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연대의 정치학

노동계급 투쟁이라는 중심이 있어야 한다


<노동자 연대> 155호 | 발행 2015-08-31 | 입력 2015-08-29



2011년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에 항의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모였던 ‘희망버스’ 운동 이후 ‘사회적 연대’는 노동운동의 유력한 전략이 된 듯하다.


사회적 연대는 조직 노동계급 밖에서도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운동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연 듯했다. 게다가 이른바 ‘대공장 정규직 노조’들이 (진짜 원인은 그 노조들의 소심한 지도자들 때문이지만) 노동자 연대에 소홀하거나 투쟁의 모범을 보여 주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연대는 이런 노동자 연대의 약점을 극복하는 신선한 수단처럼 보였다.


그 뒤로 현대차 비정규직 점거 투쟁, 유성기업, 밀양 송전탑, 쌍용차 노란봉투, 스타케미컬, 부산 생탁 등 여러 곳에서 ‘사회적 연대’ 행동들이 조직돼 왔다. 사실 이런 투쟁들의 최근 원조 격은 2008년 촛불운동 참가자들의 연대를 호소한 기륭 비정규직 투쟁이었을 것이다. 이듬해 쌍용차 투쟁에도 상당히 폭넓은 사회적 연대가 있었다.


이기주의·경쟁·소외가 만연해 그렇지 않은 사람들조차 삶에 대한 환멸과 불신에 시달리고, 종종 이런 도덕적 위기가 특정한 사회적 약자를 향한 혐오 광풍으로 표현되기도 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어 보이는 투쟁에 연대하는 ‘사회적 연대’는 고무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런데 이런 연대들은 사안에 따라 지지와 연대의 규모가 달랐고, 결과도 각각 달랐다. 당시의 객관적인 정치·경제 상황, 주관적인 조직화 정도, 노동자 연대의 폭과 강도, 전술의 적절성 등 여러 요인들이 투쟁 성패에 영향을 미쳤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가 노동자 연대를 대체할 것이라거나, 더 많은 사람들이 폭넓게 결집했으니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노동운동 일각의 생각에는 부족함이 있다. 노동운동의 전진을 위한 올바르고 효과적인 전략이 무엇인지 이론과 경험 모든 면에서 숙고해 봐야 한다. 최근 떠오른 ‘사회적 연대의 정치학’에 깔린 개념들과 전략을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으로 살펴보려는 이유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노동자 연대> 지난 호에 실린 사회연대전략 관련 기사도 그중 하나다.(“사회연대전략 비판: 계급 화해라는 공상적 ‘전략’은 노동계급의 힘을 약화시킨다”) 사회연대전략은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사회민주주의의 ‘(사회적)연대’ 개념은 본질적으로 복지국가를 위해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책임(재원)을 나눠 부담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독일 사회민주당의 함부르크 강령(2007)은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복지국가는 강자와 약자, 젊은이와 노인, 건강한 사람과 병자, 일하는 사람과 실업자, 비장애인과 장애인 사이의 조직화된 연대”(《복지국가와 사회민주주의》, 한울, 2012).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스웨덴 사민당 당수를 지낸 잉그마 바르손의 설명도 같다. “소득 수준에 상관없이 좋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권리는 기본적인 복지 …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연대적인 기여금을 내야만 한다.”(《사회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논형, 2009)


사회적 가치로써 사회적 협력과 개인에 대한 ‘공동체’의 책임을 강조하는 이런 개념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는 데에 강점이 있다.


노동 연계 복지


그러나 ‘공동체’의 개인에 대한 책임은 또한 ‘공동체’에 대한 개인들의 책임을 수반한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의 연대 개념·전략에서는 모든 개인들이 ‘공동체’의 구성원 자격으로 ‘공동체’를 위한 책임(각종 세금, 사회보험료 등)에 참여해야 한다.


개인들은 자신의 책임을 다하는 대신 공동체의 책임(개인의 권리)을 기대한다. 따라서 소득에 따라 공동체에 더 기여(세금)를 하는 것은 ‘미덕’이다. 또한 이를 위해 소득을 얻는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것도 모두 ‘미덕’이 된다. ‘제3의 길’을 내세웠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오늘날 복지 후퇴 과정에서 실업수당의 수급 요건을 강화하는 식의 노동 연계 복지를 선호하는 이유다. 권리를 보장받으려면 의무를 이행하라는 것이다. (공동체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 개인의 책임을 더 강조하느냐에 따라 오늘날 사회민주주의의 좌우가 갈린다고 볼 수 있을 듯하다.)


납세자가 모두 동등한 연대적 기여를 한다고 보는 사회민주주의 연대 개념은 사실 자본주의 사회가 계급으로 분열된 사회라는 점을 흐리는 것이다. 또한 ‘공동체’의 (모호한) 범위에 지배계급(의 일부)이 포함되는 한편 이민자와 이주노동자 같은 사회집단들은 배제돼 있는 듯하다.


그러나 계급은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 사회 현실이다. 지금 박근혜와 우파는 ‘기업 경쟁력을 위해 정규직 과보호를 줄이자’며 노동자들의 임금과 고용을 공격하고 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자본가들에게는 사업의 수익성이 (이것을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삶이든 희망이든 또는 지구 환경이든 희생시킬 수 있는) 최우선 순위라는 것이다. 결국 상호 연대적이며 안정된 삶이라는 노동계급의 이익과 자본가들의 우선순위는 충돌할 수밖에 없다.


계급 간 분열의 엄연한 현실을 흐린다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요성도 기각된다는 뜻이다. 사회연대 전략가에게 계급투쟁은 공동체 내부의 상호 신뢰(화해불가능한 계급들 사이의 협력!)에 위배된다. 특히 연대적 기여를 위한 경제 활동에 방해가 된다. 전후 복지국가의 틀이 잡혀서 영국 ‘노동당 개혁주의’의 전성기라고 불리는 1946~51년 애틀리 정부 아래서 파업 노동자에게 18번이나 군대를 투입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또, 노동계급의 계급으로서의 동일성도 흐려진다. 사회연대전략이 계급 협력(특히, 복지국가를 위한 보편적 증세)을 위해 노동계급 일부에게 사실상의 소득 삭감을 요구하는 것도 이런 원리에서 비롯한다.


불안정노동론의 사회적 연대론


한편,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에 바탕해 사회연대전략보다는 더 급진적인 ‘사회적 연대’를 구성하려는 좌파도 있다. 예를 들어, 알바노조 구교현 위원장은 “없이 사는 사람, 다 모여!”를 내걸고 지금 치러지는 노동당 당대표 선거에 출마했다. 구교현 후보는 좌파 정치가 “돈도 세력도 정치도 없이 사는 불안정 노동자를 포함해 ‘없이 사는’ 사람들을 위한 정치”가 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노동당이 “온갖국민운동본부가 돼야 한다”는 것이다.


좌파 정치가 빈곤하고 불안정한 노동자들과 연대를 구축해 이들을 제대로 대변하려 해야 한다는 주장은 옳다. 쟁점은 어떤 방법(전략)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냐다.


이 점에서 같은 노동당 리더이자, 희망버스의 주도적 조직자였던 정진우 전 노동당 부대표의 주장은 의미심장하다.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외부’를 향해 사다리를 내릴 수 있는 용기는 사회적 연대가 어떻게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증명해 보여주었다. 사회적 연대는 ‘외부세력’ 스스로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내부’를 ‘외부화’하는 과정이다. … 공장들이 실은 ‘내부’의 것이 아니라 … 언젠가는 사회적 연대의 힘으로 기획하고 공유되어야 할 우리 모두의 것임을 주장해야 한다.”(좌파 재구성을 위한 연속토론회, 2013년 10월 28일, “주체의 재구성 - 한국사회에서 좌파정치의 주체는?” 발제문 중)


정진우 전 부대표의 주장에서 전략적 행위주체는 공장 외부의 사회적 연대 세력이다. 그래서 공장이 오히려 ‘외부’가 되고, 조직 노동자는 조연이며, 운동의 성공은 공장들이 ‘외부에 존재하는 자들의 것’임을 확인하는 과정이 될 것이다. 이는 대리주의의 위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배제된 노동


정진우 전 부대표는 또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보다는 노동의 불안정성을 더 강조한다.


“‘포함된 노동’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의 구분 시점은 현재다. ‘지금은’ 포함되어 있는 노동이며, ‘아직은’ 포함되지 않은 노동이 아닌 상태다. 결국 시차를 두고 말한다면, 그것은 또 하나의 ‘배제된 노동’이다. 노동을 자본의 일부로 바라본다면, 역사적으로 모든 노동은 ‘배제된 노동’이다.”(《월간 좌파》, 2015년 8월호)


이처럼 ‘배제된 노동’을 자본주의 노동의 보편적 특징이라고 단정하면,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반대 희망버스 기획자인 정진우 전 부대표에게는 좀 억울한 얘기일 수 있겠지만) ‘포함된 노동’이 되려고 싸우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별로 의욕적이지 않을 위험성도 있게 된다.


‘포함된 노동’이고자 하는 욕구는 과도한 욕구로 보일 것이다. 그러므로 고용보다는 임금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공교롭게도 구교현 후보의 알바노조나 이와 연계된 좌파노동자회는 기본소득제 도입과 최저임금 1만 원 인상이라는 임금 요구는 대단히 강조하면서도 비정규직 정규직화 같은 요구는 그다지 비중 있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개인을 기준으로 한다면, 언젠가는 배제된 노동이 된다는 말이 맞겠지만, 체제 전체로 보면 포함된 노동이 자본주의가 굴러가는 데 언제나 중추 구실을 한다.


노동계급은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판매해야 하고, 그 때문에 판매 후 고용된 상태에서도 노동과정에 대한 통제력을 빼앗긴다. 이런 착취 과정이 고용 노동자들의 공통점이라면, 이것은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뒤집어서 보면, 자본은 오직 노동자들을 고용해 잉여노동을 강제할 수 있을 때만 이윤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노동은 자본에 의존하지만, 자본도 노동에 의존한다.


노동이 착취의 재료이면서 착취 체제를 해체할 힘을 갖는 것은 바로 이 이중성 때문이다. 오늘날 노동계급은 유례없이 집중되고 협력적인 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자신의 무덤을 파는 사람들을 만들어낸다는 칼 마르크스의 선언이 뜻하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따라서 정진우 전 부대표처럼 노동이 자본에 의존하는 측면만 강조하는 것에는 큰 약점이 있다. 물론 이는 불안정노동(프레카리아트)론 자체에 내재한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주의


불안정노동론과 이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론의 열쇳말은 ‘피해’, ‘배제’, ‘약자’다. 이들의 사회적 연대는 기본으로 ‘사회적 약자들(피억압 민중, 피해 대중)의 연대’다.


연대가 공통된 처지에 기반해 부분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이라면, 이들의 공통점은 ‘약자이기 때문’이다. ‘없이 사는 사람들 다 모여라’는 것은 위기를 겪는 야만적 자본주의에 대한 정당한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다.


문제는 약자들이 모이는 것이 어떻게 자본주의 극복을 위한 힘을 만들어 낸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을 여러 피억압 계급들의 단순한 일부분으로 취급하는 민중주의(좌파적 포퓰리즘) 정치는 이 질문에 적절한 답변을 내놓기 힘들다.


불안정노동론에 기초한 사회적 연대 전략이 작업장보다는 거리 시위와 광장 같은 공공시설 점거에 더 우위를 두는 것도 이런 특징과 관계 있다. 서로 동등한 ‘연대적 민중(시민)’의 만남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좌파노동자회 대표인 허영구 후보가 지난해 민주노총 위원장 선거에서 ‘11월 노동자대회 총파업’을 해야 한다며 내놓은 계획은 여의도 노상 점거 시위 계획이었다.


그러나 노동계급과 민중에게 자본주의가 강요하는 고통을 해결하려면, 고통과 분노를 넘어서 노동계급의 구조적 힘(객관적 잠재력이자 단결의 가능성)을 분석해야 한다.


노동계급 투쟁 중심성


이런 종류의 비판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부인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증거인가? 그렇지는 않다. 사회주의가 노동계급의 자력 해방이라는 말의 뜻은 노동계급이 아닌 피억압 대중의 해방도 결정적으로 자본주의 권력에 맞선 아래로부터 솟아나는 노동자 권력의 승리에 달려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천대받는 민중도 노동자 권력을 지지하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투쟁에 나서야 한다. 이때 노동계급이 할 일은 다른 계급이 갖지 못한 고유한 경제적 힘(이윤 생산을 멈출 수 있는 힘)을 발휘해 민중의 보호자이자 지도자 구실을 하는 것이다. 이를 노동계급(노동자 연대, 노동자 권력)이 주도하는 사회적 연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적 연대를 노동운동의 ‘전략’으로 삼으려는 정치 경향들은 이런 전략과 개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의 ‘사회적 연대’는 일부 지배자들(가령 독점자본, 수구우익 등)의 압제에 맞서 사회의 나머지 모든 계급이(사회적) 뭉치는(연대) 것이다. 불안정노동론의 경우, 재벌에 맞선 알바 노동자와 영세 자영업자의 단결을 추구한다.


이런 포퓰리즘(좌파적일지라도) 전략을 따른다면, 노동계급이 고유한 방식(파업)을 사용해 싸우는 것을 주저하게 될 수 있다. 중소기업이나 자영업자 같은 중간계급 동맹세력들을 소원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선 자유주의 세력과의 연대를 추구하는 주류 사회민주주의와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계급투쟁적 전략이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한 노동자들이 사회적 연대에 의존하는 것을 무시하고 힘 있는 대공장 중심주의에 머문다는 것은 참말이 아니다. 사실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곳들을 자세히 돌아보면, 그 작업장 내부의 노동자 연대가 봉착한 어려움에서 비롯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따라서 사회적 연대는 노동자 연대의 보완물이 돼야지, 그 대체물로 봐서는 곤란하다.


힘 있는 조직 노동계급의 투쟁이 활발해져, 더 많은 노동자들이 ‘우리도 뭉쳐서 싸우면 우리도 더 좋은 조건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이 퍼져나가고, 그래서 기업주들이 노동자를 함부로 대해선 안 되겠다고 움츠러드는 것이, 열악한 조건에서 싸우는 노동자들에게도 더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고무된 노동계급 내에서 연대투쟁과 계급의식도 발전할 것이다.


잠재적으로 조직 노동계급은 투쟁으로 나머지 노동자들과 피억압 대중에게 가장 잘 기여할 수 있다. 이 객관적 잠재력을 공통점 삼아 단결을 추구할 수 있는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을 채택해, 인내심을 갖고 꾸준히 실천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노동계급 중심성과 계급투쟁 전략이다.


사회적 타협주의의 압박


최근 노동운동의 일각에서 박근혜 정부의 노동시장 구조 개악에 맞서 노동‘계급’의 이익 방어를 전면에 내세우지 말고, ‘재벌 개혁’ 같은 구호로 불리한 쟁점을 슬쩍 비켜 가면서 더 넓은 사회적 연대를 추구해 보자는 생각이 유포되고 있다. 다행히 민주노총 지도부는 이 계획을 수용하지 않았다.


이런 발상에는 노동계급이 계급투쟁 방식으로 고유의 이해관계를 방어하는 투쟁에 나서면 사회적으로 고립돼 패배하거나 더 불리한 상황에 처할 것이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 암묵적으로는 노동 개혁과 재벌 개혁을 맞바꾸는 식의 사회적 타협으로 가고자 하는 전략도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전략은 진보정당들이 민주노총에 사회적 타협을 압박하는 것으로 드러나기도 한다.(더 온건한 한국노총은 우파적 압력에 굴복해 노사정위원회에 복귀해 버렸다.) 8월 21일 정의당 노동시장개혁 똑바로 특별위원장이기도 한 정진후 원내대표는 민주노총을 방문해 한상균 위원장에게 “올바른 노동시장개혁을 위해서 사회적 대화기구 구성이 급선무임을 강조하며 민주노총 등 노동계, 재계, 원내 3당이 참여하는 토론의 장이 필요함을 역설”했다.


정의당과의 합당을 추진하고 있는 국민모임의 김세균 교수도 최근 조선3사 공동 파업에 대해 노동자 양보론에 입각한 사회적 타협론을 주장했다. 회사가 수조 원 적자인데 파업해 봐야 사회적으로 고립될 뿐이니, 임금 동결을 수용하고 대신 기업의 주식 출연으로 노동자기금을 형성해 경영에 참가할 수 있는 길을 여는 식의 대타협을 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는 것이다.


최근 4개 분야 20개 과제를 혁신 과제로 공개한 진보결집더하기는 이 중 6번째 과제를 “진보진영을 모두 모은 사회연대전략회의 구성”으로 꼽았다. 앞장서서 노동자 소득 양보론에 기초한 사회연대전략을 되살리겠다는 것이다.


많은 경우 개혁을 위한 투쟁은 그 힘이 밀어붙이거나 또는 막아낼 수 있는 수준의 언저리에서 타협에 이른다.


그런데 개혁주의 지도자들에게는 애초부터 자본과의 협상 · 타협이 목표이므로 그들은 협상의 의지를 보여 달라는 지배자들의 압력을 수용할 수밖에 없다. (노동자들이 밀어붙이는 힘이 제약받게 되는 것이다.) 자본의 그 압력은 협상 상대를 궁지에 몰 수도 있는 전투적 대중투쟁(특히, 파업)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은 끊임없이 개혁주의 지도부에게 체제 안전의 경계선을 넘지 않겠다는 다짐을 요구한다.


그럴 때마다 기층 노동자들의 투지와 요구는 뒤로 밀린다.그렇게 되면, 다음 투쟁은 더 어려워진다. 이것이 노사정위원회 등 사회적 타협기구에서 매번 노동계급 측만 양보하는 결과가 나온 이유다.


사회적 타협주의는 단지 개혁 목표를 이루려는 속도나 시간의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목적 · 목표가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략과 다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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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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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좌파 개혁주의의 위기와 모순



<노동자 연대> 152호 | 발행 2015-07-06 | 입력 2015-07-04



■ 노동당 당대회 이후

[당대회 이후] 좌파 정당으로 남는 것이 노동자 투쟁에 더 낫다  

당대회 유감 : 국민연금하나로 특별결의문 채택 

[노동당] 좌파 개혁주의의 위기와 모순


※ 본문의 파란색 문장들은 지면에 없는 부분.



진보재결집을 둘러싼 노동당 논쟁은 노동당 당세 약화가 그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진보신당과 사회당 합당 이후로만 따져도 당권자가 2천 명 넘게 줄었다. 20~30대 청년 당원들이 그 상당수를 차지한다. 당권자 감소 때문에 재정적으로도 어려워졌다.


권태훈 부대표 등은 이것이 진보의 분립·분열로 말미암은 위기의 일부라고 진단한다. 진보 재결집론은 이런 위기의 돌파구로 제안된 것이다.


그러나 좌파가 더 성장하고 광밤위한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노동자 투쟁 수준이 전반적으로 더 높아져야 한다. 돌아보면, 옛 민주노동당의 등장과 성공의 배경에는 1997년 연초 민주노총 파업과 그해 말 경제공황의 후폭풍에 맞서는 만만찮은 투쟁들이 있었다. 그리스 시리자와 스페인 포데모스의 성장도 마찬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이것이 좌파가 양과 질에서 전혀 성장할 수 없다는 뜻은 아니다.)


근본적으로 노동계급 투쟁만이 이 사회의 지배자들인 자본가들의 이윤에 주된 위협을 가할 수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사회를 만들고 유지할 힘(현 사회를 운영하고 이끄는 생산력을 대표함)을 유일한 집단이다. 그래서 노동자들은 경제투쟁일지라도 이윤 창출을 멈추는 투쟁에 참여해 노동 ‘계급’으로서 힘과 연대를 자각하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럴 때 의식과 자신감을 높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런 배경에서 각종 정치·사회 운동들이 활성화되곤 했다. 수동적으로 사회 상층부가 제공하는 개혁을 선물 받는 것은 계급의 정치의식 향상과 별 연관이 없다.


요컨대, 핵심 과제는 계급투쟁을 활성화하는 데 좌파가 기여할 수 있느냐다.


경제와 지정학의 위기 시대에 계급 간 양극화는 노동운동 안에서도 좌우 정치 양극화를 낳는다. 개혁주의는 체제의 번영을 전제로 개혁을 제공하겠다는 전략이므로 체제의 위기 때는 개혁주의 운동 자체가 지배계급을 도와야 한다는 압력과 기층의 압력 사이에서 동요하는 위기를 겪다가 좌우로 분열하곤 한다.


최근 유럽에서 주류 개혁주의가 심각한 배신을 저지르며 우경화한 것, 이를 비판하며 좌파 개혁주의가 부상하는 것이 그 사례다. 또, 10여년 만에 민주노총에 좌파 지도부가 등장한 것이나, 4·24 총파업 직후에 노동운동의 우파 지도자들이 연이어 배신 행위들을 저지른 것도 이런 운동 내 좌우 양극화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좌파 개혁주의는 기층의 전투적 압력을 더 많이 수용하는 개혁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좌파 개혁주의가 좋은 구실을 하기도 하지만, 그 역시 일관되지 않고 기층의 압력 변동에 따라 동요한다는 뜻이다. 한편에선 사회연대전략을 지지하고 우경적 4자 통합을 지지하기도 하지만 지역 연대, 세월호, 최저임금 투쟁 등에서 기여를 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전국적 계급 세력균형이 바뀌려면 기층의 전투성이 노동운동 상층의 보수성에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려면 결국 좌파의 좌파인 급진 좌파의 임무가 매우 중요하다. 노동계급이 사회 전체에 그래야 하듯이 급진 좌파도 자신의 세력과 유용성을 노동계급 대중에게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2013년 초에 보건노조, 그해 중반에는 전교조, 그해 말에는 철도노조가 전체 운동에 부양력을 제공했다. 그래서 민주노총에 10여년 만에 좌파 지도부가 조합원 직선으로 당선한 것이나, 이 집행부가 총파업을 조직하겠다고 했을 때 기대와 지지를 많이 받은 것도 조직 노동운동에 대한 기대감의 방증이 될 수 있다.


포섭된 노동?


그러나 이런 조직 노동운동의 힘을 고무해야 한다는 점에서 노동당의 좌파 개혁주의 정치는 약점을 보여 왔다. 노동당은 주로 민주노총으로 조직된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들을 “포섭된 노동”(옛 진보신당)이라고 평가절하하고, “불안정 노동”(옛 사회당)을 새로운 주체로 부각시켰다. 특히, 경제투쟁(주로 임금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단위 작업장별 투쟁)을 ‘집단 이기주의’라며 폄하해 왔다.


이 때문에 민주노총 좌파 지도부의 등장을 기층 투쟁 활성화에 이용하는 것에도 별 의욕을 안 보였다. 투쟁의 선봉에 서야 할 조직 노동계급의 노동조건 방어에도 뜨듯미지근했다. 


일부는 여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노동운동보다 급진적 사회운동을 더 가치 있게 보기도 한다. 이는 장점도 있지만 약점이 더 크다. 생산 현장에 기반한 노동운동과 유리된 사회운동은 사회적 뿌리가 얕다는 바로 그 점 때문에 대체로 급속히 떠올랐다가 급속히 가라앉곤 한다. 그러면 일부는 우경화해 노골적인 사회연대전략(국민연금하나로) 같은 포퓰리즘으로 가기도 한다.


요컨대, 노동운동의 급진화를 요구하면서도 그 급진화에 꼭 필요한 아래로부터의 투쟁이 흔히 취하는 투쟁 형태(경제투쟁)에는 거리를 두는 모순이 노동당 정치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랬을까? 하고 묻는다면, 리더들이 과거에 가졌던 ‘혁명적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재편하는 전략’을 포기한 것, 즉 모종의 혁명주의에서 좌파 개혁주의로 옮겨 간 정치적 궤적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고, 그런 상황에서 선거주의나 모종의 포퓰리즘으로 기운 것도 연관 있을 것이다.]


이런 약점 때문에 노동운동 안에 더 넓게 뿌리내리기가 어려웠을 것이고, 현재 정치화 수준과 더불어 당세 위기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진보신당에서 노, 심 등이 탈당한 분열 후 급속히 더 어려워진 것도 아래로부터의 투쟁을 경시하고 특정한 명망가 의존이 심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당의 리더십 위기와도 연관 있어 보인다.]


예를 들면, 민주노총 4·24 총파업 지지 논평에서 파업 요구의 하나인 공무원연금 개악 문제는 언급도 하지 않았다. 노동당 공식 논평에서 박근혜의 ‘공공부문 정상화’에 대한 폭로나 반대를 보기 힘들었다. 공공부문은 대표적인 ‘정규직 고임금 직장’으로 찍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사례로, 전통적으로 노동시간 단축을 중요 의제로 삼아 온 노동당이 현대차·기아차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단축 투쟁과 그 쟁점에 무관심한 것도 같은 맥락인 듯하다. 이 투쟁들은 공장 안 모든 노동자를 위한 투쟁이며, 각 부품업체 노동자들에게도 큰 파급 효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현대차 현장 투사들과 조합원들은 2013년 봄 비공인 파업을 벌이며 투쟁의 잠재력을 보여 줬다.


또한 이 노동자 부분들은 모두 지배자들이 노동계급 전체의 노동조건을 악화시키기 위해 제압해야 할 중요한 고지로 보는 부분들이다. 좌파가 이 노동자들의 투쟁을 외면해서는 다른 투쟁에도 도움되기 어려운 까닭이다. 노동자 투쟁이 아니어도 말이다. 예를 들어, 민주노총 4월 총파업이 정말로 성공적이었다면, 세월호 투쟁에도 힘이 됐을 것이다.


공상적 사회주의


정규직 노동조합의 경제투쟁의 중요성을 무시하며 열악한 비정규직 투쟁이어야만 더 급진적이라는 식으로 보는 것은 장점보다 약점이 많다. 이것은 과학적 전략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도덕주의, 즉 이성과 선한 의지를 앞세워 사회 구성원의 조화와 설득을 추구한 공상적 사회주의(특히, 1858년의 ‘참 사회주의’)처럼 보인다. 어쩌면 이런 정치는 전략, 계급투쟁 등을 경시하는 2000년대 초·중반 자율주의 정치의 유산일 수도 있다.


이런 도덕주의는 노동운동의 약점을 노동자 대중의 현재 의식 수준에서 찾는 데서 주로 비롯하는데, 이런 이데올로기주의적 접근법으로는 ‘이기적인’ 경제투쟁보다는 이데올로기 투쟁(교육과 선전, 선거)을 더 중시하게 된다.


또한 정규직이나 기존의 조직 노동자들의 의식을 낮춰 보는 외관상의 급진성은 실제로는 기회주의를 낳기도 한다. 상층 지도자들의 투쟁 회피주의(관료주의)와 대중의 후진적 의식을 구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노동운동을 이데올로기주의의 잣대로 바라보면, 노동운동 안에서 상층과 기층의 이해관계가 꽤 다른 현상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계급 간 중재자를 추구하는 노동운동의 상층 개혁주의 지도층의 입맛에 딱 맞는 사회연대전략(국민연금하나로, 건강보험하나로, 보편증세론 등) 을 옛 진보신당 출신 지도자들 일부가 지지하고 사회당 계열이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은 것도 그 사례다.(사회당은 과거에 사회연대전략을 비판했다.) [이것은 노동당과 정의당의 차이를 선명하게 드러내지 못한 문제로 볼 수 있다.]


결국 노동당 정치의 수동적 급진성도 경제 침체기 당의 어려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수동적 급진성에는 물론 노동당의 다양한 정치적 구성도 한몫했을 것이다. 옛 진보신당 지도부는 무지개연합 식의 진보 재구성을 표방해 왔다. 그러나 다양성의 공존은 장점이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반드시 진보적 구실을 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에서는 자율주의 관성이, 한편에서는 이른바 ‘당적 질서’가 작동한다. 그 결과, 이질적 구성은 시너지 효과보다는 되는 것도 없고 안 되는 것도 없는 일종의 정치적 “늪”이 되기도 한다. [이런 조직적 요인 때문에 안 그래도 취약한 노동당 리더십 구조를 더 취약해진 것 아닌가 싶다.] 


그래서 노동당 내 논쟁은 민주적 토론을 통한 결정과 상호 승복보다는 종종 상호 불신 속에서 징계로 해결되곤 한다. 2012년 대선에서 김순자 후보 지지 당원이 제명된 것이나 지난해 7·30 재보선에서 진보당·노동당의 단일후보가 된 김종철 전 부대표가 징계를 받은 것이 그 사례다.


반제국주의


끝으로, 노동당의 좌파 개혁주의가 제국주의 문제에 큰 의욕이 없는 것도 특별히 지적할 문제다. 최근 강상구 대변인은 <레디앙> 기고에서 이렇게 반성한다.


“동북아시아와 한반도의 평화 문제[에서] … 진보정당은 2009년 이후 단 한 번도 주요 행위자가 되어 본 적이 없고, 그럴 만한 행위자들을 조직하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는 북한의 핵무장이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의 일차 원인인 듯이 주장하고(미·중간 제국주의 갈등이 더 선차적 원인이다), 따라서 그 해법도 비핵선언과 남북 적대 청산으로 “한미동맹의 근거를 자연스럽게 소멸”시키자고 주장한다.


이런 공상적 개혁주의의 관점으로는 박근혜 정부와 한미동맹에 일관되게 맞설 수가 없다. 사회당 경향도 제국주의 문제에서는 더 나은 것이 없어 보인다. 여기서도 도덕주의와 평화주의가 현존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과학적이고 혁명적인 이해에 방해가 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제국주의 체제에 대한 총체적 이해와 전략이 부실하면, 한반도를 둘러싼 제국주의 간 갈등 속에서 좌파는 끊임없이 진영 논리 그리고/또는 자국 지배계급 지지 압력 사이에서 동요하며 길을 잃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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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당 당대회 이후

좌파 정당으로 남는 것이 노동자 투쟁에 더 낫다


<노동자 연대> 152호 | 발행 2015-07-06 | 입력 2015-07-04



■ 노동당 당대회 이후

[당대회 이후] 좌파 정당으로 남는 것이 노동자 투쟁에 더 낫다  

당대회 유감 : 국민연금하나로 특별결의문 채택 

[노동당] 좌파 개혁주의의 위기와 모순




6월 28일 노동당 당대회에서 진보결집파가 내놓은 당원총투표 안건이 부결됐다. 이 안에 재석 대의원 2백86명 중 1백18명(41퍼센트)이 찬성했다.


이로써 국민모임, 노동당, 노동·정치·연대, 정의당 등 4자 대표의 “공동선언에 기초하여 새로운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을 추진”하는 과정이 주춤하게 됐다.


결과가 이렇게 나온 것은 노동당 대의원들에게 진보 재결집 정당이 현재의 정의당보다 더 왼쪽의 정당으로 될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관련 기사인 151호 온라인 기사 ‘노동당 당대회에 부쳐 ─ 급진좌파 정당인 노동당이 정의당과 통합하는 것은 오른쪽으로의 이동이다’를 참조하시오.)


노동당 자체의 정치 노선은 주류 사회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정의당보다 왼쪽에 있는 좌파적 개혁주의라 할 수 있다. ‘통합 대 독자’ 갈등이 오른쪽으로 향하는 통합 움직임에 합류할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물론 가장 중대한 문제인 당의 통합 문제를 다루는 것이므로 일반으로 당원 전체의 토론과 총투표로 결정하는 것이 더 폭넓은 의견 수렴 방식일 것이다.


그러나 나경채 대표 등이 내놓은 총투표 안은 당원들에게 통합 여부의 결정권을 주는 안이 아니었다.(결정권은 당대회에 있었다.) 이미 “대중적 진보정당 건설 추진”에 대표자 간 합의까지 한 마당이었다.


따라서 우경적 통합 결정을 위해 당대회를 무력화하려고 총투표를 이용하는 것 아니냐는 반대파의 의심을 풀 수 없었다. 결집파 지지 대의원들의 일부도 총투표 안건의 취지를 이해하기 힘들다고 토로했다. 4자 통합보다 좌파적 정당으로서 투쟁 건설에 초점을 둔 총투표 반대 발언이 더 지지를 얻었던 이유다.


이런 불신에는 노동당 당대회를 앞두고 정의당 천호선 대표가 한 언론 인터뷰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천호선 대표는 “통합 신당은 두 자릿수 지지율이 가능할 것으로 본다. … 이렇게 진보정당이 기반을 다진 후 … 2017년 대선에서 정권교체를 위한 야당 연합 … 정권교체 후에는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4자 통합에 반대하는 쪽이 경계해 온 우경 노선이다.


천호선 대표를 당대회에 초청한 나경채 대표 등 결집파 지도자들은 이날 자신들을 더 곤혹스럽게 한 천 대표의 인터뷰 내용을 누구도 나서서 비판하지 않았다.


4자 통합은 우경화


어쩌면 천 대표의 인터뷰는 노동당 내 좌파를 4자 통합 주도자들이 반기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마치 2011년 진보대통합 논의 때 진보신당 좌파들의 합류를 꺼린 옛 민주노동당 당권파가 9월 진보신당 당대회를 앞두고 자극적인 발언을 쏟아낸 일을 떠올리게 한다.


심상정 전 정의당 원내대표는 천호선과 대조적으로 노동당 당대회를 앞두고 함께하자며 옛 진보신당 당원들에게 공개 사과를 했다(<레디앙>, 6.24). 


그럼에도 독일 사민당의 고데스부르크 강령(실천은 물론이고 말에서조차 자본주의 변혁과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반공주의를 표방한 강령)을 새 ‘이정표’로 내세워 급진좌파 정당인 노동당과의 차이를 분명히 하는 걸 잊지 않았다. 천호선, 심상정 두 지도자는 이미 ‘헌법 내 진보론’이나 ‘튼튼한 안보’론으로 좌파와 선을 그은 바 있다.


따라서 급진좌파의 일부인 노동당이 앞으로 우경화하지 않는 한, 4자 통합에 참여할 명분은 갈수록 더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또한 노동당 내부에서 제동이 걸린 당대회 결과 때문에 진보 재결집 운동의 주도권은 지금보다 더 정의당 지도부에 쏠릴 것이다. 그래서 노동당 분열 위기는 여전하다고 볼 수 있다.(이 글을 쓴 직후, 통합을 추진했던 나경채 대표와 권태훈·김윤희 부대표가 사퇴했다.)


다급해진 나머지, 노동·정치·연대와 연계된 민주노총의 중앙파·국민파 지도자들이 통합 정당을 촉구하고 있다. 그러나 우경화한 주류 사회민주주의 정의당과의 통합 때문에 좌파 정당인 노동당이 분열하는 것은 (선거적 성과는 거둘지 몰라도)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의 투쟁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2012년, 통합진보당이 총선에서 역대 최고 성과를 거뒀지만, 경제적·지정학적 위기가 강요한 정치적 분화 탓에 다시금 분열로 이어진 것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


지금은 좌파가 반자본주의·반제국주의 정치를 날카롭게 벼리며 기층에서 투쟁 건설에 기여하면서 아래로부터의 노동운동을 강화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노동당도 우경적 4자 통합에 합류하기보다 ‘운동 정당’으로 남아 노동자 투쟁, 각종 삭감, 세월호 등 여러 쟁점에서 공동전선 방식으로 단결을 추구하는 게 전체 노동운동에 이로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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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당의 현 지도부는 이른바 내란음모 사건에서 개혁주의의 우파적 한계를 그대로 보여 줬다. 8월 28일(수) 당일만 해도 이정미 명의의 논평은 신중론이긴 했으나, 기계적 양비론은 아니었다. 비판의 무게중심은 국정원 비판에 있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상무위원회에서 기조가 바뀌었다. 아마 하루종일 이석기 의원이 나타나지 않는 상황 속에서 [자신들도 여러 루트로 확인한 결과도] 녹취록의 존재가 사실일 수도 있다는 판단을 하게 된 듯하다. 


무엇보다 단순 국가보안법 사건이 아니라 ‘내란음모’ 건이니 최근 부쩍 ‘국가에 대한 책임’을 강조해 온 정의당 리더들은 진보당을 애매하게 방어하는 게 자신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여긴 듯하다. 


자칭 ‘신중한 태도’를 공식 방침으로 하더니 급기야 ‘헌법 밖 진보는 보호할 수 없다’(심상정)는 발언을 거쳐 결국 체포동의안 찬성까지 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진보당과의 경쟁심리 같은 것이 작용했을 수 있다. 진보당을 밀어내고 민주당과의 야권연대 제1파트너가 되겠다는 욕심 같은 것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부차적 요소로 본다.)


천호선, 이정미, 박원석 등 현 지도부들은 수사를 받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정치적’ 책임이라며, 자신들을 진보당에게 그걸 요구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무소불위의 국가폭력을 휘두르려 하는 국정원에게 현역 의원이 끌려가는 것이 어떻게 “정치적 책임인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다심지어 이는 수사기관에 범죄의 입증 책임이 있다는 부르주아 근대 법 논리에조차 못 미치는 발상이다.


헌법 밖의 진보를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그렇다. 4·19 혁명광주민중항쟁 등을 정부 주관 기념일로 정해 놓은 나라에서 진보정당 정치인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은 황당하다


물론 소수의 무장 음모와 다수 민중의 봉기는 다르다그러나 이런 민중항쟁을 통해 쟁취하려 했던 민주주의가 바로 사상과 표현의 자유를 제한 없이 보장하는 것 아니었던가.


무엇보다 기존의 헌정질서가 정당하냐 아니냐는 헌법에 대한 물신숭배가 아니라 정치적, 즉 민중의 의지를 실천으로 확인하는 과정에서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배제한 것은 결국, 정의당 지도자들이 [아마 좌우 극단을 멀리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확고히 기존 국가의 편에 서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그러나 국가권력이 강요한 기준에 부합하는 사상만 허용하고기존 체제 바깥을 상상하고 전복하려는 사상에 자유가 없다면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를 수조차 없다국가가 허용하는 사상에게만 자유를 준다는 것은 사상의 자유가 없다는 말이나 다름 없다


그러므로 심 원내대표의 말대로라면정의당의 개혁주의는 민주적 권리를 쟁취하는 데서도 무능할 수밖에 없다. 헌정질서를 지키려 대북심리전을 했다는 국정원의 국내수사권을 결국 인정하게 되므로 국정원 개혁을 일관되게 요구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정의당 천호선 대표는 한술 더 떠 체포동의안 가결 다음 날 “아직도 골방에 앉아 1980년대 사회변혁 논리를 주장하는 것은 정의롭지 않다고 이런 후퇴를 정당화했다


국가가 보기에 ‘정의롭지 않은 논리는 골방에 모여 자신들끼리 한 토론마저 여론재판을 받고 비밀경찰과 사법기구의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인가.


이런 정의당 지도자들의 엘리트적 국가 사랑은 사회민주주의 최신 버전의 ‘국가 공동체’ 논리로 뒷받침되고 있다. 이를 한국에 적용하면, 1987년 이후 형성된 ‘민주적 공동체’를 위협한 세력에게까지 사상의 자유를 보장할 수는 없다는 논리다. 


그리고 이 공동체의 표상은 87년 민주적으로 개정된 헌법이라는 것이다. 이 논리에 근거해 이들은 진보당을 방어해야 한다는 논리가 공동체를 뒷전으로 놓는 ‘진영 논리’라고 하고 있다. 즉 진영 논리는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논리라는 것이다. 


이 ‘공동체’ 논리는 사민주의의 ‘국가·국민주의’(국민vs계급)의 새 버전이다. 공동체를 위해 모두 책임져야 하니, 노동자도 증세해야 하고, 진보정당도 무조건 노동운동 편을 들 순 없으며,(안 그러면 진영 논리니까.) 헌법을 존중하는 틀 안에서 게임의 룰을 지켜가며 점진 개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공동체’ 논리는 틀린 이유는 이 사회가 근본에서 분열돼 있기 때문이다. 모두가 조화를 이루는 공동체 따위는 없다. 이 사회를 뿌리부터 분열시키는 그 분단선이 바로 계급인 것이다. 이들의 공동체 논리야말로 반자본주의 노동운동을 배척하는 친자본주의 ‘진영 논리’에 불과하다. 


이들은 현재, 새누리당의 제명안에는 반대하고 있다. 마녀사냥이라는 것이다. 마녀사냥을 국회로 불러들여놓고 마녀사냥 반대라니 우습지만, 그거라도 반대를 하니 불행 중 다행이라고 불러야 할 듯하다. 


결국, 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의 모순된 논리는 지배계급이 정한 게임의 룰에서 벗어나 현 기득권 질서에 도전할 의사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으로 들린다. 이런 자세니 박근혜와 동맹을 할 수 있다느니, 노동자증세를 포함한 보편증세에 함께하겠다느니 하는 번짓수 없는 주장도 하게 되는 것 아니었을까.


그러나 국정원게이트에서 드러난 것은 우파 지배자들은 목적을 위해서 현행 법과 선거정치의 룰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박정희 독재가 끔찍한 유신 독재로까지 연장된 것은 대통령 직선제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을 본격화하려는 반동의 진격을 막고 복지와 민주주의의 확대를 이루려면 노동계급의 대중투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투쟁을 위해서는 체제에 도전하는 사상과 표현, 결사의 자유가 필요하다


저들이 법과 제도를 어길 각오를 하고 반동으로 가는데, 헌법 내 게임의 법칙을 준수하는 데 강박을 가진 진보로는 이런 것을 쟁취할 수가 없다. 신호등만 믿고 길을 건널 순 없다. 차들이 신호등에 맞춰 멈춰서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진정한 현실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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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는 취임 전부터 위기를 겪고 있다. 많은 경우, 이미 예측·경고했던 바다.(☞ 바로가기그러나 그것이 자동으로 진보진영에게 기회를 주지는 않을 것이다.


이명박 정부도 촛불항쟁으로 취임 첫해부터 약해졌지만, 결국 정권 연장에 성공했다. 바로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세력이 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원칙을 훼손하고] 분열하면서 기회를 못 살렸기 때문이다.


지금 박근혜 세력은 노회찬 대표를 시작으로 김선동, 김미희 등 줄줄이 진보정당 의원들의  의원직을 박탈하려 하고 있다. 이런 솎아내기에 단결과 투쟁으로 맞서야 한다. 그런데 진보정치 세력들의 분열과 반목이 전열 재정비 문제에서 걸림돌인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진보정치를 재건할 진로 논쟁, 즉 노선(정체성)과 세력의 재편에 관한 토론이 중요하다. 최근 이런 토론들이 재개되고 있다.


진보신당에선 1월 당대표 선거에서 진보정치의 연대와 노동중심성 문제가 논쟁됐다. 반갑게도 상대적으로 진보세력의 연대와 노동중심성을 강조한 이용길 후보가 대표로 당선했다.


진보정의당에서는 최근 주요 간부 설문조사에서 절반 넘는 사람이 가장 시급한 현안으로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 수립’을 꼽았다.


이 조사에서 ‘현존하는 나라 가운데 가장 바람직한 나라 모델’로 91.6퍼센트가 스웨덴을 꼽았다. 사회민주주의 모델을 지향점으로 꼽은 것이다.


사실 민주노동당도 민주노총 상층 지도부에 기반한 사회민주주의 정당이었다. 한국 노동운동의 정치적 발전 수준에서 부르주아 정당과 구분되는 좌파 사민주의 정당의 존재는 여전히 의미있다.


그러나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은 이런 좌파 사민주의보다 더 오른쪽을 지향하는 것처럼 보인다. 진보정치가 주변화된 상황의 돌파구를 주류 제도정치에 더 적응하는 것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아래로부터의 대중운동과 거리를 두려는 태도도 나타난다.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이 “광화문이나 대한문 앞에서 집회나 농성을 하는데, 국민들 입장에서 … 이해가 잘 안 될 것 같다”고 한 것도 이런 맥락[각주:1]에서다진보정의당 노회찬 공동대표는 “똑같은 임금을 준다면 비정규직, 파트타임(노동자)을 써도 되지 않겠나”라고 했다. 비정규직 철폐 요구에 매달리는 건 “근본주의”라는 말도 한다.[각주:2] 


여기서 두드러지는 것은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위로부터의 개혁’이란 관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니, 복지를 가져오는 주체로서 사회적 투쟁보다는 박근혜의 복지 공약이 더 두드러져 보이고, 또 그러다 보니 “박근혜 정부와 전략적 동맹을 맺을 준비가 돼 있다”며 중재기구를 제안하게 되는 것이다


즉, [대중운동의 대변자이자 조직자로서가 아니라] 국가기구의 최상층부와 협력해야 개혁을 이룰 수 있다는 발상에서 박근혜와 동맹 같은 제안이 나오게 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이 후퇴인 까닭은 과거 민주노동당은 초기에 ‘거대한 소수 전략’(“대중운동이 중심이고, 의원은 그 스피커 구실을 해야 한다”)을 내세웠었기 때문이다. 비록 실천에서 이 방향이 일관되게 구현되진 못했지만 말이다.


진보정의당 일부 지도자들은 ‘사민주의에 대한 낡은 금기’를 벗어나야 한다며 이런 방향을 제시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창당 강령에 “사회민주주의 한계 극복”이 들어간 맥락을 봐야 한다. 그것은 20세기 후반 유럽 주류 사민주의 정당들이 신자유주의 정책에 투항하면서 실패한 전철을 밟지 말자는 생각에서 나왔던 것이다[각주:3].


20세기 후반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후 상대적으로 장기간 지속한 서구 자본주의의 호황을 배경으로 한다. 여력이 생긴 자본가들은 노동 대중의 개혁 열망과 투쟁이 더 급진화하는 것을 막으려면 양보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낡은 금기?


그래서 1951년 영국에서 보수당이 정권을 잡았지만, 이전 노동당 정부 6년 동안 기틀이 잡힌 보편적 복지제도와 일부 기간 산업 국유화 노선이 후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세계적 경기 후퇴 속에서 자본가들이 태도를 바꾸자, 주류 사민주의 정당들은 연이어 신자유주의에 굴복했다. 자본주의의 성공에 기대서 개혁을 제공하는 전략 때문에 일어난 비극이다.


이런 실패 때문에 근래에는 주류 사민주의를 비판하며 좌파 사민주의 정치세력들이 성장했다[각주:4]. 그리스 시리자, 독일 좌파당, 프랑스 좌파전선 등이 최근 주목할 만한 성과를 거뒀다.


한국의 진보정당이 주목해야 할 것은 주류 사민주의(사회 자유주의)가 간 실패한 길이 아니라 이러한 급진좌파 세력의 성장이다. (물론 이들도 좌파 사민주의이므로 근본에선 한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진 출처: 민족일보 웹사이트. 프랑스 좌파전선의 대선 후보였던 장 뤽 멜랑숑의 지난해 선거 유세 장면.



진보정당들이 민주통합당 같은 부르주아 정당들과 구별되는 것은 그 기반 때문이다. 조직 노동운동 기반이 중요한 것이다.


예를 들어, 쌍용차와 한진중공업 투쟁들을 보자. 새누리당이 이를 골칫거리로 보고 민주당이 여야 협상의 거래가능한 쟁점으로 이를 다루는 것과 달리, 진보정당은 그 투쟁의 일부여야 한다.


이런 압력 때문에 진보신당 대표 선거에서도 조직 노동운동과 연대를 강조한 쪽이 다수의 지지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진보정의당 일각에선 ‘민주노총의 배타적 지지에 기반’하는 것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진보정당이 더는 민주노조운동의 정치적 대변자로서 자신의 임무를 ‘한정’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개념과 정의상, 진보정당의 길보다는 민주당 왼쪽방으로 가자는 것으로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민주노조운동은 나머지 노동계급과 완전히 분리된 운동이 아니다. 설사 지금 당장 정치의식이 이에 미치지 못한다해도 1천만 명이 넘는 노동자들의 삶은 민주노조운동의 계급적 요구, 투쟁과 연관돼 있다. 


그러므로 [단편적 상식과는 달리] 목표(지향)와 실천, 기반에서 ‘계급성’, 즉 노동중심성을 확고히 유지해야 진보정치세력으로서 부활할 길이 열린다. 


사실 지금 진보정당의 존재감 약화와 주변화에는 조직 노동운동의 자신감과 투쟁 수준이 아직 충분히 회복되지 못한 상황이라는 배경이 크게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운동의 약화에 노동계 진보정당의 잘못된 방향 추구와 분열이 한몫했다.


따라서 ‘조직 노동과 거리두기’를 하면서 주변화를 극복하겠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이는 진보정치 지도자들의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진보정의당 일각의 ‘현대화된 생활정당’으로의 우클릭 시도는 옳은 방향이 아니다.


민주당은 물론이고 박근혜마저 대선에서 표를 얻으려고 좌클릭해야 했다. 이럴 때 진보정당이 제도정치권에서 받아들일 만한 온건한 정책과 노선을 추수해봐야  진보정당의 존재감을 더 약화시킬 뿐이다.


진보정의당 지도자들의 이런 시도는 우리가 2011년부터 지적한 바, 유시민계와 연합해서는 진정한 진보의 원칙과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는 주장이 옳았다는 것을 부정적으로 드러낸다.[각주:5]


그 점에서 진보정의당 이정미 대변인이 <레디앙> 대담에서 유시민계와 민주노동당계ㆍ진보신당계는 “혈연관계”가 됐다고 말한 것은 시사적이다.


같은 대담에서 진보신당 김종철 전 부대표가 “민주당과 정책으로 구분되고, 장기적으로 독자적 대중 진보정당을 추구하는 세력이 되려면 자본주의 극복의 원칙과 비전이 있어야 [한다]”고 한 말이 옳다.


물론 진보신당이 이에 바탕해 연대와 단결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면 좋을 것이다.


앞으로 갈수록 박근혜의 모순과 정치 위기는 커져 갈 것이다. 진보진영은 원칙을 유지하며 투쟁태세를 갖추도록 해야 한다. 그러면서 박근혜의 위기를 이용해 단결된 반격을 해야 한다


[진정한 좌파야말로 이 과정에서 원칙과 단결을 동시에 추구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세력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하려면 유연하면서도 단호하게, 즉 효과적으로 개입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축약해서 <레프트21> 98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가기


  1. “자족적인 투쟁 구호를 외치고 노래(투쟁가요)를 부르는 것” [본문으로]
  2. 물론 근본적 요구만 되뇌이며 부분적 요구 쟁취 투쟁에 기권하면 오류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근본주의라기보다 종파주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근본적 목표에 비춰 부분적 요구와 투쟁의 위상을 설정하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본문으로]
  3. 그래서 이른바 국가사회주의와 현대사민주의 모두 지양하자는 표현이 들어갔던 것이다. [본문으로]
  4. 물론 이 좌파 사민주의, 또는 급진좌파들의 ‘반자본주의’에는 모호함이 있다. 지금 운동의 발전 수준에선 급진성과 모호함이 성장의 한 요인이기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원칙을 훼손하는 단결은 오히려 분열과 반목을 낳는다. 지금은 어려워도 원칙 있게 단결하고 싸워야 진정한 단결을 이룰 수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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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 무능’이 문제라고 말하는 진보진영 일각의 주장은 우려스럽다.

가령 심상정 진보신당 전 대표는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하는 우리 군의 대포들이 왜 유사시에는 새떼를 쫓고, 허공을 가르는지 의문 투성이일 뿐”이라며 “이명박 대통령 집권 3년 만에 상승[常勝]의 최정예 우리 군은 연전 연패의 당나라 군대가 되어가고 있[다]”고 질타했다.

심 전 대표는 앞뒤 맞지 않게 ‘평화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말하긴 하지만, “우리 군”의 ‘군사적 무능’을 걱정하는 그의 주장은 호전적 매파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 줄 수 있다.

상승(常勝)의 남한 군대에게 바라는 것이 이런 전투인가.


민주노동당 의원들이 ‘종북주의’ 낙인이 찍힐까 봐 국회의 대북규탄결의안에 기권한 반면,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는 옳게도 반대표를 던졌다. (이와 관련해서는 국회대북규탄결의안―민주당의 호전성이 드러나다 를 보시오.)

그런데 정작 진보신당 안에선 아연실색케하는 주장들이 나온다.

최병천 사회민주주의연대 집행위원은 “나치즘과 파시즘은 ‘무찌르는 것’이 역사적 정의(正義)이지, ‘양비론적’ 평화를 외치는 것이 정의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대북결의안을 찬성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같은 단체 기획위원인 홍기표도 “외국의 포탄이 본토에 떨어진 마당에 … 단호하고 신속한 대응을 … 요구하는 게 … 무리한 건가” 하고 말하고는 조 대표의 표결로 “반공 정서에 물든 노동계급을 탈환해서 … 수권가능한 진보정당을 건설하겠다는 … 구상이 물 건너 가는것이 아닌가” 하고 비판한다.[각주:1]

냉전 우익의 반공주의를 연상시키는(수사와 구호를 일부 차용한) 이들의 주장은 제1차세계대전에서 제국주의 조국의 수호를 외치며 전쟁을 찬성한 서유럽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을 떠오르게 한다. 이 당들은 제2차세계대전 후에는 혁명을 분쇄하려는 미국의 시도에 야합했고[각주:2], 체제에 충성을 바친 대가로 기성 정치권에서 입지를 다졌다.

지금 북한은 더는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각주:3] 세계 민중과 남한 민중의 안전을 위협하는 주범도 아니다. 오히려 미국 제국주의와 남한 정부가 진정한 위협 세력이다[각주:4].

이런 상황에서 진보신당 내 온건파들이 북한을 향한 호전주의 주장을 하는 것은 무엇보다 남한 자본주의를 향한 충성심을 과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 이 글을 다듬고 축약해 <레프트21> 46호에 실었습니다. 기사 주소: http://www.left21.com/article/8995

  1. 최병천과 홍기표는 국회대북규탄결의안이 호전적이라는 점을 부인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반공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아전인수다. [본문으로]
  2. 이들은 반공을 당 강령에 포함시키고, 그리스와 이탈리아 등에서 반파시즘 레지스탕스 세력의 집권을 막으려는 미국의 시도에 협조했다. 미국은 이 레지스탕스들을 공산당이 주도한 점을 문제삼았다.경제적으로 마샬플랜을 제공했고 이탈리아 같은 경우 지중해 함대를 배치하고 위협했다. 스탈린의 지령에 따라 서유럽 공산당들은 순순히 미국의 협박에 따랐다. 그리스는 그 결과 반나찌 저항세력이 미군에게 물리적으로 궤멸됐다. [본문으로]
  3. 쇠락한 독재국가 북한은 오히려 혐오 대상이다. 반공주의는 이 점을 이용해 북한 체제나 정권의 노선과 관계 없는 좌파 전체(그리고 사회주의 대안)의 신용을 떠어뜨리려 한다. [본문으로]
  4. http://www.left21.com/article/8993 를 보시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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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기발랄하게 우익을 조롱하고 비판해 인기를 얻어 온 진중권 전 중앙대 겸임교수(이하 존칭 생략)가 최근 “앞으로 진보 같은 거 안 할 [것][각주:1]”이라며 진보신당을 탈당했다[각주:2].

6ㆍ2 지방선거 후 진보신당 진로 논쟁에서 진중권은 민주대연합을 위해 중도 사퇴한 심상정 전 대표를 옹호해 왔다.

그의 탈당은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심 전 대표 쪽이 정치적 타격을 입고 당 대표 출마를 접은 것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진중권의 온건개혁주의는 노동계급의 집단적 행동에 바탕한 근본 변혁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불신한다.

진중권은 이번 논쟁에서 진보신당의 위기 책임을 당내 좌파들에게 떠넘기려 했다.

심상정을 비판하는 것은 대중과 동떨어진 “이념적 깡패짓”이고, 진보정당의 정체성 논쟁은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참기름, 진짜 진짜 진짜 참기름 구별하는 놀이”라고 폄훼했다.

그는 “이미 무덤에 들어간” 마르크스주의를 고수하는 “덜 떨어진 사고방식”이 진보의 발목을 잡는다고 주장해 왔다.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이런 방식의 좌파 속죄양 삼기를 “반공주의”라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또, 진중권이 “자신을 뺀 거의 모든 좌파들을 모조리 ‘닭짓’하는 사람들로 치부하는 사람”이라고 지적했다[각주:3].

적대시

사실 급진좌파에 대한 진중권의 반감은 뿌리가 깊다. 비록 그가 속시원히 우익들을 공격한 덕분에 우익 지배자들의 미움을 사 중앙대, 한예종 등에서 해임되고 촛불집회 때 연행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그의 과도한 좌파 모욕 행위까지 인정할 순 없다.

그는 2004년초 민주노동당 지도부 선거에서 자주파가 당권을 쥐자, 자주파를 비난하며 탈당했다. 그는 자주파를 거의 적대시하고 증오했다.

2008년 일심회 논쟁 때에는 <중앙일보>에 “‘주사파’가 아직도 존재하는 것은 … ‘국가보안법의 피해자’라는 명분 [즉]… 북한이 … 인민의 낙원이라고 ‘헛소리할 자유’를 억누르기 때문”이라고 기고했다. 누구 편을 드는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북한에서 인민을 억압하는 국가 관료와 남한 민중운동의 일부이며 국가 탄압을 받는 자주파 활동가를 구별할 줄 몰랐다[각주:4].

자주파에 대한 혐오감으로 민주노동당 분당을 지지한 그는 진보신당 입당 후 당내 좌파인 ‘전진’ 그룹 등을 강경하게 비난하는 공세를 주도했다[각주:5].

진중권은 이런 급진좌파 혐오증을 ‘좌파도 상식에 기반을 둬야 한다’는 주장으로 정당화한다[각주:6].

마르크스는 ‘일상적 시기에 사회의 지배적 사상은 지배계급의 사상’이라고 지적한 바 있는데, 진중권이 좌파를 공격할 때 사용하는 “상식[각주:7]”은 때때로 지배계급의 흑색선전과 구별이 안 될 정도였다.

그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스탈린주의는 파시즘 같은 전체주의와 같다’고 말한다.

냉전 우익이 만든 이 반공주의 ‘상식’은 모든 사회주의 운동을 전체주의와 동일시하면서 자본주의 말고는 대안이 없다는 생각을 강화시키려는 것이다.

또, 이런 생각은 오늘날 진정한 위협을 가리는 효과를 낸다. 스탈린주의는 세계적 수준에서는 국가체제로나 운동으로나 거의 소멸했지만(한반도 북쪽에는 여전히 스탈린주의 국가가 존재하지만 매우 취약해진 상태라서 좌우 누구에게도 위협적이진 않다), 자본주의 위기의 산물인 파시즘은 부활의 조짐들을 보이고 있다.

사실 최근 세계적으로, 특히 유럽에서 급진좌파의 대다수는 스탈린의 관료적 억압과 반동성에 반대하며 그 대척점에 있던 트로츠키주의 진영이다. 그는 이런 변화를 무시할 뿐만 아니라 스탈린주의와 똑같다고 취급한다.

역사적 관점에서 매우 부당한 이 동일시는 스탈린 집권 이전의 러시아혁명 자체가 독재였다는 것인데, 이는 러시아혁명 직후 이뤄진 정치·사회적 권리의 발전 폭과 제국주의 연합군의 반혁명 침략이 가져온 파괴 효과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이런 부당한 동일시를 근거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지도(정치단체의 주도적 구실)와 대중의 자발성을 부당하게 대립시켰다. 필연적으로 독재를 낳는 전위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영향력을 획득하고 발휘하려는 행위(지도) 자체가 대중 속에서 각 당파 사이에 벌어진다는 점에서 지도와 자발성은 원리상 대립되지 않는다. 그람시의 말처럼 순수한 기계적 자발성은 존재하지 않는다[각주:8].

진중권이 대중의 자발성을 옹호하면서 “노마드적 대중” 등의 용어를 사용하기도 하지만[각주:9] 맥락은 (급진적 자율주의라기보다)개혁주의의 급진좌파 혐오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자발성 옹호는 지배적 사상을 추수하는 “상식”론과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길바닥에 나가 대기업 노동자들이 착취당하고 있다!!!고 외쳐 보세요. 돌 맞습니다” 하고 주장한다[각주:10]. 그런데 계급 착취가 여론조사로 확인될 일이던가!

그는 대기업 노동자들은 소득이 높아 보수화했고 그 결과 계급투쟁이 더는 실현가능한 방식이 아니라는 오래된 주장을 되풀이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노동계급은 투쟁을 통해 생활 수준과 정치의식을 함께 높여 왔다. 오늘날 유럽 노동자들은 한국 노동자들은 누려보지도 못한 권리를 지키려고 파업을 하고 타락한 사회민주주의 정당 왼쪽에서 좌파적 대안을 모색하기도 한다.

“산업혁명의 이데올로기”인 마르크스의 계급 분석은 “정보혁명의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그의 주장도 피상적이다.

“상식”

마르크스는 임금노동자를 ‘생계를 위해 자신의 노동력을 팔아야 하는 존재’로 규정했다. 산업 구조가 바뀜에 따라 노동계급이 사라진다는 주장은 마르크스주의를 완전히 왜곡하는 것이다.

오히려 ‘정보혁명’으로 발달한 인터넷 전산망은 통신시설을 만들고 설치ㆍ관리하는 2차 산업 발전에 의존하고, 인터넷 쇼핑은 배송 서비스라는 새로운 물질노동을 확산시켰다.

종합해 보면, 좌파를 적대시하는 진중권 정치의 핵심은 개혁주의에 있는 듯하다[각주:11]. 진중권 자신도 ‘사민주의자’를 자처하며 유럽식 복지국가를 지향한다.

이를 위해 국가가 시장경제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노무현 정부의 신자유주의도 비판해 왔다.(그러나 노무현의 죽음 직후 진보신당 게시판에 가장 먼저 추모 글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선거를 중시하고 대중 투쟁을 경시한다. 불가능한 혁명 대신 체제 안 개혁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선거적 방식으로 추구하자는 것이다. 

이런 선거 중심 전략은 결국 득표력 있는 정치 엘리트들에 의존한다. 그가 유시민 지지에 동의하지 못한다면서도 심상정을 변호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점에서 그가 거부하는 것은 정치 엘리트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성향을 가진 정치활동가, 즉 마르크스주의 등 급진좌파 정치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급진좌파가 온건좌파적 선거정치에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2008년 성공회대 강연에서는 촛불항쟁이 이명박을 퇴진시키는 것은 불가능했다면서 “대안은 거리에서 찾아질 수 없습니다” 하고 주장했다.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결국 달랑 표 하나 던지는 것 뿐”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촛불항쟁 한복판에서 “민원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소규모로 준법시위를 벌여야 한다”거나, 최근 신자유주의자인 한나라당 이한구를“여야를 통틀어 제 정신 가진 몇 안 되는 정치인 중의 한 사람[각주:12]”이라고 묘사하는 것도 이런 개혁주의의 발로일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에 실은 내 기사에 몇 가지 내용과 각주을 덧붙인 글이다.  기사 원문 주소는http://www.left21.com/article/8626.
  1. 그렇다고 진중권이 진보 인사가 아닌 것은 아니다. 본인은 싫어하겠지만. [본문으로]
  2. [추가] 최근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를 통해 확인한 바로는 10월 9일 현재 탈당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9월 17일 트위터로 “탈당했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본문으로]
  3. 기본으로 김규항의 비판이 옳다고 본다. [본문으로]
  4. 흔히 냉전시대에 소련을 미국식 자본주의보다 못한 체제로 보기 시작한 극좌파 출신, 개혁주의로 변신한 옛 스탈린주의자들, 그리고 냉전 체제를 지지하며 정치 생명을 되찾은 유럽 사회민주당 등이 반공주의를 적극 내세웠다. 진중권도 이런 사례의 하나로 보인다. [본문으로]
  5. 이 점에서 그는 단순히 친북 자주파를 싫어하는 차원이 아니라 급진 좌파 전반을 혐오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6. 개혁주의자들의 전형적인 이 주장은 자본주의의 지배적 상식에 도전하길 꺼리는 개혁주의의 습성을 반영한다. [본문으로]
  7. 상식은 누구나 그럴 법하게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말하는 것으로 엄밀하게 보면 지배적 사상의 다른 표현이다. 그람시는 그래서 상식과 양식을 구분하기도 했다. 한편에서 노동자들에게 상식인 것이 자본가들에게는 비상식인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상식은 대체로 파편적인 개인의 경험들과 지배적 사고방식의 결합인 경우가 많다. 핏줄은 못 속인다든지, 전라도 놈은 원래 그래, 여자는 원래 그래 등 말이다. [본문으로]
  8. 그는 촛불항쟁 때 칼라TV에서 활동하며 지도가 아닌 중계 활동을 선보였는데, 칼라TV라는 매체가 분명한 정치적 목적을 가진 매체였고, 그의 중계는 자신의 가치관을 담은 멘트로 진행됐다는 점에서 그도 마찬가지로 촛불항쟁 때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획득하려는 행위(지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본문으로]
  9. 진중권은 지식인이지 사상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떤 특정 성향으로만 규정하기 매우 힘들다. 자기 논지에 도움이 된다면 이것저것 유행하는 사조의 단어와 개념들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10. 사실 김규항에게 지식 없이 지식인 행세한다고 비판하는 진중권이 이런 조야한 반지성주의적 태도를 취하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가 물론 일관된 반지성주의라고 하는 건 섣부르겠으나 이런 경험주의적 진술은 그가 대중의 지적 능력을 무시한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본문으로]
  11. 진중권이 여러 문제에서 자유주의적 태도를 보이긴 하지만, 김규항이 진중권의 정치를 자유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과도해 보인다. [본문으로]
  12. 이한구는 십 년 째 긴축 정책을 주장하는 거의 오리지날 신자유주의자다. 그의 주장이 가끔 상황을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때도 있지만, 그가 이명박의 경기부양책을 비판하는 게 제 정신이라고 볼 근거는 없다.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처럼 소득이 줄고 서민 가계 부채가 높은 상황에서 긴축정책은 공공서비스의 후퇴와 가계 파산을 불러올 것이다. 문제는 긴축을 못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부자만을 위한 경기부양이라는 데에 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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