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민중 혁명의 한 곳인 리비아 혁명이 내전 형태로 발전하면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군사 개입을 논의하고 있다. 의도가 아니라 능력이란 문제 때문에 군사 개입 개시 여부는 불분명하지만, 군사개입 의도 자체는 명백히 민중 혁명을 차단하고 옥죄려는 시도다. 리비아의 운명은 리비아 민중이 이룩해야 한다. 그들은 어두운 과거를 반복할 뿐이다. 이런 강대국의 군사 개입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예전에 쓴 글을 다듬고, 새로 써서 보강해 올린다.


제국주의는 개별 자본들의 경제적 경쟁이 세계시장으로 번지면서 이 경쟁이 국가 간 군사적 경쟁으로 발전한 세계자본주의의 한 단계를 가리킨다. 레닌은 이를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라고 불렀다.

자본주의 경쟁이 낳는 자본의 집적과 집중 경향은 일국 안에서 독점자본의 등장과 국가와 자본의 융합 경향으로 드러나고, 국제 차원에서는 소수의 제국주의 국가들(과 이들을 등에 업은 초거대 다국적기업들)이 지배하는 서열 체계로 발전한다.

자본 간 협력과 경쟁이 일국의 틀을 넘어 국가들 사이의 관계로 발전하면 경제적 이해관계 뿐 아니라 전략적(지정학적) 이해관계가 중요해지고, 군사적 경쟁이 주요한 경쟁 수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러시아 혁명가 부하린은 “국가자본주의 트러스트 사이의 투쟁이 무엇보다도 군사력 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이유는 군사력이야말로 서로 투쟁하는 ‘국민적’ 자본가 집단들의 최후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최후 수단이 모든 수단인 것은 아니다.냉전 초기 미국은 막대한 경제력으로 자신의 동맹 진영의 결속을 다졌다.

냉전 이후 미국은 유일 초강대국으로서 영원히 세계를 지배할 것처럼 굴었다. 그러나 강대국들 사이의 군사‧경제적 경쟁이 양대 초강대국 간 경쟁이라는 틀 속에 갇혀 있던 냉전 질서가 해체되면서 오히려 세계는 다극화된 강대국들의 경쟁이라는 현실로 변했다.

미국은 여전히 압도적인 군사 최강대국이지만, 더는 냉전 질서를 주도하던 그런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하다.

냉전이 시작될 때 미국 경제는 세계경제의 절반을 차지했지만, 냉전이 끝날 때는 세계경제의 4분의 1로 하락해 있었고, 지금은 5분의 1에 불과하다. 이제는 2008년 세계경제 위기의 진앙지가 되면서 세계를 향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통제력은 한층 약화되고 있다.

다시 말해 미국은 여전히 유일 강대국이지만, 상대적인 경제 비중의 하락 때문에 경쟁자들이 미국 중심의 제국주의 질서에 균열을 낼 수 있는 틈이 생겼다는 뜻이다.

이것은 미국 바로 아래 제국주의 국가들이 점차 자신의 독자적 이익을 추구해 간다는 뜻이기도 하며, 한국 같은 하위 파트너들이 미국 중심의 질서 아래에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전략적 이익을 추구할 수 있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지배자들의 제국 유지 전략의 기본은 이제 ‘월등한 군사력’을 이용해 제국주의 질서를 전 세계(특히 자신의 경쟁자들)에 과시할 수 있는 능력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인도주의 개입의 실체

다만, 상시적 적대국이 사라진 세계에서 미국의 상시적 군사 드라이브를 이데올로기적으로 뒷받침해 줄 것들이 필요했다. 클린턴 정부는 이를 위해 '인도주의적 개입'이라는 이데올로기를 발명해 냈고, 이 바탕 위에서 부시 정부는 '테러와의 전쟁'을 개시했다.

이는 군사적 패권주의를 서로 정당화해 준 냉전 적대국이 사라진 현실과 이에 따른 제국의 필요라는 현실을 반영한 것이었다. 이후 미국과 서방 강대국 동맹은 지역의 독재정부 제거, 빈곤 구호와 난민 보호 등을 명분으로 세워 지역 ‘깡패국가(Rogue State)’를 상대로 군사력을 과시했다.

이는 미국의 군사적 패권주의를 여전히 세계의 경찰로 보이게 하고, 진정한 군사 개입 목표를 가리는 효과를 냈다. 이것은 여러 나라에서 좌파들을 혼란에 빠뜨렸다[각주:1].

인도주의 개입이란 명분을 정당화하는 과정은 친서방 엔지오 구호단체들이 가진 실용주의의 도움을 받았다. 소말리아와 코소보 등은 이 엔지오들이 ‘인도적 군사 개입’을 요구한 지역이기도 했다. 자선 구호 단체들이 (자의든 타의든) 제국주의의 침략 수단으로 이용된 이용된 분명한 사례다.

공교롭게도 최근 문제가 된 소말리아가 ‘인도주의적 개입’을 제국주의 침략(군사 개입)의 명분으로 내세운 첫째 사례였다. 그러나 이 개입은 두 가지 점에서 철저히 실패했다.

첫째, 인도주의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유엔군은 구호 식량의 배분 과정을 내전 중인 군벌에게서 보호하겠다는 것이었다는데, 이것은 사실상 식량을 두고 다투는 전투부대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을 의미했을 뿐이다. 미군은 소말리아 수도 모가디슈에서 수천 명을 학살했다.

둘째, 군사적 위신도 망쳤다. 모가디슈에서 벌어진 전투 과정에서 최정예 전투 헬기인 블랙호크가 격추되고, 미군 18명이 죽었으며, 소말리아 인들은 난데없이 찾아와 자신의 형제자매를 죽인 ‘외국 군대’에 대한 증오심에 이 시신들을 차량에 매여 시내를 행진했다. 이 장면은 CNN에 생중계돼 미군의 위신을 추락시켰다.

미국은 10년 동안 50만 명을 죽게 만든 이라크 경제 봉쇄와 1999년 나토를 동원해 세르비아를 공격하면서야 위신을 되찾았다.

인도주의 개입이란 명분으로 시작된 이라크 경제제재는 야만적 결과를 낳았다. 석유 수출 등으로 중동에서 가장 1세계에 근접했던 이라크 사회는 이 기간 동안 빈곤과 질병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후진 사회로 바뀌었다. 후세인에게 정치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정치·경제 모든 면에서 더욱 어려운 일이 됐다.


이 두 사례도 마찬가지로 인도주의 개입을 내세웠는데, 특히, 이라크에서는 후세인의 독재, 쿠르드족 탄압, 쿠웨이트 침공 등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지역 강국으로 성장한 이라크를 약화시켜 중동에 대한 미국의 직접 지배력을 강화하고 이스라엘의 안보 위협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였다.

1991년 이라크 북부 지역을 비행금지 구역으로 설정하고 방공망을 파괴했다. 이듬해에는 남부에 비행금지구역이 설정했다. 한마디로 군사적으로 완전히 포위한 상태에서 경제제재를 가한 것이다.

후세인이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아 이란을 침략한 동맹이었다는 사실은 더는 중요하지 않았다. 후세인의 쿠르드족 학살을 미군이 방조한 것, 미국의 동맹국인 터키 정부가 더 혹독하게 쿠르드족을 탄압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의 자리에서 배격됐다.

세르비아 개입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유럽으로 나오는 천연가스 송유관의 안전 확보라는 경제적 이익 뿐아니라, 나토의 동진 정책이라는 전략적 목표가 있었다. 옛 소련의 영향권 또는 영토였던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로 미국과 나토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지정학적 목표 말이다. 

1999년 세르비아 전쟁은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인데, 코소보 인종 청소[각주:2] 때문에 세르비아 영토를 폭격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민간 지역이 폭격 대상이 됐다.

이라크 경제 제재는 더 끔찍한 결과를 낳았다. 미국은 쿠르드족 보호를 이유로 1991년 4월 이라크 북부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을 시작으로 석유수출금지 등 경제제재를 경제 봉쇄로 확대해 나갔다[각주:3].

이 때문에 이라크는 경제가 곤두박질쳐 생필품과 의약품 등이 부족해졌는데, 나중에는 의약품 등마저도 수입금지품목에 들어가 2003년 전쟁 전까지 1백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경제제재가 낳은 빈곤과 의약품 부족으로 죽었다. 이중 10세 이하 아동이 50만 명이 넘는다. 외부 개입으로 사회가 파탄나자 내부 반대파는 오히려 더 취약해 졌다.

모든 곳에서 그랬지만, 이라크에서 벌어진 ‘인도주의적 개입’은 인도적 재앙을 낳은 것이다.

뒤이어 등장한 부시 정부와 네오콘은 이런 위선적인 이데올로기에 바탕해 더 공격적인 계획을 세웠다. 세계경제가 여전히 석유에 의존하는 상황에서 세계 석유 생산의 중심지인 중동의 '불량국가'들이 군사적 패권 과시의 핵심 목표가 됐다.

2001년 9.11 사태는 '울고 싶은 놈 뺨 때려준 격'이었고 당시 부시 행정부는 거침없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로 군사적 침략의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결과는 지금 보듯이 악몽이었다. 이라크를 점령해 신자유주의 국가를 세우려던 꿈은 물거품이 됐고, 고립시키려던 이란은 오히려 영향력을 확대했다. 아프가니스탄은 이제 베트남 전쟁보다 더 긴 전쟁이 되고 있다.

지금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은 리비아에서 새로운 표적을 찾아냈다. 카다피는 학살자이고 독재자지만, 제국주의 군대가 리비아의 평범한 민중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들의 관심사는 오직 석유 수출 세계 8위국인 리비아의 자원 통제권을 자신들이 질서를 따르지 않는 세력에게 빼앗기지 않는 것 뿐이다. 리비아 군사 개입은 인접국인 튀니지와 이집트 혁명을 위협할 것이고, 중동의 민중 혁명에 강력한 브레이크 구실을 목표로 할 것이다. (계속)



  1. 1998년 인도네시아 혁명 후 동티모르가 독립하는 과정에서 한국도 다국적군 파병 논란에 휩싸였는데, 엔지오 일부와 많은 진보적 개인들이 파병을 지지했다. 그러나 미국이 주도한 이 파병은 동티모르 독립을 단순히 돕는 것이 아니라 독립 동티모르에 친서방 정부가 안정적으로 들어서도록 돕는 구실을 하는 파병이었다. [본문으로]
  2. 여기서 인종청소는 Ethnic Cleansing인데, 이는 나치의 대량 학살 Massacre와는 다른 것이다. 한마디로 지역에서 대량 ‘소개’, 즉 쫓아낸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3. 그러나 막상 1991년 걸프전에서 미국을 지지했던 쿠르드족이 후세인에게 보복 탄압을 당할 때, 미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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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혁명에 승리를! ‘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속보 포함)


△2월 2일 민주화시위대가 무바라크의 깡패로 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지키고 있다. ⓒ사진 출처 Nasser Nouri


이집트는 미국의 중동 지배 전략에서 지렛대 같은 나라입니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크고 중요한 나라(주도 국가이자 강국)면서 32년 동안 미국-이스라엘과 혈맹 관계를 유지해 온 나라입니다.

이 나라가 아랍권 역대 최대의 저항에 직면했습니다.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서 중동 지배가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 그 중동 지배의 핵심 열쇠 가운데 하나인 이집트에서 일어난 민중 혁명이 승리한다면 그것이 가져올 세계의 변화 가능성은 어마어마합니다. 

이집트 민중의 혁명은 제국주의의 심장부를 타격하는 도전입니다. 오늘날의 제국주의는 곧 미국 중심의 국제 정치·경제 질서이므로 결국 세계 자본주의의 다른 이름입니다. 그래서 미국은 그리 손쉽게 무바라크를 無발악 상태로 팽개쳐두지 않을 겁니다.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말하는 ‘질서있는 전환’은 혁명 민중을 향한 ‘질서 있는 반격’을 뜻합니다.

이집트 혁명은 크게 봐서 두 가지 요인이 결합해 터져 나왔다고 봅니다.

세계자본주의의 심장부에서 벌어진 경제 위기의 전이, 중동 지역의 억압적 정치 구조와 경제적 불평등이 쌓아온 민중의 절망과 분노. 이 둘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고, 혁명은 엄청난 규모로 사람들을 고취하고 변화시켰기 때문에 이집트 혁명은 단기간의 정권 교체 문제를 넘어선 듯보입니다.

지난주부터 타흐리르 광장을 둘러싼 쟁탈전이 시작됐듯, 혁명은 우여곡절을 겪을 것입니다.

허약하고 별 볼 일 없는 야당, 서방의 눈치를 보며 몸 사리는 무슬림형제단, 강한 탄압으로 아직은 세력이 작은 사회주의 혁명가들. 이런 취약한 주관적 조건에서도 혁명이 전진한 것은 민중의 폭발적인 자생성 덕분인 듯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시간을 벌며 질서 있는 반격을 추구할수록 이 혁명도 가장 전투적이고 가장 명확한 부위를 중심으로 혁명적 지도력을 창출하는 과제가 제기되고 있습니다.

독재가 민중항쟁에 항복했는데도 군부 일당의 정권이 5년, 일당국가체제가 10년 유지됐으며 이른바 민주 야당이 집권해서는 신자유주의로 민중의 삶을 더 어렵게 했던 한국의 경험을 돌아보면 혁명의 진전은 혁명의 성공과 생존을 위해 정말 필수적인 것입니다. 여러 정치적 논쟁과 우여곡절을 통과할 것입니다.

민중을 혁명적 방향으로 단결시킬 지도력 구심을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위대한 이집트 민중이 지금 해야 할 일인듯합니다. 무엇보다 혁명에 참여한 민중이 자신들의 다양한 의견을 민주적으로 조직해 힘을 결집한 수단들을 만드는 게 급선무겠지요. 그래야 무바라크가 고용한 깡패와 경찰의 폭력에 효과적으로 맞설 수 있을 겁니다.


특히, 노동자평의회 만들기, 민중의 생존권 보장 등 생활상의 요구와 정치 요구를 결합하기,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 투쟁으로 동맹하기, 군대 사병들에게 혁명에 가담하고 병사들의 혁명위원회를 만들라고 호소하기, 민중 스스로 무장하기 등의 조처들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집트 혁명으로 제국을 거꾸러뜨리고 중동을 혁명의 봉화대로 바꾸길 바랍니다. 이 혁명은 세계경제와 정치에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평화적 정권 이양을 거부할수록 혁명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할 것입니다. 4년 전 걸었던 그 거리들이 지금 혁명의 거리가 돼 있다는 생각을 하면 정말 놀랍습니다.

이 혁명의 기운은 한국에서 MB라크(명바라크)와 싸우는 데 큰 힘이 될 것입니다. 한국인들의 연대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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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중 이슈: 중동의 민중 반란

△ “한두 달 전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혁명을 가능성을 말했다면 모두 ‘꿈꾸는 이야기’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악독한 정권으로 고통 받는 한국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이윤선



<레프트21>이 주최한 ‘튀니지와 21세기 혁명’ 토론회 분위기는 뜨거웠다. 토론회가 열린 서울 명동 향린교회 3층 본강당은 2백여 명의 참석자들로 꽉 찼고, 이들은 아랍 지역 민중 혁명에 대한 뜨거운 지지와 관심을 보여 줬다.

특히, 이 토론회에는 튀니지와 이집트 출신으로 한국에 와 있는 청년들이 참석해 연대를 호소하는 발언을 해 큰 박수를 받았다.

토론회 시작 전 장소를 빌려 준 향린교회의 임보라 목사도 인상적인 환영 인사를 했다.

“[먼저 이런 좋은 토론회를 향린교회에서 개최해 주셔서 주최측에게 감사하다. -웃음] 21세기에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튀니지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 혁명은 들불처럼 이집트 등으로 번져 나가고 있습니다.”

“무능력하고 부패한 정권에 대해서 국민이 심판의 날을 세우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해방을 원하는 민중에게 그들이 희망하는 것을 안겨 주기를 원하는 것이 신의 뜻이라고 생각고, 이 시간에도 가열찬 투쟁을 벌이고 있는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빕니다. 향린교회 교우를 비롯해서 뜻있는 크리스챤들은 이 투쟁을 적극 지지하고 있[습니다].”

△향린교회 임보라 목사, “21세기에도 혁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튀니지에서 보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도 가열찬 투쟁을 벌이는 그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께하길 바랍니다.” ⓒ이윤선


연사인 김용욱 <레프트21> 국제 담당 기자는 “혁명은 당연하던 것들이 뒤집히는 것”이라는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김 기자가 구해 보여 준 영상에서는 튀니지 노동자들이 자기 사장을 회사에서 쫓아내는 장면이 담겨 있었다.

많은 곳에서 경제 위기로 사장들이 노동자를 쫓아내고 있는데, 튀니지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 점에서 튀니지는 진정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연사는 <파이낸셜 타임즈> 칼럼을 인용해 ‘튀니지 사건의 중요성은 자본주의가 더는 안정적인 체제가 아니라는 걸 보여 주는 점’이라고 주장했다.

“튀니지 혁명은 부패한 중동 지배자들과 이들을 후원하는 서방 제국주의 지배자들 뿐아니라 중국과 같은 나라들의 지배자들까지 두려워하게 했다”

연사는 “이런 상황에서는 대안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야한다”고 말했다.

“튀니지 혁명은 아직은 맹아적 형태이지만 가능성이 나타나고 있다. 노동자들의 공장 자주관리, 지역방어위원회 등이 그렇다.

“튀니지 혁명은 다른 나라로 확산되어야 한다. 이는 서방 제국주의의 통제를 받고 있는 중동의 지역 구도를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는 분신한 부하지지의 짧지만 비극적인 삶에서 사람들의 분노가 어디서 와서 어떻게 폭발했는지 알 수 있다고 지적했다.

“부하지지는 열 살 때부터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노점을 하면서 많은 수모를 겪었다. 이번에는 그동안 겪은 일 중 가장 모욕스러운 일을 당하고 시청에 시정 요청을 하러 갔다가 무시당 하자 분신을 했다.

억압적 정치 구조, 부패한 국가기구, 엄청난 청년 실업률은 저항의 토양이 됐다.

“그동안 튀니지에서 저항이 있었다. 1978년 튀니지노동총연맹의 총파업, 2008년 소요.

“튀니지노동총연맹의 지도부는 정부와 사회적합의를 하거나 타협하기도 했지만 기층의 노동자들은 독립운동 때부터 이어온 독립성과 전투성을 가지고 있다.

국제 담당 기자. "튀니지 혁명은 정치혁명에서 사회 혁명으로 발전하는 연속혁명 과정을 밟아야 한다.” ⓒ이윤선' height=360>
“벤 알리가 14일에 도망가고 과도정부가 세워졌지만 구체제 인사들이 포함되어 있다. 지난주부터 총파업(특히 교사들)을 하고 있는 튀니지 사람들은 구체제 관료들을 인정하지 않는다.”

연사는 이 발언 중에 방금 들어 온 소식이라며 튀니지 총리 간누시가 현 내각에 포함된 구체제 장관 열두 명의 사퇴를 발표했다는 속보를 전했다.

“이전의 혁명들에서 제기됐던 논점들이 튀니지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구체제 관료들이 포함된 정부를 인정할 것인가? 몰아낼 것인가? 혹은 튀니지 공산당과 개인 사회주의자들은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자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이 논의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승리하길 바란다. 기존 자본주의 체제를 없애고 지역방어위원회와 공장 자주 관리가 전국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의 필요에 의한 생산과 민주적인 사회운영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연사는 튀니지 혁명이 정치혁명에서 사회 혁명으로 발전하는 연속혁명 과정을 밟아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혁명이 더 나아가려면?


청중 발언에서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은 튀니지의 혁명은 정치혁명이자 민주주의 혁명에서, 이제 사회주의 혁명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각주:1].

“이 과정은 필연적인 것은 아니어서 조직된 사회주의자들의 존재가 중요하다.

“이 과정은 러시아처럼 단 1년 안에 모두 해결될 수도 있지만 1차대전 말의 독일이나 1930년의 스페인처럼 5년에서 7년까지 걸리는 과정일 수 있다. 튀니지는 혁명 과정의 시작 단계에 있다.”[각주:2]

“이 과정에서 지배계급의 반격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혁명이 더 나아가려면 보안경찰 해체처럼 구 체제의 반격을 막을 요구와 동네 위원회를 노동자평의회로 발전시키고, 경제적 요구를 결합해 혁명을 자본주의 생산관계에 대항한 도전으로 심화시켜야 한다.”

몇 명의 발언 뒤에 토론회에 참석한 이집트와 튀니지 청년들에게 특별 발언 기회가 주어졌다. 특히 이집트 청년들은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이라는 모임을 결성하고 한국 주재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1월 31일 시위를 벌이려고 준비 중인 청년들이었다.

“한국인들의 연대를 바란다.”

먼저 튀니지의 나빌 씨가 발언했다.

“지금 벌어지는 일들은 어느날 갑자기 벌어진 일들이 아니다.

“23년 동안 축적돼 온 일들이 터진 것이다. 불평등, 뇌물, 부정부패가 반복되는 것을 참을 수 없어 폭발한 것이다.

“수차례 경제 위기가 있었지만 정부가 노력하면 우리 사람이 [경제 위기 고통을 민중에게 전가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통령만 도망간 상태다. 그러나 내무부, 재무부 같은 구 체제의 내각은 유지되고 있다.

“사람들은 이들도 모두 물러나야 한다고 요구 중이다.”

△"이집트 일로 4일간 잠을 못자고 있다. 가족, 친구, 동지들의 투쟁을 인터넷으로 알리고 있다.그런데 오늘 모든 접촉이 끊겼다..한국은 독재를 타도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이집트의 상황을 이해하고 연대해 줄 거라 생각한다. " ⓒ이윤선



이집트 청년이 뒤이어 발언했다.

“지금 오늘[28일] 시위 소식을 파악하고 있다. 인터넷 접촉이 끊겼는데, 학살이 벌어졌다고 한다.

“무바라크는 내려오라고 한마음으로 외치고 싶다. 기존 내각과 국회의원 모두 사임해야 한다.

“감시평의회 만들어서 보안경찰을 솎아 내야 한다.

“위대한 민중이 정의를 외치고 있다. 한국은 독재를 타도한 나라다. 연대해 줄 거라 생각한다. 월요일 집회에 이집트인과 한국인이 함께 했으면 한다.”

이 둘의 발언은 큰 박수를 받았고, 사회자의 긴급 제안으로 참가자 모두 “Step Down Mubarak!” 구호를 함께 외치기도 했다.

김하영 다함께 운영위원은 한국의 반독재 투쟁 경험에 바탕해 중동 혁명의 과제를 제시했다.

“독재는 결코 정치 체제만의 문제가 아니다. 벤 알리 일가가 튀니지의 알짜 기업을 모두 소유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번 저항도 경제 위기에서 비롯했다. 정치 민주화만이 아니라, 근본적인 사회 변혁으로 나아가야 한다.

“한국에서도 전두환 한 명만 물러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6월 항쟁에 뒤이어 1987년부터 2년간 노동자들의 파업 물결이 민주주의의 역행을 막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이른바 민주화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추진하고 비정규직을 양산했다. 중동에서도 혁명이 더 나아가야 한다.”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중동의 저항 역사에서 좌파의 구실에 관해 말했다.

“<한겨레>는 튀니지 혁명이 아랍권 최초의 시민 혁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1958년 이라크에서 국왕 파이잘을 타도하는 민중 혁명이 있었다.

“계기는 이집트 대통령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려고 한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 제국주의 국가와 이스라엘이 전쟁을 걸어 왔다. 결국 이집트가 패배했는데, 이라크 민중은 자국의 왕이 아랍의 형제를 침략하는 데 협조한 것을 보고 열받아 국왕을 타도한 것이다.

“이 때 공산당이 큰 구실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국왕을 쫓아내는 데서 멈춰 버렸다. 결국 권력은 아랍민족주의 정당인 바트당에게 돌아갔다. 이 당은 권위적이고 국가 주도의 발전을 추구하는 당이었다. 이 당의 지도자가 사담 후세인이었다. 바트당은 공산당을 탄압해 궤멸시켰다. 2003년에 공산당 잔류파는 미국의 이라크 침략을 도왔다.

“‘가장 원성을 사던 독재자를 타도하는 데서 멈출 것인가’ 하는 문제에 답해야 한다. 좌파는 공산당의 타락을 교훈 삼아야 한다.”

전지윤 <레프트21> 편집자도 지배계급 전체에 맞서는 쪽으로 혁명이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프랑스 지배자들은 튀니지 독재자 벤 알리를 ‘친구’라고 했었다. 오바마는 무바라크를 ‘소중한 동맹’이라고 말해 왔다. 이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을 펴고 미국의 전쟁을 도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통령만 물러나고 따라서 대통령만 물러나고 이런 정책이 계속되면 안 된다.

“총리, 장관, 의원, 사장 모두 물러나야 한다. 이들이 모두 물러나고 노동자가 권력을 잡을 때까지 중단 없이 혁명을 밀어붙여야 한다.”

△“Step Down, Mubarak!” “Free Tunisia!” “Free Egypt!” ⓒ이윤선


논쟁도 있었다.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회원이라고 밝힌 한 참가자는 “튀니지도 서로 힘 보태야 하지만, 한국이 더 급하다. 한국은 시위도 못 하게 하는 독재다” 하고 주장했다.

한 대학생은 이에 이렇게 답했다.

“G20 회의를 보면 지배자들이 서로 갈등하는 듯 보이지만 경제 위기를 민중에게 전가하는 점에서 한마음이다. 국적이 나뉘어 있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높은 실업률, 높은 물가, 낮은 임금 등 비슷한 조건에서 고통 받고 있다.

“세계체제의 약한 고리인 중동에서 혁명이 승리하면 세계체제에 위협이 되므로 우리는 함께 싸워야 한다.”


가능성


연사는 연대를 호소한 이집트와 튀니지 청년들에게 “힘 되는 한 지지하고 연대할 것”이라는 말로 정리 발언을 시작했다.

연사는 청중석에서 서면으로 들어 온 두 가지 질문을 묶어서 답을 했다.

한 질문은 ‘혁명이 성공해도 또 부패하지 않겠는가’였고, 한 질문은 ‘혁명이 너무 급진적으로 나가면 제국주의의 개입을 불러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현대의 모든 혁명은 똑같은 선택에 직면했다. 이집트의 나세르 정권이나 튀니지의 부르기바 정권도 민중의 지지를 받아 집권했다. 그러나 무바라크와 벤 알리는 바로 이들의 후계자다.

“민중들은 식민 세력을 몰아내 더 나은 삶을 누리려 했지만 혁명의 목표가 제각기 달랐다. 이 정권들은 더 발달한 자본주의를 추구했다. 이들이 민중에게 한 약속과 목표 사이에 모순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 혁명은 아래로부터 혁명이었다. 내가 튀니지 혁명이 확산하지 않으면 고립되고 제국주의의 개입을 초래할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다. 독일 등에서 혁명이 승리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그러지 못했다.

“스탈린은 고립된 상황에서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쟁해 살아 남느려고 부국강병을 추구했다. 과물과 싸우다 괴물이 된 것이다.

“결과는 자동적이지 않다. 혁명 세력 사이의 논쟁에서 누가 이기냐가 중요하다. 결집된 사회주의자들의 존재가 그래서 중요하다.

“한두 달 전에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혁명을 가능성을 말했다면 모두 꿈꾸는 이야기라고 했을 것이다. 이는 악독한 정권으로 고통 받는 한국에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 이 글은 <레프트21> 49호 온라인 판에 1.29 자로 실렸습니다. ☞ 원문 가기

  1. 마르크스는 혁명을 정치혁명과 사회혁명으로, 또는 부르주아 혁명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구분했다.트로츠키는 같은 현상을 민주주의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으로 구분했다. 즉, 기성 정부를 뒤짚는 정치구조의 변동을 낳는 혁명과 마르크스가 생산관계라고 불렀던 경제 구조 전체를 변혁하는 혁명을 사회 혁명으로 구분하는 것이다.예를 들어, 지금의 튀니지 혁명이나 한국의 4·19 혁명 등은 정권은 타도됐지만, 관료 기구와 기업주와 부자들의 경제 우위는 그대로 유지됐다. [본문으로]
  2. 어제 이스라엘 내무장관이 튀니지 혁명을 러시아 혁명과 연관짓는 발언을 했다고 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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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집회’가 31일 한국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열린다.

한국에 거주하면서 독재 정부에 반대하는 이집트인들은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모임을 결성하고 집회를 개최하기로 했다.

이들은 시위 초기부터 이집트 국내와 연락을 유지하며 시위를 지지하고 무바라크 정부의 탄압 실상을 파악해 왔다.

현재 이집트 무바라크 독재 정부는 시위 며칠 만에 적어도 7명이 넘는 시위자를 죽인 것으로 알려졌다. 해외와 통하는 인터넷과 시위 수단으로 이용하는 트위터와 페이스북의 접속도 차단한 상태다.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한국 언론들과 인터뷰를 통해 정확한 이집트의 실상을 알리기 바란다. 또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도 이집트의 민주화 저항 운동을 지지해 주길 바란다.

레프트21 주최 ‘튀니지와 21세기 혁명’ 토론회에 참석한 튀니지와 이집트 청년들.


이들의 연락을 받은 ‘다함께’는 즉시 이들의 요구에 동의하고, 이 집회를 한국의 시민사회단체들과 함께 주최하려고 하고 있다.

1월 31일 집회에는 이집트인들 30~40명과 이집트 저항을 지지하는 한국인들이 참가할 계획이다. 집회 후에는 주최 단체들이 공동으로 이집트 대사관에 항의 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다.

튀니지 혁명의 열기가 중동 민주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이집트는 중동에서 가장 산업화하고 경제 규모가 큰 나라다. 이집트의 독재 정권이 무너지는 것은 중동 민주화에 결정적 분기점이 될 수 있다.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은 이 중요한 운동에 한국의 진보적인 단체와 개인들이 더 많은 관심과 연대를 보내 주기 바란다. 1월 31일 집회에 참석하는 것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

이집트 민중 운동은 물론이고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도 2006년에 한국의 진보단체들이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무바라크의 저항 운동 탄압에 항의하는 집회를 연 사실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집회

 

일시: 2011년 1월 31일(월) 오후 2시

장소: 한남동 이집트대사관 맞은편 독일학교 앞 인도

주최: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한국 사회단체들(섭외 중)

연락: 김용욱(010-8348-9666)  ※이집트인 인터뷰도 담당


※ 이 글은 <레프트21> 49호 온라인 판에 원문 그대로 실렸습니다. ☞ 바로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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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의 민중 반란 기사 모음

세계경제 위기의 여파가 튀니지에 밀어 닥치자, 23년 독재자 벤 알리는 억압 통치를 강화했다. 노점 좌판을 뺏긴 청년 모하메드 부하지지는 몸에 불을 붙여 자살했다.


이것이 민중의 분노에 불을 당겼다. 튀니지 청년층의 실업률은 “전국적으로 약 40퍼센트에 이르는데 인구의 42퍼센트가 25세 이하인 튀니지에서는 잠재적 폭발력이 있는 사안이다. IMF는 이집트, 요르단, 튀니지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 중 7명당 1명이 실직 상태라고 한다.”

이 혁명이 인근 국가로 퍼져 나가고 있다. 중동에서 가장 경제 규모가 크고, 산업화했으며 30년이 넘는 군부 독재 상태인 이집트에서 이 혁명의 파장이 밀어닥쳤다. 수만 명이 전국에서 시위를 벌였고, 이집트의 ‘울산’이라는 마할라 지역 노동자들도 거리로 나왔다. 시위대는 카이로 시내에선 밤을 새며 진압 경찰과 전투를 벌였다. 이들이 꼭 승리하기를 바란다.

물론 이집트 저항 운동은 아직 튀니지처럼 혁명으로 발전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아래 동영상들을 보면 그 수위가 일상적인 항의 시위는 아닌 듯하다.

억압적 정치 구조, 엄청난 경제 불평등, 높은 실업률(특히 청년), 부패하고 친미적인 상층 엘리트들의 횡포 등 중동 여러 나라들은 안 좋은 쪽으로 매우 닮아 있다. 그것이 이 지역에서 투쟁의 확산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세계경제 위기가 유럽의 반란을 지중해 너머 북아프리카로 실어 나른 것이다. 나이는 여든이 넘었고, 이름은 無발악이지만, 이집트의 老독재자는 마지막까지 발악할 것이다. 

오늘 한국에 잇는 이집트인들이 한국의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하고 싶다고 한국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월요일 이들과 함께 이집트 저항 운동을 지지하는 집회를 한남도 이집트 대사관 앞에서 개최하기로 했다. 이 반란이 성공하길 바란다. 그래서 한국의 저항 운동에도 좋은 영향을 끼치길 바란다.

※ 아래는 페이스북 친구들이 찾아내 올려놓은 동영상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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