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시즘2010 웹사이트 바로 가기 ☞ ‘맑시즘2010 - 끝나지 않은 위기, 저항의 사상’
맑시즘 포럼이 벌써 10년이 됐습니다. 2001년 겨울, 서울대에서 도전적으로 시작했던 행사가 여름 고려대에서 열리는 안정적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주최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였고, 명칭은 “3일 간의 토론광장”이었습니다. 주요 연사는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홍석천 배우, 손석춘 씨, 홍세화 씨 등 광범한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명사들이 많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 1년을 맞던 때이기도 했고, 홍석천 씨는 동성애자인 걸 언론이 폭로해 곤경에 처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통신과 국민·주택은행 파업 직후였으며,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여름(8월) 행사를 시작한 2003년은 반전운동이 한국에서 태어나던 시기로, 영국의 반전운동가들이 주목받는 연사였습니다. 박노자가 요맘때 인기 좌파 지식인이었습니다. 이 해에는 예년처럼 겨울에 했다가, 여름에 개최를 했는데, 겨울엔 명칭이 “변혁인가 야만인가”였고, 여름부터 “전쟁과 변혁의 시대”로 바뀌어 2006년까지 이 명칭으로 진행됩니다.
2004년 후엔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인기 연사였죠. 또 이때부터 국내 최대의 진보 토론회라는 홍보를 시작한 걸로 기억합니다. 연인원이 아닌 참가자 수가 1천여 명이 넘는 토론회는 유일했으니까요.
지금 막 KB금융지주 회장이 된 어윤대가 고려대 총장 시절에 행사를 물리적으로 막아 외대와 경희대에서 한 적도 있었죠. 경희대도 행사 허가는 공식으로 해주질 않아, 크라운 관에 거대 에어콘을 나르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땐 회기역에서 경희대 행사장까지 셔틀버스를 한 노동자의 도움으로 운영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은 한미FTA 등 신자유주의와 사회공공성이 부각되던 시기였습니다. 정태인, 우석균, 이강택PD 등은 신자유주의를 매우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전문가면서 참여적 지식인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강택 PD의 강연은 바닥에 앉아서 본 기억이 나네요.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의제로 부각돼 비정규직 관련 주제나 연사들이 인기있었습니다. 특히, KTX와 이랜드 등의 투쟁사례와 연설은 많은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영감을 줬습니다.
2007년 이때 지금의 이름(‘맑시즘20OO’)으로 행사 명칭이 바뀝니다. 이 행사가 예상을 깨고 성공하고 롱런하자, 고무적이게도 많은 진보 단체들이 벤치마킹을 하며 대규모 토론 포럼들을 열었습니다. 주최측으로선 구별되는 자기 색깔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긴 했습니다.
2008년에는 사그라들고 있긴 했지만 촛불항쟁 와중이라 촛불 청소년/청년 들의 참가와 발언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촛불항쟁의 리더들인 조계사 수배자 동지들과 이원 생중계로 개막식을 진행했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죠.
포럼 기간 중인 8월 15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계획돼, 맑시즘의 공식 일정으로 집회 참여를 넣기도 했습니다. 차 대절 얘기도 나왔는데 경찰에 '단체로' 낚시 당할 수 있어 개별로 가서 맑시즘 깃발로 모이는 방식으로 참여해 행진했었죠. 이 해 행사의 마지막은 윈디시티와 킹스턴루디스카, 두 우월한 그룹이 장식했습니다.
2008년부터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이듬해인 지난해까지 맑스주의 경제학 강연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행사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진 거죠. 그때 가장 중요한 투쟁이던 쌍용차 지원 집회 참가도 행사 프로그램으로 넣어서 맑시즘 참가자들이 경기도 평택까지 함께 간 기억이 납니다.
그날 정문에서 뛰느라 참 고생한 기억이 나는군요. 밤늦게 서울 왔더니 아직도 고대 앞에서 토론용(?) 뒤풀이를 하는 이들이 있던...ㅋ
그리고 맑시즘에 가장 많이 온 해외 연사인 고(故) 크리스 하먼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깊은 사상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직접 대화를 해 보진 못했지만, 웬지 선생님처럼 기억되는 분입니다.
그 기간 동안 논쟁에도 참여해 보고, 도우미도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엔 주로 사회과학 할인도서 판매장 도우미를 많이 했죠. ‘독서컨설팅’이라는 괴직업을 앞세워서요. ‘맑시즘’의 자랑인 탁아방과 문화행사들도 기억나는 것들이 많네요. 탁아방 꾸미기는 정말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토론하는 행사인 만큼 많은 동지(同志)들과 친구가 되는 게 젤 남는 장사이기도 합니다. 주최측도 그런 면에서 도움을 많이 주죠. 저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된 분들이 있습니다.
더많은 배움의 기억에 관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1
맑시즘 포럼이 벌써 10년이 됐습니다. 2001년 겨울, 서울대에서 도전적으로 시작했던 행사가 여름 고려대에서 열리는 안정적 행사로 바뀌었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주최는 민주노동당 학생위원회였고, 명칭은 “3일 간의 토론광장”이었습니다. 주요 연사는 권영길 당시 민주노동당 대표와 홍석천 배우, 손석춘 씨, 홍세화 씨 등 광범한 진보운동을 대표하는 명사들이 많았습니다.
민주노동당이 창당 1년을 맞던 때이기도 했고, 홍석천 씨는 동성애자인 걸 언론이 폭로해 곤경에 처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한국통신과 국민·주택은행 파업 직후였으며, 대우자동차 정리해고 반대 투쟁이 벌어지던 시기였습니다.
여름(8월) 행사를 시작한 2003년은 반전운동이 한국에서 태어나던 시기로, 영국의 반전운동가들이 주목받는 연사였습니다. 박노자가 요맘때 인기 좌파 지식인이었습니다. 이 해에는 예년처럼 겨울에 했다가, 여름에 개최를 했는데, 겨울엔 명칭이 “변혁인가 야만인가”였고, 여름부터 “전쟁과 변혁의 시대”로 바뀌어 2006년까지 이 명칭으로 진행됩니다.
2004년 후엔 민주노동당 의원단이 인기 연사였죠. 또 이때부터 국내 최대의 진보 토론회라는 홍보를 시작한 걸로 기억합니다. 연인원이 아닌 참가자 수가 1천여 명이 넘는 토론회는 유일했으니까요.
지금 막 KB금융지주 회장이 된 어윤대가 고려대 총장 시절에 행사를 물리적으로 막아 외대와 경희대에서 한 적도 있었죠. 경희대도 행사 허가는 공식으로 해주질 않아, 크라운 관에 거대 에어콘을 나르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나는군요. 이땐 회기역에서 경희대 행사장까지 셔틀버스를 한 노동자의 도움으로 운영해 호평을 받았습니다.
2000년대 중반은 한미FTA 등 신자유주의와 사회공공성이 부각되던 시기였습니다. 정태인, 우석균, 이강택PD 등은 신자유주의를 매우 구체적으로 폭로하는 전문가면서 참여적 지식인들이 인기가 많았습니다. 이강택 PD의 강연은 바닥에 앉아서 본 기억이 나네요.
비정규직 문제가 사회 의제로 부각돼 비정규직 관련 주제나 연사들이 인기있었습니다. 특히, KTX와 이랜드 등의 투쟁사례와 연설은 많은 참가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영감을 줬습니다.
2007년 이때 지금의 이름(‘맑시즘20OO’)으로 행사 명칭이 바뀝니다. 이 행사가 예상을 깨고 성공하고 롱런하자, 고무적이게도 많은 진보 단체들이 벤치마킹을 하며 대규모 토론 포럼들을 열었습니다. 주최측으로선 구별되는 자기 색깔을 분명히 밝힐 필요가 있긴 했습니다.
2008년에는 사그라들고 있긴 했지만 촛불항쟁 와중이라 촛불 청소년/청년 들의 참가와 발언이 많았던 기억이 납니다. 무엇보다 촛불항쟁의 리더들인 조계사 수배자 동지들과 이원 생중계로 개막식을 진행했던 게 가장 인상적이었죠.
포럼 기간 중인 8월 15일 대규모 촛불집회가 계획돼, 맑시즘의 공식 일정으로 집회 참여를 넣기도 했습니다. 차 대절 얘기도 나왔는데 경찰에 '단체로' 낚시 당할 수 있어 개별로 가서 맑시즘 깃발로 모이는 방식으로 참여해 행진했었죠. 이 해 행사의 마지막은 윈디시티와 킹스턴루디스카, 두 우월한 그룹이 장식했습니다.
2008년부터 세계경제 위기가 시작되고 있었으므로 이듬해인 지난해까지 맑스주의 경제학 강연이 인기를 끌었습니다. 행사 이름과 잘 맞아 떨어진 거죠. 그때 가장 중요한 투쟁이던 쌍용차 지원 집회 참가도 행사 프로그램으로 넣어서 맑시즘 참가자들이 경기도 평택까지 함께 간 기억이 납니다.
그날 정문에서 뛰느라 참 고생한 기억이 나는군요. 밤늦게 서울 왔더니 아직도 고대 앞에서 토론용(?) 뒤풀이를 하는 이들이 있던...ㅋ
그리고 맑시즘에 가장 많이 온 해외 연사인 고(故) 크리스 하먼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제가 가장 존경하는 부류의 사람들은 깊은 사상을 쉽고 간결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건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직접 대화를 해 보진 못했지만, 웬지 선생님처럼 기억되는 분입니다.
그 기간 동안 논쟁에도 참여해 보고, 도우미도 열심히 했습니다. 처음엔 주로 사회과학 할인도서 판매장 도우미를 많이 했죠. ‘독서컨설팅’이라는 괴직업을 앞세워서요. ‘맑시즘’의 자랑인 탁아방과 문화행사들도 기억나는 것들이 많네요. 탁아방 꾸미기는 정말 힘듭니다.
많은 사람이 모여서 토론하는 행사인 만큼 많은 동지(同志)들과 친구가 되는 게 젤 남는 장사이기도 합니다. 주최측도 그런 면에서 도움을 많이 주죠. 저도 그런 식으로 알게 된 분들이 있습니다.
더많은 배움의 기억에 관한 얘기는 다음 기회로 미루겠습니다. 1
- 아, 11일 만에 올린 글이군요. 아, 6월은 슬럼프의 계절.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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