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주노총은 노동절을 앞두고 “촛불항쟁 이후 민주노총 신규 노조 가입 및 결성 현황”을 발표했다.

이를 보면, 2017년부터 올해 4월까지 민주노총 조합원이 7만 6447명 늘었다그런데 “[가입 증가는] 2016년부터 목도되고 있는 경향”(민주노총)이다. 2016년 이전 두 해에 조합원 증가는 각각 1만 명이 안 됐으나, 2016년 한 해에 36343명이 증가했다.


년도

조합원수

비고

1995년 11

418,154

.

2010년 11

677,790

▽ 25,808

2011년 12

674,279

▽ 3,511

2012년 12

693,662

▲ 19,383

2014년 1

681,142

▽ 12,520

2015년 1

691,136

▲ 9,994

2016년 1

698,026

▲ 6,890

2016년 12

734,369

▲ 36,343

2018년 4

810,816

▲ 76,447


다음과 같은 민주노총의 평가가 옳아 보인다.

2015년 노동개악 저지 총파업과 민중총궐기 등으로 박근혜 정권 퇴진 투쟁을 선도적으로 이끌었으며, 2016-2017 박근혜 퇴진 촛불항쟁에서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데 대한 대중적 주목이 일정한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인과관계를 따지면박근혜 첫해부터 진주의료원 폐쇄, 철도 민영화 반대 파업, 노동개악 반대 파업 등 부분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노동자 투쟁이 촛불에 영향을 끼친 것이지 그 역이 아닌 것이다.(물론 조직 노동자 운동이 촛불을 더 나아가도록 밀어붙이지 않은 것은 아쉽지만 말이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아래서 (사정이야 어찌됐든민주노총의 선봉부대로 활동했던 공공운수노조금속노조보건노조가 촛불 이후 신규 가입의 3분의 2를 차지한 것도 조직 확대가 촛불 이전부터 벌어진 투쟁의 결과물임을 보여 준다.(흥미로운 것은 이 중 금속노조 가입 증가다. 현대중공업노조가 12년 만에 민주노총으로 복귀했는데, 현중노조의 조합원총회 결정은 2016년이고, 가입 승인은 2017년으로 2017년 가입 증가 통계에 포함됐다. 2016년 시점으로 계산을 한다면, 민주노총의 2016년과 2017년의 가입 증가 규모는 거의 같게 된다.)

결국 여러 매개 과정들을 거쳤지만촛불과 촛불 이후 세력균형 ― 박근혜 퇴진문재인 정부의 등장일부 적폐 청산의 성취우파의 약화 등 ―에는 노동자 운동이 영향을 끼친 것이다.

조직 노동자들은 문재인 정부의 노동 무시 정책을 비판할 자격이 있고더 나은 진보·좌파 후보를 선출해 그런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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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총 정치 방침 논쟁

어떤 노동자 정치가 필요한가



<노동자 연대> 139호 | 발행 2014-12-08 | 입력 2014-12-06



진보·좌파 다원주의는 단결을 위한 고육지책


처음 직선제로 치러지는 민주노총 임원 선거에서 핵심 의제는 단연 박근혜 정부의 고통전가 파상 공세에 맞설 투쟁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였다. 민주노총 정치 방침이 중요한 쟁점이긴 해도 부차적인 쟁점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그러나 후보들의 정치 방침 정책에는 큰 차이가 확인됐다.

특히, 민주노총의 상층 지도부층이 연합한 전재환 후보 조는 진보대통합 정당을 만들어, 이를 지렛대로 정권 교체기에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구하자고 주장했다. 이 경우에는 진보대통합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가 필수적인 일이 된다.

그러나 노동계 진보정당들이 사분오열해 노동운동 안에서 분열ㆍ갈등하는 상황이다. 한상균 후보 조와 허영구 후보 조 등도 진보대통합 계획 자체에 부정적인 견해를 대변했다.

△ 자본가들의 고통전가 공세에 맞서 노동자들이 단결해 파업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필요한 노동자 정치다. ⓒ이미진


민주노총 지도부가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구축하려고 시도하는 일이 가망도 없고 현명하지도 않다고 보는 이유다. 

지금 같은 시기에는 무리해서 특정 정당에 대한 배타적 지지를 결정하려 하면 노동조합의 단결 자체가 위태로워질 수 있다. 노동조합은 정치적 견해가 아니라 노동조건을 공동으로 방어하려는 조직이니 말이다.

한상균 후보 조와 <노동자 연대>가 주장한 대로 민주노총이 진보ㆍ좌파 다원주의를 정치 방침으로 채택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 이유다.

진보ㆍ좌파 다원주의는 부르주아 정당들을 배제하는 조건에서 민주노총이 여러 진보정당과 좌파 정치단체 사이에 지지 대상을 열어 놔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동 정치는 의회와 정당 문제로만 환원되지 않는다


정치 방침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가 민주노총의 투쟁 노선과도 연결되므로 진보ㆍ좌파 다원주의 안에서도 어떤 정치를 민주노총이 추구하는 것이 옳은지 하는 문제는 남는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 개념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정치는 정당 문제를 포함하지만 그것으로만 환원되지는 않는다. 국가권력을 획득하거나 사용하는 문제, 국가기관의 통치 행위에 대응하는 문제, 정치적 견해ㆍ사상ㆍ신념 문제, 노동자 계급 전체의 쟁점과 단결 문제 등이 모두 ‘정치’에 포함된다.

이렇게 보면, 노동시간 단축, 최저임금 인상을 위한 법안 제정, 정리해고 요건 완화 같은 법 개악 저지 등을 위해 파업과 시위를 수단 삼아 대중투쟁을 벌이는 것도 ‘노동 정치’다. 기업주들의 ‘철밥통론’ 같은 이간질에 맞서기, 정규직ㆍ비정규직의 단결을 위해 주장하고 투쟁하기도 정치적 문제다.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정치 개념은 협소하다. 또한 그들은 정치와 경제 영역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고 의식적으로 분업을 추구한다. 노조는 작업장 문제(‘경제’)를 맡고, 정당은 선거와 의회 협상(‘정치’)을 맡아야 한다고 본다.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정치 방침 문제가 개혁주의 정당 건설로 곧장 환원되는 것도 이런 분업주의의 발로다.

그래서 노동운동의 상층 지도자들이 흔히 ‘정치(투쟁)로 해결하자’고 말할 때는 사실 사회적 타협(노사정위원회, 정당을 매개로 한 의회 협상 등)이나 사회적 타협이 가능한 정권을 세워서 노동 현안들을 해결하자는 뜻이다.

전재환 후보 조가 내세운 정치방침과 전략 노선이 전형적으로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2015년을 준비기로, 총선과 대선이 있는 2016~17년을 투쟁기로 설정했다.

사실 진보 대통합 → 야권연대 → 정권 교체로 이어지는 이 구상은 최근 몇 년 동안 민주노총 상층 지도자들의 방침이기도 했다. 결국 정치로 해결하자는 것은 새정치민주연합과 연대해 정권을 바꿔 노동 현안을 해결하자는 말이었다.

이런 전략은 노조 상층 지도자들의 소심함과 투쟁회피주의와 결합돼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이익을 지키는 전투적 투쟁을 기피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이번 선거에서도 전재환 후보 조의 계획도 당면 투쟁 과제를 회피하는 계획이라는 정당한 비판을 받았다.

총ㆍ대선이 있었던 2012년이 최근의 전형적인 사례다. 당시 민주노총 집행부는 정권 교체에 기대를 걸고 전략적 야권연대에 ‘올인’하며 선거 득표에 도움이 안 된다고 본 대중투쟁 건설에 소홀했다. 그러다가 총선 결과가 시원찮자 그나마 공언했던 총력 투쟁 계획마저 흐지부지됐다.

그 결과, 초기에 기세를 올렸던 언론 파업, 금속 작업장 투쟁들이 혹독하게 탄압받았다. 주목 받았던 쌍용차 투쟁에 대한 연대도 더 확산되지 못했다. 그해 총·대선에서 박근혜에게 연달아 패배한 것은 어느 정도는 노동운동 상층 지도자들이 자초한 세력관계 때문이기도 했다.

지난해 말 철도노조 파업 탄압과 민주노총 경찰 침탈 때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민주노총 지도부는 즉각 대중적 항의투쟁을 조직하지 않고 ‘정치권’(심지어 새누리당 김무성까지 나선) 중재에 의존했다. 결국 대중적 공분이 크게 일었으나 조직되지 못해 투쟁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따라서 지금 노동운동에서 걸림돌이 되는 것은 ‘정치’ 자체가 아니라 보수적으로 투쟁의 잠재력을 억누르는 상층 지도자들의 온건한 ‘개혁주의’ 정치다.


노동 정치의 진정한 독립성


민주노총 정치 방침은 첫째, 노동자 ‘계급’의 정치라는 출발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사회는 계급으로 분단돼 있고, 이 계급 분단선이 이 사회의 근본 분단선이다. 계급연합을 추구하는 포퓰리즘과 선을 그어야 한다는 말이다.

불가피한 경우에 일회적ㆍ부분적 야권연대를 할 수 있다 해도, 연립정부 추진 같은 전략적 야권연대를 추진하려고 노동자 계급의 독립적 이익을 유보하거나 양보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둘째, 노동자 계급 고유의 힘, 즉 작업장에서 자본주의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힘을 발휘하는 것도 노동 정치의 중요한 수단이다.

예를 들어, 진보 정당은커녕 대변할 의원 한 명도 없었던 1997년 1월, 민주노총은 대중파업으로 정리해고 법제화 등 개악을 막아 냈다. 민주노총이 정치 파업으로 노동자 계급 전체를 위해 행동한 것이다. 

이 파업 동안 민주노총 조합원들은 한국 정치의 주역이었다. 2013년 말 철도 노동자들이 민영화 반대 파업으로 박근혜에 맞선 가장 강력한 야당 구실을 했듯이 말이다. 의회의 정치 협상은 노동자 정치에서 훨씬 덜 중요한 수단의 하나일 뿐이다.

또한 작업장 안팎에서 계급적 단결을 추구해야 파업 같은 수단이 실질적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지금 부분 파업으로 진행되는 현대중공업 노조 파업이 진정으로 위력을 발휘하려면 정규직과 사내하청 노동자들이 함께 파업을 벌여야 한다. 정규직·비정규직, 남성·여성, 내국인·이주 등의 차이로 노동자를 이간질하고 차별과 분열을 조장하는 이데올로기와 억압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정규직 양보론을 함축한 사회연대전략이 정치 방침으로 부적절한 이유다. 이 점에서는 허영구 후보 조와 좌파노동자회가 불안정노동자를 사회 변혁의 주체로 간주하거나 노동당 지식인들이 ‘포섭된 노동, 배제된 노동’ 식의 구분을 하는 것도 약점이다.

이들 모두 작업장 파업과 그것을 위한 단결의 중요성을 경시한다. 이런 입장들은 아무리 좌익적 언사로 포장해도 계급적 단결을 추구하는 데서 장애가 될 뿐이다. 오히려 상대적으로 더 큰 경제적 힘과 조직력을 보유한 조직 노동운동이 앞장서 민중의 호민관 구실을 하도록 고무하고 촉구해야 한다.

셋째, 진보정당들이 전략적 야권연대를 염두에 두거나, 투쟁을 고무하기보다 협상이나 민주당에 의존하며 불필요한 양보를 하려 할 때, 노동운동이 정치적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기조는 총선과 대선 선거 방침 같은 소시기 정치 방침에도 적용돼야 한다.

이것이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이 ‘정치조직’인 정당에게서 독자적이어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수용하는 것은 아니다. 둘 다 대중조직이고, 노동조합도 정당과 마찬가지로 노동자 계급의 부분을 대표한다.

독립성의 진정한 쟁점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가 다른 계급의 영향력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점은 민주노총과 진보정당들 모두에 적용되는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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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립정부 논쟁과 인민전선주의의 역사

요즘 연립정부 추구 노선이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글에서는 그런 발상의 원조 가운데 하나인 인민전선을 다뤄 보려 한다. 개념에서 인민전선주의는 연립정부 노선과 같지는 않다.

인민전선은 자칭 혁명가들
(스탈린주의 공산당)이 ‘진보적’ 자본가들과 동맹하려고 내놓은 특정한 실천 전략이고, 연립정부는 서로 다른 정치세력이 정권을 연합해 잡는 좀더 일반적인 경우를 가리키는 용어다. DJP 연합도 일종의 연립정부였다. 정치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사민주의의 연립정부론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공산당 인민전선과 개혁적 사민주의자들이 추구하는 연립정부 노선은 공통점이 더 크다. 계급동맹을 추구하다보니 지지 기반이 되는 노동계급을 일관되게 대변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공통점 때문에 자칭 혁명가들이 내놓은 인민전선주의의 사기극 효과가 더 크다. 왜냐하면, 인민전선주의는 처음부터 반자본주의(또는 사회주의) 민중 혁명을 막으려고 고안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걸 위해서 인민전선주의는 체제 분석과 전략에서 단계론(역사적 숙명론)을 도입해 이 교조적 도식을 뛰어넘는 [현실의]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을 억제하며, 동맹을 유지하려고 자본가 친구에게 충성한다.

왜 그런지 이론과 실천의 역사를 통해 검증해 보자.


코민테른유럽 공산당들을 소련의 국경 수비대로 만들다


인민전선주의가 공식적으로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의 국제적 합의이자 당면 이론과 행동지침으로 확정된 것은 1935년 코민테른 7차 대회였다.

당면한 파시즘과 세계전쟁의 위협에 대비해 평화애호적인 모든 세력과 연합하고 정권에 접근한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각주:1]

1936년 5월 코민테른 집행위는 “현재 국면에서 많은 자본주의 국가들도 역시 평화 유지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래서 제국주의 전쟁의 위험에 맞서 노동계급과 모든 근로 민중 그리고 세계의 모든 국민들을 아우르는 광범한 전선을 창출할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이 노선을 정당화했다.

이렇게 노선을 변경한 데는 소련 당국의 실질적 이해관계가 걸려 있었는데, 이를 파악하려면 시계를 좀더 앞으로 돌려 봐야 한다.

○ 1917년 멘세비즘

인민전선주의 이론과 실천의 직접적 효시는 러시아혁명 당시 멘세비키의 전략과 실천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멘세비키는 러시아 자본주의가 정치·경제적으로 아직 저발전 단계이므로 다가올 혁명은 부르주아 혁명이 ‘돼야 한다’고 규정했다. 따라서 혁명의 주도권과 권력도 부르주아들이 가져가야 했다.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이 목표라는 점에 동조했지만, 어쨌거나 혁명의 주도 세력은 노동계급과 빈농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쟁점에서 가장 근본적으로 새 시각을 제시한 것은 트로츠키였는데, 그는 세계자본주의 관점에서 러시아자본주의는 이미 세계자본주의의 부분이므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사회주의로 곧바로 갈 수 있되, 그것은 국제혁명의 일부일 때 가능하다는 것이다.

레닌과 트로츠키는 분석은 달랐지만, 노동계급 주도성이라는 핵심 관점에서 일치했기에 1917년에 둘은 함께 혁명을 이끌었다.


어쨌뜬 이런 도식을 갖고 있던 멘세비키는 1917년 2월에 혁명이 터져 차르 체제가 날라가고 소비에트가 구성됐는데도, 부르주아 야당이 권력이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부르주아들을 설득하려고 애원했다. 애원한 이유는 실질적인 도시 통제력을 노동자소비에트가 가지고 있어서 부르주아들은 임시정부에 실질 권력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멘세비키의 좌파인 국제파 수하노프마저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안 된다고 이렇게 말했다.

부르주아지 전체가 일제히 온힘을 다해 차르 체제를 지지하고, 차르 체제와 손잡고 강력한 반혁명 공동전선을 구축할 것이다. 그리되면 중간계급 전체와 언론이 모두 혁명에 반대해서 일어설 것이다. ... 그런 상황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혁명은 반드시 패배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현실적 태도가 아니라 혁명의 목표마저 망각하는 재앙적 태도라는 것은 수하노프 자신의 증언에서 드러난다. 러시아혁명은 1차대전이 가한 징집과 전사, 빈곤과 억압 등에 반발한 것이었다. 즉각 전쟁 중지를 선언해야만 국내에서 변혁을 진전시킨 기회가 생기고, 적국의 노동계급을 향한 반전 메시지로 반전 혁명이 확산할 여지가 생길 테다.

그런데 멘세비키 좌파라는 수하노프마저 “혁명의 성공을 위해 부르주아지의 충성과 부르주아 정부에 의존해야한다면 일시적으로 전쟁 반대 구호를 보류할 필요가 있다는 것도 선험적으로 명백했다”고 말한다. 혁명은 왜 한 것일까.

인민전선주의의 국제 수장인 스탈린이 1917년 2월의 시기에 볼세비키 지도부였으면서도 이 멘세비키의 임시정부 지지 입장을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레닌의 비판에 한동안 동조하지 않았던 것은 적어도 이론의 면에서는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 코민테른 2기의 좌충우돌 후 우선회 시기

1924년 소련 당국은 ‘일국사회주의’ 노선을 선포한다. 1923년 독일 혁명 패배 후 실질적인 국제혁명 전략을 포기한 것이다. 고립된 소련에서 사회주의를 건설하겠다는 것인데, 이제 스탈린식 국제주의는 서유럽 등 다른 지역의 공산당들의 목적이 소련의 영토와 체제 안정을 도모하는 것으로 바뀌는 것을 뜻했다.

그래서 이 때부터 코민테른은 소련 국내 정책의 대외적 반영, 그리고 대외 정책을 위해 서유럽 공산당들을 통제하고 희생시키는 도구가 됐다. 스탈린 체제가 신경제정책의 성과에 고무돼 일국사회주의를 내세우며 부하린과 우파 동맹을 맺고 농민 우대 정책을 펴던 1925~1927년의 시기는 인민전선의 맹아적 시도들이 개시된다.

핵심은 반식민 상태인 중국에서 제국주의와 맞서려면 애국적 자본가와 지식인, 농민, 노동자가 동등하게 동맹해 독립 자본주의 국가를 추구해야 한다는 전략으로 중국공산당을 중국국민당에 예속시킨 것이다.

1925년 영국 제국주의에 맞선 항거가 발전한 상하이 중심의 노동자혁명은 엄청난 사건이었고, 이 혁명이 성장하면서 주도적 구실을 한 공산당도 성장했다. 그런데 지역 군벌과 일부 자본가들을 기반으로 한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는 이 혁명 덕분에 상하이를 점령할 수 있었으면서 환영하는 노동자들을 오히려 학살했다. 소련 당국은 공산당에게 자신이 군사적으로 후원하는 국민당과 장개석에게 복종하라고 지시한다. 그 대가로 혁명과 중국공산당이 참담하게 파괴됐다.

영-소 노동조합위원회 시도도 영국 노동조합 관료들에게 이용만 당한 채 끝을 맺고 만다. 영국의 개혁 좌파와 동맹해 영국 정부에 압력을 넣는다는 전략이 오히려 개혁 좌파에 비판적인 공산당의 입과 손을 막아 1926년 총파업을 노조 좌파 지도자들이 말아 먹을 때에도 공산당은 아무 대응도 하지 못했다.

다음은 이 시기에 관한 아이작 도이처의 증언이다.

당시에 코민테른은 트로츠키주의 이단자들과 지노비예프주의 이단자들을 뿌리뽑느라 여념이 없었다. 이런 이단자들의 뚜렷한 특징들은 '중간계층과의 동맹'에 대한 '초좌익적'이고 부정적인 태도, 그런 동맹을 맺는 것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태도, 그리고 특히 저발전 국가들에서 부르주아 혁명이 부르주아지가 진보적이고 심지어 혁명적 역할을 수행하는 역사발전의 독립적 단계를 형성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로 규정되었다.[각주:2]

코민테른은 '동맹'을 무조건 숭배하는 병에 걸린 듯했다. 이런 숭배에 대해 조금이라도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조짐을 보이면 트로츠키주의라는 낙인이 찍혔다. 동맹에 대한 숭배는 두가지 목적에 이바지했다. 소련 안에서 그것은 부하린과 스탈린의 우익적 노선을 정당화해 주었다. 국제적으로 그것은 중국공산당을 국민당에 예속시켜 장개석의 명령을 따르게 만든 소련의 중국 정책을 정당화해 주었다.


○ 1935년 코민테른의 마지막 대회

코민테른은 주인의 명령을 따라 노동계급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와 노동계급의 조직과 운동을 파괴하는 파시즘이 똑같은 것이라는 ‘사회파시즘’론을 1928년 내놓았다.

이때는 관료-우파-농민 동맹으로 우선회하던 시기에 성장한 부농이 오히려 관료 권력을 위협하면서 스탈린과 관료들이 농민을 억압하고 농촌을 수탈해 급속한 공업화로 방향을 전환하던 시기다. 강제농장이 시행되고 노동자의 민주적 권리가 파괴됐다.(이른바 국가자본주의 반혁명)

이것은 좌선회로 비춰졌는데, 중국에서 우경적 정책이 파탄난 것을 만회하려고 스탈린은 초좌파 모험주의로 방향을 튼 것이 이런 변화들을 정당화했다.

이런 초좌파 모험주의는 독일에서 히틀러가 집권하고 공산당이 박살나면서 재앙이 됐고, 이제 나찌 독일의 침략 위협에 직면하게 된 소련 지배자들은 서방 제국주의와 군사동맹을 맺어 독일의 위협을 방지하려 했다.

게다가 3기 초좌익 전술이 실패한 결과, 노동계급 대중의 정서가 단결을 추구하는 정서로 바뀌었다. 그리고 중국과 독일에서 패배한 스탈린주의가 국제 좌익들의 의심을 걷어내고 계속 지배력을 행사하려면 혁명적 좌익들을 말살하고 배제할 필요가 있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코민테른의 절대 전략으로 제시된 것이다. 소련 방어를 위해 서방 강대국과 우호 관계를 맺으려면 그들을 놀라게 해서는 안 된다. 이제 소련과 우호적일 가능성이 있는 모든 나라에서 공산당들은 자국 지배자들을 겁먹게 하는 행동을 중단해야 했다. 즉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 계급협력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본주의 반대와 제국주의 반대 모두 코민테른 7차 대회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각주:3]

그런데 이것은 코민테른 자신을 근본에서 부정한 것이었다. 1919년 코민테른 결성 당시 레닌 등이 작성한 코민테른 가입 조건(‘21개 조항’)에는 공산당과 자본가 정당의 연합 반대가 포함돼 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애국주의로 전향한 제2인터내셔널을 대체한 진정한 혁명적 국제주의 제3인터내셔널로서 코민테른의 존재 의의는 이제 사라졌다. 코민테른이 인민전선을 채택한 7차 대회를 마지막으로 활동이 정지됐다 흐지무지 1943년에 해산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1930년대는 세계적 경제 위기 상황에서 노동자 혁명이라는 희망도, 파시즘이라는 위협도, 그리고 세계전쟁이라는 공포도 현실적 문제였다. 인민전선이 집권가능했던 것은 노동 대중이 프랑스의 급진당이나 스페인의 공화연합 같은 당들이 아니라 공산당과 사회당에게 권력을 주고 싶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공산당들은 저항의 열기를 인민전선 전략에 따라 자유주의 자본가당들과 연합해 정권을 잡으면서 통제했다. 대중의 혁명적 열기는 헌정 질서 아래서 선거적 지지로 표현해 달라는 요구를 받았다. 바로 어제까지 사민주의도 적이라며 겁나게 혁명적인체 하던 공산당에게서 말이다!


노동자운동이 내전 종식 뒤 프롤레타리아 독재 수립을 목표로 삼는다는 것은 절대로 잘못된 것이다. ... 우리 공산주의자들은 이런 가정을 최초로 부정한 사람들이다. 우리는 오직 민주공화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염원 때문에 투쟁하고 있는 것이다.
― 인민전선 결성 후 스페인공산당 일간지 편집자 헤수스 에르난데스


[스페인] 인민전선 강령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아마도 진지한 사회경제적 요구들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점이다. ... 강령은 진통제와 같은 성격의 문건, 공화정과 같은 민주주의적 정부만을 위해서 모인 다양한 부문의 광범한 연합을 위해 마련된 것이 분명했다.
― E. H.카

단결 정서에 어느 정도 부합한 대가로 인민전선을 결성한 프랑스 공산당과 스페인 공산당은 성장했다. 스페인 공산당은 서른다섯 배나 커졌다. 그래봐야 다섯 배 성장한 프랑스 공산당의 10분의 1밖에 안 됐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성장은 당 구성에서 중간계급의 비중이 늘어나는 성장이었다. 명백한 좌익적 분위기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정치의 구심력이 사라졌기 때문에 구성의 변화는 당의 성격 변화를 보여 주는 징표로 남고 만다.

목표대로 1935년 5월 프-소 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되고 7월 프랑스 인민전선 협약이 체결된다. 1936년 4월 총선에서 인민전선이 집권한다. 프랑스 공산당은 각료 참여를 원했지만 배제됐다. 그러나 공산주의자 각료로 자본가들을 놀라게 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인내했다.

스페인 인민전선도 1936년 2월 집권에 성공한다. 이 정당들의 집권 과정과 성적표는 링크한 기사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프랑스 / 프랑스 총파업 / 스페인

이 정당들은 자본주의 헌정 질서를 지키려고 정치적 양극화가 첨예해지는 시기에 양극화의 왼쪽 끝을 억누르는 구실을 자임했다. 어제의 혁명가 당이 오늘의 혁명을 가로막자 내일의 희망이 묘지로 갔다.

1936년 스페인의 반파시즘 혁명과 프랑스의 거대한 점거 총파업 운동이 뒤통수를 맞았다. 대중은 환멸과 사기저하에 빠졌고 자본은 위기를 반동적 방식으로 처리하기로 맘먹었다. 언제나 인민전선 실패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스페인에서 프랑코가 이겼고, 프랑스에선 인민전선 정부에서 공산당과 사회당이 쫓겨나고 달라디에 등 우파들이 정권을 파시스트인 비시에게 넘겼다.

여기서 스탈린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영국 등은 나찌 독일을 달래려고 폴란드를 히틀러에게 넘겨줬다. 서방 강대국과 동맹해 히틀러의 군사 위협을 막겠다는 소련의 국제 인민전선 전략이 실패한 것이다. 소련 당국은 금세 입장을 바꿔 1939년 히틀러와 독·소 불가침 조약을 맺으며 서방 제국주의를 비난한다. 그들이 말하는 평화는 거짓이라는 것이다.(이 말은 맞다.)

그러나 히틀러가 약속을 깨고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당국은 다시 민주적 제국주의, 진보적 제국주의, 진보적 민주주의 운운하며 국제 차원의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조선의 좌파들과 민중운동은 미군을 점령군이 아니라 해방자로 환영하는 결정적 실수를 저지른 배경이다.

이런 타협이 훗날 1970년대 유러코뮤니즘의 “역사적 타협”으로 귀결된다. 그래서 1971년에 칠레에서 아옌데가 이끄는 인민연합 정부가 들어섰을 때, 인민전선 전략을 견제하는 좌파가 거의 없었다.



실패의 교훈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 노선에서 핵심은 혁명의 국제적 확산을 포기하고 ‘사회주의 모국’인 소련을 군사적으로 보호하는 것이었다. 코민테른은 이를 위해 각국 공산당을 동원하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그 절정이 인민전선 전략이었다.

특히 나치 독일의 위협이 현실이 되자 히틀러를 막으려고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심지어 스탈린은 스페인 내전 초기인 1936년 사회당 소속인 수상 카바예로에게 사유재산 보호를 요구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요컨대, 인민전선 전략은 애초부터 그 목표가 체제 위기를 혁명으로 해결할 노동계급의 잠재력을 억제하는 데 있었다. 자본가들에게 혁명을 낚아채고 파괴할 기회를 혁명가들이 제공하는 것이다. 자신들이 잡아야 할 권력을 부르주아에게 양보한 것이니 말이다.

반면에 자본가들은 노동자 혁명을 두려워했다. 그것이 스페인처럼 파시스트 쿠데타에 맞서 공화국 정부를 옹호하려고 시작된 것이었을지라도 그랬다. 자본주의의 근간인 자본주의적 소유권을 건드리지 않는 파시즘이 노동계급 대중에게 총을 주는 것보다는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에 이들이 술책을 부려 혁명의 주요 타겟을 자신들에게서 돌리고 자신들이 혁명에 올라타 그 목을 죌 수 있다면 최상의 방법일 것이다. 물론 그것은 엄청나게 힘들고 주도면밀해야 하는 과정일 것이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인민전선에 참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트로이의 목마’다.

결국 공산당의 인민전선주의가 자본가들이 혁명에 올라탈 기회를 줬다. 혁명적 투쟁으로 얻은 신용을 자본가들을 신용보증해주는데 써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인민전선주의는 스탈린주의자들의 술책이기도 했지만, 국제 자본가들의 손바닥 안으로 스스로 기어 들어가서 벌인 술책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노동계급 자신의 권력기관으로 기존 국가를 대체해야 한다는 결론까지 도달하지 못한 채 총파업(30년대 프랑스나 70년대 칠레)이나 봉기(30년대 스페인)에 나선 노동자들은 공산당과 사회당이 포함된 인민전선 정부를 자신의 정부로 여겼다는 것이다.

혁명적 위기의 시대에 이런 모순된 의식을 배경으로 한 인민전선 정부의 집권은 혁명적 위기(과 노동자의 자신감)의 고조와 혁명의 방향을 헌정 질서 안에서 투쟁하는 문제(독립적 투쟁 발목 잡기)로 전환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드러내게 마련이다.

게다가 자본주의 국가기구는 혁명가들이 선거로 최상층 부위를 장악한다고 해서 그 계급지배 성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최근 통치,정치 라는 이름으로 운동과 정치, 투쟁과 집권을 대립시키며 계급협력과 연립정부 참여 노선을 미화하는 개혁주의 경향들[각주:4]이 있는데, 이것은 스스로 국가의 포로가 되는 엘리트 [개혁주의] 정치를 앞으로 목적의식적으로 추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인 듯하다.

문제는 좌파들이 반MB야권연대 수준에 갇혀 있으며 투쟁을 억제하니 실제로 대중의 의식 발전도 그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실제로는 대단한 투쟁이 필요한 인민전선주의가 대중적 지지를 받는 상황이다.

○ 대안적 전략·전술

이처럼 인민전선주의의 본질과 그것이 등장하는 배경의 모순적 성격 때문에 단지 인민전선이 나쁜 것이라고만, 여기에는 다른 의도가 있다고 폭로하는 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세력을 모으고 대안적인 행동을 건설해야 하고, 경험에서 인민전선 전략의 허위를 입증해야 한다. 그것은 계급투쟁 상황, 세력관계, 대중 정서를 모두 감안한 구체성을 띄어야 한다.

인민전선의 대안은 행동을 위한 대중이 인민전선과 독립된 자주적 행동을 유지하면서 투쟁 경험을 의식과 운동을 전진시키도록 돕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1930년대에 트로츠키는 노동자 공동전선을 제안했다. 무엇보다 자본가와 혁명가들의 연립정부가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와 공존하는 상황에서 대처했던 1917년 러시아 혁명의 경험이 유용하다. 이 승리의 경험이 트로츠키 사상의 원류이기도 하다.

1917년 레닌과 트로츠키가 이끌던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타도하자는 선진노동자들의 때이른 봉기를 억제시키고 [어쨌든 2월 혁명의 성과로 비치고 있는] 임시정부를 입증하는 전술을 썼다. 그들은 카데츠(자본가)-사회혁명당(농민)-멘세비키가 동맹한 임시정부에서 ‘내각의 자본가장관들은 물러나라’라고 요구했다.

임시정부에 대한 환상을 부추기지 않으면서 주적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제 멘세비키는 이 요구에 어떻게 응하냐에 따라 누구를 대변하려 하는지 입증될 것이다. 그리고 볼세비키는 임시정부를 [따라서 소비에트도] 전복하려는 코르닐로프의 쿠데타를 막는 데 앞장섰다. 반동에 맞서 임시정부를 군사적으로 방어한 것이다.

이를 통해 볼세비키는 혁명 전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집단으로 인정받아 소비에트의 다수파 지위를 획득하고 봉기를 주도해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인민전선의 본질이 노동자들이 권력을 잡아야 할 때, 자본가들에게 다시 돌려주는 것이기 때문에 볼세비키의 이런 접근법은 근본적으로 관점과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라는 원칙과 목표의 문제다.[각주:5]

즉 인민전선주의는 목표와 방법에서 모두 [전략으로서 신념으로서] 마르크수주의에서 이탈한 것이다. 자칭 혁명가들이었던 스탈린주의 관료들은 노동계급의 역사적 잠재력에 관한 신념을 잃고, 국제혁명의 가능성을 포기하고, 자본주의 체제에서 국가관료로서 살아남으려고 이런 국제적 계급협력을 추구했다.

궁극적 지향이 다르기 때문에 현재의 투쟁에 접근하는 법도 다르다. 이정희 대표 같은 야권연대론자들은 한진중공업 투쟁에 유시민이나 정동영을 끌어들이는 걸 중요하게 여긴다면, 혁명가들은 평조합원들이 굳건히 대열을 유지해 금속노조의 연대파업을 끌어내길 바란다.

또다른 예를 들면,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최근 ‘FTA 재협상’을 민주당과 야권 공통 요구로 합의했는데,혁명가들이라면 이따위 요구로 협정을 맺지는 않는다. 진보 양당도 그렇고 진보진영의 기본 견해는 FTA는 원천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혁명가들은 단기적 이익을 위해 야당과 제휴하더라도 필요한 행동, 즉 ‘한나라당의 일방 비준시 저지 행동을 한다’는 식으로 협정을 맺는다. 그리고 독립적 투쟁을 조직한다. 이런 방침은 유리하면 유리했지 불리할 게 하나도 없는 실천 협정이다.


결론

* 자본주의는 단계적으로/점진적으로 극복되지 않는다. 그것은 혁명적으로 전복해야 한다.

* 자본가들은 사회 진보를 위해 동맹할 세력이 되지 못한다. 지배계급의 분열이 성공적인 반란을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혁명의 목표는 지배질서 자체의 전복(사회혁명)이다.

* 인민전선주의의 단어상 목표는 정치혁명이지만 실천은 그조차도 가로막는다. 더 문제는 그 말뿐인 목표조차 사회혁명을 막으려고 제시된 것이라는 점.

* 노동계급의 자주적 행동이 중간계급을 끌어당길 수 있다.

* 절망은 필연이 아니고, 노동자들은 위기의 시대에 스스로 권력을 잡고 사회 변혁에 착수해야 한다.

* 혁명 기회를 놓치면 반동이 찾아 온다. 실패는 늘 혁명과 권력의 기회를 놓치고 양보한 데서 비롯했다.

* 자주적 행동을 고무할 명확한 강령과 전략, 현실적 전술을 실현할 조직과 조직력 필요

* 레닌과 트로츠키가 당면 지침으로 제안한 공동전선은 인민전선과 이렇게 다르다.

(1) 노동계급 정당들의 단결과 협력 ≠ 자본가 정당들과 계급 협력 목표

(2) 특정 목표 성취 위한 실천 협정 ≠ 공통의 선거 강령과 자본가 정부 지지

(3) 이데올로기적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 보장 ≠동맹을 무조건 지지하고 미화

(4) 혁명정당 활동의 한 부분 ≠ 인민전선은 코민테른의 전체 전략



○ 자본가들은 권력을 나누는 동맹이 될 수 있는가 ― 스페인의 사례

스페인에서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스탈린주의자들은 지금도 그렇다고 주장한다.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한 곳에서 패배했다.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다가 내각이 교체되기도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한다던 자유주의 자본가들은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것은 국제적 차원에서도 그랬다. 영국, 미국, 프랑스 등의 자유민주주의 정부가 스페인 공화정부를 지원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일 것이다. 그래서 저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국내 전선에서도 국제전선에서도 노동자들이 자본가를 놀라게 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본가들의 배신이 노동자들을 놀라게 했다. 자본가들과 단절하지 않은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사실 다른 모든 곳에서 자본가들의 행동은 마찬가지였다.)

반면에 자본가들의 이런 태도 때문에 노동자와 농민(농촌 인구의 다수는 사실 농업노동자였다)의 전쟁은 사회혁명으로 나아갔다. 옛 주인들이 파시스트를 피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그래서 사회혁명은 이들이 싸워야 할 이유가 됐다.그들에게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인민전선 전략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했다.

안타깝게도 스페인은 파시즘과 세계전쟁을 막느냐 아니냐 하는 기로였다. 진지하게 인민전선이 적용된 1930년대 프랑스, 1970년대 칠레에서 같은 비극이 정도만 다르게 반복됐다.


중간계급을 어떻게 획득할까

인민전선주의자들은 중간계급을 획득하려면 자본가와 동맹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들이 친자본주의 성향을 갖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매판 자본가 vs 나머지 모두의 동맹, 한나라당 vs 나머지 정치세력의 동맹. 이런 게 인민전선주의자들이 기본 도식이다.

중간계급과 동맹하는 것은 혁명적으로 성장한 노동계급에게도 중요한 과제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스스로 능력을 제한하는 것은 그 과제를 수행할 수 없게 만든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으로 사회를 개조하는 것이 나머지 대중의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입증할 때만 그들을 동맹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 생긴다.

농민 같은 고전적 중간계급이든 상층 관리자 같은 신흥 중간계급이든 중간계급은 그 분산적 존재조건과 이해관계 때문에 독자적이고 지속적인 조직과 사회변혁강령을 발전시킬 수 없는 존재다.

이들은 양대 계급의 충돌에서 강력한 편으로 쏠리게 마련이다. 이들이 평소에 친자본주의 성향을 띄는 것은 그것이 지배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 국가와 민족에 가장 강한 호응과 애착을 보이는 것도 이들이다. 민족국가와 국가관료기구는 그들에게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계급 운동이 계급 협력에 매여 독자적 힘을 최대한 발휘하기 힘들수록 중간계급은 노동계급의 능력을 오히려 불신하게 된다. 반대로 독일처럼 너무 공산당과 노동운동이 분열해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같은 효과가 난다.

1917년 러시아에서, 1936년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노동자 투쟁의 잠재력은 중간계급들을 노동계급 쪽으로 끌어당긴 게 분명하다. 이때 중간계급의 공산당 가입이 늘어난 것은 이런 견인력의 방증이다. 노동자 혁명이 경제위기로 파산하는 중간계급들에게 희망을 준다면, 절망적 몸부림인 파시즘이 중간계급에서 대중동원에 성공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이 혁명정치를 포기하고 혁명의 잠재력이 소진하자 당 구성비율 변화는 반대로 국가주의와 애국주의 등 온갖 낡은 사상과 편견, 그리고 인민전선주의를 당내에서 강화시키는 요인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인민전선주의는 노동계급의 발목을 잡아 중간계급마저 반동에게 내주는 정책이다. 



※ 이 글은 한 토론 모임에서 발표한 원고를 토론 내용을 반영해 다시 가다듬은 것이다.
  1. 대회 의장 디미트로프는 스탈린의 하수인 구실을 하던 자인데, 인민전선주의는 능동적으로 지지한 인물이다. [본문으로]
  2. 이 주장들은 최근 국민참여당 등과 가까워지는 진보정당 리더들을 비판하면서 상시적 야권연대와 국참당 진보통합 포함론에 반대하는 이들에게 가해지는 비난 말투와 너무 유사하지 않은가. [본문으로]
  3. 당시 인도 공산당의 대표는 인도를 식민 점령하고 있는 영국 제국주의에 관해 단 한마디도 발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것은 최근 개악된 민주노동당의 강령에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명백히 후퇴한 것을 떠오르게한다. [본문으로]
  4. 이들은 주로 이론적 근거를 베른슈타인과 막스 베버에게서 끌어오는데, 최장집과 박상훈이 대표적 이데올로그로서 심상정, 유시민, 박용진 등이 이 용어법을 자주 사용한다. [본문으로]
  5. 1890년대 프랑스에서 밀랑의 내각 입각을 두고 반대하는 게드파와 조레스파가 논쟁할 때, 입각 지지파를 가능주의자들이라고 불렀다. 자본가 정부에 입각해서도 진보 추구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개혁주의자들처럼 이들은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을 냉소적이고 현실기권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동자권력의 가능성을 불신했다는 점에서 이들은 불가능주의자들이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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