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더니, 취임 한 달 동안 박근혜 정부의 꼴은 마치 한 2년은 지난 정부 같았다. 장차관급 고위 인사들이 비리 혐의로 임명장도 받기 전에 일곱 명이나 짐을 쌌다. 일곱 번째 낙마 직후, 친박계인 새누리당 대변인 이상일마저 “청와대는 반성해야 할 것”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한국갤럽 최근 조사에선 국정수행지지도가 40퍼센트 초반으로 취임 초기 지지율로는 역대 최저다. 장관급 인사 네 명이 낙마하고, 임기 초 지지율도 당시까지 역대 최저였던 이명박보다도 못한 것이다.
새누리당은 서울 노원 병 보궐선거에 ‘필승을 위한 인사’를 전략 공천하지 못했다. 물론 안철수가 당선해 야권을 분열시키기 바라는 속셈도 있긴 할 것이다. 그러나 승산이 없다고 다들 출마를 기피한 탓이 더 크다. 정권 초 선거에서 집권당의 무기력함은 시사적이다.
이처럼 예상보다 빨리 정치 위기가 찾아왔지만, 박근혜를 괴롭히는 위기의 요소들이 충분히 무르익은 것은 아니다. 그래서 고위 권력층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던 별장게이트 수사는 주춤하고, 새누리당 안의 청와대 책임론은 실무진 책임론으로 빗겨가고 있다. 개별적 반발들은 있지만 새누리당은 여전히 박근혜 국회 거수기 구실에 머물고 있다.
이명박이 첫해에 레임덕 위기에 빠진 것을 기억하는 박근혜는 조기 레임덕을 막으려고 친정체제를 더 강화하고 있다. 이것은 강성우파들이 지금보다 더 전면에 포진할 거라는 뜻이다. 위기 속에서 우파적 공세 전환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흡이 낙마한 헌법재판소장 자리엔 우파 기질로는 뒤지지 않을 박한철을 내정했다. 2008년 촛불운동 때 대검 공안부장으로 강경 대응을 지휘했고, 김앤장에서 ‘전관예우’를 받았다.
또 방송통신위원장에는 측근 이경재를 내정했다. 그것도 방송 장악 음모라는 의혹에 스스로 ‘어떠한 사심도 없다’고 했던 대국민 담화를 단번에 뒤집은 것이다. 비록 낙마했지만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겼다”는 평을 들은 공정거래위원장 인사도 그런 사례였다.
강성 우파 육군 대장 출신이 국방장관 뿐아니라 청와대 안보실장(신설), 경호실장, 국가정보원장 등 요직을 꿰찼는데, 시사적인 건 이들 중 가장 선임이 새 국정원장 남재준이란 점이다. 국정원장에 무게중심을 더 얹었다는 것이다. 당장 남재준은 “안보 수사는 … 북한의 의도도 잘 아는 국정원이 하는 것이 능률적”이라고 국정원 수사권을 옹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3월 26일 박근혜가 ‘사이버테러 위기 대응이 분산돼 있으니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하자마자, 새누리당은 ‘국가사이버위기관리법’을 발의하겠다고 나섰다. 핵심 내용은 국정원의 민간 수사 권한을 더 크게 강화하는 것이다. 국세청, 감사원을 동원한 사정 정국도 예고하고 있다.
박근혜는 이런 과정을 통해 국가기구를 단속하고 사회 분위기를 냉각시켜 손상된 국정장악력을 회복하려고 한다. ‘국가 기강 세우기’를 내세우는 이유다. 이것은 한편에선 사정 정국을, 한편에선 ‘반국가·반헌법’ 세력이라고 좌파를 마녀사냥하는 ‘종북 몰이’를 예고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과정이 순탄치는 않을 것이다. 위기의 성숙도가 아직 낮아 가까스로 봉합은 할 수 있어도 위기의 요소들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선, 복지 공약 먹튀에 서민 증세 계획, ‘부패’·‘우파’ 코드 인사 등으로 통치의 정당성, 즉 신뢰의 위기를 불러 온 당사자는 박근혜다. 우파 본색 강화는 이 위기를 더 심화시킬 수 있다.
사실 역대 정권 중 임기 초 사정 드라이브가 효과를 본 것은 김영삼 뿐이다 1. 집권 당시 지배계급 내 소수파였던 이들의 국가기구 내부 숙정이 군부와 민정당 기반의 옛 지배세력 솎아내기로 비춰졌기 때문이다.
특히 김영삼은 하나회와 재벌을 공격해 크게 지지를 받았다. 김영삼은 임기 초 지지율이 70퍼센트가 넘었는데 2 이런 내부 숙정으로 지지도가 더 크게 올랐다. 물론 김영삼은 진정한 개혁이라기보다는 자신의 권력 공고화를 위해 이런 일을 벌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조건 때문에 포퓰리즘적 활용의 여지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박근혜는 사정 대상이 돼야 할 보수적 국가관료와 재벌들이 자신의 핵심 기반이다.
“걸레경연대회”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박근혜 인사가 복마전이었던 것도 이 인적 기반이 박정희 시절부터 국가와 사회의 최상층부에서 군림해 온 주류 지배자들이기 때문이다. 전관예우와 회전문 인사 등은 이들의 부패한 연결망을 얼핏 보여 준 것 뿐이다.
따라서 검찰, 감사원, 국세청, 국가정보원 등을 동원한 전방위적 사정 정국은 자칫 자신의 핵심 기반을 건드릴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에겐 우파 결속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다. 그래서 결국 박근혜의 공직기강 다잡기는 ‘이명박 측근 몰아내기를 통한 전 정권 색깔 지우기’ 수준에 그칠 수밖에 없다. MBC 사장 김재철 해임처럼 말이다.
무엇보다 박근혜 정치 위기의 근본 배경에는 경제 위기 심화 조짐이 있다. 가까스로 임명장을 받은 경제부총리 현오석은 첫 경제관계장관회의에서 “성장률이 사상 처음으로 7분기 연속 전기 대비 0퍼센트 대 저성장 흐름을 계속하고 있다”며 불안감을 토로했다.
여기에 북한 핵을 빌미로 한 동아시아 군사 갈등이 격화하고 있다. 한국 자본주의는 그동안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가 커져 왔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한미동맹을 추구해 온 한국 지배자들조차도 미·중 갈등이 커져 가는 지금의 대외 환경이 썩 편한 것만은 아니다.
한미일 동맹 강화도 일본의 우경화와 결부돼 있기 때문에 대중의 반감을 고려해야 하는 한국 지배자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런 위기 요소들이 건재하기 때문에 박근혜가 친정체제를 구축하며 일시적으로 위기를 봉합하더라도 위기 재발 가능성은 여전하다.
그런데 바로 이 때문에 박근혜는 정치 위기 재발과 통치 기반 약화를 피하려고 더 신경질적이고 더 필사적이다. 좌파를 희생양 삼아 사회 분위기를 냉각시키고, 지배계급의 우파적 결속을 도모하는 것이 중요한 통치 방식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4대악 범죄와 무질서 때문에 사회 혼란과 범죄가 만연하고 있다며 공포를 조장하고, ‘법과 질서’를 강화하겠다고 나설 것이다. “○○와의 전쟁” 따위가 유행할 것이다. 부정부패 척결도 명분으로 동원될 것이다.
이처럼 “법과 질서”강조·강화로 통치의 정당성 위기를 만회하려는 맥락에서 노동계 진보세력을 “반헌법”·“종북” 세력으로 몰면서 속죄양 삼으려 할 것이다. 검경 등 권력기관들의 사회통제 권한을 전반적으로 높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박근혜 위기와 모순을 폭로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한데, 마찬가지로 대중에게 우파 정부의 흉악한 발톱이 드러나는 조짐을 경고하는 것도 필요한 때다.
박근혜의 진보정치 솎아내기는 앞으로 경제 위기가 더 심해지고 고통전가 정책이 펼쳐질 경우, 그 불만이 진보정치 세력들의 성장으로 수렴하는 것을 선제 예방하려는 의도도 있을 것이다. 새누리당 의원 김태흠은 ‘종북 당은 해산해야 한다’며 통합진보당 이석기·김재연 의원 자격심사안의 본심을 드러냈다.
문제는 박근혜의 위기 시기에 진보진영도 분열과 위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진보정치 세력과 노동운동은 복지 먹튀를 폭로하며 박근혜의 위기를 활용해 진보의 독자 대안을 제시하는 일을 제대로 못 하고 있다.
야금야금 먹어 들어오는 공격에 매우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고 있다. 오히려 무기력·무대안으로 힘겨워하고 있다. 진보정의당 의원 3명이 정부조직법에 찬성하고 통합진보당 의원 자격심사 문제에 침묵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안철수가 이 틈을 비집고 4·24 재보선에 출마해 “새 정치”라는 모호한 구호로 반새누리·비민주당 층을 가로채 가려는 것이다.
우파 정부의 위기가 자동으로 진보에게 반사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명박 정부 때의 교훈이다. 임기 첫 해 지지율 10퍼센트로 추락해 내내 허덕였지만, 결국 새누리당은 연속 집권에 성공했다. 진보가 분열해 독자 대안을 내놓고 행동을 건설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박근혜가 우파 본색으로 위기의 돌파구를 열려고 하는 지금, 결국 중요한 것은 진보적 노동운동의 대응 여부일 것이다. 발톱을 드러내는 박근혜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 공세에 맞선 단결된 투쟁 건설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이 당장 쉬워 보이지는 않는다. 이럴 때는 운동의 과제를 내놓는 것 뿐만 아니라. 이런 과제들, 즉 원칙에 기초한 단결, 단호한 대중투쟁 건설을 바라는 사람들을 묶어 세울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급진좌파가 해야 할 임무다.
진주의료원 폐업 반대 투쟁에 사회적 연대 건설과 함께 보건 노동자들의 연대파업 같은 단호한 전술을 주장하고 건설하려 해야 한다. 진보의 독자 대안을 내놓는 것도 필요하다. 복지 먹튀에 대응하는 부자 증세와 부실 기업 공기업화를 통한 고용 보장 요구 같은 것 말이다.
유연하고 개방적 태도도 필요하다. 각자도생 상황 속에서도 특정 사안에 대한 협력은 여전히 가능하다. 이런 최소한의 협력에 걸림돌이 되는 관료적 투쟁회피주의, 패권주의, 종파주의를 경계하는 것도 필요하다.
과장도 회피도 하지 말고, 박근혜의 위기와 모순을 폭로하면서, 노동계급 운동의 정치적 지도력 재건 방향이 더 좌파적이고 급진적이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장 단결과 운동의 지도력 회복이 더디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이런 방향에 동의하는 이들의 네트워크를 자신들의 주변에 건설하려 해야 한다.
'기사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38조 원은 체불임금이다, 이 도둑놈들아! (0) | 2013.05.10 |
---|---|
한숨돌린 박근혜, 공세 전환? (0) | 2013.04.18 |
별장게이트 ― 저들의 특권 세계 (0) | 2013.03.28 |
“법과 질서”―강성 우파의 전통 매뉴얼 (0) | 2013.03.03 |
“걸레 경연대회”에 나선 박근혜의 사람들 (0) | 2013.03.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