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 시간이 꽤 지났지만 올려 둔다. 아래 내 글의 출처는 옛 <레프트21>(지금은 <노동자연대>) 웹사이트에서 벌인 지난해 12월 논쟁의 글(http://wspaper.org/article/13966)이다.(여기엔 옮기지 않았지만, 그 웹페이지에 함께 실린 김지윤의 글도 함께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은 그 이전 논쟁에서 파생된 나에 대한 2인의 반론(http://wspaper.org/article/13965)에 대한 나의 재반론이다. 

논쟁의 발단은 <레프트21>116호의 내 기사들인 통합진보당 내란음모 재판: 자유민주주의의 낮은 기준도 지키지 않는 마녀사냥 중단하라와 국가보안법은 친북사상뿐 아니라 북한과 아무 관계 없는 급진적 사상도 공격하는 무기다에 대해 비판 글(http://wspaper.org/article/13900)이 실리면서부터다. 




최용찬 동지(이하 존칭 생략)에 대한 지난 번 내 반론의 요점은 세 가지였다.

 

첫째, 최용찬이 통합진보당 방어 문제에서 사상의 문제를 운동ㆍ조직의 문제와 억지스럽게 분리시키고 있다는 점, 둘째,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비판적 지지ㆍ방어 전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진보당에 대한 무비판적 방어를 주장한다는 점, 셋째, 당면 투쟁에 대한 그의 전술적 주장이 현실과 부합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그런데 전지윤과 최용찬은 반론에서 최초의 세 가지 주장을 카세트테이프 돌리듯이 반복했다. 전지윤과 최용찬은 모두 ‘내란음모’ 재판에서 이 사건이 조작ㆍ날조됐다고 단언하지 않으면 정권의 탄압에 기회주의적으로 굴복하는 것인양 주장한다.

 

그래서 내가 이 재판의 핵심 쟁점을 사상의 자유 문제로 보는 것은 이런 기회주의를 정당화하려는 복선이라고 보는 듯하다.

 

두 사람의 주장이야말로 내가 지난 반론에서 ‘이것이 진짜 하고 싶은 주장 아니냐’고 되물은 바로 그것들이다. 그러므로 둘의 반론은 나에 대한 진정한 반박이 되지 못한다. 도리어 내 진단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준다.(독자들이 두 사람의 글을 읽고 지난 번 내 반론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논쟁 구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글에서 나는 이 쟁점들에 대해 더 확장된 문제의식을 제기할 것이다.

 

우선 ‘사상의 자유가 국가보안법 탄압의 본질’이라는 내 주장에 관한 비판을 다뤄 보자. 둘은 내가 사상의 문제를 강조함으로써 “노동자 계급의 ‘조직’, ‘운동’, ‘세력’, ‘성과’”(최용찬)의 문제를 대립ㆍ경시한다고 반론한다.(전지윤이 ‘일베’ 운운하며 내가 사상과 계급 기반을 분리시켰다고 주장한 것은 반론의 가치도 없다. 그것은 논리 이전에 국어 독해력의 문제다.)

 

내 주장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는 것이 어처구니없다. 사상의 자유는 견해 표명의 자유(언론ㆍ출판ㆍ집회)와 분리될 수 없고 개인주의자가 아닌 이상 이것은 결사의 자유와 분리될 수 없다. 바로 그 때문에 내가 사상의 자유 문제가 핵심이라고 주장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부연 설명하자면, 사상의 자유란 표현, 결사의 자유와 분리돼 단지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영역일 수 없다. 고립된 개인의 사상조차 타인이 사상을 표현하는 과정과 집단적 토론에 참여하는 경험을 전제하지 않고는 형성될 수 없다. 노동계급의 집단적 자기해방을 위해서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사상은 마르크스의 말처럼 수백만 대중을 사로잡아 물질적 힘이 될 때, 진정으로 그 위력을 발휘한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으로 발전해야 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발전을 막으려고 지배자들은 사상의 자유 자체를 가로막고 탄압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


그래서 집단적 해방을 추구하는 자기의식적 노동운동에게 사상의 자유란, 집단적 경험이 일관된 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주장하고 토론하는 자유, 지배계급의 온갖 악취나는 사상이나 이간질 책략과 싸우며 그들과 전혀 다른 사상적 기초 위에서 자신들의 조직을 꾸려나갈 자유를 뜻한다.

 

바로 이 점 때문에 19세기 이후 민주주의를 진정으로 필요로 하고 그것을 쟁취하는 진정한 동력이 됐던 것도, 자본가와 자유주의자들이 아니라 노동운동과 급진좌파들이었다. 이것이 내가 “노동자 투쟁이 진전시켜 온 민주주의의 역사는 바로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를 확대해 온 역사”라고 말한 이유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는 특정한 사상에 따른 결사의 자유까지 보장돼야 그 자유가 온전히 보장된다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 헌법이 ‘사상의 자유’라는 표현을 쓰지 않지만, 그것을 적어도 문구상으로는 보장한다고 보는 근거는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 보장” 조항 때문이다.

 

전지윤 스스로 2009년에 쓴 글에서 “토머스 제퍼슨은 언론ㆍ출판ㆍ집회ㆍ결사의 자유를 ‘자유 중의 자유’라고 했는데 한국에서는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인 이 권리들을 국가보안법이 원천적으로 부정ㆍ제약했다”(《마르크스21》호, <레프트21> 사이트에 전문 게재)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이 ‘국가보안법 탄압의 본질이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라는 내 주장과 뭐가 다른가.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면, 전지윤의 생각이 바뀐 것일 텐데, 정말 그런지 궁금할 뿐이다.

 

법무장관 황교안은 내란음모 혐의 발표 직후 “[내란 선동죄는] 내란에 대해 고무적 자극을 주는 일체의 언동”이라고 말했다. 즉, “일련의 탄압이 궁극으로 겨누는 것은 계급지배 질서에 도전하는 사상과 운동들”(김문성)이라는 것이다. 내란음모 실재 여부(조작 여부)는 탄압의 당사자에게도 부차적이다. 만에 하나 진보당이 ‘종북’ 사상과 내부 토론을 이유로 해산된다면, ‘사회주의’를 강령에 포함했던 민주노동당의 성장기와 비교할 때, 명백히 노동운동의 ‘정치사상의 자유’가 후퇴하는 것이다.

 

따라서 진보당의 조직이 위협 받는 문제는 노동계급의 사상과 토론, 결사의 자유라는 더 큰 민주주의 문제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일벌백계”인 것이다. 사태를 이처럼 규정하면, 탄압에 맞서는 데서 조작 여부를 밝히는 것은 부차적이게 된다. 조작이든 아니든 노동계급 전체의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옹호ㆍ방어하는 것이 본질이자 핵심 과제가 된다.

 

이런 주장이 국가정보원의 증거 조작ㆍ날조 사실을 애써 무시하는 것인가. 그렇진 않다. 비록 두 사람은 애써 내가 조작 문제를 회피한다는 인상을 주려 하지만 말이다.

 

보안경찰이 흔히 그런 방식을 쓴다는 것은 내가 116호에 쓴 기사에서도 밝혔고, 국정원의 회의록 왜곡 사실과 침투 공작을 폭로했다. 심지어 폭로의 분량도 내가 최용찬보다 더 많다. 그의 글이 내 기사보다 더 긴데도 말이다.

 

내 주장은 이 사건의 핵심 쟁점과 효과적인 방어 전술에 관한 것이었다. 그 점에서 차이가 있다. 둘은 ‘모든 것이 조작ㆍ날조됐다’는 주장으로만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왜 진보당 활동가들이 “조작에 맞서 죽기살기로 투쟁”해야 하는 상황이 됐을까. 정권이 내란을 논의했다는 혐의를 입증하려고 혈안이 된 것은 그것이 ‘유죄’, 즉 처벌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고로 “‘조작’이라는 주장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는 주장은 ‘국가보안법 프레임’ 자체에 도전해야 한다는 말이다. 급진적 사상과 주장을 토론하는 것이 ‘왜 유죄가 돼야 하느냐’고 항의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사상 재판의 본질을 잘 폭로하고, 지지자들과 운동 전체의 사기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반면에 조작 여부에 치중하는 변론은 자칫하면 국가보안법을 인정하는 전제 위에서 무죄를 주장하는 것으로 미끄러질 위험성이 있다. 이것은 본질상 사상재판인 국가보안법 재판에서 노동계급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방식일 뿐만 아니라 노동계급 전체의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데서도 한계가 명백한 것이다.

 

비판적 방어ㆍ지지


그런데 두 사람은 이런 내 논거를 귀담아 듣지 않고, ‘조작’ 여부를 경시하는 것은 내가 진보당 지도부의 사상을 비판하고 싶어서라고 주장한다.

 

전지윤은 이 점을 이렇게 강조한다. “사상과 그 사상에 대한 이견’을 핵심으로 부각시키면 우리는 분열되기 쉽다. 예컨대 이번 마녀사냥 때 <뉴데일리>는 이렇게 이간질했다. ‘트로츠키주의야말로 스탈린주의와 상극이니까 방어하지 말아야 옳다.” 또 ‘김문성의 주장이 일베의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는 것과 뭐가 다르냐’고도 묻는다.

 

이처럼 <레프트21>의 기조와 내 기사들을 일부 개혁주의자들의 기회주의적 주장들과 사실상 동일시하며 매도하는 것은 ‘무조건적이되 비판적인 지지ㆍ방어’ 전술에서 ‘무조건’과 ‘무비판’을 혼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이들은 사실상 ‘탄압 방어를 위해서는 진보당을 불편하게 할 어떠한 비판적 인식이나 주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식의 주장으로 나아간다.

 

비판적 지지란, 노동계급과 지배계급 사이에 분명한 바리케이드를 치면서도(무조건 지지) 혁명적 독자성을 포기하지 않는 것(비판적 지지)의 결합이다. 이는 대중의 모순된 의식, 현실과 혁명적 원칙의 괴리를 고려해 혁명가들이 채택하는 전술이다.

 

사실 전지윤이 <레프트21> 활동을 그만 둔 뒤에 나온 신문들에서 진보당 탄압 쟁점을 다룬 기사의 분량은 오히려 그 전보다 많다. 면 배치와 다루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단순한 폭로에 그치지 않고, 혁명적 관점으로 분석적으로 접근하려 한 것이다.

 

전지윤과 최용찬의 주장은 결국 혁명가들의 독립적 주장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이다. 그것은 두 사람이 입을 모아 “급진적 좌파가 노동계급 운동 속에 뿌리내리도록 끈질기게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의 음험한 탄압에 대한 가장 좋은 대응책일 것”이라는 주장을 종파적인 것처럼 문제 삼는 데서 드러난다.

 

진보당을 탄압하는 박근혜 정부의 칼끝이 노동운동의 역사적 성과와 급진적 사상들을 겨누는 것이라면, 바로 그 칼끝의 표적이 된 노동운동이 저항에 나서 건재를 과시하고, 급진좌파가 노동운동 속에 뿌리내려 성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야 할 것들일 텐데 말이다.

 

이런 태도는 전지윤이 진보당과 자신의 정치가 다르다는 말을 하는 것이 불편하다고 말하는 것에서도 엿볼 수 있다. 국면마다 강조점은 달라야겠지만, 모종의 친북적 사상과의 준별 자체는 혁명적 조직을 건설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라면 불가피한 일이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이 진보의 대안을 주장하면서, 북한 체제는 진정한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말을 피할 수 있는가.

 

그 유명한 ‘볼테르의 경구’조차도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다르다. 그러나”로 시작한다. 즉, 차이가 있지만 사상(표현)의 자유를 방어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인가. 방어를 위해 차이를 아예 숨겨야 한다는 전지윤과 최용찬의 주장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사상 자체를 지지하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계급에게 부정직한 태도인 것이다.

 

전지윤은 2011년에 최미진과의 공동 기사에서 “자주파 단체들이 6ㆍ15선언 이행과 민족 자주 등 자신들의 고유한 강령을 지지해야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을 제대로 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태도”(<레프트21> 52호)를 “폭넓은 운동을 건설할 수 없다”고 비판한 바 있다.

 

노동자 운동에서 사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을 회피하는 것은 노동계급을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에게 정치적 지도를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각각의 좌파들 사이에 사상적 차이가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고, 또 그런 차이들을 이해할 능력도 있다.

 

현실 직시


한편, 이쯤에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전지윤은 <레프트21> 편집자 시절인 올해 8월 초에 박근혜의 우익적 반격 가능성을 경고해야 한다는 내 의견을 무시하고 박근혜 위기론을 밀어붙인 바 있다. 그런 점에서 이제 와서 내가 박근혜의 탄압을 경시하는 듯 말하기보다 자기 비판부터 하는 것이 정직한 일일 것이다.

 

박근혜의 위기를 강조하다가 갑작스레 탄압이 주는 나쁜 효과를 ‘과장’하는 쪽으로 강조점이 옮겨간 것이다. 그래서 전지윤은 “노동자 투쟁이 돌파구를 열 수 있다”는 내 주장을 “막연한 낙관”이라며 “주체적 노력을 통해 상황을 바꾸려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전지윤이 말하는 능동적 자세란 무엇인가. “노동운동을 분열ㆍ위축시키려는 종북몰이에 맞서 노동운동의 단결된 대응”이다. 최용찬은 “노동자투쟁을 민주주의 투쟁과 결합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철도노조와 민주노총이 진보당 탄압에 반대하는 것을 주요 과제 중 하나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왜 노동자 투쟁이 노동자 민주주의의 맹아이고, 따라서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기본적 권리들(사상의 자유, 정치적 자유)을 방어하는 것보다 열등하지 않다는 점을 최용찬이 이해하지 못하는지 모르겠다. 최용찬의 ‘민주주의’ 개념은 정치적 차원에 국한되는 듯하다.

 

구체적인 전술, 실천의 강조점(우선순위)에서도 전지윤과 최용찬의 개념에는 분명히 결함이 있다.

 

혁명적 조직에게는 각각의 전선에 대한 전술이 있고 여러 전선 중 어느 전선이 더 중요한지를 구분해 힘을 집중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진보당 방어 전선에서 비판적 방어를 하되, 철도노조 파업 등 노동자 투쟁 전선이 훨씬 더 중요하므로 여기에 힘을 집중하자고 주장한다.

 

전지윤과 최용찬의 전망과 달리, 지금 철도노조는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가지고 진정한 대중투쟁을 건설”해서 박근혜 정부에 대한 불만과 투쟁의 전국적 초점으로 떠올랐다. 이것은 “노동운동이 위축되지 않고 정부의 공세에 단호한 의지와 전투적 태세로 맞서며 불만의 초점 구실을 한다면, 반격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전지윤의 사임 이후의)  <레프트21>의 전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다.

 

노동자 투쟁이 계급 세력 관계를 바꾼다면, 우익적 공세도 약화시킬 수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데 기여하는 노동자투쟁의 힘이라는 것이 기계적으로 정권 퇴진 투쟁이나 민주적 권리 쟁취 투쟁의 형태만을 띠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1987년을 들 수 있다. 6월의 민주화 항쟁은 그 몇 년 전부터 일어난 노동자 투쟁의 퇴적물이었고, 다른 한편 6월의 거리시위가 얻어낸 군사정권의 후퇴와 양보를 되돌릴 수 없게 만든 것은 7~9월 노동자대투쟁이었다. 이 투쟁들이 주로 임금과 노동조건 등 경제적 요구들이 주가 된 투쟁들이었음에도 말이다.

 

종파주의


이렇게 보면, 내가 철도노조에게 민주주의 요구를 결합시켜야 한다고 요구하는 주장이 추상적이고 도식적이라고 말했다고 해서 이를 ‘모욕’으로 받아들일 이유는 없다. 두 사람이 틀린 이유는, 진보당 방어와 철도노조 파업이라는 서로 다른 전선을 기계적이고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으로 묶으려는 데 있다. 그것도 철도노조에게 진보당 방어 전선에 참여하라고 요구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태도는 일부 지각없는 스탈린주의자들에게서나 나올 법한 것이다. 스탈린주의 정치는 ‘당이 계급을 대표하고 자신들(공산당)이 그런 유일당이므로 자신들이 결정하는 의제가 운동에서도 가장 중요해야 한다’는 원리에 입각해 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전지윤도 그렇게 하려는 것 같다. 그는 내가 “마녀사냥에 맞서 노동운동이 단결하자는 것을 별로 강조하지 않고 있다”는 근거로 “노동운동은 … 자신의 계급적 요구를 가지고 진정한 대중투쟁을 건설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기죽지 않고 자신들의 요구를 내놓고 저항에 나서는 것이 가장 훌륭한 반격”이라는 주장들을 문제 삼는다.

 

마르크스는 “종파는 자신의 존재 이유와 영예를 계급 운동과의 공통성에서 보지 않고, 그 운동과 자신을 구별해 주는 특수 표지에서 본다”고 말한 바 있다. 내가 볼 때, 두 사람이 철도노조 투쟁을 바라보는 태도는 근본에서 이와 다르지 않다.

 

철도노조 파업이 불만의 초점 구실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은 이 파업 자체를 강화(전면 파업, 연대 파업 등을 통해)할 수 있도록 현장 조합원을 고무하고 아래로부터 노조 지도자들을 압박하는 것이 우선적인 과제다. 최용찬이 우려했던 대로 한길자주회 보안법 사건이 터졌지만, 이런 것들이 이 과제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 건 아니다. 파업 지도부 일부가 진보당 지지자들이어서 그 이유로 분열ㆍ위축이 일어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부차적이지만, 최용찬이 말한 집회 참가 건도 보자. 더 중요한 전선에 힘을 집중한다는 점에서 그가 언급한 두 집회에 관한 우리의 참여는 모두 문제 없었다고 본다. 11월 30일에는 철도노조 조합원 집회가 오전에 있었고, 12월 7일에는 삼성ㆍ화물연대ㆍ지하철 등 노동자 사전집회가 있었다. 여기에 우리 단체가 적극 참여한 것이 뭐가 문제인가.

 

이처럼 두 사람의 주장이 개념 혼란과 현실 검증을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데도, 스스로 논리적 모순을 느끼지 않는 까닭은 이들의 논쟁 방식 때문이다. 상대가 하지도 않은 주장을 허수아비로 세워놓고 난도질하고는 그것으로 상대 주장을 논파한 듯 착각하는 것이다.

 

내가 볼 때, 둘 모두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주장에 있어서 솔직하지도 않다. 진보당에 대한 무비판적 방어에 몰두하다가 스스로 정치적 중심을 잃었다. 우리의 차이점은 바로 여기에서 비롯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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