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박근혜는 IMF 위기로 ‘아버지가 이룬 나라가 망가지는 걸 두고 볼 수 없다’며 정계에 복귀했는데, 그녀가 지지한 신한국당이야말로 경제 위기를 불러 온 당사자로 지탄받고 있었다.


그녀는 이름을 바꾼 한나라당에서 승승장구하다가 2002년 대선을 앞두고 당의 대선 후보로 뽑히기 힘들 듯하자, 측근들을 데리고 탈당해 한국미래연합을 만들었다.


1981년 일기에서 “유신이 없었다면 공산당의 밥이 됐을 것”이라던 박근혜는 남북 평화 기조가 국민의 지지를 받자, 그 해 방북해 김정일과 단독 회담을 하며 남북한 신뢰 구축을 내세웠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지지율이 떨어지자, 그녀는 한국미래연합 창당 비용 2억 원을 한나라당한테 받고 복당했다. 사실 이 돈은 훗날 문제가 된 “차떼기 대선자금”에서 나온 것일 테다.


그런데도 2004년 총선을 앞두고 박근혜는 시치미를 뚝 떼고 바로 그 차떼기 수사와 노무현 탄핵으로 궁지에 몰린 한나라당의 당권을 차지했다. 사실상 중도 표가 다 날아가는 상황에서 우파와 영남 지역 표라도 끌어모아 피해를 최소화해보려는 우파의 시도였다.


그때 차떼기 자금을 파헤쳐 유명해진 대검 중수부장 안대희는 유독 박근혜의 자금 수수 부분은 수사를 하지 않았는데, 그는 이번에 박근혜 캠프에 발탁됐다.


박근혜는 2004년 가을에 이른바 4대 개혁 입법(국가보안법·사립학교법·과거사규명법·언론관계법 개정) 반대 투쟁에 ‘올인’했다. 그녀는 이 투쟁을 “국가정체성 수호” 투쟁이라고 불렀다.


이 투쟁을 놓고 당내 논란이 일었는데, 박근혜는 자서전에서 당시 의원총회를 이렇게 회상했다. “가장 민주적 방법으로 투표를 통해서 대표인 나에게 모든 것을 일임해 주었다.” 이것이 2002년 한나라당 탈당 때부터 ‘정당 개혁’을 내세우는 박근혜의 ‘민주주의관’이다.


당시 법사위원장이던 한나라당 최연희가 ‘[여론 때문에] 버티기 힘들다’고 하소연하자, “도대체 국가관이 있는 겁니까?” 하고 호통을 치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에서 위세를 떨치던 공안검사 출신에게 ‘국가관’을 따져 물을 정도니 박근혜의 국가관이 얼마나 우파적인지 알 만하다.



2005년 12월 16일 사학법 개정 반대 집회에서.



그녀의 국가관은 1퍼센트 기득권 세력을 철저하게 옹호한다는 점에서도 우파적이었다. 박근혜는 노무현의 온건한 사립학교법 개정을 놓고 “나라의 정체성을 뒤흔들어 놓는 법은 절대 통과되어서는 안 되며 법의 뿌리가 허물어지면 대한민국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고 강변했다.


박근혜는 사실상 소유주로 영남대 이사장을 지냈고 1989년 학원 민주화 투쟁 때 쫓겨난 바 있다. 이명박 정부 아래서 개악된 사학법으로 가장 먼저 구 재단이 복귀한 곳이 바로 영남대다.


정수장학회 강탈 사건의 과거 진상 규명이 시작됐을 때는 “정치탄압”이라며 반발하면서도 뒤가 구린지 금세 이사장을 사퇴했다. 물론 유신 때 자신의 비서관 출신을 후임으로 앉혀 놓고 말이다. 그 후임이 최필립인데, 그는 자신의 외교부 동료와 후배들로 이사진을 채웠다.


노무현 정부의 배신과 실패가 낳은 환멸 때문에 우파 집권이 확실해 보인 2007년 대선 때는 ’줄푸세’를 내세우며 우파들한테 아부하느라 정신 없었다.


뉴라이트 회합에 가서는 “제가 꿈꾸는 사회도 바로 뉴라이트가 꿈꾸는 사회와 같다. 법치주의가 확립되고, 공권력이 바로 서야 한다”고 했고, 기업인들에게는 “크기만 하고 무능한 정부, 불법파업과 집단 이기주의, 기업은 규제로 묶이고 국민의 마음은 갈라져 있는 것, 이것이 우리 경제의 큰 병”이라며 신자유주의 우파 정부를 약속했다.


이러던 박근혜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반감에 바탕해 무상급식 등 진보 의제가 사회적으로 우위에 서자 “내 아버지의 꿈이 복지국가”라는 궤변을 내뱉으며 복지와 경제 민주화를 내세우기 시작했다. 2009년 미국 스탠포드 대학 강연 때부터 말을 바꾼 것이다. 


박근혜는 2008년 총선 공천에서 친박계가 ‘학살’된 뒤, “국민도 속고, 나도 속았다”고 이명박을 성토했지만, 정작 18대 국회에서 이명박의 친기업·반민주·반노동 정책과 대립한 적이 없다. 4대강, 부자 감세에 적극 찬성했고, 쇠고기 협상 결과, 쌍용차와 용산 사태에는 침묵했다.


유일하게 이명박과 대립한 게 행정수도 문제였는데, 사실 박정희가 1970년대 말에 지금의 세종시에 포함된 충남 연기군 장기지구를 유력한 제1후보지로 놓고 행정수도 이전을 기획하고 추진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박근혜의 집착이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이명박 도움을 얻어 영남대재단에 복귀하는 과정에서는 복귀에 반대할 것이 뻔한 영남대의료원 노조를 극렬하게 탄압했고, 지금껏 그 탄압이 이어지고 있다. 


박근혜는 2007년 인혁당 사건 재심 판결 직후에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사건 때도 민간인들이 죽고 군경이 희생되었지만, 친북좌파들은 이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며 유족에 대한 사과 요구를 궤변으로 일축했다. 


그래 놓고는 이제 와서 대선에서 불리할 듯하니, 자신은 예전부터 사과의 뜻을 밝혀 왔다고 말을 바꾼 것이다.





이런 박근혜에게서 진정한 소신과 일관성을 찾으라면, 그것은 반동적 쿠데타와 1퍼센트 기득권을 옹호하는 정권을 세우려는 추악한 권력욕일 뿐이다. 박근혜에겐 어떻게든 집권해 국가의 힘으로 반동의 시대를 여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는 길’일 것이다.


진보진영에는 이런 추한 우파의 집권을 막을 반우파 정치투쟁을 광범하게 건설할 과제가 있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안보’와 ‘성장’이라는 우파 프레임에 굴종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그 때문에 박근혜 대세론에 균열이 가는데도, 지지세가 붕괴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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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에 대해서도 … 아버지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그렇게까지 하시면서 나라를 위해서 노심초사하셨습니다. 그 말 속에 모든 것이 다 함축돼 있다, 이렇게 생각하고요.”


박근혜가 또 민주주의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의 얼굴에 침을 뱉었다.


박근혜는 30여 년 전 일기에서 “유신 없이는 아마도 공산당의 밥이 됐을지도 모른다 … 혼란 속에 나라를 빼앗기고 공산당 앞에 수백만이 죽어 갔다면 그 흐리멍텅한 소위 민주주의가 더 잔학한 것이었다고 말할지 누가 알 수 있으랴” 하고 민주주의 혐오증을 드러낸 바 있다.


이것이 “바뀌네” 쇼를 하며 전태일과 ‘국민대통합’ 하겠다던 박근혜의 실체다. 



△“아버지보다 더한 딸이다” 9월 12일 새누리당사 앞에서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을 열고 오열하는 ‘인혁당 사건’ 희생자 유가족들. ⓒ사진 고은이



이런 본색 때문에 수도권 청장년 세대와 중도층에서 ‘박근혜 거부’ 정서는 꽤 강력하다. 이들이 연말 대선 때 박근혜 반대표를 찍으려고 투표장으로 몰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박근혜는 갖고 있다. 그래서 새누리당 한 관계자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외연 확대는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라는 말도 했다. 


 그러나 쌍용차 해고 노동자를 끌어내면서 전태일 동상에 헌화하겠다는 식의 추잡한 연극은 처음부터 오래 갈 수 없는 운명이었다. 추악한 본색은 웬만한 화장으로 가려지지 않고 있다. 아니, 가려질 수도 없다. ‘광폭’ 행보는 이제 독재정권의 ‘광기 어린 폭력’을 옹호하는 행보가 되고 있다. 


박근혜는 박정희 독재를 사과하거나 반성하거나 하는 일을 결코 할 수 없는 인물이다. 무엇보다도 박근혜의 현재가 유신체제의 유산을 딛고 서 있기 때문이다. 


우선, 박정희가 강탈한 재산으로 만든 육영재단, 영남학원(영남대), 정수장학회, 한국문화재단 등이 박근혜가 1퍼센트 특권층의 삶을 유지하며 정치 활동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돼 왔다. 


청와대를 나온 박근혜에게 전두환은 청와대에서 발견한 박정희의 비밀 자금 6억여 원(현재 가치로는 수백억 원)을 줬다. 그리고 박근혜가 활동을 재개한 첫 기반은 육영재단과 영남대재단이었다. 1995년부터는 11년간 정수장학회 이사장을 지낸다.



1979년 강남은마아파트 전단지. 평당 68만 원으로 계산하면, 박근혜가 받은 6억 원의 현재가치를 짐작할 수 있다. 은마아파트 30채를 살 수 있는 돈이었다. 이를 지금 시세로 하면???



지금도 <부산일보>의 실질적 소유주인 정수장학회는 아바타 사장을 심어 놓고 박근혜 비판 보도를 한 기자들을 징계ㆍ해고하며 편집권을 통제하고 있다.


박정희 일가의 돈은 단 한 푼도 들어가지 않은 이런 강탈 ‘재단’들을 박정희가 죽은 뒤에도 박근혜 일족이 소유하게 된 데에는 또 다른 ‘유신 적자’ 전두환의 배려가 크게 작용했다. 전두환은 비자금을 종자돈으로 줬을 뿐아니라, 문제의 재단들을 국가가 환수하지 않고 박근혜가 운영하도록 했다. 


정수장학회의 장학생 출신자 모임인 상청회는 박근혜의 대선 사조직 기반이다. 7인회 소속인 김기춘과 현경대가 이 모임의 1,2대 회장 출신으로 상청회 두 축이라 불린다. 


현재 장학금을 받고 있는 재학생들 모임인 청오회도 2007년 이후로 정치적 동원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다. <시사인>은 출결 관리를 하며 행사에 동원한다는 의혹을 제기한 바도 있다.


또한 최근 폭로된 자료를 보면, 박근혜와 그 친지, 측근들 스물두 명이 문제의 재단 네 곳 중 최소 두 곳 이상의 이사를 순환하며 맡아 왔다. 


△10일 오전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앞에서 정수장학회 공대위 주최로 "정수장학회 해체 촉구와 고(故) 김지태 유족 입장발표 및 독립정론 부산일보 쟁취를 위한 상경 농성 돌입" 기자회견이 열리고 있다. ⓒ사진 박재광


박근혜는 박정희의 반동적 이데올로기와 정책도 고스란히 상속 받았다.


5ㆍ16 쿠데타, 유신, 장준하 의문사, 인혁당 사형 등에 대한 박근혜의 반동적 입장과 생각은 확고한 신념으로 굳어져 있어서 쉽게 가려지지도 바뀌지도 않는 것이다. 


올해 초 제주 해군기지 반대 운동이 부상하자, 박근혜는 “제주를 [해군기지가 있는] 미국의 하와이처럼 만들자”고 말했는데, 사실 제주도에 미군이 사용할 해군기지를 만들자는 제안을 한국에서 가장 먼저 한 자가 바로 박정희였다. (실제 공군기지로 사용한 건 일본 제국주의였다. 그 알뜨르 비행장은 강정 해군기지 완공시 부속 공군 기지/활주로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다.)

박정희는 1969년 6월 1일 <워싱턴포스트>와 기자회견을 하면서 제주도의 미 해군기지 제공 의사를 밝혔다. 막 취임한 미 닉슨 행정부에게 잘 보여 지지와 지원을 받으려는 속셈이었다. 당시 미국은 해군기지가 있던 오키나와를 일본 영토로 반환하는 문제로 골치를 썩고 있었다.


최근 김종인과 이한구 등이 대선 캠프의 주도권을 놓고 다투는데, 사실 2인자들을 여럿 두고 경쟁시키며 일인 권력을 강화하는 방식도 박정희의 것이다. 


박근혜가 철두철미하게 박정희의 ‘아바타’처럼 구는 것은 정치·재정적 ‘유산’ 때문만은 아니다. 그 스스로 유신체제 권부의 일원이었기 때문이다. 


박근혜는 1974년부터 공식적 퍼스트레이디로 청와대에서 공식으로 예산과 비서관을 두고 정치 활동을 했고, 유신 말년에 새마음운동 총재로 행사를 열 때는 장관, 서울시장, 정주영 같은 재벌들이 ‘수행’으로 나서는 등 위세도 대단했다. 그는 구국여성봉사단으로 1백만 명이 넘게 사람들을 모아 ‘거느렸다.’ 


박근혜가 최근 ‘1975년 인혁당 사건 판결은 고문과 허위 자백에 바탕한 조작이었다’는 2007년 법원의 재심 판결을 인정하지 않는 것은 자신도 이 범죄의 책임자 중 하나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때 이미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처럼 뼛속까지 독재 DNA로 충만한 박근혜에게서 ‘과거사 반성’이니 ‘경제 민주화’와 ‘복지’ 따위를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사실 박근혜가 내건 “100퍼센트 국민대통합”이란 구호도 “1퍼센트에 맞선 99퍼센트” 같은 [계급투쟁을 상징하는 구호가 유행하는 등] 급진화에 맞불을 놓는 우파적 구호에 불과하다. 


게다가 박근혜의 핵심 기반인 1퍼센트 지배자들은 ‘경제민주화’ 같은 사기성 구호들조차 불편해 한다. 이는 세계경제 위기가 다시 확산하면서 한국 경제에도 위기감이 감도는 것과 결코 무관치 않다. 


게다가 우파 집권당의 유력한 차기 대선 후보가 “경제 민주화”나 “복지국가” 같은 구호들을 내세우는 것이 사람들의 기대감을 자극해 오히려 부메랑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박근혜 본인도 ‘경제민주화’와 ‘줄푸세’는 다를 게 없고, 감세를 강하게 말하지 않는 건 이명박이 감세를 잘 해서라며, 복지를 위한 재정 확대(증세)에는 반대한다는 식으로 말을 바꾸며 뒷걸음치고 있다.


물론 박근혜의 본색이 이렇다고 해서 당장 쿠데타가 일어나고 유신 체제가 복귀하는 일이 벌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경제위기 조짐들 속에서 박근혜의 당선은 지배계급 내에서도 각별히 구시대적인 우파들이 득세할 가능성을 높일 것이다. 


박근혜는 진흙탕 선거전으로 판 자체를 더럽게 만들어 노동계급 청년세대가 냉소적으로 투표에 기권하도록 만드는 한편, 우파를 단단히 결집시키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다고 계산하는 듯하다. 진보진영의 자중지란과 민주당의 지리멸렬 덕분에 이런 책략이 어느 정도 통할 수 있는 것이다.(건질 게 별로 없던 문재인의 오늘 대선후보 수락 연설을 보라.)


그러나 2002년에도 이회창 대세론이 거셌지만, 미군의 여중생 살해 사건에 항의하는 청년들의 시위가 서울 한복판에서 최대 40만 명까지 참가하는 운동으로 발전하면서 결국 이회창은 집권에 실패했다. 


당시 거대한 대중투쟁은 노동자ㆍ청년 들 속에서 냉소를 걷어내고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줬다. 


그러한 반우파 대중투쟁과 진보 대안 건설 노력을 결합시키는 것을 통해서 진보의 가치와 요구를 의제화하고 우리 편의 사기를 높인다면 박근혜 대세론에 균열을 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대선 이후 (누가 당선하더라도) 불의한 반민주ㆍ반노동 정책들을 쉽게 추진 못 하게 할 힘을 축적할 수 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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