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에 짧게 쓴 서평. 선거를 앞두고 생각이 났다.
주제 사마라구의 2부작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시민들의 눈이 멀었을 때, 시민들이 눈을 떴을 때. 정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감시와 통제, 거짓 민주주의는 유지된다.
반면, 자신들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 정부마저 눈이 멀었을 때, 또는 사람들이 갑자기 정치적 맹아이기를 거부했을 때, 정부는 순식간에 통제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바로 이 점, 현대 사회에서 비민주적인 자본가 정부를 다수를 대표하는 민주적인 정부라고 믿게 만드는 거짓 민주주의가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주제 사마라구의 통찰이 이 소설이 지닌 흡인력의 실체다.
포르투갈 공산당 출신의 이 노 소설가가 여느 젊은 신진 작가 못지 않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기발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부르주아 법 어디에도 금지 되지 않은 백지투표 제출이 '민주' 정부의 정통성을 뿌리채 흔들 수 있다는 발상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우익 정부와 정치인들이 내보이는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냉소를 특유의 문장 부호 없는 대화로 드러내는 묘사도 날카롭다.
주제 사마라구의 이 소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정치와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또한 보여준다.
국가 질서나 체제를 넘어서 사회 자체가 붕괴되버린 듯이 보이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묘사가 그렇다. 모두의 눈이 멀어 버린 세상에서 '인격'을 유지하며 강인하게 살아남은 이들이 정부의 공작 앞에서 맥 없이 살해되는 것도 그렇다.
저자의 본 뜻이 혁명에 대한 비관주의인지 아니면 그래도 무정부주의 혁명이 대안이라는 건지, 아니면 나의 독해와 일치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결말의 비관주의를 나는 백지 투표가 상징하는 무정부주의 혁명의 무기력함으로 해석한다.
도망가버린 정부의 음모는 성공했을까. 아니면 눈뜬 시민들이 승리했을까. 인간의 존엄과 양식을 보여줬지만 대안 권력을 세우지 못한 눈뜬 자들의 도시가 정말 이 세계의 진실에 눈을 뜬 것인지, 계속 전진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반쯤만 승리한 이 무정부주의적 백지 투표 혁명이, 포위된 눈뜬 자들의 도시가 '거부'와 '우회'만으로 승리할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4년 만에 눈뜬 자들로 채워진 이 도시의 존재 자체에서 낙관적인 혁명의 희망을 발견한다.
(2007.8.27.)
이 도시 2부작은 권력과 인간의 본성, 선거, 정치적 무관심이 적극적 저항으로 바뀌는 역설,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취약성 등 다양한 현대 정치 주체를 다루고 있다.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저자가 암시하는 건지, 경계하는 건지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거부와 우회로 상징할 수 있는 정치적 해법의 취약성은 소설 자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전히 대안과 전략전술의 예술의 몫이 아니라 정치의 몫이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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