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느새 운동 안에 개혁주의 분위기가 세졌네! 하고 생각한 순간, 원칙과 이론, 전략(정치)의 자리를 정체성정치나 감수성 등의 용어로 포장된 도덕주의가 채우기 시작했다. 여러 실수와 이론 취약, 사기 저하 등으로 새 페미니즘에 대응하지 못한 기존 좌파들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그런 분위기를 주도하며 ‘운동권 사또 놀이’ 하려는 쪽에서 자신들은 도덕적 의무에서 예외인 듯 구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곳곳에서 분열과 불신을 일으켜 그나마의 긍정성도 까먹으면서도 돌이켜 성찰할 줄을 모른다. 자기중심주의와 분별없는 열정이 문제인데, 나이 문제도 아니다. 민주노총 여성부장의 해괴한 행태가 딱 그렇기 때문이다.
워커스/참세상도 전통있는 좌파매체였는데 어쩌다 보니 참 이런 수준이다. 진정성있게 성찰하고 시정하려 할지는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굴수록 워마드 종류나 부추겨 결과적으로 좌파로서의 정체성을 가진 자신들의 자아만 맹동적 분열적 혐오주의의 깊은 심연으로 삼켜져 버릴 뿐임을 직시했으면 좋겠다.(5.19)
2.
홍대 건 수사가 이례적으로 빨랐다는 말은 동의하기가 힘들다. 남성 누드모델이 무슨 사회적 힘이 있다고(누드모델 보호에 무슨 실익이 있다고) 경찰이 그러겠는가. 게다가 일반 몰카와 달리 이건 수 명으로 용의자가 특정되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그 용의자는 경찰에서 핸드폰을 버렸다고 증언했다. 그러니 구속 요건은 된다.
물론 피의자 입건과 구속은 다르긴 하지만, 전광석화처럼 구속됐다기에는 전후 정황이 맞질 않고 경찰이 이리저리 눈치 보다가 처리한 걸로 본다. 그러나 이게 진정한 쟁점이 아니므로 이렇게 논쟁이 되는 것은 누군가의 의도적 발화/행동에 의한 프레임 이동으로 볼 수 있다.
이제 문재인이 한마디 거드니, 경찰청장까지 대(對) 여성 범죄 수사를 철저하게 한다고 한다. 이것은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성들의 불만과 위협에 대한 조처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국가/경찰에게 남성 전체를 잠재적 범죄자로 취급하라고 요구한 것이라는 점.
결국 스스로의 정체성을 항구적 피해자로 자리매김하며 생물학적 남성 전체를 적(단일 집단)으로 돌리는 종류의 페미니즘은 사회에서 해방의 힘을 만들어낼 수 없기 때문에 국가와 동맹하고 국가의 통제력 강화를 지지하는 방향으로 가기 십상이라는 게 새삼 입증되고 있다고 본다. 이것이 중간계급적 개혁주의와 ‘잘’ 결합되면 그 ‘국가의 여성화’(생물학적 여성의 고위직 진출 지지)에 대중의 지지를 동원하는 구실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 결과는 그들 스스로 표방했던 페미니즘의 희석이다.(5.21)
3.
오늘날 좌파와 진보가 이런 종류의 페미니즘과 대결하기는커녕 아부하기에 바쁘다는 건, 혁명이든 개혁이든 대중 스스로 단결한 행동으로 사회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대(大)전망에서 후퇴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개개인들의 관계와 태도, 도덕성을 개선하려는 것만으로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
그렇다면, 여성해방 문제에서 마르크스주의는 사회 변혁과 개인의 혁신을 어떻게 관계 지으려 하는가? 마르크스는 일찌기 “환경의 변화와 인간 활동 혹은 자기변혁의 일치는 오직 '혁명적 실천'으로서만 파악될 수 있으며, 또 합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했다. 혁명이 필요한 이유는 그 과정에서만 대중이 스스로를 혁신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것이 마르크스주의의 알맹이를 이루는 노동계급의 자력해방과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정신의 한 측면이다.
그러므로 집단적 실천, 혁명적 실천, 계급투쟁과 계급투쟁에의 의식적 개입 활동을 개개인들의 의식과 도덕성을 바꾸는 일과 대립시키고 경멸하는 일은 오해 아니면 의도적 기각 행위다. 둘 중 무엇이든 그 자신은 노동계급 대중이 스스로 자기 혁신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포기하는 것이다.(워마드가 남성 비하적 용도로 쓰는 단어들이 대체로 노동계급 남성을 비하는 것임도 시사적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좌파가 이런 종류의 정치에 굴복하거나 침묵하는 것은 개혁주의로의 후퇴이고 따라서 정치의 타락이다.(5.21)
4.
메이드 인 다겐함은 꽤 괜찮은 영화다. 영국에서 동일노동 동일임금 제도화에 물꼬를 튼 걸로 평가되는 다겐함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진지하면서도 유쾌하게 묘사한다. (실제로는 노동자 투쟁을 억제하는 법안을 발의하려 했던) 노동당 윌슨 내각의 노동부장관 바버라 캐슬이 미화된 게 아쉽지만 말이다.
그런데 변혁정치는 이 영화가 자본만이 아니라 남편과의 전쟁도 치르는 걸 보여 준 영화라고 평한다. 그러고 보면, 영화가 바버라 캐슬을 좋게 묘사한 것에 페미니즘의 영향이 있는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파업 와중에 남편과도 전쟁을 치러야 했다는 식으로 영화를 평하는 것은 생뚱맞다. 도대체 파업 노동자의 현실을 알고나 하는 건지, 영화를 성실하게 본 건지를 의심스럽게 만드는 평이다. 영화의 주인공 가정의 갈등에는 (물론 남성적 편견도 전혀 없진 않겠지만) 무노동무임금이 적용되는 파업이 길어지고(생활고가 심해지고) 파업의 승리가 불투명한 상황이라는 배경이 있다.
그러니 주인공 부부의 갈등은 남여 역할을 바꿔 놔도 흔히 벌어지는 갈등이다. 그걸 남성 파업 노동자가 나는 와이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파업을 했다고 묘사해야 하나? 아내의 파업이 승리하는 게 남편 노동자에게 불리한 결과를 낳나??? 영화에서는 파업 승리가 불투명해지면서 여성 노동자들도 갈등을 겪고 이탈자도 생긴다. 그것을 여성혐오 때문이라고 할 수 있나?
뿐만 아니다. 영화에는 파업 여성 노동자들을 돕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좌파 남성 활동가가 비중있는 배역으로 나온다. 주인공의 남편은 부인의 고군분투를 직접 목격하고 사과하고 전폭적 지지를 표한다. 주인공 여성은 남편과 논쟁하면서도 남편을 투쟁하는 노동자의 관점으로 설득하려 하지, 너는 여혐이야 하는 식으로 내몰지 않는다. 다소 페미니즘 성향이 있더라도 영화 자체는 결코 남성(노동계급)에 적대적이지 않다.
그러므로 영화평을 통해 노동자들의 현실과 투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도 미루어 짐작이 된다. 둘 다에 동의하기가 힘들다. 그런 편협한 관점이 아니고도 얼마든지 유쾌하고 감동적인 이영화에 고무되고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을 찬양할 수 있다. 사회변혁‘노동자’당을 표방했는데, 변혁당의 정치가 갈수록 수상해진다.(5.16)
※ 아래는 추천 기사(누르면 기사 전문으로 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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