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계급의
목을 직접 졸랐다.
노동계급 정당과
노조들이 모두 참여해 2월에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좌익 정치범 사면과 석방
말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7월에
프랑코 등 우익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쿠데타에 직면했다.
그러나 합법 절차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그것은 스페인
지배계급이 지지부진한 경제 발전 문제를 최신의 반동적
방식, 즉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우익 반군을
막아 나선 것은 노동계급 정당들도 포함된 공화국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등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정부와 쿠데타 군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지방 정부와
유지들을 제치고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이는 당연히 도시와 산업,
농토를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뜻했다.
부족한 것은 이
지역적 자주관리를 전국 차원에서 조율하고 반파시즘
전쟁을 통일된 전략으로 수행할 기구였다.
즉,
새로운 국가의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이 일정에 올랐던
것이다.
우익 쿠데타가
내전으로 바뀌고 오히려 민중 혁명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자유주의 정부들의 군사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대외 정책은 더욱 결정적 변수가
됐다. 소련의
군사지원은 코민테른의 개입을 더 권위있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결국 혁명의 실패,
즉 자본주의 수호의 보증수표가
되고 말았다.
히틀러를 두려워
해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국내외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정서를 반영하려는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며 스페인
노동자들의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스탈린주의의
배신에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 해도 당시 스페인 노동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아나키스트 등 비스탈린주의
좌파들의 무능도 문제였다.
선거 참여 등을
거부하며 정치투쟁에서 스스로 주변화해 개혁주의를
오히려 강화시켜 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막상 혁명에
직면하자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으로
뭉친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정치적 무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한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는 게
드러났다.
혁명이 질식하자
파시즘이 독기 묻은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는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운동은 후퇴했다.
1900년~1936년,
스페인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발전으로
말미암은 첨예한 계급 갈등에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 지배계급의 무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지사가 된
구 제국 시절 영광의 포로였던 전통적 지배계급은
스페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산업 조직 방식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륙의
토지 자본가들과 카탈루냐의 산업 자본가 같은 신흥
지배계급이 과거 부르주아혁명의 전례를 따라 민중을
동원해 구 지배세력을 타도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그들은 구 지배세력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신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 두려워 했다.
1873년의
제1공화국이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다시 등장한 왕정이
근본적 도전을 1910년대까지
받지 않앗던 배경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규정한
“불균등결합발전”의 전형적 사례였다.
스페인 사회의
저발전 상태를 해결할 유일한 집단은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사회의 모순에 고통 받았다.
자본주의의 저발전
상태로 말미암은 중앙집중적 산업 발전의 지체,
중앙집권적 국가의 미발전과
지방분권적 경향,
고립분산적 농업에 대한 의존 등은
민중운동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아나키즘의 득세를
낳았다.
산업 노동계급은
인구의 소수였고,
북부의 보수적 농민층과 남부의
무토지 농민(농업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신흥
산업지대인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스페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곧 드러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1917년 총파업을 기점으로 3년
동안 혁명적 정세가 이어졌다.
같은 때 다른 유럽
국가들의 혁명적 반란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련된
혁명 지도부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덕에 농업 수출로 경기가
살아났으나 이 우연적 호황은 전쟁과 함께 끝났다.
미겔의 독재는 그래서 안정적이지
못한 채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또다른 우익 장군
베렝게르가 뒤를 이었으나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단순한
내각 교체에 머물지 않았다.
9년에 걸친 혁명이 1931년에
시작된 것이다.
알퐁소 13세는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계급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1934년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자
가운데 하나가 훗날 독재자인 프랑코였다.
이 봉기는 애초에
전국적 봉기의 일부로 계획됐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노동총동맹은 단순한 하루 총파업으로
물러섰고, 아나키스트들이
지도하는 전국노동연합은 봉기를 포기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감 속에서 우익 세력들이 1934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됐고, 1936년
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했다.
우익과 구 지배계급에
맞서 공화국을 수호하자는 이 인민전선 정부는 공화좌파,
공화연합,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청년당,
공산당,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
노동자총동맹 등이 참여했다.
이전 집권에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모든 좌익 정치범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고무했다. 6월에는
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투쟁의 파고가 높아졌다.
동요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사이에 놓고 정치 양극화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익 군부와 파시스트들,
카톨릭 교회와 왕정복고세력들은
쿠데타 음모를 짰고 마침내 7월
16일
모로코 주둔군의 본토 진격으로 반혁명 내전이 시작됐다.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해 새 정부를 선포하려던 우익 반군의
목표는 지역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좌절됐다.
결국 내전 초기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아 스스로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는 대체로 파시스트들이
패배했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한때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이후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마르크스주의노동자단결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 전략 때문에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정치적으로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하거나 병사들이 장교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한 곳에서 패배했다.
노동운동이 정규군과
지방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믿고 기다린 곳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맞았고 파시스트들의 승리와 점령,
학살이 시작됐다.
그래서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생적 저항을
더 두려워 한 인민전선 정부는 민중들에게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라고 호소하지 않았다. 심지어 반군의 본토 진격 항로인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던 함대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반란군일지로
모를 [즉,
신뢰할 수 없는]
정규군에게 [쿠데타에 대한] 진압을 맡기겠다며, 자발적으로 무장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층의 반발로 내각이 교체됐다.
대다수 자본가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의 지지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자 인민전선
정부는 대변할 사회 세력이 없는 껍데기가 됐다.
좌파는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가지 말고 각 지역 혁명위원회들을 연결망으로
하는 전국적 대안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들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이제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패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최선을 다한 인민전선
정부와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에 있다.
이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혁명의 위력이 가장
강했던 카탈루냐에서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FAI)과
POUM은 지역판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다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한편,
프랑코 진영의 주력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과
모로코인 용병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모로코
독립을 선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모로코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이 공화국이
식민해방을 약속하면 쿠데타 군에게 타격을 주는 봉기로
협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은 프랑스령 모로코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인민전선 정부와
소련의 판단으로 이 해방적 조처는 거부됐다.
서방 민주국가들의
위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이렇게 행동했는데도 ‘반파시즘’을 자처하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자본가들은
결코 스페인의 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렇게 인민전선 정책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최신 무기와 병사
수만 명을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이 내전이 혁명처럼 비치면 자유 진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있던 자발적 지역위원회와 의용군들을 배척한
이유다.
일부 지역에서
지방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보다는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적 소유권은 그대로 인정할
것이라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파시즘 진영을
배신했다.
스페인 정부는
국제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는데,
미국,
영국 등의 정부는 스페인에서
볼세비즘의 악몽을 되풀이하느니 파시즘이 집권을
하는 게 최악을 피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사회당 출신 수상 레옹 블룸이 비밀리에 군사지원을
진행할 때도 인민전선 정부의 다른 자본가정당들은
제지했다. 영국
정부는 불개입을 촉구했다.
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불개입 선언을 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최신
무기로 프랑코 진영을 후원했고 서방 정부들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미국와 영국의
대자본가들은 막대한 돈을 프랑코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계좌는 ‘동결’되지
않았다.
합법 정부가 군사
반란에 직면했는데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공화국을 방어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들이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너무 역겨운 짓이다.
피의 강물을 함께 건넌 스탈린주의
왜 소련의 지원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때 소련은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책을 대외정책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소련 정권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며 스스로 유럽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협력하겠다는 뜻이었다.
민중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볼세비키 국제주의 대신 소련 국가의 강화와
생존이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단기적으로 집약적 산업 발전을 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은 단기적으로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이 과정은 당연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성과를 국내에서 파괴하는 반혁명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 국가자본주의론 참고 링크 ☞ 바로 가기
서방 공산당들은
소련 국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바뀌어 갔다.
그것은 소련의 자금과 위신을 담보로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를 위한 좌파적 신용도를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정교한
관료적 줄타기가 필요했다.
특히, 당시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이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 열강과의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유럽 혁명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스탈린이 인민전선 정부에게 군사 지원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소련 공산당이 서유럽의 혁명도 반대했지만, 파시즘의 득세도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의 군사지원은 모두
스페인 정부가 보유한 막대한 금을 대가로 받고 이뤄졌다.
반면에 수많은 기층 투사들이 온갖
나라에서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 목숨을 걸고
자원했다.
그나마 1차대전
때 쓰던 낡은 무기들이 주종이었고,
사람은 야전부대가 아니라 경찰
요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지원을
핑계로 의용군을 해체하고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군대는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의용군이 파시스트들에게
빼앗아 사용하던 전화국 건물을 공격했다.
혁명의 보루였던
카탈루냐에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반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파시스트 군대를 격퇴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고
배신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전쟁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공산당과
인민전선의 배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저항의
동기를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동기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동력도 제거했다. 여기에는 비밀경찰과 공산당내 숙청, 의용군 해체 등의 조처가 동반됐다.
이제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국내에서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진정한 민중의 해방 운동과 [그리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도]건널 수 없는 피의 강물을 건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