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만에 우파 정권이 들어서고 그 충격으로 진보정당이 분열한 2008년, 촛불항쟁과 미국발 세계경제 위기가 터졌다. 이 대사건들은 진보진영이 이념과 대안, 가치와 세력을 새로 구축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강하게 요구했다.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우며 창당한 진보신당도 이 과제에 더 몰두했다. 그 중간 평가가 내로라하는 진보 명사들의 대담과 글로 출판됐다.《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가 그것이다.

《진보의 재탄생: 노회찬과의 대화》는 홍세화·진중권·변영주·김어준·우석훈 등이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이하 존칭 생략)와 진보의 미래를 놓고 대담한 기록이다.

노무현의 유고 《진보의 미래》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보신당 상상연구소가 기획한 《리얼진보》는 김대중·노무현의 진보는 가짜라며, ‘진짜 진보’의 모습을 제시하려 한다. 강수돌·김상봉·정태인 등 지식인과 노회찬·장석준 등 진보신당 논객들의 글을 망라했다.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진보의 재구성’을 내세운 진보신당은 촛불항쟁에선 수천여 명이 가입했고, 생태를 중요한 의제로 부각하는 등으로 진보의 의제와 외연을 확대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비유하자면, 정치의식이 민주당과 민주노동당 사이에 있으면서 민주당에 실망한 층을 목표대로 잘 수습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창당 2년이 지난 지금, ‘진보의 재구성’의 성과를 다시 재검토하자는 목소리가 높다. 새로운 층의 유입과 진보 좌파적 지향이 제대로 갈마들지 못해 좌충우돌의 진원지가 된다는 평가도 있다. 지방선거가 다가오면서 반MB 단일화 압력이 커지면 (민주당과 급진좌파 사이에서) 모호한 진보신당의 입지는 스스로 찬 족쇄가 될 수 있다.

《진보의 재탄생》 대담자들은 대중과 만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다.

김어준과 변영주는 세련되고 개방적인 진보로 변화할 것을, 홍세화는 “민중의 집” 같은 “일상의 정치”를 강화하자고 제안한다.

진중권은한국경제 자체를 한 단계 도약시킬 대안”을 요구한다.

《리얼진보》의 필자들은 상대적으로 “근본적 성찰과 고민”을 강조한다.
 

“진보와 개혁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자본주의에 대한 입장”(김상봉, 《리얼진보》)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는 2008년 위기로 신자유주의 지구화 시대가 파산했으므로, “긴 호흡”으로 과제를 모색하자는 것이다.

장석준은 “이윤 확보의 자유”에 “의문”을 던지자고 하고, 김상봉 전남대 교수는 “자본주의 극복 의지”를 강조한다. 한재각은 “환경·생태 분야를 다루면서 끊임없이 사회적 평등 같은 주제와 연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은 자유주의 정치와 선 긋기를 강조한다. “시민의 이익과 충돌하는 기업 이익을 우선시한다는 점에서”도 “노동계를 통제하고 배제하는 것에서도 [노무현과 이명박] 두 정권은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는 것이다.

노회찬은 이런 의견을 대체로 조합해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 전략’을 포함한 “서민중심형 복지동맹”(《리얼진보》)을 만들자고 한다. 이것이 “반MB 대안연대”다.

이를 위해선 “한나라당-민주당 체제를 극복”해야 하며, “보수와 진보의 양대 축으로 가려면 민주당이 해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진보의 재탄생》)

진보와 개혁의 근본적 선 긋기를 강조하는 것은 반갑다. 얼핏 보아 급진적인 이런 ‘진보의 재구성’론이 결정적으로 장벽에 부딪히는 곳은 다름 아닌 “(행위) 주체” 문제다.

상상연구소 명의 글은 “노동운동의 힘이 중심에 버티지 않는 한” 전진이 불가능하다고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러나 상상연구소를 포함한 여러 필자들은 현재 조직 노동자운동을 불신한다.

이런 불신이 생긴 건 “복지를 통한 증세는 정규직 노동자 또한 …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할 수밖에 없는[데] … 민주노총은 이를 정면으로 반대”(김정진, 《리얼진보》) 하기 때문이다.

행위 주체

오건호의 말처럼, 조직 노동자들이 더 많은 복지 비용을 부담하는 게 “사회적 약자를 위해 자신의 요구를 집중하는 선도적 실천”(《리얼진보》)이라면, 이들이 말하는 노동운동의 ‘재구성’은 노동계급에게 계급투쟁 대신 ‘계급 양보’를 요구하는 셈이다.

“사회연대전략”은 더 열악한 집단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방안이 조직 노동자들의 양보라고 주장한다. 대기업과 친기업 정부에겐 직설적으로 요구하길 회피하는 것이다. 장석준의 “이상주의”도 이런 양보론의 냄새를 풍긴다.

여기서 이들이 노동운동 안에서 새 “주체”를 쉽게 못 찾는 이유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조직된 행위주체인 노동운동을 불신하는 탓이다. 

그 뿌리에는 노동계급의 투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확신이 없는 게 문제 아닐까. 사실이라면 진보신당의 명망가·선거 중심 활동은 진보신당 2년 평가에서 중요한 덕목이 돼야 할 것이다.

그런데 노회찬도 이렇게 털어놓는다.

“지금은 [진보정당 안에서도] 목표가 … 자신이 국회의원 한번 되는 게 거의 전부인 경우도 있고 … 집권하면 세상이 획기적으로 좋아지느냐, 거기에 대한 확신도 없는 거예요.”(《진보의 재탄생》)

노회찬은 홍세화와 한 대담에서 “진보신당의 좌표, 공식적인 노선은 여전히 사회주의적 경향에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진보의 재탄생》) 고 말한다.

그러나 사회주의의 가치로 자본주의의 폐해와 맞서 싸우려면, “좋은 진보정당”(노회찬) 만으론 부족하다.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해 자본과 벌이는 계급투쟁에서 승리해야 한다. 그래야 사회주의 가치가 정치에 반영될 것 아닌가.

그러려면, 조직 노동자들이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사회적 약자를 위해 … 선도적 실천”을 해야 한다.


두 책이 강조하는 ‘진보의 재구성’에선 바로 이것이 빠져 있다. 실제 사례를 들어 가며 환경 의제와 조직 노동운동의 만남 가능성을 중시한 한재각(
《리얼진보》)을 예외로 하면 말이다. 

시장의 민주적 통제?

그래서 비록 이 책들이 진보신당 2년을 솔직하게 돌아본다는 장점이 있고, 다른 보수 정치인들이 선거를 앞두고 내는 책들과는 비교할 수 없이 진지하다 할지라도 아쉬움이 남는 게 사실이다.

그 아쉬움의 실체는 여전히 진보와 중도개혁 사이에 존재하는 실천적 차이점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행위 주체(노동계급)의 문제는 대안(자본주의 극복)의 구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그렇다.

예를 들면,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일자리를 창출할 때에도 이를 산업조직과 연결시키지 못”했고, 이는 “국가가 개입하는 성장동력을 통해서 일자리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전망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것(진중권, 
《진보의 재탄생》 )은 다소 당황스럽다.

좌파가 자유주의 우파에게
성장전략”이 없다고 비판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밥 먹여 주는 진보'의 재구성일까.

노동계급의 힘을 동원하는 걸 꺼리니 자본주의를 [자체든 그 폐혜든] 극복하려는 전략도 모호해 지는 것이다.

노회찬은 홍기빈과 대담에서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를 말하면서도 반(反)시장, 반(反)기업은 아니라고 말한다. 시장을 최소화하는 과거의 사회주의 정책에 대해서는 이미 검증이 다 됐다고 보기 때문이다.(《진보의 재탄생》)

물론 노회찬이 과거의 사회주의라 부른 것들, 옛 소련과 그 위성국가들의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실패하고 검증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홍기빈이 대담에서 지적하듯이 온건한 시장 규제 정책으론 자본주의의 횡포를 막을 수 없다는 것도 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집권 경험으로 이미 검증됐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을 공개적으로 짓밟는 기업이 한 나라의 최고 기업(기업인)으로 대접받는 사회에서 [진보] 정부가 주류 엘리트들에게서 반(反)기업이라는 비난을 받지 않고 진보적 사회 정의를 구현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선 진보신당의 강령 전문(前文)이 오히려 현실을 정확히 보는 듯하다.

자본은 암세포가 숙주를 파괴하고 자기도 소멸하듯 총체적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우리는 이 위기를 오직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함으로써만 해결할 수 있다. 인류가 이 문제를 새로운 기술이나 시장 개척 또는 군사력으로 해결하려는 망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 인류 문명을 송두리째 파괴하는 전쟁과 죽음밖에 없다.”(진보신당 강령 전문 2, 강조는 기자의 것)

 
세계자본주의 핵심부에서 시작한 경제 위기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좌파의 재구성은 자본주의의 우선 순위에 도전할 대안과 전략, 세력을 구성해야 성공할 수 있다. 그러려면,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려는 '현실주의'가 아니라, 현실을 바꾸려고 그 현실의 조건을 직시하는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진보의 재탄생》과《리얼진보》에서 때론 급진적이기도 한 문제의식이 대안과 행위 주체에서 부딪히는 벽을 넘지 못하는 것은 후자의 '현실주의'를 회피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 이 서평은 <레프트21> 29호에 실린 기사(아래 링크)에 추가로 내용을 덧붙인 글입니다.

[서평:《진보의 재탄생》, 《리얼진보》] 진보의 재구성에 관한 진보신당의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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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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