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한 자본주의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좀더 능동적 관점으로 질문을 바꿔 보자. 자본주의를 없애고 난 폐허 위에 어떤 세상을 만들려는가. 아니, 만들 수 있는가?

대안 사회 논의는 이중적이다. 그것은 자칫 현실과 유리된 유토피아를 상상하게 만든다. 이것은 창조적 에너지의 창고가 되기도 하지만, 현실의 비루함이 오래될수록 우리 안의 독이 된다. 

대안 사회는 현실에서 생겨날 것이다. 바로 그 폐허 위에서, 바로 그 탐욕의 철로 끝에서.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현실이 만들어 놓은 조건에서 대안 사회의 가능성과 대안 사회의 원리들을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발달한 생산력과 그 생산력을 담지하는 집단인 노동자계급의 존재가 계급사회 발생 이후로 최초로 사회주의[각주:1] 사회의 가능성을 현실화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최초로 모든 이들이 먹고 살 만한 부를 창조했다. 그 과정에서 비도덕성과 비민주성, 불평등이 만연했지만 말이다.

이전 사회와 달리 자본주의에서 생기는 빈곤은 사회의 부(총생산)가 인구와 비교해 적어서가 아니라 넘쳐서 생긴다. 모든 것이 상품으로 거래되는 자본주의에서는 사회 전체의 생산능력과 부가 오직 개별 경제주체들(기업과 개인 등)의 소비 능력에 따라
분배되기 때문이다.

생산력의 발전을 반영해 자본주의 핵심 생산단위인 기업은 이제 소수 개인들 소유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주식회사의 등장은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의 개인 소유 원리를 부정하는 현상이다.

이런 경제 조건에서 생산을 담당하는 노동계급은 이전 다른 모든 피착취 계급과 달리 집단적 생산에 종사한다. 그들은 고도로 집중화된 생산시설을 이용해 재화와 서비스를 생산한다.

그들이 해방되는 유일한 길은 생산수단을 각자 나눠 갖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으로 통제하는 길이다. 농민을 되찾은 토지를 나눠 가질 수 있지만, 자동차 공장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눠 가질 순 없다.


그런데 자본주의 경제의 생산은 이론상 사회의 [필요에 따른] 총수요와 아무 관계 없이 생산되며, 그 생산과 수요의 적절한 비율은 사후적으로만 평가된다. 이 경쟁적(=시장쟁탈적) 생산의 보편화는 필연적으로 과잉생산의 경향을 낳는다.

이것은 자본주의가 역사적으로 두 가지 분리에 바탕했기 때문인데, 하나는 직접생산자와 생산자의 분리이고, 하나는 생산이 경쟁하는 자본들로 분리돼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전자는 임노동-자본의 관계를 낳고, 후자는 무계획적 시장 경쟁을 낳는다.

그 점에서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은 유용한 시도다. 그것은 상상력을 자극하면서도 생산과 소비의 계획 등 미래 청사진의 구체적 형상을 현재 자본주의 방식과 대비해 설명한다.

그는 평등과 연대, 다양성, 자율관리 등의 가치를 제시한다. 임노동-자본 관계가 낳는 노동의 소외를 극복하려고 사람들의 노동이 세심하게 고려된 균형적 직군으로 편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시장경제가 사람들의 필요보다는 잘 팔릴 상품을 중심으로 생산하는 모순을 바꾸려면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생산계획과 소비계획이 경제 전체의 윤곽을 그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합리적이며 구체적으로 잘 짜여진 그의 파레콘(참여경제) 계획은 유토피아적이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한한다.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선 내게는 전반적인 계획에서 앨버트와 다르게 생각하는 점도 있다. 꼼꼼하게 그의 저작을 살펴볼수록 그 차이는 매우 중요한 차이인 듯하다.

내가 보기에 앨버트는 마르크스주의의 고전적인 계획경제 구상이 필연적으로 스탈린주의식 관료지령경제로 귀결된다고 보는 듯하다.

그는 한 챕터를 할애해 중장집권계획경제를 비판한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경영을 담당하는 조정자계급을 낳게 될 것이고, 이는 계급 체제를 부활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와 레닌은 물론이고 스탈린과 대척점에 섰던 트로츠키마저 그 전략과 전략 주체인 당이 스스로 조정자계급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에게 마르크스주의=중앙집권계획경제=스탈린주의=관료적계급체제=조정자계급지배경제인 셈이다.

문제는 계획경제라는 사상과 실천의 역사에 관한 그의 평가가 그의 파레콘 계획에 반영된다는 점이다.

그는 노동자평의회가 생산계획을 짜고, 지역의 소비자평의회가 소비계획을 짜서 반복 조절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평의회의 기초 단위는 개별 공장과 카운티(한국으로 치면 군 단위라고 함)라는 것이다.

알렉스 캘리니코스는 이를 두고 지나치게 시장경제와 가까운 의사결정 방식이 아니냐는 비판을 한다. 중장기적 계획이 필요한 문제를 해결할 시스템이 없다는 것이다. 캘리니코스는 이 점에서 드바인의 ‘협상조절모델’이 더 효과적이라고 평한다.

나도 캘리니코스의 견해에 동조하는데, 계획은 아래에서 위로 취합해 가는 계획도 필요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생산과 소비를 계획적으로 조절하고 배분하는 일도 필요하다.

우선, 사회 전체의 부가 흘러 넘친다 해도 자연적 총량은 한계가 있다. 생산과 소비에 관한 계획이 각 자율적 단위의 계획들을 취합하고 사후적으로 조절하는 과정만으로는 지속적 해결 방식이 될 수 없다.

생산과 소비 수요의 충돌 문제도 볼 수 있다. 이른바 남반구 국가들의 농업 문제(식량 위기)
는 지금의 식량 소비 구조를 바꿔야 하는 압력이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소비 계획을 자율적 단위들에게만 맡겨 두고 캠페인 식으로 해결할 순 없다[각주:2].

게다가 특정 사안들은 사회 전체 차원의 결정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 에너지 전환을 한다고 하면, 기존의 핵에너지와 화석에너지[각주:3] 발전(전력 공급)을 없애는 것부터 시작할지 아니면(수요를 당분간 억제해야 한다), 기존 수요를 고정한 채 자연력 에너지 공급을 늘리는 과정부터 시작할지 결정해야 한다.

이것은 자율적 단위들의 사후적 조절 메카니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게다가,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선택하더라도 일정 기간 동안 모든 경제 단위들이 에너지 소비를 줄여야 하는 시기가 필요하다. 이것은 생산과 소비 모두 제약이 생긴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앨버트의 계획은 기본적으로 우선적인 중앙 계획을 따라서 권위를 지닌 중앙 계획 기구를 거부하는 것이다.
각 촉진위원회는 순전히 계획을 짜고 집행하는 데서 기술적 구실에 한정돼 있다. 이것은 시장경제를 ‘무엇인가’로 대체하려는 핵심적 이유를 거부하는 것이다. 시장경제의 부정적 본질 가운데 핵심이 ‘무계획성’이다[각주:4]

그 점에서 앨버트가 단위 공장과 군 단위를 기초 평의회 단위로 설정한 것도 시사적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작동 방식은 기본적으로 공장과 군 단위의 노동자/소비자평의회가 서로 계획들을 내놓고 반복되는 검증 과정을 거쳐 사후적으로 생산과 소비를 조절하는 과정이다.

앨버트의 파레콘 계획이 시장경제의 작동방식과 닮아있다는 비판은 바로 이런 뜻이다. 협력적이란 뜻에서 사회적 생산이 이뤄지는 체제에서 총생산(=총소비) 단위의 배분 계획과 그 계획을 수립할 민주적 기구와 작동원리가 없어서는 안 된다.

앞서 말한 난점들을 해결하고 파레콘의 약점을 극복하려면, 중앙 차원의 계획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스탈린주의식 가짜 계획경제=관료적 지령경제와 다른 민주적이고 참여를 보장하면서도 중앙집중적인 계획 메카니즘을 구성해야 한다. 

각 지역과 작업장의 민중의회들과 평의회들이 보낸 대표들로 구성되고, 이들에게서 수렴된 의사들을 집행할 대표기구이자 하급 평의회들에게 사회 전체의 필요와 조건을 판단해 결정한 계획을 지시하고 집행할 민주적 중앙계획기구가 필수적이다. 

내가 볼 땐, 파레콘의 자율적 단위들을 유지하면서도 위계적이지 않은 중앙집중적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 체계가 가능해야만 자본주의 시장경제보다 민주성과 효율성 면에서 우월한 경제를 이룰 수 있다. 이 점이 마르크스주의의 민주적 계획경제론이 자본주의에 대해 가지는 본질적 장점이다.

쟁점은 그것이 어떻게 (실제로는 비계획적인) 스탈린 식 지령경제와 다를 수 있는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마르크스는 어떤 특권도 없고, 아래로부터 선출되며, 언제든지 소환 가능한 이행기 단계의 국가를 전망했다. 이것은 단지 예측만이 아니라 목표다. 마르크스는 이 원리를 1871년 파리 코뮌에서 배웠고, 역사는 20세기 동안 줄곧 이 목표가 현실화한 사례들을 남겨줬다. 

이 평의회 국가는 과거의 흔적 위에서 과거를 일소하면서 사회 전반의 계획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 세대의 상상력으로 실현할 것이다. 이 국가야말로 국가와 정치를 계급 지배 도구와 권력 투쟁에서 순전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문제로 바꿔 놓는 구실을 하면서 소멸해 갈 것이다. 관료제를 막으려는 계획기구 요원들의 추첨제도 이런 사회 단계에서는 민주적일 수 있다고 본다. 

앨버트는 스탈린주의에 대한 혐오(우리도 공유하는 정당한 혐오) 때문에 이 과정마저 거부한다. 그래서 앨버트의 파레콘은 어떻게 이 참여경제가 현실에서 시장경제의 작동을 멈추고 현실에 안착해서 작동 가능한가 하는 근본적 물음을 남긴다.

그러나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대안 사회 구상인 민주적 참여계획경제는 기존 국가기구를 대체하는 이행기 국가 단계를 전망하기 때문에 자본의 최후 방어막인 국가기구를 타도할 집중적 행동 전략을 제시한다. 이 전략의 핵심 주체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목표인 이윤 생산을 생산 과정에서 담당하는 노동자계급이다.

노동자계급과 이들을 따르는 다수의 피억압 대중들은 투쟁 과정에서 스스로 사고와 실천을 혁신할 것이다. 체제를 바꾸는 행동은 그 체제에 물든 주체들을 혁신시키는 과정이기도 하다.

이런 과정을 거치는 전략적 투쟁의 힘만이 자본가들을 권력의 원천에서 무력화할 수 있다. 그 힘으로 사회 전체를 개조하는 것은 불가피하게 노동자계급이 스스로 정치적 지배자로 등장해야 한다는걸 뜻한다.

그것은 역사상 최초로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체제가 될 것이며, 근원적인 불평등 구조가 해소되는 순간, 앨버트가 그토록 두려워하는 노동자국가조차 필요 없게 될 것이다.

□ 참고 도서
저자: 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북로드
출판년도: 2003년

출판사 서평: http://www.yes24.com/24/goods/392270?scode=032&srank=1

<레프트21>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1102



저자: 알렉스 캘리니코스/마이클 앨버트

출판사: 책갈피

출판년도: 2009년

출판사 서평: http://www.left21.com/article/6839




  1. 마르크스 이전에도 사회주의라 부를만 한 사상과 운동은 존재했고, 그 역사는 매우 길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전통》(칼 드레이퍼, 다함께, 2003) 참조 바람. [본문으로]
  2. 소농 중심의 지역 자급 농업을 중심에 둘 지, 집단 농장 형태를 중심에 둘 지도 고민거리다. [본문으로]
  3. 핵에너지도 그렇지만, 지구 온난화 때문에 화석에너지 사용 중단도 시급한 과제다. [본문으로]
  4. 시장경제는 본질적으로 무계획적이고, 반민주적이며, 불평등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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