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4.18]


나름의 성과(정당 득표수)도 있지만, 어쨌거나 총선은 민주당 압승, 통합당 참패, 진보정당 제자리걸음으로 끝났다.
이쯤에서 생각해 볼 것은 노동계 대표적 조직들인 민주노총, 정의당, 민중당이 공히 지난 3년간 민주당 문재인 정부와 ‘(비판적) 협력’ 관계를 맺어 온 점이다. 이전 정부 때 야권단일화 추수로 지역구 일대일 구도 고착화에 기여한 점도 얘기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민주당이 강화되고 진보정당이 상대적으로 초라해진 결과가 문재인 정부와 협력해 진보 개혁을 얻어내자는 전략을 더 강화시킬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다.뒤로는 청와대와 민주당이 노동계에 요구하는 게 더 많아질 것이다. 노사정 대화 제안 등 16일 민주노총 중집의 결정에 담긴 함의라고 본다.(누명을 씌워 좌파를 마녀사냥하는 결정도 했다.)
사회적 대화 노선은 총선 앞둔 두어 달 간 보인 약점(연합정당 문제로 동요, 코로나19 대응에서 정부에 정치적으로 독립적이지 못함 등)을 치료하기는커녕 더 악화시킬 것이다. 사회적 대화, 즉 계급간 대화에 매달리면 실익도 없이 노동계급 내부가 분열된다.
그럼에도 개혁주의가 운동의 주류를 이루는 시대가 된 상황에서, 사회적 대화 전략을 다루는 건 정치적 날카로움과 꼼꼼함이 동시에 필요하다
매우 시의적절하게 좋은 책이 출간됐다. 일독을 권한다.
👉 신간 소개: 《문재인 정부와 노동운동의 사회적 대화 – 좌절과 재시도》: 문재인이 추진해 온 사회적 대화의 본질을 들춰낸 책
https://wspaper.org/m/23815

 

신간 소개: 《문재인 정부와 노동운동의 사회적 대화 – 좌절과 재시도》: 문재인이 추진해 온 사회적 대화의 본질을 들춰낸 책

문재인 정부는 최근 코로나바이러스·경제 위기 국면에서 사회적 대화를 또다시 추진하고 있다. 노·사·정이 힘을 모으자며 경제주체 원탁회의와 비상경제회의를 열었다. 노동운동 내에서도 사회적 대화 추진 노력이 진행 중이다. 민주노총 집행부는 “코로나19 원포인트 비상 대화” 등 다양한 사회적 대화의 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런 상황에서 매우 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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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쟁에 참가한 사회주의자에게서 듣는 1987년 6월 항쟁

“6월 항쟁은 우리의 역사로 삼아야 할 위대한 계급의 기억”



1987년 7~9월 노동자 대투쟁

마침내 기지개를 켠 노동계급의 힘과 전투성





김문성님이 노동자 연대님의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노동자·민중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꾼 경험.
청년세대가 알아야 할 역사와 기억.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의 관객수가 상영 9일 만에 300만 명을 넘었다네요. 특히 그 시절을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10대, 20대에서 관심과 호평이 많다고 합니다.
그래서 청년 세대에게 1980년대 저항의 역사를 명확하고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본지 기사들을 추천합니다.

1987년 6월 민중항쟁을 다룬 영화 〈1987〉의 관객수가 상영 9일 만에 300만 명을 넘었다. 박종철 열사를 고문으로 살해하고 이를 은폐하려 한 전두환 독재정권의 야비한 행태들과 이에 맞선 저항을 잘 그렸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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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성님이 노동자 연대님의 게시물을 공유했습니다.

87년 민주화를 보는 데서 양 편향이 있는데, 거울 이미지다.
한쪽에 1987년에 6월만 있었던 것처럼 하는 자유주의 부류(민주당 386이 대표적)가 있고, 다른 한쪽엔 6월은 7~9월 노동자대투쟁과 아무 상관없는 남(중간계급?)의 투쟁이었던 양 다루는 부류(노동자주의나 초좌파적 사고)가 있다.
얄궂게도 두 편향 공히 6월항쟁에서 노동계급의 참여와 구실을 지워 버린다.
그러나 정치적(절차적) 민주주의도 노동계급에게 필요했을(/할) 뿐만 아니라 6월 항쟁(국민적/민중적 항쟁이었지만)은 커질수록 사회적 구성에서 노동계급이 다수를 이룬 항쟁이기도 했다.
거울이미지 문제에서의 요점은 역사적 변화를 바라보는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관점이 아닌가 싶다. 100여 년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가 1905년 러시아 혁명과 대중파업에 대한 저술로 탁월하게 입증했듯이 말이다.

영화 〈1987〉로 당시 역사적 배경과 항쟁의 의미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당시 사회주의자로서 항쟁을 지역에서 조직하며 참가한 활동가로부터 시대적 배경과 항쟁 상황, 의미를 듣는 장문의 인터뷰 기사를 추천합니다.


1987. (수정)

과거를 살펴보는 까닭은 현재를 잘 해석해 미래를 잘 대비하고 준비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거꾸로 현재에서 과거를 보는 시각에는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점이 반영된다.
지난해, 아니 이젠 지지난해 아직 박근혜 정권의 결말이 정해지지 않았고, 아직 남은 위세를 떨치고 있을 때 이 영화가 기획됐다고 한다.
만약, 퇴진 촛불이 없었다면? 퇴진 촛불이 성공하지 못했다면? 정권이 다시 보수당에게 넘어갔다면? 이 영화의 내용이나 메시지, 결말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물론 개봉시점에도)
그렇게 보면, 이 영화가 (애초 기획도 그런 방향이었던 같긴 하지만, 더더욱 분명하게) 희망적 세계관을 전하는 배경을 더 잘 이해할 것 같다. 지금 시점에서 민중의 저항이 사회 발전의 동력이라고 묘사하는 건 한국 영화의 진전으로 보인다. 
이 영화는 박종철 열사 사망 직후 사냥개들의 사이의 작은 균열부터 조망한다. 시스템 안의 인물들이 갈등하게 하는 것이 바로 외부 요인(시스템 도전에 대한 두려움)이란 점에서 이를 단지 공안부장 검사의 미화라고 보는 건 협소하다. 그뒤로 이어지는 정말 보통 사람들, 연기력까지 더해 압도적인 대공수사처장의 위세 앞에서 개개인별로 대면 상대도 안 될 것 같은 보통 사람들이 저마다의 조건에서 작은 용기를 내고 능동적으로 권력의 강요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영화에서 보통 사람들은 단지 희생자, 피해자가 아니다.(시대상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그런 보통사람들의 기여를 더 돋보이게 한 것 같다. 한편, 6.9 연세대 정문 앞 시위 장면에서 깨알같이 최루탄의 곡사와 직사를 구분해 묘사한 것은 감탄을 자아냈다.) 
그래서 소수 개인들의 저항이 반향을 얻고 집단의 저항으로 발전했다는 점, 지금의 ‘절차적’ 민주주의가 그런 누적된 저항들과 민중의 투쟁과 승리로 얻은 것임을 설득력있게 보여 준 것에서 이 영화의 첫째 성취가 있다고 본다.
미장셴에 해당하는 묘사들만이 아니라 기본 줄거리가 지금껏 밝혀진 당시 상황에 비교적 충실하다. 이 점도 20대에게는 긍정 요소가 될 것 같다.(가상인 여주인공 빼고는 거의 실존 인물이 실명으로 등장한다. 다만, 유해진의 한병용 역은 자료들을 살펴 볼 때, 두 사람(전병용과 한재동)의 이름을 짬뽕한 것 같고, 깨알 웃음 주는 표 검사는 아무래도 보온병 상수인데...) 
물론 영화 하나로 모든 걸 해결할 수 없다. 가령 영화는 독재 타도 염원이 사람들의 삶에서 무엇을 뜻했는지는 자세히 묻지 않는다. 2017의 승리감이 묻어나는 영화의 반대급부일 듯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다큐나 좌파 영화가 아닌 이상, 그건 영화가 아니라 정치운동의 몫이 아닐까 싶다.
...... 한편, 이 영화를 소재로 한 ‘최고급 수준의 추억팔이’ (당시 경력 팔아 정치적 변신 정당화하기) 글에 이 영화가 추억팔이라고 평가 절하하는 동조 댓글이 달리는 걸 보니 참 세상은 넓고 웃을 일은 많다.

“평범한 시민들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도저히 참지 못해, 30년 만에 또다시 일어나 제2의 6월 항쟁을 일으키고 있단다. “종철아, 네가 살아 있다면 여기서 다시 소리칠 거야, 그렇지? 되살아난 거야, 그렇지? “종철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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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연대〉134호 기사 보기 ☞ http://wspaper.org/article/14907


[서평] 《싸가지 없는 진보》 (강준만, 인물과 사상사, 1만 3천 원, 2014)


무례한 강준만 씨, 

민주당의 실패를 좌파 탓으로 돌리지 마시길



노동운동이나 좌파 활동가들이 어리석게도, ‘나만 옳다’든가 ‘내가 다 안다’는 우월감 따위로 자기 주변 사람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경우를 가끔 본다. 


강준만 교수(이하 직책과 존칭 생략)가 낸 《싸가지 없는 진보》라는 책의 제목만 보고 ‘그래 고칠 건 고쳐야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진보 활동가들의 태도나 성품에 관한 조언을 담은 책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해, 강준만이 이 책에서 문제 삼는 것은 사실 선명한 좌파 정치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유시민 등 새정치민주연합 안팎의 이른바 ‘강경 친노’ 그룹을 “싸가지 없음”의 주된 비난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강준만의 주된 관심이 민주당의 재집권에 가 있기 때문이다.(그는 새정치연합을 민주당이라고 부른다.) 물론 친노 그룹이나 486 등의 이중성, 위선을 꼬집는 것은 옳다. 


그러나 강준만이 보기에 “싸가지 없음의 원조는 좌파 진보”다. 


“자신만이 옳고 보수는 몹쓸 집단이라는 식의 태도 … 자신과 상대를 ‘선과 악’으로 구분하고 과도한 적대의식을 보이면서, 국민들에게 양자택일을 종용하는 것”(107쪽)은 바로 ‘좌파 진보’의 습성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진보》에서 척결하자는 진짜 알맹이는 주류 지배자들, 당장은 박근혜 정부에 대한 비타협적인 좌파적 정치인 것이다.


강준만은 수년 전부터 ‘진보진영’의 ‘증오 상업주의’를 비판해 왔다. 우파 정부를 ‘적대’하는 정치가 힘을 얻으면서 정치 양극화를 조장하고 민주당이 중도 표를 얻는 데에 방해가 된다는 것이다. 그가 2012년 대선 후보 선정 과정에서 안철수를 지지한 것도 이런 취지에서였다.


 “새 정치의 실천에서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은 새누리당과 대립하거나 새누리당을 적대시하는 프레임이다. … 오히려 선의의 경쟁을 벌여야 한다.”(243쪽) 


그의 대안은 선의의 경쟁과 협력에 기초해 정권을 주고받는 보수-중도(강준만은 ‘진보’라 부름) 양당 체제다. 따라서 강준만이 척결 대상으로 삼은 것은 이런 부르주아 양당 체제 구축을 방해하는 좌파 정치인 것이다.



양극화가 ‘선악의 정치’ 때문인가


강준만이 보기에 ‘좌파 진보’의 ‘싸가지 없는 정치’는 기본적으로 선악의 정치다. 내가 선이고, 적이 악이므로 화해가 불가능한 타도 대상이다. 그리고 “반대 편에 대한 싸가지 없는 언행은 지지자들을 열광시키는 동시에 단합의 대열로 이끌 수 있다.”(51쪽)


강준만이 보기에 이런 정치는 ‘싸가지 없게 보여’ 중도적 유권자들을 새누리당에게 내줄 뿐이다.


“정치와 선거는 20퍼센트가 결정하는 싸움이다. … [진보와 보수의 고정 지지층을 뺀 나머지 사람들은] ‘보수의 분노’나 ‘진보의 분노’ 내용에 공감하기보다는 그들의 분노 표출 방식, 즉 태도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다. 바로 여기서 싸가지가 문제가 된다.”(23쪽)


이를 납득시키려고 강준만은 진보적이지만 싸가지 없는 사람과, 보수적이고 탐욕스러운데 대인관계의 매너가 좋은 사람을 대비시킨다. 중도적 유동층에게는 후자가 더 매력있게 비쳐질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저급한 실용주의적 발상이다.


그런데 정치적 계급 양극화가 벌어지는 것은 경제 위기 시대에 사회적 양극화가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를 쥐어짜기 바쁘고, 정부는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으로 이런 기업주들을 돕고, 노동자ㆍ민중의 저항을 탄압하며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


이런 추세는 이 사회 자체가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들로 계급 적대가 형성돼 있기 때문다. 따라서 계급 양극화 시대에 계급 간의 합리적 소통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특히, 지배계급을 대표해 경제 위기의 고통을 노동자 민중에게 전가해야 하는 박근혜 정부는 지배 질서에 흠집이 나거나 노동자 대중에게 자신감을 줄 수 있는 양보는 한사코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있는 그대로의 세상”은 노동계급이 앞장서는 전투적인 대중투쟁과 선명한 좌파 정치를 필요로 한다. 이것들이야말로 (우파 통치에 맞서는) 현재의 운동에서 부족한 요소들이다. (물론, 강준만의 단순화와 달리, 좌파정치가 선악의 가치 판단 문제로 단순화되진 않는다.)


현실에서는 오히려 (강준만의 한탄과 달리) “보수주의자들을 … 이해하고 더 나아가 존중까지 해야 한다”(200쪽)는 온건한 개혁주의 정치의 영향력이 큰 것이 문제를 낳고 있다. 


예를 들어, 세월호 운동에서도 원칙을 저버리고 유가족까지 배신하면서 박근혜 정부와 타협하려다가 운동을 위기에 빠뜨린 것은 새정치연합과 주요 NGO들의 리더들이었다. 이런 식의 ‘타협’ 노력을 적극 지지했던 참여연대 이태호 사무처장이 탈진영론을 내세우는 것은 시사적이다.


새정치연합의 리더십 위기는 온건 개혁주의가 운동을 지배하는 이런 현실에서 온 것이다. 새정치연합은 노골적으로 친자본주의적인 중도 정당으로서 기업주들의 이윤을 보호해 주면서도 이런 양극화를 봉합하려 애쓰는 가련한 처지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협 불가’라는 새누리당에 새정치연합이 매달리게 만드는 근본 요인이다.


결국 강준만은 종로에서 뺨 맞고 엉뚱한 곳에 화풀이를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도덕의 부재?


책 곳곳에서 강준만은 진보측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싸가지 없는 태도를 낳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 즉 목적이 도덕적이면 어떤 비도덕적 수단을 써도 정당하다는 스탈린주의의 도덕관을 마르크스 자신의 것인 듯 비난한다. 일종의 ‘허수아비 때리기’다.(그런 점에서 이택광이 진보는 도덕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고 강준만을 비판한 것은 부적절한 반론이다.)


스탈린주의 체제는 ‘마르크스ㆍ레닌주의’를 표방했지만, 그 체제는 노동계급의 자기해방이라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원칙에 적대적인 체제였다. 그러나 미국도 소련도 아닌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은 계속 존재해왔다.


그러므로 설사 마르크스주의 도덕 이론이 확고하게 정립돼 있지 않을지라도 스탈린주의를 들어 마르크스주의를 비난하는 것은 무지의 소치다.


친노 정치인들은 물론이려니와, 강준만이 사례로 든 1997년 한총련 프락치 사망 사건이나 2012년 통합진보당 중앙위 폭력 사태가 마르크스주의와 도대체 무슨 상관이 있나? 해방 정국에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지침을 따라 반탁에서 찬탁으로 선회한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도덕적 오류’로 보는 비판도 난데없다.


마르크스주의 도덕은 계급 분단의 현실에서 출발한다. 서로 화해할 수 없는 이해관계로 분단된 사회에서 모든 계급이 공통 으로 미덕으로 삼아야 할 가치는 모호한 추상에 그칠 수밖에 없다. 선한 자세로 주어진 일에 충실한 것(“가만히 있어라”)이 미덕이라는 정적주의(quietism)가 파업할 때는 동료 노동자를 배신하고 파업을 파괴하는 악덕이 된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 도덕에서는 노동계급의 자기 해방 의식과 활동, 조직에 이로운 연대와 억압에 대한 저항 등이 미덕이 된다. 


반대로 개인에 대한 테러, 핵무기, 여성ㆍ인종 등에 대한 각종 차별 사상은 노동계급에게 미덕이 아니다.


정권 교체와 의회 협상의 파트너로서 새누리당을 존중하자는 강준만에게는 마르크스주의 도덕이 “싸가지 없음의 원조”로 보일 것이다.



어차피 민주당을 찍을 수밖에 없다?


강준만의 주장은 좌파정치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는 칼날로, 민주당 리더들에게 좌파진보와 더는 가까이 지내지 말라는 조언이다.


그런데 강준만은 자기 논리의 전제인 ‘어차피 30퍼센트는 민주당을 찍게 돼 있다’는 생각 자체가 “싸가지 없는” 발상이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진보정당들이 죽을 쑨 6ㆍ10 지방선거에서도 진보정당들은 합쳐서 전국적으로 2백만여 표 정도를 득표했다. 이 투표자의 다수는 광역단체장 투표, 또는 2012년 대선에서 울며 겨자 먹기로 민주당 후보에게 투표했겠지만, 좋아서 그런 것은 아니다.


즉, 새정치연합이 이른바 중도적 유동 표를 잡으려고 지금보다 더 보수적인 태도를 취할 때, 왼쪽으로 이탈하는 사람들이 생길 것이다. 7ㆍ30 재보선에서 야권 심판이 일어난 것도 부분적으로 이 때문이다.


강준만의 계획대로 ‘중도’ 유동층을 잡으면서도 진보적 유권자들을 새정치연합의 고정 지지층으로 묶어 놓는 방법이 있긴 하다. 그것은 진보정당, 좌파정치세력들이 위축, 몰락하는 길이다.


그래서 강준만이 “싸가지 없는 진보” 담론을 통해 “좌파 진보”를 비난ㆍ고립시키려 하는 것은 그가 의도했든 아니든 (친자본주의) 보수-중도 양당체제를 구축하려는 프로젝트에 정확하게 부합한다.


좌파 진보를 경원시하면서도 굳이 새정치연합을 ‘진보’라고 부르는 것은 바로 이런 목적의식의 산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국과 서유럽의 비교 고찰에서 보듯, 노동자 대중정당이 제도권에 없는 것은 노동자 운동에 다소 불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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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동자 연대> 125호 온라인 ☞바로가기



4월 2일 롯데리아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에게 주휴수당을 지급하지 않으려고 근무표를 조작했다는 한 점장의 양심선언이 있었다. 롯데리아 본사가 이를 알고도 묵인을 지시한 사실도 폭로됐다.


지난해 “학생들의 아르바이트 실태” 국회 세미나에서는 “2012년에 법을 위반한 [아르바이트 고용] 사업장이 91.8퍼센트”라는 고용노동부의 근로감독 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그 밖에 신고건수로 보면 임금체불이 압도적으로 많다.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권문석ㆍ박정훈, 박종철출판사, 2014, 1만 4백20원)

이런 현실에 놓인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최저임금을 1만 원으로 인상하라는 운동에 주력해 온 알바연대와 알바노조가 자신들의 요구와 논리, 활동을 정리해 《알바들의 유쾌한 반란》을 내놓았다.


알바노조 조직화를 위한 교본처럼 보이는 이 책은 생생하게 현실을 폭로하고 최대한 읽기 쉽게 쓰려고 애쓴 흔적이 강점이다. 청소년, 청년들이 자기 권리를 깨닫고 행동과 자기 조직화에 나선 몇몇 경험담은 매우 고무적이고 흥미롭다.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가 청소년만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 편의점에서도 장년과 노년 노동자들을 자주 볼 수 있다. 더구나 박근혜 정부는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 정책으로 전반적인 노동조건을 낮추려 한다. 이 책은 당사자들의 경험에 바탕해 “한국의 시간제 일자리는 잘 활용해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축소하고 없애야 할 한국 경제의 나쁜 결과물”이라고 잘 지적하고 있다.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이 현대자동차 정규직처럼 기본급이 낮고 장시간 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에게도 이익이 될 수 있다면서 부문을 뛰어 넘어 연대하자고 주장하는 부분은 인상적이다. 더 적은 노동으로 더 많은 소득을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나, 그에 바탕해 최저임금 1만 원 인상과 보편적 기본소득을 요구하는 것도 공감의 폭을 넓힌다.


그러나 이 책의 이론적 알맹이들은 흥미롭지 않다. 케인스주의적 금융화론의 통속화된 설명과 프레카리아트론을 합쳐 놓은 분석은 현실을 직시하는 데에 혼란을 자아내기 십상이다. 이 책이 비록 최저임금이 “적절한 임금” 수준이 돼야 한다는 논거로 마르크스주의 임금론을 인용하지만, 전체적인 분석과 전략은 케인스주의에 가깝다.


저자들은 완전고용과 복지국가의 시대를 신자유주의와 금융산업 발전으로 성립된 금융자본주의가 대체했고, 이 시스템이 수익 창출을 위해 개인들을 부채 위기로 몰아넣고 노동유연화를 추구해 불안정노동을 양산했다고 말한다.


이는 전형적으로 좋은 자본주의와 나쁜 자본주의를 구분하는 개혁주의 사고 방식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왜 ‘나쁜’ “금융자본주의로의 전환”을 막지 못했냐 하는 것이다. 이 책은 이 문제에 “국가가 개입해 재정지출을 늘려도 실업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중앙정부는 물가도 잡지 못합니다. 케인스의 구상이 설 자리가 없어졌습니다” 하고 답한다.


금융자본주의가 국가를 무력화했다는 설명은 혼란을 자아낼 만한데, 왜냐면 이들의 핵심 실천은 모두 국가에 요구하고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로기준법의 주휴수당 받아내기는 그렇다 쳐도 최저임금 1만 원 인상, 보편적 기본소득 지급 등은 매우 강력한 국가가 필요한 요구들이다.


노동계급이 정치적 해결을 위해 국가에 요구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궁금한 것은 금융자본주의의 등장을 막지 못한 국가가 금융자본주의를 제어하거나 해체하는 데서는 유능할 수 있냐는 것이다.


물론 알바연대 활동가들은 국가를 강제하는 대중행동이 관건이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대답도 만족스럽진 않은데, 그렇다면 왜 1970~80년대에는 그렇게 못 했냐는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이 책이 “금융자본주의로의 전환”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노동운동이나 사회운동의 대응이 왜 실패했는지에 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사실 국가 개입으로 완전고용을 이룰 수 있다는 “케인스의 구상”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은 이들이 프레카리아트와 기본소득을 강조하는 것과 연관이 있다. 고용(보장)을 위한 투쟁, 임금 인상 투쟁보다 고용 여부와 관계 없이 소득을 지급하라는 요구와 투쟁이 더 중요해졌다는 것이다. 


이제는 “노동시장 자체에서 배제된 장애인, 실업자, 빈민, 취업준비생 등과 노동시장에서 차별 받는 비정규직, 아르바이트노동자, 그리고 정리해고의 위협 속에서 떨고 있는 정규직노동자들을 포괄”하는 “프레카리아트”들이 새롭게 ‘불안정성’을 매개로 단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조직노동자와의 공통점을 강조하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 내부의 격차를 강조하는 이진경 교수 등의 프레카리아트론보다는 나아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들이 “불안정성”을 기준으로 사회집단을 분류하는 한 프레카리아트론 고유의 약점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프레카리아트론은 칼 마르크스의 노동계급 이론을 계승ㆍ혁신한 듯 보이지만, 사실은 그 이론의 정수를 부정하고 폐기하는 개념이다. 그 핵심은 노동계급의 잠재적 권능을 외면하는 것이다.


쌍용차, 한진중공업, KT 사례에서 보듯 정규직이라고 고용불안에서 면제된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조직노동자들의 조직력, 투쟁력, 투쟁의 전통을 그런 힘과 경험이 전혀 없는 사람들과 똑같이 취급하는 것은 정확한 분석도 현명한 전략도 되지 못한다. 


이들의 ‘상대적 특권’과 정규직노조의 부문주의를 변호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적 안정성을 가능하게 한 힘에 기초한 정치와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본의 내부에서, 그리고 국가의 바깥에서 그들을 압박할 수 있는 힘 말이다.


사실 자본들 간의 끝없는 시장 경쟁이 정치적 갈등과 국가 간 전쟁으로 발전하는 자본주의 체제는 그 자체가 항구적인 불안정의 체제다. 주기적인 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갈등이 상시적 불안정을 낳는 체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들도 자본주의 안에서 항구적 안정성을 찾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불안정성을 금융자본주의에 와서 보편화한 새로운 특징적 현상으로 지목하는 것은 오히려 자본주의의 불안정성을 과소평가하는 것이다. 


한편에서 이들은 노동의 불안정성은 과장한다. 그러나 노동자들은 몇 가지 이유로 자본주의에 맞서 상대적 안정성을 획득할 능력이 있다. 노동자 개인들이 자본의 고용에 의존하듯, 이윤을 창출하려면 자본도 노동계급의 존재에 의존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잉여노동만이 (이윤으로 바뀔) 새로운 가치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생산이 노동에 의존한다는 점 때문에 노동계급에게는 자본을 마비시켜 그들의 경제권력을 해체하고 사회를 재조직할 수 있는 구조적 능력이 생기는 것이다. 


또한 자본에게는 안정적 축적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 (숙련과 충성도 면에서) 안정적인 노동력을 확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요인을 배경으로 노동자들은 상대적 안정성을 획득할 수 있다. 노동계급의 일상 투쟁은 항구적 불안정성에 맞서 상대적 안정성을 유지 확보하려는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노동자들이 고용안정과 임금에서 전반적인 전진을 이룬 때는 박정희, 전두환의 국가자본주의 시대가 아니라 1987년 대투쟁 이후였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전체 고용 노동자 중 비정규직이 차지하는 비율 자체는 축소되고 정규직이 다시 늘어나는 추세가 된 것도 마찬가지로 이 두 가지 요인들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불안정 속에서도 지속적인 투쟁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노동계급의 특징이다. 


그러나 불안정성에 기초한 프레카리아트의 연대는 이런 힘에 대한 개념이 없다. 기본적으로 약자들의 연대다. 자본과의 객관적 관계 속에서 생기는 단결의 조건과 힘에 기초한 연대가 아니라 의식과 각 주체들의 선의(도덕적 정의감)에 기초한 연대다.


그래서 개인들의 의식과 각성, 이데올로기 효과를 중시할 수밖에 없다. 이 책은 한 장을 알바생과 알바노동자의 호칭이 가져올 이데올로기 효과를 다루는 데 쓴다. 노동자성 강조는 좋지만, 용어 사용이 세력관계와 대중의 의식을 뒤바꾸진 않는다.


이들의 전략에 국가를 외부에서 압박할 힘을 가진 주체가 없으니 국가가 무력해졌다는 분석을 하면서도 실천은 국가에 의존하거나 활용하는 전략에 기울 수밖에 없다. 또한 자영업자들과의 연대(계급연합)를 중시하는 것도 이런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은 선거주의적 포퓰리즘(계급연합) 정치로 귀결될 수 있다.


이 책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대기업 갑과 자영업자 을 다음의 병이라고 주장한다. 갑에 맞선 을과 병의 연대가 이들의 주요 전략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영업자와 아르바이트 노동자의 공동 이해관계를 강조한다. 심지어 노동자들의 요구가 (‘병’으로) 덜 중요한 문제처럼 취급된다.


“영세 자영업자와 관련하여 당장 중요한 문제는 최저임금을 지급하지 못한 것에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가해지는 대기업의 횡포를 막는 일이라 보입니다. 알바연대 역시 불공정거래 문제를 집중적으로 제기하고 있습니다.”(116쪽)


“임금이 높아지면 소속감과 책임감이 높아지기 때문에 이직이 줄어들어 사장님 입장에서도 이익입니다. 임금이 높으면 동기가 부여되어 생산력이 높아집니다.”(136쪽)


이것은 공동의 이익을 강조해 자본가들을 설득하겠다는 전형적인 개혁주의적 태도다. 이것은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월간 좌파》12호(2014.4)에서 알바노조 구교현 위원장은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의 현실과 요구를 널리 알리려고 올해 지방선거에 적극 나서겠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그 핵심 공약 중 하나는 악덕 사업주와 모범 사업주 명단을 공개하고 모범 사업주 지원하기다.


그러나 자영업자와의 단결로 최저임금 인상을 이뤄낼 수 있을까. 상호간에 경쟁하는 자영업자들끼리의 단결도 어려울 뿐만 아니라, 대기업을 위협할 힘이 없다. 설사 프랜차이즈 사업에서 갑의 횡포를 줄인다고 해도 을과 병 사이의 고용주-노동자 관계는 사라지지 않는다. 


저임금 시간제 일자리인 아르바이트 노동은 상대적으로 불안정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들이 최저임금제, 기본소득제 등 정치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것은 옳다. 그러나 그 엄청난 재원을 감안하면, 단지 개개인들의 의식 각성을 통한 동참을 호소하는 것만으로는 실현이 어려울 것이다. 이런 현실이 알바연대와 알바노조의 주요 활동이 사실은 노동상담지원센터 같은 구실에 머무르는 배경 중 하나일 것이다. 


조직노동자들의 힘을 동원해야 하고 계급투쟁의 방식으로 정치적 운동을 건설해야 할 것이다. 이 힘으로 체제와 국가를 압박하고 무엇보다 궁극적으로 사회를 재조직할 힘을 보여 줘서 다른 계급의 지지를 끌어내는 것이 바로 노동계급의 주도성이다. 


이는 노동운동의 전투성뿐 아니라 노동계급을 변혁정치로 단결시킬 정치와 조직의 문제를 제기한다. 노동계급 중심 전략 아래서는 전투적 청년들의 자기조직화가 꼭 지금 알바노조의 형식과 수준에 머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알바노조 자체가 민주노총에 가입해 더 광범위한 노동자들과 전투적인 노동조합 행동을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길 바란다. 


또한 청년들은 더 넓은 차원의 노학연대나 사회적 연대에 참여할 수 있고, 무엇보다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현실을 바꾸려고 분투하는 변혁적 노동자정치단체의 일원이 돼서 노동계급 전체를 위한 투쟁에 더 많은 기여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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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창이란 출판사에서 《열한 살의 한잘라》라는 만평(카툰) 모음집이 나왔다. 


이 책의 저자는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나지 알 알리라는 팔레스타인 출신의 ‘위대한’ 만평가다. 


한 컷짜리 흑백 카툰으로, 시대와 국제 질서를 꿰뚫는 통찰력과 땅을 잃은 팔레스타인 민중의 비통한 역사적 기억과 감정, 그리고 불굴의 저항의지를 두루 담아 표현한다는 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인가. 


그의 작품 속엔 미국과 이스라엘에 대한 분노 뿐만 아니라 그들의 꼭두각시가 돼 팔레스타인 저항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만 할 뿐인 [PLO를 포함한] 아랍 지배자들에 대한 통렬한 풍자도 담겨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결코 비관적이지 않다. 


나지 알 알리는 1948년 ‘나크바’[각주:1] 때 팔레스타인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살던 열한 살 소년이었다. 나지 알 알리의 작품마다 등장하는 뒷짐진 소년 ‘열한 살의 한잘라[각주:2]’는 바로  작가 자신의 분신인 것이다.


재앙의 시간대에 여전히 머물러 있는 현실, 그리고 그 기억을 결코 잊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아닐까 싶다. 저들이 우리의 시간을 멈추게 했다면, 저들의 시간도 더 앞으로 갈 수 없도록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의지에 바탕해 그는 단순한 반서방 아랍 민족주의적 감성에 머물지 않고 아랍 세계 내부의 분열을 직시하며 무엇보다 단호한 아랍 민중의 단결과 저항을 부르짖은 작가였다.


이 이미지는 작품집에 포함된 것으로 블로그 http://blog.daum.net/_blog/BlogTypeMain.do?blogid=06Hl1#ajax_history_3 에서 빌려 왔다. 이 그림은 미국이 아랍 지배자들의 입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 때문에 이쪽저쪽 적도 많았다는[각주:3]] 나지 알 알리는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후 활동 공간이 된 쿠웨이트에서 추방된 후 안타깝게도 영국 런던에서 1987년 의문의 암살을 당했다.[각주:4] 인티파다를 촉구하며 기다려 왔던 그가 제1차 인티파다[각주:5]가 시작된 해에 죽고만 것이다.


‘열한 살의 한잘라’는 영원히 어른이 못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을 아끼는 많은 팔레스타인 인들이 ‘내가 한잘라’라고 한다니, 승리하는 한잘라, 드디어 인간의 시간을 돌려 나이 들어가는 현실의 한잘라들을 반드시 볼 수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사실, 2007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복사집 제본 형태의 아랍어로 된] 나지 알 알리 작품집을 산 적이 있다. 그해 나는 카이로에서 열린 국제반전회의에 한국의 대규모 참가단 중 하나였다. 


그때 [사실 지금도 그렇지만] 나지 알 알리에 대해 잘 알았던 건 아니다. 다른 동지의 소개와 추천이 있었고, 이 작가의 만평엔 뒷짐 진 소년이  나온다, 아랍 쪽에서 매우 유명한 만평가다 하는 정도였다. 



작품 몇 컷으로도 느낌이 팍 오는 것도 있고, 아랍에 대한 미국[과 서방] 제국주의와 이스라엘의 침략과 개입 문제가 화두였던 국제반전회의 참가자로서 가장 걸맞는 지출이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기꺼이 구입한 기억이 난다. (설사 소장용에 그칠지라도) 그걸 현지 동지들의 부스에서 사면서 연대감을 표시하는 건 덤이고 말이다.


내가 그 책을 보면서 느꼈던 건, 만평에게도 [심지어 언어 장벽을 넘어] 가슴 깊은 곳을 울릴 수 있는 힘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의 작품은 내가 보기에 시대의 정직한 목격자고, 팔레스타인과 아랍 민중의 속시원한 대변자이며, 불굴의 선동가다. 


그런데 이번에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비망록의 [만화] 작가 조 사코의 서문을 달고서 나온 것이다. 추가 해설도 있으니, 배경 설명이나 일부 작품 속 짧은 단어 해석이 아쉬웠던 나로선 반가운 출판이다. 지인들에게도 일독을 권한다. 



※ 팔레스타인 현대사를 글로 다루는 책 중 최근 내가 읽은 것은 9월에 나온《나의 아버지는 자유의 전사였다》(램지 바루드, 산수야, 2012)다. 

생생하면서도 현대사를 개괄할 수 있는 이 책도 신간들 중에선 내 개인 추천도서다. 아랍과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저항에 관해 관심 있는 분이라면 두 책을 함께 봐도 좋을 듯하다. 

《한잘라》의 서문을 쓴 조 사코의 만화들도 모두 좋다. 출간 시기를 더 길게 잡으면 더 많은 좋은 책들이 있는데, 이 글에서는 《인티파다》(책갈피)를 추천한다.






  1. 재앙이란 뜻의 아랍어라고 한다. 그런데 팔레스타인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이 영국 등 서방 제국주의 진영을 등에 업고 팔레스타인 인들을 그 지역에서 쫓아내기 시작한 역사적 사건을 일컫는 고유명사다. [본문으로]
  2. 한잘라는 아랍어로 쓰라림, 고통을 뜻하는 단어라고 한다. [본문으로]
  3. 나지 알 알리의 카툰을 본 PLO 의장 야세르 아라파트가 격노하여 "나지 알 알리가 대체 누구야? 이따위 카툰 그리는 걸 당장 멈추지 않으면 손가락을 산성 용액에 담가준다고 전해!"라고 소리쳤다는 일화가 있다고 한다. [본문으로]
  4. 이스라엘의 소행인지, 아랍 쪽의 소행인지 밝혀진 것이 하나도 없다. [본문으로]
  5. 1987년 12월 가자지구 난민 캠프에서 팔레스타인 청년들이 이스라엘 군인들에게 살해된 것을 계기로 폭발한 팔레스타인 민중 봉기. 제2차 인티파다는 2000년 이스라엘 총리 아리엘 샤론의 도발과 이스라엘 군대의 소년 살해 사건을 계기로 일어났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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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에 짧게 쓴 서평. 선거를 앞두고 생각이 났다.





주제 사마라구의 2부작 소설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었다.

 

시민들의 눈이 멀었을 때, 시민들이 눈을 떴을 때. 정부는 별반 다르지 않다. 자신의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감시와 통제, 거짓 민주주의는 유지된다. 


반면, 자신들 스스로 통제가 안 될 때, 정부마저 눈이 멀었을 때, 또는 사람들이 갑자기 정치적 맹아이기를 거부했을 때, 정부는 순식간에 통제력을 상실하고 무기력한 존재가 된다.

 

바로 이 점, 현대 사회에서 비민주적인 자본가 정부를 다수를 대표하는 민주적인 정부라고 믿게 만드는 거짓 민주주의가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주제 사마라구의 통찰이 이 소설이 지닌 흡인력의 실체다.

 

포르투갈 공산당 출신의 이 노 소설가가 여느 젊은 신진 작가 못지 않은 정치적 상상력을 발휘해 기발한 상황을 연출한 것이다. 


부르주아 법 어디에도 금지 되지 않은 백지투표 제출이 '민주' 정부의 정통성을 뿌리채 흔들 수 있다는 발상은 통쾌하기까지 하다. 우익 정부와 정치인들이 내보이는 인간의 존엄과 생명에 대한 냉소를 특유의 문장 부호 없는 대화로 드러내는 묘사도 날카롭다.

 

주제 사마라구의 이 소설은 인간의 존엄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정치와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임을 또한 보여준다.  


국가 질서나 체제를 넘어서 사회 자체가 붕괴되버린 듯이 보이는 눈먼 자들의 도시의 묘사가 그렇다. 모두의 눈이 멀어 버린 세상에서 '인격'을 유지하며 강인하게 살아남은 이들이 정부의 공작 앞에서 맥 없이 살해되는 것도 그렇다. 

 

저자의 본 뜻이 혁명에 대한 비관주의인지 아니면 그래도 무정부주의 혁명이 대안이라는 건지, 아니면 나의 독해와 일치한 건지는 알 수 없다. 결말의 비관주의를 나는 백지 투표가 상징하는 무정부주의 혁명의 무기력함으로 해석한다.

 

도망가버린 정부의 음모는 성공했을까. 아니면 눈뜬 시민들이 승리했을까. 인간의 존엄과 양식을 보여줬지만 대안 권력을 세우지 못한 눈뜬 자들의 도시가 정말 이 세계의 진실에 눈을 뜬 것인지, 계속 전진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반쯤만 승리한 이 무정부주의적 백지 투표 혁명이, 포위된 눈뜬 자들의 도시가 '거부'와 '우회'만으로 승리할 수 있을지 나는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4년 만에 눈뜬 자들로 채워진 이 도시의 존재 자체에서 낙관적인 혁명의 희망을 발견한다.

 

(2007.8.27.)


이 도시 2부작은 권력과 인간의 본성, 선거, 정치적 무관심이 적극적 저항으로 바뀌는 역설, 자유민주주의의 근본적 취약성 등 다양한 현대 정치 주체를 다루고 있다. 굉장히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저자가 암시하는 건지, 경계하는 건지 나로선 알 길이 없지만 거부와 우회로 상징할 수 있는 정치적 해법의 취약성은 소설 자체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전히 대안과 전략전술의 예술의 몫이 아니라 정치의 몫이다. 그 점을 감안하고 읽는다면, 꽤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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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려 5년 전 네이버 블로그에 썼던 논쟁적 서평인데, 20년대 독일 상황을 검색하다 발견했다. 그람시의 <리용테제>를 참고한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글 전반적으로 지금보다 더 ‘혈기방장’한 티가 난다. 지금이라면 더 차분하고 예의바르며, 좀더 간결하게 썼을 것 같다.   



《패배한 혁명》(크리스 하먼, 풀무질, 2007)의 압박이 크다. 가슴이 답답해 지고, 나는 저 상황에서 그런 재앙적 오류를 피할 수 있었을까 하는 질문에 선뜻 대답하긴 힘들어진다.


전략 전술이란 이런저런 기계적 원리들을 이해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당면 시점의 구체적 세력관계, 무엇보다 지배계급부터 밑바닥 대중까지 사회적(그리고 정치적)으로 표출되는 심리와 정서를 제대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62일 허세욱 열사 49재 집회에서 노동자해방 당 건설 투쟁단(약칭, 당건투)라는 단체에서 발행하는 <현장노동자>라는 신문을 보았다. 뭐 면식 있는 선배도 있고 하는 단체라서 유심히 지켜봐 왔는데, 이번 신문에 실린  《패배한 혁명》  서평은 대실망이었다. 틈만 나면 레닌의 흉내를 내는 사람들이 도대체 레닌의 중요 저작 중에서도 중요 저작인 좌익소아병》은 읽어나 보았는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인 국면에서 어떤 전술, 어떤 정책을 취해야 할 지에 대한 귀중한 분석서인 이 책을 추상적인 혁명정당 당위론 설파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은 아쉬움을 넘어 화가 나게 만드는 일이다


물론, 당건투가 아니라 사회실천연구소 소속의 활동가가 쓴 서평이긴 하지만 자신들이 내세우는 정치 전통에 있는 도서의 서평이라면 그런 수준 낮은 서평을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배포하는 신문에 싣는 것은 자신들의 형편 없는 정치적 수준을 대중 앞에 고백하는 것에 불과하다.(아무리 계급에게 솔직해야 한다지만!!) 그것은 저자에 대한 모독이기도 하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동맹의 섣부른 봉기 시도를 예로 들어보자.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사민당의 그럴듯한 말에 마음을 빼앗긴 “완전히 새로운 노동자층을 정치활동에 끌어들이는”데에도 무능력했다.(108결국 1919년 1월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동맹의 봉기는 사민당 정부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다.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렸으며이에 자신의 힘시간혁명적 열정이 파괴되는 것을 허용했다그 사이에 정부는 국가의 모든 자원을 마음대로 써가며 최종 진압을 준비할 수 있었다.”(132저자는 1월 봉기의 교훈을로자 룩셈부르크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평가한다. “강력한 혁명정당을 가졌다면베를린 노동자계급은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았을 것이다.”(132)


때이른 봉기 이후 국면에서 화해협상의 덫에 걸려들지 않는 것과 봉기 자체가 애초 잘못된 정책이었다는 것은 범주가 다른 문제다. 서평 필자는 후자에 대해 일언반구도 없다. 사민당을 앞세운 덫에 걸려들지 않았다 하더라도 봉기 자체가 섣부른 모험주의 였다는 점이 변하진 않는다. 그것이 설사 50만 당원을 가진 당이었다 해도 마찬가지다.


19191월 스파르타쿠스 봉기의 가장 커다란 교훈은 국민대중 다수의 지지 없이 노동계급이 권력을 쥐려하는 것, 또는 노동계급 다수의 지지 없이 혁명정당이 권력을 쥐려 하는 모험주의에 대한 경계다. 섣부른 봉기는 정부의 반격을 정당화하고, 다수 대중을 사태의 방관자로 전락하게 한다. 결국, 섣부른 봉기의 대가로 실제로는 봉기 정책에 반대했던 로자 룩셈부르크 등 최고의 유능한 지도자들을 잃었다. 운동은 탄압으로 후퇴했다.


섣부른 권력 장악 시도에 대한 경계는 훗날 공동전선으로 정식화된 정책에 대한 강조로 결론나야 정당한 평가가 될 수 있다. 즉 다수를 획득하기 위한 정책(전략전술)로서 개량주의 좌파들과 협력을 통해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노동자 대중들과 접촉할 기회를 얻고 좌파와 노동계급 단결의 욕구를 대변하는 것. 이를 통해 다수 대중들이 구체적이고 생생한 자신들의 실제 경험으로 체제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신들의 지도자를 떠나 극좌파에 대한 지지로 옮아오게 만드는 능력에 대한 강조로 이어져야 옳다.


역사적 기회에서 벌어진 독일공산당의 처참한 실패는 이러한 정책의 중요성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험주의 공세론과 엉뚱한 수세 전략을 좌충우돌한 대가다. 그 대가는 너무 컸다. 반혁명의 승리가 파시즘(독일에선 나치즘)의 승리와 동의어가 됐기 때문이다.


유럽 대륙에서 가장 선진적인 제국 중 하나였던 독일에서 노동자와 병사들이 제국주의 전쟁을 끝장내고 카이저 제정을 무너뜨렸다. 우리는 이런 노동자들이 왜 사민당을 뛰어넘지 못했냐고 묻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자


어제까지 제국주의 강도 전쟁의 총알받이 신세이던 노동자와 병사들이 어제까지 마르크스주의, 사회주의를 내세우고 전시에 불법이 된 좌파 정당의 집권을 지지한 것이 어찌 큰 잘못이겠는가. 문제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들이 뿜어낸 혁명의 열기와 의지를 어떻게 그들 자신의 권력을 수립하는 것으로 나아가게끔 도울 수 있었는가다. 우리가 진정으로 실천적이라면 질문은 이렇게 던져야 한다.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마지막을 이렇게 맺는다.


역사는 우리에게 계급협조 정책을 추구하는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 이런 세력이 존재하고 있다. (중략) 이런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단절한 독립적인 혁명정당의 필요성이다. 자본가 정치세력들의 헤게모니 하에 노동자들을 갖다 바치는 역할을 하는 사민주의 세력! 이들이 외치는 ‘진보진영 단결’이니 ‘진보대연합’이니 하는 구호가 세계노동자운동에 얼마나 큰 질곡으로 작용했는지 ‘패배한 독일혁명’은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 역사는 우리에게 사민당-개량주의정당의 지도자들을 믿지 말라고 가르친다. 문제는 압도 다수의 대중들이 아직 이런 가르침을 자신의 신념과 행동지침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안 돼 있다는 거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저항을 극한까지 밀어붙이고자 하는 사람들은 인내심을 가지고 당면 시점에서 적절한 행동을 촉구하며 끈질기게 사람들을 설득하는 기예를 배워 익혀야 한다.


아직 변혁운동가들의 대의를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은 대중들과 대화하는 법을 익혀야 하고, 이들을 자기의식적인 배신적 지도자들과 구분할 줄도 알아야 한다. 필요할 땐 개량주의자들을 지지하고, 먼저 협력을 제안할 줄도 알아야 한다. 따라서 필요한 건 단순한 인내심이 아니라 정확히 표현하자면 그것은 '주도면밀한 집요함'이다.


저자가 강조한 '혁명정당'이란 바로 이런 실천과 정책의 주체이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이런 실천 속에서 자신들을 단련하고 대중을 획득해 가는 수단이다. 따라서 실제로는 '혁명정당'이 대중을 획득하기 위한 정책을 거부하는 결론을 내리면서, '혁명정당'의 존재와 대중 장악력을 교훈으로 내세우는, <현장노동자>의 서평은 관념론(역사적 추상주의 또는 추상적 선전주의)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1923"독일의 '10'"이 왔을 때, 독일 공산당은 그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외부적으로는 초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노동계급 생활의 파탄과 내부적으로는 지노비에프 등 일부 코민테른 지도자들의 엉성한 지도를 교정한 레닌과 트로츠키의 노력으로 다시금 50만 당원의 정당으로 되살아 난 상태였다. 그러나, 그 해 유례없는 위기와 행동이 있었고, 억압 기구로서 국가가 완전히 마비됐지만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손상되지 않은 채 살아남았다. 그리하여 혁명의 기회는 유실되고 히틀러의 전진이 시작됐다.


따라서, 격변의 시기에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구체적으로 행동지침을 결정하는 데, '혁명정당의 존재' 그 자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저항의 성공 여부는 수년 간의 단련과 경험을 통해 쌓은 대중적 신뢰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자신의 정치적 판단력/실행력, 전국적 행동을 조율하고, 이견들을 하나로 모아낼 수 있는 조직 구조를 형성해 놓았느냐라는 전제 위에서 '구체적으로 직면한 상황에 걸맞는 올바른 행동방침을 내놓을 수 있는 판단력과 실행력을 발휘하고 이를 대중 행동에 관철할 수 있느냐'까지 모두 검토돼야 한다.


여기에 우연적 요인들까지 감안한다면 그 판단과 실행의 기민함에 더해 상황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통찰력있는 지도자들을 충분히 보유하고 있느냐, 유연한 행동 보폭을 조직 구조가 감당할 수 있느냐는 문제까지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이것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일상적 시기부터 실천을 통해 스스로 검증하고 대중에게 검증받으면서 오류와 실수를 교정해 가며 쌓아야 하는 것이다. 그조차도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에 다시 한번 최종적 시험대에 올라야 하는 것으로 과거가 미래를 완전히 담보할 수 없는 미결정의 영역을 남겨 놓는다.


따라서, <현장노동자>의 서평처럼 추상적이며 종파적인 결론을 내리는 것은 <패배한 혁명>에 대한 완전한 곡해다 《패배한 혁명》 은 당과 운동의 관계에 대한 변증법적 실천과 판단에 대한 중요한 분석서이자 보고서이다. 우리가 뼛 속 깊이 새겨야 할 또는 절대 반복해서는 안 될 쓰라린 그러나 유익한 교훈들로 가득찬 이 책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일상적 냉소와 무기력에서 일순간에 행동으로 도약하는 대중들은 낡은 사회의 때를 한순간에 털어낼 수 없다. 이들은 평상시 가지고 있던 계급내 의식과 경험 수준의 불균형, 모순된 편견 등을 가지고 행동에 돌입한다. 그리고 뒤늦게 행동에 참여한 후진 부위는 대체로 이 낡은 때가 더 많지만 그래서 행동에서 더 성급할 수도 있다.


따라서 적절한 슬로건과 실제 적절한 행동지침을 제시하고 온갖 곳에서 이런 행동을 구체적으로 조직하고 각각의 행동들을 연결시킬 수 있어야 한다. 당시 독일에서는 그럼으로써 선진부위와 독일 공산당은 밀착됐을 것이고, 선진부위는 후진부위에 대한 주도력을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격변의 시기에 대중들은 매우 빨리 정치의 속성을 이해하고 적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 자신의 경험"이다.


저자와 <좌익소아병>에서 레닌이 거듭 강조하듯이, 대중의 기대 심리와 환상을 반영한 이런 비판적 지지(협력)과 공동전선 정책은 개량주의 지도자들 자신을 시험대에 오르게 만든다. 필요한 공동행동을 거부한다면 그들 스스로 노동계급의 단결보다 부르주아 정당과 협상을 중요시한다는 것이고, 공동투쟁 계획에 동의한다면 더 많은 대중이 실천에 나서게 되고, 그 대가로 더 많은 접촉면을 통해 신생 공산당과 교류하게 됐을 것이다.


<현장노동자>의 서평 필자는 '진보진영 단결''진보대연합'을 체제를 위해 대중을 속이는 개량주의자들의 기만 행위라 부르고 있다 《패배한 혁명》 에서 독일 공산당이 붕괴한 사민당 정부에 대항해 독립사민당 좌파 정부를 지지하면서 합법 야당으로 활동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을 때, 레닌과 트로츠키, 그리고 책의 저자 크리스 하먼은 적절한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는 구절을 서평의 필자가 읽었는지 궁금하다.


민주노동당을 [아직은 거리감 있는] 급진좌파로 여기는 수백만의 대중들이 사이비 개혁정부와 그 당에서 이탈하고 있다. 다수는 상대적으로 더 진보적인 세력의 집권을 바란다.


그들에게 수동적이나마 정치적 표현체를 제공하고, 지배계급이 위기를 봉합하기 전에 판을 흔들어 정치 위기를 가속화시키는 것, FTA 반대 운동 등에 기초한 진보연합으로 진보 후보를 유력한 후보로 만드는 것, 이를 통해 진보개혁 정부의 집권을 경험하게 하는 것, 그것은 다음 단계의 진전을 위해 매우 유용한 전술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더 급진적인 정부로 향하는 도정일 수도 있고, 대중 자신이 기대감에 바탕한 대중행동에 나서게 하는 촉매가 될 수도 있다. 그 과정은 쓰라린 급진적 각성의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독일에서 1919년에 혁명가들의 경고를 무시하고 사민당 정부를 지지했던 대중들이 반혁명에 직면해서 그리고 반혁명을 제압하는 데 진지하지 않은 (자신들이 지지했던) 사민당 정부를 지켜 보면서 더 급진적인 정부를 요구하며 일부 지역은 스스로 권력으로 나아가면서 전진했던 경험을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혁명정당이니 나를 따르라’라는 선험적 자기 선언이 아니라 ‘혁명정당이 수행해야 할 임무’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실천이다(2007.6.9)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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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론 조정래 작가의 아리랑이 단연 한국문학의 최고봉에 서 있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치밀한 조사에 바탕한 생생한 사실성과 역사성, 그리고 각자의 개연성이 잘 살아있는 인물들, 유려한 문장 등.

지난해 늦가을에 읽은《허수아비춤》은 그런 웅장함은 없지만, 상상력 뛰어난 사람이라면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 같은 책을 읽고 한번쯤은 머리 속에 그려 봤음직한 저들의 세계와 사고 방식을 개연성 있게 그려낸 수작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전형적인 인물들은 잘 묘사됐는데, 주인공 격인 인물들은 상대적으로 전형적인 면에서도 입체적인 면에서도 조금 부족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보다 먼저 읽은 이들 일부가 계몽적이라 불편했다는 말도 하던데, 읽어 보니 그리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만큼 노작가가 기업권력이 정치권력과 언론의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이 날로 두르러져 보이는 현실에 강력한 반감을 느끼고 있다는 방증인 것으로 보이는데,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회적 발언을 하는 게 그리 나빠 보이진 않았습니다. 누군가 해야 할 말이었으니까요.


오히려 이런 대작가가 현실의 기업권력의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고 자본주의의 속물 논리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말자고 호소하는 것은 요즘 같은 현실에 비춰 볼 때 큰 울림이 있습니다.

이 소설의 가장 큰 장점은 저쪽 세계의 추악함이 아니라 그 과정에서 그들의 사고방식을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는 것입니다. 정몽구와 이건희를 짬뽕해 놓은 듯한 ‘회장’의 일거수일투족과 말투는 잘 표준화된 한국 대자본가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현실의 강한 힘에 타협하는 게 마치 현실적이고 지혜로운 행동처럼 비춰지는 세상에서 인간으로서 자존감을 갖고 시스템에 맞서자는 소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도 기쁜 일입니다.

한편, 선뜻 공감이 가지 않았던 것은 기업 권력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약한 이유를 대중 일반의 속물적 ‘욕망’ 탓으로 돌리는 게 과연 올바를까 하는 점입니다.(이 점은  굿바이 삼성 필자들의 상황 인식과도 비슷한 듯합니다)

(더 긴 논의는 다음으로 미루고[각주:1]) 짧게 결론만 말하면, 화살은 대중의 ‘욕망’이 아니라 그 반대편을 향해야 합니다.

체제가 실제로 돌아가는데 필수적인 노동을 제공하는 대중들이 엄청난 불평등 때문에 부당하게 결핍된 욕구를 욕망하는 것이 큰 문제일까요? 대중의 욕망을 문제 삼는 것은 또다른 억압적 권력을 불러 오는 것이 아닐까요?

저는 대중의 기본 욕구마저 제대로 충족해 주지 못하는 무능하고 불평등한 이 사회의 시스템과 그 운영자들이야말로 죄값을 치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대중은 속물적 욕망으로 기업 권력의 충실한 하위 파트너나 암묵적 동조자가 된 게 아니라 억압적 현실과 불평등 때문에 욕구를 실현할 방법을 찾지 못해 소외돼 냉소에 빠져 개인적 탈출구에 허망하게 기대는 상태에 있는 걸로 봐야 하는 거 아니냐는 거죠.

또 대중의 욕구는 스스로 억제해야만 하는 것이냐는 겁니다. 저들의 논리가 단지 전도된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관점의 차이에서 작가는 욕망을 절제하는 선한 엘리트들의 계몽적 활동에 기대를 걸게 되는 반면, 저는  현대차 비정규직 노동자들처럼 정당한 필요(욕구)를 요구하는 집단행동에 기대를 걸게 되는 것 같습니다.

결론은 여러 가지를 깊게 생각해 볼 수 있게 하는 대작가의 소설을 읽어 보는 것은 좋은 지적 경험이 될 것이라는 겁니다.


  1. 애초에는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주제로 나온 굿바이삼성과 허수아비춤을 묶어 글을 써 보려 했으나 여태 미뤄졌네요. 이것도 삼성의 음모일까요??? ㅋ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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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긋지긋한 자본주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좀더 능동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 보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난 폐허 위에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가. 아니, 만들 수 있는가?

대안 사회 논의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창조적 에너지의 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비루함이 오래될수록 우리 안의 독이 된다. 

대안 사회는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바로 그 탐욕의 철로 끝에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서 대안 사회의 가능성과 대안 사회의 원리들을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담지하는 집단인 노동자계급의 존재가 계급사회 발생 이후로 최초로 사회주의[각주:1]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최초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만한 부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비도덕성과 비민주성, 불평등이 만연했지만 말이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빈곤은 사회의 부(총생산)가 인구와 비교해 적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부가 오직 개별 경제주체들(기업과 개인 등)의 소비 능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해 자본주의 핵심 생산단위인 기업은 이제 소수 개인들 소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등장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의 개인 소유 원리를 부정하는 현상이다.

이런 경제 조건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전 다른 모든 피착취 계급과 달리 집단적 생산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시설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들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생산수단을 각자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길이다. 농민을 되찾은 토지를 나눠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눠 가질 순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은 이론상 사회의 [필요에 따른] 총수요와 아무 관계 없이 생산되며, 그 생산과 수요의 적절한 비율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된다. 이 경쟁적(=시장쟁탈적) 생산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의 경향을 낳는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분리에 바탕했기 때문인데, 하나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자의 분리이고, 하나는 생산이 경쟁하는 자본들로 분리돼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임노동-자본의 관계를 낳고, 후자는 무계획적 시장 경쟁을 낳는다.

그 점에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은 유용한 시도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생산과 소비의 계획 등 미래 청사진의 구체적 형상을 현재 자본주의 방식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는 평등과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등의 가치를 제시한다. 임노동-자본 관계가 낳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려고 사람들의 노동이 세심하게 고려된 균형적 직군으로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잘 팔릴 상품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모순을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생산계획과 소비계획이 경제 전체의 윤곽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잘 짜여진 그의 파레콘(참여경제) 계획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선 내게는 전반적인 계획에서 앨버트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꼼꼼하게 그의 저작을 살펴볼수록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계획경제 구상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식 관료지령경제로 귀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한 챕터를 할애해 중장집권계획경제를 비판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 조정자계급을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계급 체제를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물론이고 스탈린과 대척점에 섰던 트로츠키마저 그 전략과 전략 주체인 당이 스스로 조정자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중앙집권계획경제=스탈린주의=관료적계급체제=조정자계급지배경제인 셈이다.

문제는 계획경제라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가 그의 파레콘 계획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생산계획을 짜고, 지역의 소비자평의회가 소비계획을 짜서 반복 조절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평의회의 기초 단위는 개별 공장과 카운티(한국으로 치면 군 단위라고 함)라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가까운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중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이 점에서 드바인의 ‘협상조절모델’이 더 효과적이라고 평한다.

나도 캘리니코스의 견해에 동조하는데,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 취합해 가는 계획도 필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배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선, 사회 전체의 부가 흘러 넘친다 해도 자연적 총량은 한계가 있다. 생산과 소비에 관한 계획이 각 자율적 단위의 계획들을 취합하고 사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만으로는 지속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생산과 소비 수요의 충돌 문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남반구 국가들의 농업 문제(식량 위기)
는 지금의 식량 소비 구조를 바꿔야 하는 압력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비 계획을 자율적 단위들에게만 맡겨 두고 캠페인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각주:2].

게다가 특정 사안들은 사회 전체 차원의 결정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을 한다고 하면, 기존의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각주:3] 발전(전력 공급)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할지 아니면(수요를 당분간 억제해야 한다), 기존 수요를 고정한 채 자연력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과정부터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 단위들의 사후적 조절 메카니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모든 경제 단위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앨버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인 중앙 계획을 따라서 권위를 지닌 중앙 계획 기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각 촉진위원회는 순전히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데서 기술적 구실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무엇인가’로 대체하려는 핵심적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부정적 본질 가운데 핵심이 ‘무계획성’이다[각주:4]

그 점에서 앨버트가 단위 공장과 군 단위를 기초 평의회 단위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작동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군 단위의 노동자/소비자평의회가 서로 계획들을 내놓고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사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계획이 시장경제의 작동방식과 닮아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뜻이다. 협력적이란 뜻에서 사회적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에서 총생산(=총소비) 단위의 배분 계획과 그 계획을 수립할 민주적 기구와 작동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파레콘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중앙 차원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식 가짜 계획경제=관료적 지령경제와 다른 민주적이고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계획 메카니즘을 구성해야 한다. 

각 지역과 작업장의 민중의회들과 평의회들이 보낸 대표들로 구성되고, 이들에게서 수렴된 의사들을 집행할 대표기구이자 하급 평의회들에게 사회 전체의 필요와 조건을 판단해 결정한 계획을 지시하고 집행할 민주적 중앙계획기구가 필수적이다. 

내가 볼 땐, 파레콘의 자율적 단위들을 유지하면서도 위계적이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체계가 가능해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민주성과 효율성 면에서 우월한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적 계획경제론이 자본주의에 대해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쟁점은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비계획적인) 스탈린 식 지령경제와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특권도 없고,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이행기 단계의 국가를 전망했다. 이것은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목표다. 마르크스는 이 원리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배웠고, 역사는 20세기 동안 줄곧 이 목표가 현실화한 사례들을 남겨줬다. 

이 평의회 국가는 과거의 흔적 위에서 과거를 일소하면서 사회 전반의 계획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 세대의 상상력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 국가야말로 국가와 정치를 계급 지배 도구와 권력 투쟁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바꿔 놓는 구실을 하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관료제를 막으려는 계획기구 요원들의 추첨제도 이런 사회 단계에서는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우리도 공유하는 정당한 혐오) 때문에 이 과정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앨버트의 파레콘은 어떻게 이 참여경제가 현실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현실에 안착해서 작동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사회 구상인 민주적 참여계획경제는 기존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이행기 국가 단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자본의 최후 방어막인 국가기구를 타도할 집중적 행동 전략을 제시한다. 이 전략의 핵심 주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목표인 이윤 생산을 생산 과정에서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억압 대중들은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사고와 실천을 혁신할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행동은 그 체제에 물든 주체들을 혁신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전략적 투쟁의 힘만이 자본가들을 권력의 원천에서 무력화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해야 한다는걸 뜻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가 해소되는 순간, 앨버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동자국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저자: 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북로드
출판년도: 2003년

출판사 서평: http://www.yes24.com/24/goods/392270?scode=032&srank=1

<레프트21>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1102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책갈피

출판년도: 2009년

출판사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6839




  1. 마르크스 이전에도 사회주의라 부를만 한 사상과 운동은 존재했고,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칼 드레이퍼, 다함께, 2003) 참조 바람. [본문으로]
  2. 소농 중심의 지역 자급 농업을 중심에 둘 지, 집단 농장 형태를 중심에 둘 지도 고민거리다. [본문으로]
  3. 핵에너지도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 중단도 시급한 과제다. [본문으로]
  4.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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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만에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그 충격으로 진보정당이 분열한 2008년, 촛불항쟁과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터졌다. 이 대사건들은 진보진영이 이념과 대안, 가치와 세력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요구했다.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우며 창당한 진보신당도 이 과제에 더 몰두했다. 그 중간 평가가 내로라하는 진보 명사들의 대담과 글로 출판됐다.《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가 그것이다.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는 홍세화·진중권·변영주·김어준·우석훈 등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이하 존칭 생략)와 진보의 미래를 놓고 대담한 기록이다.

노무현의 유고 《진보의 미래》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기획한 《리얼진보》는 김대중·노무현의 진보는 가짜라며, ‘진짜 진보’의 모습을 제시하려 한다. 강수돌·김상봉·정태인 등 지식인과 노회찬·장석준 등 진보신당 논객들의 글을 망라했다.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운 진보신당은 촛불항쟁에선 수천여 명이 가입했고, 생태를 중요한 의제로 부각하는 등으로 진보의 의제와 외연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정치의식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으면서 민주당에 실망한 층을 목표대로 잘 수습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창당 2년이 지난 지금, ‘진보의 재구성’의 성과를 다시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새로운 층의 유입과 진보 좌파적 지향이 제대로 갈마들지 못해 좌충우돌의 진원지가 된다는 평가도 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반MB 단일화 압력이 커지면 (민주당과 급진좌파 사이에서) 모호한 진보신당의 입지는 스스로 찬 족쇄가 될 수 있다.

《진보의 재탄생》 대담자들은 대중과 만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김어준과 변영주는 세련되고 개방적인 진보로 변화할 것을, 홍세화는 “민중의 집” 같은 “일상의 정치”를 강화하자고 제안한다.

진중권은한국경제 자체를 한 단계 도약시킬 대안”을 요구한다.

《리얼진보》의 필자들은 상대적으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을 강조한다.
 

“진보와 개혁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김상봉, 《리얼진보》)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는 2008년 위기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가 파산했으므로, “긴 호흡”으로 과제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장석준은 “이윤 확보의 자유”에 “의문”을 던지자고 하고,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자본주의 극복 의지”를 강조한다. 한재각은 “환경·생태 분야를 다루면서 끊임없이 사회적 평등 같은 주제와 연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자유주의 정치와 선 긋기를 강조한다. “시민의 이익과 충돌하는 기업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도 “노동계를 통제하고 배제하는 것에서도 [노무현과 이명박] 두 정권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이런 의견을 대체로 조합해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 전략’을 포함한 “서민중심형 복지동맹”(《리얼진보》)을 만들자고 한다. 이것이 “반MB 대안연대”다.

이를 위해선 “한나라당-민주당 체제를 극복”해야 하며, “보수와 진보의 양대 축으로 가려면 민주당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진보의 재탄생》)

진보와 개혁의 근본적 선 긋기를 강조하는 것은 반갑다. 얼핏 보아 급진적인 이런 ‘진보의 재구성’론이 결정적으로 장벽에 부딪히는 곳은 다름 아닌 “(행위) 주체” 문제다.

상상연구소 명의 글은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상상연구소를 포함한 여러 필자들은 현재 조직 노동자운동을 불신한다.

이런 불신이 생긴 건 “복지를 통한 증세는 정규직 노동자 또한 …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데] … 민주노총은 이를 정면으로 반대”(김정진, 《리얼진보》) 하기 때문이다.

행위 주체

오건호의 말처럼, 조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복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자신의 요구를 집중하는 선도적 실천”(《리얼진보》)이라면, 이들이 말하는 노동운동의 ‘재구성’은 노동계급에게 계급투쟁 대신 ‘계급 양보’를 요구하는 셈이다.

“사회연대전략”은 더 열악한 집단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조직 노동자들의 양보라고 주장한다. 대기업과 친기업 정부에겐 직설적으로 요구하길 회피하는 것이다. 장석준의 “이상주의”도 이런 양보론의 냄새를 풍긴다.

여기서 이들이 노동운동 안에서 새 “주체”를 쉽게 못 찾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직된 행위주체인 노동운동을 불신하는 탓이다. 

그 뿌리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게 문제 아닐까. 사실이라면 진보신당의 명망가·선거 중심 활동은 진보신당 2년 평가에서 중요한 덕목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회찬도 이렇게 털어놓는다.

“지금은 [진보정당 안에서도] 목표가 … 자신이 국회의원 한번 되는 게 거의 전부인 경우도 있고 … 집권하면 세상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느냐, 거기에 대한 확신도 없는 거예요.”(《진보의 재탄생》)

노회찬은 홍세화와 한 대담에서 “진보신당의 좌표, 공식적인 노선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경향에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진보의 재탄생》) 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치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우려면, “좋은 진보정당”(노회찬) 만으론 부족하다.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 자본과 벌이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주의 가치가 정치에 반영될 것 아닌가.

그러려면, 조직 노동자들이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 선도적 실천”을 해야 한다.


두 책이 강조하는 ‘진보의 재구성’에선 바로 이것이 빠져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가며 환경 의제와 조직 노동운동의 만남 가능성을 중시한 한재각(
《리얼진보》)을 예외로 하면 말이다. 

시장의 민주적 통제?

그래서 비록 이 책들이 진보신당 2년을 솔직하게 돌아본다는 장점이 있고, 다른 보수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내는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그 아쉬움의 실체는 여전히 진보와 중도개혁 사이에 존재하는 실천적 차이점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행위 주체(노동계급)의 문제는 대안(자본주의 극복)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때에도 이를 산업조직과 연결시키지 못”했고, 이는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동력을 통해서 일자리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전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진중권, 
《진보의 재탄생》 )은 다소 당황스럽다.

좌파가 자유주의 우파에게
성장전략”이 없다고 비판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밥 먹여 주는 진보'의 재구성일까.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하는 걸 꺼리니 자본주의를 [자체든 그 폐혜든] 극복하려는 전략도 모호해 지는 것이다.

노회찬은 홍기빈과 대담에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말하면서도 반(反)시장, 반(反)기업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장을 최소화하는 과거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다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진보의 재탄생》)

물론 노회찬이 과거의 사회주의라 부른 것들, 옛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실패하고 검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홍기빈이 대담에서 지적하듯이 온건한 시장 규제 정책으론 자본주의의 횡포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집권 경험으로 이미 검증됐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공개적으로 짓밟는 기업이 한 나라의 최고 기업(기업인)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진보] 정부가 주류 엘리트들에게서 반(反)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진보적 사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선 진보신당의 강령 전문(前文)이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보는 듯하다.

자본은 암세포가 숙주를 파괴하고 자기도 소멸하듯 총체적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오직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인류가 이 문제를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개척 또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과 죽음밖에 없다.”(진보신당 강령 전문 2, 강조는 기자의 것)

 
세계자본주의 핵심부에서 시작한 경제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좌파의 재구성은 자본주의의 우선 순위에 도전할 대안과 전략, 세력을 구성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려면,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려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려고 그 현실의 조건을 직시하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에서 때론 급진적이기도 한 문제의식이 대안과 행위 주체에서 부딪히는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후자의 '현실주의'를 회피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서평은 <레프트21> 29호에 실린 기사(아래 링크)에 추가로 내용을 덧붙인 글입니다.

[서평:《진보의 재탄생》, 《리얼진보》]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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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476쪽, 2만2천 원)/《삼성반도체와 백혈병》(삶이 보이는 창, 160쪽, 7천 원)[각주:1]

관련 글 보기 

삼성그룹 웹사이트에서 경영이념을 찾아보면 “인재․기술, 인류공헌”이 큼지막하게 새겨져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책(《삼성을 생각한다》, 사회평론, 476쪽, 2만2천 원)을 보고 나면 이 슬로건이 이렇게 보인다. “이건희에게 충성할 ‘인재’를 돈으로 관리하는 ‘기술’에서 ‘일류’로 ‘공헌’한 집단들”.
 

요즘 인기를 끄는 “일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행어도 옛 삼성 광고에서 따온 것이다. 삼성이 1등주의를 표방하며 만든 광고 카피가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였다. “반도체와 휴대폰에서 남은 이익을 한 2조 원쯤 … 돌려서 우리나라 전 가정에 삼성 냉장고와 에어컨을 공짜로 줘서 LG를 망하도록 하라”는 이건희의 “황당한 지시”가 이 1등주의의 사례가 되겠다.

그러나 김용철 변호사는 결국 삼성이 일등 기업․일등 권력이 된 것은 ‘일등 비자금 관리 기술’ 때문이라고 말한다. 김 변호사는 이 책에서 삼성의 ‘일등 비자금 관리 기술’이 어떻게 정치 권력․재벌․언론 사이에 단단한 부패 사슬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비자금 관리의 핵심 부서에서 일했던 전직 수사 검사 출신의 내부 고발은 생생하기 그지없다.

김 변호사가 삼성에 입사할 때 실세 부서는 그룹 비서실이었다. 이 비서실이 IMF 때는 구조조정본부로, 지금은 전략기획실로 이름을 바꿔왔다. 이 부서는 그룹 안에서 “실”로 불린다.

이 “실”에서도 재무팀을 맡은 이학수[각주:2]와 김인주가 실세다. 이들이 삼성의 경영권 승계 작업과 비자금 관리를 담당해서다.

“[삼성에버랜드 사건 판사에게] 한 30억 원 줄까”(이학수) “몇 천만 원 주는 걸 무얼 그리 겁내느냐”(김인주) “[삼성 본관에 압수수색이 들어오면] (칼로) 찌르고 도망가죠” 등 법과 상식을 초월해 “불법적인 행태를 저지른 게 이들에게는 자랑거리였다.”

삼성의 모든 계열사가 이 “실”의 재무팀 관재파트로 비자금을 만들어 보낸다. 심지어 “부실 규모가 1조 원인 회사”도 “실”의 종용으로 매년 50억 원씩 비자금을 만들어 보낸다. 이 돈을 “관계사”에서 넘겨 받아 삼성 태평로 옛 본관 27층 비밀금고로 실어 나르는 서울대 경영학과 출신의 관재파트 젊은 과장들이 “미래의 사장감”들이다.

 

삼성 장학생

비자금은 두 용도로 쓰인다. 하나는 경영권 승계 작업이고, 하나는 삼성 장학생 관리다.

김 변호사의 2007년 폭로로 진행된 특검에서 밝혀진 차명계좌 비자금만 4조 5천억 원이었다. 이 돈은 삼성생명 등에 투자돼 이건희 일가의 삼성 지배를 공고히 하는 데 쓰여졌다. 장학생 관리는 이 과정에서 힘을 발휘했다.

삼성 에버랜드 편법 증여 사건의 재판부를 평소에 “삼성은 무죄다”고 공개 발언해 온 민병훈에게 편법 배당한 서울지법 법원장은 촛불 재판 고의 배당으로 악명을 떨친 신영철이었다. 이 재판에서 삼성의 변호인이 지금 대법원장 이용훈이다. 한편, 삼성이 줄기차게 지지한 한미FTA 협상을 이끈 김현종은 지난해 삼성전자 법무팀 사장이 됐다.

이런 전방위 관리로 애초 김 변호사의 내부 고발은 불발될 뻔 했다. 유력 언론과 시민단체가 모두 외면한 것이다. 김 변호사는 2007년 10월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찾아갔다. 당시 사제단조차 상대가 삼성이라 위험 부담에 내부 논란이 컸다고 한다. 실제로 첫 기자회견 후 신부들에게도 삼성이 접근했다.(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프레시안북)

그러나 김 변호사와 사제단의 용기 있는 고발은 반향을 얻었다. 비판 여론이 들끓고 대선후보인 권영길․정동영․문국현 등이 요구해 삼성 특검이 시작됐다.

그러나 특검 결과는 이건희에게 면죄부를 주었다. 차명 비자금 4조 5천억 원을 이병철의 상속 유산이라고 판정해 오히려 “도둑에게 장물을 준 특검”이 됐다. 회사 돈으로 마련한 비자금이 합법적인 이건희 개인 재산이 된 것이다. 

당시 청와대는 김 변호사에게 “정권을 물어뜯지 않을” 특별검사 추천을 부탁했다고 한다. 권력자 누구도 물어뜯지 않은 특검은 김 변호사를 물어 뜯었다. 김 변호사가 ≪삼성을 생각한다≫를 쓴 첫째 동기다.

 

무노조 경영

김 변호사는 책에서 ‘공공연한 비밀’도 사실로 확인해 준다. 그 첫째가 삼성이 1999년 부도 위기였다는 사실이다. 자체 검사 결과, “자본 잠식 50조 원”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구조본으로 불리던 “실”이 계열사 전체를 분식회계해서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제 장부상 지출을 맞추려면 어디선가 돈을 줄여야 했다. 삼성 노동자 6만여 명이 쫓겨났다.

2003년 삼성SDI 노조 설립을 추진하던 노동자들의 핸드폰 위치 추적 사실을 2004년 MBC <시사매거진>이 폭로했다. 이 일로 삼성을 고소했던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은 도리어 명예훼손으로 구속됐다. 그러나 삼성 구조본에서 인사팀장을 지낸 노인식은 김 변호사에게 삼성SDI 노동자 불법 도청 사실을 시인했다.

김 변호사는 삼성을 먹여 살리는 노동자들과 “반도체 기술자”보다 “비자금 기술자”들이 더 대접받는 게 삼성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김 변호사는 삼성 입사 후 임원 교육에서 본 삼성전자 수원공장의 가전부문 조립라인을 이렇게 회고한다.

“컨베이어 벨트에 예속돼 두 시간에 10분씩 휴식하면서 꼼짝 없이 일하는 모습을 봤는데 혹시 배탈이 나더라도 화장실에 갈 수 없는 정도였다.”,  같은 직장에서 본사 직원이나 관리직은 쾌적한 공간에서 대접도 받고 권세도 부리는데, 생산 현장에서는 해마다 생산성 향상 30% 구호 아래 경비를 줄이기 위하여 마른 수건을 쥐어짜듯 내핍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 모습에서 삼성전자 기흥공장이 떠오른다. “한국을 먹여 살린다”는 바로 그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젊은 노동자들이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2007년까지 10년 사이에 확인된 사망자만 7명이다. 온양공장에서도 백혈병 환자가 4명이나 된다.

삼성은 산재를 인정하라는 이들을 회유하고 협박하다 끝내 외면했다. 노동부, 근로복지공단과 산업안전관리공단 모두 한통속이었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홍희덕 의원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발암물질인 벤젠이 검출됐다는 서울대 산학협력단 조사 결과를 공개한 바 있다. 벤젠은 반도체공장에서 백혈병과 암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자신들을 “삼성이 버린 또 하나의 가족”이라고 부른다. 노동․시민단체들과 ‘반올림’이란 단체를 만들어 진실을 알리던 이들도 최근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삶이 보이는 창, 160쪽, 7천 원)을 냈다.

 

베스트셀러

 

이 두 권의 책은 1등 기업 삼성, 더 나아가 삼성공화국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 재판을 본 아이들이 ‘정의가 이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게 정의’라는 생각을 하게 될까봐 두렵다. 그래서 이 책을 썼다.”고 둘째 동기를 밝힌다.

어떤 이들은 김 변호사의 걱정대로 절망하고 두려워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결코 절망의 보고서가 아니다. 이런 책들 자체가 악명 높은 “관리 삼성”에서도 내부자들의 용기있는 고발이 존재한다는 점을 웅변한다.

삼성도 경제 위기에 전전긍긍대는 기업이고, 자신들의 불법을 감추려 노심초사하며 막대한 비자금을 뿌려야 한다. 1997년과 2002년엔 삼성이 민 이회창이 연거푸 낙선했다.

김 변호사는 “노조 설립을 막기 위해 온갖 불법행위를 저지르면서 삼성이 치른 비용도 만만치 않다. 노동조합 때문에 생기는 비용보다, 노동조합 설립을 막기 위해 치르는 비용이 더 크다는 말이 나올 정도”라고 밝힌다.

김 변호사는 주류 집단에게 반(反)삼성은 곧 반(反)기업이라고 지적한다. “우리 사회에서 삼성은 특정 기업 이름이기만 한 게 아니다”.

김용철 변호사의 용기가 메아리를 얻는 게 그래서 더 반갑다. 그의 책은 주요 언론들의 광고 거부에도 주요 인터넷서점에서 판매순위 1~2위를 다투고 있다. 이병철 찬양 책들을 제치고 말이다.(2010.2.9)

 

 

  1. 2월 9일 날 쓴 서평인데, 좀 늦게 올린다. [본문으로]
  2. 이학수는 이명박이 ‘공정한 사회’를 말하기 시작한 8월, 8·15 특사로 풀려 나왔다. 이학수는 곧바로 삼성으로 복귀했다. (2010.9.17)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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련 기사: 삼성공화국의 실체를 용기있게 고발하다 / 삼성 눈치 보며 비판 입 다문 <경향신문> 
관련 글: 삼성을 생각한다》삼성반도체와 백혈병》를 읽고


삼성을 생각한다》를 인터넷교보에서 바로드림 서비스로 주문하려는데, 광화문점에서 대기일이 6일이 나오더군요. 1시간 후가 아니라 6일 후라니... 떠도는 말처럼 혹시나 삼성이 싹쓸이를 하는 건가 의심도 했습니다.

예전에도 이씨춘추》나 나는 삼성왕국 무노조 경영철학의 희생자였다》 같은 책들이 충분히 회자되기도 전에 서점 판매대에서 사라진 적이 있었습니다. 10년 전에 ≪이씨춘추≫가 우연히 손에 들어와 봤는데, 이건희를 마약 중독으로 묘사한 게 기억나네요. 나머진 비실명이라 흥미 반감이었습니다.

김용철 변호사는 삼성을 생각한다》에서 이건희 마약 중독 소문은 과장된 것이라 말합니다. 다만,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 사실처럼 여겨진 건 일반인과 구별돼 살고자 하는 주류집단의 ‘귀족주의’, ‘신비주의’ 때문이라고 지적합니다. 이건희 흉 볼 게 하나 줄었다고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책을 보면 넘치거든요. 

김용철 변호사의 이 책은 용기가 넘칩니다. 그래서 삼성 소유주 일가뿐만 아니라 한국의 "주류집단" 전체를 불편하게 할 내용이 가득합니다. 그 결과 매우 흥미진진하고 재밌는 책이 됐습니다. 이건희 일가의 저택들이 모여 있는 동네 입구에 그들이 미술관을 세운 이유는? 미술관 경비를 핑계로 그 동네 출입 자체를 막고 경비하는 것이랍니다. 전 탈세 목적의 미술품 보관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이 책은 2007년 10월 후 특검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시작합니다. 1부가 최근 삼성 에버랜드 재판까지, 2부는 김 변호사의 삼성 입사부터 퇴사까지, 3부는 김 변호사는 대검에서 수사 검사로 재직하던 시절입니다. 각 파트는 시간대 별이지만, 책 전체로 보면 과거로 거슬러 갑니다. 마지막 결론은 PD수첩 등 다시 현재 얘기로 돌아옵니다. 

마치 영화 <박하사탕>의 구성을 연상시키는데요, 김 변호사 자신이 삼성 비자금 관리와 로비 업무에 몸 담았던 만큼 이런 구성도 책읽는 재미를 늘려준 듯합니다. 

애초에 이번 서평은 삼성을 생각한다》와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그리고 <레디앙>에 보도된 삼성공화국 관련 미발표 논문을 묶어 보려했는데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서평에서도 지면 사정상 삼성반도체와 백혈병》을 더 다루지 못한 건 조금 아쉽네요.

삼성반도체와 백혈병》는 활동 백서 성격이라 삼성을 생각한다》 만큼 판매순위가 높진 않지만, 김 변호사 책 판매를 보면 삼성반도체의 유족들과 투병 직원들을 응원해 줄 잠재적 독자는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책에서 삼성과 노동부·근로복지공단·산업안전관리공단 모두 이들을 외면하지만, 최근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벤젠이 사용됐다는 증거가 나오는 등 이곳에도 희망이 비추고 있습니다.

김 변호사의 책에서도 삼성 노동자들의 무노조 삼성 노동자들의 고된 현실이 잘 드러나 있습니다. 특히, 보이는 곳만 화려한 북한의 현실과 삼성 공장을 비교한 것은 신선했습니다.

김 변호사의 책은 삼성 창업주이자 이건희 아버지인 이병철 출생(일부 언론은 역겹게도 ‘탄생’이라더군요) 1백 년 맞이 용비어천가 쓰레기들을 판매 순위에서 멀찍이 제친 건 기쁜 일입니다. 이병철이 살아 있던 80년대만 해도 평범한 서민들은 그를 이름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돈병철’이라 불렀죠. 그의 라이벌은 ‘돈주영’이었습니다. 군사독재 아래서 승승장구하는 문어발 재벌에게 이만큼 적절한 호칭도 없었을 겁니다. 

이 경멸스런 돈벌레 기업주가 한국 대표 재벌로 성장한 때가 공교롭습니다. 1998년과 1999년 삼성이 부도났고 김대중 정부가 다 막아주고 있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었습니다. 김 변호사는 이 삼성 부도설이 사실이었다고 얘기합니다. 

놀랍게도 이 때가 바로 삼성이 1등 재벌 무리에서 치고 나가 단독 1등 재벌로 우뚝 서기 시작한 때입니다. 한국 대기업들이 혼자 잘나서 오늘날 성공한 것처럼 말하는 건 그래서 다 뻥입니다. 삼성만 해도 삼성자동차 부채를 해결해 준 건 정부였고, 삼성은 지금까지도 이 돈을 다 갚지 않았습니다.

이 때는 또 삼성이 6만 명이나 되는 노동자들을 쳐낸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 때 일방 해고된 노동자들 일부를 모아서 일반노조를 만들고 저항을 시작한 이가 바로 삼성일반노조 김성환 위원장입니다. 

김성환 위원장이 펴낸 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삶이 보이는 창, 2007)에 실린 글들을 보면, 김성환 위원장의 대단한 저항 기록뿐만 아니라, 삼성에서도 적지 않은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비인간적인 노동 조건을 바꿔 보려 몸부림친 기록들이 나옵니다. 

거제 삼성중공업의 어용노조 위원장 출신(무노조 경영의 앞잡이)인 최석철 씨가 쓴 나는 삼성왕국 무노조 경영철학의 희생자였다》는 양심고백서 성격이 있습니다. 최석철 씨는 후유증에 시달리다 나중에 삼성 본관에 자동차로 돌진했으나 언론에는 단순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나오게 되죠.

삼성왕국의 게릴라들》(프레시안북, 2008)에는 김용철 변호사와 그를 도운 사제단, 김성환 위원장 등을 비롯해 검찰 X파일을 폭로한 MBC 이상호 기자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등의 고군분투가 각각 간결하게 잘 기록돼 있습니다. (재밌는 건 사제단도 김 변호사를 돕는데 주저하고, 삼성의 로비 대상이 됐다는 자기 고백이 나옵니다. 물론 삼성도 사제단에겐 돈으로 로비하지 않더군요.) 

이밖에도 삼성-선출되지 않은 권력》(다함께, 2008[개정판])에는 '고대녀' 김지윤 씨를 포함한 고려대 출교생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들은 교수 감금 때문에 출교 징계를 받았다고 알려졌지만, 사실은 그 1년 전 고대 당국의 이건희 명예박사학위 수여 반대 시위 조직에 대한 보복이 진짜 이유였습니다. 이들의 끈질긴 투쟁은 출교 철회라는 승리를 거뒀습니다. (뒤끝 있는 MB고대 전통에 따라 무기정학 소송이 남아 있긴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전 삼성을 비판적으로 다룬 이 적지 않은 책들을 보면서 오히려 두려움보단 희망을 봅니다. 이 책들 모두 삼성 왕국에 저항한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공교롭게도 이들 대부분 삼성의 내부자입니다. 안팎에서 삼성의 가장 큰 특징을 요약하는 단어가 “관리 삼성”이라고 합니다. 철저하게 감시·닦달·조종한다는 건데, 그 “관리 삼성”에서 이토록 내부자들의 저항과 고발이 끊이지 않는다는 거야말로 삼성이 결코 빅브라더가 아니라는 방증이겠죠. 

10조 원에 이를 거라는 비자금도, 삼성 장학생들도 이건희 유죄와 비판을 막지 못했습니다. 5년 전 고대생들의 이건희 명예박사 학위 수여 반대 시위도 꽤 유명했죠.

김 변호사는 우리 사회의 주류집단이 반(反)삼성을 반(反)기업으로 여긴다고 전합니다. 이것이 비자금보다 더 강력하게 삼성장학생을 만드는 구조적 요인이라는 거죠. 그래서 삼성공화국(왕국)은 기업공화국인 겁니다. 삼성 권력 비판은 한국의 기업권력 체제에 대한 문제제기인 겁니다.

그런 점에서 김용철 변호사와 적지 않은 게릴라들이 전문 경영자에게 삼성의 경영권을 넘기는 해법은 진짜 해법이 될 수 없습니다. 전문 경영자도 기업 공화국(왕국)을 유지하는 데는 이해관계가 같기 때문입니다. 삼성을 '돈' 씨 일가에서 빼앗아 공기업화해 이 범죄왕국을 끝장내고 막대한 생산 능력을 사회에 공헌하는 방식으로 운영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

오늘날,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엔 노조를 허용할 수 없다던 수많은 ‘돈병철’들의 기업에 노조가 버젓이 생겼고 그들이 투쟁도 하고 진보정당 지지도 합니다. 그래서  수많은 다윗들의 저항 기록들은 보존하고 떠받들 가치가 있습니다. 그 기억들이 전해져 또다른 다윗들을 낳고, 더 많은 다윗들이 한 뜻으로 단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다윗들 없인 저들이 골리앗을 굴러가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가장 강력한 것은 삼성 노동자들이 내부자 저항을 시작하는 겁니다.

(다음엔 재벌 개혁 논의들을 다뤄보려 합니다. 좋은 자료나 책들을 아시는 분들은 추천 좀 해주세요)

 

□ 추천 도서
삼성을 생각한다》 (김용철, 사회평론, 476쪽, 2만2천 원, 2010)
삼성반도체와 백혈병》 (박일환·반올림, 삶이 보이는 창, 160쪽, 7천 원, 2010)
삼성왕국의 게릴라들》 (프레시안기획취재팀, 프레시안북, 336쪽, 1만2천 원, 2008)
골리앗 삼성재벌에 맞선 다윗의 투쟁》 (김성환 외, 삶이 보이는 창, 355쪽, 1만3천 원, 2007)
삼성-선출되지 않은 권력》[개정증보판] (한규한 외, 다함께, 120쪽, 3천 원, 2008)
《고르디우스의 매듭》(김병윤, 두레스, 239쪽, 1만2천 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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