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당 결집파 일부, 정의당 대표 선거에서 조성주 등 진보정치 일부에서 ‘낡은 이념정치를 버리자’는 얘기가 다시 나온다.


이념/이론은 한 개인 또는 한 집단이 세계를 일관되게 바라는 시각과 기준 즉 관점과 방법을 일컫는다.


이념/이론이 기본적으로 세계관의 문제라는 말은, 각자 개인적/집단적 경험과 그 경험에서 유추한 부분적 통찰들, 사회의 지배적 상식들을 조합해 나름의 ‘세상보기틀’을 만들어낸다. 즉, 그것은 일관된 체계를 갖춘 이론일 수도 있고, 짬뽕일 수도 있으며, 개인들의 개똥철학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나름의 이념/이론/세계관(인생관)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특정한 이념적 틀을 선호하거나 선택할 수도 있고, 이것저것 조합할 수는 있어도, 이념/이론 자체를 벗어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각 개인들이 최종 취사선택해 얼개를 짜는 특정한 사고 체계는, 우리 뇌가 외부의 객관적 세계를 인식하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인간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벌이는 활동의 맥락에서 자신의 이념/이론(세상보기틀)이 사실에 부합하는지, 자신의 목적 실현에 유용한지를 검증할 뿐이다.


그래서 사실은 “이념이 쓸모 없고 당장의 먹고 사는 게 더 중요하며 그래서 거추장스런 이념을 벗어던지자”는 것이 하나의 이념이다. 


이런 세계관을 좀 더 다뤄 보자면, 먹고 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이 마르크스 유물론의 기본적 전제다. 문제는 첫째,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삶이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욕구 문제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둘째, 사람들이 먹고 입으며 살아가는 방식이 현재의 사회에 어떻게 구조화돼 있냐는 것이고, 셋째는 내가 어떻게 먹고 살 것이냐 하는 문제다.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은 자기 삶의 조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주의는 이것을 ‘계급 관계’에 기초해 설명한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은 ‘놀라워서’ 자신의 계급관계와 인식이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념/이론은 객관적 사회관계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개별적, 역사적 경험의 문제이고, 각 개인의 기질과 성격 문제이기도 하다. 이것이 뜻하는 바는 이념/이론은 그것이 각 개인의 계급 관계에 들어맞든 안 맞든 어느 정도는 각 개인이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상의 이유로 이념/이론은 인간 집단의 능동적/지적 활동들  속에서 복수로 경쟁하는 관념들이다. 우리 삶은 인식에서 실천까지 끊임없는 선택에 놓여있다. 많은 대중은 자신의 계급적 처지와 보고 듣고 배운 세계관들의 모순된 조합을 이념/이론으로 갖고 있다.


그래서 다수는 기존 사회의 기성 질서에 무조건 순종적이지도 않고, 완전히 혁명적으로 거부하는 입장도 아니다. 대체로 개혁주의적인 것이다. 개김과 순응의 적당한 섞임. 그 배합 비율은 격변적 사건의 경험이나 계급 세력관계에 따라 매번 바뀐다. 또 개인마다 다르다.


그래서 다시 강조하건대, 우리가 지각 있는 인간이라면 이념/이론/세계관에서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첫째, 이념 없는 정치는 없다. 없는 걸 하자고 하는 사람은 사기꾼 아니면 무능한 인물일 것이다. 세계를 일관된 틀로 해석할 수 없는 정치가 미래 사회의 설계를 내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념 없는 정치는 전형적으로 흑묘백묘론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배부르면 그만 아닌가. 그러나 내가 왜 배고픈지를 알려고 해야 한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가도, 밥은 나오고, 부자들의 시종이 돼도 밥은 나온다. 굶어가며 투쟁하는 것도 밥을 위해서다. 


힘들고 지쳐도 정해진 시간 동안 노동력을 팔고, 비굴하게 웃고, 때론 땡볕에 집회를 하고 밥새워 농성을 하고 심지어 공장을 점거하고 경찰과 싸워야 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수틀리면 단식과 고공농성 같은 것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떻게 배를 채울 것인가도 중요하다. 작은 성과, 작은 승리의 경험 좋다. 지금보다만 나으면 좋은 거다. 그런데 그 밥은 계속될 수 있는가? 아닌가? 이런 걸 이념 없이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박근혜가 너무 나쁘니까 유승민이 박근혜에게 이기면, 그 자체로 진보인가? 맥락은 진보되, 그 자체는 진보가 아니다. 유승민이 부상하는 게 어딜 봐서 진보인가. 박근혜도 망설이던 싸드 도입하자고 난리치던 인간인데. 


다만 맥락상 대통령 권력이 약화되는 것은 노동자들이 투쟁에 나서는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맥락상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좋은 건 왜 좋은지, 왜 좋게 됐는지, 좋은 일이 계속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 알아야 한다.


심지어 무엇이 정말로 좋은 건지에 대해서도 일관된 판단 기준이 있어야 한다. 나는 이런 판단의 기준이 될 이념(이것의 통속적 버전이 가치관/세계관) 없이 무엇으로 이런 걸 판단할 수 있다는 건지 도저히 알지 못한다.


사실 밥에 의존하는 것은 노동자에게 솥도, 쌀도 없기 때문이다. 급진적 이념? 과격한 투쟁? 이 모든 게 세상이 노동자들에게 아무런 생활수단도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운 좋으면) 착취받는 노동에 평생 시달려야 하고, 그 자리를 더 좋게 하려고 조직하고 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노동계급의 이념/이론이다. 


이것을 체계 있게 이해하는 것이 바로 이념/이론이고, 없는 사람이 더욱 더 이념/이론을 소중히 여겨야 하는 이유다. 노동자들은 여럿이 싸워야 막강한 힘을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념/이론은 더 체계화돼야 하고, 효율적인 수단으로 보급돼야 한다. 이념/이론에 바탕한 조직이 필요한 이유다.


둘째, 그러니 없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문제와 이념을 배치시키는 것은 사실은 이념이론 일반이 아니라 특정한 이념/이론, 즉 계급투쟁의 이념/이론을 배제하자는 것이고, 투쟁의 고단함과 헌신을 버리자는 말의 그럴싸한 포장인 것이다. 


자력 해방을 위한 싸움이 필요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투쟁 없이는 자기 몫을 정당하게 쟁취할 수가 없다. 자기 행동 속에만 대중은 스스로의 힘에 대한 자기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이런 투쟁을 소모적으로 보는 것은 자력 해방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이고,  그것은 사실상 그 가능성, 즉 노동계급 대중의 잠재적 자력 해방 능력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대중 스스로 해방적 이념/이론을 비교 검토하고 취사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다.


셋째,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세계를 총체적으로 체계 있게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 때다. 노동자에겐 늘 계급의 이해관계에 기초한 이념/이론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그러한 사회를 총체적으로 분석해 이해하고 변화의 길을 제시하는 이념/이론이 필요한 때다.


세계적 규모의 경제 위기가 국제정치의 향방을 한계 짓고, 국내의 임금, 노동조건, 복지 삭감을 추동한다. 이런 배경에서 강대국 간 갈등이 고조되며, 각국에서 정치 위기와 계급 적대가 격화되고 있다. 즉 노동자 개인들의 삶을 옥죄고 밥그릇을 위협하는 것이 거대한 사회구조적 위기와 연관돼 있다는 것이다.


법으로, 단협으로, 작업장의 관행으로 애써서 쌓아놓은 개혁 성과들이 반복해서 도루묵이 되기 때문에, 이 사회의 어떤 면이 그렇게 만드는지, 항구적 개혁을 이루려면 사회의 무엇, 또는 사회를 어떻게 바꿔야 하는지 명확해질 필요가 있다. 


반면, 갈수록 주류 언론, 출판, 교육 등은 노동 대중의 이런 욕구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개혁을 주지 못하는, 심지어 개혁을 도로 빼앗는 개혁주의 조직[기구]들도 대중의 욕구에, 또는 새로운 이념 제시에 실패하고 있다.


넷째, 따라서 이런 때에 자칭 ‘진보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이념의 정치화’ 자체를 문제 삼는 것은, 우경화의 정당화, 책임회피, 무능 셋 중 하나라고 본다. 대부분은 셋 다다. 이해하지도 못하는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으며, 대중에게 뭘 바꾸자고 설득할 수 있겠는가.


인식 상의 선택 기준과 방식을 포기한다는 것은 일관된 잣대 없이 그때그때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식으로 판단하겠다는 것이다. 이념 배척주의가 실용주의인 이유다.


다섯째, 그래서 이들의 이념 포기 선언은 모든 이념의 포기 선언이 아니다. 사회를 변혁하자는 좌파 이념, 급진적 이론과 결별하자는 선언이다. 갈수록 하층민들을 나락으로 내모는 세상의 구조를 현상유지하면서 세탁질, 땜질에 그치자는 정치다. 그러므로 이것이 누구에게 보여 주려고 하는 선언인지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오늘날 유럽판 진보정치의 대표주자인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위기는 단지 외부적 위기만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대표한다고 했던 바로 그 사람들에게서 환멸과 분노의 대상이 되고 있다.


노동자 대중이 이런저런 방식의 세탁질에 이제는 기대할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정치 위기, 좌우 양극화(극우/파시스트의 성장과 좌파개혁주의 정당의 부상) 등이 일어나고 있다. 다수의 ‘상식적 개혁주의’ 세계관에 균열이 생기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역사적 변화의 현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정리하면, 이념이 대중에게 필요없다거나 대중은 이념적 정치를 원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현상만 보고 이면을 보지 않는 것이고 사실은 대중을 수동적 객체로 보는 것이다. 이념을 이해하고 검증해 자기 것으로 만들 대중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출발부터 자기제한적인 것이다.


일상적 시기에 노동계급 대중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힘은 잠재력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이를 확인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구조적 잠재력이므로 이론(이념)적으로 이를 증명해야 하고, 둘째, 불가피하게 거듭 치러내야 하는 투쟁이 확대되고 깊어지며 스스로 힘을 자각하는 경험이 필요하다.


따라서 노동운동 정치에서 이념을 버리자는 말은, 노동계급 대중의 삶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세상을 바꿀 그 잠재력을 부정함으로써 가장 유력한 길을 봉쇄하는 것이다.


이념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실용주의 언사들이 실천적으로 뜻하는 바는, 선거에서 좋은 당선자를 내는 것으로 진보정치의 임무, 진보적 노동 대중의 임무가 끝난다는 것이다. 이념을 따지지 말거나 이념적으로 편향된 인상을 주지 않아야 일상적인 때의 선거에서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념 배제론은 정치인과 지지자들의 맺는 관계가 투쟁에서의 소통과 연대, 논쟁이 아니라 선거 시기에 표를 매개로 이뤄지는 관계가 돼야 한다고 보는 셈이다. 배신당한 유권자들이 다음 선거에서 사후 복수 하는 것 말고는 사태를 바로잡을 수 없는 관계다. 거의 1백 년 가까이 개혁주의 정당들의 반복된 국제 경험이다.


때문에 실용주의의 자기제한적 발상으론 애초에 승리하는 싸움을 만들어내기가 어렵다. 아 ... 허무해라.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