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동당 이정희 대표와 당권파(경기동부연합) 진보대통합을 자본가 정당과의 계급연합으로 끌고 가려는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6월 7일 국회 본회의 비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나선 이정희 대표.

6월 7일 국회 연설에서 이정희 대표는 “과거에 무엇을 했는지를 묻지 않겠습니다”라며  국민참여당을 진보대통합에 포함시키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5월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 합의문에서 이정희 대표가 “자본주의 극복” 구절 삭제에 흔쾌히 동의한 것도 국민참여당을 염두에 뒀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이정희 대표의 국회 연설과 같은 날 유시민은 진보 양당이 “[진보정당들이] ‘집권전략’으로 나아갈 의사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면 참여당이 함께 하는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진보정당들에게는 “민주당과의 차별화에 중점을 두고 정부의 정책에 강력하게 반대하는 활동”을 그만하라는 ‘충고’까지 했다.

개혁적이긴 해도 친자본주의적 성격과 참여정부 집권 전력 때문에 결코 진보정당이라고 할 수 없는 국민참여당이 적반하장 격으로 진보정당이 오른쪽으로 오면 통합할 수 있다고 거드름을 피우는 것이다.

그들은 한미 FTA 추진, 이라크 파병, 비정규직 양산 등 집권 시절 과오를 제대로 반성조차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이정희 대표는 이런 당과 비밀 회동을 하고 “과거를 묻지 않겠다”며 공동으로 야권연합에 관한 책을 출판하겠다고 한다. 이것은 명백한 ‘묻지마 계급연합’ 추진이다.

묻지마 계급연합

그래서 유력 대선주자가 있는 참여당과 합당해서 몸집을 키운 다음, 민주당과 장관 자리들을 거래하며 연립정부로 나아가는 것이 이정희 대표와 당권파의 계획이라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진보신당과 통합은 오히려 거추장 스럽게 생각하고 일부 명망가만 데려 오겠다는 계산이라는 것이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강령에서 “사회주의의 이상과 원칙 계승” 구절을 삭제하려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웹사이트 당원토론방에는 “이럴려고 상반기부터 기를 쓰고 유시민 콘서트를 추진하고 그랬는지”, “강령 삭제가 참여당과의 밀월을 위한 액션 아닐까”, “대표의 국회연설을 보노라면 … 밀실에서 야합비슷하게 … 모종의 중대한 협약이 이미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들이 올라오고 있다.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이정희 대표의 행보가 혹시라도 진보대통합 합의문이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부결되길 노리는 것이라면, 진보대통합 불발의 책임을 진보신당 독자파에게 떠넘기고 명망 있는 지도자들을 포함해 진보신당 통합파 일부만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어떤 경우라도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이정희 대표가 진보의 원칙과 단결을 파괴하며 벌이는 ‘연합정치’가 민주노동당 당원은 물론이고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진보정당 지지 대중의 반발과 불신을 낳을 것이라는 점이다.

민주대연합 노선이 진보의 정책과 가치를 후퇴시키고, 진보의 단결을 해칠 것이라는 경고가 현실화되는 것이다.

이정희 대표는 민주노동당 입당 전인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 강금실을 지지한 적이 있다. 이정희 대표는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전략후보로 영입된 후 이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당원으로서 강금실 후보 지지선언을 했다면 문제가 될 수 있겠죠? … 제가 사회적 변호인이다라고 생각했던 일들에서는 민노당 강령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민노당이 추구하고 있는 바를 위해서 일을 해왔다.”

현재 이정희대표의 행보는 이런 약속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사람들에 대한 배신이며 진보정당 정치인으로서 원칙과 기준에 어긋난다.

민주노동당 당권파와 이정희 대표는 민주노동당을 자본주의 국가 운영에 더 적합한 당(이른바 ‘수권정당화’)으로 만들면서 자본가 정당과의 권력 공유를 추진하는 것을 당장 중단해야 한다.

이런 계급연합과 연립정부 노선은 선거에서 득표나 권력 나눠먹기에는 유리할지 모르지만 노동자들의 계급의식을 갉아 먹고, 노동자 단결과 투쟁을 가로막아 결국 진정한 진보와 개혁을 방해할 뿐이기 때문이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야권단일정당이나 야권연대를 추구하는 개혁주의자들은 툭하면 “낡은 진보”를 들먹인다.

물론 진보가 시대적 상황에 걸맞게 새롭게 혁신하는 것은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주로 진보적 원칙을 포기한 사람들이 자신의 후퇴를 정당화하고 진보정치에서 급진성을 제거하려고 할 때 ‘낡은 진보론’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계급’과 ‘대중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낡은 진보”라고 이들은 말한다.

이들의 첫째 근거는 시대가 변했다는 것이다.

진중권은 “현재의 진보가 어떤 면에선 한나라당 뺨칠 정도로 수구적”이라며, “NL은 농경사회의 패러다임이고 PD는 산업사회의 패러다임이다. 사회는 이미 정보사회로 진입”했다고 말한다.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국민국가의 산물인데, 민족해방론이 ‘농경사회 패러다임’이라는 황당한 주장은 일단 제쳐 두자.

△지난해 말 현대차 파업 당시 점거를 해산시키려는 사측과 노동자들의 충돌 이런 것을 보고도 ‘계급 갈등과 모순’을 강조하는 것이 낡았다고 할 텐가. ⓒ사진 이미진



과장과 달리 ‘정보사회’라 불리는 현상의 상당 부분을 떠받치는 것은 여전히 산업 노동자들이다.

스마트폰의 ‘기적’은 위험한 작업 환경에서 일하는 반도체공장 노동자들이, 클릭 한 번으로 집에서 상품을 사고파는 ‘신세계’는 거대 물류 창고를 관리하고 온종일 교통지옥을 오가며 운송ㆍ배달하는 노동자들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계급은 낡지 않았다’

반도체를 만들다가 백혈병으로 죽어간 삼성전자 노동자들과 아이폰을 만들다 연쇄 자살한 중국 폭스콘 노동자들이 ‘정보사회’의 숨겨진 진실인 것이다. 삼성반도체 노동자들의 산업재해와 박정희가 만든 원진레이온 공장의 산업재해의 근본 원인과 저들의 대응 행태도 결코 다르지 않다.

겉모습이 아무리 바뀌어도 여전히 우리 사회의 본질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다.

이런데도 “프로게이머들이 하고 있는 것이 미래 사회 블루칼라의 모습”이라며 “노동운동은 끝났다”는 진중권의 말은 어처구니가 없다.

한편, “디지털 시대”에도 세계 곳곳에서 경기 침체와 물가 폭등, 실업과 빈곤의 문제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각국 정부들은 위기에 처한 자본가ㆍ투기꾼 들을 살리려고 세금을 퍼부으면서 그 때문에 줄어든 정부 재정을 충당하려고 노동자들의 복지와 일자리를 삭감하고 있다. 그래서 계급 간 격차와 불평등은 더욱 커지고 있다.


김규항은 “양극화가 심각하다[는 것은] … ‘계급적 격차가 더욱 커지고 있다’는 말”인데, ‘계급’을 말하면 “80년대 스타일” 취급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적한다.

둘째, 이제 더는 대중투쟁으로 사회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낡은 진보론’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것은 노동자 양보론으로 연결된다.

최근 출범한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본부’의 이상이 상임대표는 지난해 “‘낡은 진보’는 고용주가 건강보험료의 60퍼센트를 부담(현재는 50퍼센트)하고, 정부가 국고로 30퍼센트를 부담(현재는 20퍼센트)하라고 요구한다. … 국민의 건강보험료 추가부담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는다. … [이런 요구는] 지금의 계급 역관계와 정치현실에서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한 바 있다.

복지 재원을 기업과 정부에게 요구하며 투쟁을 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노동자들이 세금을 더 내는 것은 현실적인 ‘새로운 진보’라는 것이다.

‘복지국가 만들기 국민운동본부’는 “[민주당 개혁파와 함께 만들] 복지국가 단일정당[이] … 내년 총선과 대선에서 승리하면 보편적 복지국가 건설은 우리의 현실이 됩니다” 하고 말한다.

싸워서 개혁을 쟁취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표로 집권하면 개혁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두 가지를 함축하는데, 하나는 대중행동보다 선거 득표와 정치엘리트들의 법안 협상을 우선하는 ‘정치’이고, 또 하나는 ‘계급 연합(협력)’이다.[각주:1]

대중행동보다 선거 득표와 정치엘리트들의 법안 협상을 통해 복지국가를 만들 수 있고, 이를 위해 민주당과도 손잡자는 것이다. 

이들은 “운동권 정당”, “낡은 진보”라는 표현으로 좌파들을 거리에서 핏대 선 모습으로 소리나 꽥꽥 지르면서 막상 현실적 변화는 못 이끌어 내는 무능한 집단으로 묘사하곤 한다..

복지국가 단일정당을 지지하는 진보신당 박용진 부대표는 “10년 20년, 진보정치가 집권할 때까지 기다리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너무나 잔인하고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한다.

이는 최근 심상정 전 의원이 ‘정치인은 신념윤리보다 책임윤리를 중시해야 한다’는 막스 베버의 주장을 인용하며 야권연대를 정당화하는 것과 유사하다.[각주:2]

정직하게 밝힌 신념에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실천의 동기가 되는 신념과 실천의 결과에 대한 책임을 분리하는 것은 사실상  해 진보의 원칙[신념]에서 벗어나는 정치 행보를 정당화하려는 것이다.[각주:3]

그러나 김규항의 말처럼 “한국에서 유의미한 정치적 변화는 언제나 의회가 아닌 길거리에서 이뤄졌다.” 즉 대중이 거리에서 직접 정치의 주역으로 변화를 이끌어 내 왔다.

“의회가 아닌 길거리”

1987년 민중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군사독재를 무너뜨릴 수 있었다. 노동자들의 투쟁[각주:4]과 청년들의 반보수 시위들[각주:5]이 있었기 때문에 민주당의 10년 집권도 가능했다. 2008년 촛불항쟁이 있었기 때문에 이명박 정부가 공기업과 의료 민영화 같은 것들을 멋대로 추진할 수 없었다.

따라서 선거를 통해 ‘도로 민주당’ 정부만 만들면 복지 확대 등 엄청난 진보가 가능할 것처럼 과장하며 대중운동 건설을 방기하고 민주당과 계급연합에만 매달리는 것이야말로 ‘무책임’ 정치다. 좌파의 책임정치는 집권을 기다리기만 하지 말고 지금 당장 함께 싸우자고 말하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가 바뀌었다”며 정치적 후퇴를 정당화하는 개혁주의자들은 많았다. 1백 년 전 독일의 사회민주주의자였던 베른슈타인도 그런 예다.

그는 ‘세상이 바뀌어서’ 마르크스가 말한 경쟁과 주기적 경제 위기라는 자본주의의 모순은 사라졌고 자본주의를 점진적으로 개혁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10여 년 뒤 자본주의의 모순은 야만적인 세계 전쟁을 불러 왔다. 그를 지지했던 사회민주당 의원들은 전쟁에 찬성표를 던졌다.

오늘날에도 프랑스 사회당의 개혁주의자들은 사르코지만 몰아내면 된다며 신자유주의 전도사 IMF 총재 스트로스 칸을 대선 주자로 내세우다가 곤경에 처했다. “낡은 이념”을 버리고 추구한 실용주의가 낳은 결과다.

반대로, 올해 초 시작된 아랍 지역의 민중 혁명은 계급, 대중투쟁, 혁명, 제국주의 등이 여전히 생생한 현실임을 보여 줬다.


낡은 것은 우경화된 개혁주의 전략[각주:6]이고, 계급투쟁이야말로 현실이다.


※ 이 글은 축약돼 <레프트21>57호에 실렸습니다. ☞ 기사 보기
  1. 이것이 최근 후마니타스 출판사에서 나온 ‘정치가 우선한다’나 ‘정치의 발견’ 등을 교본 삼아 유시민, 심상정, 박용진, 최병천 등이 강조하는 “정치의 우선성”이다. [본문으로]
  2. 유시민도 최근에 낸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최장집 교수와 그의 제자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최근 막스 베버가 쓴 ‘소명으로서의 정치’를 열심히 소개하고 있다. [본문으로]
  4. 정리해고법과 안기부법 등의 날치기에 맞선1997년 1월 대중파업은 당시 신한국당(한나라당 전신) 김영삼 정권을 그로기 상태로 몰아넣었다. 이후 김대중 정부 들어서도 인력 감축과 기업 합병 등에 맞선 투쟁이 줄기차게 이어졌다. IMF의 구제금융 조건을 재협상하라는 요구도 컸다. 이것은 더 친사용자적이고 IMF에 더 친화적인 정당인 한나라당 집권에 반대하는 정서의 형성에 기여했다. 노무현은 여기에 바탕해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 주는 대통령이 되겠다” “반미가 대수냐”는 발언을 할 수 있었고 청년들의 인기를 끌 수 있었다. [본문으로]
  5. 1997년 민주노총의 1월 파업이 남긴 여파가 지속되는 가운데, 학생운동은 김영삼 대선자금 비리를 폭로하며 5월에 서울에서 대규모 시위를 매일 벌였다. 상당한 지지를 받은 이 투쟁은 비록 학생들의 도덕적·정치적 오류로 사그라들었지만, 이 투쟁이 제기한 파장은 연말 대선에 영향을 미쳤다. 1990년대 말 안티조선 운동과 2002년 여중생 사망 항의 촛불운동, 2004년 탄핵 반대 촛불시위 등. [본문으로]
  6. 사실상 사회적 자유주의(제3의 길)와 구분하기 힘든 우파 사회민주주의를 가리킨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을 위한 진보진영 대표자 연석회의’(이하 연석회의) 5 6 3차 합의문을 발표했다.

이 합의문에는 새로운 진보정당이 추구할 가치와 정책과제 20개가 담겼다. 주로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해 ‘민영화 반대’와 ‘보편적 복지’ 등 진보적 요구를 담고 있는데, 진보적 사회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면 흔쾌히 지지할 만한 내용들이다.

그런데 합의문 원안에 있던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함으로써”라는 문구가 최종 논의 과정에서 삭제됐다.

복지국가와 진보대통합을 위한 시민회의(이하 시민회의)’의 삭제 요구를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와 조승수 진보신당 대표 등이 수용한 것이다.

시민회의는 이 회의에서 “자본주의 극복”을 빼고 “자본주의 폐해 극복”을 넣자고 했다고 한다.

시민회의는 국민참여당을 진보진영 연석회의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자본주의 극복” 문구가 보수 언론에 이용될 수 있다는 걱정도 했다고 한다.

결국 시민회의는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 참가에 부담스러워 할 ‘너무 센’ 문구를 삭제하자고 한 듯하다. 명백히 오른쪽의 눈치를 보는 것이다[각주:1].

이처럼 개혁적이지만 친자본주의적 한계가 있는 정당[각주:2]까지 통합의 대상으로 삼으며 “자본주의 극복” 문구를 합의문에서 삭제한 것은 명백한 후퇴다.

물론 새로운 진보정당이 폭넓은 단결을 목표하기 때문에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접근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고 중요한 진보적 가치가 훼손돼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 극복’ 문구 삭제는 부적절하고 불필요한 후퇴다


첫째, 상징적인 의미에서 후퇴다.

궁극적으로 자본주의를 극복” 문구는 연석회의 참가 단체들의 집행 책임자 회의에서 ‘다수안’으로 채택된 것이며, 이 잠정합의안은 이미 공개된 바 있다.

이 문구가 다수안이 됐던 것은 이미 기존 진보정당들이 이미 ‘자본주의 극복’을 기존 강령에 상징적으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사회주의적 이상과 원칙을 계승 발전”을, 진보신당은 “자본의 지배 자체를 극복”해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둘째,반자본주의’[각주:3]라는 시대적 과제에도 안 맞다.

현재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가 심각해 지면서 도처에서 민중의 삶이 위협받고 있다.

각국 지배자들이 자본주의를 위기에서 구출하려는 시도는 경제 위기에 책임이 있는 기업주들을 살리는 대신 세계적 물가인상과 복지 삭감, 실업 증가와 대중의 소득 축소를 낳고 있다.

자본주의적 경쟁이 불러 온 전쟁과 핵 공포, 기후 변화의 위협은 또 어떤가.

이런 위기를 배경으로 중동에선 친제국주의적이며 신자유주의를 추구한 독재 정권을 타도하는 민중 혁명이 터져 나왔다.

이처럼 반자본주의적 지향이 더더욱 중요해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삭제한 것은 후퇴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기의 시대에 이번 3차 합의문에 포함된 “토지 사회화”, ”보편적 복지” 등을 실현하려면 다소간 모호하더라도 모종의 반자본주의 목표와 수단을 진보진영이 채택해야 한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3차 합의문에서 추상적이나마 반자본주의 가치 지향을 담은 표현이 사라진 것이다.

이런 진보진영 연석회의 3차 합의문 채택 과정은 진보대통합을 민주대연합의 부속물로 여기는 노선이 진보대통합을 우경화로 이끌어갈 위험성을 보여 줬다.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등 연석회의에 참여하는 진보진영 지도자들 다수가 실제로는 ‘포괄적인 야권 연대와 연립 정부’를 반대하지 않기 때문에 급진적 가치를 문서화하는 데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올초 민주노동당의 사회주의 강령 삭제 시도 등도 같은 맥락이다.

그 점에서 연석회의에 참여한 진보교연, 사회진보연대(참관) 등 좌파들에게도 아쉬움이 생긴다.

시민회의가 제시한 “자본주의 극복” 대신 “자본주의 폐해 극복”을 넣자는 안이 다수의 지지를 받자, 좌파들은 “자본주의 폐해 극복”은 자본주의를 인정하는 것이므로 안 넣으니만 못하다는 생각을 한 듯하다. 그래서 둘 다 빼고 “새로운 대안사회”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자본주의 극복”을 유지하도록 일관되게 주장하고 설득하는 것이 첫째로 필요했을 것이고, 그것이 힘든 상황에서는 “자본주의 폐해 극복”이라도 반영되도록 하는 게 더 적절했다고 본다.

대안사회라는 표현은 너무 모호해 지칭하는 바가 없다. “자본주의 폐해 극복”이 원안에서 후퇴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어쨌든 반자본주의 지향을 담은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연석회의 안의 좌파는 필요한 논쟁은 회피하고, 타협해도 될 문제는 과도하게 대응한 듯하다.

지금 3차 합의문을 두고 연석회의 참가 단체 중 사회당만 4차 합의문 작성 과정에서 “자본주의 극복” 문구 문제를 재논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종합의문에서 또다시 불필요한 후퇴가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시대의 요구’인 반자본주의 가치가 반영돼야 한다.

그러려면 연석회의는 다함께 같은 급진좌파들의 참가를 가로막지 말고, 논의를 개방해야 한다.


한편, 이번 3차 합의문은 진보신당과 사회당 등의 요구대로 북한의 핵개발과 3대 세습, 2012년 대선 방침, 패권주의 등 민주적 당 운영 등 핵심 이견들을 구체적으로 명시하고 이를 5월까지 해소하도록 노력한다고 표현했다.

애초 3차 합의문이 4월까지 합의해 3차 대표자회의에서 발표할 계획이었는데, 5 4차 대표자회의로 넘어온 것은 연석회의를 주도하는 세력들이이 쟁점 사항을 표기하자는 의견을 패권적으로 묵살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연석회의 주도 세력은 사회당 울산시당이 4·27 재보선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이갑용 후보를 지지한 것을 문제삼기도 했는데, 연석회의가 야권연대를 합의한 바도 없는데, 왜 민주당과 연합한 민주노동당 후보는 지지해도 되고, 독자 출마한 진보 후보는 지지할 수 없다는 것인가.

좌파들은 진보대통합 논의가 민주대연합 노선의 부속물이 되지 않도록 적극 참여하고 개입해야 한다.


  1. 시민회의는 자본주의 극복이 대통합의 문턱을 높일 수 있다고 했다는데, 이들에겐 오른쪽 문턱만 걱정인 듯하다. [본문으로]
  2. 최근 국민참여당은 민주당의 한EU FTA 합의를 규탄하는 농성에 참여했는데, 농성에 참가한 최고위원 유성찬은 쇄국주의에 반대하며 통상국가를 지지한다며 원칙적으로는 FTA에 찬성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진보대통합 3차 합의문은 한미·한EU FTA에 반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본문으로]
  3. 여기서 반자본주의란 혁명적 반자본주의부터 생태주의와 급진개혁주의 등 개혁적 반자본주의를 포괄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민주노총은 올해 메이데이에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를 선언할 예정이다.

△1997년 1월 대중파업으로 정리해고법과 반민주 악법들을 철회시킨 민주노총 노동자들은 한동안 한국 정치의 주역이었다. 이 때 얻은 정치적 자신감과 교훈이 노동자 정치세력화로 이어졌다.

민주노총이 발행한 “2011년 정세와 투쟁” 교안은 이 과제의 중요성을 이렇게 설명한다.

“노동조합이 단위사업장의 근로조건 개선 등 경제투쟁을 뛰어넘는 … 전체 노동자계급의 이해와 요구를 관철해 나가는 정치적 투쟁으로 나아가지 못하면 자신만의 고용에만 안주하고, 통장에 남은 잔고만 바라보는 신세를 벗어나기 어렵다.”

노동자들이 바라는 사회의 진보적 변화를 위해서는 노동계급의 정당을 통해서 정치권력을 획득하는 운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가 정당에 의존해서는 노동자들의 삶을 개선하기 힘들다는 깨달음은 진작부터 있어 왔다. 그 가운데 대중적으로 성공한 첫째 시도가 2000년에 민주노동당을 창당한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은 한때 선거에서 주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며 약진하기도 했지만, 2007년  대통령 선거에서 저조한 성적을 거두고 분열했다.

다수의 현장 조합원들은 진보정당이 단결해 세력을 키워서 노동자 투쟁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민주노총의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가 ‘진보대통합’을 뜻하게 된 이유다.

이 점에서 일부 급진좌파들처럼 진보대연합을 지지하지 않거나 냉소적인 것은 잘못이다.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왜 난관에 부딪쳤는가

민주노동당은 2004년 4월 총선 때 노무현 탄핵 반대 투쟁의 열기 속에서 의원 열 명을 당선시키며 약진했다.

2004년은 파병반대 운동, 비정규직 투쟁,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등 대중운동이 활발한 시기였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이런 투쟁들을 확대ㆍ발전시키는 데 주력하기보다는 의회 안에서 열린우리당과의 공조에 더 매달렸다. 자주파와 평등파 지도자들 모두 이러한 방침을 추구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는 아예 우경화해 2005년에 한나라당에 대연정을 제안하고 2006년에 한미FTA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양극화는 심화했고, 비정규직은 늘어만 갔다.

문제는 이에 맞서 투쟁과 대안을 건설해야 할 일부 노조 지도자들이 투쟁을 회피하려고 비정규직 투쟁 등 단결된 투쟁을 외면한 것이다. 심지어 일부는 비리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그런데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은 (대체로 정파를 가리지 않고) 이런 노조 지도자들을 비판하며 투쟁을 호소하는 대신 침묵했다. 게다가 “정규직 이기주의론”에 굴복하는 사회연대전략 같은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각주:1]

그것은 오히려 진보진영과 노동운동을 모두 겨냥한 우파의 공세에 힘을 실어줄 뿐이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의 개혁 배신과 우경화에 실망해 왼쪽으로 이탈한 대중을 민주노동당은 흡수하지 못했고 민주노총의 선진 조합원들에게는 실망을 안겨줬다.

진보정치의 위기에는 주요 지도자들의 온건한 개혁주의 전략이 크게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집권당을 대체할 대안으로 부상하지 못한 상황에서 대중의 환멸을 기회 삼아 이명박 같은 우파가 권력을 잡을 수 있었다. 

그런데 심상정 전 의원 등은 ‘민주노총당’, ‘데모당’이 문제라며 민주노동당을 더 온건화시켜 이 상황에 대처하려 했다.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는 당원을 제명시키려고도 했다. 원인과 해법이 어긋났기 때문에 이런 시도는 대가를 치렀다.

다함께 등의 좌파가 이 잘못된 시도에 맞섰지만, 끝내 민주노동당은 분열했다. 분열의 결과로 진보 양당이 모두 약화됐고 어느 정도 더 온건해졌다.

그래서 현장 조합원 다수가 진보진영의 단결을 바라지만, 한편에선 불신도 있다. 현대자동차 정동석 조합원은 “울산 북구에서 국회의원, 구청장을 노동자들이 계속 밀어줬는데, 노동자의 삶은 크게 달라진 게 없다. 그래서 진보대통합에 기대감은 있지만 열정적이진 않다”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따라서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는 대중적 정치투쟁 방식으로 단결을 추구해야 노동자들의 사기와 신
뢰를 높여 이명박 정부의 경제 위기 고통전가 정책에 브레이크를 거는 대안이 될 수 있다.



반MB 범야권 연대를 어떻게 볼 것인가

이명박 정부 아래서 벌어진 부자 감세, 기업 특혜, 임금 삭감과 고용 불안, 물가와 전월세 폭등, 노동운동 탄압 등 때문에 수많은 노동 대중이 고통받고 분노하며 싸우고 싶어 한다. 이명박 정부에 반대한다는 뜻에서 이들의 ‘반MB’는 기본으로 ‘반정부’를 뜻한다.[각주:2]

문제는 이것이 민주당까지 포함하는 ‘반MB’ 민주연합(범야권연대)이 필요하다는 주장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노회찬 진보신당 전 대표 등은 진보대연합 이후에 민주당과 선거연합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심상정 전 대표는 나아가 민주당과의 연립정부까지 얘기한다.[각주:3]

그런데 현 정부에 반대하는 것이 꼭 민주대연합이어야 할까? 그것은 ‘반자본주의’를 위해 ‘반MB(반정부)’를 기각하자는 급진좌파 일부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논리 비약이이다. 둘은 같지 않지만, 대립된 목표가 아니며 결합될 수 있다.

그 점에서 반MB 정서는 모순적이다. 그것이 대체로 거대 야당인 민주당이 아니라 민주대연합 지지로 표현된다는 점에서 그 이면에는 민주당을 향한 불신이 배어 있기도 하다.
민주당의 오른쪽이 아니라 왼쪽에 있는 진보정당들과 연합하는 것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그 정서는 왼쪽으로 향하는 점도 있다. 그 점에서 정치인들의 민주대연합 노선과 대중의 정서를 구별해서 봐야 한다.

그래서 허영구 민주노총 전 부위원장처럼 ‘반MB’를 단순히 ‘민주당 지지 정서’로 낮춰 보면 올바른 전략·전술을 내놓기 어렵다. 일부 급진좌파처럼 외부에서 기존 진보정당들을 비난하기만 하면, 아직 좌파를 지지하진 않지만 이명박 정부와 맞서 싸울 의지가 있으며 왼쪽으로 향하는 대중을 오히려 민주대연합 노선에 내맡기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그래서 진보의 단결이 필요하고, 특히 단결된 대중투쟁이 중요하다. 1997년 1월 노동법·안기부법 철회 파업 때처럼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강력한 힘을 발휘하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최근 청소 노동자 투쟁이나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쌍용차·한진중공업 등 정규직 파업 등은 전투적 투쟁 자체가 옛날 얘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 줬다. 열쇠는 지도부가 민주노총 차원에서 전(全) 계급적인 연대 투쟁과 파업을 제대로 조직하는 것이다. .


문제는 친자본주의 정당인 민주당과 연합을 하려 하면 할수록 이명박에 맞선 투쟁을 건설하는 데 제약이 생긴다는 것이다. 

자본가 정당인 민주당과 연합해 진보 개혁을 이룬다는 노선은 자본가들과 타협해 개혁을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의 반영인데,
지금처럼 경제 위기 상황에선 자본가들도 이윤과 지배력을 보존하려고 매우 거칠고 무자비하게 나온다.

그래서 단호한 투쟁과 반자본주의 대안이 필요할 때, 진보정당과 노동운동은 요구와 강령을 낮추고 투쟁을 자제해야 하는 모순에 처하게 된다.[각주:4] 그것이 비록 단기적으로는 선거에서 성과를 줄 수 있겠지만 중장기적으로 노동자 정치세력화, 즉 계급정치의 잠재력을 갉아 먹게 된다.[각주:5] 


예컨대, 전북 버스 노동자 투쟁에서는 민주당이 지역 자본가들 편을 들고 있는데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민주당을 날세워 비판하지 못하고 있다. KEC나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때 민주당과 진보정당 의원들이 함께한 의원 중재단이 투쟁을 자제시키는 구실을 했다.[각주:6] 

이런 상황에서 국민참여당이 진보대통합연석회의에 참가하겠다고 해 논의가 이뤄지고 있다.

“촛불을 통해서 정치사회에 새롭게 뛰어든 시민들”(이학영)인 국민참여당 당원들을 외면하지 말아야 한다는 일각의 주장은 일리가 있다. 국민참여당이 실시한 1월 초 온라인 조사에서 당원 67퍼센트가 자신을 ‘대체로 진보’라고 했고, 75퍼센트는 ‘보편적 복지’를 선호하는 복지 이념으로 골랐다.

그럼에도 그 당의 강령과 핵심 지도자들의 정치가 친자본주의적 자유주의라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대체로 ‘제3의 길’ 정치를 추구한다.


그래서 이 당을 진보대통합에 포함시키기보다는 실천 속에서 이 당의 한계와 불철저함을 진보적 대중 앞에서 드러내 보여야 한다. 그리고 진보대연합을 건설해 국민참여당에 호감을 갖는 진보적 대중을 끌어당겨야 한다.


북한을 대하는 태도와 패권주의 문제

‘종북주의’와 패권주의 문제도 진보대통합의 주요 쟁점이다.

민주노총 김영훈 위원장은 ‘종북주의’ 비판은 색깔론과 유사하며, 단결을 하려면 공통점을 앞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종북주의’ 용어는 마녀사냥 느낌을 주는 잘못된 용어다. 동아시아 군사적 긴장의 주범인 미국 제국주의보다 북한을 주되게 비판ㆍ반대하는 것도 균형 잡힌 태도가 아니다. 또 북한 지배자와 남한 노동자ㆍ민중 운동의 일부인 자주파 동지들은 구분해야 한다.

그러나 진정한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핵에 철저하게 반대해야 하는 진보의 원칙에서 볼 때, 북한 정권의 3대 세습이나 핵개발을 지지할 수는 없는 일이다. 북한 체제에 반대한다고 남한 체제를 지지해서는 안 되지만, 남한과 똑같이 억압적 착취체제인 북한을 대안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이처럼 북한을 바라보는 견해 차이와 연립정부에 대한 찬반 등을 어물쩍 덮으며 민주노총 지도부가 세몰이 식으로 통합을 밀어붙이는 것은 패권적 태도일 것이다.

민주노동당 자주파 지도자들은 패권주의를 반성한다고 말하지만 ‘묻지마 야권연대’ 추진 과정에서 당내 절차와 비판 의견은 패권적으로 묵살해 왔다. 그 점에서 오히려 진보대통합의 진정성을 의심받기도 한다.

그렇다고 이런 견해 차이와 문제점들을 이유로 민주노동당 자주파와 연합하는 것 자체를 사실상 반대하는 진보신당 독자파 등의 태도도 적절하지는 않다. 급진좌파 일부처럼 진보대연합이 민주대연합의 사전단계라고 선험적으로 단정해 버리는 것도 지도부의 노선만 보고는 대중의 염원을 무시하는 처사다.

그래서 다함께와 <레프트21>은 진보대통합이란 이름으로 단일 정당 방식을 고집하지 말고 공동전선 방식의 진보대연합을 하자고 주장해 왔다.

그것은 각 정파가 독립성과 비판의 자유를 유지하면서,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행동강령 십수 개를 중심으로 단결해 대중투쟁과 선거 대안을 함께 추구하는 것이다. 자주파와 평등파의 정치ㆍ문화적 차이와 오랜 갈등의 뿌리를 볼 때 이것이 가장 효과적인 단결 방식일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급진좌파는 “제2의 노동자 정치세력화”와 진보대연합이 선거공학으로 기울어 민주대연합의 부속물이 되지 않고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개입해야 한다. 그것이 대중의 염원에 부응하면서도 진보운동의 좌파적 성장을 도모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 이 글은 축약해 <레프트21> 55호(발행 4.23/온라인 입력 4.21)에 실렸습니다. 바로 가기


  1. 이 전략은 상대적으로 평등파 지도자들이 더 적극적이었다. 이때부터 진보정치는 대중투쟁 대신 기업주들과 그들을 대표하는 다수당 그리고 국가기구와 벌이는 정치협상을 주요 목표이자 수단으로 의식적으로 추구하기 시작햇다. [본문으로]
  2. 이 반정부 정서는 이명박 정부의 시장주의에 바탕한 반노동계급적 성격 때문에 반신자유주의·반자본주의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본문으로]
  3. 진보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을 위한 대표자 연석회의에 참여한 진보대통합 시민회의나 최근 모임을 만든 ‘진보의 합창’도 통합진보정당이 범야권연대나 연립정부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한다. [본문으로]
  4. 그 점에서 복지국가 강령으로 민주당과도 연합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복지국가단일정당론’은 (진지하게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전제에서) 공상에 가까운 목표다. [본문으로]
  5. 만일 민주당의 양보로 민주노동당이 선거에서 성과를 얻게 된다면, 그 성과를 유지하려는 관성과 이 정책을 추진한 사람들이 스스로 옳았다는 판단 때문에 민주노동당의 활동 폭은 더욱 제약을 받게 될 것이다. 즉, 민주당에 정치적으로 더 종속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물론 개혁주의 정당으로서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의 변신 가능성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본문으로]
  6. 민주당은 최근에도 부자 감세의 하나인 취득세 인하에 합의했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직업안정법개악에 한나라당과 합의했는데, 민주대연합에 적극적인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이를 비판하지 않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갑용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 출마했다. 민주노동당 김종훈 후보가 사실상 야권 단일후보로 결정된 직후다.

이갑용 후보는 비정규직을 늘리고 노동 탄압을 일삼은 민주당과 진보 양당이 연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묻지마’ 야권연대에 기울어 있는 민주노동당 지도자들이 새겨 들어야 할 비판이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은 4·27 울산 재보선에서 민주당·국민참여당과 선거연대를 했다. 야4당연대가 한나라당 세력이 강한 울산에서 당선 가능성은 높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정당들이 민주당보다 훨씬 크고 강한 곳에서 진보진영의 단일화로 대안적 연합을 하는 것이 진보정치의 발전에는 더큰 도움이 됐을 것이다.



〈민중의 소리〉는 이 점이 못마땅했는지 이갑용 후보가 ‘고춧가루 뿌리며 한나라당 도와주러 나왔다’는 식으로 비난 기사를 내보냈다가 사실 관계 정정 보도를 하기도 했다. 민주당과의 선거연합만을 최우선의 가치로 두고 그의 출마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진보언론이라는 곳이 할 ‘소리’가 아니다.

민주노총도 실수했다. 민주노총 중앙은 조합원이더라도 진보정당 소속이어야 지지할 수 있다는 정치 방침을 근거로 이갑용 후보를 민주노총 지지 후보로 선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갑용 후보는 현재 민주노총 지도위원이며 노무현 정부의 공무원노조 징계 요구를 거부하다 구청장 직을 박탈당한 바 있다. 그런데 진보정당 소속이 아니라는 형식적인 이유로 지지 후보 선정에서 배제하는 것은 군색해 보인다.[각주:1]


진보진영의 단결

물론 이미 울산 진보진영 다수의 지지를 받는 민주노동당 후보가 있기 때문에 곤란했을 수 있다. 그 점에서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할 일은 두 진보 후보의 단일화를 중재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지금은 민주노총 울산본부가 단일화 중재에 나서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민주노동당 김종훈 후보를 유일한 민주노총 지지 후보로 공표했기 때문에 단일화 촉구는 이갑용 후보에게 사퇴하라는 뜻으로 비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노동당 울산시당과 김종훈 선본이 나서야 하는데, 이들은 야권연대와는 달리 별 열의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서 경쟁적인 노동계 지지 선언으로 세 과시에만 치중하는 것은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의 진보대통합 진정성에 의문을 갖게 만든다.



한편, 이갑용 후보가 출마 이후 한나라당 비판보다 민주대연합을 이유로 민주노동당과 민주노총 비판에 더 비중을 두는 것은 아쉽다. 누가 진정한 적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듯한 태도는 분별 있어 보이지 않는다.

민주당이 못 믿을 자본가 정당인 것은 맞지만, 지금 울산 동구에서 야권 단일 후보는 민주노동당 후보이고, 이 선본이 민주당 때문에 불필요한 타협을 하거나 실책을 한 것은 아직까지 없어 보인다[각주:2].

울산 동구는 정몽준의 정치적 근거지이므로 정몽준의 노동탄압과 재벌 정치를 폭로하면서 민주대연합보다 노동자진보정치가 더 효과적으로 이에 맞설 수 있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가장 좋은 것은 울산처럼 진보정당들의 세력이 강한 곳에서 진보진영이 단결해 한나라당에 맞서며 민주당과 다른 진보적 반MB의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사실 두 후보의 기본적인 강령과 공약, 선거운동 방식이 단일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른 것도 아니다.

더 유력한 후보인 민주노동당 후보가 먼저 이갑용 후보의 민주대연합 비판에 귀를 열어야 이런 과정이 가능할 것이다. 양측 모두 
이번 선거에서 진보 후보에게 투표하고, 이후 이명박에 맞선 투쟁에 단결해 나서려던 노동자들이 두 후보의 경쟁을 보면서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결론: 단일화하면 좋겠지만, 안 되고 두 후보가 각자 나오면 둘 중 누구라도 선진노동자의 투표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투쟁에서의 단결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노총 울산본부 등이 방침으로 특정 후보 지지를 결정하는 것은 단결에 이롭지 않을 것이다. 





※ 이 글은 <레프트21> 54호에 축약돼 실렸습니다. ☞ 기사 보기

... 한편, 울산 동구청장 선거에는 진보 후보가 두 명 출마했다(민주당과 후보단일화를 통해 출마한 민주노동당의 김종훈 후보와 무소속으로 출마한 이갑용 후보). 

여기서 이갑용 후보가 민주당과의 선거연합을 비판하는 것은 정당하다. 하지만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민주노동당 후보로 단일화된 상황에서도 김종훈 후보를 진보 후보로 인정할 수 없다는 이갑용 후보의 주장은 공감하기 어렵다. 

사실, 김종훈 후보를 당선시켜 한나라당을 내쫓고 싶은 노동자들의 심정도, 민주대연합에 대한 반감 때문에 이갑용 후보를 지지하겠다는 노동자들의 심정도 모두 공감할 만한 것이다. 

두 후보가 단일화를 했다면 진보가 단결해 한나라당을 패퇴시키길 바라는 노동자들의 곤혹스러움을 덜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단일화가 안 된 상황에서는 두 후보 중 어느 한쪽에도 투표할 수 있다고 본다. 두 후보 모두 경력과 공약에서 진보 후보로서 큰 손색이 없기 때문이다. 

한쪽을 선택하라고 강요함으로써 선거라는 부차적 문제에서 진보가 굳이 분열할 이유는 없다. 중요한 것은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맞선 투쟁 속에서 단결하는 것이다.

― <레프트21> 55호 ‘4·27 재보궐선거 이명박과 한나라당에 참패를!’ 중에서.




  1. 이 조항은 민주노총 조합원의 보수 정당 후보 출마를 막으려는 조항으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이 방침은 민주노동당이 진보진영의 대표 정당이던 2005년에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기준에 따라서 충분히 좌파적이지 않을 수는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국회의원도 아닌 구청장 선거 공약이 대단한 내용을 담긴 힘들다. 그 점에서 이 선거의 정치적 의미를 노동자정치의 관점에서 부각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정권과 재벌의 양극화 확대 정책, 울산 동구의 노동탄압에 맞서 싸우는 후보이자, 그런 투쟁을 지지·지원하는 선거운동과 구정 운영을 강조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민주노동당은 4월 3일 중앙위원회를 열어 진보정치 대통합 방안을 결정했다. 핵심 쟁점은 범야권연합 문제와 북한에 대한 태도 문제였다.

최종 의결된 문안은 “민주당을 밀어주는 ‘묻지마 야권연대’도 안 되고, 반MB한나라당이라는 국민적 요구를 무시하는 범야권연대 원천 부정도 곤란하다”와 “6.15 남북공동선언 정신에 따라 정세와 사실을 고려하여 북을 비판할 수도, 지지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3월 27일 진보신당 당대회 결정에 대한 응답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진보신당은 당대회에서 “북한의 핵 개발 문제, 3대 세습에 반대”하고 “민주당 및 국참당을 비롯한 신자유주의 정치세력과의 ‘연립정부론’은 … 진보정당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아니다” 하고 결정한 바 있다.

진보신당 당대회 후 언론들은 “진보대통합이 ‘안갯속으로’ 들어가고 있다”(<경향신문>), “빨간불”(<한겨레>)이라고 보도했다. 진보신당의 독자파가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을 결정해서 사실상 진보대통합을 거부했다고 분석한 것이다.

물론 진보신당 독자파가 사실상 민주노동당과 통합을 거부했다고 볼 수 있지만(그것은 안타까운 일이고 지나치다고 보지만), 북한 문제와 연립정부 관련한 진보신당 당대회 결정 자체는 문제 삼기 어려운 점이 있다.

△3월 27일 진보신당 당대회는 진보대통합의 쟁점을 날카롭게 드러냈다. 진보신당의 분열 위기는 역설적으로 공동전선 방식의 진보대연합이 더 단결에 효과적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줬다.


진보정당이라면 마땅히 진정한 민주주의를 추구하고 핵무기와 핵 자체에 반대해야 한다는 점에서 볼 때, 북한의 핵 개발과 3대 세습에 반대하는 입장을 문제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주파에 대한 ‘종북’ 마녀사냥에 동조하거나 남한 체제에 대한 지지로 나아가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진보정당의 존재 이유가 노동계급의 독립적인 정치 대안을 제시하려는 것에 있다는 점에서 볼 때, 자본가 정당과의 연립정부를 거부하는 태도도 올바른 것이다.

진보대통합을 위해서 이런 정치적 입장을 후퇴시키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번 진보신당 당대회의 ‘강경한’ 결정은, (독자파가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라는 점에서도) 독자파의 정치적 플랜보다는 진보 양당 지도부의 행보가 더 영향을 미친 듯 보인다.(그들의 책임이 더 크다는 뜻)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지난해 6ㆍ2 지방선거 이후로 모든 선거에서 ‘묻지마 야권연대’를 추진해 왔다. 이정희 대표는 민주당과 ‘연립정부’ 구상을 암시하는 발언을 거듭해 왔다.

그래서 전북 전주에서 넉 달째 버스 노동자들이 민주당 소속의 도지사와 시장의 탄압에 맞서 싸우는데도, 민주노동당 중앙당은 민주당에게 단 한마디도 쓴소리를 하지 않았다.

또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북한의 3대 세습에 관해 “북한의 문제는 북한이 결정할 문제”(9.29 대변인 논평)라고만 언급해 실망을 줬다.


진보의 재구성

진보신당 독자파는 이와 같은 민주노동당 지도부에 대한 정당한 우려에 기반해 당대회에서 다수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진보대통합이 민주대연합의 사전 단계가 아니냐는 의구심도 크다. 

여기에 심상정 전 대표 등 진보신당의 유력 정치인들이 진보운동의 대의와 당원들의 뜻을 어기고 무원칙한 연합정치를 주장하고 비민주적으로 이를 추진하기도 한 것이 반감을 불러 일으키며 독자파의 입김이 커지는 것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배경을 감안해도 진보신당 독자파가 민주노동당 지도부를 핑계로 진보적 대중의 단결 염원마저 외면하는 것은 문제다.

일부는 민주노동당이 더는 진보정당이 아닌 것처럼 주장해 사실상 진보대연합 자체를 반대하는 듯 보인다. 진보신당 정책위 의장은 최근 한 공개토론회에서 민주노동당과의 연합을 “반동 연합”이라고 부른 바 있다. (이런 점에 비춰, ‘독자파’란 호칭은 사실상 민주노동당에 대한 독자파라는 뜻이라고 본다.)


그러나 진심으로 좌파적 의도에서 민주노동당/진보대연합의 우경화를 우려한다면, 진보대연합을 지지하면서 그 속에서 진보대연합이 민주대연합의 사전 단계로 변질되지 못하도록 막는 게 올바른 길이다.

사실 진보신당 독자파 리더들은 “진보의 재구성은 일단 실패”했다는 조승수 대표의 솔직한 고백을 인정해야 한다. ‘종북주의’ 반대만으로 차별화된 실천을 만들 순 없다.

이들은 명망가 중심 정치와 민주노동당 시절 추진했던 사회연대전략(노동자 양보론)을 이어갔지만, 그런 온건 노선으로는 경제 위기 속에서 뚜렷한 대안도, 진보의 재구성도 이룰 수 없었다. 당내 민주주의도 후퇴했다(그것이 지금의 위기를 불러 왔다).

진보신당 독자파는 당대회에서 “2011년 9월 전후 시기까지 …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합의하는 세력들과 함께 새로운 진보정당을 건설”한다는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수용하기 힘든 기준을 제시해 통합 거부의 책임을 민주노동당에게 떠넘기고 사회당 등과 소통합으로 정치적 생존의 길을 모색하겠다는 의도인 듯하다[각주:1]. 그러나 앞의 내 분석에 따르면 당대회로 모아진 여론이 당을 쪼개는 것까지 지지하는 쪽으로 가진 않을 것이다[각주:2].

이런 상황에서 3월 29일 진보대통합연석회의에 참여한 대표자들의 합의문이 문구 그대로 “아래로부터의 ‘진보정치대통합과 새로운 진보정당 건설’ 운동”을 불러일으키긴 힘들어 보인다.

진보 양당이 공통점도 많지만, 쉽게 합의하기 힘든 차이가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3년 가까이 독자 정당으로 존재하면서 그 차이는 더 분명해졌다. 이 때문에 <레프트21>과 다함께는 단일 정당 방식이 아니라 공동전선 방식의 진보대연합을 주장해 온 것이다.

각 정치세력의 독자적 선전ㆍ비판ㆍ조직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면서 임금 인상, 복지 확대 등 구체적인 10~20개의 행동 강령을 중심으로 공동전선 방식의 단결체를 만들어 단결하고 투쟁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선거 대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대중투쟁 건설을 중심 과제로 해야 선거주의적 양보와 후퇴 압력에도 덜 취약할 것이고, 단결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진보신당 내 논쟁도 그렇고, 진보대통합이든 새로운 진보신당이든 모두 이 과제가 빠져 있다. 그래서 선거공학으로만 자꾸 흐르게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연립정부에 대한 반대 입장을 후퇴시키며 연합하라는 잘못도, 북한에 대한 입장 차이 때문에 연합하지 말아야 한다는 잘못도 피할 수 있다.


※ 이 글은 <레프트21>54호에 축약해 실렸습니다. ☞ 기사 보기
※ 이 글을 보충 설명할 이전의 글 ☞ 진보대통합 논쟁 / 진보신당의 실패와 위기   

  1. 그 점에서 진보신당의 분열 위기는 현실적이다. 통합파도 운신의폭이 좁아졌기 때문이다. 당장 새로운진보정당건설추진위원장 임명 건이 첨예한 쟁점이 될 것이다. 나는 조승수 대표가 노회찬 전 대표를 임명할 것으로 예상했는데, 논란 끝에 전국위원회에서 통과될 것으로 본다. 부결은 사실상 결별을 뜻하는데,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독자파가 지금 이를 결행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이다. 노회찬 전 대표 등 지도자들도 당이 최대한 현재 규모로 통합에 임해야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들을 아우르는 태도로 인준을 요청할 것이다. 안건 반려 시도가 있을 듯한데, 현 지도부의 지도력 타격과 통합에 대한 거부를 표출한다는 점에서는 결과가 같다. 아마 독자파가 분열할 것이다. [본문으로]
  2. 그 점에서 독자파의 정파 리더들도 부담이 클 것이다. 조승수 대표 등 통합파가 노회찬 전 대표 임명이라는 강수를 둔 것은 이를 고려해 당 대회 패배를 만회하려 한 반격이라고 본다. 만일, 내 예측과 달리 노회찬 인준 건이 반려되거나, 부결된다면 진보신당은 급속히 분당 위기로 치달을 것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명박은 원전 수출 협상을 위해 아랍에미리트(UAE)를 방문한 3월 12일에 아크부대를 방문했다.

그는 부대원들에게 “한국과 UAE는 형제 관계로 볼 수 있다”며 “여러분이 흘린 땀방울이 국방 협력의 성과로 이어지고 나아가 우리 국익에도 기여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했다.


이명박이 말한 ‘형제 관계’와 ‘국익’의 실체는 그 이틀 뒤, 아랍에미리트(UAE) 정부가 바레인 민주화 시위대를 진압하려고 5백여 명의 병력을 파병하면서 드러났다. 그날 이명박은  아랍에미리트 연방 총리 겸 두바이 통치자인 모하메드 빈 라시드 알 막툼과 한-UAE 간 우호 관계를 다지는 회담을 했다.

올해 1월 파병된 아크부대는 아랍에미리트(UAE) 군대에 특수전ㆍ대테러 임무 등을 교육하고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각주:1].

한국 군대가 중동에서 반혁명 군대 구실을 하는 아랍에미리트(UAE) 군대를 교육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은 이란을 포위하는 전진기지로 아랍에미리트(UAE)를 군사 지원해 왔다. 아랍에미리트(UAE)는 최근 중동에서 사우디아라비아 다음으로 군비 투자에 열을 올리는 나라다.

미국은 이란의 핵발전소 추진 계획을 핵무장의 전초 단계라며 반대하고 압박하고 있는데, 미국의 맹방인 한국의 이명박과 UAE 아부다비 왕가는 아무 제지 없이 핵발전소 건설을 거래하고 있는 것도 수상하다[각주:2].

이명박은 이런 반동적 지배자들과 ‘형제’가 되고 싶어 아크부대를 파병한 것이다[각주:3]. 부대명 ‘아크’(Akh)는 아랍어로 ‘형제’란 뜻이다. 

아크부대는 당장 철군해야 한다.


※ 이 글은 축약해 <레프트21> 53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 가기


  1. 아크부대는 특전사 소속으로 현재 UAE의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알아인의 특수전학교에서 임무를 수행 중이다. [본문으로]
  2. 이란의 핵무장 성공에 대비해 UAE를 핵무장시키려는 미국의 의도가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된 바 있다. [본문으로]
  3. 한나라당은 이를 위해 지난해 12월 날치기로 파병동의안을 처리한 바 있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리비아 공습 이후 벌써 조중동 등 우파 언론들은 ‘카다피 제거를 위해서는 지상군 투입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들은 북한을 압박할 선례를 리비아에서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런데 평소 같으면 이런 호전성을 비판할 법한 자유주의 언론과 진보진영 일부도 서방의 군사 개입을 지지하고 나섰다.

<한겨레>와 <경향신문>은 각각 두 차례나 사설에서 서방의 군사 개입을 지지했다.

<한겨레>는 유엔 안보리 결의 후 “국제 사회가 좀더 일찍 이렇게 단호한 모습을 보였더라면 그토록 많은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도 있었을 터”라고 주장했다.

<경향신문>은 유엔 결의안에서 “지상군 투입 문제는 … 사실상 배제됐다[.] … 이는 … 리비아 시민들의 학살과 고통의 장기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불평했는데 사실상 지상군 개입을 주장하는 셈이다.

진보신당은 17일 “국제 사회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실효성 있는 조치를 즉각 취해야할 것”이라며 “비행금지 구역 설정” 등을 촉구했다. 진보신당 지도부는 26일 반전평화연대(준) 주최로 개최 예정인 리비아 군사 개입 반대 집회에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한다.

사회당은 18일 “유엔 안보리가 리비아에 대한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한 것은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옹호했다.

제국주의가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려고 여론을 통해 이데올로기적 압박을 하는 것에 밀려 불필요한 타협을 한 것이다. 진보정당들이 반제국주의라는 진보의 중요한 과제를 외면한 것이다.

△총격당한 동료를 안고 절규하는 바레인 민주화 시위대 이것을 묵인ㆍ방조한 서방이 카다피의 학살을 막겠다는 것은 순전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급한 불부터 끄자’는 이들의 기대와 달리 지금 다국적군의 목적은 ‘리비아 민중의 보호’가 아니다. 폭탄으로 불을 끌 순 없는 법이다.

우선, 서방이 내세운 ‘국민 보호 책임의 원칙’은 1990년대 냉전 이후 제국주의가 만든 ‘인도주의 개입’ 이데올로기의 변형일 뿐이다.

그것은 세계화가 진정돼 국가 주권보다 보편적 인권이 더 우선하므로 ‘국제 사회’가 인도주의적 목표를 위해 각국에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국가에 대항해 강제 개입할 수 있는 ‘국제 사회’는 현실에서 서방 강대국들밖에 없다. 결국 이른바 ‘국민 보호 책임의 원칙’은 서방 강대국들에게 어느 곳이든 자기 입맛에 따라 무력 개입을 할 수 있는 허가증을 주는 허울 좋은 포장지일 뿐이다.

인도주의 개입의 국제적 첫 사례인 1992년 소말리아부터, 1990년대 내내 이어진 이라크 비행금지구역 설정과 경제봉쇄,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침략전쟁 등에서 무고한 민간인들이 서방의 ‘인도주의’ 폭탄과 총탄에 희생됐다.

특히, 코소보 전쟁이 좋은 사례인데, 당시 미국과 나토는 세르비아 밀로세비치 정부의 코소보 지역 알바니아계 인종청소를 인도주의 개입 명분으로 삼았다. 그런데 실질적인 인종청소는 공습 시작 후에 벌어졌다. 폭격이 양쪽의 증오를 부추겨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와 세르비아계 거주민 수십만 명이 모두 상대편에 의해서 쫓겨났다. 세르비아 민간인 2천5백여 명이 나토 폭격으로 사망했다. 


반대로 서방 지배자들은 동맹국의 만행에는 침묵한다.

21일 이스라엘 전투기들이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를 폭격한 일은 유엔안보리에 회부하거나 비행금지구역 설정 논의를 하지 않는다. 14일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UAE)의 군대가 바레인에 진격해 민주화 시위대를 진압한 일에는 ‘국민 보호 책임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다.


사우디의 독재도, 예멘의 발포도... 저들은 튀니지와 이집트에서 독재자들이 살인 진압을 하는데도, 독재자들의 퇴진을 촉구하는 데 주저했다.

서방 지배자들은 교활하게 반군이 가장 약화된 시점에서 개입했다. 자신들을 반군 보호, 민주화 지지 세력으로 포장하려던 것이다.

서방 지배자들은 벵가지의 혁명 세력에게 동결된 카다피의 자산을 제공해 무기와 필수품을 구입하는 등 직접적으로 혁명 세력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은 거부해 왔다.

힐러리는 지난주 프랑스 파리에서 리비아 과도정부위원회가 보낸 특사[각주:1]의 무기 판매 요구를 거절했다. 리비아 무기 금수 조처 때문이라는데, 이것은 카다피 때문에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양쪽에 모두 적용된다는 것은 서방 지배자들은 양 편을 모두 경계한다는 뜻이고, 그것은 직접적으로 반군을 자기 편으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방 열강의 공습 목표가 “민간인 보호”에 있지 않다는 것도 분명하다. 반군이 위험에 처했다는 벵가지가 아니라 트리폴리 도심이 공습 대상이 된 것이다.

벌써 미군의 민간인 공격도 있었다. 23일 벵가지 외곽에서 자체 결함으로(?) 추락한 미군 F-15 조종사 둘을 보호해 주던 민간인들에게 미군의 구조 헬기가 폭탄 두 발을 쏘는 등 공격을 한 것이다. 이 때문에 민간인 여섯이 크게 다쳤다.

이들은 마을 뒷산에 떨어진 전투기 잔해를 보고 조종사 둘을 구해줬다. 돌아온 것은 미 헬기의 공격이었다. 미 사령부는 사실 확인을 거부했다. 이들이 리비아 민중을 바라 보는 인식이 이렇다.



결국 서방 열강은 혁명으로 위협 받는 석유 패권을 유지하고, 중동 혁명의 확산을 막으려고 리비아에 군사 개입을 하는 것이다.

카다피가 서방 군대와 정면으로 맞서고 공습으로 카다피를 무너뜨릴 수 없다면, 서방 열강은 지상군 투입으로 이끌릴 수밖에 없다. 제국주의의 위신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는 제국주의의 리비아 점령이 되는 것이고, 또 다른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될 것이다. 전쟁은 필연적으로 더 큰 인도적 재앙으로 발전할 것이다. 독재정부를 제거했다는 이라크ㆍ아프가니스탄에서 지금 민주주의가 생겨나고 있는가. 한국의 중소도시 인구가 몰살당하는 규모의 학살이 있었을 뿐이다.

이 과정에서 카다피는 ‘반제국주의 항쟁’이라는 거짓 선전을 강화하며 오히려 입지를 강화할 수도 있다. 반대로 항쟁 세력은 위축되고 분열할 수 있다.

그러나 서방은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규모 병력이 묶여 있어 지상군 투입이 현실 군사 역량으로만 보면 쉽지 않다. 아마 뒤에서는 중재 시도도 하나의 옵션으로 활용할 것이다.

이 경우 카다피가 서방과 적당히 타협해 휴전을 할 순 있겠지만, ‘리비아 민주화’라는 애초 목표는 사라자는 것이다. 항쟁 세력은 서방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는 한 보호막 없는 고립 신세가 될 것이다. 카다피 정부 출신 고위 인사들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서방 군대에 의존하는 민주화와 해방은 모래성일 뿐이다.

어느 경우든 리비아 민중의 진정한 바람과는 동떨어진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리비아 민중의 안전과 해방을 바란다면 서방의 군사 개입을 지지해선 안 된다. 카다피의 학살을 막으려는 심정에는 백번 공감하지만, 물에 빠진 사람에게 칼날을 쥐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다.

<한겨레>나 <경향> 등이 혁명의 운명을 ‘민주적’ 제국주의에 맡기자는 것은 사실상 이들이 지지하는 민주주의가 자본주의적 민주주의, 즉 형식적 민주화만 있고 민중의 삶과 자유를 보장하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금 목숨 걸고 혁명에 나선 중동 민중은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있다.


우리가 중동 혁명을 지지한 이유는 그것이 억눌려 왔던 민중 스스로 사회를 만들려고 나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일을 그동안 세계 곳곳에서 민중을 억압하기만 해 온 서방의 군대에게 맡긴다는 것은 사실상 혁명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뜻이고, 민중의 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폭탄이 내게 가져다 줄 해방은 무엇일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많은 분들이 주장에 공감하지만, 서방 군사 개입이 아닌 혁명 승리의 구체적 대안을 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레프트21의 다른 기사들에도 있고, 제 글 안에도 있습니다. 우리는 리비아 혁명 세력이 스스로 강해질 수 있는 정책을 펴라고 요구합니다.
카다피의 동결 자산을 항쟁세력에게 주고 그들이 무기와 필수품을 사도록 해야 합니다. 용병이 못 들어오도록 리비아의 남쪽 국경을 봉쇄해야 합니다. 이것은 서방 지배자들이 거부한 일들입니다.
혁명 세력은 단순한 내전이 아니라 사회 혁명적 방식으로 항쟁을 이끌어야 합니다. 즉 중간적 대중이 항쟁을 지지하고 참여하도록 더 많은 민주주의와 복지, 서방 개입 반대를 더 분명히 해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동에서 흔들리는 제국주의를 약화시켜야 합니다. 그것은 오히려 서방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여론과 운동을 건설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중동에서 이집트 등의 혁명이 더 진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국민 보호 책임 원칙(Responsibility to Protect, R2P)

자국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정부를 국제 사회가 제재할 수 있다는 것. 2005년 제60차 유엔총회에서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원칙은 사실상 무력 개입 능력을 가진 강대국이 자기 입맛대로 약소국에 개입하는 것을 정당화한다. 유엔은 리비아가 이를 공식 적용한 첫 사례라고 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이미 이런 개입은 이뤄져 왔다. 다만, 유엔이 이 원칙을 공식 천명한 것이 이들 전쟁 뒤였고, 사실 이 전쟁들은 유엔의 결의를 거치지 않았을 뿐이다. 이 R2P 원칙은 앞으로 벌일 군사 개입 뿐 아니라 , 이전 침략전쟁을 사후에 정당화해 준 것이기도 한 것이다.


※ 이 글은 애초 원문을 축약해 실은 <레프트21>53호에 실린 기사를 보완한 것이다. ☞ 기사 보기




  1. 그때 특사였던 마흐마드 지브릴은 지금 임시정부 총리로 발표됐다. 아마 전투의 열세와 서방의 개입으로 반군 내 친서방파의 목소리가 커진 듯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서방의 강대국들이 리비아에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카다피의 학살을 막고 리비아 민중을 구하려면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떻게든 혁명을 돕고자 하고, 독재자 탓에 죽어가는 희생을 막으려는 심정에 충분히 공감하지만, 목마르다고 소금물을 들이킬 순 없다.

서방 강대국들은 카다피보다 더한 살인마들이라는 점, 카다피와 서방 강대국들 정부 서로 진지하게 적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는 점, 잘못된 외부 개입이 혁명을 왜곡하고 방해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군사개입 찬성론은 목적과 반대되는 수단에 찬성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진보신당 서울시당 부위원장이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인 최병천 씨는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미국의 군사 개입을 찬성”한다고 밝혔다. 

“보편적 인권과 반제국주의(및 국민주권) 가치 중에서 전자가 ‘상위 가치’”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 상위 가치를 대변하는 존재가 왜 서방 강대국의 군대여야 하는 것이냐인데,그는 우선 “‘민주주의 없는 ‘반제론’은 실패했음이 북한, 리비아를 통해 역사적/경험적으로 입증되었다”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한다.

또 그는 “승리를 ‘목전에 둔’ 상황이라면 굳이 국제적인 군사적 개입을 할 필요가 없겠죠”라고 말하는데, 리비아 민중의 자기해방 능력에 대한 불신 때문에 서방 군대의 개입이 정당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결국 최 위원의 주장은 민중은 스스로 민주주의를 이룰 가망이 없으니 강대국 군대가 강제로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리비아 혁명의 수도 구실을 하는 벵가지의 한 건물에서 서방 군사 개입에 반대하는 혁명 투사들.


그런데 과연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옹호하는 존재인가.

냉전 이후 서방 강대국들은 패권적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려고 민주주의와 인권을 들먹여 왔다. 이른바 ‘인도주의 개입’론은 소말리아, 코소보와 세르비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에서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해 줬다.

그러나 현실과 명분은 달랐다. 제국주의 군대는 ‘인도주의 개입’ 때마다 자신이 보호하겠다고 한 바로 그 사람들을 학살하고 인도적 재앙에 빠뜨렸다.

소말리아에서 민간인 수천 명을 죽였고, 세르비아에선 민간인 지구가 폭격 대상이 됐고, 폭격은 민족간 증오를 더 부추겨 세르비아에선 알바니아계가 쫓겨났고, 코소보에선 세르비아계가 수십만 명 쫓겨났다.

세르비아 정부와 의심스런 코소보 해방군을 제외하면 그 두 민족의 평범한 대중은 그 전까지 이웃으로 살아왔다.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 수백만 명이 학살당했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했듯이, 제국주의 점령군은 이곳들에서 카다피보다 더 끔찍한 짓을 해 왔고 지금도 하고 있다.

게다가 그들이 제거하겠다고 했던 후세인, 탈레반, 알카에다 등은 모두 미국이 키운 악당들이었다.

지금 카다피가 사용하는 무기들도 죄다 서방이 판매한 것이다.

최 위원의 주장처럼 리비아에서 보편적 인권과 ‘반제국주의’가 대립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카다피는 후세인의 몰락을 보며 미국에 항복했고, 그 뒤에는 서방 정부들과 유착해 왔다.

이런 상호 유착 때문에 혁명 초기 서방 국가들은 카다피 비판을 애써 피했다. 지금 그들이 군사 개입을 망설이는 것은 민주주의를 수호할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 발목이 잡혀 개입할 지상군이 부족하기 때문이고 개입이 또 실패할까 봐 두렵기 때문이다.

서방이 군사 개입을 한다면 그 목표는 강대국들의 패권과 석유 자원 확보이지 리비아의 민주화가 아니다.

이 때문에 리비아 혁명 세력의 ‘전국위원회’는 일단 서방의 지상군 개입에는 반대하고 있다. ‘비행금지구역’ 문제에서는 혼란스런 입장을 내면서도, ‘외국 군대’의 주둔에 반대하는 이유는 그들이 식민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고, 강대국들의 경제제재로 오랫동안 고통 받아 왔기 때문이다.

더구나 서방이 군사 개입을 시작하면 ‘저항세력은 서방의 사주를 받은 세력’이라는 카다피의 악선동에 오히려 힘이 실릴 것이고, 혁명 세력은 분열할 것이다. 심지어 리비아 혁명에 우호적인 국제 좌파 진영도 분열할 것이다. 

일단 발을 들여 놓은 서방 군대는 ‘안정’과 ‘평화’라는 이름 아래 리비아의 모든 국내 세력과 석유 자원을 자신의 통제 아래 두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친미독재 국가들을 위협하는 민중 반란 물결을 분쇄하려 할 것이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사실상 카다피의 대공능력을 무력화해야 정상적으로 작동할 수 있으므로 선제 폭격이 이뤄져야 하는데, 이것은 리비아의 혁명 열기를 식히고, 확산하던 중동 혁명에도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폭격과 서방 군대 개입은 이라크·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끔찍한 재앙과 비극을 낳을 것이다.

제국주의 군대는 결코 해방의 주체가 될 수 없다. 혁명은 제국주의 폭탄이 가져다 주는 선물이 아니라 민중 스스로 자기 해방을 이루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리비아 민중을 위해 해야 할 일은 그들이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도록 지지하고 연대하는 것이다. 혁명을 지지하는 서방 대중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카다피는 고립될 수 있고, 그렇게 돼야 그의 반혁명적 저항은 위력을 잃을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의 군사 개입을 지지하는 치어리더가 돼선 안 된다.

※ 이 글은 축약돼 <레프트21> 52호에 실렸습니다. 기사 보기 ☞ 민주와 인권을 위한 서방 개입이 필요하다?

※ 이 글의 보론은 여기로  ☞ 보편적 인권 vs 국가 주권 구도는 허구다 를 읽어 보시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한국에서 일부 자주파 인사들은 카다피를 반제국주의 지도자로 묘사해 왔다. 반대로 일부 개혁주의자들은 카다피의 독재가 서방의 인권ㆍ민주주의 가치와 대립해 왔다는 식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둘 다 진실이 아니다[각주:1]

카다피가 1969년 쿠데타로 미군과 영국군을 몰아내고 석유를 국유화해 일부 복지를 제공하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그의 정치체제가 민주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복지 제공이 지속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1980년대 미국 대통령 레이건은 카다피를 “미친개”로 불렀다. 그는 1986년에 카다피를 죽이려고 트리폴리를 폭격했다. 60톤의 폭탄이 쏟아졌고 카다피의 수양딸 등 수백 명이 죽었다.

그가 한때 팔레스타인 해방 투사들의 피신처를 제공하고, 시리아, 이집트 등과 아랍연방을 구성하려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짐바브웨의 무가베 같은 제3세계 독재 정부들도 후원했다.

그는 이처럼 한때 제국주의와 갈등했지만, 그것을 독재 정당화에 이용했다. 서방과 갈등이 (베네수엘라 차베스처럼) 진정한 사회 진보를 두고 벌인 갈등도 아니었다. 

그런데 2003년부터는 태도를 바꿔 제국주의에 빌붙어 왔다.
그는 테러와의 전쟁을 지지했고, 2003년 이라크전쟁에서 미군이 초기에 이라크 정권을 무너뜨리고 후세인을 사형시키는 것을 본 뒤, 완전히 항복했다.

미국은 실체도 없는 대량살상무기 개발 계획을 포기하라고 압박했는데, 2003년 12월 카다피는 결국 대량살상무기 포기 선언을 했다.


미국은 그 대가로 2004년 리비아와 외교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제 제재를 해제했다. 2006년에는 리비아를 테러지원국 명단에서 삭제했다.

그뒤, 서방 지배자들은 카다피를 “지역의 실력자”로 부르며 유착 관계를 형성하고, 리비아의 석유 자원 수입, 유전 개발과 각종 건설 투자, 무기 수출로 돈벌이에 나섰다.

‘테러와의 전쟁’에서 중동 지역의 동맹이 절실했던 미국에게 ‘반미 투사’로 알려진 카다피의 지지는 전쟁의 이데올로기를 선전하는 데 매우 소중했다. 승전 가능성이 적어질수록 미국 지배자들에게 중동에서 동맹의 존재가 중요해 졌다.

유럽 열강들도 원유 매장량이 세계 8위이고 지중해와 접한 리비아와 관계 개선 상황을 한껏 이용했다. 카다피의 ‘안정적인’ 통치와 석유 독점 때문에 서방 강대국들은 카다피와 유착을 통해 안정적으로 전략적·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려 했다.


서방 열강의 제국주의자들에게는 중동 혁명의 와중에도 석유 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출처: http://atopy101.com, stitch님의 작품.



전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리비아가 서방과 돈독한 파트너가 되면서 전 세계가 이익을 얻을 것”이라고 말했다. 2008년 미 국무부 대변인 숀 맥코믹도 “리비아는 … 미국과는 물론 국제사회와 건설적인 관계를 맺고 있고 앞으로 발전 여지도 많다”고 말했다.

2004년 영국 블레어, 2007년 프랑스 대통령 사르코지, 2008년 미 국무장관 라이스가 카다피와 회담하려고 리비아를 방문했다.

선두주자는 카다파의 서방 질서 편입 과정을 중재한 영국 블레어였다.
블레어는 회담과 동시에 영국계 석유기업 셸과 BP의 유전(석유와 천연가스) 개발권을 확보하고 미사일과 방공시스템, 시위 진압 장비 등도 판매했다.


블레어는 리비아 장교들을 영국사관학교 샌드허스트에서 교육시키고 군사자문단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과거 리비아를 식민 지배했던 이탈리아에서 부패 총리 베를루스코니는 2008년에는 식민지배 피해 보상 명목으로 25년간 50억 달러를 개발 원조하겠다는 협정을 카다피와 맺었다.

이탈리아는 지금 EU 회원국 가운데 리비아에 무기를 가장 많이 팔고 있고, 전체 석유 수입의 4분1 가까이를 리비아에 의존한다.


2007년 정상회담 후 프랑스도 원자로와 비행기, 군수물자 등을 1백억 유로어치 판매했다.


미국의 전 국무장관 콘돌리자 라이스는 2008년 리비아 방문 때 카다피에게서 20만 달러가 넘는 선물을 받았다. 그는 “부시 대통령이 양국 관계 개선 전망에 매우 흥분해 있다”고 카다피에게 전했다.

이때 카다피는 15억 달러를 미국 정부에 배상했고, 미국 석유기업들은 이 돈을 대줬다. 미국은 그동안 러시아 다음으로 리비아에 무기를 가장 많이 판 나라다.

서방 지도자들은 2009년에는 카다피를 G8 회의에 초청했고, 유엔총회에서 연설할 기회를 주기도 했다.

이탈리아 로마에서 열린 G8회의에 나란히 초청된 카다피와 이명박. 이명박은 독재자와 잘 통했다. 이 회의 후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카다피가 갑자기 내 손을 잡고 흔들며 뭐라고 말을 막 하더라. … 내 말에 굉장히 감동받은 것 같은데 어느 대목에서 감동받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사진 출처: 청와대 웹사이트



카다피도 화답했다. 관계 개선에 적극적인 정부에게 유전 개발 등 거액의 사업권을 줬고, 자유시장을 도입하겠다고 약속했다.

카다피는 2008년 ‘혁명’(사실은 쿠데타) 39주년 연설에서 “내년 초부터 자유시장 경제 조처들을 도입한다”며  “자본주의 체제를 도입하면 걱정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서방과 카다피 모두 위선자인 것이다.

서방의 강대국들은 카다피가 저항 세력을 학살하도록 무기와 돈을 제공한 당사자다. 서방 지배자들이 민주주의 운운하거나 인도주의적 군사 개입을 말할 때 그것은 다른 속셈을 감추려는 것일 뿐이다.

카다피가 ‘주권’을 말하는 것도 위선이다. 그가 해외에서 용병을 불러들이는 데 쓰는 돈은 막대한 석유개발 이권을 독점해 다국적 기업들에게 나눠 준 대가로 받은 돈이다.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은 중동을 순방하며 무기 세일즈를 한 직후에 ‘카다피의 학살을 막아야 한다’며 위선을 떨었다.

그가 “영국이 아랍 정상들에게 무기를 판매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하고 얘기하는 동안 리비아 학살 동영상에는 영국제 장갑차가 진압에 사용되는 장면이 나왔다.

부시 행정부에서 국방정책자문위원장을 지낸 ‘네오콘’ 리처드 펄은 세계적 컨설팅 기업인 모니터그룹 소속으로 연간 3백만 달러를 받는 카다피 자문팀에 참여해 왔다.

오바마 정부도 불과 몇 달 전에 카다피와 무기 수출 계약을 추진한 바 있다. 카다피는 ‘테러와의 전쟁’을 돕겠다며 미국의 전투기, 헬기, 탱크를 수입해 왔다.

결국, 카다피는 반제국주의이기는커녕 제국주의에 빌붙어 온 독재자일 뿐이고, 서방은 카다피의 독재와 학살을 도와준 공범들일 뿐이다.

서방 강대국 지배자들이 카다피를 단죄하려 한다면, 그것은 카다피가 더는 안정적으로 리비아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보호해 주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때일 것이다. 패권과 석유 자원을 위협하는 민중혁명을 차단하려고 결심했을 때인 것이다.

이명박과 카다피의 유착 관계

한국은 카다피의 학살 만행을 공식적으로 비난하지 않은 나라 가운데 하나다. 

외교부가 지난주 유엔의 인도적 지원에 6억여 원을 내겠다고 발표한 것이 대응의 전부다.

한국 기업들이 리비아가 경제를 개방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의 건설기업들이 현재 리비아에서 따낸 공사 수주액은 40조 원이 넘는다. 

2009년에 이명박은 G8 회의에서 만난 카다피가 “[아프리카 개발에 도움을 주겠다는] 내 말에 굉장히 감동을 받은 것 같다”며 흡족해 했다.

이런 중요성 때문에 지난해 7월 리비아에서 과도한 첩보 행위가 발각돼 국정원 요원들이 추방됐을 때, 이명박 정부는 ‘형님’ 이상득을 카다피에게 특사로 보냈다. 

당시 이상득은 “용서해 달라”며 “양국 정상이 서로 방문하고 새로운 관계로 발전시키자”고 카다피를 달랬다.


※ 이 글은 축약해 <레프트21> 52호에 실렸습니다. ☞카다피와 서방의 공범 관계이명박과 카다피의 유착



  1. 의도는 다르지만, 두 견해 모두 카다피 식의 제3세계 독재를 반제국주의 국가로 보는 공통점이 있다. 예를 들어, 최병천은 리비아나 북한식의 ‘반제론’은 틀렸다며 서방의 제국주의적 개입 지지론을 정당화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left21.com/article/9399를 보라. 이 기사를 보완한 포소트도 곧 올릴 계획이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2
18일 끝난 진보신당 서울시당 위원장 선거에서 한 선본의 웹 홍보물엔 이런 내용이 있었다.

당원들을 만나 다시 활동을 하자고 권유를 하면 대부분 ‘당이 사라지는데 지금 활동을 해서 뭐합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진보신당은 이제 희망도 미래도 사라져 버린 당으로 보이는 것이 현실입니다.”

정경섭 진보신당 서울 마포구 당협위원장도 최근 <레디앙>에 “얼어 죽고 굶어 죽게 생겨 버렸다. … 진보신당은 사람을 모을 돈도, 사람들의 발과 입으로 내세울 의원도 없다.”고 털어놨다.

진보신당 내부는 이 당의 선거적 성공 가망이 점점 없어진다는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이에 관해 더 자세한 제 견해는 ☞‘진보신당 논쟁과 대표 선거 ― 실패한 전략 반복하기?’를 보세요.)

존재의 위기감’ 때문에 심지어 분열 걱정까지 나온다. 통합파인 유의선 서울시당위원장 당선자가 당원총투표로 진로를 결정하자는 공약을 낸 것도 이런 맥락인 듯하다.

[현재 당원 모두] 새로운 통합진보정당으로 함께 갔으면 합니다. … 가장 걱정하는 것은 ‘그냥 따로 가자’ ‘제 갈 길 가자’는 불신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민주노동당과 절대 함께 못하겠다며 독자 노선을 고집하는 일부 독자파의 태도는 당원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사실 <조선일보>와 인터뷰해서 민주노동당을 종북주의라고 비판했던 조승수 대표 자신이 ‘종북파’의 핵심이라던 김창현 민주노동당 울산시당 위원장과 후보 단일화로 당선했다. 진보신당 지방의원 25명 가운데 21명이 사실상 민주노동당과 후보 단일화를 거쳐 당선했다.

독자파가 목소리를 높이지만, 냉정한 당의 현실과는 괴리감이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정경섭 위원장은 독자 노선은 “그냥 고사되자는 거나 같은 소리”라고 비판한다.  

정경섭 위원장은 “[민주노동당의] 자주파는 적이 아니다.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다”고 옳게 지적한다. 진보정당이 차이점을 앞세워 분열할 게 아니라 이명박에 맞서서 공통의 요구를 중심으로 단결하고 투쟁해야 하는 것이다. 

진보신당 당원 다수는 이런 단결을 바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서울시당 선거에서 ‘진보통합정당에 단결해서 참여하자’는 유의선 후보가 절반 가까운 득표로 당선한 것과 통합파 두 후보의 득표 합계가 70퍼센트에 육박한 것은 이것을 보여 준다.

통합파 안에서도 국민참여당 같은 친자본가 정당과도 통합할 수 있다는 최선 후보보다 진보정당 통합이 우선이라는 유의선 후보가 갑절 더 많이 득표했는데, 둘 모두 범야권 선거연합 가능성은 열어뒀다.

유 당선자가 특별히 당원 총투표를 주장하는 배경에는 당원 여론과 달리 당 지도부와 대의 기구에는 여전히 독자파가 많아 대의원대회에서 진보대통합 합류 방침이 통과될지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최악의 경우 분열하더라도 최대한 많은 당원을 통합진보정당으로 조직하려는 계산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일부 통합파 지도자들이 진보 대중의 진보대연합 지지에 부응하는 수준을 넘어서 민주당과 연립정부를 하는 수준의  민주대연합까지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관련 내 글 보기 ☞ 연석회의 출범 ― 어떤 진보대연합인가)

심상전 진보신당 전 대표는 2012년 대선에서 민주당과 연합해 연립정부를 구성하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적극적 전략”이라고 주장한다. 진보대연합의 파트너인 민주노동당 지도부도 민주대연합 노선에 기울어 있다. (한편 민주노동당 지도부 주류가 실제로는 진보대통합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비판도 적지 않다.)

자본가 계급에 기반을 두고 그들의 이익을 대변한다는 점에서 명백한 한계가 있는 민주당과 연합해서 이명박에 맞서겠다는 잘못된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도 민주당은 비정규직을 늘리는 직업안정법 개악을 한나라당과 합의한 바 있다. 

이런 상황에서 ‘묻지마 통합’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독자파의 일부 주장에 일리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장석준 상상연구소 연구기획실장처럼 “범민주당 정권을 복원하는 것이 목표고, … [진보정당] 통합은 단지 그 사전 정지 작업”이라고 단정하며 진보대연합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선 진보신당 독자파의 태도는 일관되지도 않다. 말과 달리 독자파의 “진보정치의 독자성” 원칙은 ‘선거적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달랐다.

진보신당의 독자파 대부분은 지난해 지방선거 때 당선 가능성 있는 후보들의 야권연대에 침묵했다. 장석준 실장도 내년 총선에서 민주당과의 선거연합 자체를 반대하지는 않고 있다. 최근 제출한 당발전계획[안]도 마찬가지다.

지금도 독자파가 지도부 다수인 진보신당은 민주당이 제안한 4·27 재보선 야권 단일화 협상에 참가했다. 조승수 대표는 민주당을 비판했지만, 그가 서명한 공동 합의문은 “4·27 재보선부터 민주진보진영의 연합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였[]”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일부 독자파들은 민주노동당의 자주파를 공격하기 위한 용도로만 민주대연합을 비판하는 듯한 인상도 준다. 

무엇보다 조 대표가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 때 야권공조로 공장에 가 농성 해제 종용에 동참한 사실에 대한 비판을 당내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독자파는 민주노동당과 재통합에 반대한다는 점에서만 일관성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재통합이 자신들이 주도한 분당/창당 프로젝트의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싸우는 노동자들과 진보 대중이 바라는 진보대연합은 현대차 비정규직 파업이나 홍익대 미화노동자 파업 같은 투쟁에서 진보세력이 충심으로 단결해 투쟁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진보의 진정한 민생정치 아니겠는가.

그런 연대와 승리, 단결과 신뢰가 누적돼야 연합 조직을 함께 구성하는 것도 가능할 테고, 더 큰 투쟁으로 갈 정치적 자신감을 얻을 수 있으며, 선거에서 단일한 진보 후보를 내고 지지를 늘릴 수 있을 것이다.

장석준 실장의 말과 달리 다함께처럼 민주대연합에 반대하면서도 이런 투쟁적 진보대통합을 지지하고 추진하는 좌파들도 있다.

실제로 홍익대 투쟁처럼 진보정당과 진보 단체 들이 단결해 연대한 곳에서 노동자들의 사기도 높아졌고 투쟁도 전진했다.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도 진보 양당이 단결한 곳에선 양당 지지율 합계보다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이런 방침은 국민참여당 등처럼 그 지지층은 탐나지만, 그 지도부는 연합할 만한 가치가 없는 세력들에 대한 태도에도 해법을 줄 수 있다. 기준도 전망도 모호한 ‘가치’가 아니라 실질적 ‘요구’와 ‘투쟁’으로 단결했을 때, 무능한 그 지도자들의 손아귀에서 진보적 대중을 왼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

반대로 그들에게 진보적 색을 칠해 주면서 연합하는 방식으로 하면 오히려 대중에게 그들에 대한 환상을 키워줄 뿐이다.

따라서 단언하건대, 다수 개혁주의 지도자들의 의심스런 행보를 핑계로 광범한 진보 대중의 단결 염원을 거부하는 것은 현명한 좌파의 태도가 아니다. 진보대연합을 지지하고 동참하면서, 그 속에서 진보대연합이 민주대연합의 사전 단계가 아니라 진보진영의 단결과 투쟁에 복무하도록 노력하는 게 올바른 태도일 것이다.

그 점에서 현재 진보신당 내 통합 논쟁에서 빠진 것은 진보대통합의 목적에 관한 문제의식, “진보대통합이 어떻게 계급투쟁을 강화할 수 있느냐” 라고 본다. 어느 파도 선거공학적 관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집트와 중동의 민중 반란이 보여 주듯이 진정한 개혁을 성취할 수 있는 힘은 아래로부터의 대중 행동에 있다. 진보대연합은 노동자의 단결과 투쟁 건설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이런 투쟁 속에서 서로 협력하고 신뢰를 쌓으며 선거에서도 진보 단일 후보를 내야 한다.

한편, 단일한 정당 형태로 통합했다가 다시 당내 경쟁이 격화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이다. 정경섭 위원장은 “섣불리 통합했다가 다시 분열이라도 된다면 진보정치의 미래는 거의 끝”이라고 걱정한다.

신뢰에 바탕한 단결이 되려면 공통점을 앞세워야 하지만,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 자체가 억압돼선 안 된다. 단일 정당 모델은 그 점에서 여전히 위험하다. 분당 경험은 차이점을 더 크고 분명하게 해 놓았다.

따라서 각 정치세력의 독자적 선전, 비판, 조직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10~20개의 진보적 행동강령을 중심으로 단결하고 투쟁하는 공동전선 모델이 단결을 위해 더 효과적이다.


※ 이 글은 수정·축약해 <레프트21> 51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 보기   이 글은 그 기사를 보완해 논지를 더 보충한 것입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한국사회포럼 이집트 혁명 토론

이집트 노동계급이 완전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2월 17일부터 19일까지 열린 “한국사회포럼2011”의 마지막 날, 다함께가 주관한 “격동의 이집트, 중동의 민중 반란과 연속혁명”에는 청중 60여 명이 강의실을 꽉 채웠다.

한국에 온 지 5년 됐다는 이집트인 연사 마흐무드 압둘 가파르 씨는 그동안 무바라크가 이집트인들을 억압하고 분열 지배해 온 행태를 생생하게 폭로했다. 가파르 씨는 이집트 혁명 초기부터 한국에서 '이집트 혁명을 지짛는 이집트 사람들' 모임에 참여해 대사관 집회 등에 참석했한 바 있다. 

“무바라크는 생사여탈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가졌다. 무바라크는 군 최고 통솔자였고, 경찰조직을 직접 운영했다. 국회에서 원하는 법을 맘대로 통과시켰다.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법을 국회가 통과시키면 멋대로 폐기했다.

토론회 시작 전, 참가자 모두 이집트와 중동 혁명의 희생자를 위한 묵념에 함께했다.

“이집트 경찰을 보면 이집트 상황을 알 수 있다. 군대가 40만 명인데 경찰은 2백만 명이다. 그 중 다수가 보안경찰이다. 이들은 민간인 복장을 하고 다닌다.

“무바라크는 억압과 분열로 지배했다. 분열의 대표 사례는 무슬림과 가톨릭을 분열시킨 거다. 무슬림들은 ‘가톨릭들은 서방의 지원을 받는다. 이들에게 민주적 권리를 줘서 이들이 표를 얻으면 무슬림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 것이다’ 하고 말했다. 무바라크는 똑같은 말을 가톨릭도 하게 만들었다.

“언론도 강력하게 통제했다. 타흐리르 광장에서 2백만 명이 시위를 벌일 때도 국영 TV에서는 그런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최근 불만이 폭발한 계기는 칼리드 사이드란 청년이 집앞에서 죽은 것이었다. 경찰은 약물을 팔다가 약을 먹고 죽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조사해 보니 이 사람은 경찰이 마약을 파는 장면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렸다가 경찰에게 보복당한 것이었다.

“시위 일주일 만에 무바라크가 졌다는 게 분명해졌다. 그동안 속아 왔다는 것을 모든 이들이 느낀 것이다. 사람들을 분열시킨 주장들이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모두 깨달았다. 타흐리르 광장에서는 무슬림과 가톨릭의 충돌이 없었다. 도시 안의 도시 같았다. 스스로 깨끗하고 훌륭하게 운영했다.”


21세기 혁명


김인식 <레프트21> 발행인은 이집트 민중에게 축하와 연대의 인사를 보내며 연설을 시작했다.

“21세기에 혁명이 가능할 뿐 아니라 현실성이 있다는 점을 북부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의 민중이 보여 주고 있다.

“가파르 씨가 ‘친절한 사람이 화나면 조심하라’고 했다. 트로츠키는 이를 ‘혁명적 보수성’이라고 한 바 있다. 노동 대중이 [삶의 악화에 맞서] 현 상황을 지키다 지키다 안 됐을 때 터져 나오는 게 혁명이라고 했다. 사람들이 싸우지 않는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다. 혁명을 예비하고 축적하는 과정인 것이다.

“한국에서도 좌파의 과제는 계속 투쟁을 누적시키는 것이다. 

“무바라크가 퇴진했다는 것은 명백하지만, 여전히 무바라크 정권의 사람들은 남아 있다. 또한 국가의 핵심인 억압기구는 살아남았다.

“군부는 독재의 척추였고 엄청난 특혜를 받았다. 민간 경제 활동의 대주주기도 하다. 군부가 운영하거나 군부에 봉사하는 기업도 많다. … 군부는 해마다 미국에 13억 달러를 지원받아 왔다. 이런 군부가 미국을 거스를 것인지 의심해야 한다.

“이집트 혁명에는 모든 계급이 참여했다. … 그러나 이 정권이 결정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대중파업이 시작되면서부터다. 이집트 노동계급은 이집트뿐 아니라 중동 전체에서 해방의 열쇠를 쥐고 있다. 연속 혁명으로 나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노동계급은 이제 경제적 고통을 해결할 요구를 해야 한다. 이 투쟁이 국가 탄압에 직면하면 정치투쟁으로 발전할 수 있다.

“사회 혁명으로 전환이 안 되면 군부는 피의 보복, 반혁명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1917년 러시아에서 2월 혁명이 성공했지만 7월에 꼬르닐로프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칠레에서도 거대한 운동이 있었지만 군부가 반동을 준비했고 결국 1973년 9월에 피노체트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타흐리르 광장의 자치 능력이 작업장과 지역사회에서도 실현돼야 한다. 작업장위원회, 지역위원회, 파업위원회의 전국적 네트워크를 건설해야 한다. 이는 이집트 혁명의 성과를 보존ㆍ발전시키는 데 결정적이다.

“이집트는 최초의 계급사회가 등장한 곳이다. 이제는 이집트가 계급을 없애는 여정으로 나가고 있다. 이것이 가능하기를 바란다.”

자유 토론에서 한 참가자는 이집트 혁명에 관한 흔한 논평들을 반박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SNS는 혁명 확산의 부차적인 수단이었다고 생각한다. 발제에서 나온 것처럼 꾸준히 저항하면서 축적돼 온 운동의 효과가 본질이었다고 생각한다.”


계급없는 사회


최일붕 다함께 운영위원은 이집트 혁명이 연속혁명으로 발전해야 주어진 과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집트 혁명이 해결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세계적 상황이 이전 동유럽이나 한국 등의 민주화 이행 과정과는 다르다고 주장했다.

“이집트는 제국주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미국과 이집트는] 미국과 일본처럼 긴밀하다.

“군부는 자기 자신이 자본으로서 경제의 한 축이다. 따라서 쉽게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제국주의와 군부통치 척결 말고도 토지 개혁과 경제난 해결의 과제가 있다고 했다.

이집트 혁명이 직면한 환경도 다르다. 세계경제 위기와 미국 제국주의의 핵심적 이해관계가 걸린 지역이라는 것이다.

“누가 이 문제들을 해결할까? 외국의 원조를 받는 부패하고 소심한 자본가들일까? 이집트의 지식인들일까? 이들은 독자적 경제 기반이 없다. 누가 해결하겠는가? 야당? 야당은 엄청 취약하고 부패했고 타협적이다. 이들이 해결하는 게 가능할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막중한 난제들을 해결할 능력을 가진 사회집단은 노동계급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 노동계급이 역사 무대의 한가운데 등장했다.

“1917년 2월 혁명을 트로츠키는 민주혁명이라 하지 않고 하나의 에피소드 단계라고 했다. 이집트 혁명도 아직 민주 혁명이 아니다. 아직은 어떤 민주적 과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어려운 길을 가는 것보다는 쉬운 길로 가는 게 낫다. 그것은 바로 노동계급의 정치권력 장악이다. 첫 걸음은 공장, 지역사회, 학교, 거리에서 노동자, 학생들의 민주적 기관을 설립해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션 정리 발언에서 가파르 씨는 “이집트에서 혁명을 일으킨 사람들은 무바라크 제거에서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제도 4백만 명이 모였다. 그들은 매주 이런 시위를 할 것이고 요구가 받아들여지기 전까지 시위를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인식 발행인은 과제를 제시했다. “이집트 혁명의 운명을 결정지을 세력은 셋이다. 백악관, 군부, 노동계급. 이 셋이 앞으로 결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이집트 혁명의 운명이 결판난다.

“이집트 혁명은 가자지구 국경 개방을 중요한 요구로 제출해야 한다. 노동계급이 가자 국경 개방과 팔레스타인 해방을 요구로 내걸어야 한다.

“이집트의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이집트 노동계급이 과거의 혁명에서 잘 배울 수 있도록 말해야 한다. 그 점에서 이들의 성장이 이집트 혁명의 미래를 결정지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기사는 <레프트21> 온라인 판(http://www.left21.com/article/9276)에 좀더 축약해 실렸습니다. 

※ 저도 메모를 했는데, 기사 작성 시점에서 마침 마르크스의 눈 블로그에 발표문을 잘 필기해서 정확하게 정리해 놓은 것을 발견했습니다. 필기보단 Ctrl+C와 Ctrl+V를 하는 것이 낫겠길래 상당 부분 긁어 썼습니다. 인용을 허락해 주신 주인장께 감사합니다. 


이날 포럼은 조금 늦게 시작했습니다. 가파르 씨가 지방에서 올라오느라 조금 늦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줄지 않을까 했는데, 사람들이 계속 들어 오고, 먼저 온 사람들은 안 가고 열심히 시작을 기다리더군요. 
생각보다 젊은 대학생 참가자가 많았습니다. 플로어 토론 발언자는 제가 소개한 것보다 훨씬 더 많았습니다. 혁명의 기운을 받아서인지, 발언들이 다 좋았습니다. 
가파르 씨는 노동자들이 책임 있게 파업해 수에즈운하를 막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경제에 해를 끼치지는 않았다는 거죠. 
저는 가파르 씨가 이 말을 굳이 한 이유를 나름대로 이해했습니다. 자신의 모국이 부르주아 언론의 주장대로 혼란스런 무정부 상태가 아니고 혁명의 주역들도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지금 노동자들은 있는 잠재력을 모두 발휘해 지배자들을 언론에 비친 이미지가 아니라 실질적인 힘으로 굴복시켜야 할 때입니다. 여전히 이집트 국가는 군부와 기업주들, 곧 ‘저들의 것’입니다.저는 저들이 아직 장악하고 있는 국가의 이익(=국익)을 위해 노동자들이 자기 행동과 요구를 낮추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이집트 혁명이 승리할 때까지 함께 싸울 것” 



 2월 11일 오후 이집트대사관 앞에서 ‘무바라크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가 열렸다.

평일 낮인데도 한국인과 이집트인 1백여 명이 모여 무바라크 퇴진을 요구했다.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다함께, 나눔문화, ‘사회주의노동자정당건설 공동실천위원회’, 그리고 고려대 등에서 많은 학생들이 참가했다.

첫 발언을 한 이집트인 칼리드 알리 씨는 무바라크 정부 인사들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1월 25일부터 보름 동안 3백 명에서 4백 명이 죽거나 실종됐다. 무바라크는 미디어로 거짓말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거짓은 탄로날 것이다. 무바라크가 30년 동안 폭력, 거짓, 고문, 살인으로 지배해 온 것을 전 세계가 알게 될 것이다.

“무바라크는 30년 동안 이집트 민중의 모든 것을 빼앗아 갔다. 보건의료시스템, 경제, 권리. 더는 빼앗기지 않겠다는 의지로 광장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한국은 독재와 싸워 이긴 나라다. 한국 민중의 연대를 바란다.”

△이집트 혁명의 승리는 우리 모두를 고무할 것이다. 한국인들의 연대도 매우 중요하다. ⓒ유병규



다함께 김용욱 활동가도 연대 발언을 했다.

“무바라크는 지금 겁에 질려 있다. 1940년대 독립 투쟁을 할 때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왔다. 이집트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제 거기에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투쟁에 나섰다. 수많은 독재정권들이 무너질 때에는 거리 투쟁과 함께 노동자들의 파업이 있었다. 한국의 민주화도 이 두 힘의 결합으로 공고해졌다.

“이집트 혁명은 [한국처럼 중도에 머물지 말고] 계속 투쟁해 꼭 승리하도록 한국에서도 최선을 다해 연대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정성희 최고위원도 참가해 “이집트 혁명을 열렬히 지지하며 연대를 약속한다”고 밝혔다.

“미국 제국주의자들은 이집트 차기 정권이 친미냐 반미냐만 재면서 반미 정권을 막으려는 예방적 조처에만 열중하고 있다.

“무바라크는 친미ㆍ친이스라엘 정책으로 아랍 민중의 자주권을 유린해 왔다.

“이집트 민중의 투쟁을 끝까지 밀고 나가 완전한 자주를 쟁취하길 바란다.”

이어 참가자들은 박노해 씨가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며 발표한 시 “’분노의 날’이 밝아온다”를 낭독했다. 칼리드 알리 씨가 아랍어로, 나눔문화 활동가가 한국어로 이 시를 낭독했다.

결의문을 낭독하고 참가자들은 아랍어로 함께 외쳤다.

“야스콧 야스콧, 호스니 무바라크”(호스니 무바라크는 물러나라)

이집트 혁명이 새로운 기로에 선 상황에서 한국 내 연대가 꾸준히 이어지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 연대 소식은 투쟁하는 이집트 민중에게 힘을 줄 것이다. 이들이 승리한다면 한 참가자의 말처럼 “체제에 맞서 싸우려는 세계 민중은 더 큰 자신감을 갖게 될 것”이다.


무바라크 즉각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 결의문


지난주에 이집트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사건이 벌어졌다.

2월 3일 민주화를 요구하며 2주 동안 굳건하게 싸워 온 이집트 민중이 무바라크 정권이 동원한 깡패의 공격에 맞서 이 운동의 상징인 타흐리르 광장과 이집트 혁명을 방어한 것이다.

2월 4일에는 8백만 명이 넘는 이집트 민중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무바라크의 즉각 하야를 요구했다. 일부 노동자들은 무바라크 하야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면서 무기한 파업에 들어갔다.

무바라크 정부와 깡패의 공격 때문에 이집트인 수백 명이 죽고 1천 명이 훨씬 넘는 사람들이 다쳤다. 민중의 민주화 열망을 수용하고 싶지 않은 무바라크 정부의 권력욕이 귀중한 생명을 앗아간 것이었다.

무바라크는 기만적이게도 공격 이틀 전 이집트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해 자신과 아들이 2011년 9월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발표하면서 사람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그와 정권 고위 인사들이 진정으로 이집트 민주주의를 위해 정권욕을 포기할 생각이 있다면 왜 깡패들을 시켜 민주화 시위대를 공격했는가?

지금 무바라크 정부는 야당 지도자들을 만나 이집트 민주화에 관해 논의하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무바라크 정부가 구체적 성과도 없는 회담을 반복하면서 시위대가 지치기를 기다리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무바라크 정부가 민중의 요구를 거스르면서 온갖 책략을 부리고 심지어 유혈 공격을 자행한 데는 미국 정부의 책임도 크다. 오바마 정부는 말로는 민주주의를 말하면서도 민주화 인사와 평범한 사람들을 고문한 비밀경찰 국장 출신인 부통령 술레이만에 대한 지지를 보내는 등 겉과 속이 다른 행동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오바마 정부가 중동의 진정한 민주화보다는 석유에 대한 통제권을 포함해 미국 국가와 기업 이익을 더 중요시하고 있음을 명백히 보여 주는 것이다.

진정으로 민주화를 바라고 쟁취할 수 있는 세력은 지금도 타흐리르 광장과 이집트 전국 방방곡곡에서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무바라크 하야와 이집트 사회의 민주적 변화를 요구하는 수많은 평범한 이집트인이다.

이집트 민중은 무바라크 정부의 거짓말과 시간끌기에 신물이 났다. 그들은 무바라크 독재를 30년 동안 지지해 온 미국 정부가 이집트 민주화에 관해 이러쿵 저러쿵 말하며 개입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은 무바라크 정권이 당장 물러나야 하며 이집트 민중 자신이 스스로의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오늘 집회에 참가한 우리는 이집트 민중 투쟁과 요구에 지지를 보내며 그들이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이곳에서 함께 싸울 것이다.

  - 무바라크는 즉각 물러나라!

  - 이집트의 자유를!

  - 학살자를 처벌하라!

  - 이집트 노동자 파업 지지한다!

2011년 2월 11일 ‘무바라크 즉각 퇴진과 이집트의 자유를 위한 2차 집회’ 참가자 일동

(이집트 혁명을 지지하는 이집트 사람들, (이하 가나다순) 국제노동자교류센터, 경계를넘어, 나눔문화, 노동전선, 다함께, 랑쩬(rangzen), 민주노동당, 민주노총,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보건의료단체연합(건강사회를위한약사회, 건강사회를위한치과의사회, 노동건강연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참의료실현청년한의사회), 사회당, 사회진보연대, 인권연대, 전국노동자회, 진보신당, 참여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팔레스타인평화연대, 한국진보연대, 향린교회)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아덴만의 여명” 작전 후 <조선일보>는 사설에서 “전력증강 계획을 앞당겨 해군 함정을 확충해 군함을 추가 파견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주장했다. 

‘아덴만 마케팅’이 자극한 애국주의의 압력 속에서 해상 안전을 위해서라면 강경 대응이나 추가 파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유감스럽게도 진보신당조차 “해군 선박의 추가 배치 등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대변인 논평을 발표했다.  

△군사적 대응을 강화하자는 것은 군비를 더 늘리자는 속셈에 불과하다. 인질 석방 몸값의 수백 배를 사람 죽이는 무기에 쓰자는 것이다. ⓒ사진 출처 합동참모본부




그러나 군사적 대응을 강화해서는 소말리아 해적을 ‘소탕’할 수도, 한국 선박과 선원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도 없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문제의 원인을 더 키우는 것이다. 

사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세계 해적 사건의 30~40퍼센트는 말라카 해협과 인도네시아 해안에서 일어났다.

그때 유엔은 아무 개입을 하지 않았고, 주변국들이 알아서 협조해 대처했다.

그런데 소말리아에 대해선 달랐다. 유엔은 2008년 6월에 각국이 함대를 보내야 한다고 결의했다. 심지어 그해 12월엔 내륙까지 진입할 수 있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서방 강대국들이 함대를 파견한 뒤인 2009년에 이 지역 해적 사건은 전 해보다 갑절로 늘었다. 2010년부터 해적 사건이 줄어든다고 하지만, 해적의 활동 범위가 소말리아 연안을 넘어 인도양까지 넓어진 것을 고려해야 한다. 

미국의 주도로 유엔이 허가한 강대국들의 함대 파견은 단순히 해상 교역로를 보호하는 것에만 목적이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미국이 주도한 ‘테러와의 전쟁’의 일부였다. 

특히, 미국은 2003년에 ‘대량살상무기 확산방지구상(WMDPSI)[각주:1]을 주도적으로 구성했는데, 이는 쉽게 말해 미국이 테러 혐의 국가로 찍은 나라들에게 군사적 해상 봉쇄를 하겠다는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 특히 미국은 이 지역에서 제국주의적 군사 개입을 정당화하려고 ‘해적’을 빌미로 삼은 것이다.

아덴만은 수에즈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지나는 곳이고, 아라비아 반도의 석유가 인도양으로 나오는 바닷길목이다. 

소말리아는 미국이 알 카에다 본거지라 꼽은 예멘과 아덴만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는 나라다. 소말리아 파견 함대는 중동을 포위하는 함대이기도 한 것이다. 

미국은 최근 아프리카에 대한 군사 개입도 늘리고 있다. 현재 미국은 아프리카 사령부를 아프리카 대륙 안에 확보하지 못한 처지다[각주:2].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경제ㆍ군사적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미국에게 소말리아는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나라인 것이다. 


테러와의 전쟁

그래서 2006년에 미국에 비협조적인 이슬람법정연맹(UIC)이 소말리아 민중의 지지 속에 내전을 끝내고 불안정과 빈곤을 해결하려 나섰을 때, 미국은 그것을 두고 보지 않았다. 

미국의 사주와 지원을 받은 에티오피아 군대가 소말리아를 침략해 수도 모가디슈를 점령했다. 미군은 폭격 등으로 이를 지원했다. 미국이 세운 괴뢰 과도 정부와 각 세력 사이 내전이 다시 시작됐다.

난민 수백만 명을 낳은 지금의 내전과 기아 상태는 순전히 미국의 개입 때문인 것이다[각주:3].

소말리아 인들이 생계형 해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것도 강대국들의 책임이다. 

1990년대부터 소말리아의 혼란을 틈타 각국 어선들이 소말리아 영해에서 불법(약탈적) 어업을 하고, 각종 폐기물을 버려 왔다. 이 때문에 소말리아의 어업이 붕괴됐다. 지금 함대를 파견한 어느 나라도 이런 행위를 막으려 한 적이 없다. 

1990년대 초반 국제구호단체들이 선진국들의 남는 식량을 마구잡이로 푼 결과, 소말리아 농업의 자생력이 오히려 파괴됐다. 이런 행위가 오히려 소말리아 식량 위기를 구조적 문제로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도시에서도 바다에서도 생계를 해결할 방법을 빼앗긴 어민들은 바다로 나가 불법 어선들에게 ‘세금’을 받았다. 미국과 친미 강대국들은 이런 사람들을 ‘해적’이라 부르며 (불법 어선이 포함된) 자국 선박을 보호하겠다고 함대를 파견한 것이다.

해적의 규모가 커졌다 해도 이들을 양산하는 내전과 기아의 책임은 제국주의와 그 동맹자들에게 있다. 

소말리아 민중의 삶과 존엄을 파괴하는 제국주의 군대가 모두 철수하고 내정 간섭을 중단해야 소말리아에 평화와 민주적 재건의 싹이 피어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소말리아의 기아와 빈곤을 해결해 나갈 때 ‘해적’은 사라질 것이고 선원들의 안전도 지켜질 수 있다.

 부메랑이 될 ‘아덴만 마케팅

‘아덴만의 여명 마케팅’은 동이 채 트기도 전에 박살이 나는 듯하다. 
해양경찰청 수사본부는 7일 삼호주얼리 호 석해균 선장이 맞은 총탄 네 발 중 하나가 한국 해군의 탄환이라고 밝혔다. 
잃어버린 한 발의 총탄에 관한 의혹도 커지고 있다. 나머지 한 발은 교전 과정에 생긴 파편일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정작 해적이 쏜 게 분명한 총탄은 하나뿐인 것이다.
해경은 “새벽 시간 배의 조명이 꺼지고 링스헬기가 엄청나게 사격을 가하는 상황에서 우리 해군과 해적이 서로 총을 쐈기 때문에 매우 혼란스러웠을 것”이라고 정부와 군을 변호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교전 없이 해적을 제압했고 석 선장은 이미 쓰러져 있었다’는 국방부의 애초 발표와 정반대다. 
그동안 이명박은 자신이 직접 지시한 작전이 완벽히 수행됐다며 자랑해 왔다. 한나라당 대변인 안형환은 총알에 관한 의혹을 제기한 이들에게 “간첩이나 다름없다”고 호통친 바 있다. 
이 모두가 거짓이었다. ‘완벽하고 성공한 작전’이기는커녕 해적 여덟 명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인질들의 생명도 도외시한 무모한 도박이었던 것이다. 국방장관 김관진도 작전 며칠 후 기자들에게 무리한 작전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대통령의 지시로 그냥 밀어붙였다는 것이다. 
금미305호 선원들이 9일 극적으로 석방됐는데, 정부는 6~7억 원에 불과한 몸값 지원조차 거절한 바 있다.
(여당은 원칙의 승리라고 논평했지만, 협상을 맡았던 케냐 교포 김종규 씨는 <동아일보> 인터뷰에서 석방금 지불 사실을 시인했다. 석방 과정의 의문점은 ①석 선장이 위중하고 해군의 총탄에 맞은 것이 확인된 시점에서 석방, ②케냐 교포인 협상 당사자가 석방 시점에서 서울에 와 있었던 점 등이다.) 
청해부대 파병 목적 자체가 ‘선원 안전 보호’에 있지 않다.
한국 지배자들의 소말리아 파병은 미국의 세계 패권 전략에 편승해 군사력을 과시하고 자신들의 국제적 지위를 높이려는 속셈에서 나온 것이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파병 등에 꾸준히 참여하고 한미FTA 체결에 집착하며 “연안 해군”에서 “대양 해군”으로 가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청해부대는 미군이 유럽 여러 나라의 해군과 함께 구성한 연합함대(그 가운데 CTF-151[각주:4]) 지휘 아래서 한국 선박보다 갑절이나 많은 해외 선박을 호송했다. 한국 선박 가운데 직접 호송한 비율은 13퍼센트에 그친다. 
군사력을 대외에 과시하겠다는 한국 지배자들의 전략적 목표와 ‘레임덕 탈출’ 기회를 만들려는 이명박의 계산이 모두 무모한 군사 작전의 배경이 됐다. 
길게 보면, 한국민의 위험은 정부가 미국의 침략 전쟁을 도우러 중동에 파병한 대가다. 파병으로 도운 미국의 ‘테러와의 전쟁’이 지금 소말리아를 망친 주범이니까 말이다. 
2009년 청해부대 파병 직후 예멘에서 한국인이 표적 테러를 당한 일을 떠올려야 한다. 
한국 정부는 즉시 철군해야 한다. 


※ 이 글은 다듬고 축약해 <레프트21> 50호에 실렸습니다. ☞ 바로 가기
  1. 영어 풀네임은 Weapons of Mass Destruction Proliferation Security Initiative. 미국 주도로 여러 나라들이 맺은 협약 같은 것으로, 그 내용은 대량 살상 무기를 실을 것으로 의심되는 항공기나 화물선을 공해상이나 우방의 영해 및 영공에서 강제로 검문하거나 검색할 수 있도록 하는 것. 북한, 이란 등을 주요 대상국으로 함. [본문으로]
  2. 현재 미군의 아프리카 사령부 본부는 독일에 있다. 그 전에 미국에게 아프리카 사령부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중부 사령부와 유럽사령부가 분할 관할하다 아프리카의 전략적 중요성이 커지면서 2007년 아프리카사령부를 신설했다. [본문으로]
  3.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한 혼란과 1991년 정부 붕괴 후 내전으로 일어난 인도적 재난을 악화시킨 것은 서방 강대국들의 구호단체들이었다. 이들이 소말리아 지역 사회와 협의없이 식량을 푼 대가로 소말리아 농업은 붕괴 위기에 빠졌고, 이는 식량 위기를 가속화했다. [본문으로]
  4. 한국 정부와 해군은 대 테러 작전 함대인 CTF-150 배속을 원했으나, 같은 해역에서 대 해적 작전을 초점을 두고 한국이 파병 직전인 2009년 1월 창설된 CTF-151에 배속됐다. 그래봐야 이 둘 모두 미국 제5함대의 연합해군사령부(CMF)의 지휘를 받는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


1936, 프랑스에서 노동계급의 전진을 가로막았던 계급동맹 전략이 스페인에서는 노동계급의 목을 직접 졸랐다.

노동계급 정당과 노조들이 모두 참여해 2월에 집권한 인민전선 정부는 좌익 정치범 사면과 석방 말고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7월에 프랑코 등 우익 장군들이 이끄는 군사쿠데타에 직면했다.

그러나 합법 절차로 선출된 공화국 정부는 불법 쿠데타를 두고 우왕좌왕하기만 했다. 이런 정부의 대응은 쿠데타 모의에 참가하지 않았던 군부와 지방정부들을 동요시켰다.

그것은 스페인 지배계급이 지지부진한 경제 발전 문제를 최신의 반동적 방식, 즉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방식으로 해결하려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결국 우익 반군을 막아 나선 것은 노동계급 정당들도 포함된 공화국 정부가 아니라 노동자와 무토지 농민들이었다.

카탈루냐, 안달루시아 등 전국에서 노동자들은 정부와 쿠데타 군 사이에서 눈치를 보는 지방 정부와 유지들을 제치고 스스로 저항을 조직했다. 이는 당연히 도시와 산업, 농토를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뜻했다.

부족한 것은 이 지역적 자주관리를 전국 차원에서 조율하고 반파시즘 전쟁을 통일된 전략으로 수행할 기구였다. , 새로운 국가의 수립, 즉 노동자 혁명이 일정에 올랐던 것이다.

우익 쿠데타가 내전으로 바뀌고 오히려 민중 혁명으로 성장한 것은 바로 이런 배경에서였다.

이번에도 공산당의 계급동맹 정책이 문제가 됐다. 자유주의 정부들의 군사 지원이 없었기 때문에 소련의 대외 정책은 더욱 결정적 변수가 됐다. 소련의 군사지원은 코민테른의 개입을 더 권위있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결국 혁명의 실패, 즉 자본주의 수호의 보증수표가 되고 말았다.

히틀러를 두려워 해 서방과 맺는 동맹에 집착한 스탈린은 서방 자본가들에게 혁명의 위협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은 국내외 자본가계급의 반혁명 정서를 반영하려는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며 스페인 노동자들의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하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스탈린주의의 배신에 역사적 책임을 묻는다 해도 당시 스페인 노동운동에 큰 영향력을 미쳤던 아나키스트 등 비스탈린주의 좌파들의 무능도 문제였다.

선거 참여 등을 거부하며 정치투쟁에서 스스로 주변화해 개혁주의를 오히려 강화시켜 준 아나키스트 지도자들은 막상 혁명에 직면하자 인민전선 정부를 지지하고 참여하면서 자멸의 길을 걸었다.

마르크스주의통일노동자당으로 뭉친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은 정치적 무능을 끝내 극복하지 못했다.

결국 기층의 활력이 꺾이자 인민전선 정부는 더 노골적으로 혁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좌파 정당들은 불법화되고 그 지도자들은 처형당하거나 살해됐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는 세계사의 한줄기를 바꾸는 패배였다는 게 드러났다.

혁명이 질식하자 파시즘이 독기 묻은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스페인에서 파시스트 군사 반란이 성공하자마자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을 당겼다.

스페인에서는 인민전선 정부 지지자를 포함해 수십만 명이 학살됐고, 노동계급 투사 한 세대가 절멸했다. 스페인 혁명의 패배와 파시즘의 승리는 세계적으로 노동계급 운동의 사기를 떨어뜨렸고 운동은 후퇴했다.




1900~1936, 스페인


스페인에서 인민전선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저발전으로 말미암은 첨예한 계급 갈등에 어떤 대안도 내놓지 못한 지배계급의 무능이 자리잡고 있었다.

과거지사가 된 구 제국 시절 영광의 포로였던 전통적 지배계급은 스페인 자본주의의 발전에 걸림돌이었다. 그들은 새로운 산업 조직 방식에 자신의 기득권을 내주려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륙의 토지 자본가들과 카탈루냐의 산업 자본가 같은 신흥 지배계급이 과거 부르주아혁명의 전례를 따라 민중을 동원해 구 지배세력을 타도할 의지나 능력이 있었던 것도 전혀 아니다.

그들은 구 지배세력보다 노동자와 농민들이 자신의 소유권에 도전하는 것을 더 두려워 했다.

1873년의 제1공화국이 1년 만에 군부 쿠데타로 무너뜨리고 다시 등장한 왕정이 근본적 도전을 1910년대까지 받지 않앗던 배경이다.

20세기 초 스페인은 러시아 혁명가 트로츠키가 규정한 “불균등결합발전”의 전형적 사례였다.

스페인 사회의 저발전 상태를 해결할 유일한 집단은 새롭게 등장한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은 스페인 사회의 모순에 고통 받았다.

자본주의의 저발전 상태로 말미암은 중앙집중적 산업 발전의 지체, 중앙집권적 국가의 미발전과 지방분권적 경향, 고립분산적 농업에 대한 의존 등은 민중운동의 분리주의적 경향과 아나키즘의 득세를 낳았다.

산업 노동계급은 인구의 소수였고, 북부의 보수적 농민층과 남부의 무토지 농민(농업 노동자)들이 다수였다.

그럼에도 신흥 산업지대인 카탈루냐 지방을 중심으로 스페인 노동계급의 혁명적 잠재력은 곧 드러났다.

1917년 러시아혁명이 스페인에 저항의 불바람을 몰고 왔다. 1917년 총파업을 기점으로 3년 동안 혁명적 정세가 이어졌다.

같은 때 다른 유럽 국가들의 혁명적 반란이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로 단련된 혁명 지도부를 만들어내지 못한 이 운동은 3년 만에 진압되고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의 군사독재가 시작된다.

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킨 덕에 농업 수출로 경기가 살아났으나 이 우연적 호황은 전쟁과 함께 끝났다. 미겔의 독재는 그래서 안정적이지 못한 채 오래 가지 못하고,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순식간에 허물어지고 만다.

또다른 우익 장군 베렝게르가 뒤를 이었으나 스페인 민중의 저항은 단순한 내각 교체에 머물지 않았다. 9년에 걸친 혁명이 1931년에 시작된 것이다.

알퐁소 13세는 퇴위하고 제2공화국이 선포됐다. 그러나 집권한 공화주의자들은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눠 주지도 않았고, 노동자들의 생활 수준을 높이지도 못했다. 여전히 봉건적 지배계급 노릇을 하는 교회를 억압하지도 못했다.

1934년 스페인 북부 아스투리아스에서 광부들이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하고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자 가운데 하나가 훗날 독재자인 프랑코였다.

이 봉기는 애초에 전국적 봉기의 일부로 계획됐으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통제하는 노동총동맹은 단순한 하루 총파업으로 물러섰고, 아나키스트들이 지도하는 전국노동연합은 봉기를 포기했다.

결국 노동자들의 패배감 속에서 우익 세력들이 1934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다. 우익 세력들은 3년간 시늉만 낸 개혁조차 뒤엎으려 했다.

저항이 다시 시작됐고, 19362월 선거에서 인민전선 정부가 집권했다.

우익과 구 지배계급에 맞서 공화국을 수호하자는 이 인민전선 정부는 공화좌파, 공화연합, 사회주의노동자당, 사회주의청년당, 공산당, 마르크스주의통합노동자당, 노동자총동맹 등이 참여했다.

이전 집권에서 실패한 경험 때문에 인민전선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모든 좌익 정치범을 석방하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이것은 노동운동을 고무했다. 6월에는 더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며 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가는 등 투쟁의 파고가 높아졌다.

동요하는 인민전선 정부를 사이에 놓고 정치 양극화가 고조되는 상황에서 우익 군부와 파시스트들, 카톨릭 교회와 왕정복고세력들은 쿠데타 음모를 짰고 마침내 716일 모로코 주둔군의 본토 진격으로 반혁명 내전이 시작됐다.

단숨에 수도 마드리드를 점령해 새 정부를 선포하려던 우익 반군의 목표는 지역 노동자들의 저항으로 좌절됐다.

결국 내전 초기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아 스스로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는 대체로 파시스트들이 패배했다.


POUM

이 당의 지도자 안드레스 닌은 한때 트로츠키가 이끄는 국제 좌익반대파 소속이었으나, 이후 결별하면서 지지자들과 POUM(마르크스주의노동자단결당)을 결성했다. 이 당은 스탈린의 반혁명 정책에는 반대했으나 혁명적 경향과 개혁주의 경향 사이에서 동요하다가 투쟁의 기회를 놓쳤다.


FAI

무정부주의자들의 정치단체로 1백만 명이 넘는 전국노동연합(CNT)을 지도했다. 충심으로 혁명을 지지했으며 가장 전투적인 반파시즘 투사들이었다. 그러나 아나키즘 전략 때문에 전국적인 대안 권력을 세우는 일에 정치적으로 기권해 인민전선 정부를 대체할 정치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노동자들이 너무 급진적으로 행동해서 반파시즘 진영이 분열하고 자본가들이 도망간 것이 패인은 아닐까?

반파시즘 투쟁이 혁명으로 발전한 과정을 살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게 드러난다.

파시스트 군대는, 노동자들이 단호하게 나서 정규군에게 무기를 넘겨 받고 지역을 통제하며 저항하거나 병사들이 장교를 무력화하고 노동자들과 함께 행동한 곳에서 패배했다.

노동운동이 정규군과 지방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믿고 기다린 곳에서는 대부분 뒤통수를 맞았고 파시스트들의 승리와 점령, 학살이 시작됐다.

그래서 내전 초기, 카탈루냐 지방정부 수장 콤파니스는 노동운동의 지도자들을 불러 “모든 것이 여러분 수중에 있습니다. … 지금의 나와 내 충성심을 믿어 주십시오” 하고 말해야 했다.

반대로 인민전선 정부는 처음부터 동요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의 자생적 저항을 더 두려워 한 인민전선 정부는 민중들에게 파시스트 군대에 맞서라고 호소하지 않았다심지어 반군의 본토 진격 항로인 지브롤터 해협을 지키던 함대에게 교전을 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반란군일지로 모를 [, 신뢰할 수 없는] 정규군에게 [쿠데타에 대한] 진압을 맡기겠다며, 자발적으로 무장 저항에 나선 노동자들에게 무기 지급하기를 거부하기도 했다. 그 결과 기층의 반발로 내각이 교체됐다.

대다수 자본가들도 스스로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보다 차라리 파시스트를 선호한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들의 지지가 프랑코 진영으로 넘어가자 인민전선 정부는 대변할 사회 세력이 없는 껍데기가 됐다.

좌파는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가지 말고 각 지역 혁명위원회들을 연결망으로 하는 전국적 대안 권력을 창출해야 했다. 인민전선 정부를 위해 혁명적 투쟁을 자제하는 것은 자멸의 길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에게 이 전쟁에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었기 때문이다. 옛 주인들이 떠난 곳에서 이들은 공장과 토지를 접수하고 모든 공공서비스와 치안을 통제했다. 이제 선택지는 혁명이냐, 파시즘이냐 둘 뿐이었다.

따라서 오히려 패배의 책임은 노동자들에게서 가장 강력한 투쟁의 동력인 사회혁명의 열망을 제거하려 최선을 다한 인민전선 정부와 스탈린주의 공산당과 인민전선 정부에 있다.

이들의 주요 책략은 좌파를 인민전선 정부에 포함시켜 발목잡고 뒤통수치는 것이었다.

혁명의 위력이 가장 강했던 카탈루냐에서 이베리아아나키스트연합(FAI)POUM은 지역판 인민전선 정부에 들어갔다가 그런 꼴을 당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POUM을 중앙정부에서 쫓아냈고 얼마 안 가 불법화한 뒤 그 지도자 안드레스 닌을 살해했다. 배신의 마지막 희생자는 공산당 자신이었다.

한편, 프랑코 진영의 주력 부대는 스페인령 모로코의 주둔군과 모로코인 용병이었다. 인민전선 정부가 모로코 독립을 선언한다면 전세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 실제로 모로코의 민족해방운동 지도자들이 공화국이 식민해방을 약속하면 쿠데타 군에게 타격을 주는 봉기로 협조하겠다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페인령 모로코의 해방은 프랑스령 모로코에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프랑스 자본주의를 불편하게 하면 안 된다는 인민전선 정부와 소련의 판단으로 이 해방적 조처는 거부됐다.


서방 민주국가들의 위선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이렇게 행동했는데도 ‘반파시즘’을 자처하던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자본가들은 결코 스페인의 노동자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이 압력에 굴복해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도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의 군사 지원 요청을 거부했다.

이렇게 인민전선 정책 때문에 스페인 노동자들의 손발이 묶여 있는 사이에 독일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정부는 최신 무기와 병사 수만 명을 프랑코에게 지원했다.

인민전선 정부는 이 내전이 혁명처럼 비치면 자유 진영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이 유일하게 파시스트들을 격퇴하고 있던 자발적 지역위원회와 의용군들을 배척한 이유다.

일부 지역에서 지방 정부와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의 자주 관리보다는 파시스트들이 자본주의적 소유권은 그대로 인정할 것이라 보고 소극적으로 저항하거나 반파시즘 진영을 배신했다.

스페인 정부는 국제적으로 지원을 호소했는데, 미국, 영국 등의 정부는 스페인에서 볼세비즘의 악몽을 되풀이하느니 파시즘이 집권을 하는 게 최악을 피하는 길이라고 여겼다.

프랑스 인민전선 정부의 사회당 출신 수상 레옹 블룸이 비밀리에 군사지원을 진행할 때도 인민전선 정부의 다른 자본가정당들은 제지했다. 영국 정부는 불개입을 촉구했다.

그들은 독일과 이탈리아를 포함한 불개입 선언을 하고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최신 무기로 프랑코 진영을 후원했고 서방 정부들은 이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미국와 영국의 대자본가들은 막대한 돈을 프랑코 진영에 보냈다. 그러나 이런 계좌는 ‘동결’되지 않았다.

합법 정부가 군사 반란에 직면했는데도 서방 제국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적 이해관계 때문에 공화국을 방어하지 않은 것이다. 이런 자들이 몇 년 후 제2차 세계대전을 반파시즘 민주주의 전쟁이라고 부른 것은 너무 역겨운 짓이다.


피의 강물을 함께 건넌 스탈린주의


왜 소련의 지원은 혁명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이때 소련은 인민전선 정책으로 돌아서고 있었다. 인민전선 정책을 대외정책 측면에서 정리하자면 소련 정권은 유럽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이며 스스로 유럽 자본주의를 유지하는 데 협력하겠다는 뜻이었다.

민중혁명의 국제적 확산이라는 볼세비키 국제주의 대신 소련 국가의 강화와 생존이 우선순위가 된 것이다. 서방 강대국들과 경쟁해서 살아남으려면 단기적으로 집약적 산업 발전을 할 시간이 필요했고, 그것은 단기적으로 제국주의와 타협하는 정책으로 나타났다.(이 과정은 당연히 1917년 러시아혁명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성과를 국내에서 파괴하는 반혁명 과정과 함께 진행됐다. 국가자본주의론 참고 링크 ☞ 바로 가기 

서방 공산당들은 소련 국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처럼 바뀌어 갔다. 그것은 소련의 자금과 위신을 담보로 가능했다. 그럼에도 이를 위한 좌파적 신용도를 유지하려면 나름대로 정교한 관료적 줄타기가 필요했다.

특히, 당시 소련은 나치 독일의 침략 위협이라는 공포에 빠져 있었다. 이 때문에 서유럽 열강과의 동맹이 절실히 필요했고 이를 위해 서유럽 혁명을 막아주는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인민전선이다. 

그래서 마지못해 스탈린이 인민전선 정부에게 군사 지원을 한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그것은 소련 공산당이 서유럽의 혁명도 반대했지만, 파시즘의 득세도 막아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련의 군사지원은 모두 스페인 정부가 보유한 막대한 금을 대가로 받고 이뤄졌다. 반면에 수많은 기층 투사들이 온갖 나라에서 스페인의 반파시즘 투쟁에 목숨을 걸고 자원했다.

그나마 1차대전 때 쓰던 낡은 무기들이 주종이었고, 사람은 야전부대가 아니라 경찰 요원들을 지원했다.

그들은 지원을 핑계로 의용군을 해체하고 인민전선 정부에 충성하는 정규군 체제를 확립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마침내 공산당이 주도하는 인민전선 군대는 19375월 바르셀로나에서 노동자 의용군이 파시스트들에게 빼앗아 사용하던 전화국 건물을 공격했다.

혁명의 보루였던 카탈루냐에서 공산당의 이름으로 반혁명을 시작한 것이다.

그때 유일하게 파시스트 군대를 격퇴하고 있던 것은 스스로 무장한 노동자와 농민들이었다. 공장과 토지의 옛 주인들은 도망가고 배신했다.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이 전쟁에서 필사적으로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이 전쟁이 사회혁명이기 때문이었다.

스탈린 공산당과 인민전선의 배신은 가장 강력하면서도 유일한 저항의 동기를 제거해 버렸다. 그들은 동기를 제거함으로써 혁명의 동력도 제거했다. 여기에는 비밀경찰과 공산당내 숙청, 의용군 해체 등의 조처가 동반됐다.

이제 스탈린주의는 러시아 국내에서뿐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진정한 민중의 해방 운동과 [그리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 전통과도]건널 수 없는 피의 강물을 건넜다.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