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제2차 민중총궐기

정부 탄압에도 많은 노동자들이 시위에 참가하다


<노동자 연대> 162호 | online 입력 2015-12-06


12월 5일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2차 민중총궐기에는 노동자, 농민, 청년 등 5만여 명(주최측 추산)이 참가했다.


이들은 노동 개악 중단, 교과서 국정화 철회, 공안탄압 중단, 백남기 농민 진압 책임자 처벌 및 대통령 사과 등을 요구하며 서울시청 광장에서부터 대학로까지 행진을 했다. 행진은 주말 도심 나들이를 나온 시민들에게도 호응을 받았다.


무엇보다 노동 개악 입법 시도에 맞서 16일 파업을 결정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이날 참가자의 다수였던 점은 시사적이다. 금속노조는 민중총궐기 본대회 전에 결의대회를 열었다. 노동자들은 12월 2일 새누리당과 새정치연합 지도부가 노동개악 관련 법안을 합의처리 하기로 야합한 것에 분노했다.


이밖에도 대학생, 청소년들도 꽤 규모있게 참가해 인상적인 행진을 벌였다.


바로 이틀 전까지 박근혜 정권과 경찰은 강도 높게 엄포를 가했었다. 이날 집회를 원천 불허할 것이고, 참가자 전원에게 색소 물대포를 뿌려 모두 검거하겠다고 협박했다.


복면금지법, 테러방지법 등의 도입 논의도 급물살을 탔다. 심지어 검찰청장 김수남은 복면금지법이 제정도 안 됐는데, 복면 시위대를 가중해서 구형하겠다는 ‘초법적’ 헛소리를 지껄이기까지 했다.(대통령께서 초월적이시니, 뭐...) 정권이 일부 우익 조계사 신도의 협조를 얻어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에게 모욕적인 위협을 가한 일도 있었다.


이 모든 일들이 1차 총궐기와 파리 테러 참사 직후, 박근혜가 집회에 참가하는 사람들을 테러리스트에 비유하며 강경 탄압을 지시한 뒤에 벌어진 일들이었다.


강경 공안탄압 공세를 통해 박근혜 정권은 백남기 농민을 사경에 이르게 한 살인 진압의 책임을 면피하고, 하반기 노동 개악 등 각종 악법의 국회 통과를 앞두고 노동자·민중 운동을 위축시키려 한 것이다.


그러나 정권의 이런 ‘오버’가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사람들은 위기감 속에서도 큰 반감을 느꼈고 어떤 형태로든 굴복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현하고 싶어했다. 특히 노동 개악 입법이 코 앞으로 다가와 노동자들의 분노가 더 컸던 듯하다.


게다가 경찰의 집회금지 통고를 취소해 달라는 신청이 법원에서 받아들여져, 엄포를 놓던 경찰이 체면을 구긴 통쾌한 일이 있었다.


결국 이날 집회와 행진은 박근혜 정권의 협박에 노동운동을 중심으로 한 피억압 대중이 위축되지 않고 반격할 수 있음을 보여 줬다.


이날 민주노총 한상균 위원장은 영상 메시지를 통해서 “2차 민중총궐기 그리고 국민대행진이 더 큰 민중의 항쟁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민주노총은 총파업 투쟁으로 함께하겠다” 하고 약속해 큰 박수와 호응을 받았다.


이제 더는 새정치연합에 기대지 말고, 민주노총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12월 16일부터 시작하기로 결정한 노동개악 저지 파업을 실질화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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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가 취임 반 년 만에 ‘존재의 이유’를 확실히 과시하고 있다. 박근혜는 917일 반박근혜 진영에게 “국민적 저항에 부딪힐 것”이라고도 협박했다.


재벌과 부자들, 국정원과 검·, 조중동 따위들만 “국민”이자 “국정동반자”로 여기는 박근혜의 이 말은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주먹을 휘둘러 답하겠다는 뜻일 것이다.


926일 검찰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을 형법상 내란 음모·선동과 국가보안법상 찬양고무 혐의로 기소했다. 검찰은 심지어 통합진보당의 해산청구까지 밀어붙이려 한다. 이 사건은 무엇보다 국정원이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는 점에서 매우 상징적이기도 하다.


23일에는 고용노동부가 15년간 합법노조였던 전교조를 법외노조로 만들겠다고 압박했다. 저항에 밀려 몇 달 미뤘던 밀양 송전탑도 10월부터 강행하겠다고 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을 다룬 KBS <추적 60>을 징계하려 한다.


심지어 국정원게이트 진실의 10분의 1이나 캤을까말까 한 수사조차 못마땅해 검찰총장 채동욱을 찍어냈다. 전 국정원장 원세훈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한 ‘괘씸죄’ 탓일 게다.


이런 정치적 반동 속에서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도 본격화하고 있다.


정부는 20만 원 기초연금 공약을 철회한 것도 모자라 도리어 국민연금 가입 노동자들이 손해를 보는 개악안을 내놨다. 반값등록금, 고교의무교육, 무상보육이 모두 같은 운명이 될 처지다.


이런 복지 후퇴를 재정 부족 때문이라며 호시탐탐 노동자 증세를 노리면서도 “법인세는 높이지 않는 것이 나의 소신”이라는 것이 박근혜다.


고용노동부는 삼성전자서비스 위장도급을 합법이라고 판정해 노동자들을 우롱했다. 철도 민영화, 노동자 증세, 공공부문 임금 삭감 등 각종 개악 조처들이 줄줄이 발사대에 올라있다.


이런 움직임을 보면, 국정원이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을 터뜨린 828일에 박근혜가 재벌 총수들과 만나 “국정 동반자”라며 손을 잡은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박근혜는 권위주의 체제의 통치 이념이던 “반공”과 “성장”을 국가적 기치로 다시 자리매김하고 싶어한다


이는 반공 국가주의를 앞세워 ‘보수대연합’을 공고히 하면서 경제 위기 고통전가를 본격화하겠다는 뜻이다. 북핵 위협론 등을 활용하며 쇼비니즘적 애국주의도 조장하려 한다.(간만에 국군의 날 퍼레이드가 대규모로 치러지는 것도 시사적이다.) 


차기 대권을 노리는 집권당 실세 김무성이 “역사전쟁”을 선포하고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우파정권이 집권해야 한다”며 우파 결집을 호소하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사실 역사·경제 교과서의 ‘좌편향’을 10년 전부터 문제 삼아온 선구자는 바로 재벌 총수들 모임인 전경련이다교육부에 시정 요청을 줄기차게 한 것으로도 모자라, 2006년에는 ‘경제교과서’를 자체 발행했다. 교학사 책의 베타 버전 격인 2008년 ‘대안교과서’ 제작을 후원한 것도 전경련이었다. 


이들은 자본주의 위기의 시대에 자본주의가 유일한 대안이라고 사람들을 ‘세뇌’하고 싶어한다. 따라서 자신들이 한국 자본주의를 만들고 지배해 온 방식, , 친일과 독재, 부패와 초착취를 정당화하는 방향으로 한국사를 새로 쓰고 싶어하는 것이다.


박근혜는 이런 책을 교과서로 인정해준 것도 모자라 뉴라이트 역사왜곡 대장격인 유영익을 국사편찬위원장에 임명했다. 그는 ‘위안부=해외 취업’이라고 말하는 자다.


요컨대, 경제·안보 위기 속에서 지배계급은 보수화하고 있다. 1987년 이후 노동운동의 성장으로 쟁취한 민주적 권리들을 공격하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시도와 전교조 법외노조화 시도가 대표 사례다.


그러나 이런 반동의 진정한 의도와 함께 그 약점과 모순도 봐야 한다.


노동운동의 조직은 여전히 건재하고, 복지 먹튀와 노동자 증세 사기극은 광범한 불만을 낳고 있다. 검찰과 청와대의 갈등에서 보듯 저들 내부에서도 반동의 속도와 강도를 놓고 갈등이 있다. 측근이라던 진영이 제발로 친박 진영을 이탈한 건 박근혜에겐 불길한 징조다.


반공주의의 부활이 반공국가의 부활은 아니라는 것이고, 지나친 낙관과 비관 모두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치적 차이를 넘어 함께 힘을 모아 민주적 권리를 방어하는 대중투쟁 건설에 나서야 한다. 여기에 복지 후퇴, 노동자 증세, 밀양 공사 강행 등에 밎선 분노들이 한 데 모이도록 정치적 초점을 제공하려 노력해야 한다. 백기투항하듯이 국회로 복귀해 박근혜 돕는 결과만 내고 있는 허약한 민주당에 의존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바로 이 과제들에서 운동이 약점을 보이고 있다. 박근혜의 공격에 제대로 맞서려면 우리 편의 분열과 약점을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이런 과제들은 자본주의 우선순위에 도전할 태세가 돼 있는 좌파들이 가장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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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기 짝이 없는 박근혜가 대통령 비서실장을 김기춘으로 교체했다


박근혜 후원 원로그룹 7인회의 일원인 이 자는 중앙정보부, 검찰총장, 법무부장관을 거치면서 공안수사의 총지휘자 구실을 하던 자다.


유신헌법의 기초 작업 실무를 관장해 박정희의 이쁨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젊은 나이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 직을 맡아 출세가도를 달렸다.(당시 그의 직속 상관인 중정부장도 정치검사 출신인 신직수) 그 시절, 각종 간첩단 조작 사건과 고문 수사가 판을 쳤다. 그가 87년 이후 공안검사들의 원조 격 취급을 받는 이유, 공작정치, 공안통치의 대가로 취급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박정희와 표면상 차별화를 하고 싶었던 전두환 때 요직에는 진출하지 못했으나, 노태우 때 초대 검찰총장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그는 1989년 공안정국을 주도하기도 했다. 당시 공안정국은 일선 경찰에 시위 대비용으로 총기가 지급될 정도였다.


김기춘이 주도한 1992년 ‘초원복집 사건’이란 것도그 본질은 부산 지역의 시장경찰검찰안기부교육감기무사기업주 등이 모여 반동적 정치 공작을 음모한 것이다.


국정원이 선봉에 선 총체적 탄압 공작이 분노의 초점이 된 상황에서 총체적 공안 공작의 전문가를 정권의 컨트럴타워로 영입한 것이다. 유신 시절 대통령 휴양지로 지정한 저도에 가서 질낮은 저도의 추억억을 되새기더니 남들 다 하는 말로 유신의 추억을 되새기고 온 듯하다.


김기춘은 국무총리 정홍원과 법무장관 황교안의 검찰 내 고위 상관 출신이다. 이는 박근혜의 반동적 친정체제를 강화하겠다는 것이다.(애초 정홍원을 총리로 추천한 자도 김기춘이라는 설도 있다.)


특히, 새로 임명한 민정수석 홍경식도 대검 공안부장 출신으로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법무부장관 황교안과 검찰총장 채동욱의 상관 출신이다. 검찰을 확실히 장악해 정권의 위기 탈출 수단으로 더 효과적으로 써먹겠다는 뜻이다


아니나다를까, 7일 검찰은 '사이버 명예훼손 사범 엄정처리지침'을 발표해 ‘악의’만 있으면 사실이라도 명예훼손을 적용하고 사이버 명예훼손도 구속 수사를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상호 기자는 이를 두고 ‘박근혜식 긴급조치 1호가 아니냐’고 반문했다.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는 검찰이 판단하니 말이다. 



<한겨레> 8.1. 장봉군 만평.



박근혜는 임기 초 부패·유신 코드 인사로 위기를 겪었는데, 취임 다섯 달만에 더 노골적인 반동적 친정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나이 80이 다 된 배후세력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강성우익의 본색을 본격화하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가장 큰 압력은 대중의 분노가 행동으로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7월말에만 전국 50곳에서 촛불이 타올랐다. 6월에 3백여 명으로 시작한 촛불이 지금은 매주 수만 명이 결집하는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런 상황에서 김기춘이 등장한 것을 보면서, 1989년 공안정국을 떠올려 보는 것도 도움은 될 듯하다. 


노태우는 당선은 했지만, 1987년 이후 고양된 대중운동, 특히 노동운동 때문에 크게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88년 말에는 쿠데타 베프인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보내야 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군부 내 강경보수파들이 공개 반발하기도 했다. 여전히 경제호황의 여파가 있었지만, 좋은 시절은 정점을 찍고 끝나가고 있었다. 


1989년 3월 현대중공업 점거파업과 서울지하철 파업이 벌어지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을 했다. 이를 빌미로 체제 위협론을 들먹이며 노태우는 공안관계장관대책회의를 주재해 공안정국을 개시했다. 


곧바로 공안정국 아래서 일선 경찰에 총기가 지급됐다. 현대중공업에 경찰 병력을 쏟아부어 폭력 진압을 실행했다. 


이때 공안정국을 주도할 주체로 공안합동수사본부(공안합수부)라는 게 구성됐다. 안전기획부(중앙정보부의 바뀐 이름)와 검찰, 경찰, 보안사 등을 모아 만든 이 기구를 사실상 주도한 것이 당시 검찰총장 김기춘이다


구성을 보면, 공안합수부는 이번 국정원게이트처럼 안기부가 정치와 탄압에 노골적으로 개입한 사례이기도 하다. 그것도 공개·합법적으로 말이다.(지금은 해도 몰래 해야 하는 처지다.)


이 공안합수부의 명목상 본부장이 김기춘의 직속 부하인 대검 공안부장 이건개였다. 이건개는 김기춘과 마찬가지로 박정희의 총애를 받던 극우 공안검사 출신이다.(이건개의 아버지가 박정희의 군 선배로 친하게 지내던 장군 이용문이다. 이건개는 지난해 대선에 출마했다가 박근혜 지지를 선언하고 사퇴했다.) 


김기춘은 공안정국을 시작하면서 평검사들을 모아 놓고 “좌경세력은 무좀과 같아서 약을 바르면 치유된 듯하다가도 다시 나타난다. 체제 수호에 검찰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라.고 강조했다. 준 군사정권의 수호를 위해, 재벌 독재화의 유지를 위해, 민주화 반동을 위해 진보세력을 ‘박멸’하라는 것이다.


공안합수부는 결성되자마자 신문 1면을 연일 장식하며 당시 전민련 간부들(이재오, 김근태 등)과 리영희 교수 등 진보적 지식인들을 체포·구속하는 탄압 선풍을 일으켰다. 


전교조 대량 해직 사태 등 노조 탄압, 민주화 활동가 대량 구속, 노동·학생 운동가들의 의문사가 연이어 벌어졌다. 심지어 보안사령부는 계엄령을 검토하며 민간인을 사찰하며 체포 명단을 작성했다.(‘청명계획’)


이런 총체적 탄압과 공작은 보수대연합을 구성해 정권의 기반을 확대하는 정계개편으로 이어졌다.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이 탄생한 것이다


물론 이런 반동은 전노협 결성과 연대 투쟁, 19915월 투쟁 등으로 우리 운동이 치열하게 맞선 결과, 반동적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합당시 3분의 2에 이르는 의석을 가졌던 민자당은 1992년 총선에서 과반수에 한 석 미달하는 수준의 결과만 얻었다. 


김기춘은 1991년 5월 투쟁 중에 이번에는 (승진해서) 법무장관으로 긴급 투입돼 유서대필 사건 조작 등을 배후에서 지휘하며 투쟁의 찬물 끼얹기에 한몫했다. 법무장관에서 물러나 뒤 1992년 12월에 부산에 가서 공작을 진행하다 사단이 난 것이 그 유명한 초원복국집 사건이다. 


1997년에는 민주노총 총력 파업 후 정치적 식물인간으로 평가받던 김영삼도 한총련을 이적단체로 규정하고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해 대선에서 일당국가 해체를 막을 순 없었다.


이런 역사적 사례로 알 수 있는 것, 첫째, 박근혜는 집권 반 년만에 반동 본색을 드러낼 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 둘째, 반동적 우파 정책을 수행하려면 박근혜는 지금 물러설 수 없다. 셋째, 그래서 신경질적으로 반동적 태도를 더욱 노골화할 수 있다. 넷째, 그러나 운동이 위축된 수세적 태도를 취할 필요는 없다. 


지금 박근혜는 겨냥하는 운동의 속도를 늦추거나 국정조사 따위에 운동의 잠재력을 한정하며 박근혜에게 시간벌기를 허용하는 것이 잘못인 이유다. (사실 이 글이 김기춘을 소재로 했지만, 김기춘만이 주인공인 글은 아니다. 왜 그런 내력의 인물을 전면에 세웠는지 정치적 맥락을 이해하고 경계하자는 것이 핵심이다.) 


저들이 그토록 애를 쓰며 정권을 쥐려한 것은 그냥 청와대에서 근무 한 번 해 보고 싶어서, 예전에 살았던 집에 다시 들어가 보고 싶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정권을 잡고 그 권력을 이용해 하려고 하는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유린이고,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들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대중적 불만과 시위가 박근혜의 반동에 맞서는 총체적 분노로 발전해야 한다는 주장은 억지스런 게 아니다. 이를 위해선 거리와 1퍼센트 지배자들의 눈치를 보며 두길보기 하는 민주당에게서 독립적인 정치가 필요하다. 


거리의 촛불은 쟁점을 확대해 진정으로 힘을 가진 노동운동과 만나야 한다. 그 방향으로 전진해야 박근혜의 신경질적인 반동을 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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