져들었다. 이 와중에 기초연금과 국민연금을 강화하여 모든 국민의 노후를 보장하고자 하는 길도 방향을 잃고 말았다.


이번 공무원연금 개편은 2007년 국민연금 삭감, 2014년 기초연금 개악, 2015년 공무원연금 삭감으로 이어지는 ‘공적연금 하향평준화’의 완결판이다. 박근혜 정부는 공적연금에 대한 철학도 없고, 당사자와 합의도 없으며, 자기가 한 약속에 대한 책임의식도 없다.


초고령사회에서 연금이 노후생활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지대하다. 그런 의미에서 공무원노조에서 연금수령액의 하향을 막기 위해 투쟁에 나선 것은 정당하다. 문제는 150만 공무원(사학연금, 군인연금 포함)보다 형편없는 수준의 연금을 받고 있는 2100만명 국민연금 가입자와 ‘용돈 국민연금’조차 받지 못하는 나머지 절반의 국민들에 대한 배려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지난 5월 2일 여야가 서명한 합의문에는 “국가 책임 하에 모든 국민이 기본적인 노후대비를 할 수 있도록 국민연금을 포함한 공적연급제도의 개선방안을 마련하는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빈곤 해소를 위한 사회적 기구’를 국회에 설치한다”고 밝힌 바 있다.

노동당 전국위원회는 연금개혁이 표류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다음과 같이 입장을 밝히며,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빈곤 해소를 위한 사회적 합의를 이루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다. 아울러 여야, 정부와 정치권에 공적연금 강화와 노후빈곤 해소를 위해 다음과 같은 방향으로 국민적 논의를 모아 나갈 것을 촉구한다.



[공적연금 개혁의 목표] 모든 공적연금의 목표는 재정절감과 자본성장이 아니라 국민들의 전 생애에 걸친 소득보장에 있다. 노후빈곤과 불평등 해소를 위해서는 소득보장체계를 △선별연금에서 보편연금으로, △용돈연금에서 생활연금으로, △사적연금에서 공적연금으로 전환하고, 이를 전제로 보편적 복지증세와 목적세 신설, 사회보험료 확충이 필요하다.


1. 기초연금을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인을 대상으로 △국민연금 가입기간/기초생활보장 수급 여부에 상관없이, △국민연금가입자 평균소득(A값)의 20% 수준(월 40만원)로 지급해야 한다.


2. 연금 사각지대 해소를 위해 △비정규직 노동자, 영세자영업자 등에 대한 보험료 지원 △출산, 돌봄, 군복무 등 공익적 활동과 실업, 휴직 등의 경우 지원을 확대해야 한다.


3. 노후소득의 실질적 보장을 위해 △국민연금 소득대체율 향상과 이에 따른 적정 보험료 기준에 대한 합의를 촉구한다. 이와 함께 △국민연금 가입자 평균소득(A) 산정방식 변경 △보험료 소득상한액 인상 또는 폐지 △연금 지급액의 상한 설정 △고용보험 방식의 보험료 기업책임 확대 △연금세 및 공적연금소득세 신설 등이 필요하다.


4. 보편적 연금 실현 및 재분배 강화를 위해 공무원연금 등 특수직역연금과 국민연금을 통합하자. 아울러 이 기회에 △공무원 교사의 노동기본권과 정치참여권리를 보장하고 △고용보험/산재보험을 함께 가입하고, △국민연금보다 초과하여 납부하는 보험료(현행 소득이 5%)에 대해 기존 직역연금공단 등에서 운용하여 부가적 연금으로 지급하자.


5. 연금 통합과 함께 기존 특수직역연금에 명시된 국가의 지급의무규정을 국민연금이 승계하여야 한다.


6. 노동자의 퇴직적립금을 사보험 퇴직연금 상품이 아닌 국민연금공단에 추가납부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여 해당 퇴직적립금에 대한 추가 소득대체율을 보장한다.



미래세대 부담을 줄이려면 지금부터 고용안정과 복지증세가 필요하다. 보험료를 크게 올리지 않아도 전반적 노동환경이 개선되면 임금이 오르며 및 가입자 증대가 가능하다. 여기에 ‘버는 만큼 내는’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면 연금보험료 수입은 자연스럽게 늘어난다. 더불어 보육, 교육, 주거, 의료 등 복지 확대를 통한 부양률 개선과 노후복지 강화 역시 공적연금 강화에 중요한 과제이다.


결국, 미래세대 부담을 늘리는 건 정부의 저임금-저복지-저연금 정책이다. 당장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철회하고 최저임금을 인상해야 한다. 누리과정 무상보육 대란에서 보듯이 ‘증세없는 복지’는 허구로 드러났다. 기업과 고득소자부터 사회보험료를 더 내고 연금세 등 목적세 도입, 법인세·소득세 강화 등 보편적 복지증세가 절실하다.


공무원연금 폐지, 기초연금 두배로, 국민연금 하나로, 공적연금 강화하고 노년이 기다려지는 세상을 노동당이 앞장서 실현하자!



2015년 5월 23일

노동당 전국위원 일동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어떤 이들은 노동자연대가 말로는 인민전선에 반대한다면서도 실천에서는 인민전선을 추종해왔다고 말한다. 


그들은 공동전선은 노동계급 내 공동행동이므로 '계급 대 계급'의 노선 아래서만 진정한 가치를 구현한다고 말한다. 이말대로면, 나는 반대로 이렇게 비판할 수 있다. 어떤 초좌파들은 공동전선을 지지한다면서 실천에서는 종파주의로 일관했다!


왜 그렇게 되는가. 사실 “계급 대 계급” 노선은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초좌파 종파주의(이른바 사회파시즘론) 노선이 내세운 핵심 논거였다. 이들은 사회민주주의(개혁주의)를 파시즘과 똑같이 취급했다.그래서 심지어 나치와 협력해 사민당 지방정부를 탄핵하려고도 했다. 노동운동이 어마어마한 내부 불신 속에서 분열해 무기력해진 것은 당연한 결과다.


이런 스탈린주의 공산당들도 말로는 공동전선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계급 대 계급 노선에 기초해야 진정한 공동전선이라는 것은 자가당착적 헛소리다.


노동계급의 일상, 노동계급의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정치는 순수하게 노동계급 고유의 것들이 아니다. 일상에서 계급은 서로 영향을 미치며 특히 일상적으로 피지배자이자 소외된 처지인 노동계급은 상층 계급들에 기원한 이데올로기에 상대적으로 더 많이 영향 받는다.


지배계급의 우익 정치나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사회민주주의, 좌파 민족주의, 자율주의 등 다양한 버전의 개혁주의들이 그렇다. 아나키즘도! 자본주의 일상에서 객관적 처지(계급적 이해관계)는 같더라도 노동계급 대중은, 서로 다른 계급들에 기원을 두는 정치나 이데올로기로 분열돼 있는 것이다.(이 때문에 노동계급의 삶과 운동, 이데올로기들을 다룰 때,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적 분석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겉으로는(현상적으로는) 노동운동 내 공동행동을 추구하는 공동전선이 서로 다른 계급 기반의 정치와 협력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공동전선은 명백히 노동계급 대중이 광범위하게 단결해 스스로 행동에 나서도록 조직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혁명가들이 개혁주의 리더들과 체계적으로 협력하는 전술이다.)


아주 엄밀하게 따지면 사회민주주의조차 노동계급 대중이 아니라 노조 상층관료에 기반한 정치이니 노동계급이 아니라 (협상과 조화를 추구하는) 신중간계급적 세계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혁명적 마르크스주의나 혁명적 신디칼리즘 정도가 노동계급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하겠다. 혁명적 신디칼리즘은 그 이데올로기의 계급 기원(토대)보다는 그 이론 자체의 결함이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따라서 대중투쟁 속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분열된 노동자들을 단결시키려면, 객관적 이해관계를 기초로 단결를 추구해야 한다.(그래서 사회연대전략 따위가 해롭다는 것이다.) 그렇게 단결한 투쟁 속에서 어느 정치가 계급적 이해관계를 제대로 대변하고 실현하는 데 더 효과적인지 대중 스스로 경험을 통해 검증하는 방식을 추구해야 현명하다. 노동자들의 대중에 영향을 미치는 상층 리더들의 이데올로기만 보고 해당 운동이나 부문을 일면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그러니 공동전선을 지지한다면서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정치 이데올로기들을 기준으로 '계급 대 계급' 노선을 구현한다는 것은 실제로는 공동전선을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런 경우, 매우 종파적 초좌파주의에 빠지거나 아니면 자기 기만적인 기회주의(인민전선)로 타락하기 십상이다. 스탈린이 지휘한 1930년대 공산당들도 '계급 대 계급'을 내세운 초종파 노선에서 계급타협적인 인민전선 노선으로 순식간에 옮겨갔다. 종파주의와 계급타협주의의 본질은 둘다 기회주의이기 때문이다.



☞ 관련 글 보기: 

공동전선은 무엇이고 왜 필요한가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파리 사태를 대하는 반제국주의 좌파의 임무.

 

할 말을 하라! 


“파리 테러는 비극적 사건이고 일어나지 않았다면 좋을 일이지만, 그 사건 자체는 제국주의의 중동 간섭과 지배가 낳은 유산이다. ‘표현의 자유 수호를 위해 국가 공동체가 모두 단결하자’는 잘못된 프레임이다. 이는 오늘날 인종차별주의의 주류적 버전인 이슬람혐오증을 강화시킬 뿐이다. 그런 이슬람 악마화는 제국주의자들과 극우익 세력들을 도울 뿐이다. 오늘날 광신적 이슬람 근본주의는 제국주의가 중동에 뿌린 야만과 증오(종파간 분열을 포함한)의 열매를 먹고 자란다.



고향은 제국주의 국가들과 그들에게 후원받는 독재자들에게 유린되고, 이민 온 유럽에서는 2등 시민, 3등 시민으로 천대 받는 사람들의 종교를 비꼬고 모욕하는 것이 (풍자의 형식 때문에) 그 내용까지 옹호 받을 문제는 아니다.


유럽에서 무슬림 망신주기는 소신 있는 풍자가 아니라 체제의 인종차별과 편견에 편승하는 것일 뿐이다. 우익적 광기에 눈 감는 일이다. 그래서 약자를 비꼬는 건 풍자도 아니다. 일베의 ‘홍어 택배’ 운운이나 구제불능의 여성 비하가 풍자도, 표현의 자유로 옹호 받을 일도 아니고 단지 유해한 공해에 불과하듯이 말이다.


게다가 프랑스야말로 아랍 출신 이주자들에게 식민 본국 아닌가. 아무리 테러가 규탄 받을 일이라 해도, 식민 본국 출신의 성공한 백인 엘리트들이 이민자들의 종교를 비꼬는 것이 칭찬 받을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국가권력의 강압적 조처 문제도 아닌데, 상대적으로 천대받는 집단들의 극히 일부가 모욕적 행위자들에게 폭력으로 반응했다고 해서, 그것이 규탄 받아 마땅한 행동이라 해서, 이를 곧바로 ‘표현의 자유 수호’로 등치시키는 것은 잘못이다.


기독교를 함께 비웃었다고 해도 본질이 달라지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 어디에도 기독교 신도라고 천대 받고 린치 당하며 열등인 취급 받는 나라는 없다. 히잡 금지는 있어도 십자가 금지는 없다.


흑인 차별을 예로 들어 보자.(오늘날 피부색 차별을 공식으로 옹호하는 집단은 거의 없으니까) 아파테이트가 종식되기 전, 남아공에서 흑인 전통 문화에 대한 비아냥과 조롱하기가 주류 언론들에 실렸다면 어땠을까. (오늘날 미국에서 무슬림의 상당수는 아프리카계 흑인들이기도 하다.)


표현의 자유는 피지배 민중에게 필요한 것이지, 국가가 체계적으로 조장하는 인종차별에 편승해 약자를 괴롭히는 자들의 악덕을 가려주기 위한 은폐막이 돼서는 안 된다. 사실 앞으로도 서방 강대국 안에서 광신적 이슬람근본주의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해 인종차별적 표현들에게 허용된 자유가 위축되는 일이 있을 것 같진 않다.


표현의 자유는 제약없이 자유로운 개인들에게 보편적으로 주어지는 권리가 아니다.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에서 표현의 자유는 서로 다른 내용을 뜻한다. 사장들이 노동자들의 고임금 때문에 경영이 어렵다고 말할 자유는, 노동자들의 임금과 노동조건을 올릴 (또는 올리라는 주장으로 지지를 얻을) 자유와 충돌한다.


사실 이번 테러 공격으로 ISIS나 알카에다 등이 목표한 바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역설로 입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반동, 즉 무슬림 혐오를 오히려 부추겨 무슬림 청년 대중이 더욱 테러리즘 전략에 가까이 오도록 하는 것 말이다.


지금 이런 광적인 세력이 영향력을 일거에 늘린 것은, 대중 행동을 통한 중동의 해방이 요원하다는 절망과 시리아 혁명 등을 종파간 다툼으로 파탄내려 한 역내 독재자들(예를 들어, 시리아 아사드)의 술책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이 원인들을 더 거슬러 가면, 제국주의의 중동 침략, 강탈, 억압, 간섭 등이 더 근본적 원인으로 등장한다. 


그 점에서 이런 테러 행위, 또는 이슬람주의(정치적 이슬람)의 문제점들이 이슬람이라는 종교에 내재한 파시즘성 때문이라고 보는 따위의 주장들은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맥락을 완전히 무시한다는 점에서 초역사적·초사회적, 즉 극히 추상적이고 피상적인 관찰에 불과하다.


무슬림 독재자들? 이슬람 파시즘? 무슬림 독재자와 무슬림 민중이 있는 사회의 민주주의 문제에서 종교가 분단선인가? 계급이 분단선인가? 


막간의 혁명을 사이에 두고 서구화 추구 독재와 이슬람신정주의 추구 독재가 이어진 이란에서 종교가 독재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정권은 히잡을 강제로 벗게 했고, 한 정권은 강제로 쓰게 했다.(터키의 케말 파샤 세력도 히잡을 강제로 금지시켰다. 그렇다고 이들이 무슬림이 아니었던가?)


많은 경우, 종교는 사회적 비극의 원인이라기보다는 그 결과에 가깝다. 중동에서 세속 좌파의 실패를 분석하지 않고서는 이슬람주의의 성장을 이해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중동에서 가장 세속적이라는 팔레스타인에서 하마스가 선거로 집권한 2006년의 일은 PLO와 파타의 정치적 부패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이처럼 종교를 사회적 계급관계의 반영물로 보고 종교 그 자체보다 종교를 낳는 사회적 맥락을 더 중시해 다루는 것이 칼 마르크스 이래로 종교를 대하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태도다.) 


이슬람 사회에서도 종교에 대한 태도는 각 집단의 계급적 처지, 상황, 전통 등에 따라 매우 다르다. 신정주의, 민주적 세속주의, 서구화 세속주의 등. 히잡을 쓴 중동의 여성 사회운동가들이 정치적 이슬람과 세속주의로 날카롭게 구분되는 일 등. 따라서 필요한 것은 분명하고 간단하다. 상황을 분별있게 보라는 것이다.


코르테스와 피사로의 중남미(잉카와 아스텍) 학살과 점령, 미국 KKK단의 인종차별 만행, 부시의 이라크 전쟁, 그리고 한국의 반공기독교 카르텔 따위를 두고 기독교 자체가 악마의 종교라고 하지 않는 바로 그 태도가 이슬람, 그리고 중동 출신의 피억압 민중에게도 적용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적 맥락에서 보는 진정한 배경은, 제국주의의 중동 억압과 독재자 후원이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점령이며, 제국주의 지배자들이 서구에서 벌이는 이슬람혐오증(편견)이다. 그들은 이슬람 혐오증으로 중동에 대한 제국주의적 간섭의 명분을 얻고 국내적으로는 피억압 민중을 분열시키길 바란다.


따라서, 테러 대상이 언론사였다는 점이 문제의 근원적 맥락, 즉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의 문제를 기각하지는 못한다. 그리고는 언론의 자유 문제로 몰고가는 것은 (그것이 표현의 자유의 기준과 목적, 한계에 대한 성찰을 촉발시키긴 했지만) 이 사건을 종합해서 다룰 적절한 프레임은 아니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자칫 지배자들의 이런 시도에 좌파들이 독립적으로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제국주의 지배자들을 돕는 것이고 극우와 파시스트들을 고무할 뿐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논쟁: 시간이 꽤 지났지만 올려 둔다. 아래 내 글의 출처는 옛 <레프트21>(지금은 <노동자연대>) 웹사이트에서 벌인 지난해 12월 논쟁의 글(http://wspaper.org/article/13966)이다.(여기엔 옮기지 않았지만, 그 웹페이지에 함께 실린 김지윤의 글도 함께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그 이전 논쟁에서 파생된 나에 대한 2인의 반론(http://wspaper.org/article/13965)에 대한 나의 재반론이다. 

논쟁의 발단은 <레프트21>116호의 내 기사들인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재판: 자유민주주의의 낮은 기준도 지키지 않는 마녀사냥 중단하라와 국가보안법은 친북사상뿐 아니라 북한과 아무 관계 없는 급진적 사상도 공격하는 무기다에 대해 비판 글(http://wspaper.org/article/13900)이 실리면서부터다. 




최용찬 동지(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지난 번 내 반론의 요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최용찬이 통합진보당 방어 문제에서 사상의 문제를 운동ㆍ조직의 문제와 억지스럽게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적 지지ㆍ방어 전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진보당에 대한 무비판적 방어를 주장한다는 점, 셋째, 당면 투쟁에 대한 그의 전술적 주장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전지윤과 최용찬은 반론에서 최초의 세 가지 주장을 카세트테이프 돌리듯이 반복했다. 전지윤과 최용찬은 모두 ‘내란음모’ 재판에서 이 사건이 조작ㆍ날조됐다고 단언하지 않으면 정권의 탄압에 기회주의적으로 굴복하는 것인양 주장한다.

 

그래서 내가 이 재판의 핵심 쟁점을 사상의 자유 문제로 보는 것은 이런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복선이라고 보는 듯하다.

 

두 사람의 주장이야말로 내가 지난 반론에서 ‘이것이 진짜 하고 싶은 주장 아니냐’고 되물은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므로 둘의 반론은 나에 대한 진정한 반박이 되지 못한다. 도리어 내 진단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독자들이 두 사람의 글을 읽고 지난 번 내 반론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논쟁 구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쟁점들에 대해 더 확장된 문제의식을 제기할 것이다.

 

우선 ‘사상의 자유가 국가보안법 탄압의 본질’이라는 내 주장에 관한 비판을 다뤄 보자. 둘은 내가 사상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조직’, ‘운동’, ‘세력’, ‘성과’”(최용찬)의 문제를 대립ㆍ경시한다고 반론한다.(전지윤이 ‘일베’ 운운하며 내가 사상과 계급 기반을 분리시켰다고 주장한 것은 반론의 가치도 없다. 그것은 논리 이전에 국어 독해력의 문제다.)

 

내 주장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다. 사상의 자유는 견해 표명의 자유(언론ㆍ출판ㆍ집회)와 분리될 수 없고 개인주의자가 아닌 이상 이것은 결사의 자유와 분리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사상의 자유 문제가 핵심이라고 주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부연 설명하자면, 사상의 자유란 표현, 결사의 자유와 분리돼 단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영역일 수 없다. 고립된 개인의 사상조차 타인이 사상을 표현하는 과정과 집단적 토론에 참여하는 경험을 전제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기해방을 위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상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수백만 대중을 사로잡아 물질적 힘이 될 때, 진정으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발전을 막으려고 지배자들은 사상의 자유 자체를 가로막고 탄압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


그래서 집단적 해방을 추구하는 자기의식적 노동운동에게 사상의 자유란, 집단적 경험이 일관된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주장하고 토론하는 자유, 지배계급의 온갖 악취나는 사상이나 이간질 책략과 싸우며 그들과 전혀 다른 사상적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꾸려나갈 자유를 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19세기 이후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진정한 동력이 됐던 것도,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노동운동과 급진좌파들이었다. 이것이 내가 “노동자 투쟁이 진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역사는 바로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확대해 온 역사”라고 말한 이유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특정한 사상에 따른 결사의 자유까지 보장돼야 그 자유가 온전히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사상의 자유’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그것을 적어도 문구상으로는 보장한다고 보는 근거는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보장” 조항 때문이다.

 

전지윤 스스로 2009년에 쓴 글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자유 중의 자유’라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이 권리들을 국가보안법이 원천적으로 부정ㆍ제약했다”(《마르크스21》호, <레프트21> 사이트에 전문 게재)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보안법 탄압의 본질이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라는 내 주장과 뭐가 다른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면, 전지윤의 생각이 바뀐 것일 텐데, 정말 그런지 궁금할 뿐이다.

 

법무장관 황교안은 내란음모 혐의 발표 직후 “[내란 선동죄는] 내란에 대해 고무적 자극을 주는 일체의 언동”이라고 말했다. 즉, “일련의 탄압이 궁극으로 겨누는 것은 계급지배 질서에 도전하는 사상과 운동들”(김문성)이라는 것이다. 내란음모 실재 여부(조작 여부)는 탄압의 당사자에게도 부차적이다. 만에 하나 진보당이 ‘종북’ 사상과 내부 토론을 이유로 해산된다면, ‘사회주의’를 강령에 포함했던 민주노동당의 성장기와 비교할 때, 명백히 노동운동의 ‘정치사상의 자유’가 후퇴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당의 조직이 위협 받는 문제는 노동계급의 사상과 토론, 결사의 자유라는 더 큰 민주주의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벌백계”인 것이다. 사태를 이처럼 규정하면, 탄압에 맞서는 데서 조작 여부를 밝히는 것은 부차적이게 된다. 조작이든 아니든 노동계급 전체의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옹호ㆍ방어하는 것이 본질이자 핵심 과제가 된다.

 

이런 주장이 국가정보원의 증거 조작ㆍ날조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인가. 그렇진 않다. 비록 두 사람은 애써 내가 조작 문제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려 하지만 말이다.

 

보안경찰이 흔히 그런 방식을 쓴다는 것은 내가 116호에 쓴 기사에서도 밝혔고, 국정원의 회의록 왜곡 사실과 침투 공작을 폭로했다. 심지어 폭로의 분량도 내가 최용찬보다 더 많다. 그의 글이 내 기사보다 더 긴데도 말이다.

 

내 주장은 이 사건의 핵심 쟁점과 효과적인 방어 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둘은 ‘모든 것이 조작ㆍ날조됐다’는 주장으로만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진보당 활동가들이 “조작에 맞서 죽기살기로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까. 정권이 내란을 논의했다는 혐의를 입증하려고 혈안이 된 것은 그것이 ‘유죄’, 즉 처벌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고로 “‘조작’이라는 주장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국가보안법 프레임’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급진적 사상과 주장을 토론하는 것이 ‘왜 유죄가 돼야 하느냐’고 항의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상 재판의 본질을 잘 폭로하고, 지지자들과 운동 전체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반면에 조작 여부에 치중하는 변론은 자칫하면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 미끄러질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본질상 사상재판인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노동계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데서도 한계가 명백한 것이다.

 

비판적 방어ㆍ지지


그런데 두 사람은 이런 내 논거를 귀담아 듣지 않고, ‘조작’ 여부를 경시하는 것은 내가 진보당 지도부의 사상을 비판하고 싶어서라고 주장한다.

 

전지윤은 이 점을 이렇게 강조한다. “사상과 그 사상에 대한 이견’을 핵심으로 부각시키면 우리는 분열되기 쉽다. 예컨대 이번 마녀사냥 때 <뉴데일리>는 이렇게 이간질했다. ‘트로츠키주의야말로 스탈린주의와 상극이니까 방어하지 말아야 옳다.” 또 ‘김문성의 주장이 일베의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도 묻는다.

 

이처럼 <레프트21>의 기조와 내 기사들을 일부 개혁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주장들과 사실상 동일시하며 매도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되 비판적인 지지ㆍ방어’ 전술에서 ‘무조건’과 ‘무비판’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들은 사실상 ‘탄압 방어를 위해서는 진보당을 불편하게 할 어떠한 비판적 인식이나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으로 나아간다.

 

비판적 지지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에 분명한 바리케이드를 치면서도(무조건 지지) 혁명적 독자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비판적 지지)의 결합이다. 이는 대중의 모순된 의식, 현실과 혁명적 원칙의 괴리를 고려해 혁명가들이 채택하는 전술이다.

 

사실 전지윤이 <레프트21> 활동을 그만 둔 뒤에 나온 신문들에서 진보당 탄압 쟁점을 다룬 기사의 분량은 오히려 그 전보다 많다. 면 배치와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단순한 폭로에 그치지 않고, 혁명적 관점으로 분석적으로 접근하려 한 것이다.

 

전지윤과 최용찬의 주장은 결국 혁명가들의 독립적 주장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급진적 좌파가 노동계급 운동 속에 뿌리내리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음험한 탄압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책일 것”이라는 주장을 종파적인 것처럼 문제 삼는 데서 드러난다.

 

진보당을 탄압하는 박근혜 정부의 칼끝이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와 급진적 사상들을 겨누는 것이라면, 바로 그 칼끝의 표적이 된 노동운동이 저항에 나서 건재를 과시하고, 급진좌파가 노동운동 속에 뿌리내려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야 할 것들일 텐데 말이다.

 

이런 태도는 전지윤이 진보당과 자신의 정치가 다르다는 말을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국면마다 강조점은 달라야겠지만, 모종의 친북적 사상과의 준별 자체는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불가피한 일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진보의 대안을 주장하면서, 북한 체제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말을 피할 수 있는가.

 

그 유명한 ‘볼테르의 경구’조차도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로 시작한다. 즉, 차이가 있지만 사상(표현)의 자유를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가. 방어를 위해 차이를 아예 숨겨야 한다는 전지윤과 최용찬의 주장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사상 자체를 지지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계급에게 부정직한 태도인 것이다.

 

전지윤은 2011년에 최미진과의 공동 기사에서 “자주파 단체들이 6ㆍ15선언 이행과 민족 자주 등 자신들의 고유한 강령을 지지해야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레프트21> 52호)를 “폭넓은 운동을 건설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노동자 운동에서 사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정치적 지도를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각각의 좌파들 사이에 사상적 차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고, 또 그런 차이들을 이해할 능력도 있다.

 

현실 직시


한편, 이쯤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전지윤은 <레프트21> 편집자 시절인 올해 8월 초에 박근혜의 우익적 반격 가능성을 경고해야 한다는 내 의견을 무시하고 박근혜 위기론을 밀어붙인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와서 내가 박근혜의 탄압을 경시하는 듯 말하기보다 자기 비판부터 하는 것이 정직한 일일 것이다.

 

박근혜의 위기를 강조하다가 갑작스레 탄압이 주는 나쁜 효과를 ‘과장’하는 쪽으로 강조점이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전지윤은 “노동자 투쟁이 돌파구를 열 수 있다”는 내 주장을 “막연한 낙관”이라며 “주체적 노력을 통해 상황을 바꾸려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지윤이 말하는 능동적 자세란 무엇인가. “노동운동을 분열ㆍ위축시키려는 종북몰이에 맞서 노동운동의 단결된 대응”이다. 최용찬은 “노동자투쟁을 민주주의 투쟁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이 진보당 탄압에 반대하는 것을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왜 노동자 투쟁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맹아이고,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들(사상의 자유, 정치적 자유)을 방어하는 것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최용찬이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최용찬의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적 차원에 국한되는 듯하다.

 

구체적인 전술, 실천의 강조점(우선순위)에서도 전지윤과 최용찬의 개념에는 분명히 결함이 있다.

 

혁명적 조직에게는 각각의 전선에 대한 전술이 있고 여러 전선 중 어느 전선이 더 중요한지를 구분해 힘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진보당 방어 전선에서 비판적 방어를 하되, 철도노조 파업 등 노동자 투쟁 전선이 훨씬 더 중요하므로 여기에 힘을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전지윤과 최용찬의 전망과 달리, 지금 철도노조는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가지고 진정한 대중투쟁을 건설”해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과 투쟁의 전국적 초점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노동운동이 위축되지 않고 정부의 공세에 단호한 의지와 전투적 태세로 맞서며 불만의 초점 구실을 한다면,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전지윤의 사임 이후의)  <레프트21>의 전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노동자 투쟁이 계급 세력 관계를 바꾼다면, 우익적 공세도 약화시킬 수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기여하는 노동자투쟁의 힘이라는 것이 기계적으로 정권 퇴진 투쟁이나 민주적 권리 쟁취 투쟁의 형태만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987년을 들 수 있다. 6월의 민주화 항쟁은 그 몇 년 전부터 일어난 노동자 투쟁의 퇴적물이었고, 다른 한편 6월의 거리시위가 얻어낸 군사정권의 후퇴와 양보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든 것은 7~9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이 투쟁들이 주로 임금과 노동조건 등 경제적 요구들이 주가 된 투쟁들이었음에도 말이다.

 

종파주의


이렇게 보면, 내가 철도노조에게 민주주의 요구를 결합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주장이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이 틀린 이유는, 진보당 방어와 철도노조 파업이라는 서로 다른 전선을 기계적이고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묶으려는 데 있다. 그것도 철도노조에게 진보당 방어 전선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태도는 일부 지각없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치는 ‘당이 계급을 대표하고 자신들(공산당)이 그런 유일당이므로 자신들이 결정하는 의제가 운동에서도 가장 중요해야 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전지윤도 그렇게 하려는 것 같다. 그는 내가 “마녀사냥에 맞서 노동운동이 단결하자는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근거로 “노동운동은 …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가지고 진정한 대중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반격”이라는 주장들을 문제 삼는다.

 

마르크스는 “종파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영예를 계급 운동과의 공통성에서 보지 않고, 그 운동과 자신을 구별해 주는 특수 표지에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볼 때, 두 사람이 철도노조 투쟁을 바라보는 태도는 근본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

 

철도노조 파업이 불만의 초점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은 이 파업 자체를 강화(전면 파업, 연대 파업 등을 통해)할 수 있도록 현장 조합원을 고무하고 아래로부터 노조 지도자들을 압박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다. 최용찬이 우려했던 대로 한길자주회 보안법 사건이 터졌지만, 이런 것들이 이 과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건 아니다. 파업 지도부 일부가 진보당 지지자들이어서 그 이유로 분열ㆍ위축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차적이지만, 최용찬이 말한 집회 참가 건도 보자. 더 중요한 전선에 힘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가 언급한 두 집회에 관한 우리의 참여는 모두 문제 없었다고 본다. 11월 30일에는 철도노조 조합원 집회가 오전에 있었고, 12월 7일에는 삼성ㆍ화물연대ㆍ지하철 등 노동자 사전집회가 있었다. 여기에 우리 단체가 적극 참여한 것이 뭐가 문제인가.

 

이처럼 두 사람의 주장이 개념 혼란과 현실 검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데도,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느끼지 않는 까닭은 이들의 논쟁 방식 때문이다. 상대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난도질하고는 그것으로 상대 주장을 논파한 듯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둘 모두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주장에 있어서 솔직하지도 않다. 진보당에 대한 무비판적 방어에 몰두하다가 스스로 정치적 중심을 잃었다. 우리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논쟁: 시간이 좀 지났지만 올려 둔다. 아래 글은 <레프트21>에서 벌어진 온라인 논쟁(http://wspaper.org/article/13900)에서 내 글만 퍼 놓은 것이다. <레프트21>116호의 내 기사들인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재판: 자유민주주의의 낮은 기준도 지키지 않는 마녀사냥 중단하라와 국가보안법은 친북사상뿐 아니라 북한과 아무 관계 없는 급진적 사상도 공격하는 무기다에 대한 비판에 대한 내 반론이다.



사상의 자유는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최용찬 동지는 통합진보당 마녀사냥에 맞서 사상의 자유를 방어하는 것이 핵심이라는 내 주장을 비판했다.

 

그러면서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이 “자신들의 ‘종북’사상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해, 한국의 노동자계급이 투쟁해서 일궈낸 성과를 지키기 위해 투쟁”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상의 자유를 위한 투쟁”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을 부당하게 대립시키는 최용찬 동지의 주장은 놀랍다.

 

그러나 최용찬 동지의 주장과 달리 사상의 자유야말로 노동계급에게 민주주의가 중요한 핵심 이유다. 그래야 노동계급이 자기 해방 사상을 자유롭게 토론하고 이에 따라 조직을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투쟁이 진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역사는 바로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확대해 온 역사였다.

 

나는 “국정원이 한국 민주주의에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는 [해외 한국학] 학자들의 성명”을 최용찬 동지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할 뿐이다. 이 성명은 공안탄압을 비판하며 “한국이 …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연설ㆍ사상ㆍ정치 행동의 자유를 완전히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 행위로 옮겨지지도 않은 “내란음모 여부”, ‘RO’의 실체 여부가 그토록 쟁점이 되겠는가. 최용찬 동지는 왜 “내란음모”가 ‘조작’이라는 데 매달릴까.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이 “평화운동 건설”이라는 사상 토론만 했으므로 무죄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아닌가. 반대로 지배자들은 바로 그 사상 토론을 “내란음모”의 증거로 만들려 하기 때문 아닌가.

 

따라서 최용찬 동지 스스로 통합진보당 활동가들의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면서도, 사상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부당하게 대립시키며 논지를 전개하는 핵심 이유는 따로 있는 것이다.

 

진보당 탄압에 맞선 투쟁에서 사상의 자유 문제가 핵심이라고 규정하면 그 사상을 지지하는지 비판하는지도 언급해야 하는데, 그게 싫은 것이다. 그러니 사상이 아니라 ‘운동이 탄압받는 민주주의 문제’라고 규정해, ‘닥치고 방어’하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결국 최용찬 동지는 “‘RO’의 실체나 조작 여부는 진정한 쟁점이 아니”라는 내 주장을 진보당에 대한 종파적 비판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진보당을 무비판적으로 방어해야 진정한 방어라고 말하는 셈이다.

 

그렇지 않다면, 제목이 “마녀사냥 중단하라”이며, 굵은 고딕체로 강조하면서까지 “마녀사냥의 희생양이 되고 있는 구속자들이 즉각 석방되고 무죄 판결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내 글을 “함께 투쟁하겠다는 연대의 목소리가 없다”고 매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매도

그러나 사상 탄압에 맞선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변론은 단순히 저들의 탄압이 “조작”이라는 주장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지배자들이 그어 놓은 선, 즉 ‘현재의 헌정 체제, 즉 자유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사상은 법적 단죄의 대상’이라는 대전제(합헌ㆍ애국 프레임)에 도전해야 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좌파들을 체제에 순응시키려는 지배자들의 프레임에 스스로를 가둘 이유가 무엇인가.

 

그렇게 볼 때, 사실 진보당 활동가들이 어떤 토론을 했건 사상과 토론의 자유이므로 법적 단죄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만큼 명쾌하고 강력한 반박이 어디 있겠는가. 방어에도 더 효과적이다. 진보당 지도부의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함께 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 글은 진보당 활동가들을 방어하면서도 논리 자체는 독립적(비판적)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무조건적 그러나 비판적인 지지ㆍ방어” 정신이다. 노동계급 대중은 자본주의를 변혁하고 해방의 주체가 될 잠재력을 갖고 있지만, 흔히 자본주의 지배질서에 근본으로 도전하지 않는 이런저런 개혁주의 사상들을 가지고 운동에 참여한다. 따라서 노동계급 운동 일부인 동지들과 한편에 서지만(무조건적인 지지ㆍ방어), 노동계급의 이익에 도움이 안 되거나 그 잠재력을 훼손하는 사상이나 전술을 향해서는 독립된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진보당의 해명, 활동, 사상에 무비판적이어야 제대로 방어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그 사상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에게 “연대”를 설득하는 데도 결코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랬다가는 진보당의 초기 말 바꾸기 실수 때문에 낭패를 겪었을 것이다. 또한 조작 여부에 확신이 없는 사람은 확실히 사실이 규명될 때까지 방어를 유보해야 하는가.

 

그러므로 내 글의 핵심 취지는 박근혜의 공세에 어떻게 대응하는 것이 효과적인 좌파의 전술이냐 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최용찬 동지는 박근혜의 최근 공세에서 진보당 탄압이 차지하는 비중을 과장해서 본다. 곤경에 처한 박근혜 정권이 진보당을 해산 위기로 몰자, 그 때문에 노동자들이 위축돼 싸우기 힘들다고 주장한다.(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박근혜 정부도 촛불 지켜보니까 ‘별거 아니네’ 하면서 정면돌파로 나오[면서] ... 약한 고리를 공격한 것"이라는 서강대 이호중 교수의 진단이 더 일리 있는 것 같다.)

 

그러니 “노동자들이 [마녀사냥에]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반격”이라는 내 주장이 “한참 부족하다”는 비판을 하는 것일 테다.

 

그러나 11월의 양대 노총 노동자대회나 최근 전교조 총투표, 학비 노동자 파업, 인천공항 노동자 파업 그리고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 준비 상황, 12월 7일 시국대회에서 드러난 분위기를 보면 그것은 기우인 듯하다. 나는 이런 노동자 투쟁이 돌파구를 열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최용찬 동지가 나를 비판하면서 제시하는 전술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가 파업을 앞둔 철도 노동자들에게, 그들의 투쟁을 지지하면서 말을 걸고, 투쟁이 어떻게 승리할 수 있을지 전술을 제시하고 토론하는 동시에, 박근혜 정권의 진보당 탄압에 맞서서도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자는 것인가? 이것은 이미 <레프트21>이 하고 있는 것이다.

 

그게 아니라 철도 노동자들에게 왜 진보당을 방어해야 하는지를 주장하면서 말을 걸고, 진보당을 방어하지 않으면 ‘종북’으로 몰려 위축되고 분열해 투쟁은 실패할 것이라고 주장하자는 것인가?

 

최용찬 동지의 주장이 후자라면, 현실적이기보다는 도식적이다. 엘리트 활동가들의 ‘정치투쟁’ 도식에 현실을 꿰맞추려는 태도는 노동자들이 투쟁 경험을 통해 계급의식을 발전시킨다는 마르크스주의적 생각과는 거리가 멀다. 이야말로 노동자 투쟁에 대한 종파적 태도 아닐까.

 

끝으로 나는 ‘RO’ 모임의 강조가 ‘평화운동 건설’이었다고 말한 바가 없다. 나는 진보당 차원의 공식적 강조점에 관해 말한 것이다. 반복해서 말하지만, 이런 진술이 이들을 방어하지 않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그들이 무엇을 토론했든 사상의 자유를 보호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올해 대선은 경제 위기가 다가오는 상황에서 치러진다. 지배계급도 노동계급의 생활 수준을 공격하는 긴축(내핍) 정책을 펴려고 발톱을 다듬고 있다. 지배계급 압도다수가 유신 독재 계승을 자임하는 반동적 우익 박근혜 지지로 결집한 배경이다.


민주통합당 문재인이 썩 내키지 않아도 반동적 지배계급이 박근혜 당선에 환호하는 꼴이 보기 싫어서 문재인에게 투표하겠다는 정서가 노동계급 다수에게서 발견되는 까닭이기도 하다.


박근혜가 당선해 이명박, 이건희, 정몽구, 전두환, 방일영 같은 뻔뻔하고 야비한 자들이 환호하면, 5년 동안 신자유주의 우파 정부와 싸워왔던 노동자들은 일시적으로 굴욕감과 낭패감을 느낄 거라고 여기는 듯하다.


또한 “투표로 자본주의를 통제할 수는 없다. 그러나 투표로 항의할 수는 있다.” 그러므로 노동자들의 박근혜 반대 투표 정서는 이명박 5년에 대한 노동계급의 항의 투표로 이해해야 한다.


요컨대, 지배계급과 노동계급 사이의 계급 분단선과 유사한 분리선이 박근혜와 문재인 투표층 사이에서 발견되고 있다. ‘박근혜냐, 아니냐’ 구도가 돼 버린 상태에서 노동자들의 “계급투표” 현상이 뒤틀리고 반쯤은 왜곡돼서, 문재인에 대한 ‘박근혜 반대 투표’로 형성돼 있는 것이다.


이것이 1997년부터 2007년까지 세 번의 대선과 다른 점이다. 이때는 민주노총이 조직적 결의로 독자 후보와 민주노동당이라는 선거 대안을 내놓았고, 많을 때는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차악” 대신 [최선이나 차선으로] 진보 대안을 지지했다.


그런데 누가 당선하든 그 방식과 시기가 다르더라도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공세가 벌어질 것이 분명하다. 프랑스 올랑드 정권은 긴축정책으로 돌아서는데 6개월 걸렸다.


따라서 대선에서 투표도 중요하지만, 차기 정권의 고통전가 공세에 대비하는 투쟁 태세 갖추기가 가장 중요하다. 이 투쟁의 주체가 될 노동자들 다수가 지닌 ‘최악을 막자’ 정서에 공감하며 투쟁 건설을 위한 ‘말걸기’를 하려는 것이 노동자연대의 대선 투표 전술이다.


최악의 막자’ 정서와 투쟁을 위한 자신감 고취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볼 순 없기 때문에 이런 불가피한 타협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견해가 문재인을 무비판적으로 지지하거나 공동정부를 모색하는 입장과 결코 같지 않다는 것은 명백하다. 노동자연대다함께는 그런 입장이 잘못이라고 줄곧 비판해 왔다.


그런데 일부 급진좌파 동지들이 노동자연대다함께의 비판적 문재인 투표 전술을 비판한다이 동지들은 박근혜나 문재인이나 똑같은 부르주아 정치인들이라는 근거에서 곧바로 투표 전술에 관한 결론을 이끌어 낸다. 부르주아 후보 둘 중 누구 하나를 찍는 것은 노동계급의 독자성에 대한 배신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김소연·김순자 후보에게 투표하자는 노건투는 “말로는 혁명적 정치를 떠벌리지만 행동으로는 문재인 지지를 호소하는 ‘다함께’류의 꽁무니주의자들”이라고 비난한다.


그런데 지금 김소연 선본이 내놓은 대선 강령과 과제가 혁명적 사회주의 강령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그것이 문제라고 보지 않는다. 사실, 부르주아 국가를 타도하고 노동자권력을 세우자는 원칙에서 곧바로 선거 전술과 슬로건을 도출한다면, “노동자대통령 후보”라는 슬로건 자체가 모순일 것이다.


결국 선거와 투표에 관한 혁명가들의 개입 정책은 혁명과 권력 문제를 다루는 전략이 아니라 전투를 위한 전술인 것이다


전술은 해당 시기의 구체적 정세, 운동의 당면한 상태와 과제, 노동대중의 조건과 정서를 종합적으로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다. 투표 전술에선 후보의 성격뿐 아니라, 후보를 지지하는 집단의 성격, 투표 결과가 계급투쟁에 미칠 영향도 고려해야 한다.


그런데 좌파 노동자 후보를 지지하는 것만이 옳다고 얘기하는 동지들은 후보의 ‘질’적 성격에만 주목하는 듯하다.


박근혜와 문재인 두 친자본주의 후보 사이에 본질적 차이가 없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맞는 얘기다. 노동자연대다함께는 그 점을 부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민주당은 집권 시절, 각종 신자유주의 개악 정책들을 추진한 당사자다. 문재인 투표를 고려하는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문재인과 민주당에게 여전히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노동자연대다함께도 “이미 민주당 정부 10년의 배신을 경험한 노동자들은 문재인이 차악이라는 것을 뻔히 알기에 내키지 않으면서도 어쩔 수 없이 투표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박근혜에 맞서 문재인이 승리한다고 해서 대중이 환호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투표 전술과 그 비판 사이에서 문재인에 대한 환상과 기대감 같은 것이 쟁점은 아니다. 진짜 차이는 특정 후보들을 지지하는 집단의 성격과 투표 결과의 파장까지 고려하고 있는가 아닌가다.


예를 들면, 대중이 보기에, 민주당 정부가 재벌에게 잘 보이려고 노동자들을 구속하고 해고하는 지배계급 비주류 정권이었다면, 박근혜 쪽으로 집결하는 세력은 노동자들을 고문하고 심지어 탱크와 총으로 학살한 독재정권과 재벌 그 자체다.


즉 ‘최악의 집권을 막고 싶어서 노동자들이 문재인이라는 차악으로 모이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차이 때문에 조직 노동자들 안에서도 문재인이나 진보 후보들에 대한 지지의 ‘양’에서 차이가 나고 있다는 현실이다. 이번 선거에서 진보 좌파 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만 선진노동자로 섣불리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까닭이다.


이미 60만여 명이 소속된 21백 개 노조가 문재인 지지 선언을 했다. 이중에는 한국노총 소속 노조가 더 많긴 하다.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문재인을 찍겠다고 해도 대체로 큰 기대감은 없기 때문에 적극적인 지지 선언 식으로 표현되지는 않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보면, 문재인 투표층에 선진노동자들도 다수가 포함돼 있다는 것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이정희 후보와 진보적 정권 교체’를 지지한다는 선언에도 1만여 명의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참여했다. 김소연 후보 지지 선언 노동자 수보다도 스무 배나 많은데, 진보적 정권교체를 지지했다고 해서 기아자동차, 화물연대, 학교비정규직노조 등의 조합원들을 후진 노동자라고 부를 수도 없을 것이다.


바로 이런 투표 분위기 때문에 김소연 후보 선거운동은 갈수록 박근혜보다 민주당 비판에 무게중심을 더 두게 되고, 이것은 현장 노동자들과 접점을 찾기 더 어렵게 만들 것이다.


지지의 양


이런 지지 양의 차이 문제에 관해 김소연 후보를 지지하는 ‘노동자대통령 학생선거투쟁본부’(학투본)는 “전체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이 균등할 수는 없다. … 사회주의자들은 가장 선진적인 노동자들과 함께 다른 노동자들이 급진화될 수 있는 실천들을 만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데 이미 공감”하는 노동자들이 최악과 차악을 벗어나 ‘노동자대통령 후보 선거투쟁으로 후진 노동자들을 급진화시키자’는 것이다.


학투본의 말처럼 노동계급 안에서도 계급의식은 불균등하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계급 안에서 반동적 사상 뿐아니라 개혁주의와 혁명주의 간에 경쟁이 있고, 이런 사상 투쟁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정치조직()이 필요한 것이다.


이런 정치조직은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의 단결을 추구하고 투쟁을 건설하며 선진노동자 집단의 네트워크 구축을 추진할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자본주의 체제를 뒤엎어야 한다는 데 이미 공감”하는 소수의 노동자들에게서 시작하는 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김소연 선본의 일부가 이런 당 건설을 목표로 이번 대선에서 “선거투쟁”을 하는 것이라면, 그래서 지지의 ‘양’이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만, 그 경우, 노동운동의 전술 과제를 다루는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투표전술을 비판하는 것은 번지수가 맞지 않는 것이다. 이들은 독자후보 완주 정책은 자신들의 강령과 당 건설 프로젝트를 위한 선전이 목표일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단순한 선전이 목표가 아니라면 노동자들의 지지 ‘양’은 일반적으로 선거 전술, 특히 후보 전술에서 중요하다. 어느 정도 의미를 부여할 정도로는 득표를 하는 것이 후보 전술의 성공 여부를 가늠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번 선거는 왜곡된 계급투표 양상으로 전개돼, 책임있는 단체라면 ‘박근혜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답을 내놔야 한다. 이것이 1997년, 2002년처럼 사실 꼭 문재인이다 라는  나는 분열한 채 얻는 수만여 표로는 어떤 답도 되기 힘들다고 본다. 


1997년 민주노총 대중파업으로 정권을 굴복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로 대선에 출마했던 권영길 후보가 얻은 표가 30만여 표다.


그해 초에 민주노총 파업이 보여 준 사회적 힘을 대표하기엔 30만 표는 불비례하게 부족했다. 그 때문에 실망하는 노동자들이 있었고, 민주노동당 창당까지 2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럼에도 이 30만 표는 민주노총의 조직적 결의에 바탕했고 어느 정도는 선진노동자를 다수 포괄하는 숫자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는 시류를 거슬러가며 얻은 득표였는데도]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었다. 권영길 후보는 당시 이를 “미래를 위한 종자돈”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민주노총 차원의 단합된 결의도 없는데다가 과거 30만 표에 턱도 없게 못 미치는 득표가 나온다면, 반자본주의 선전만으로 노동대중을 “급진진화시키기”에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 대중의 급진화에는 선전과 교육으론 부족하고, 성과를 거두는 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거리에서 현대차, 쌍용차 투쟁을 지지하는 모금과 서명을 진행하면 매우 많은 젊은이들의 지지와 성원을 확인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냉정히 말해 이런 지지와 성원이 이번 대선에서는 노동자 후보에 대한 득표로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급진좌파 후보에게 던지는 득표만이 ‘정치적 의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선진노동자들의 사기 진작에도 별로 도움 되지 않을 것이다. 또 그런 적은 표로는 박근혜냐 아니냐 하는 물음에 책임있는 답변이 되지 못한다.


“노동자들이 문재인에게 표를 주는 이유는 다함께가 그토록 강조하는 노동자계급의 당이 유의미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학투본 주장이 부족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노동계급의 당이 유의미한 대안세력으로 등장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에 대한 답을 못 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을 반자본주의 방향으로 급진화하는 데 필요한 것들은 단순히 소수의 지지를 받는 급진 후보를 선거에 내고, 다수 정서와 어긋나는 [때론 종파적으로 들릴 수 있는] 생경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은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선진 조직 노동자들이 왜 문재인에게 씁쓸한 투표를 하려 하는지, 그들이 투표에서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투쟁의 영역에서 단결해 나설 수 있도록 그들과 공감하고 소통하면서 전술의 기예를 발휘하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닐까.


우리 모두 김소연김순자 후보, 심지어 사퇴한 이정희 후보 등이 득표의 양과 관계 없이 선거보다는 투쟁의 영역에서 더 큰 재능과 영향력을 지닌 투사들이라는 것을 잘 안다따라서 이 논쟁은 ‘올바름’보다는 ‘적절함’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후보들의 헌신과 역량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투표소에서 표를 찍는 1분 남짓한 그 시간의 앞뒤로 더 많은 시간 동안 우리는 모두 진정한 힘을 발휘할 투쟁을 건설하는 데 매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누구에게 표를 던졌냐와 관계 없이 단결해야 한다. 비판적 투표 전술은 투쟁에서의 단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물론 박근혜가 당선한다면, 노동자연대다함께의 투표 전술이 크게 소용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소통과 공감을 위한 겸손하고 유연한 자세는 노동자들이 일시적으로 사기 저하를 겪더라도 함께 투쟁을 건설하는 준비를 할 수 있는 신뢰를 제공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실망하고 상심하는 노동자들에게 공감하는 자세가 냉소하고 ‘난 체’하는 태도보다 훨씬 더 올바르고 필요하다. 

.

혁명가들은 원칙과 강령의 올바름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상황에서 제기되는 새로운 문제에 늘 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대중의 조건과 경험에서 배우려는 자세가 늘 중요한 것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 글을 읽기 전에 다음 연결 기사를 읽기 바랍니다 : [다함께] 박근혜 패퇴와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진보정치 연합체가 필요하다 , [차경윤] 진보정치 연합체에 대한 입장에서 군더더기로 보이는 점들



노동자연대다함께가 발표한 “박근혜 패퇴와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진보정치 연합체가 필요하다”는 성명은 통합진보당 사태가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의 정치적 리더십 위기를 낳고 있는 상황에서 매우 시의적절하고 합리적인 제안을 담은 글이었다.


차경윤 동지는 이 성명에 전반적으로 공감한다면서도, 몇 가지 이견을 제시했다.


차 동지는 “참여당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참여당계 평당원까지 배제의 낙인을 찍자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노동자나 피억압 사회집단에 속하며 진보진영으로 견인해야 마땅하다”는 성명의 주장이 “불필요한 사족”이라고 말한다.


우선, 차 동지는 이 주장이 실질적 효과가 없을 거라고 보는 듯하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주체였던 사람들이 대대적 부정선거를 자행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등 소름끼치는 얼굴을 본 참여당계 출신자들의 입장에서” 새로운 진보정치 연합체라고 “매력을 느낄지도 의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효과는 정해져 있지 않다. 차 동지 말대로 진보정치의 도덕성과 자정 능력, 리더십이 바닥을 친 상황에서 그런 외연 확대 효과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효과가 없을 거라고 해서 진보정치 연합체가 “노동자나 피억압 사회 집단”에 속한 평범한 참여당 지지자들을 미리 선을 긋고 배척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진보정치 연합체 제안은, 지금 비록 일차 초점이 노동운동 안에서 무너진 정치적 리더십을 재구축하는 문제에 있지만, 기본으로는 진보정치가 민주당·참여당 류에 실망해서 급진화하는 대중 속으로 외연을 확대해 세력을 키우려는 목적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 외연 확대는 지난해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참여당과의 통합을 위해 노동운동과 진보정치를 분열시킨 것과 같은 계급연합 추진 노선과는 명백히 다른 것이고 달라야 한다.


노동자연대다함께가 제안하는 진보정치 연합체는, 차 동지도 인정할 테지만, 노동계급을 기성 자본가정당들에게서 떼어내 독립적인 진보정치로 단결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보정치의 외연 확대는 이런 목적에서 노동계급을 단결시키고, 더 많은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을 반자본주의적 진보정치로 “견인”하는 과정이 돼야 한다. (내 주장에 담긴 원리는 민주노조가 진보정당 지지를 조직적으로 결정했다고 해서 조합원 자격에 진보정당 지지를 두는 게 비효과적인 것과 같다.)


이 점을 인정한다면, 사실 ‘효과’ 문제는 진정한 쟁점은 아니라고 본다.


효과가 부족해 보이더라도, 그런 개방적 태도가 필요한 일이라고 진심으로 여긴다면, 어떻게 효과가 있도록 할 수 있을지를 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내게 차 동지의 주장은 결과적으로는 참여당계를 전면 배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에 대해 차 동지는 진보정치의 위기 때문에 “[참여당계에서] 기층이 지도부와 이반하기도 어렵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혁명가들이 계급의식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과제라고 인식했다면 우리는 어렵더라도 그것을 실현할 방법을 운동 속에서 배우면서 강구해야지, 그들을 “신 포도” 취급하는 식으로는 진정한 계급 정치 운동도, 조직도 구축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나는 차 동지가 그런 태도를 갖고 있다고 보진 않는다.


그래서 나는 차 동지의 가정에는 특정한 정치 세력의 지도부와 기층의 지지자들을 구분해서 보지 않으려는 태도를 암묵적으로 깔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애초의 노동자연대다함께 성명이 표현했듯이, “노무현 정부 시절에 요직을 차지하고 각종 배신과 개악을 주도했던 유시민, 천호선 등 참여당계 리더들”과 “노동자나 피억압 사회 집단”에 속한 기층의 지지자들은 그 이념에서 동질감이 있더라도 명백하게 계급 구분선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차 동지가 이 ‘기층 지지자’들을 진보로 견인하는 게 필요하다는 것에 동의한다면, 그 과제를 제기한 문구가 ‘사족’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적절한 일이다.


독자 후보


한편, 차경윤 동지는 진보정치 연합체가 대선에 독자 후보를 내는데, 사퇴할 가능성을 열어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미리 그런 후퇴한 상황을 해설하는 것은 … 결과적으로 그럴 수도 있다는 설명이 길어져 … 독자적 정치세력화의 과제를 절실하게 느끼게 하지 않고 느슨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주장을 담은 단락은 ‘미리 사퇴 가능성을 말할 필요는 없지 않냐’는 주장으로도 읽히고, ‘무조건 독자 완주가 옳다’는 것으로 읽힌다. 사실 어떤 것이든 문제가 달라지진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처럼 박근혜의 집권에 대한 반감이 강력하고, 상대적으로 진보정치의 독자적 위상이 약화된 시기에 진보 독자 후보는 그 지지자들에게서조차 처음부터 이 질문에 부딪힐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는 실제로 이미 진보정치의 대선 대응에서 중요한 쟁점으로 떠올라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진보정치 세력의 단결을 위해서나, 박근혜 집권을 어떻게든 막고 싶어하는 사람들과 우호적인 소통을 위해서나, 독자 후보의 진퇴 여부를 미리 결론짓지 않고 열고 가는 것이 불가피하게 필요한 것이다.


이것은 사퇴를 전제로 하는 것과 다르다. 노동자연대다함께는 독자 완주를 기본으로 하면서도 구체적 상황에서 불가피한 전술적 타협의 여지를 남겨 놓자는 것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선거나 투표가 투쟁의 한걸음 한걸음 보다 훨씬 부차적인 위치를 차지하기에 이런 전술적 유연함이 가능한 것이다.


선거에서 독자 완주도 소중한 가치고 득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노동운동과 진보진영이 어떤 상태에서 다음 정권을 맞이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단결에 기초한 투쟁 태세를 갖출 수 있는 가장 구체적 조건을 따지는 것이 진짜 중요한 것이다.


사회주의 단체가 자신들의 전술적 제안을 하면서, 이처럼 뜨거운 쟁점에 명료한 입장을 제시한 것이 “군더더기”라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출처: http://www.left21.com/article/11639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경향신문>에서 노동자연대다함께의 ‘맑시즘’ 행사 강연료 방침을 문제 삼았던 <웹場> 구성원들이 맑시즘 기획팀의 입장에 반박 성명 비슷한 걸 냈다. 


핵심 입장은 이것으로 보인다[각주:1]. (맑시즘 행사 기간에 인턴 기자들이라는 사람들이 쓴 허접한 기사보다는 ‘솔직하다’는 점에서 낫다.)


200개 단체의 후원과 1,500명에 달하는 참가자의 참가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사에게 강사료를 지급하지 않는 것이 노동의 가치를 중요시하는 맑시즘의 취지에 부합하는가.

저희에겐 ‘맑시즘 포럼’이 ... ‘한국 사회 변혁 운동을 전진시키기 위한 토론과 논의를 하는 장’ 혹은 ‘진보적 사회 변화 운동의 일부’인가 아닌가는 중요치 않습니다. 


핵심은 웹장의 구성원들이 맑시즘 토론회를 단순한 수익 사업(즉 이윤 추구 행위)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이 마치 ‘노동의 가치’를 대변하는 듯 말하는데, 사실 이론적으로 따져 보면 좀 유치하다. 


맑시즘 토론회가 수익을 목표로 하는 사업이라면, 주최측이 참가 티켓을 많이 팔아 수익을 남기려고 티켓 판매에 유리한 ‘연사’를 고용한 셈이 된다. 참가자는 티켓 형태로 된 행사 참가 상품을 사는 것이 될 것이다. 티켓 비용은 예상 비용이 아니라 목표 수익을 근거로 책정될 테다.

 

이때 연사는 연사료를 받더라도 착취받는 임금노동자인 것이다. 이 경우엔 강연료를 주지 않으면 착취 정도가 아니라 고용주의 강탈이 되는 셈이다.

 

그러나...  맑시즘은 변혁(or 99%의 저항) 운동을 건설하려고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서 토론하는 행사다. 


그러니 주최측도 연사도 [나같은 연사를 포함해] 수익이 아니라 더 많은 사람과 더 좋은 토론을 하려고 행사를 주최하거나 참가하는 것이다. 토론회 청중들의 참가 목적도 대체로 같기 때문에 이들이 내는 참가비도 소정의 행사 준비와 원활하고 쾌적한 토론 참여를 위해 행사 비용을 분담하고 후원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 시민단체나 진보와 개혁을 표방하는 언론들이 주최하는 다른 강연 행사와 비교해도 현격히 저렴한 참가비를 설명할 수가 없다. 또, 노동자연대다함께가 때론 적자도 감수하며 12년째 토론회를 개최해 온 것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경향신문>이 주최하는 ‘청소년저널리즘캠프’ 같은 행사는 2박 3일 참가비가 숙박비 포함 1인당 49만 5천 원이나 된다. 참여연대가 주관하는 강연 행사는 수익 사업이 목표가 아니겠지만, 강연 1회당 1만 원을 받는다. 반면 맑시즘은 나흘간 강연 17개를 듣는데 4만 원이고, 학교측이 에어콘 등을 끄면, 적자 감수하고 동력기와 에어콘 대여 등을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


많을 때는 1백여 명에 이르는 진행팀들의 자원 활동과 단 한 푼의 추가 비용도 없이 제공되는 진보진영 최고 수준의 탁아방 서비스도 그 진정한 ‘가치’를 알아볼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강연회들과 달리 참가자들에게 공평하고 자유로운 발언 시간을 주는 것도 낯설 것이다.


지금껏 수백 명의 연사들이 연사료 없이도 기꺼이 참가해 즐거운 마음으로 한 사람에게라도 더 운동의 대의를 알리려고 애를 쓰며 수준 높은 연설을 자발적으로 해 준 것도 바로 이런 행사의 취지와 목적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사료는 객관적 관계이자 사용자의 의무인 임금 문제가 아니라 주최측이 주최측과 참가자들을 대표해 감사의 표시를 하는 주관적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연사료가 없다’면서도 매번 강연 후에 감사의 선물을 하는 것이고, 지방의 연사들에게는 차비를 지원하는 것이고, 일부 연사는 그런 차비조차도 사양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용 관계와 전혀 다른 연대와 공감의 관계로 맺어지는 관계들과 행사의 목적에 전혀 공감하거나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 태도 때문에, 웹장의 구성원들은 ‘운동의 일부’인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고, 임금이 지급되는 것만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웹장의 기사와 입장이 불쾌한 까닭은 자신들의 이런 무지를 성찰하기보다 오히려 상대와 독자들에게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태도의 연장선에서 어떤 공개 의무도 없는 주최측에게 수익 내역을 밝히라는 무례한 요구까지 하는 것이다. 


물론 강연료로 먹고 사는 이들에게는 이런 토론회 자체가 눈에 거슬릴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그 분들이 맑시즘 연사들을 문제 삼을 수는 없고 또 그 역도 마찬가지다. 물론, 서로 필요가 일치하면 그 분들도 맑시즘 연사로 올 수 있다. 그건 순전히 주최측과 본인들의 선택 문제다. 


한편, 모여서 함께 토론하는 일, 조직하는 일, 집단적으로 결정하고 실행하는 것을 포함한 조직 그 자체의 중요성을 이해 못 한다면 이런 노력이 우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주욱 살펴 봤듯이 너무 기본적인 판단의 문제 아닌가. 수익을 위한 자본의 노동력 고용(그리고 착취) 관계가 아닌데, 어찌 연사료 지급 여부가 ‘노동의 가치’를 담보하는 기준이 될 수 있겠는가. 


맑시즘 행사에서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노동의 가치’가 있다면, 쌍용차 등 노동 투사들의 연대 호소에 참가자들이 귀를 기울이고 어떻게 연대를 확산할지, 왜 정리해고가 나쁜지 등에 공감하며, 진지하게 토론에 참가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불안정 노동과 청년 실업, 소수자 차별, 제국주의의 전쟁과 핵 위협, 기후 재앙 같은 문제들이 노동 중심의 변혁 전략과 결합돼서 해결 가능한지를 머리맞대는 것이야말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진지한 노력일 것이고, 그러한 결론에 공감하는 참가자들의 네트워크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건설할 것인지에서 명쾌한 공감과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귀하게 만드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노동의 가치를 실현하는 것은 변혁 운동의 토론 행사를 수익 사업의 기준으로 재단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웹장의 성원들이 말하는 ‘노동의 가치’가 교환가치로서 노동력의 가치만을 말한다면, 맑시즘 주최측과 참가자들이 소중히 여기는 ‘노동의 가치’는 단지 그것으로 환원될 수 없다. 


우리가 말하는 ‘노동의 가치’는 노동자를 착취하는 체제에 맞서는 ‘노동운동의 가치’이고, 억압과 착취에 저항하는 인간들 사이의 ‘연대의 가치’다. 


물론 참가자 중 일부에게 티켓 구입이라는 형식 때문에 이 관계가 상품 판매 관계로 보일 수도 있다. 현실이 자본주의이다 보니, 불가피하게 참가자들도 비용을 분담해야 할 수밖에 없고, 게다가 그 형식이 티켓 판매 형식으로 드러나니, 그 형식만 놓고 보면, 주최측과 참가자가 맺는 관계가 이윤을 위한 상품 판매 관계와 구분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행사 전체의 목적, 그리고 [형식과 대비한] 내용을 보면, 주최측과 연사나 참가자들이 맺는 관계는 교환가치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교환가치가 전부는 아니다.’ 


오히려 웹장의 구성원들은 변혁 운동의 대의와 문화에 전혀 익숙하지 않은,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자유주의 관점을 보여줄 뿐이다[각주:2]. 이런 한계는 자유주의가 인간의 모든 관계를 상품 판매로 맺어지는 관계로‘만’ 보기 때문이다.(상품물신주의[각주:3]21세기에 자칭 ‘진화’했다는 자유주의의 수준이 겨우 이 모양이다.


그러므로 자칭 오리지날 진보를 자처하는 일부 개인들이 이런 문제제기에 [때로는 유치하게] 적극 동조하는 것은 이 나라 변혁 운동 일각에서 그 이론과 지향점 수준이 훼손된 상황을 보여 준다고 하겠다.  



이 많은 투사들과 참가자들을 주최측의 수익을 위한 마케팅으로 동원된 사람들로 취급한다면, 너무 서글프지 아니한가. 적지 않은 이들에게 이는 모욕으로 들릴 것이다.



  1. http://baram.khan.co.kr/khan_art_view.html?artid=201208052047502&code=810404 [본문으로]
  2. 나는 이 기자들이 무급 인턴이라고 해서 자기 사장에게 하고 싶은 말을 기사로 올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봤다. [본문으로]
  3. 이렇게 자본주의 하에서 모든 관계가 상품 판매 관계로 보이는 것을 상품물신주의라고 하는데, 이런 현상을 본말이 전도된 것으로 보지 않고 정상적인 것으로 보는 관점을 마르크스주의에서는 물신숭배라고 부른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아래 글은 내가 민주노동당 홈피 당원토론방에 쓴 글(☞ 이정희 대표 유감/보완 글)에 달린 반론 댓글과 그에 대한 내 댓글이다.


우리dlp

1. 당 대표로서 출판기념회를 가지면 안되는지 궁금합니다. 게다가 본인도 "공식 당무는 아니"라고 밝힌바 있는데, 출판기념회를 하려면 허락을 맡아야 하는건지 궁금하네요. 그리고, 이미 출판기념회 관련한 이야기는 한달이상을 떠돌았었고, 그래서 연기도 됬었는데, 이 과정에서 무수한 당원들의 의견을 수렴했을거라 생각하는데 당게에 올라오지 않으면 당내 민주주의를 무시하는건지 또한 궁금하네요. 


2. 최고위 회의록 찾아봤습니다. 김성진 최고께서 "책 출판하시는 겁니까?"라고 묻네요. 제가 보기엔 몰라서 물었다기보단, 확인의 차원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이미 지난 1월, 3월등 민중의소리에서 기획을 할 때마다 향후 책으로 낼 것이다라며 몇차례 공표했던 사실인데.. 많은 일반당원들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데 과연 몰랐을까 싶기도 합니다.


또한, 지난 연석회의에서는 동의하는 세력은 함께한다고 문을 열었었고, 참여당이 함께 하고 싶다고 했었죠. 이에대해 지금 우리-신당 양당간 협상이 중요하니 합의후에 논의하자며 미뤄왔었습니다. 5.31일 합의도 되었고, 이제 참여당을 받을지 말지, 안받으면 이러저러해서 못받는다라고 하는 어찌보면 밀린숙제를 처리하고 가는 것 필요한 일 아닐까요?  어찌되었든 끼워달라고 한 상대에 대해 '가부'를 알려줄 필요도 있는거구요. 이 얘길 정리하자고 한게 잘못한 일인지 싶습니다.


3. 문제 해결과 반성은 다릅니다. 물론 반성없는 미래는 의미없겠지만, 해결하기 위해 반성하자고 하는것은 옳은 표현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해결하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지요. 이정희 대표가 "반성을 요구하는것이 적절치 않다고 했습니다" 해석하고싶은 사람의 의도에 따라 다르게 보이겟지만 저에게는 "반성을 핑계로 함께하고자 하는 과거의 잘못이 있는 사람을 내치지는 말자"라고 들립니다. 

혹시라도, 반성을 요구하지 말자해서, 우리가 "정리해고 도입, 한미FTA, 비정규직 등 노동악법, 공공서비스 민영화, 국민연금 개악, 해외 파병"등을 또다시 결정해야 한다면 그때 한미FTA를 찬성하고, 정리해고를 도입하고, 노동악법을 생산하고... 하겠다는건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이라도 정리해고 실수였다. 한미FTA미안하다, 노동악법 되돌리자 하는 세력이 있으면 누구와도 손잡고 현실에서 바꾸기 위한 힘을 키우는것 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4. 제가 무식해서 그런진 몰라도, 계급정당과 대중정당이 공존할수 없다곤 생각지 않습니다. 다행히 님께서도 "계급정당과 대중정당은 대립되는 게 아닙니다"라고 이야길 하고 계시구요. 저도 유시민 건방지다 생각합니다. 전에는 "민주노동당은 동지는 많으나 친구는 없다"고 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이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활동하는 수많은 기층당원들의 힘을, 그들의 삶을 보지 못한 건방진 언행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참여당과 통합이, 유시민 한사람과 통합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유시민과 통합 안할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갈 수 있는 수많은 참여당 당원을 잃는것은 안타깝습니다. 그들속에는 민주주의와 노동, 평화, 복지, 인권등과 같은 가치에 동의하며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굳이 그런 사람들과 계급이네 대중이네 하며 갈라서 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런 마음이었다면 애초에 "종북정당과 함께 할 수 없다"는 진보신당과의 협상은 불가능 했겠지요. 


5.  현실을 바꾸는 모든 방법에서, 견인해 낼 수 있었다면 , 그걸 실현하지 못한 것 또한 아쉬움이겠지요. 

조금 다른이야기로 "흔히 진보의 정책에는 저작권이 없다"라는 표현을 합니다. 꼭 우리가 실현하지 못해도, 우리가 내걸었던 공약이라 하더라도, 다른 정권이 이를 실현한다면 그것으로 의미 있다는 표현이지요. 지금은 안그렇지만, 한나라당에서 전면 무상급식을 실현하고, 정부책임등록금제를 실시하고, 최저임금을 노동자평균임금50%로 한다면, 왜 우리를 따라하느냐 할게 아니라, 쌍수를 둘고 환영할 일입니다. 


노동자 정치세력화 역시, 국회의원 배출 역시 현 제도권안에 들어가 현실을 바꾸는데 조금이라도 더 힘을 발휘하기 위한, 우리에게 불리하기만 한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한 결정이었습니다. (최근에는 이정희 대표의 본회의 반대토론으로 대표적 반민생법안인 형사소송법 개정안을 부결시킨 적이 있었지요.) 가능하면 이렇게도 막고, 저렇게도 성사시키고 해야 합니다. 이런 아쉬움을 두고 한 말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진짜 진보의 힘은 노동 대중의 각성과 자주적 행동력 만이 아니라, 이 주변으로 보다 많은 중간층을 인입해내는 것이며, 이를 토대로 실제 노동대중과 중간층의 현실을 바꾸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거꾸로 생각하고 있다. 그들처럼 하다간 영토를 확장하긴커녕 자칫 자기 살던 집마저 무너질 수 있다.


우리dlp님의 의견에 답변하겠습니다. 


1. 당 대표로서 출판기념회를 하면 안 되는 거냐고 물으셨습니다. 여기에 중요한 단어가 빠진 것 아시죠? 저는 진보정당 대표가 비진보정당 대표와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를 하는 걸 문제 삼은 겁니다. 


2. 최고위 회의록 말씀하셨는데, 회의록을 정확히 옮기면 “출판하는 것은 사실이예요?”라고 돼있습니다. 김성진 최고위원이 속으론 미리 알고 있었는지 저는 알 길이 없죠. 그러나 님이 적은 “책 출판하시는 겁니까.”와 회의록의 정확한 문구는 미묘한 뉘앙스와 해석의 차이가 생길 수 있습니다. 반론을 위해 인용할 땐 정확히 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3. 문제 해결과 반성은 다르다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반성 자체가 문제 해결이라고 말한 적이 없습니다. 말씀하신대로 문제 해결의 핵심은 힘이죠. 저는 그 필요한 힘을 국참당과 통합 노선이 약화시키고 있다고 말하는 거죠. 무엇보다 노무현 정부의 과거 실책은 지금 민중을 옥죄는 현실입니다. 과거 성찰은 그래서 진보의 현재 과제와 연결돼 있다고 주장한 겁니다. 힘을 발휘하려면 한 방향으로 힘을 집중해야 하는 법입니다.


사실 저는 유시민 등에게 반성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웃기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안이한 사고의 허점을 국참당이 이용한 거죠. 합의문을 승인해서. 정작 자신들의 강령은 하나도 안 바꾸면서요. 진보신당의 합의문 문제 트집잡아 연석회의 깨고 나면 연석회의 합의문은 아무 의미 없는 문서 됩니다. 그러면 유시민과 국참당은 그 합의문 때문에 발목 잡힐 일 없습니다. 


4. 참여당 당원 가운데 진보적인 당원들과 함께하자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진짜 진보정당 지지자, 당원으로 만들고 싶다면 이정희 대표를 비롯해 일부 진보정치 지도자들이 국참당 지도부를 진보로 포장해 주는 걸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굳이 그들이 더 왼쪽으로 옮길 이유를 없애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5. 노무현 정부를 견인해 낼 수 있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정부에 참여해서 견인하겠다고 민주노총이 그 무리수를 둬가며 노사정위원회에 참여했지만, 노사관계로드맵과 비정규직악법이라는 철퇴를 맞았을 뿐입니다. 

그리고 자본가당의 행정부에 각료로 참여하는 것과 이정희 대표가 민주노동당 이름으로 국회의원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얘깁니다. 이건 논점을 왜곡하는 것이죠.
 

삭제 수정 댓글
2011.07.15 14:55:06



5-1. 우리 당은 노동자정치세력화 프로젝트를 핵심으로 해서 만들어진 당입니다. 그래서 이 당의 계급기반은 노동입니다. 중간층, 즉 중간계급 대중을 끌어당기려면 노동의 힘이 강력해 그들이 우리를 신뢰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일의 선후관계가 분명한데, 이를 대립시키고 중간층 흡입을 위해 노동 정체성을 약화시키자는 것은 사실상 노동계급정당이라는 정체성을 포기하자는 것이고 실제로 개혁을 쟁취할 힘을 약화시키는 주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님의 글 마지막 문단이 이런 주장이라고 단정해 비판하기엔 조금 짧고 모호합니다. 그래서 논지를 분명히 하는 걸로 마무리하겠습니다.


++++++++++++++++++++++++++++++++++++++++++++++++++++++++++++++++++++++++++++++++++++++++++++++++


Mr.sunday

 용서라고요? 진보신당은 용서를 받는다는 말 자체로도 우리와 함께하지 않을 것 입니다.

 왜냐면 그들의 기준은 용서를 빌어야 할 주체는 우리지 그들이 아닙니다.

 정신 똑바로 차리십시요. 그 사람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대다수 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들의 존재의의이자, 단결을 꾀하는 구심점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노동자 정치? 민중? 그 어느것도 진보신당 내에서 '종북주의'보다 더 강한 단결을 이끈 사항은 없었습니다.  님이 용서를 하던, 우리가 용서를 하던 그것은 지금 그들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진보대통합이 확실하게 한걸음 나아간다면 저는 국민참여당이 지난날에 대한 확고한 반성과 권력에 대한 욕구를 거세하지 않고 손쉽게 우리를 이용해 진보란 방패를 얻는 것에 반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의 무조건 적인 배제는 민심을 거스르는 큰 패착이 될 것 입니다.

 민심은 통합을 원했고, 그러기에 우리가 진보대통합을 외치는 것이고, 진보대통합이 그나마 힘을 얻어 진보신당이 합의안에 대한 '인정'이라도 한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민심에서'배제'란 것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2011.07.16 00:02:44
김문성

님의 마지막 문장에는 동의합니다. 

민심은 통합을 원했고, 그러기에 우리가 진보대통합을 외치는 것이고, 진보대통합이 그나마 힘을 얻어 진보신당이 합의안에 대한 '인정'이라도 한 것 입니다. 그리고 그 민심에서'배제'란 것은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과 통합을 해야 합니다. 엄밀하게 말해서 누가 누굴 용서할 처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분당 당시 탈당파나 당권파나 우경화와 패권주의라는 잘못을 저지른 건 마찬가지입니다.

구원(舊怨)을 떨치고 현명한 방법을 찾아 진보 대중의 단결 염원에 부응해야 합니다. (제 본의는 용서하자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진보신당에 대한 어떤 감정이든 우리 스스로 결단을 내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는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국민참여당은 실제로는 진보가 아니므로 진보신당 문제와 함께 다뤄질 문제가 아닙니다. 국참당은 우리가 ‘배제’하는 게 아니라 애초에 해선 안 되는 통합인 겁니다. 진보대통합을 바란 민심의 다수가 국민참여당을 진보로 본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일 그런 민심이 생긴다면 그것은 민주노동당 일부 지도부가 국민참여당 지도자들을 진보로 색칠해 주고 있기 때문이고, 상시적(묻지마) 야권연대에 충성을 다해 왔기 때문입니다. 국참당이 진보냐와 상관없이 통합하라는 민심이라면, 그 민심은 민주당과도 통합하라는 민심일 겁니다. 

국참당이 진보라는 진보정치 지도자들은 사기를 치는 것이고, 진보는 아니지만 국참당과 통합하자는 지도자들은 그렇다면 왜 민주당과는 통합할 수 없는지부터 설명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가능할까요?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서방 공습 반대 주장은 옳지만 구체적 대안도 제시해야

리비아 혁명에 대한 <레프트21>의 주장은 극단적 소수파적 주장이다. 하지만 이 주장이 옳은 주장이었음이 시시각각 드러나고 있다. <한겨레>, <경향신문>과 같은 언론들은 폭격이 시작됐을 때 이를 지지했다. 그러다 점점 서방 세력의 실체(민간인 사망, 아랍 세력의 냉대, 반제국주의 여론 확산)가 드러나자 은근슬쩍 군사 개입이 잘못됐다는 식의 기사를 쓰고 있다. <레프트21>만큼 시종일관 서방의 개입을 반대한 곳은 없어서 매우 반가웠다.

다만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면 구체적 대안 제시가 없었다는 거다. 서방의 리비아 공습은 잘못된 것이지만, 궁지에 몰린 리비아 혁명 세력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공습 이외의 대안이 무엇인지 제시했어야 한다. 그래야 그 주장에도 더 힘이 실린다.

나는 다음과 같은 '구체적 대안'들을 생각해 봤다. ‘서방은 군사공습하지 말고 동결한 카다피의 재산을 혁명 세력에 넘겨라’, ‘즉각 카다피와 모든 외교관계를 철회하고, 자국의 리비아 대사를 추방하라’, ‘혁명 세력이 승리할 때까지 리비아산 석유에 대한 거래를 즉각 중단하라’ 등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리비아 공습 잘못된 것 아니냐’ 하고 주장할 때마다 벽에 부딪혔다. ‘넌 카다피를 옹호하는 거냐’는 반응 때문이었다.

카다피도, 제국주의도 모두 거부하는 입장임을 명확히 보이려면 카다피를 혁명가로 착각하는 다른 좌파연하는 세력과 다르게 구체적인 주장을 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선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고 리비아 혁명에 대한 서방의 개입에 반대하는 <레프트21>의 주장에 공감하는 정원석 씨의 독자편지가 매우 반가웠다.

정원석 씨의 말대로 리비아에 대한 서방 개입에 반대하는 주장은 아직 상대적 소수파다. 그것은 그 주장의 근거나 명분이 취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가장 큰 이유는 역겹게도 서방 열강이 리비아 혁명에 도움을 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리비아 혁명을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서방 개입 찬성론자들은 반대자 모두를 카다피 지지자로 쉽게 몰아세울 수 있다. <경향신문> 이대근 논설위원이 3월 31일에 <경향신문>에 쓴 칼럼에서 그렇게 했다.

그는 서방 개입 반대론을 비판하면서, 리비아 민중 항쟁을 사실상 지지하지 않으면서 서방의 리비아 개입에 반대하는 자주계열 활동가들의 논리(민주노동당 논평)를 비판하면서,  싸잡아 비판했다.

그러나 지금 한국에서 집회까지 열면서 서방의 군사 개입 반대 활동을 주도하는 곳은 다함께나 사회진보연대처럼 반카다피 혁명 세력을 지지하는 급진 좌파들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카다피에 반대하고 민중 항쟁이 성공적인 혁명으로 발전하길 바라는 사람들이 제국주의의 중동 개입에도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 중요하다.

정원석 씨의 글을 보면서 <레프트21>이 어느 정도 이 과제를 잘 수행한 듯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정원석 씨는 ‘서방의 군사 개입이냐, 카다피 지지냐’ 하는 왜곡된 이분법을 깨려면 리비아 혁명 과정에 서방 개입이 아닌 [혁명 지원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한다.

그런데 <레프트21>은 다양한 기사들에서 이미 대안들을 제시해 왔다.

가령, 정원석 씨는 카다피의 재산을 동결해 혁명세력에게 넘기라는 주장이 필요하다고 했는데, <레프트21> 53호 1면 기사 ‘리비아 폭격을 중단하라 – 아랍 혁명에 승리를’도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지만 기사에서도 지적했듯이 이런 일을 해야 할 주체는 서방 국가들인데, 그들은 결코 그렇게 할 세력이 아니라는 점도 봐야 한다. 서방의 리비아 개입 목적은 혁명의 성공이 아니라, 석유 통제권과 중동 반란 확산 저지에 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구체적 대안’은 혁명 과정을 더 심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반카다피 혁명 세력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즉각 개선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요구와 이를 위한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을 발전시켜야 한다. 그래야만 반카다피 세력이 더 많은 리비아 민중의 지지를 확보해 카다피와의 투쟁에서 승리하고 새로운 리비아를 건설할 수 있다.

다른 한편, 정원석 씨는 ‘혁명 세력이 승리할 때까지 리비아산 석유에 대한 거래를 즉각 중단하라’는 요구도 필요하다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단서를 달아 지지할 수 있을 것 같다.

혁명 세력이 장악한 유전지대에서 석유 판매 대금은 당분간 혁명 자금과 사회개혁을 위한 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원석 씨의 문제제기에 대한 더 자세한 답변은 이 주제와 관련한 <레프트21>의 최근 기사들을 추천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