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일 ‘노동ㆍ정치ㆍ연대’가 출범했다. 노동ㆍ정치ㆍ연대는 노동정치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가 노동 중심의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만든 중앙추진체다.


연석회의에는 공공운수현장조직(준), 노동자교육기관, 노동자연대다함께, 노동자정당추진회의, 노동포럼, 전국현장노동자회, 혁신네트워크 등 7개 단체가 가입해 활동해 왔다. 노동ㆍ정치ㆍ연대는 전국에서 더 많은 단체와 개인들의 가입을 받을 계획이다.


이들은 노동기본권과 고용안정 보장, 민영화 중단, 보편복지, 한미FTA 등 신자유주의 경제협정 폐기, 노동악법ㆍ반민주악법 폐기 등 노동계급의 당면 문제 해결을 기본 과제로 내놓고 있다.


그동안 노동계 진보정치의 분열로 ‘각개 기어가기’가 노동조합의 투쟁에도 좋지 않은 영향을 미쳐 왔다. 그것은 또, 공식 정치에서 진보정치의 존재감을 왜소화시켰다.


이런 상황에 비춰 보면, 민주노총의 전ㆍ현직 지도자들과 노동운동가들이 모여서 노동계 정당을 재건해 노동자 정치운동의 사분오열 상황을 극복하자는 것은 환영할 일이다.


이날 출범식에 권영길ㆍ단병호ㆍ이수호ㆍ임성규ㆍ신승철 등 민주노총 전ㆍ현직 위원장들과 정의당ㆍ노동당 지도부가 대거 참석한 것도 노동자 정치운동의 단결 염원을 보여 준 것이다.


물론 걸어온 길보다 갈 길이 더 많이 남아 있다. 진보정치 운동의 분열이 남긴 정치적 상처가 아직도 심하기 때문이다. (※ 물론 아직은 역량상 당장 당을 만들어내는 수준의 활동을 할 수는 없다. 단체와 취지를 알리는 것과 함께 아마 내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민주노총과 연계한 공동 선거대응 협의틀을 만드는 게 당분간은 주된 활동이 될 듯하다.)


그럼에도 노동ㆍ정치ㆍ연대의 출범은 노동운동 내 주요 지도자들이 진보정치의 분열과 그로 말미암은 주변화를 극복하려고 나서기 시작했음을 보여 준다.




배신의 역사?



한편, 이런 재편과 단결을 위해서는 옛 민주노동당 등 정치세력화 운동의 최근 과거를 공정하고 정직하게 평가하는 일도 중요할 테다. 


그런데 일부 좌파는 민주노동당과 제1기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역사를 지도자들의 온통 배신으로 점철된 역사로만 평가한다.(이런 평가에 따르면 노동·정치·연대의 출범도 과거의 재탕일 뿐이다.) 


물론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노무현 정부와 일부 노조 지도자들의 배신에 모호한 태도를 취했다. 또, NL계 지도부가 ‘묻지마 야권연대’,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추진한 것도 잘못이었다.


그러나 ‘올바른 대중과 배신적 지도부’라는 구도로만 사태를 설명하는 것은 공정하지도, 정확하지도 않다.


이런 관점으론 우여곡절 속에서도 2007년 무렵까진 선진 노동자들 속에서 이 당이 성장했고, 또 선거적 성공이 노동자들의 정치적 자신감을 고무하기도 했다는 점을 설명할 수가 없다.


그래서 ‘배신적 지도자’론은 개혁주의를 지지했던 대중을 결국 수동적 허수아비로 보는 일종의 엘리트주의로 빠질 뿐이다. 올바른 강령으로 무장한 좌파가 우파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지도권만 잡으면 노동운동의 정치적 약점들이 바로잡힐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이런 발상은 종파주의와 선전주의로 빠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배신과 음모로만 설명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체제 안에서 겪는 노동자들의 소외, 즉 자신들이 사회를 집단적으로 통제할 수 없다는 경험과 생각에 기초한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개혁주의를 벗어나 혁명적으로 발전하는 것은 종파적ㆍ선전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개혁을 위한 투쟁 속에서 대중 자신이 자신감과 조직을 구축해 가는 과정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다. 좌파가 대중과 교류하며 실천 경험 속에서 올바름을 입증해 가는 끈기 있는 노력과 과정이 필수적인 것이다.


바로 이런 과정을 회피했기 때문에, 2000년대 내내 민주노동당 바깥에서 그저 선전주의적 비판에 주력했던 일부 좌파들은 성장의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주노동당 분당 후에 생긴 정치적 공백을 노렸던 일부 좌파들의 실험이 실패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민주노동당의 경험뿐 아니라 그 바깥 좌파의 경험에서도 배울 것이 있다.



※ 레프트21 115호. ☞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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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진보당 사태에 여러 세력의 프로젝트가 엉켜 있어 혼란스럽게 보인다. 


우선, 진보정당의 의회 세력 강화를 되돌리고 싶어하는 지배계급 우파들이 있다.

 

이들은 혁명적 [친북] 스탈린주의 출신 통합진보당 당선자들을 ‘종북좌파’로 몰며 두어 달째 흠집내 왔다. 이들이 전향 여부가 불투명한 [친북좌파] 혁명가 출신들의 국가기구 진입을 얼마나 혐오하고 두려워하는지 엿볼 수 있다.

 

그들에게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은 호재다. 일단은 그 덕분에 터져 나오는 권력형 비리를 감출 수 있게 됐다. 부패의 규모로 치면, 코끼리가 비스킷 뒤에 숨는 격이다. 역겹다.

 

무엇보다, 주류 지배자들과 우파들은 이 기회를 통해 진보정당과 진보진영의 투쟁을 동시에 약화시키고 싶어 한다. 노동운동과 연결된 통합진보당을 약화시켜 당면 투쟁들의 김도 뺄 수 있기를 바랄 것이다.

 

이왕이면 대선에서 위협적인 [진보정당을 포함한] 야권연대도 분열시키는 것이 좋다. 우파적 의제의 주도권이란 점에서 보면, 진보정당이 중요한 축의 하나가 되는 야권연대와 그렇지 않고 민주당의 오른쪽과만 하는 야권연대는 그 효과가 다를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투쟁을 당권투쟁 프레임으로 보는 통합진보당 내 세력들이 있다. 한쪽에는 당권파가 있고, 한쪽에는  ‘진보적’ 자유주의와 온건파 사회민주주의 세력의 연합이 있다.

 

애초부터 서로 다른 계급 기반을 둔 정당들의 옳지 않은 통합으로, 선거적 성공은 일시적으로 거둘 수 있어도 분열과 갈등이 조만간 발생할 것이라는 예측이 옳았던 것이다.

 

그 점에서 당명에 ‘통합’이 들어간 것은 이 당이 실제로는 한지붕 아래 여러 당들이 연합한 인민전선체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옛 민주노동당이 가장 큰 지분을 차지한 노동계급 기반이 여전한 진보정당으로서 나는 총선에서 [묻지마 야권연대에 비판을 하면서도] 선거적 성공을 바라며 전폭 지지했다.


자유주의+사민주의 연합파는 이참에 국가기구 진입에 껄끄러운 친북 공세에서 벗어나고 싶어하고 급진적 강령과 가치, 문화를 ‘낡은 운동권 관행’으로 매도해 폐기하려 한다. 이들은 제도적 민주주의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정당을 만들려 한다. 

 

그래서 유시민 공동대표는 그 첨예한 갈등과 이른바 ‘쇄신’ 투쟁의 와중에 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게 득표에 해가 됐다며 통합진보당에 남은 급진성의 흔적마저 공격했다. 뜬금없어 보이지만, 계산된 문제제기였던 것이다.


심상정 대표는 이미 2008년에 민주노총당·운동권당을 탈피하자며 국가보안법 구속자들을 당에서 제명하는 안을 ‘민주노동당 혁신안’으로 내놓은 바 있다. 그는 통합진보당의 혼란때문에 민주당과의 야권연대가 깨질까 봐 걱정하는 발언도 했다.


이들은 대선을 앞두고 당권을 장악해 대선 단일화와 연립정부 협상에서 자신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고 싶어하는 듯하다. 사태의 엄중함에 비춰, 이들의 쇄신안이 초라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이들은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으로 당면한 노동자들의 투쟁과 노동자정치세력화의 운동이 냉소와 환멸, 상호 불신과 분열,사기 저하 때문에 약화될 것을 우려해 진보의 원칙을 다시 세우며 발본적으로 혁신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국민적 눈높이’ 즉 부르주아민주주의적 상식에 걸맞는 당을 만드는 것이 목표다. 그래서 국민의례 같은 권위주의적 국가의 잔재에도 굴복하려는 것이다.


그 맞은 편에 ‘당권파’라 불리는 세력이 있다. 진보적 자본가 분파와 연합해 국가권력에 진입한다는 옛 스탈린주의의 인민전선 전략을 몇 년 전부터 추진해 온 이들도 진보정당의 우경화를 부추겨 왔다. 


인민전선적 우경화는 선거적 실용주의를 부추겨 왔다. 인민전선적 정부 수립을 하고 그 정부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참여당과 묻지마 통합을 비민주적으로 물어붙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권을 빼앗기는 것은 자신들 전략에 타격이 될 수 있다고 본 듯하다. 그러면서 사태의 한쪽 측면(우파의 공작)만 강조하고 있다.


크게 봐서 이 세력의 기획이 엉켜 있기 때문에 진보의 자기 정화 대신 당권 투쟁과 우파의 마녀사냥이 겹쳐서 대단히 혼란스런 상황이 되고 있다. 균형을 잘 잡고 원칙있게 상황을 바라봐야 할 이유다. 


당대회의 회의 방해와 폭행 사태는 우리가 오랜만에 스탈린주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한다[각주:1].(이미 인민전선 전략이 스탈린주의 문제이긴 했지만 말이다.)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건은 사건의 심각성과 더불어 우파의 음모 때문에 쟁점의 블랙홀이 되고 있다. 이보다 더 걱정되는 것은 노동자들과 진보적 의제의 투쟁들이 위축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진정한 혁신이란 이런 문제의식이 반영돼야 하고, 그래야 우리 모두 진보는 똥덩어리라는 인식의 블랙홀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자신들의 선거 부정을 가볍게 여기고 실행하는 그런 행동들에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스탈린주의 윤리관이 한몫했다. 그런데 이들의 행태에서 스탈린주의라는 뿌리를 지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선거 부정 문제가 불거지고부터다. 


이들은 선거 부정에 당내 주요 세력이 모두 책임져야 하고, 그러려면 당권파도 혹독한 책임을 지는 것이 진보의 자기 정화를 위한 선결 조건이라는 주장을 ‘쿠데타’로 규정했다. 이후 전국운영위원회와 당대회를 거치면서 이들이 보인 행태는 스탈린주의 사상의 특징을 보여 줬다.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레닌의 당 이론[각주:2]과 달리 스탈린주의에서 당은 계급을 대표한다. 그리고 당 지도부는 당을 대표한다. 사실 당이 계급을 대표한다는 사상은 20세기 초반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로 당시 ‘마르크스주의의 교황’이라 불리던 카우츠키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그러나 당이 곧 국가권력을 구성해야 한다는 엘리트적 카우츠키의 사상이 갈수록 [선거제도 같은] 현실에 적응하면서 당이 후진적인 부위의 계급까지 대표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것이 제1차 세계대전을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는 사회민주당들이 지지한 사상적 배경이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는 1928년 이후 러시아에서 새로운 지배계급로 등장한 공산당 관료들의 공식 이데올로기다. 당이 계급에 적응하기(야당인 사민당)보다는 계급이 당에 적응해야 한다(일당독재를 하고 있는 당)는 쪽에 무게중심이 실리게 된다. 당이 계급을 대표하며 따라서 혁명 이후에 당이 곧 국가권력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사실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상식(즉, ‘국민적 눈높이’)을 그다지 중시하진 않는다.(그래서 그때그때 실용주의적으로 대처한다.) 진보진영 안에서의 민주주의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배계급이 된 스탈린주의 관료들에게 자유로운 사상의 발전은 해롭기 때문에 정치와 조직이 전도돼 정치적 올바름을 규명하는 것보다 조직에 대한 충성이 우선하고, 조직 보전을 위한 이해관계를 사후 정당화하는 임무가 정치와 이론의 것으로 주어지게 된다. 


그 결과, ‘무오류의 존재’로 가정된 당 지도부와 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당 조직을 보위하는 것은 계급에게 충성하는 것이고, 자신들의 당[과 당권]에 도전하는 당 안팎의 비판자들을 곧바로 ‘계급의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탈린 독재가 트로츠키를 비롯한 반대파들을 제국주의의 첩자로 규정해 숙청한 것처럼, 베트남의 공산당은 사이공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을 학살했으며, 김일성은 일인 체제를 위협하는 박헌영을 미제 첩자로 몰아 죽인 것이다


이런 특성은 저항세력의 이데올로기로 구실을 할 때조차 드러나곤 한다. 비록 자국에서는 급진적 야당이지만 스탈린주의를 그대로 수입한 각국 공산당들은 이런 사상적 특성을 그대로 흡수한다. [초기엔 소련 지도부의 권위와 지원 때문에, 그리고 나중엔 그 관료주의가 그 내부에서 굳어져서.]


이렇게 볼 때, 통합진보당 중앙위원회에서 보인 당권파의 물리적 투쟁과 극단의 종파주의를 우리는 정치사상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우파의 통합진보당 죽이기 공작으로 규정했으니, 당권투쟁은 곧 ‘계급투쟁’의 일부였던 셈이다.(일면적이서 그렇지 완전히 허구적 발상인 것은 아니다.) 


어제 내 옆을 스쳐 단상으로 몰려가던 한 학생은 (심상정을 지칭한 듯) “저기가 누구 자린데 어디서...”라고 북받치는 말투로 혼잣말을 했다. 나는 맥락에서 단순한 이정희 추종 발언으로 여기지 않는다. 통합진보당의 주인은 자신들의 ‘당’이고, 그 ‘당’은 오롯이 계급을 대표하는 당이라는 발상으로 보인다. 


그 점에서 그들이 자기 편이라 여기는 이정희 대표의 대표직 사퇴와 의장직 포기는 단상 자체를 적으로 보겠다는 신호였던 셈이다. 나는 회의 시작 전, 이정희 대표가 사퇴 선언을 하고 자리를 떳다는 소리를 듣고 심각한 상황이 오겠구나 하는 직감을 했다. [그러나 폭행 자체는 이런 심리 상태를 배경으로 일어난 우발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비당권파의 비전이 색다르거나 발본적 진보 혁신과 자기 정화를 담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리도 요란한 당내 쇄신 투쟁에 진보의 원칙과 가치, 기풍을 재확립하려는 어떤 의제도 제출된 바 없다. 유시민의 ‘애국가’와 ‘운동권 관행’을 없애자는 것 말고는.


어제도 나는 통합진보당 중앙위원으로서 새 강령 제정의 건에 표결을 요구하려 했다. 적극 반대는 하지 않더라도 찬성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만장일치 통과에 반대한 것이다. 


현재 강령 제정안은 옛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을 포함해 기존 진보정치가 내세워 왔던 내용과 기준에서 진보의 정체성과 노동 중심성에서 상당한 후퇴가 있었다.

 

연립정부 참가를 위해 기존 진보정당의 강령들에서 톤다운한 것이다. 광범한 국유화와 사회화가 소유구조의 다원화로 후퇴했고, 노동이 주인되는 세상이 노동존중사회로 뒤바뀌었다. 반제국주의 강령도 후퇴했다.

 

연립정부와 전략적 우경화에 반대해 온  ‘노동자 연대 다함께’ 회원들이나 개별 중앙위원들로서는 찬성에 손을 들 수는 없는 안건인 것이다. 

 

물론 상황이 상황인지라 굳이 찬반 토론에서 의견을 내지 않았다. 차분한 찬반토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당권파가 분위기를 험악하고 시끄럽게 만들어 놨기 때문이다. 심지어 표결을 요구하며 내가 표찰을 들었을 때, 나를 표찰을 앞세워 단상으로 몰려가는 당권파 중앙위원들과 구분하기 힘들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 새 강령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의 의견이 묵살된 것과 별개로 바로 그런 상황 때문에 만장일치 통과라는 건 더욱 문제가 된다. 그것은 전혀 현명한 처사가 아니다. 

 

소란스런 와중에 나같은 이들의 반대 의견을 듣기 힘들 수도 있고, 절차를 위협하는 잘못을 했지만 안건 처리에 반대하는 중앙위원 세력이 있는데, 굳이 만장일치 통과를 시도했어야 할까. 그게 과연 현명한 처사일까. 이미 그 직전에 정회 표결을 봐도 표결이 불가능한 상황도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다.

 

어제 중앙위원회에서 당권파가 3분의 1에도 훨씬 못 미쳤고, 당권파가 표결 참가를 거부해도 정족수가 모자라는 일이 벌어질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 후퇴한 강령안을 당권파를 핑계로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려 한 것은 이 세력도 당내 좌파들에게 그다지 민주적이진 않다는 걸 보여 준다.

 

사실 중앙위원회 구성에서의 이런 세불리 때문에 당권파는 회의 자체를 불법으로 몰아가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회의 결과 자체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해야 계속 당권투쟁을 벌일 논리적 근거가 유지되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땐, 계산된 회의 방해였던 것이다. 폭행 사태 자체는 우발적일지라도 말이다.

 

사실 결과적으론 무리하게 만장일치 통과를 선포하는 순간, 단상 점거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매우 유감스런 상황 전개였다. (물론, 당권파의 폭력 난동은 결코 변호받을 수 없고, 진보진영 자체의 기존으로 일벌백계해야 한다.)

 

결국 진정한 혁신의 선결조건인 혁신안에 찬성하고, 강기갑 비대위에는 찬성하지 않는 입장은 표결의 기회조차 갖지 못했다. 원칙적 기강, 진보의 정의와 민주주의를 재확립하는 과제를 수행할 책임자로, 최근 줄곧 원칙 없는 중재적 태도를 보여 온 강기갑 전 대표가 적임자라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어쨌든 어리석게도 당권파가 도리어 울고싶은 유심의 뺨을 때려준 격이 됐다. 통합진보당은 자정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는 게 드러났다. 화학적으로 결합하기 힘든 여러 당들의 무원칙한 연합체가 태생적으로 가지는 분열과 갈등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치적 타락과 무능도 드러났다.

 

나로선 오만방자한 패권파의 승리도, 이 와중에 애국가나 찾고 앉아 있는 우경화 세력의 승리도 바라지 않는다. 통합진보당 안에서는 노동 대중이 좌파적 버전의 희망을 더는 찾기 힘든 이유다. 그래서 현장을 지켜 본 나로선 더는 함께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우파의 ‘종북좌파’ 혐오증 유포는 그 단어가 곧 그들 나름의 대중적으로 ‘급진좌파’를 부르는 코드명이란 걸 유념해야 한다. 저들은 폭력 사태를 빌미로 검찰 수사 등으로 압박하며 조여올 것이다. 검찰 수사는 민주적 쇄신이 아니라 당원 명부 등 진보진영 내부 정보 확보와 좌파 단속을 위한 약점 잡기가 주요 목적일 것이다. 


강 건너 불구경하며 이런저런 훈수를 두는 자유주의자들이야 반새누리 세력의 헤게모니를 좌파가 아니라 자신들이 쥘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설치는 것이니 이들의 충고를 좌표로 삼을 순 없다.


이 둘의 의도와 목표는 조금씩 다르더라도, 어쨌든 이들이 지지하는 쇄신이란, 그들 표현을 빌면, ‘운동권적 습성 탈피’가 될 것이다. 그것은 진보정당의 투쟁성과 급진성을 제거해 기성 정치 체제에 순치하겠다는 것이다. 비판할 건 하되, 부화뇌동해선 안 되는 이유다. 

 

노동계급의 정치세력화는 그것이 의회정당 수준일 때조차도 강령 차원에서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를 명확히 지향하는 것이 옳고, 대안적 미래를 위해 노동자와 피억압 민중의 단결을 전략적으로 추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통합진보당 창당 과정은 이런 원칙을 훼손하고, 여기에 항의하는 당내 좌파를 고립시키는 과정이었다. 한때 노동자 [의회] 정치세력화의 전진을 상징했던 옛 민주노동당을 전신으로 하는 통합진보당은 여전히 진보정당일 테고 [누군가의 호들갑처럼] 당장 망하는 일도 없겠지만, 분열과 우경화를 결과적으로 더 부추기게 만든 이 당이 더는 노동자 진보정치의 ‘대표체’일 순 없는 듯하다.

 

가장 좋은 것은 민주노총 지도자들이 통합진보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철회하고, 새로운 당을 주도적으로 건설하는 것이다. 동시에 진보정치의 타락에 대항해 원칙과 기강, 민주적 단결을 추구하려면 급진적 노동자 좌파 정치가 성장해야 한다.




  1. 한편에서 이번 폭행 사태에 스탈린주의 문제를 검토하는 것은, 일부 자유주의자들이 좌파 혐오증에서 스탈린주의자들을 전체주의나 파시스트와 동일시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2. 마르크스가 기초하고 레닌이 정립한 당이론은, 당의 필요성은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에서 비롯한다. 당은 계급의 일부지만, 계급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며 계급의식의 불균등성을 목적의식적으로 극복하려고 조직된 무리라는 점에서 계급과 구분되는 행위주체다. 이 이론에 따르면, 혁명 이후에도 새로운 국가의 주체는 계급이 되는 것이다. 당은 그 일부로서 여전한 자기 임무를 위해 분투해야 하는 것이다. 레닌의 당 이론과 실천은 스탈린주의의 일당독재 이론과 조금치도 닮은 데가 없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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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파의 올바른 개입을 위해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의 여파로 지금껏 스물두 명이 죽었는데도 진짜 원인을 제공한 자들은 그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다. 무도한 정부가 제주 해군기지를 강행하며 온갖 폭력을 휘두르는데도 진보진영은 해군기지 무효화는커녕 건설 중단조차 쟁취하지 못하고 있다. 


정권의 최고위 실세들이 부당한 특혜를 기업들에게 주고 그 대가로 받은 돈으로 정권을 차지하고, 특권과 부를 누려온 일이 폭로됐는데도 당장 이들을 처벌하지 못하고 있다. 


도대체 이 지지리도 인기 없는 이 부패하고 추악한 정부가 아직도 살아남아 온갖 나쁜 정책을 아직도 밀붙이고 있다는 것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분노하고 있다. 특히, 이 문제들을 근본적이고 급진적으로 해결하길 바라는 사람들에게 이런 상황은 답답하기 그지없을 것이다. 


민주통합당이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이뤄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겠다고 나섰지만, 사실 민주당이 이 문제들을 진지하게 해결할 것을 기대할 순 없다. 


오히려 민주당을 주도하는 세력은 한미FTA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시작했던 사람들이고, 이명박과 마찬가지로 정권 차원의 저항적 사회운동 사찰을 저질렀던 세력이다. 지금도 이런 악행들을 제대로 사과하지도 않았다. 


그 점에서 진짜 문제는 통합진보당이나 민주노총을 주도하는 진보진영 내 다수파의 노선과 태도에 있다. 


지난해 옛 민주노동당 당권파는 민주노총과 진보진영을 분열시킬 것이라는 비판과 경고를 무시하고, 친자본주의 정치세력인 국민참여당과 통합했다. 


그 뒤에도 이들은 스탈린주의 전략과 개혁주의적 선거 실용주의의 맥락에서 인민전선 전략을 발전시켜 왔다. 이 때문에 민주당의 약점을 제대로 비판하지도 못했고 독립적 진보 대안 건설이나 투쟁 태세 구축 대신 ‘묻지마’ 야권연대에 더 힘을 실어 왔다.  


이런 태도가 진보진영 안에 투쟁을 통한 쟁취와 심판보다 수동적 선거 심판론을 유포해 왔다. 투쟁 연대체 등에서 이런 약점들에 비판이 나올라치면 연대체 안의 친민주당 NGO 지도자들과 손잡고 비판들을 패권적으로 묵살하곤 한다.


따라서 급진좌파들이 민주당의 친자본주의 본성을 비판하며, 통합진보당의 묻지마 야권연대에 반대해 온 것은 옳았다. 반MB를 넘어서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관점이 운동에 필요하다는 주장도 원리상 옳다. 


그러나 원리상 옳은 입장을 가지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좌파가 구체적 현실 조건과 당시의 대중 정서를 면밀히 판단해 접점을 만들어 개입하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그때 원칙이란 추상적 원칙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이란 단어는 원리상 옳지만, 현실의 실천지침으로 크게 소용이 없다는 뜻이다. 


오히려 지금 문제는 급진좌파들이 현실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전술의 차이를 원칙의 차이로 과장하며 고립·주변화를 자초해 오히려 개입할 능력을 약화시켜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진영의 우경화에 불만이 높은데도 좌파가 성장하기보다는 단순히 진보진영의 분열만 키우는 방식으로 사태가 흘러왔다. 


즉, 급진좌파들 일부의 문제점도 진보정치세력의 약점의 일부라는 것이다. 이는 안타깝게도 운동의 우경화에 맞서 급진좌파들이 함께 개입해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제약해 왔다. 


첫째, 종파주의 문제가 있다. 


마르크스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과 명예를 계급 운동과의 공통점이 아니라 운동과 자신을 구별짓는 특별한 표지에서 찾는” 태도를 종파라 불렀다. “사회주의적 종파주의의 발전과 진정한 노동계급 운동의 발전은 언제나 반비례한다”고도 지적했다.


 


이는 종파주의가 고립을 자처할 뿐만 아니라 주변화하고 고립되는 상황에서 싹트는 것이라는 지적이다. 일종의 악순환인 것이다. 


우선 이들은 옛 민주노동당의 우경화와 참여당과의 통합에 반대하는 투쟁에 기권해놓고는 통합진보당에 대해서는 종파적 규정을 남발한다. 


민주노총의 상급 지도자들 다수에 기반해 있고, 조합원 다수가 지지하는 통합진보당을 ‘진보도 아니다’ 라거나, ‘진보정당은 변혁에 걸림돌’이란 일면적 분석을 하는 것은 현실에 맞지 않다.


심지어 투표를 통한 지지조차 반대하며, 어떤 공동행동도 거부하려 해 왔다. 일부 급진좌파들은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서도 투쟁 대안을 제시해 단결을 추구하기보다 민주노총의 통합진보당 지지를 막는 것에만 열을 올렸다. 


이들은 진보신당이 울산 북구와 경남 창원에서 통합진보당을 새누리당과 다름없다며 분열적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이지 않았다. 


계급투쟁에서 부차적 지위를 갖는 선거에서의 차이를 과장해 결과적으로 정작 중요한 투쟁에서의 단결을 해치는 것은 결코 현명한 일이 아니다.


얼마든지 비판과 지지, 이데올로기적 경쟁과 운동의 단결을 결합할 수 있는데도, ‘차이와 분화’만 강조함으로써 민주노총 조합원 등 선진노동자들 다수와 거리감을 넓히고 스스로 고립과 주변화를 자초한 것이다. 


선진적 소수는 ‘선전과 선동’만으로도 정치의식이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대체로 대중적 각성은 투쟁에 참여하고 승리하는 경험 속에서 낡은 사회적 편견과 소외감을 떨치며 더 급진적인 사상을 받아들이고 조직에 참가할 자신감을 얻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이런 자신감과 각성의 깊이와 폭은 투쟁의 규모에 크게 좌우된다. 


따라서 좌파가 투쟁에 개입할 때나 주도할 때는 운동 지도부의 이데올로기만 보고 미리 재단하거나 선험적으로 참가의 폭을 제한하려는 것은 잘못된 태도다. 


이명박의 집권과 2008년 총선으로 자칫하면 우파의 우위로 넘어갈 수 있었던 사회 분위기가  오히려 진보적 의제가 주도하는 세력관계로 유지되고 바뀐 것은 서울에서만 최대 1백만 명까지 참가했던 촛불항쟁 덕분이었다. 


참가 규모가 커지자, 참가자들의 사기도 높아졌고, 자연스럽게 미국산 소고기 수입 중단에서 각종 신자유주의 정책 반대로 의제가 확장되고 정권 퇴진 같은 급진적 요구로 발전해 갔다. 이 운동은 개혁주의적 NGO 리더들이 주도했는데, 다함께는 이들의 견제 속에서도 적극적인 개입으로 이 과정에서 의제 확대와 정권 퇴진 요구를 제안해 많은 지지를 받고 영향력을 키워갔다. 


그러나 당시 급진좌파 일부는 ‘비정규직 문제는 배제됐다’거나 ‘가난한 노동자는 어차피 소고기는 못 사 먹으므로 이 투쟁은 중간계급의 투쟁’이라는 식으로 투쟁에 적극적으로 연루되거나 개입하길 꺼렸다. 


그래서 이들은 운동 자체를 전진시키거나 운동 안에서 좌파의 영향력을 키우는 문제에서 완전히 무능했다. 이처럼 좌파 일부는 과거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한 듯하다. 심지어 지난해 한진중공업 희망버스의 교훈에서도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 


당시 중요한 승리의 요인이었던 사회적 연대의 확산 과정에는 대단히 개방적인 태도가 큰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인기 연예인들도 지지하고 참가할 정도였다. 


그런데 급진좌파 일부가 주도권을 틀어쥐고 주도한 올해 희망광장 투쟁은 안타깝게도 통합진보당까지 배척하면서 개방적 연대 분위기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이들 중 일부는 그런 식의 ‘순수한’ 투쟁으로 통합진보당 식의 야권연대와 경쟁하는 별도의 구심을 만들려고 한 듯하다. 그러다보니 안타깝게도 이 투쟁은 장기투쟁 작업장 조합원들의 품앗이처럼 비춰졌다. 


쌍용차 희망텐트 때도 일부 참가단체들이 통합진보당 지도부에게까지 야유를 보냈는데, 이런 행동은 자신들이 주도한 그 집회에서조차 별 호응을 얻지 못했다. 


둘째, 급진좌파 일부의 태도는 말로는 진보정당들의 선거주의를 비판한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설득력있는 투쟁적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몇 가지 행동들을 보면, 선거주의를 비판하는 이들 자체가 엄청나게 선거를 중요하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다. 


일례로, 노동운동 안의 급진좌파들은 올해 민주노총 정기 대의원대회와 3월 임시 대의원대회, 금속노조 정기대의원대회에서 민주노총이 4월 총선에서 통합진보당을 공식 지지 정당으로 정하는 방침에 격렬하게 반대했다. 심지어 3얼 22일 임시 대의원대회는 바로 이 방침을 막으려고 좌파들이 소집한 대회였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민주노총의 8월 총파업 계획을 보완하거나, 언론 파업을 엄호하는 하루 총파업 등 투쟁 건설을 위한 제안에는 그다지 열의를 보이지 않았다


이것은 투쟁에 제약을 주기 때문에 야권연대에 반대한다는 자신들의 주장과도 모순된다. 선거 전술에서의 차이를 결정적 차이로 보는 것은 선거에만 집중하는 개혁주의의 거울 이미지다. 


셋째, 이들이 통합진보당이나 민주노총 다수파의 패권주의를 비판하는 건 옳지만, 자신들이 주도하는 투쟁 등에서 보이는 소패권주의도 문제다. 


자신들이 주도한 희망텐트나 희망광장 등에서 자신들과 의견이 다른 세력의 제안이나 주장을 개방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배척하는 태도를 보이기 일쑤였다. 


따라서 진정으로 운동의 우경화를 막고 투쟁을 활성화하려면 급진좌파들은 이런 약점들을 극복해야 한다. 


쌍용차, 한진, KEC와 유성기업, 그리고 언론사 들에서 노동자들은 신자유주의 우파 정권의 야비한 탄압을 받 왔고 지치지 않고 치열한 투쟁을 벌여 왔다. 


그러나 파편화된 투쟁으로 제대로 반격하는 데 애를 먹는 경험을 하면서 노동자들 사이에는 광범한 단결의 정서가 커지고 잇다. 


무엇보다 각종 우파적 공격에 대한 노동자들의 반격 능력은 얼마나 폭넓게 단결하느냐에 크게 달려 있다. 좌파라면 이런 단결 투쟁을 추구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의 정책이 올바르다는 것을 실천 과정에서 입증하는 방식으로 활동해야 한다. 


즉 지금 벌어지는 언론 파업과 제주 해군기지 반대 싸움, KTX 민영화 반대 파업, 금속 노동자들의 심야노동 철폐 투쟁 등이 이명박 정부에 대한 광범위한 분노와 연결돼 폭넓은 정치투쟁으로 발전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또 민주노총의 8월 총파업이 진정한 총파업이 될 수 있도록 투쟁을 조직하고 헌신하는 관점에서 실천과 비판적 지지를 결합해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만의 고립된 섬을 창출하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마련이고, 그것은 종파적 늪으로 더 자신을 밀어넣을 뿐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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