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이명박은 천안함 사고를 북한의 도발로 단정하고 경고 담화를 발표했습니다. 천안함 합동조사단의 발표가 전혀 의문점을 해소하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조사단 발표는 또 다른 의혹을 낳고 있다)

결정적 증거라는 게 파란 매직으로 쓴 파란 1번 글씨[각주:1] 뿐이라는 건 이 사건의 진실을 캐내려던 사람들을 참 허무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합동조사단의 조사를 신뢰한다는 응답이 70퍼센트가 넘는 조사에서도 대북 강경 대응에 찬성하는 여론이 과반을 넘지 않고, 이 사건 때문에 이번 지방선거에서 여권 후보를 지지하기로 맘을 바꿨다는 사람이 그 반대 경우보다 많지 않거나 오차범위 안에서 많은 정도입니다. 딱히 현직 단체장인 한나라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올라가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각주:2].

오늘자 내일신문에서도 발표 신뢰가 70퍼센트가 넘는데, 증거가 부족하다는 응답이 50퍼센트에 육박합니다. 경향신문에선 조금 줄긴 했지만, 여전히 지방선거에서 정권 견제 투표를 하겠다는 응답이 다수입니다. 동아일보 여론조사조차 지방선거 지지 후보 결정에 별 영향을 못 미쳤다가 70퍼센트를 넘습니다.

이는 이 발표가 정부가 노린 최소한의 효과, 즉 보수층 결집 이상의 효과를 내지 못한다는 것이고, 정부의 엄청난 호들갑에도 다수의 사람들이 정부의 ‘안보 위기’ 과장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성공하고 있다고 볼 근거는 없어 보입니다.

한국에서 북한 문

△북한 최고 포털사이트로 추정됨.

제가 가진 특성상 적지 않은 사람들이 아마도 합동조사단의 결과에 마지못한 신뢰를 보낸 것이라고 봅니다. 거리에서도 ‘안보 위기’의 긴장감 같은 건 찾기 힘듭니다. 인터넷의 다양한 패러디와 풍자는 덤이겠죠. (☞ 이미지 모음)

이러니 거짓말도 아주 크게 치면 믿는 사람들이 생겨난다는 말이 전해져 오나 봅니다. 합조단의 발표는 꼼꼼히 읽어보면 모조리 '추정'입니다. (합조단은 잘 모르나 본데, 북한도 한글을 쓰는 국가입니다)

합조단은 북한 잠수정의 침투·탈출 경로도 설명 못하면서(파악 못했다고 스스로 인정) 북한 소행이라고 단정지었습니다. 이러니 전혀 북한 정권에 우호적이 아닌 사람들도 정부 발표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정부는 합조단 발표를 믿지 않으면 ‘친북’이라 합니다.

심지어 자기 말을 믿게 하려고 미군과 한국군의 해상 방위 능력을 완전히 ‘이뭐병’ 수준으로 만드는 ‘자해’도 서슴지 않습니다. 늘 실패한 국가라고 비웃던 북한의 무기 과학은 세계 최첨단 기술로 격상됩니다. 결정적 증거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딱 ‘자해공갈단’ 수준입니다. “쳐맞아서 자랑이다”는 인터넷 패러디물의 비아냥은 이명박 정부의 거짓말과 진실 은폐에 염증이 난 사람들 심정을 대변해 줍니다.

△ 알았어, 욕하지마, 안 찍을께!

민주공화국’이란 나라에서 선출된 정부가 증거도 없이 무작정 정부 발표를 믿으라 강요하고, 믿지 않으면 처벌하겠다고 하니, 이젠 정부 자체가 불신의 대상이 됩니다.

게다가
정부는 천안함 사고의 진상과 관계없이 대북 호전주의로 돌진하고 있습니다.

정부 스스로 이 문제를 사실의 문제가 아니라 이데올로기 문제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쟁점은 ‘이명박 정부의 신뢰도’입니다. 그래서 정부의 발표가 진실이라고 믿을 이유도 없고 믿어야 할 정당성도 없습니다.

천안함 사건의 진상이 무엇으로 밝혀지든 한반도가 군사적으로 불안정해진다면, 그것은 이명박 정부가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이럴 때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발표를 믿어주는 게 이명박에겐 매우 큰 힘이 될 겁니다. 미국마저도 인정한다면? 정부가 생거짓말을 치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 만합니다.

그러나 미국이야말로 이런 조작의 원조입니다. 미국이 1965년 베트남 전쟁을 시작하면서 계기적 명분으로 내세운 사건이 통킹 만 사건(1964년)입니다. 베트남의 호치민 정부가 통킹 만에서 작전 중인 미군함 매독스 호를 어뢰로 공격했다는 것이었습니다[각주:3].

이 사건은 나중에 미국의 조작(자작극)으로 밝혀졌습니다. 조작된 증거로 10년이나 베트남 민중의 삶과 영토를 유린하는 참혹한 전쟁을 일으킨 겁니다[각주:4].

이런 일은 21세기에도 반복됐습니다. 2002년 미국 부시 행정부는 유엔조사단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해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숨겨져 있다고 뉴욕 쌍둥이빌딩을 무너뜨린 9·11 테러의 배후에, 즉 알카에다의 배후에 후세인 정부가 있다고 단정했습니다.

부시가 거짓 증거로 유엔의 지지까지 받아가며 침략 전쟁을 시작했지만, 미국이 승리해 이라크를 점령하자 역설이게도 그 거짓말이 드러났습니다. 미군이 장악한 그 땅에 대량살상무기는 없었던 것입니다. 여지껏 사담 후세인과 알카에다의 연계도 전혀 밝혀진 게 없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때 세계의 인구 다수가 전쟁 전부터 부시 행정부의 말을 믿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전쟁 전인 2003년 2월에 이미 3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세계 곳곳에서 이라크 전쟁 반대 시위를 벌였습니다.

이런 정치적 압력 때문에 미군은 군사 작전도 제약을 받았습니다. 이라크의 저항세력도 강렬하게 저항했습니다. 결국, 부시의 거짓말은 들통났고, 이런 정당성 위기는 미국의 이라크 전쟁 실패에 주요한 배경이 됐습니다. 그리고 이 여파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반복되고 있습니다.

두 경우에서 우리는 세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전쟁광들은 진실을 매우 싫어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전쟁광들은 진실이 알려진 뒤에도 전쟁 노력을 곧바로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명박도 안보 위기 조장 시도를 당분간 계속 할 것입니다.

그래서 셋째 교훈이 중요합니다. 어떤 무시무시한 전쟁광도 진실을 다수가 알아채고 저항에 나서는 걸
막지는 못했다는 점입니다.

한국에선 1996년 북풍 사건이 있습니다. 그해 총선을 앞두고 판문점에서 북한군이 한국군 초소를 향해 총격을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선거에 이용하려고 (한나라당 전신인 신한국당의) 김영삼 정부가 북한 군부를 매수해 총격을 ‘요청’한 사건이었습니다.

이런 전례를 봤을 때, 이명박은 우리가 믿든말든 전쟁 위기를 조장하는 언동을 계속 해댈 겁니다. 46명의 죽음을 이용해 훨씬 더 많은 죽음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위험한 전쟁 몰이를 선동하는 겁니다.

그럴수록 정부는 심각한 정당성과 신뢰의 위기를 확인할 뿐이지만, 이미 도박을 시작했기에 바로 그 신뢰의 위기 때문에 더욱 과장과 호전적 선동에 매달려야 하는 신세입니다.

저들의 호전적 선동은 저들은 한 톨 만큼의 정당성도 없습니다. 전쟁 몰이에 필요해 46명의 죽음은 부각하지만, 정부와 군부의 무능만 드러내는 금양호 선원들의 죽음은 외면합니다. 저들은 삼성 반도체 공장에서 백혈병으로 죽어간 ‘산업 역군’에게는 단 한번도 그런 관심을 보여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들이 말하는 안보는 ‘국민의 다수인 평범한 다수의 안전’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저들에겐 자신들의 기득권 체제, 지배체제, 통치 질서를 지키는 게 ‘안보’입니다. 글자 그대로 그들의 안보관으론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안전, 평화가 ‘안 보’입니다.

그런 점에서 진보진영 일부 인사들이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대응을 비판하면서 (민주당 일부 인사를 따라) '안보 무능' 어쩌고 한 것은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부적절합니다. 그건 저들이 소유한 의제 안에서 싸움을 거는 겁니다. (약간 과장하는 감이 없진 않지만) 차라리 “전쟁이냐, 평화냐[각주:5]하고 묻는 게 낫습니다.

요즘 한국 군부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국지전 정도는 해 보고 싶다는 듯 들리는데, 북한이 강경하게 반응하니 실제로 한반도에서 긴장이 조성되고 있습니다. 남한 군부와 집권당은 남북한의 ‘적대적 상호의존’ 관계를 한껏 이용하려는 듯 보입니다. 

친북 낙인 협박에 굴복하지 말고 계속해서 천안함 진실을 계속 캐묻고 이명박 정부의 신뢰도를 문제 삼아야 합니다. 과거의 북풍 전력을 끄집어 내 저들의 추악한 과거=진짜 진실을 보여줘야 합니다.

‘안보 위기’를
빙자한 민주적 권리 억압을 비판하고 경고하며 싸워야 합니다. 이명박이 천안함 관련해서 미국 정부의 협조를 받는 대가로 주려는 것들(아프가니스탄 추가 파병 등)에 반대해야 합니다. 천안함 소재로 한 정쟁 중단 따위를 합의하면 안 됩니다.

△1천3백 톤 천안함을 박살내고도 그을림 하나 없이 멀쩡한 어뢰 추진축, 그 어뢰에서 무사히 살아남은 무적의 파란 매직 글씨.

‘Made in MB’인 군사적 위기 조성에도 반대해야 합니다. 이번 사건으로 한반도 불안정이 커진다면, 남북 양비론이 아니라 순전히 이명박 정부(와 이에 동조한 미 오바마 정부[각주:6])의 탓이라는 걸 분명히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일부러 대북 긴장을 조성해 국내 권위주의 통치 강화에 활용하는 행태에 맞설 수 있습니다. 대북적대정책은 민주와 복지를 갉아먹는 주범입니다.

‘파란색 1번’은 일종의 코드처럼 보입니다. 남한산 파란 1번들이 우리에게 ‘북한산’ 파란 1번이 결정적 증거임을 믿으라고 강요합니다. 그러나 ‘북한산’ 파란 1번의 증거 능력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남한산 파란 1번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 ‘1천3백 톤 전함을 침물시키고 살아남았다는’ 이 파란색 1번’과 한동안 싸워야 할 듯 합니다.




  1. 1번만 증거로 인정하는 더러운 정부!!! ㅋ 이 어뢰가 ‘11번가’ 쇼핑몰에서 구입한 건데, 앞뒤가 지워져서 ‘1번’만 남았다는 설(說)도 있군요. [본문으로]
  2. 야당 후보들의 지지율이 딱히 오르지 않는 것은 별도의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무래도 민주당이 지난 10년 동안 정말 별 볼 일 없는 행적을 보인 게 젤 큰 요인이 아닐까 합니다. [본문으로]
  3. 미국 의회는 이 사건을 빌미로 통킹 만 결의를 하고 이듬해 2월부터 침략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1971년 뉴욕타임스가 미 국방부의 보고서(펜타곤 페이퍼)를 인용해 조작 사실을 폭로했고, 훗날 당시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가 조직 사실을 인정합니다. [본문으로]
  4. 이 전쟁에서 베트남 민중은 2백만 명이 넘게 죽었습니다. 미군도 수만 명이 죽었으며, 파병 한국군도 5천 명 넘게 죽었다고 합니다. [본문으로]
  5. 선거로만 치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이 막판에 써먹어 효과를 좀 봤죠. 이번 선거에서 통할지는 두고봐야 알겠네요. [본문으로]
  6. 한국의 어떤 정당도 이명박의 황당무계한 결정적 증거를 인정하는 미국정부를 비판하지 않고 있음.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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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기사: 전두환 독재에 맞선 위대한 민중 무장 항쟁
관련 글:
광주민중항쟁 30년 ①: 역사를 제대로 이어가기
광주민중항쟁 30년 ②: 학살이냐, 항쟁이냐
광주민중항쟁 30년 ③: 유신 적자 전두환과 미국
광주민중항쟁 30년 ④: MBC와 투사회보, 그리고 저항 언론
광주민중항쟁 30년 ⑤: MB 시대와 민주주의, 저항의 길


박정희 독재 정권은 민중을 가난하게 만들고, 멸시했습니다. 노동기본권은 꿈같은 얘기였고, 저임금 체제를 유지하려고 쌀값을 억제한 결과, 도시 빈민을 양산하고 다시 이들이 저임금 노동의 풀(pool)이 되는 악순환 체제(저임금-저곡가 체제)는 굉장한 정치적 억압 체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했습니다.

긴급조치가 9호까지 발동됐지만, 박정희 체제를 두고 쌓여온 불만이 임계점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에 이어 부마항쟁이 터져 나왔습니다. 공수부대를 투입해 진압했지만, 박정희 체제 핵심부에겐 큰 충격이었습니다.

결국, 표면적으로 부마항쟁 진압 방식이 내부 논쟁의 도마 위에 오르고 유화책을 냈다가 모욕당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1026일 궁정동 비밀 요정에서 강경파 박정희와 경호실장 차지철을 죽입니다. 역설이게도, 박정희는 김재규가 죽였는데, 실권은 전두환에게 넘어갑니다.

이미 111일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일 외무성 말을 인용, “전두환 계엄사령부 수사본부장, 한국의 실권을 잡다” 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유신 말기, 박정희 체제를 떠받치는 핵심 권부는 대통령 경호실(차지철), 중앙정보부(김재규), 보안사령부(전두환)였는데, 이 가운데 박정희와 차지철이 10·26 사건으로 제거됐고, 김재규는 체포됩니다. 남은 건 이제 전두환 하나 뿐.
 
김재규가 박정희를 쐈다면 다른 조처를 할 생각도 있었겠죠. 그 자신도 권부의 핵심이었는데요. 그러나 암살 저격 소식을 누구보다 빨리 입수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잽싸게 김재규를 체포합니다
. 전두환은 더 나아가 사건 배후로 중앙정보부를 지목해 활동을 정지시켜 버립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핵심 지도자 제거'를 목표로 하는 테러리즘이 저항 전략으로서 얼마나 무력한지 알 수 있습니다. 기층의 압력으로 체제의 핵심부가 분열했지만, 개인 테러 방식으로 최고 지도자가 제거됐기에 유신 체제는 오히려 억압 체제 유지의 명분을 가지고 살아남고, 대중은 수동적 관망 상태에서 [신군부의 등장을 우려의 눈으로 바라보면서도] 몇 달을 허비합니다.

전두환은 어떻게 이런 신속 대응이 가능했을까. 여기에 전두환과 신군부의 초기 체제를 '박정희 없는 박정희 체제'라고 부르는 이유와 전두환이 이 박무박 체제에서 순식간에 실권을 장악한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박정희는 19791월 비공개 대통령령으로 국가비상상태 발생시 보안사령부가 국내 모든 수사정보기관을 흡수하는 합동수사본부를 구성·지휘하도록 조처하고, 3월에 전두환을 보안사령관에 임명합니다. 결국, 박정희의 사망은 전두환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줍니다. 이런 조처는 '박정희 양아들' 소리까지 듣던 전두환이야말로 유신 체제의 적자(嫡子)라는 사실에서 비롯합니다.

1980년 서울의 봄, 유신체제의 억압에서 벗어나려는 민중들과 신군부가 정면 충돌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여기서 결정적으로 비롯합니다. 독재자는 갔는데, 그가 만든 체제는 그대로였던 겁니다.

전두환은 19615·16 쿠데타 직
후 육사생도 1천여 명을 모아 서울 종로를 관통하는 쿠데타 지지 시위를 벌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시위 날짜가 518일이다)

이 일은 무력 시위였을 뿐아니라, 군부 전체가 쿠데타를 지위하는 듯한 인상을 줘 쿠데타 성공에 기여합니다. 이때부터 총애를 받기 시작한 전두환은 곧바로 박정희의 민원비서관으로 발탁되고, 그뒤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이 돼 1963년 김종필 등을 제거하는 친위쿠데타를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하나회는 1963년 결성됐고, 박정희는 이들을 후원합니다. 1973년엔 박정희가 직접 세단 승용차와 ‘일심[一心]’('하나회'의 한자 명칭)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합니다. 그뒤, 특전사와 대통령 경호실 참모를 거쳐 1979년 보안사령관에 임명됩니다.

앞 글에서 얘기했듯, 특전
사(공수부대)가 독재자의 친위부대인 만큼 당시 특전사 지휘관을 거치는 건 나름의 출세 코스였습니다. 전두환과 하나회 실세들은 거의 모두 특전사 여단장 직을 거쳤습니다. 전두환과 노태우는 특전사→대통령 경호실→보안사를 차례로 거칩니다.

박정희의 선물로 10·26 후 권력을 상당히 손에 쥐지만, 장벽은 남아있었습니다. 김재규는 체포됐지만, 부마항쟁 후 더는 폭압통치만으로 체제 유지가 힘들다는 그의 주장에 지배계급 상당수가 동의하는 듯 보였습니다. 미국도 불만을 잠재우려면 일정한 정치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문했구요.

임시 대통령 최규하와 계엄사령관 정승화는 정권 민간 이양과 개헌에 동의해 국회와 협상하려 합니다. 긴급조치도 하나씩 철회하겠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군 수뇌부가 이러니, 유신헌법을 고수하려는 전두환에게는 그 시간들이 매우 다급했던 겁니다.

이 구도를 뒤엎은 게 12·12 쿠데타입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이 쿠데타로 군부의 실권을 완전 장악했습니다. 유신 체제의 억압 기구와 방식은 이름만 바꿔 그대로 살아남았습니다. (이 자가 형식상 민간 정권의 겉모습을 띠려고 광주항쟁 진업 후 만든 민정당이 지금 한나라당의 전신입니다. 이 자들이 민주주의를 싫어하는 건 이들의 정치적 유전자 DNA에 새겨진 본성입니다

이러니 사람들은 계엄령 전국 확대(당시 제주만 계엄 제외)가 실시된다면, 이것이 12ㆍ12에 이은 2차 쿠데타인 거라고 봤습니다.

전국 계엄 하에선 내각(국무총리)이 지휘계통에서 배제돼 명령체계가 대통령-계엄사령관으로 이어집니다. 최규하가 허수아비였으므로 안 그래도 막강한 신군부는 완전한 날개를 다는 겁니다. 사실상 군부 통치가 시작하는 거죠. 반대로 계엄령 해제는 신군부를 타격하는 요구(슬로건)이겠죠.


그래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신군부에 반대하는 단결한 대중 저항이 필요했는데, 1980년 서울의 봄은 다소 자생적이고 지역·부문 별로 분산된 저항으로 시작합니다. (이는 오랜 억압 체제 탓에 운동 자체가 전국적 지도력과 조직(연결망)을 형성할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객관적 한계를 보여줍니다.)

그런 한계 속에서도 저항은 들불처럼 번집니다.
1980년 봄에만 노동쟁의가 9백여 건 벌어졌습니다. 유신 시절 전체를 합친 것보다 많은 파업 숫자입니다. 4월 21일 강원도 사북면에선 광산노동자들이 사장과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면 전체를 장악했습니다. 5월 들어선 학생 시위도 크고 격렬해 집니다.

당시 김대중, 김영삼을 비롯한 자유주의 정치인들은 시위가 더 커지면 사회 혼란을 핑계로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킬 명분과 빌미를 준다며 시위 자제를 호소했는데, 결과적으로 순진한 판단이었다는 게 드러납니다.

우리가 먼저 자제하고, 먼저 양보하는 게 얼마나 허망한 건지 보여주는 또하나의 사례입니다. 결정적일 때, 저항 세력의 어정쩡한 태도야말로 빌미를 주는 것입니다.

나중의 증언을 보면, 광주 운동권의 지도자 격인 윤한봉 씨는 상황을 비관적으로 본 듯합니다. 신군부는 공개적인 정권 장악 시도를 시도할 것이고, 민주화운동이 이기기 힘들다고 본 듯합니다. 그럼에도 윤한봉 씨는 그걸 막기 위해서라도 시위를 계속 해야 한다고 봤습니다.

5월 15일 서울역 시위 날, 군 병력을 실은 트럭과 장갑차들이 효창운동장과 잠실운동장에 집결한다는 소식을 들은 시위 지휘부(서울지역 총학생회장단)는 시위를 곧바로 해산했습니다.

광주에선 16일까지 시위를 이어갔습니다. 이때 전남대 총학생회장 박관현은 신군부가 계엄을 확대하면 즉시 (정오에) 전남도청 앞에 집결하자고 호소했습니다.[각주:1] 이것은 광주 민주화 운동 진영이 내린 결정이었죠.

그 결과, 광주항쟁은 당시 전국적 민주화운동의 한계를 그대로 보여주며 군사적으로 패배합니다. 고립된 한 지역의 무장 항쟁은 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어도 지역 장악을 계속 유지할 순 없습니다. 상대는 지역 경찰이 아니라 군부 독재 정권 그 자체였습니다.

최정예 사냥개들이 무장헬기와 탱크 등 최신 무기를 끌고 2만 명 넘게 지역을 봉쇄하고 공격합니다. 군대에 대항한 무장저항은 국가권력을 문제를 제기하는데, 당시 민주화운동은 물론이고 항쟁에서도 그런 준비는 전혀 돼 있지 않았습니다. 


운동의 이념(국가권력의 성격을 이해하는 정도와 전략 등) 수준, 조직(전국적으로 통일된 저항을 전개할 수 있는 연결망) 수준, 구성(노동계급의 운동이 미발전이라 지배계급에 타격을 주는 정도가 미약함) 수준은 사회와 운동 발전의 객관적 한계에서 비롯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겁니다.

이념적 한계 중에 미국의 제국주의 성격 문제도 있습니다. 

광주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은 민주주의 우방인 미국이 사태를 알아차리면, 신군부를 제지하고 자신들을 지지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미국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들어왔다는 소문에 자신들을 구하러 온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한 시민들도 있었습니다.

그럴 만도 했죠. 박정희 말기, 미국 카터 행정부가 한국 정치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박정희와 공개적으로 갈등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갈등의 본질적 배경은 미국의 베트남 패배 증후군이었습니다.

패배 후 자신감을 잃은
미 지배계급은 당분간 해외 개입 형태를 바꾸려 했습니다. 카터 행정부를 통해 인권 외교를 내세운 것입니다. 주한미군 철수도 공개적으로 거론했습니다.

가뜩이나 미국의 베트남전 패배를 보며 불안해 진 박정희에게 미 행정부의 이런 태도는 위기감을 던져줍니다. 김대중 가택연금 해제와 일부 정치수 석방 등 요구를 수용하며, 주한미군을 붙잡는데 주력합니다. 한편에선, 독자 핵무장 노선으로 기울었습니다

결국 두 정부는 공개적인 갈등을 무마하고 타협합니다. 박정희는 매우 형식적인 민주화 조처만 취하고 주한미군을 붙잡아 놓습니다. 사실상 미 행정부의 본뜻이 정권교체는 아니라는 걸 확인한 겁니다.

이처럼 미국의 인권 외교가 제국주의적 국익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미국의 광주 시민을 도울리 만무했죠. 522일 미 백악관 대책 회의는 “최우선 과제는 계엄당국이 차후 혼란의 씨가 되지 않도록 최소한의 무력을 행사해 광주의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라고 결정했습니다.

그뒤 밝혀진 문서에는 당시 신군부의 군대 이동 사실을 모두 파악하고도 전혀 제지하지 않고, 오히려 진압을 승인했다는 게 드러났습니다. 미국은 사건 이후 줄곧 작전지휘권 밖의 부대(특전사)가 출동했기 때문에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해 왔습니다.

미국 레이건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먼저 이 학살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했습니다. 다수의 나라들이 광주항쟁 진압 사건을 알고서 정부 승인을 뒤로 미루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이랬던 레이건 정부도 전두환 정권에게서 (나중에 안전판 구실을 할 수도 있는) 김대중을 구해내고, 대중 저항이 거세진 1980년대 중반에 (엄격하게 제한된) 민주 개혁 요구 수용 쪽으로 기웁니다. 

결국 1987년 민중항쟁(6월 항쟁과 뒤이은 7~9월 노동항쟁) 때는 역대 최강 친미인 전두환 정권을 구출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기억해 달라”던 광주항쟁 투사들의 피어린 유언이 총칼보다 셌던 겁니다.


광주항쟁의 본의 아닌 (객관적) 약점은 1987년 항쟁에서 상당히 극복됩니다. 그래서 전두환 체제는 또다른 쿠데타를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국가의 물리력을 무력화하려면 노동계급의 경제적 힘-파업을 동원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게 드러납니다. 1980년과 1987년의 차이 가운데 하나가 이것입니다.

그래서 미완의 과제를 완성하려면 “해방 광주”는 박제화된 해석과 다르게 급진적으로 재해석해 계승해야 합니다. 이명박 시대의 민주주의 훼손을 걱정하는 사람들이라면 광주항쟁의 역사가 저항의 교본이 돼야 합니다. 운동의 잠재력과 한계 모두 배워야 합니다.

광주항쟁 투사들이 외친 민주주의는 결코 제도와 절차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당시 박정희 유신 체제 아래서 요구하는 민주주의는 정치적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 뿐만 아니라 먹고 살 권리를 정당하게 보장받는 것, 이를 위해 조직하고 행동할 자유가 있는 세상을 뜻합니다.

광주항쟁의 주요 구성이 천대받던 하층 노동자였다는 사실은 이런 교훈의 방증입니다. 서울의 봄을 달궜던 노동자·농민 등의 저항은 이런 맥락에서 나온 몸짓이었습니다.




광주항쟁 30년을 맞는 올해, 다가오는 지방선거에서 이명박을 표로 심판하자는 주장에 공감은 하면서도, 어딘가 부족해 보입니다. 저들이 살인마 전두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열심히 그 흉내를 내는데, 우리는 표가 아니라 총을 들던 그 정신을 되새겨야 하지 않을까요.

 (다음에 계속)

(다음 편은 5·18 지난 뒤에 올려야겠습니다)

※ <레프트21> 32호 기사 준비로 시간이 없어 예정보다 시리즈를 줄여 올립니다.

※ 아 비공개를 안 풀어 놓고 있었군요. 이런~


  1. 전남대 학생들은 오전10시 전남대 정문이 계획이었습니다. 광주항쟁 첫 시위와 시간장소가 일치합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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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국가와 세금

기사들 2010. 5. 17. 17:53


최근 보편 복지를 주장하는 이들은 대부분 보편 증세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강약과 강조점의 차이는 있지만, 보편적 복지국가 유지 비용을 감당하려면, 누진세도 늘려야 하고, 세금 내는 사람의 숫자도 더 늘어나야 한다는 논리다.

<한겨레>가 14일 보도한 것(아래 표 참조)처럼, 70퍼센트가 넘는 많은 국민들이 보편적 복지 혜택을 누릴 수 있다면 세금을 더 낼 용의가 있다고 말한다.

지난 글에서 지적했듯이, 노동자와 서민들에게 보편 복지국가를 유지하려 내는 세금 비용보다 돌아오는 복지 혜택이 더 많다면 해 볼 만한 일로 여겨질 것이다.

즉, [개인들이 받는 복지 수혜 비용을 사회임금이라 부른다면] 세금(노동자들이 시장임금에서 내는) 순(純) 사회임금이 더 늘어나느냐 마냐가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 관점에서 바탕해서 보편 복지를 위해 보편 증세가 필요하다는 논자들의 주장을 검토해 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 사회임금 문제와 관련한 더 초벌적인 내 분석은 (http://enlucha.tistory.com/40)을 참조하세요.]

대표적인 사회임금 중시론자인 오건호 사회공공연구소 연구실장은 “정책보다 운동 … 노동조합 나서야”(<레디앙>, 423)라는 글에서 노동자도 세금을 더 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 실장은 이 주장을 위해 근거 두 가지를 댄다
.

첫째
, 이명박의 감세 정책이 부자에게만 유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오 실장은 노동운동이 감세 운동을 했던 과거를 비판하며 감세가 부자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인게 드러났으므로 이제 노동자를 포함한 증세를 요구하는 게 맞는 것 아니냐고 반문한다.

둘째
, “보편 복지처럼 증세 주체도 가능한 많은 사람일수록 좋다 … 중간계층이 공공재원 마련에 참여하며, 이들이 부자들의 재정 책임 이행을 압박하는 주체로 성장”할 것이다. 의무를 이행한 만큼 권리의식도 높아질 거라는 논리다.

이런 논리로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이 최근 내놓은 사회복지세 도입 요구안도 비판한다
.

상위 5% 계층만을 과세대상으로 하는 진보신당의 ‘사회복지세’ 방안에 대해선 재검토가 필요하다. … ‘내라’보다는 ‘내자’가 훨씬 강력하다.” 

진보신당이 내놓은 사회복지세 요구는 소득세와 법인세 등의 고액 납부자에게 납부세액에 기초한 추가 세금을 내도록 하는 것이다. 대상은 주로 5퍼센트 고액 납부 개인과 기업에 집중된다.

오 실장은
사회복지세의 납세 대상이 너무 좁게 설정됐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복지세의 수입 목표액은 이명박의 부자 감세액 규모다. 이명박이 부자들에게 깎아 준 만큼 부자들에게 도로 내놓으라는 것인데, 이를 비판하는 것은 부자 감세를 원상 회복해야 한다는 오 실장 자신의 말과도 모순된다.

물론 세금을 더 내서라도 복지 혜택을 받고 싶단 생각이 들 정도로 열악한 한국의 복지 현실이 진짜 문제다
.


그렇다고 노동자들이 스스로 먼저 증세하겠다는 의지를 제안하자는 오 실장의 “내자 운동” 계획이 옳다고 할 순 없다. 오 실장의 계획은 기껏해야 “병[증세] 주고 약[복지] 주겠다”는 것에 불과하다.

첫째
, 순사회임금의 획기적 증대 없는 노동자 증세는 빈부 격차를 더 심하게 한다.

부자감세는 정확히 말해,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법인세와 소득세, 특별소비세 등을 감면하면서부터다. 그뒤 지금껏 소득세와 법인세는 다시 오른 적이 없다.(↘, 사실 법인세는 2000년 김대중 정부 시절부터 감면되기 시작했다.)

반면에 2006
년부터 소득이 낮아 근로소득세가 면제되는 노동자 비율이 줄고 있다.(50→43퍼센트) 각종 세액공제 등 절세 혜택을 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근로소득세 총수입액에서 상위 10퍼센트의 비중은 5년째 늘어 2008년엔 64.3퍼센트가 됐다.

정부가 부자 세금을 깎아주고, 노동자에겐 절세 혜택을 줄여 근로소득세를 내는 노동자 수를 늘렸는데도 총 세금 수입에서 기업주를 포함한 상위 집단의 비중이 커진 것은 노동자들의 소득이 전반적으로 하락했다는 뜻이다
. 불평등이 확대된 것이다.

임금 소득이 줄어드는 현실에서 일방적인 “보편 증세”는 빈부격차를 더 크게 할 것이다
. 오 실장이 이 점을 간과하는 건 시장임금과 대비한 사회임금만 강조하지, 진짜 중요한 순 사회임금을 중요하게 고려하지 않기 때문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세금이 노동자들의 시장임금에서 나간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다. 보편 증세로 세금이 늘어 시장임금이 줄어든다면, 사회임금이 늘어나는 것이 조삼모사일 수도 있는 것이란 얘기다. 또 이런 태도는 노동자들이 시장임금을 올리려고 벌이는 투쟁의 중요성을 간과[하고 오히려 무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런 방식은 당연히 노동자의 지지를 모으기도 힘들어 보편 복지를 쟁취할 동력도 만들지 못할 것이 뻔하다

둘째, 먼저 세금을 올린다고 정부와 기업주들이 양보할 거라는 보장이 전혀 없다.

예를 들어
, 2002~2006년 사이에 건강보험 재정의 절반을 정부가 부담하는 특별법을 만들었지만, 이 기간 동안 정부 미납금액 규모가 37천억 원가량이다. 예상 보험료 수입액의 20퍼센트를 정부가 내기로 한 바뀐 법에서도 지난해까지 정부는 액수를 채우지 않았다.

전면 무상급식은 이미 예산이 있는데도 정부와 기업주들은 반대한다
. 무상급식이 다른 보편 복기 욕구를 자극해 부자 증세 압력으로 다가올까 두렵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은 기금 고갈론 사기극을 벌인 끝에 지급율을 낮췄다. 정부가 연기금에 기여해 수혜 대상을 늘려야 하는데 말이다.

이런 점 때문에 노동자들이 먼저 선 증세를 결의한다고 해도 그에 걸맞는 복지를 받으려면 결국 정부와 기업주를 상대로 투쟁에 나서야 한다.[각주:1]
정부와 기업주들에게 “내자” 운동이 압력을 넣는 효과를 낼 거라는 생각을 순진하다고 보는 이유다.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세금을 더 내겠다고 해도 여전히 거친 투쟁의 과정이 남는다면, 자진 증세의 뜻을 모으고 선언해야 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오히려, 권리(복지)에는 의무(증세)가 따른다는 저들의 복지 회피 논리에 도움만 주는 자충수가 되진 않을까.[각주:2] 오  실장 등이 진지하게 답해야 할 문제다.

오 실장은 “국가와 자본을 향한 요구투쟁 … 방식에만 의존하는 것”을 문제 삼는다. 그러나 문제는 “요구 투쟁” 방식이 아니라 “요구 투쟁”이 더 강력하지 못했던 것에 있다.

“복지는 권리”라고 단도직입으로 말해야 복지병이나 도덕적 해이를 들먹이는 저들의 담론 틀에 휘둘리지 않고 더 유리하게 싸울 수 있다. 뭉뚱그려진 사회임금 인상이 아니라 순 사회임금을 올리는 복지국가를 제안해야 한다. 그럴려면, 시장임금 인상을 가볍게 취급해선 안 된다.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투쟁이 감당 못 할 지경이 될 때에야 복지제도를 도입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개혁을 거부하면 혁명이 올 것 같을 때
, 보편 복지를 도입하기 시작할 것이다.

불평등한 현실을 생생하게 알리고 노동자들이 단결해 정부와 기업주에게 “보편 복지(권리)”를 “요구”하며 싸우도록 고무해야 하는 게 좌파의 할 일이다. 노동자에겐 무엇이든 요구할 권리가 있다.

 


※ 이 글은 <레프트21>31호에 실린 내 “복지국가는 양보가 아니라 투쟁으로 가능” 기사를 수정·보완한 것이다.

  1. 투쟁 없인 이명박이 서울시장 시절 마련한 버스준공영제 같은 게 나올 수 있다. 버스준공영제는 환승할인 서비스로 편한 면도 있지만, 세금이 서민 교통료 절감이 아니라 버스 회사들 이익 보전을 위해 쓰인다. 완전공영제가 우리의 세금을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본문으로]
  2. 이것이 바로 1997년 집권한 영국 노동당 블레어 내각이 내세운 논리다. 이들의 ‘제3의 길’은 결국 사회적 자유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포장된 버전(좌파 신자유주의)에 불과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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