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가 우파적 공세로 전환하는 조짐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경제·안보 위기가 고조되는 가운데, 박근혜는 우파 결집으로 임기 초 정치 위기를 돌파하려는 것이다.


44일에는, 한때 대화 시도를 했던, 쌍용차 해고자 농성 천막을 폭력으로 철거해 버렸다. 경찰은 이 과정에서 38명이나 연행하고, 김정우 쌍용차지부장에게는 구속영장까지 신청했다. 노동자가 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그 다음날 홍준표는 진주의료원 휴업을 발표했다. 


검찰과 경찰은 공개된 ‘우리민족끼리’ 사이트 가입자에 대한 국가보안법 적용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협박했다. 새누리당은 이를 종북 마녀사냥에 써먹고 있다. 새로 임명된 서울중앙지검장 조영곤도 “종북 엄단”을 최우선 과제로 꼽았다. 국가정보원 권한을 강화할 사이버테러방지법도 발의했다.


주요 권력기관 인사에서도 ‘꼴통우파’ 인물들이 약진하고 있다헌법재판소장에 박한철이 임명되면서 법무부장관과 헌재소장이 모두 공안검사 출신으로 채워졌다


최근 박근혜가 추가로 지명한 헌법재판관 조용호도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하는 보수파다. 5일 검찰 인사에선 전교조와 촛불시위 탄압 수사에 앞장섰던 자들이 대거 승진했다.


한편, <레프트21>이 예상한대로 박근혜는 통치력 회복을 위한 사정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국세청은 대기업 세무조사를 지난해보다 대폭 늘릴 계획이다. 이미 한국GM, LG, GS, CJ 등이 세무조사를 받고 있다. 공정거래위원회도 삼성생명과 현대·롯데카드 등 재벌 금융사 조사를 3월말에 시작했다. 행정기관 감사도 곧 시작할 것이다.


물론 열심히 뒤진다고 대기업주들이 처벌 받을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4ㆍ1부동산 대책’도 말은 서민을 위한 주택 대책이었지만, 실상은 처치 곤란의 집부자들을 돕는 조처일 뿐이었다. 국민행복기금의 본질도 채권자가 돈을 잘 받게 하려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조처들로 지배계급 안에서는 [청와대를 향한 비판을 가로막는] 단속의 효과가 어느 정도 있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의 위기를 수습하며 반격의 기회를 노리게 된 데에는, 위기의 요소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을 뿐아니라, 커지는 실망감과 반감이 옮겨 갈 대안 정치 세력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통합당은 박근혜 견제는커녕 대선 평가를 둘러싼 내분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진보정당들도 분열과 혼란이 이어지면서 아직 존재감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틈을 노려 서울 노원병 보궐선거에 출마한 안철수도 정작 새로운 비전을 내놓지 못하면서 예상보다는 고전하고 있다.


(※ 이번 4·24 재보선에는 재벌 특권에 맞서 싸우겠다고 출마한 김지선 후보나 한반도 평화와 박근혜 심판을 주장하는 민병렬 후보 등 진보정당 독자 후보들에게 투표하는 것이 나은 선택일 것이다.


이처럼 야당들이 무기력한 탓에 얼마 동안은 박근혜의 정치 위기가 봉합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박근혜 국정수행 지지도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이 정부의 우파·친재벌 본색에 대한 반감이 조금씩 커지고 있다는 뜻이다.


진주의료원 폐쇄를 놓고 [속내는 별로 다를 것도 없는] 복지부장관 진영, 경기도지사 김문수, 경남도지사 홍준표가 서로 신경전을 벌인 것도 공공의료 후퇴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크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경제·안보 위기 탓에 이런 반감을 달랠 여유가 별로 없다. 게다가 사정 드라이브 과정에서 부패 추문이 폭로될 수도 있다.(최근 대기업 갈구기는 새로운 유착관계를 형성해 정권말에 터질 수 있다.) 


따라서 우파적 일방통행은 오래 못 가 반발과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우파 본색은 박근혜의 강점이자 약점이다.] 박근혜의 위기가 사라지지 않았으므로 단결해 싸워 얻은 작은 승리가 정권을 흔드는 기폭제가 될 수 있다


그렇게 하려면, 변혁적 좌파들은 노동운동이 그 중심에 서도록 노력해야 한다.



□ 한반도 긴장 고조가 박근혜에게 유리하기만 할까?



한국 지배자들은 북한과의 냉전적 대결 구도를 핑계 삼아 국내 억압을 강화해 왔다그 중에는 1996년 판문점 총격 사건처럼 남북 지배자들이 뒷돈을 주고 받으며 짜고 친 사건도 있었다.


그러므로 탄압의 속죄양이 되곤 했던 진보진영 일각에서 최근의 한반도 상황을 남북 지배자들이 내부 단속을 위해 벌이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이런 주장이 맞든 틀리든 진보진영은 국가적 위기를 빙자해 좌파를 속죄양 삼으려는 시도에 함께 반대해야 한다.


그러나 상황을 종합적으로 바라보면지금의 위기가 우파 지배자들에게 유리하기만 하다는 관찰은 일면적이다이런 생각은 자칫 한반도 긴장 고조의 심각성을 무시하거나박근혜 정부의 약점을 보지 못 할 수 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 고조는 동아시아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패권 질서가 중국을 견제하면서 벌어지는 것이다박근혜 정부가 선택한 대외환경이 아니라는 뜻이다오히려 미―중 제국주의 간 갈등은 한국 지배자들에게 곤혹스런 상황이기도 하다.


한국 자본주의는 그동안 중국 의존도가 커져 왔다수출의 4분의 1이 중국 대상이다전통적으로 한미동맹을 추구해 온 한국 지배계급 안에서 동북아 균형자론(미―중 간 양다리 외교론)이 한때 부각됐던 배경이다


이런 모순을 반영해 박근혜도 [인수위 시절 발표한] ‘국정과제’에서  미국과 군사 동맹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중국과 “협력 동반자 관계를 내실화”하겠다는 구상을 제시한 바 있다인수위 시절에는 미국보다 먼저 중국에 친박 실세 김무성을 대표로 하는 특사단을 파견했다.


그러나 지금 박근혜는 위기 고조 속에서 한미동맹으로 기울고 있다. [사실 기울 수밖에 없다. 왜냐면] 한국 주류 지배자들은 미국 제국주의의 보살핌을 받으며 그 하위파트너로 성장해 왔다박근혜는 바로 그들의 대변자다


한편한미일 동맹 강화는 일본의 우경화와 결부돼 있기 때문에대중의 반일 정서를 고려해야 하는 한국 지배자들에게는 이 또한 부담스러운 문제다.


미국과 군사동맹을 강화하는 것은복지를 삭감해 군비를 늘리고제주 해군기지를 강행하는 것을 뜻한다일부 지배자들은 이 틈을 타 핵무장 야심도 드러내고 있다.


결국 박근혜가 이명박과는 다를 것이라며 내세웠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만신창이가 됐다. 한편, 한반도 위기 고조 문제로 양극화로 박근혜의 [시늉 뿐인] ‘대화’ 제스쳐조차도 우파 지지층의 강력 반발을 낳고 있다. 


박근혜의 친제국주의 정책은 위험천만할 뿐만 아니라, 위기와 모순을 더 키우고 있다.




※ 두 글은 http://left21.com/에 각각 축약하고 다듬어져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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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이란 출판사에서 《열한 살의 한잘라》라는 만평(카툰) 모음집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나지 알 알리라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위대한’ 만평가다. 


한 컷짜리 흑백 카툰으로, 시대와 국제 질서를 꿰뚫는 통찰력과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비통한 역사적 기억과 감정, 그리고 불굴의 저항의지를 두루 담아 표현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의 작품 속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꼭두각시가 돼 팔레스타인 저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할 뿐인 [PLO를 포함한] 아랍 지배자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도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나지 알 알리는 1948년 ‘나크바’[각주:1] 때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살던 열한 살 소년이었다. 나지 알 알리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뒷짐진 소년 ‘열한 살의 한잘라[각주:2]’는 바로  작가 자신의 분신인 것이다.


재앙의 시간대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현실, 그리고 그 기억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저들이 우리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면, 저들의 시간도 더 앞으로 갈 수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지에 바탕해 그는 단순한 반서방 아랍 민족주의적 감성에 머물지 않고 아랍 세계 내부의 분열을 직시하며 무엇보다 단호한 아랍 민중의 단결과 저항을 부르짖은 작가였다.


이 이미지는 작품집에 포함된 것으로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6Hl1#ajax_history_3 에서 빌려 왔다. 이 그림은 미국이 아랍 지배자들의 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쪽저쪽 적도 많았다는[각주:3]] 나지 알 알리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후 활동 공간이 된 쿠웨이트에서 추방된 후 안타깝게도 영국 런던에서 1987년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각주:4] 인티파다를 촉구하며 기다려 왔던 그가 제1차 인티파다[각주:5]가 시작된 해에 죽고만 것이다.


‘열한 살의 한잘라’는 영원히 어른이 못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아끼는 많은 팔레스타인 인들이 ‘내가 한잘라’라고 한다니, 승리하는 한잘라, 드디어 인간의 시간을 돌려 나이 들어가는 현실의 한잘라들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사실, 2007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복사집 제본 형태의 아랍어로 된] 나지 알 알리 작품집을 산 적이 있다. 그해 나는 카이로에서 열린 국제반전회의에 한국의 대규모 참가단 중 하나였다. 


그때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지 알 알리에 대해 잘 알았던 건 아니다. 다른 동지의 소개와 추천이 있었고, 이 작가의 만평엔 뒷짐 진 소년이  나온다, 아랍 쪽에서 매우 유명한 만평가다 하는 정도였다. 



작품 몇 컷으로도 느낌이 팍 오는 것도 있고, 아랍에 대한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침략과 개입 문제가 화두였던 국제반전회의 참가자로서 가장 걸맞는 지출이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기꺼이 구입한 기억이 난다. (설사 소장용에 그칠지라도) 그걸 현지 동지들의 부스에서 사면서 연대감을 표시하는 건 덤이고 말이다.


내가 그 책을 보면서 느꼈던 건, 만평에게도 [심지어 언어 장벽을 넘어] 가슴 깊은 곳을 울릴 수 있는 힘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내가 보기에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고,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의 속시원한 대변자이며, 불굴의 선동가다. 


그런데 이번에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비망록의 [만화] 작가 조 사코의 서문을 달고서 나온 것이다. 추가 해설도 있으니, 배경 설명이나 일부 작품 속 짧은 단어 해석이 아쉬웠던 나로선 반가운 출판이다. 지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글로 다루는 책 중 최근 내가 읽은 것은 9월에 나온《나의 아버지는 자유의 전사였다》(램지 바루드, 산수야, 2012)다. 

생생하면서도 현대사를 개괄할 수 있는 이 책도 신간들 중에선 내 개인 추천도서다.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저항에 관해 관심 있는 분이라면 두 책을 함께 봐도 좋을 듯하다. 

《한잘라》의 서문을 쓴 조 사코의 만화들도 모두 좋다. 출간 시기를 더 길게 잡으면 더 많은 좋은 책들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인티파다》(책갈피)를 추천한다.






  1. 재앙이란 뜻의 아랍어라고 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이 영국 등 서방 제국주의 진영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인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기 시작한 역사적 사건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본문으로]
  2. 한잘라는 아랍어로 쓰라림, 고통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을 본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격노하여 "나지 알 알리가 대체 누구야? 이따위 카툰 그리는 걸 당장 멈추지 않으면 손가락을 산성 용액에 담가준다고 전해!"라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이스라엘의 소행인지, 아랍 쪽의 소행인지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 [본문으로]
  5. 1987년 12월 가자지구 난민 캠프에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살해된 것을 계기로 폭발한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제2차 인티파다는 2000년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의 도발과 이스라엘 군대의 소년 살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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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11년 아랍 혁명의 의의
고전적 민중혁명의 귀환, 마르크스주의 혁명 전략의 현실성.

□ 노쇠한 자본주의의 장기불황 시대

 - 경제 위기와 정치 위기의 결합
 - 일국 위기와 국제 위기의 결합


□  지배계급의 본질
 - 제국주의든 자국의 독재자든 지배계급은 매우 잔인하고 교활하다는 점.
 - 국가기구를 분쇄하고 새로운 대안권력 기구를 창출해야 한다는 점.
 - 부르주아민주주의 정치구조라는 완충지대가 없다는 점이 혁명의 속오를 오히려 높여.

□  고전적 민중혁명이 실현가능한 현실적인 사건임을 증명
 
- 민중의 자기조직화 능력: 평범한 사람들(노동자, 여성, 실업자)의 잠재력이 어마어마.
 
- 노동계급의 구실.
 
- 민중의 무장봉기.

□  국제적 위기가 혁명의 국제적 확산으로.
 
-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
 
- 정치혁명과 사회혁명
 
- 제국주의의 반혁명적 개입


2.   아랍 혁명의 성과

  ○ 세계자본주의 질서(제국주의)에 타격을 준 혁명.
  ○
 2008년 이후 세계경제 위기와 고통전가 시도에 저항하는 혁명.
  ○
 부패한 아랍 독재 체제 아래서 누적된 정치적 불만이 독재자들 타도.

이 세 가지를 종합해야, 튀니지 혁명이 아랍 전역의 혁명으로 번진 것을 이해할 수 있다.

2008년 세계경제 위기와 연관성이 세계 지배자들을 또 두렵게 한다. 이것이 이 혁명의 또다른 국제적 성격이고, 국제적 확산의 또다른 도화선이 될 수 있다.

또이 아랍혁명이 유럽의 노동자 투쟁과 상호작용을 하고, 올해 미국 위스콘신 점거, 스페인 점거 운동과 월가 점거 운동 등에 미친 영향을 이해할 수 있다.

즉, 일국 혁명이 범아랍 혁명으로, 아랍혁명이 서구와 교류하는 혁명으로 발전한 계기.



□ 독재자 축출  표면적으로 보면, 평균 1인당 32년 집권의 독재자들이 쫓겨났다.

1월 15일 튀니지 벤 알리(23년) 퇴진

2월 11일 호스니 무바라크(30년) 퇴진

6월 5일 예멘의 살레 사우디로 도망

8월 23일 리비아 트리폴리 함락

10월 20일 카다피(42년) 사망

11월 23일 살레(33년) 권력이양 서명
 

이 독재자들은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을 모두 장악한 지배자들. 비대한 억압기구로 일상적으로 사찰과 억압, 착취. 저항은 잔인한 탄압. 엄청난 부. 한마디로 정리하면 1천 미터 지하 암반수보다 더 뿌리 깊은 증오의 대상.

사우디, 바레인처럼 너무 억압이 심해 반란이 없을 법한 곳들에서도 시위와 파업 발생. 탄압하면서도 양보를 해야 하는 처지. 시리아와 레바논, 팔레스타인도.

시리아: 알아사드는 정권 교체를 요구하는 시위대를 군경을 동원해 무참히 짓밟고 있다. 유엔에 따르면, 희생자 수는 5천명을 넘어섰다. 가족 정권이라 정권 균열이 상대적으로 적음. 리비아와 유사. 시민의 저항은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양상. 노동자 파업으로 전이. 서방과 연계된 야권 세력이 시리아국가위원회(SNC)를, 정부 이탈 반군이 `시리아자유군'을 각각 결성. 시리아위원회는 망명자들 중심으로 서방과 연계를 맺으려 한다.

바레인: 3월 사우디아라비아 군대와 아랍에미리트(UAE) 경찰 동원 시위 진압. 시위 계속.

쿠웨이트: 시위로 최근 내각 총사퇴 의회 해산.
 

한편에서는 양보도 제공했다. 주로  정치적 완충 구조, 즉 불만을 체제 내부에서 흡수할 수 있는 정치 구조를 수립하는 것으로 대응.

이집트: 자유 선거(대선과 총선) 약속, 계엄 해제 약속 

사우디/UAE/카타르 등 걸프 지역의 군주제 국가들: 넉넉한 사회복지 혜택

사우디: 차기 지방선거에서 여성의 참정권 허용

카타르: 2013년 첫 총선 실시

UAE: 연방평의회 간접선거인단 대폭 확대
 


□ 제국주의 질서에 타격   

아랍 혁명은 미국의 세계패권과 그를 위한 중동 패권 질서에 심각한 타격을 입혔다.

그중에서도 이집트가 가장 중요. 아랍혁명의 성패도 상당 부분 이집트 혁명에 달림. 가장 인구가 많고, 가장 산업화, 가장 강력한 군대. 1천 년 가까이 아랍세계의 중심 국가. 그래서 미국의 중동전략에서 핵심 지역 동맹은 이스라엘, 사우디, 이집트.

제국주의는 모든 곳에서 모두를 지배할 수 없다. 가장 전형적인 방식: 현지의 부패한 독재자들과 결탁하는 것. 불가피할 때 민주적 외양.

이집트 친미화는 이스라엘의 안전(이스라엘을 워치독으로 하는 미국의 전략)에도 타격.


1952년 자유장교단 쿠데타: 나세르는 애초 반미주의가 아니었으나 미국의 적대로 전향.

1956년 수에즈운하 국유화: 국가자본주의/아랍민족주의/아랍공화국/토지개혁/복지국가

1967년과 1970년 연달아 이스라엘에 패배

1974년 후계자 사다트가 국가자본주의 해체.

1978년 캠프데이비드 협정

1981년 무바라크는 신자유주의/친미 노선으로 완전히 기울어. 토지개혁도 되돌려.


미국은 이집트를 동맹으로 해 아랍민족주의를 타락시키고 이스라엘의 군사적 안전을 보장하려 해. 이집트는 그 대가로 이스라엘을 제외한 나라 중 가장 많은 원조를 매년 수혜.

냉전 이후 패권전략 재조정. 이라크에 직접 친미 신자유주의 정권 수립 목표, 실패. 
이라크 침략 후 약화된 미국의 위상: 억눌려 온 반제국주의 정서의 표출.
무바라크 정권의 친미·신자유주의 정책에 불만.
친이스라엘 고수 어려움. 이스라엘의 무력 정책이 오히려 반감 키워. 최근 미-이 갈등.

 - 특히 경제 위기로 취약해진 배경에서 아랍 혁명 발발. 줄줄이 친미정권 무너짐.
 
- 미국, 시늉으로라도 혁명을 지지하게 해야 하는 옹색한 처지로.
 
- 이집트혁명은 이스라엘의 약화와 고립, 반미/반이 인티파다 가능성. 가자지구 개방.
 
- 미국과 서방은 혁명이 위기를 겪은 리비아에서 기회를 잡음. 시리아도 개입 기회 노림.

 


3.   이집트 혁명의 현재  

혁명의 미래? 혁명은 활쏘기나 사격, 육상 경기가 아니다. 
기성 질서가 무너진 상황에서 적대 계급 간에 권력과 사회 질서 재구성을 놓고 다투는 장. 그러므로 한 편의 의지만으로 혁명/반혁명이 성공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이 혁명들이 어느 세력과 어떤 질서에 타격을 입혔는가를 봐야 한다. 그래야 그 작용과 반작용이 어떻게 이뤄질까를 전망할 수 있고, 우리의 미래와 과제를 예측하고 도출할 수 있다.

지정학상, 정치적, 전개상 가장 중요한 이집트혁명을 살펴 보며 혁명의 현재 상황을 따져 보자. 


□ 이집트혁명에서 세력간 비교


- 석유 판매 수익 커도 아랍 지역은 
부패한 독재로 빈부 격차 심화.

- 무바라크의 신자유주의 본격화: 민영화로 복지 후퇴, 청년실업률 40퍼센트, 인구 5분의 2가 극빈층.

- 2008년 경제 위기 후: 외환보유고 급감/식량가격 폭등
 

○ 군부

- 군부는 이집트 경제의 30퍼센트 지배.

- 혁명 초기, 혁명의 열기 때문에 이집트 지배계급, 특히 군부는 갈림길에 봉착.

첫째, 지배전략을 놓고 분열,

둘째, 사병이 혁명 열기에 동화. 진압 명령 내리면 군대 붕괴 위험.

- 미국 등과 협의 끝에 무라바크 버리기로 나머지 군부가 결정한 것.

그러나 사람만 제거하고, 체제는 남기는 것이 이들의 목적.

- 정치적 완충 구조 신설로 불만을 흡수하고 특권을 보존하려 함.

의회 선거 제도 개혁해 무슬림형제단 등이 완충세력으로 등장하도록 협상.

대통령 선거는 반격의 시간 벌려고 2012년으로 멀찍이 일정 잡음.

- 6월과 11월, 혁명세력의 강도를 측정하려고 도발 시도. 종단간 이간질.(콥트교도 공격)


○ 무슬림형제단 등 이슬람주의 부상

- 1950년대 시작한 아랍민족주의의 실패가 역사적 배경.(좌파 무능, 인민전선, 탄압)

-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레바논 헤즈볼라 등의 모태.(이 조직들은 모두 아랍지역 무슬림형제단의 해당국 지부였음)

- 정치 활동과 함께 빈곤층 지원 사업 등 하면서 영향력을 키워 옴. 단원만 수십만 명.

- 종교단체인 만큼 다계급 구성. 민중혁명은 무슬림형제단이 공식으로 구상하는 집권이나 사회 개혁 프로그램과 거리가 멈.

- 이집트 무슬림형제단은 혁명 중간에야 공식 지지. 그러나 노동계급 청년 단원들은 적극 초기부터 참여. 내분과 모순, 공식 기구에서는 혁명 지지파 숙청.

- 의회주의 체제 도입을 기대하며 그 정치 체제에서 정치적 완충물 구실: 지도부는자신이 집권하는 수준에서 혁명을 멈추고 군부와 타협하길 바람.

- 7월 이슬람 시위에 살라피주의자들이 선제 제안에 뒤늦게 참여.

- 10월 이후 1,2차 선거에서 연달아 1위 성적. 지도부는 군부와 타협 노선으로 기움.

- 자신들이 만든 정의발전당의 부대표를 기독교인으로 하는 등 군부와 미국(서방)에 79년 이란과 다르다는 걸 보여 주려 애씀.

- 미국과 군부가 계속 무슬림형제단을 파트너로 삼을지는 미지수.

※ 이밖에도 세속적 자유주의 부르주아 정치세력이 있음. 무바라크 타도와 선거 실시 합의 후에는 노동자 등 기층 혁명세력과 등돌림. 최근 좌파 마녀사냥에 가세.


○ 
 혁명세력

- 세속파 민주화운동세력/독립노조들/혁명좌파

- 2000년대 이후 민주화운동, 반전운동, 팔레스타인 연대 운동의 퇴적물, 2006년 이후 마할라 중심 노동자 조직화와 파업 운동 부활.

- 혁명 초기 이미 이집트에서 가장 강력한 사회운동은 노조운동, 리비아 등과의 차이.

- 2월 이후 노동자들의 경제투쟁 활성화: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상호 영향.

- 민중의 자기조직화: 혁명수호민중위원회, 독립노조, 정당

- 민주주의 투쟁 중요: 대중 시위로 국가안보국 습격과 해체

- 2월 이후 임금과 노동조건 둘러싼 파업 물결

- 좌파 정당들 등장, 혁명 좌파와 독립노조운동이 함께 민주노동자당 결성

- 콥트교도와 무슬림, 좌파와 미조직 대중을 이간질하려는 공작에 잘 대처하고 있음

- 급진좌파들은 7월 기반만 새 헌법을 부결시키자는 운동했으나 역부족이었음.

- 혁명좌파는 선거에서는 주목받지 못하고 있으나 거리에서 영향력 커지며 성장

- 무바라크 개인만이 아니라 군부 자체를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 영향력 커지고 있음.

- 11월 18일 시위는 군부의 반혁명 시험대였고, 광장 사수에 성공. 

- 거리 시위와 광장 점거를 주도하는 청년들과 노조운동의 결합이 관건 
 
 
서구식 자유주의 혁명? 쿠데타? 다 헛소리



4.    혁명은 어디로?


- 위기의 강도에 달려 있다: 판도라의 상자, 탄압만으로 억누를 수 없다. 
이집트도 선거 예정 등이 있기 때문. 다른 나라도 이런저런 양보를 함.

- 경제 위기와 생활 수준 향상 요구를 군부와 임시정부들은 해결할 수 있는가.

- 이슬람 개혁주의를 포용할 수 있는가.

- 이스라엘 등 전통적 반제국주의 정서에 부합하는 정책 펼 수 있나? 팔레스타인 독립 문제 해결 여부.

- 신자유주의 정책 전환 여부: 이집트 IMF에 돈 빌려 달라 요구. 군부는 미국에서 시위진압무기 대량 구입.

- 지배계급의 재구성: "청산" 과정, 얼마나 이행되느냐. 


□ 주관적 요건 
=> 혁명은 계속돼야 하고, 계속될 것.

앞서 언급한 요소들에서 아랍, 특히 이집트 지배자들이 혁명 대중의 요구를 들어줄 객관적 능력이 없음.
친미 부패 지배계급 청산 가능하지 않다.


- 노동자 투쟁의 전진에 달려 있다.(이집트와 시리아): 노조운동은 경제투쟁의 활력을 일반화하는 정치총파업 등 추진 필요. 독자정당 통해 무토지 농민을 혁명 지지로 할 수 있어야.

- 독립적 정치: 나쁜 예는 리비아, 시리아도 시험대. 독립적 정치는 군부의 종단간 이간질 시도와 좌파 마녀사냥에 맞설 수 있도록.

- 파업과 노조, 정당: 조직화

- 국제적 연대: 직접 연대, 더 중요한 것은 각국에서 투쟁을 전진시키는 것. 각국 투쟁의 확산은 제국의 개입 능력을 무력화함. 예) 베트남.
 


□ 우리에게 필요한 것

- 혁명적 낙관주의: 외양 속에 감춰진 본질 속에서 혁명의 현실성을 이해. 즉, 오늘날 자본주의 위기가 제기하는 인류에게 제기하는 과제는 체제의 혁명적 재구성이라는 사실.

- 노동계급의 중심성: 노동자들의 고유한 계급적 잠재력을 발휘하는 것의 위력. 그것을 정치적으로 단일세력화하는 것의 중요성.

- 정치투쟁과 경제투쟁의 결합: 정치투쟁이 경제투쟁, 특히 노동자들의 부문 투쟁과 조직화를 고무하는 패턴, 경제투쟁이 정치투쟁의 저수지 구실을 하는 패턴, 둘의 결합으로 대중투쟁의 계급적 성격이 분명해지면서 운동의 계급적 분화와 대중의 계급적 각성과 행동이 고무되는 패턴을 이해하고 이것을 현실 운동에 적용하려 해야 함.

☞ 2008년 촛불 때 노동자들의 경제투쟁이라도 각지에서 번졌다면, 그러면서 촛불투쟁을 지지한다는 선언들이 조직됐다면 어땠을까. 직접적인 정치파업은 아니더라도 촛불항쟁의 성격과 위력을 한껏 고무했을 것.
 


※ 1월 25일을 이집트혁명 1주년으로 국제적 차원에서 기념한다고 합니다. 지난해 12월 하순 공개토론회 두 군데서 이 주제로 발표한 내용의 발표용 메모를 기념으로 올립니다. 세부 진행 과정 묘사보다는 큰 그림에서 혁명 전반의 상황을 이해하고, 혁명의 의의와 성과, 전망을 검토하는 데 초점을 두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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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정부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강행하려고 무지막지한 탄압을 일삼고 있다. 그러나 여론과 계속 드러나는 증거는 이 기지가 평화와 민주적 절차를 위협하는 괴물이라는 것이다. 

세계적 진보 석학인 미국의 노엄 촘스키 교수는 제주 해군기지가 “한국과 중국 간 군사적 대치를 촉발해 군비확장 경쟁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불가피하게 미국의 개입을 불러들이게 될 것 … 초강대국들의 참혹한 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전 세계 사회정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 강정마을을 중요한 전장으로 여겨야” 한다고 호소했다.

최근 제주도의회가 한나라당의 반대를 물리치고 실시한 행정사무조사에서는 ‘정부와 해군이 정당한 법적 절차까지도 위반하며 공사를 강행해 온 사실’이 밝혀졌고, 그들이 주장해 온 ‘민군복합형 관광미항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실제론 해군기지를 건설해 왔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그런데도 정부와 해군은 상식을 뛰어넘는 탄압을 자행하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한다. 

10월 2일에는 구럼비 바위로 기지 건설 반대 기도를 드리러 헤엄쳐 가는 종교인 송강호 씨를 해경구조대원이 붙잡아 수심 10미터가 넘는 곳에서 오리발을 빼앗고 수차례 얼굴을 물속에 처박는 짓을 저질렀다. 

같은 날, 공사 강행에 항의하던 대학생과 노동자 열다섯 명이 연행됐고, 10월 4일에는 해군이 쳐 놓은 펜스를 넘어 구럼비 바위 해안가로 간 천주교 신부들과 기자를 폭력 연행했다. 경찰은 연행한 <미디어충청> 기자에게 취재 목적과 내용을 진술해야 풀어 줄 수 있다고 협박하는가 하면, 취재 내용 삭제까지 강요했다. 현재 구속자는 일곱 명이나 된다. 

이런 폭력과 위협에도 저항을 이어가는 강정마을 주민과 저항 운동가들은 해군기지를 “해적기지”라 부르고 있다. 평화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해적기지’ 건설을 즉각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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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에 승리를! ‘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속보 포함)


△2월 2일 민주화시위대가 무바라크의 깡패로 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출처 Nasser Nouri


이집트는 미국의 중동 지배 전략에서 지렛대 같은 나라입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주도 국가이자 강국)면서 32년 동안 미국-이스라엘과 혈맹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아랍권 역대 최대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서 중동 지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그 중동 지배의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이 승리한다면 그것이 가져올 세계의 변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이집트 민중의 혁명은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도전입니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곧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이므로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그리 손쉽게 무바라크를 無발악 상태로 팽개쳐두지 않을 겁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말하는 ‘질서있는 전환’은 혁명 민중을 향한 ‘질서 있는 반격’을 뜻합니다.

이집트 혁명은 크게 봐서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해 터져 나왔다고 봅니다.

세계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경제 위기의 전이, 중동 지역의 억압적 정치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이 쌓아온 민중의 절망과 분노. 이 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혁명은 엄청난 규모로 사람들을 고취하고 변화시켰기 때문에 이집트 혁명은 단기간의 정권 교체 문제를 넘어선 듯보입니다.

지난주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시작됐듯, 혁명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입니다.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야당, 서방의 눈치를 보며 몸 사리는 무슬림형제단, 강한 탄압으로 아직은 세력이 작은 사회주의 혁명가들. 이런 취약한 주관적 조건에서도 혁명이 전진한 것은 민중의 폭발적인 자생성 덕분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시간을 벌며 질서 있는 반격을 추구할수록 이 혁명도 가장 전투적이고 가장 명확한 부위를 중심으로 혁명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독재가 민중항쟁에 항복했는데도 군부 일당의 정권이 5년, 일당국가체제가 10년 유지됐으며 이른바 민주 야당이 집권해서는 신자유주의로 민중의 삶을 더 어렵게 했던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면 혁명의 진전은 혁명의 성공과 생존을 위해 정말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 정치적 논쟁과 우여곡절을 통과할 것입니다.

민중을 혁명적 방향으로 단결시킬 지도력 구심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위대한 이집트 민중이 지금 해야 할 일인듯합니다. 무엇보다 혁명에 참여한 민중이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조직해 힘을 결집한 수단들을 만드는 게 급선무겠지요. 그래야 무바라크가 고용한 깡패와 경찰의 폭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노동자평의회 만들기, 민중의 생존권 보장 등 생활상의 요구와 정치 요구를 결합하기,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 투쟁으로 동맹하기, 군대 사병들에게 혁명에 가담하고 병사들의 혁명위원회를 만들라고 호소하기, 민중 스스로 무장하기 등의 조처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집트 혁명으로 제국을 거꾸러뜨리고 중동을 혁명의 봉화대로 바꾸길 바랍니다. 이 혁명은 세계경제와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평화적 정권 이양을 거부할수록 혁명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4년 전 걸었던 그 거리들이 지금 혁명의 거리가 돼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이 혁명의 기운은 한국에서 MB라크(명바라크)와 싸우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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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에 관한 제 지난 글(아덴만 축배 뒤의 진실: 소말리아에서 철군해야)에 몇 개의 댓글로 몇몇 분이 반론을 폈습니다. 

길거리에 삥 뜯겨 봤냐, 그런 상황에서도 불쌍한 해적 운운하며 한가한 소리 할 수 있냐는 반론이 가장 많은 듯합니다. 쉽게 말해 한국 선박이 피해를 보는데 정부가 범죄자인 해적을 사살해서라도 한국 선박 구하는 건 필요한 일 아니냐는 것이죠. 

이와 관련해서 결과적으로 성공한 작전을 왜 비하하느냐, 정부가 또 돈으로 해결해야 하느냐 하는 반론성 질문이 있었습니다. 

이 반론에게 제가 할 수 있는 첫째 답변은 ‘아덴만의 여명’ 작전이 성공했다고 문제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겁니다. 정부의 과장 광고 탓에 일부 사람들은 군사적으로도 불가능한 환상에 빠져 있습니다.

청해부대가 지금까지 한국 선박을 직접 호송한 것이 242회입니다. 같은 기간에 국토해양부가 밝힌 해당 수역 통과 한국 선박은 1천62 척입니다[각주:1]. 한 회에 여러 척을 호송한다고 해도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소말리아 해안선이 청해부대 작전 지역보다 넓은 데다가[각주:2], 1척의 구축함이므로 한국과 교대시 공백도 있습니다[각주:3]

게다가 강대국들의 함대가 소말리아 해역에 진을 치자, 해적들의 활동 범위는 오히려 인도양 전역으로 넓어졌습니다. 마치 풍선효과처럼 말이죠. 

그렇다고 한국 해군이 인도양은커녕 소말리아 해역을 완전히 평정할 능력이 되나요? 한국 자체로는 추가 파병이 불가능합니다. 여섯 개 뿐인 4천5백 톤급(이지스함 바로 아래 급) 구축함 중 하나가 그곳에 가 있습니다[각주:4].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청해부대는 한국 선박 보호를 위한 독자 작전이 아니라 대 테러 작전을 주임무로 하는 미군 제5함대의 연합해군사령부의 지휘를 받는 연합 함대의 일원으로 파병됐다는 겁니다.

군사작전이 최선이라는 논리대로라면, 최소한 구축함 한 척을 더 보내야 할텐데, 아무리 소말리아 해역이 중요해도 본토를 지키는 해군 전력의 핵심 구축함 가운데 3분의 1을 먼 곳에 보낼 수 있는 간 큰 나라는 없습니다[각주:5]. 게다가 이명박 정부는 서해에서 북한과 군사적 긴장을 유발한 상태입니다. 

미국, 영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군사 강대국들도 유엔 결의안을 명분으로 함대를 보냈습니다. 그런데도 해적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유엔이 해적을 좇아 내륙으로 쳐들어갈 권리까지 결의안으로 채택했는데도 그렇습니다. 

청해 부대가 직접 해적을 물리친 작전도 이미 14회입니다. 그런데도 해적 문제가 계속 발생하는 것은 왜일까요? 

선박을 호송 중인 청해부대 대조영함.(함은 계속 교체함) ⓒroknavy http://www.flickr.com/photos/roknavyhq/5055901829/


이번에 문제가 된 해적 13명(피살 8명과 체포 5명) 중 10명이 한 동네(푼틀란드 갈카요) 출신이라고 하죠. 부산에서 조사 받는 해적들은 유치장에서 세 끼 꼬박 나오는 밥에 “굿”을 연발하고 있다고 하네요. 소말리아 해적이 기업화했다 해도 그들이 생계 때문에 ‘해적’이 된 사람들이지 광기어린 테러리스트 같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간접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소말리아에서 해적이 생겨나는 구조적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거라는 점은 사실관계만 확인해도 분명해 보입니다. 무리한 작전은 오히려 석해균 선장의 목숨을 뺏을 뻔했습니다.

둘째, 한국 정부의 태도입니다. 어느 분이 매번 한국 정부가 인질값을 내야 하느냐고 물으셨는데, 한국 정부는 단 한 번도 인질값을 지불한 적도 협상에 임한 적도 없습니다. 

인질값 협상은 모두 개인 차원이나 선박을 보유한 기업 차원에서 이뤄졌구요. 이 돈을 지불할 능력이 없는 금미호 선원들은 여태 풀려 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금미호가 영세 어선이라 배 자체로 이미 담보 대출을 받은 상태라 정부에게 몸값을 지불할 돈의 대출을 요구했는데도 정부는 거절했습니다. 이쯤되면 표현상 비약이긴 하지만, 돈 없다고 몸값을 열 배나 낮춰 준 해적이 더 인간적으로 보일 지경입니다. 

결과적으로 정부는 대기업에 속하는 삼호해운의 선박만 구출해 주고 만 것입니다. 그나마도 무리한 작전[각주:6]을 펴느라 석해균 선장은 아직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그의 완쾌를 빕니다)

이쯤되면 결과적으로 성공한 한 번의 작전으로 정부가 할 일을 다했다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자고 할 근거가 부족한 것 아닐까요?

셋째, 소말리아 해적에 대한 이중적 태도입니다. 국제상공회의소의 국제해사국이 낸 통계(2003~2008)를 보면, 소말리아와 아덴만 해역에서 해적 행위가 늘기 시작한 건 2007년부터입니다. 그 전에는 인도네시아와 인근 말라카 해협 등이 훨씬더 많은 해적행위 발생지였습니다[각주:7]

그러나 유엔은 이 지역에 내륙 침입권까지 주는 각국의 해군 파견 결의를 한 바가 없습니다. 인도네시아에서 발생한 2003년과 2004년 해적행위는 빈도 면에서 2008년 아덴만보다 더 많습니다. 아덴만 해적이 늘기 시작한 2007년조차도 해적행위 숫자 자체는 그해 인도네시아와 비슷했습니다.

절대 규모에서 소말리아 해역의 해적 행위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은 2008년인데, 한국 정부(국토해양부) 통계는 이조차도 2008년 1~2분기에는 2007년 1~2분기와 발생 숫자가 같습니다. 의심스럽게도 유엔은 2008년 6월에 이미 소말리아에 해군을 파견하자는 결의안을 통과시킵니다.(가장 폭발적으로 이 지역 해적 사건이 늘어난 것은 강대국 함대들이 온 후인 2009년 상반기입니다.) 

이런 차이는 해당 지역과 해당 지역의 국가에 대한 (유엔을 움직이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인도네시아와 그 주변국들은 서방 강대국들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죠. 

소말리아는 두 가지 점에서 다른데, 하나는 정부가 붕괴한 상태라는 것이고, 또 하나는 미국에 적대적인 이슬람 정부가 등장할 뻔한(2006) 국가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소말리아는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의 공격 대상이 됐죠. 미국이 소말리아를 폭격하고(2007) 미국의 사주를 받은 에티오피아가 소말리아를 침공한(2006) 배경입니다[각주:8]



소말리아 자체는 별 것 없지만 그 지정학적 위치는 아라비아 반도와 마주보는 위치로서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선박들, 중동 석유가 나가는 뱃길에 자리잡은 나라라는 겁니다. 이런 곳에 미국을 앞세운 서방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통제력을 유지·강화하려 합니다. 

유엔에서 내륙 침입권까지 확보하면서 소말리아 해안에 강대국들이 함대를 파견한 이유입니다. 

게다가 강대국들은 아프리카에서 영향력 쟁탈전을 벌이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석유가 계속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죠. 

특히 최강대국 미국은 아프리카에서 더 많은 군사기지를 바라고, 아라비아 반도를 마주 보는 소말리아도 좋은 후보지 가운데 하나입니다[각주:9]. 소말리아를 통해 아라비아 반도 특히 예멘을 경계하고[각주:10] 아프리카 내륙으로는 케냐와 수단 등에 군사적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습니다.

넷째, 여전히 소말리아에서 가난한 사람들 일부에게 해적으로 살도록 하는 사회경제적 배경이 해결돼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1990년대초 소말리아 정부의 붕괴는 미국과 소련이 부추긴 전쟁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사주로 에티오피아를 쳐들어간 소말리아 정부는 패배하고 약화된 군사정부는 분열합니다. 이것이 내전의 시작이죠.'

아버지 부시가 보내고 클린턴이 지휘한 미군은 평화유지군이란 깃발 아래 학살을 자행합니다. 미군은 평화 구호 활동이 아니라 군벌들 간 내전에서 특정 군벌을 편들어 자국에 우호적 정부를 만들려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당시 미군은 아이디드라는 장군을 편들었는데, 어쩌다 아이디드가 고분고분하지 않자 이들과 미군이 싸우게 된 겁니다. 2006년에는 에티오피아 침공이 있었구요.

여기에 정부 붕괴를 틈타 소말리아 영해에서 다른 나라 배들이 어업을 하고, 각종 폐기물을 버리는 일들이 벌어진 것이죠. 연평도 식으로 치면 이들의 어업은 국경(영해선) 침범입니다. 이런데도 함대를 보내는 게 자국 선박을 보호하려는 것이라면, 저는 과연 누가 소말리아 해역에서 해적질을 하는 것이냐 되묻고 싶습니다. 

한국 정부는 2000년대부터 ‘대양 해군’을 부르짖어 왔습니다. 한미FTA를 ‘선진통상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선전해 왔습니다.(이명박 정부는 ‘성숙한 세계국가’) 이런 목표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소말리아 파병과 군사력 과시가 제게는 한묶음으로 보입니다. 이 묶음은 전임 노무현 정부나 이명박 정부 모두 공유한 목표이고 믿음이었습니다. 

청해부대 소속 UDT가 삼호주얼리 호에서 작전을 실행하는 실제 모습. 출처: 자주국방네트워크(KDN) http://koreadefence.net/detail.php?number=1495&thread=22r01



자국 배는 4분의 1도 ‘커버’ 못 하면서 그 배나 되는 외국 선박을 호위한 것은 청해부대의 진정한 임무가 아덴만과 소말리아 해역, 그리고 인도양에서 미국 중심의 군사 질서에서 한몫 하는 걸로 그런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요.

한마디로 한국 지배자들은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에서 자신들의 국제적 지위를 향상시키는 전략의 하나로 소말리아에 가 있는 겁니다. 한국 지배자들은 ‘소제국주의’로 나아가는 듯 보입니다. 

따라서 저는 튀니지와 이집트인들이 보여 줬듯, 소말리아인들에게도 스스로 정부를 구성할 권한을 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이 침략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는 아직도 민주주의가 먼 얘기지만, 미국의 뜻을 거슬러 민중이 봉기한 튀니지와 이집트는 민주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저도 한국인 인질이 더 없었으면 좋겠고, 지금 잡힌 인질도 풀려났으면 합니다. 한국인 선원들의 생명이 소중한 만큼 같은 이유로 소말리아 민중의 안전과 생계도 중요합니다. 진정으로 국민을 위하는 정부라면 인질값을 주고라도 선원들을 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해적행위가 없어지도록 근본 대책을 수립해야 합니다. 

탐욕스런 개입을 중단하고 소말리아의 모든 해역에서 제국주의 군함들은 철수해야 합니다. 차라리 조건 없는 인도적 지원을 하는 게 낫습니다. 차라리 정부가 금미호 선원들의 몸값을 지원하지 않는 걸 비판하십시오. 

국민의 세금을 먹는 정부가 국민의 안전에 책임지는 게 당연하다? 간접적으로 보면, 한국민의 위험은 바로 그 세금으로 미국의 침략 전쟁을 도우러 중동에 파병한 대가이기도 합니다. 그 파병으로 도운 것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고, 그것이 지금 소말리아를 망친 주범이니까요. 
  1. 이 시기에 대해 조선일보의 1월 25일자(인터넷에는 24일 밤) 사설은 “2009년 3월~2010년 10월 한국 국적 또는 한국인이 탄 선박 925척이 소말리아 해역을 통과했지만 청해부대 호위를 받은 경우는 13%인 120척뿐이었다. 게다가 소말리아 해적은 활동 범위를 인도양 전역으로 확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본문으로]
  2. 청해부대의 호송 작전 거리는 아덴만 일부인 1천2백 킬로미터라고 합니다. 소말리아 해안선은 총 3천 킬로미터가 넘습니다. [본문으로]
  3. 해군은 6개월 주기로 교대하는 구축함 왕복에 총 8주가 소요된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4. 그보다 작은 배는 장거리까지 나가 작전할 능력이 안 되고, 이보다 큰 이지스함은 단 두 척이라 나라 밖으로 보낼 수 없다고 한다. [본문으로]
  5. 지금도 돌아온 구축함의 정비 기간을 포함하면 몇 달은 두 척을 뺀 네 척만 운용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정부는 지금 인도 해군과 MOU를 체결하고 인도 구축함의 도움을 받기로 했죠. 그런데 이는 한국 해군도 인도 선박을 함께 호송해 주는 것이니 절대적인 대책은 될 수 없습니다. [본문으로]
  6. 한국 주말 언론 보도에 시점을 맞추려던 것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도 들긴 합니다. [본문으로]
  7. 이 지역에선 아시아지역해적퇴치협정이란 걸 맺었는데, 이 협정은 주변국들끼리의 협정이다. [본문으로]
  8. 한마디로 정부를 붕괴시킨 것은 미국이라는 것이고, 미국이 주도하는 유엔이 내륙 진입권리까지 각국 해군 함대에게 준 것은 확인 사살과 같은 짓입니다. [본문으로]
  9. 현재는 소말리아 인접국인 지부티에 미군 기지를 두고 있습니다. 지부티는 아덴만 안에 있는 소국입니다. [본문으로]
  10. 미국은 예멘도 알카에다 근거지라며 군사적 통제를 하려 합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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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덴만 여명’ 작전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소말리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중단하라


소말리아에서 청해부대가 군사작전을 통해 피랍된 한국인 선원을 구출한 다음부터 대부분의 언론은 온통 정부와 군을 찬양하는 내용으로 뒤덮여 있다.

이명박은 “완벽한 작전 수행”을 치하하며, 자신이 직접 이 작전을 명령했다고 자자화자찬하는 데 열심이다. 레임덕 수렁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가 왔다고 좋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역겹기 짝이 없다.

작전 책임자인 합참 군사지원본부장 이성호는 “해적들이 추가 도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이번에 한국이 봉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각인시켰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소말리아 해적들은 이제부터는 “절대 한국 선박들로부터 몸값을 받지 않고 배를 불태우고 선원들을 죽일 것”이라며 강력한 보복을 천명하고 나섰다. 이번 군사작전이 앞으로 한국 선박과 선원들을 더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게 된 것이다.[각주:1]

따라서 이명박이 대국민 담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라고 한 말은 사실이 아니다.

△청해부대 창설 당시 훈련 모습. ⓒ사진 출처 해군


이미 석 달도 더 전에 납치된 영세 어선(금미305호) 선원 두 명에게는 정부가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을 봐도 알 수 있다.

해적들조차 이 배 선원들의 몸값을 10분의 1로 낮춰 줄 정도인데, 정부는 몸값 지불을 위한 대출 지원마저 거부했다.

사실, 이번 ‘아덴만의 여명’ 작전도 인질로 잡혀있는 선원들의 생명과 안전을 도외시한 무모한 작전이었다. EU 해군조차 “인질의 안전을 무시한 작전”이라며 “이같은 유형의 작전을 따라 하지는(follow suit)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조선일보>조차 “구출작전이 시작되자 해적들은 선원들이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하나하나 들춰내 선장을 찾아낸 뒤 조준 사격을 했다”는 선원들의 증언을 인용해 “만일 해적이 전체 선원들을 향해 난사(亂射)를 했다면 훨씬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할 수 있었다”고 지적할 정도다.

결국 1차 작전 실패에 엠바고(보도 자제 요청)를 걸면서까지 실행한 무모한 작전 탓에 석해균 선장이 심각한 총상을 입은 것이다.

이명박 정부가 레임덕 탈출을 위해 인질들을 볼모로 삼았다고 비판받아야 할 이유다.

소말리아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중요한 것은 사람의 생명과 안전이 아니라 한국 기업주 계급 전체의 이익과 한국 국가의 국제적 위상이다.[각주:2]

한국 지배자들은 2000년대 들어 해외 파병을 대폭 늘리면서 “중견 국가”로서 “국격”을 높이는 행위라고 광고해 왔다.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에 더 적극 참여해 그 안에서 국제 서열을 더 높이겠다는 것이다.

소말리아의 아덴만 지역은 사우디아라비아가 접한 홍해의 출구에 해당한다. 세계 석유의 4분의 1이 통과하는 곳이다. 한국의 수출입 물량 29퍼센트도 이 지역을 지난다.

그래서 한국을 포함해 23개나 되는 나라에서 소말리아 앞바다에 해군을 보냈다.

이 지역에서 역시 핵심 구실을 하는 강대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이 지역을 석유 패권과 연관된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자 한다.

미국은 영국, 독일, 한국 등 전통적인 친미 우방국들과 연합해군함대를 구성해 활동하고 있다.

한국 청해부대는 이 연합함대의 지휘 아래 움직여 왔다. 청해부대는 1진이 파병된 2009년 3월부터 현재까지 한국 선박은 242회를 호송하고, 외국 선박은 508회 호송했다.

청해부대의 활동을 보면, 한국군이 이 지역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을 지원하며 떡고물을 챙기고, 이를 통해 “국격”을 높이려고 파병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국주의 침략을 통해 큰 고통을 겪어온 소말리아 민중들에게 이런 한국군이 어떻게 보일 지는 분명하다. 그런데 이제 이명박 정부는 ‘해적 소탕’을 명분으로 군사적 개입과 대응을 더 강화하려 한다. 이것은 한국 선박과 선원들을 더 위험스럽게 만들고 더 큰 비극을 낳을 수 있다.


미국: 소말리아를 망친 장본인

 

미국의 소말리아 개입 역사는 오래 됐다. 그리고 매우 추악하다.

냉전 시대에는, 소말리아의 인접국인 에티오피아가 소련의 후원을 받는다고 소말리아 군사정부를 부추겨 전쟁을 일으켰다.

그뒤 소말리아 정부가 전쟁에서 지고 혼란 끝에 1991년 붕괴하고 빈곤과 기아가 만연하자, 미국은 ‘희망 회복’이라는 이름 아래 1992년말 직접 파병했다. 각종 구호 물자를 안전하고 적절하게 배분하도록 경호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이 냉전 이후 ‘인도주의적 개입’을 제국주의 침략의 명분으로 내세운 첫째 사례였다.

그러나 유엔의 평화유지군 패찰을 단 미군은 곧 소말리아 민간인들과 충돌했고, 1천여 명을 학살했다. 수도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시가전에서 미군 19명이 살해됐고, 주민들은 미군 시체를 차에 끌고 다니며 시위를 했다.

처참한 실패를 하고 미군을 철수했다. 계속된 내전을 끝낸 것은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받은 이슬람법정연맹(UIC)*이었다.

2006년 UIC가 수도 모가디슈를 접수하고 지지 속에 치안을 회복하자, 당시 이라크에서 고전하던 미국은 “테러와의 전쟁”을 소말리아로 확대했다. UIC가 ‘테러단체’라는 게 명분이었다.

대규모 폭격이 이뤄졌고, 미군의 돈과 무기로 무장한 에티오피아 군대가 마침내 소말리아로 쳐들어 갔다. 압도적 화력의 열세를 이기지 못하고 모가디슈는 에티오피아 군대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게릴라 저항이 시작되면서 에티오피아 군대가 세운 임시 정부는 전혀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게 지금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난민 규모는 최소한 3백만 명이 넘고, 사망자는 수십만 명에 이른다.


* 이슬람법정연맹(UIC)

1991년 내전 발생 후 나타난 이슬람주의 단체. 원래 중앙정부가 없는 상황에서 이슬람 율법에 따라 질서를 유지할 지역 법정을 세우는 것을 목표로 했지만, 교육과 복지를 제공하고 무장력을 갖춘 사실상의 국가 기구로 발전했다.



해적은 왜 등장했을까

 

1991년대 정부 붕괴 뒤, 소말리아가 사실상 무정부 상태가 되자, 서방 국가와 기업들은 각종 독성 폐기물을 소말리아 해변에 내다 버렸다. 자기 나라에서 버리면 1톤에 1천 달러가 드는 각종 화학 폐기물이 여기서는 3달러 밖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핵폐기물도 버려졌다.

그 뿐인가. 온갖 나라 어선들이 소말리아 국경을 침범해 새우와 참치 등을 어획해 갔다. 소말리아 어부들의 그물까지 가져갈 정도였다. 엄청난 쓰레기와 불법 어획으로 어민들은 생계 수단을 잃었다.

때문에 처음 등장한 건 어민들이 이 불법 선박들을 잡아내 ‘조업세’(일종의 벌금)을 받는 생계형 ‘해적’이었다.

사실 이들을 해적으로 부를 수도 없다. 이들은 진정한 피해자였기 때문이다. 2005년 인도양에서 발생한 쓰나미로 폐기물들이 해변을 뒤덮은 뒤, 어획량 감소는 물론이고 각종 질병들이 창궐해 사망자만 수백 명이 생겨났다.

이런 생계형 해적조차 UIC가 집권해 사회 통합이 일부 이뤄지고 치안이 회복된 뒤 거의 사라졌다.

그러나 미국이 사주한 에티오피아의 침공으로 다시 무정부 상태가 되자 해적들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지금은 사회 발전에 대한 희망도, 전통적 생계수단도 잃어버린 많은 젊은이들이 해적의 본거지인 폰틀랜드로 몰려 든다고 한다.[각주:3]

진보신당 논평 유감


진보신당 심재옥 대변인은 ‘아덴만 작전’에 관한 논평에서 “조속한 구출”이 “다행”이라고 평가하면서 우려스럽게도 “해군 선박의 추가 배치 등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따른 군사 개입이 소말리아의 경제와 사회를 파탄낸 것이 해적을 만들어 내는 현실에서 “해군 선박의 추가 배치”는 결코 해답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소말리아 아덴만으로 청해 부대[1진]가 출발하자 예멘에서 한국인 4명이 목숨을 잃고 3명이 다치는 참사가 발생”했던 2009년 사건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최근 각 나라들이 ‘해적’을 핑계로 소말리아 해역에 경쟁적으로 함대를 파견하며 군사력을 과시하자, 해적들의 활동 범위가 오히려 인도양 전역으로 넓어지고 있다.
소말리아에 대한 제국주의적 개입에 일관되고 철저하게 반대하는 것이 진보정당 지도부가 취해야 할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강대국들은 소말리아에서 손을 떼라


뻔뻔하게도 미국과 서방 국가들은 자신들이 지지한 전쟁과 그로 말미암은 혼란과 빈곤 때문에 탄생한 해적들을 소탕한다며 함대를 보냈다.

이 함대들의 주요 관심사는 군사력을 대외에 과시하고, 석유 자원의 이동 통로를 안전하게 확보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국 어선들의 불법 어획을 보호하는 것이다.

한국 지배자들은 이 과정에 적극 참여해 강대국 중심의 국제 질서에서 서열 상승이라는 열매를 맛보려 한다. 한국의 소말리아 파병은 1993년 미군의 학살을 도운 평화유지군(PKO)으로 거슬러 간다.

한마디로 ‘해적’은 이 지역에 전략적 이해관계를 갖는 강대국들이 군대 파견을 합리화하려는 핑계에 불과하다. 지금까지 ‘해적’들은 강대국들의 정규군 함대를 공격해 전과를 올린 적이 한 번도 없고, 붙잡은 인질을 먼저 살해한 적도 없다.

우리가 ‘해적’의 인질 납치를 지지할 순 없지만, 소말리아와 해적에 관한 진실을 알게 된다면 이명박 정부의 대응 방식이 전혀 문제의 해결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UIC의 집권 경험은 오랜 내전 속에서도 민중의 지지를 받는 정권 창출이 소말리아에서 가능하다는 점을 보여 줬다. 문제가 있었다면, 미국 지배자들의 입맛에 맞지 않는 정부였다는 것이다.

즉, 소말리아의 혼란과 인도적 참사를 해결하는 길의 시작은 진정한 해적들인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 그리고 한국군이 소말리아 개입을 중단하고 그 해역에서 철수하는 것 뿐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 49호 온라인 판에 실렸습니다.

-[아덴만 여명’ 작전 뒤에 숨겨진 추악한 진실] 소말리아에 대한 군사적 개입을 중단하라

  1. 해적들의 거의 유일한 목표가 현금을 얻는 것이고, 무엇보다 이들의 무장 수준으로는 중무장한 정규 함대를 이기는 일이 불가능에 가깝다. 그 점에서 아덴만 마케팅은 군사적으로도 과장돼 있다. [본문으로]
  2. 이는 한국 지배자들이 소제국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부분적인 증거로 볼 수 있다. [본문으로]
  3. 해적들은 과거와 달리 점점 기업화하고 있다. 첨단 기기를 동원해 선박들의 이동경로를 파악하고 양쪽에서 인질 석방 협상 수수료를 받는 협상 전문가들을 해외에서 고용하기도 한다.(주로 런던) 이들이 인질 몸값으로 번 돈은 두바이 등 중동의 금융 중심지들의 은행으로 흘러 간다. 이들을 국내에서 봐 주는 것은 부패한 관리들과 기업들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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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 해체 이후 미국은 쇠퇴하는 경제적 영향력을 여전히 막강한 군사력으로 만회하는 전략을 추구해 왔다. 세르비아[각주:1], 아프가니스탄, 이라크 등에서 벌인 야만적인 침략 전쟁은 이런 전략의 결과였다.

동북아시아에서, 미국은 북한의 군사 위협을 과장해 ‘평화’의 유일 관리자를 자임해 왔는데 그 실상은 군사적 대북 압박이었다.

미국은 북한 위협을 빌미로 일본(과 남한의 핵무장)을 묶어 두고, 중국을 견제하고 압박했다. 군사대국들이 밀집한 동북아의 맞춤형 전략인 것이다[각주:2].


양국간 대화든 6자회담이든 매번 약속을 어기고 사태를 악화시킨 것도 미국이었다.

미국은 북핵 위기 시작 이후 제네바 합의(1994)를 이행하지 않았고, 북미공동선언(2000)을 무시했으며, 9ㆍ19 공동선언(2005)은 바로 뒤집었다.
해외 계좌 동결, 북한 선박 임의 검색 등 경제 제재도 강화돼 왔다.

미국은 이미 1950년대에 정전협정을 깨고 남한에 핵무기를 들여 온 적이 있다. 핵을 포함한 대규모 선제공격 훈련을 실시해 온 것도 미국와 남한 정부였다[각주:3]. 1994년에는 전쟁 직전까지 갔다.

이런 군사ㆍ경제적 압박이 북한 정권을 핵과 미사일 개발, 벼랑끝 외교[각주:4]로 내몬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의 군사적 대응을 반제국주의 저항으로 볼 수는 없다.


반제국주의와는 거리가 먼 북한의 군사적 대응

사회주의는 총과 미사일로 오지 않는다. 그것은 노동대중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고, 그 핵심 수단은 말과 설득, 그리고 자신의 힘을 민주적적 사회 운영에 발휘하려는 집단적 행동이다. 폭력은 지배자들의 반동적 폭력에 맞서는 방어적 수단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최소성의 기준을 벗어나는 대량살상무기는 사회주의의 방어수단이 될 수 없다.


첫째, 핵은 인류와 환경을 오염하고 파괴하며 폭격 지역의 인간을 절멸시키는 ‘대량살상무기’일 뿐이다.


따라서 방어적 억지 수단에 불과하다는 변호도 명분이 없다. 약소국의 핵무장은 제국주의 핵 강국들을 흉내내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든 핵무기를 반대한다.

둘째, 군비 증강으로 강대국에 맞서려면 다른 분야를 희생해 가용 자원을 군사 분야로 최대한 집중시켜야 한다. 이 과정이 3대 세습 같은 권력의 초집중, 비민주적 억압의 강화, 노동계급 삶의 희생을 낳았다.

올해 김정일은 “[인민에게] 흰 쌀밥에 고깃국을 주겠다”고 한 아버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만성 식량부족국가가 돼 버렸다.

그 뒤 국제협상에서 북한의 요구 중 빠지지 않는 게 식량 지원이었는데, 정작 북한 정권의 우선 순위는 군비 증강에 가 있다.

결국 민중의 희생으로 군비를 늘리는 것은 북한 체제의 억압적ㆍ착취적 성격을 드러낼 뿐이다.

셋째, 이런 두 가지 이유 때문에 북한은 진정으로 제국주의에 맞설 수 있는 나라 안팎에서 모두 대중적 지지를 동원할 수 없다. 사실 북한 정권은 이에 관심도 없다.

대규모 살상무기를 전면에 내세우거나 연평도처럼 군사 보복식으로 대응하면, 표적이 되는 상대 국가(남한)나 제국주의 국가들의 민중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각주:5]. 남한의 반제국주의 운동이 매번 부딪히는 어려움이다[각주:6].

역설이게도 북한의 핵과 미사일 개발 시도는 미국 제국주의의 동북아 개입을 정당화하고 일본이 재무장하는 명분을 쌓는 데 이용됐다. 남한 정부와 우익 언론도 이를 국내에서 억압적 조처를 강화하는 데 이용한다.

반대로 체제와 정권이 진정한 개혁을 제공하면서 ‘세계적 반동의 보루’인 미국 제국주의와 맞서는 경우, 나라 안팎에서 진정한 반제국주의 대중 동원을 이룰 수 있다[각주:7].

이것이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제국주의 연합군을 물리친 배경이다[각주:8].


비슷한 예로, 미국은 베네수엘라에서 반(反)차베스 우익 쿠데타를 세 번이나 후원했는데, 이들은 번번이 민중 저항에 직면해 실패했다.

그러나 차베스는 반제국주의ㆍ반자본주의 운동에 지지를 호소[각주:9]하다가도 한편에서 관료와 군부에 의존하고, 중국 같은 비서방 강대국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최근에는 핵개발을 선언했다.

이런 사례는 반제국주의의 진정한 목표가 무엇이 돼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던진다.


체제의 우선순위


제국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기업 경쟁이 국제적 규모로 확산한 결과다[각주:10]. 호전적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를 바꾸는 일은 자본주의를 바꾸는 일이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목표는 제국주의 미국에게서 “체제 보장”을 받고 그 질서에 편입하는 것이다. 이것이 (북한의 대응이 반제국주의가 아닌) 넷째 이유다.

김일성은 1994년 전쟁 위기 때 방북한 카터에게 ‘통일 이후에도 주한미군 주둔을 용인한다’고 말했고, 김정일은 2000년 남북정상회담 때 같은 언급을 김대중에게 전했다.

“철천지 원쑤”의 군대를 통일 후에도 수용한다는 것은 현재의 주둔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억압 체제의 안전만 보장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제국주의(=세계자본주의) 질서에 순응할 수 있다는 의사 표시인 것이다.

결국, 내가 말하려는 바는 북한 정권이 대량살상무기에 집착하는 한 진정한 반제국주의 저항을 하는 것이 아니며 미국의 군사 압박을 막는데 도움이 될 정치적 지지를 받기 힘들다는 것이다.

고립은 더 깊어질 뿐이다.
그러나 국가간 경쟁과 축적을 인민의 필요보다 우선시하는 체제와 정권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북한의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신화를 거부하고 아래로부터 진정한 반제국주의 저항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 


※ 이 글은 다듬고 축약해 <레프트21> 47호에 실렸습니다. ☞기사 주소: http://www.left21.com/article/9048


  1. 1999년 나토군을 앞세운 폭격 전쟁. [본문으로]
  2. 북핵 위기 주범설은 완전한 위선인데, 미국은 훨씬 더 파괴력이 큰 핵무기를 1만 6백 기나 보유하고 있다고 하며, 이스라엘 같은 호전적 우익 국가에게는 NPT에 가입하지 않고 핵무기 1백여 기를 보유하는데도 절대 제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핵무장을 지지했다. [본문으로]
  3. 연인원 20만 명이 참가하며 한미 육해공이 모두 [본문으로]
  4. 이른바 벼랑끝 외교가 남한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추종 외교보다 자주적으로 보일지라도, 그 본질은 북한 정권이 미국에게 벼량으로 내몰린 상황에 있다. 북한이 능동적으로 벼량으로 간다는 것은 친제국주의 세력과 언론이 한반도 위기 주범을 북한으로 몰고가려는 술책이다. 안타깝게도 진보진영의 자주파는 북한 정권을 미화하려는 의도 때문에 이 술책에 무비판적이다. [본문으로]
  5. 베트남 전쟁 등 여러 사례를 봐도 약소국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이나 제국주의의 간섭에 부딪힌 제3세계의 진보 정권들에게는 제국주의 본국 민중운동의 지지가 매우 중요한 도움이 될 수 있다. [본문으로]
  6. 미국의 대북 압박이 원흉이며 이에 반대하는 것이 우선 과제라고 주장하면, 흔히 남한 민중 전체를 겨누는 북한의 핵무기를 옹호하는 것이냐는 악의적 반론에 부딪히곤 한다. [본문으로]
  7. 북한이 민중을 위해 필요한 개혁을 제공하는 정권이라고 상상해 보자. 미국의 군사적 대북 압박에 저항하는 여론을 이끌어 내고, 저항 운동을 건설하는 일은 매우 쉬워질 것이다. [본문으로]
  8.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뒤이어 독일에서 제정이 타도되자, 미국·영국·프랑스 등 제국주의 열강들은 14개국 연합군을 꾸려 러시아의 반혁명 백군을 지원하며 혁명 러시아를 침공했다. 만 3년의 내전은 러시아혁명의 조건을 더 어렵게 만들긴 했지만 열악한 무력에도 혁명 러시아의 군대는 말과 설득을 앞세워 승리했다. 전투 전에는 적국 병사들에게 선동 연설과 유인물이 배포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곳곳에서 전투를 거부하는 연합군 병사들이 생겨났다. [본문으로]
  9. 차베스가 2005년 브라질 포르투알레그레에서 열린 세계사회포럼에서 ‘21세기 사회주의’를 제창한 것이 한 예다. 당시 연설장소인 체육관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에서 모인(유럽과 우리 같은 아시아 참가자들도 있었지만) 급진적 청년 수만여 명은 차베스의 연설에 열정적인 지지를 보냈다. [본문으로]
  10. 기업주들은 경제적 경쟁자든 아래로부터 저항이든 국내에서 자신의 권력과 이윤에 대한 도전자들에 대처하는 데 국가의 힘을 빌린다. 이들이 국경을 벗어나 세계시장에서 경쟁할 때도 마찬가지로 국가의 조력이 필요하다. 약소국에게는 국가를 이용해 자신들에게 유리한 교역 조건을 강요하고, 선진국끼리 무역분쟁 때도 국가간 경쟁이 촉발된다. 제국주의는 세계자본주의의 오늘날 이름이다. 그래서 진정한 反제국주의는 反자본주의여야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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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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