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트가 동네 시장 품목까지 판매하면 되냐는 비판에 신세계 부회장 정용진이 “이념적 소비를 하느냐”고 조소하면서 “윤리적 소비” 논쟁이 불거졌다.(관련 글 ☞ 신세계·이마트와 정용진의 ‘이념적 소비’)  

조국 교수는 ‘윤리적[착한] 소비’ 운동으로 오만한 대기업에 본때를 보여 주자고 호소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또는 ‘착한 소비’) 운동가들의 목표는 단순한 라이프스타일 추구나 개인의 자기 만족만은 아니다. 이들은 공정무역, NPO(비영리은행), 기업의 사회적 책임, 사회적기업, 생협, 지역화폐 등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

이들은 ‘나쁜’ 대기업들이 국경을 넘나들며 벌이는 불공정 거래와 착취ㆍ환경파괴 등에 분노한다. 이들은 기업 이윤보다 인권과 환경, 민주주의가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들이 초콜릿 회사를 비난할 때, 그것은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 등의 카카오 농장에서 인신매매로 팔려온 아동들이 다국적 식품회사를 위해 노예노동을 하는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다.

이들이 폐지 재활용 소비를 권장할 때, 그것은 다국적 기업이 브라질이나 칠레에서 막대한 삼림을 파괴해 지구 기후를 위험에 빠뜨리는 일을 막으려는 호소다.

자본주의를 변혁하려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런 분노에 공감한다. 이랜드 등 ‘나쁜’ 기업의 노조 탄압에 맞선 보이코트(불매운동)를 마르크스주의자들도 적극 지지하고 동참한 바 있다.

△ 삼성 불매에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랴마는 삼성이 지배하는 시장은 한국경제에서 핵심적인 시장들이다. 삼성과 그 아이들=나쁜 대기업들이 지배하는 시장들이라는 것이다. 그놈이 그놈인 시장에서 불매운동하기 참 힘들다.


그럼에도 이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일차적으로 다른 점은 자본주의 기업에 타격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방법의 차이에 있다. 

“소비 투표”

이들은 자본주의에서 기업들은 결국 상품 판매에 성공해야 이윤을 벌 수 있다는 것에 주목한다. 그래서 “윤리적 소비”가 기업에 진정한 압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소비는 돈으로 하는 투표”라는 말로 요약된다. (투표라는 상징을 사용한 것은) 경제 구조를 바꾸지 않고도 “소비 투표”로 시장을 민주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방법의 차이는 대안의 차이를 반영한다. 이들이 ‘나쁜’ 기업을 길들여 만들려는 세상은 ‘윤리적(착한)’ 자본주의다. 

그런데, 이 방법은 점진적 목표를 이루는 데서조차 몇 가지 난점을 낳는다. 

첫째, 현실에선 ‘나쁜’ 대기업들이 필수적인 소비 시장을 지배한다. 예를 들어, 무노조 삼성의 가전 제품이 싫다고 노조 탄압 LG 제품을 사는 것을 누구도 ‘윤리적 소비’라 부를 수 없다는 딜레마가 생긴다. 공정무역 등 윤리적 소비 품목이 대체로 커피, 초콜릿 등 기호품[각주:1]에 한정돼 있는 현실이 이것의 방증이다.(각주 꼭 보세요)

둘째, 이윤 그 자체가 목적인 기업들은 ‘윤리적 소비 시장’도 창출해 낸다. 창업자[각주:2]가 극우 시오니스트고 아프리카 커피농장 착취로 대표적인 불매 대상 기업이던 스타벅스가 겨우 전체 구매량에서 5퍼센트만 공정무역 커피를 쓰고도 ‘공정기업’으로 불린다!

△ 스타벅스 문제는 일종의 딜레마다. 윤리적 소비로 점진적 기업 변화를 추구하는 관점에서 보면 스타벅스의 조그만 변화는 성과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여전히 이스라엘 국가를 후원한다는 의혹을 벗어나지 못했다. ‘보이콧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억압에 맞서 이스라엘과 하는 모든 교역에 반대하는 국제 캠페인이다.


셋째, 윤리적 소비를 하려면 대체로 더 비싼 가격을 치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신세계 정용진을 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이마트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 김규항의 말처럼 “생존 자체가 숙제인 비정규 노동자들이 ‘착한 소비’를 촉구받는 건 공정한 일일까?”[각주:3]

반대로, 마르크스주의는 소비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는 자본주의를 바꿀 수 없다고 본다.

소비 시장에서 누구나 품목을 선택할 순 있지만(윤리적 소비를 하려 할 수 있지만) 모든 재화와 서비스가 상품화하는 자본주의에서 소비 자체를 거부할 순 없다.

자본주의에서 무엇을 살지 고민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무엇을 생산할 지 결정하는 기업주들이 권력을 갖게 되는 이유다. 자원을 배분하고 얼마나 생산할지 결정하는 과정에서 소비자 기호는 부분적 고려 사항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개별 기업은 시장 경쟁의 압력에 종속돼 있다. 이 경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생산’과정에서 노동자를 쥐어짜고 산업안전이나 환경보호 등에 드는 비용을 줄여야 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나쁜’ 기업들은 이 ‘경쟁적 축적’ 과정[각주:4]의 필연적 산물이다.

윤리적 소비 운동가들이 대체로 대안으로 삼는 소생산자 경제도 이 시장 경쟁 구조를 바꾸지 않는다면 도로 독점체들의 과점 시장으로 바뀔 것이다. 사실 소생산자나 소상인이, 또는 그 제품이 특별히 더 윤리적이라고 할 이론적 근거는 없다.

자본주의에서 가장 큰 소비자는 바로 기업들이기도 하다. 기업의 투자가 수요를 창출한다. 원료(구입과 운송), 토지(또는 사무용빌딩, 물류창고 등의 부지 매입과 건축), 노동력 등을 구매하는 데 쓰는 비용이 수요를 창출하는 것이다.

이 말은 노동소득(임금)을 모두 합쳐도 총투자와 맞먹을 수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소비재에 대한 ‘소비 투표’가 기업권력을 통제하기에는 표가 애초부터 너무 적다. 

눈을 돌려 소비 시장이 아니라 ‘생산’ 과정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이 거대 기업들의 이윤 활동은 전적으로 고용된 노동자들의 활동에 의존한다. 이들의 노동은 자신의 임금몫 말고도 막대한 부를 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소비자로서보다 생산자로서 더 큰 잠재력을 가진다. 현대자동차 소비자 수백만 명을 모으는 것보다 현대자동차 노동자 4만 명이 파업을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고 파급력이 크다[각주:5].

따라서 진정 이윤에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소비’ 과정이 아니라 ‘생산’과정이고, 그 주역은 원자화된 소비자가 아니라 생산과정을 중단시킬 수 있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행동이다.

이것만이 ‘나쁜’ 기업들이 지배하는 경제 구조를 민주적 계획이 기초가 되는 사회로 바꿀 잠재력을 가진다. 

진심으로 기업 횡포가 만연한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착한’ 소비에 머물지 말고 노동계급의 집단적 투쟁을 지지하고 더 나아가 이 투쟁에 함께하는 것이 필요하다.


※ 이 글은 <레프트21> 42호에 기고한 마르크스주의로 세상 보기-윤리적 소비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를 보충한 것이다.(그래서 간결한 속도감은 좀 줄었다.) 오늘날 윤리적 소비 운동은 세계무역부터 동네 소비까지 방대한 영역을 다루므로 짧은 칼럼에서 완벽히 다룰 순 없다. 그 점에서 이 주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로서 앞으로도 계속 연구하고 논평할 계획이다. 우선, 이 기사의 부연 설명 글을 주말쯤 올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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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호품 공정무역은 또다른 중요한 논점을 낳는다. 제3세계 국가의 기호품 수출은 해당 지역 농업을 거대 농장의 단일 경작으로 바꿔 버렸고, 그것은 해당 지역의 식량 위기를 낳았다. 이런 식의 농업 구조 변화 때문에 커피 등 기호품 생산이 과잉돼 가격이 폭락하는 바람에 더 악화됐다. 이 플랜테이션 노예노동은 제국주의 수탈에서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기호품 공정무역은 이런 구조를 건드리지 않고 가격만 좀더 주기 때문에 오히려 이런 잘못된 농업 구조를 영속화시키는 것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본문으로]
  2. 스타벅스 창업자 하워드 슐츠는 1950년대 뉴욕 빈민가 출신으로 스타벅스를 세계적 기업으로 키운 자수성가 신화의 스타 CEO다. [본문으로]
  3. 김규항의 칼럼에서 이 구절이 가장 날카로운 문장이었다고 생각한다. [본문으로]
  4. 즉 자본주의 경쟁에서 소비재 판매는 부분적 본질이라는 것을 뜻한다. 자본주의 경쟁의 본질은 경쟁적 축적이다. 그래서 내부 시장이 금지됐던 소련 등에서도 자본주의 경쟁이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본문으로]
  5. 삼성을 두고 아직 이런 예시를 들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삼성 안팎에서 싸우는 모든 분들에게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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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이 <경향신문> 사실상의 절독 선언을 했다[각주:1]. 진보정당과 개혁 언론의 충돌은 흔한 일이 아니다.

발단은 <경향신문> 10월 1일자 사설이다. 이 사설은 북한의 3대 세습을 비판하면서, 이를 비판하지 않는 민주노동당도 함께 비판했다. 민주노동당은 그 직전 외부에서 왈가왈부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3대 세습을 비판할 수 없다고 논평한 바 있다.

북한은 자본주의 계급사회

북한 지배계급은 수십 년 만에 조선노동당 대표자회의를 열어[각주:2] 김정일의 3남으로 알려진 김정은을 초고속 승진시켰다. 김정은은 북한군의 대장과 조선노동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임명됐다. 군 경력도 없고 서른도 안 된 인물이 사실상 최고 권력자의 지위 승계를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북한 체제가 사회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는 사례다. 사회주의는 원리상 단지 몇 년에 한 번 대통령을 뽑는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와는 비교할 수 없이 민주적이다. 정치는 경제적 결정을 다루는 과정이 될 것이고, 무엇을 얼마나 생산하고 소비할지는 자유로운 대중들이 협력적으로 수요를 조사하고 토론하며 투표를 거쳐 결정할 것이다.

이런 권리들이 설사 외부적 요인으로 일시적으로 제약되더라도, 말그대로 그 제약이 일시적이어야 하며, 그것을 보장할 최소한의 기초적 권력은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북한은 사회적 지위에 따라 부와 권력이 애초에 불평등하게 배분돼 고착화된 사회다. 최고 지도자 지위의 세습은 두드러진 한 사례일 뿐이다.

명백한 계급사회인 것이다. 어떤 계급사회일까? 북한 경제는 국경 밖 자본이나 군사력과 벌이는 경쟁이 경제의 우선순위와 형태를 강제한다는 점에서 원리상 자본주의다. 폐쇄적 국가‘자본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체제는 핵과 인공위성, 중공업 같은 경쟁과 자본 축적의 필요가 인민의 배고픔보다 우선시된다.

이들 국가자본주의 경제는 한때 유행하고 성공하기도 했다. 그래서 북한은 1970년대 후반까지 남한보다 더 빨리 성장했고, 1980년대 초반까지는 남한보다 더 잘 산다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체제도 서방의 시장자본주의 경제와 마찬가지로[각주:3] 자본주의에 생래적인 주기적 경제위기를 겪어 왔다. 1980년대 후반부터 취약해진 북한 경제의 경쟁력은 옛 소련의 붕괴 후 역내 시장마저 잃어버리면서 더욱 약화됐다. 대홍수로 식량 기근까지 겹친 1990년대 중반부터 북한 경제는 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볼 때, 김정은 권력 승계는 북한 지배계급의 호언장담과 달리 북한 체제가  지속적인 위기 상태라는 걸 보여주는 사건이다. 북한 지배계급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권위, 일당 체제를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이 그나마 경제와 생활수준이 성장하던 시기에 최고지도자였던 김일성 ‘주석’의 후광 뿐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그것이 김정일이 주석 자리를 공석으로 둔 채 ‘유훈 통치’를 한 배경인데, 그 방식을 유지하려니 검증된 지도력이 아니라 그 혈통과 군부의 지지에 의존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선군(先軍)정치는 이번에도 강조됐다. 물리적 억압력에 의존하는 것이다.

이번 당 대표자회는 이 때문에 조선노동당 규약도 손 봐야 했는데, 공산주의 등 명목상
용어 대신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혁명전통'을 공식화하고, 그에 대한 '계승성'을 강조”했고 “선군(先軍)혁명이 추가됐다.[각주:4]

주체 혁명은 이제 권력세습과 군부를 앞세운 선군정치를 뜻하는 것이 됐다.



북한 비난하는 남한 지배자들의 위선

이것을 한국의 우파들은 김씨 왕조의 권력 세습이라고 비판했는데, 이것은 매우 위선적인 상징 조작이다. 

북한을 봉건왕조로 묘사하는 것은 남한 자본주의와 자유민주주의가 북한 ‘사회주의’(진실은 가짜 사회주의)보다 근본에서 더 우월한 체제라는 것을 깔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개인 왕조 체제인 것도 아니다. 북한은 관료적 자본가들의 집단 지배체제다[각주:5]

북한 모델이 진보적 대안 사회가 결코 될 수 없지만, 우파의 북한 비판과 선을 그어야 하는 이유다. 이 점을 혼동한 많은 좌파들이 냉전시대에 반공주의로 전향했다[각주:6]

그러나 권력과 부의 세습이란 점에서 남북이 다르지 않다. 대표 사례인 <조선일보>와 삼성재벌의 세습은 그것이 일개 기업이나 돈 더미 정도가 아니라 한국 사회 주류 중의 주류로서 보유한 권력까지 세습된다[각주:7]는 점에서 북한과 다르지 않다.

몇 년에 한 번 투표권이 있으며, 그나마 뽑힌 뒤 별 헛짓거리를 하고 다니는데도 어떻게 할 수 없이 임기 채우기만 기다려야 하는 자유민주주의도 허술하고 비민주적이긴 마찬가지다.

남한도 진정한 권력은 세습되고 있다. 진정한 통일과 남북 닮아가기는 남북 고위층에서 이뤄지고 있는 셈이다. 두 사회가 자본주의적 계급 사회라는 공통점에 기초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양쪽 지배자들이 서로 상대 존재를 핑계로 내부 불만을 잠재워온 적대적 공생관계의 역사는 바로 지배계급이라는 공통적 속성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한국 사회 주류의 비판은 반박꺼리일 뿐 진지한 고려 대상이 아니다[각주:8]그렇다면, 진보진영 안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접근법 문제인데, 이 점에선 일단 민주노동당 지도부의 논평을 비판할 수밖에 없다.

북한은 진보의 대안 될 수 없어

진보와 좌파의 보편적 기준에 북한의 권력 승계(외교적으로 좋게 표현하면)는 당연한 비판 대상이다. 무엇보다 그런 행위를 사회주의의 이름으로 한다면 지나칠 수 없다. 좌파의 신용이 걸린 문제기 때문이다.

사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다수 대중의 진정한 이익과 의견 참여가 반영되는 체제가 진보진영에서 대강 합의 가능한 대안적 민주주의의 모습이라면, 북한의 권력 체제가 이를 봉쇄하고 억압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민주노동당 지도부는 논평에서 좀더 세련되게 내재적 접근론과 남복관계 고려론을 펴는데, 여기에 비판받을 대목이 있다. 우선 오직 북한 정권의 문제에 대해서만 내재적 접근론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지 북한이 알아서 결정할 일이라는 논평은 사실상 북한 체제의 비진보성에 눈 감겠다는 선언이다. 권력과 부의
세습이나 비민주성을 비판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안에서 체제 비판을 할 때 일관성의 문제가 생긴다. 삼성과 <조선일보>의 세습이 좋은 사례다. 한편, 국제적으로 제국주의를 비판할 때도 일관성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에게도 내재적 접근법을 써야 하나.

이정희 대표[각주:9]는 북한 최고 지도자를 비판했을 때 늘 대북 관계가 악화됐다며 이 논평을 정당화한다[각주:10]. 이 대표가 이 나라나 미국의 관료와 우익들이 평소에는 적대시하다가 북한 정권과 우호 관계가 필요할 때는 찬사를 늘어놓는 이율배반을 지적하는 것은 옳다[각주:11].

하지만 한반도에서 각 국의 관계를 결정하는 가장 핵심 요인은 미국의 패권전략과 여기에서 파생되는 한반도 주변국들의 관계지, 남한 정당들의 태도가 아니다. 1994년 정상회담 추진에서 급작스런 전쟁위기로, 1998년 햇볕 정책 아래서 서해교전을, 2000년 냉각 국면에서 정상회담으로 등 이런 변화는 미국의 태도 변화가 주요 변수였고 남한 정권은 종속변수였다. 

또한 미국의 전쟁 협박 같은 게 아니라 진보적 비판을 이유로 북한 정권이 거칠게 나온다면 그것은 북한 정권이 나쁜 거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우리가 이명박이나 삼성 이건희 일가를 깐다고 그들이 권력을 동원해 억압하면, 그게 그들이 나쁘기 때문이지 우리 탓인가.

미국 제국주의나 한국의 냉전 우익의 색깔 공세와 진보진영의 북한 비판을 구분하지 않고 싸잡아 매카시즘으로 치부하는 것은 명백한 오류다. 진보도 북한 체제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문제는 쟁점이 된 <경향신문> 사설도 논점을 바꿔버렸다는 것이다. 사설에서 4분의 3 정도는 북한 비판과 북한 체제를 비판 못하는 민주노동당 논평의 약점을 비판하는 데 할애돼 있다. 여기까진 사실 문제 없다.  

그러나 사설은 글 말미에서 민주노동당이 “북한 체제를 비호하고, 나아가 상부로 간주한다는 비판에 부딪혀 분당이라는 아픔까지 겪은 바 있다”며 ‘종북’ 쟁점을 꺼낸 뒤, 민주노동당 지도부가 북한 비판을 거부하는 것은 “냉전적 사고의 잔재”라고 말한다. 

냉전적 사고를 보통 남(南) 아니면 북(北)의 편에 서서 상대편을 죽이려는 사고 방식이라고 본다면, 경향의 사설이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냉전적 사고라고 비판하는 것은 이들이 북한을 ‘상부로 간주하며’ 남의 체제와 대결하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다. 에둘러 표현했지만 사실상 ‘민노당 종북론’인 것이다[각주:12]

이 때문에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입장을 바꿔달라는 경향의 호소는 마치 민주노동당 지도부에게 스스로 종북이 아님을 증명하라는 것처럼 돼 버렸다[각주:13]. 이정희 대표는 분명하게 이 점을 이유로 내세워 자신은 말하지 않을 권리를 사용하겠다고 답했다. 

이런 반응은 이해가 가는 면도 있지만, (경향 사설에 대한 판단과는 별개로) 모든 비판을 싸잡아 반공주의로 몰아가는 것은 과도한 면(역편향)이 있다고 본다. 국가 탄압으로 촉발된 논쟁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엔 아마 예상 못한 3대 세습이 자주파 내부에서도 혼란을 일으킨 게 과도한 대응의 주관적 배경이 아닌가 싶다.

유감스런 경향의 종북 공격

사실, 유럽의 스탈린주의 공산당들이 옛 소련의 정치적 국경수비대 구실을 한 역사가 있다. 남한의 자주파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고, 앞으로도 그럴 의향이 있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옛 공산당들이 각국 진보운동의 자체 구조와 문화, 맥락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남한의 자주파도 남한 진보적 대중의 지지를 받아야 정치적으로 생존 가능하므로 친북 성향이라 할지라도 보통은 남한 정치의 맥락을 더 중요하게 고려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남한의 자주파가 한미fta에 반대하고, 비정규직 투쟁에 연대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반대해 대중행동 건설에 참여했을 때, 그것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것
(종북주의)이었나. 그렇다면, 비친북 좌파나 엔지오들은 북한의 지령에 따른 행동에 부화뇌동한 것인가.

이런 논리적 귀결 때문에 자주파를 일방적으로 종북주의로 내모는 것은 자기 얼굴에 침뱉기하는 것이다[각주:14]. 종북이란 용어가 뉴라이트에게서 시작한 것은 우연이 아닌 것이다.

북한 정권의 3대 세습을 비판하는 문제라면 누구나 한마디 거들 수 있고, 비판하기 뭣 하면 입을 다물면 된다[각주:15]. 진보진영 안에서 외교적 고려가 우선이냐, 가치가 우선이냐 등을 가지고 논쟁할 수 있다. 더 근본적으로 북한 사회가 사회주의인지, 정말 대안 사회의 자격이 있는지 토론해야 한다. 

그리고 종북론을 들먹이지 않고도 얼마든지 진보적 관점에서 북한 체제를 비판하고 자주파의 오류를 지적할 수 있다. <레프트21>은 종북론에 의존하지 않고도 북한 3대 세습과 자주파의 무비판적 태도를 비판했다.(☞ 관련기사 ①이것이 사회주의인가 / ②당대표자회의 정치적 배경 / 다음 호에도 추가 기사가 실릴 예정이다[각주:16])

사실, 민주노동당 안의 자주파 지도부가 3대 세습을 찬양하는지, 혼란스러워 하는지, 비판하는지 개개인들의 정확한 속내는 아무도 모른다. 민주노동당 당원 전체는커녕 범엔엘 경향의 내부 의견 분포도 정확히는 모른다.[각주:17]

그런데 <경향신문>처럼 당 전체를 싸잡아 “종북이냐, 아니냐” 묻고 증명의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기는 방식은
레드컴플렉스를 자극할 수도 있어 위험할 수 있다.[각주:18] 

내가
마르크스주의 시각에서 북한 체제와 그 옹호론을 강하게 비판하고, 북한 체제 비판을 무조건 매카시즘으로 몰아가는 자주파 일부의 대응 방식을 싫어하면서도, 경향발 종북 소동이 찜찜한 이유다.

남한에서 북한 비판은 차고 넘친다. 문제는 어떤 비판이냐다. 진짜 쟁점은 북한이 사회주의냐, 아니라면 무엇이냐, 진보의 대안 사회는 무엇이냐가 돼야 한다.




 

  1. 민주노동당 울산시당은 경향신문에 항의문을 보내고 보도를 시정하지 않으면 절독 운동을 하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이 논조를 바꿀리 없으니 울산시당은 이미 절독을 선언함 셈이다. 결과는 우려스럽다. [본문으로]
  2. 이번 3차 당대표자회는 1966녀 제2차 회의 이후 44년 만에 처음 열리는 회의다. [본문으로]
  3. 2차대전 시기부터 1960년대 말까지는 서방까지 포함해 전 세계적으로 국가자본주의 형태가 큰 흐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국가자본주의는 1930년대 대공황이 자유시장이나 미약한 국가개입에 맡겨서는 해결될 수 없다는 게 드러났고, 세계대전으로 주요 국가들이 국가통제 전시경제로 가면서 실업과 과잉생산이 해서된 것 때문에 유행하게 됐다. 이 체제의 선구자는 1930년대 옛 소련과, 나찌 독일, 일본이었다. [본문으로]
  4. 통일뉴스 9월 29일치 기사 인용. ☞ 개정된 北노동당 규약 서문, '공산주의' 문구 빠져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91961 [본문으로]
  5. 이 말은 김정일이 그랬듯이, 김정은도 북한 지배계급 핵심 집단에게서 최고지도자로서 검증과 인정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으로]
  6. 심지어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마저 그랬다. 이들 일부는 네오콘이 되기도 했다. 반면교사로 삼아야할 교훈이다. [본문으로]
  7. 김정은은 아마 세습 선배인 <조선일보> 사주 일가를 보면 “방가방가” 하고 인사할지도 모른다. 조선일보 사주 방씨 일가는 가계도 상으론 무려 4대째 세습이다. 2대 방우영/일영 형제는 사실 방응모의 양손자다. 김1성 가문이 3대 세습에 성공하려면 ‘남조선’의 ‘3성’ 가문을 보고 배워야 한다. [본문으로]
  8. 그들이 친미 독재 국가인 이집트나 싱가포르의 정권 세습이나 사우디아라비아 왕정, 후세인 시절 이라크, 중국 등을 이런 문제로 비난하는 걸 거의 보지 못했다. 심지어 2000년 미국 대선에서 부시가 대권을 강탈하는 걸 전 세계인이 지켜봤는데, 뭐라 한마디 했던가. 한국 주류 우익들의 북한 비난은 남한에서 좌파의 신용을 떨어뜨리려는 매우 의도적인 위선이다. [본문으로]
  9. 이정희 대표가 다음 블로그에 쓴 “진보임을 인정받기 위해 한 마디만 해 보라고?- 경향신문 9월31일자 사설에 대해” 라는 글이 논쟁이 되는데, 찬반을 떠나 아무도 말하지 않는 진실이 있다. 9월은 31일이 없다. 해당 사설은 10월 1일치다. (☞ http://blog.daum.net/jhleeco/7701325) [본문으로]
  10. 물론 이런 외교적 이유로 미국이나 한국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는 가치 판단을 담은 논평을 내지 않았다. 그 점에서 이정희 대표의 견해는 자주파적이라기보다는 햇볕정책의 자장 안에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본문으로]
  11. 예를 들어,동아일보는 주석궁에 김일성의 보천보전투를 보도한 기사를 황금본으로 만들어 가져갔다. [본문으로]
  12. 암튼, 친북과 종북 두 용어는 쓰는 쪽에서나 받아들이는 쪽에서나 그 맥락이 다르다. [본문으로]
  13. 민주노동당의 자주파 지도부도 이 점을 민감하게 느껴 강하게 반발하는 듯하다. 경향신문의 후속 기사 제목도 자극적이다. [본문으로]
  14. 이 자기얼굴 침뱉기를 피하려면 자주파를 진보가 아닌 것으로 취급하면 된다. 종북론이나 반공주의를 수용하는 진보진영 일부가 자주파를 적대시하는 종파주의에 빠지는 것은 이런 논리의 귀결이라고 본다. [본문으로]
  15. 대한민국에서 북한 욕하기는 쉽다. 내가 진중권을 다룬 글에서 지적했듯 지배적 ‘상식’에 부합하는 것이니까. 그러나 국가보안법이 북한 체제를 명백히 비판하고 반대하는 좌파까지 처벌하는 것을 보면,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 체제를 어떻게 비판하는가다. 북한을 비판할 때도 남한보다 못한 체제로 비판하는 것과 남한처럼 권력과 부가 독점 세습되는 똑같은 자본주의 계급사회라고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본문으로]
  16. 박노자 교수도 10월 1일자 레디앙 칼럼을 통해 북한‘만’ 악마화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진보신당 조승수 대표 후보도 맨처음 북한만 비판하던 것과 달리 최근에는 세습 문제에서 남북 모두 비정상국가라는 논리로 바뀌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본다. 물론, 그럼 정상국가란 무엇일까 하는 의문은 남지만 말이다. [본문으로]
  17. 내부에 있을지도 모를 혼란과 외부적 부담을 모두 고려해 북한 체제를 비판하지 않겠다는 견해를 낸 것으로 보인다. [본문으로]
  18. 아니나다를까 후속 보도에서 경향은 북한 세습 비판을 이유로 민노당이 반발한다고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종북 낙인찍기에 반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절독 선언 같은 건 완전 에러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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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트 피자 출시에 항의하는 네티즌에게 신세계 부사장 정용진이 트위터로 한 말이 사화적 논쟁으로 번졌다. 그는 이 네티즌에게 “본인은 소비를 실질적으로 하시나요 이념적으로 하시나요?” 하고 물었다.

대량 구매로 대량 판매하는 대기업 할인 마트는 이제 소비 시장의 영향력을 바탕으로 제조업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월마트 등 다국적 유통기업들의산업 지배력은 날이 갈수록 높아진다. 중국의 저가 수출 성장은 이런 월마트 같은 선진국 대형유통자본의 성장과 공생관계다. 한국에서 대형유통업체들도 모두 굴지의 대재벌 계열사들이다.



한국 사회에서 듣는 이를 참 곤란하게 하는 질문인데, 대중의 반발은 바로 ‘이념’이란 단어에 있다. 정용진의 소비에 관한 생각도 공인된 시장주의 이념에 바탕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부유층도 이념적 소비라는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정용진이 말한 실질적 소비는 기업 윤리라는 게 현실에 없다는 솔직한 토로라는 것이다.

우선, 그는 둘 가운데 어디 물건이 더 팔릴지는 “소비자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더 싼 이마트 피자를 실질로 구분했다.
그러니까, 정용진은 주류 경제학이라는 ‘자유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이념’에서 가르친 그대로 사람들을 가격 신호에 따라 소비를 결정하는 ‘합리적 개인’들로 본 것이다. 

물론, 평범한 노동자와 서민들에게는 물가가 낮은 것이 좋다. 요즘 배추 파동처럼 식료품이나 생필품의 가격이 오른다면 노동자들의 임금소득은 앉은자리에서 줄어들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인간을 단순히 가격 신호에 자동 반응하는 기계로 취급하는 주류경제학의 천박한 이해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각주:1]. 인간은 사회적 존재로서 사회 속에서 다양한 가치와 필요, 이해관계를 습득하고 형성한다. 당연히 소비에도 이런 점이 반영된다.

2007년 이랜드 비정규직 대량해고 때 이랜드 전 계열사 불매운동이 전국에서 비교적 호응을 얻은 것도 그런 사례다. 이 투쟁의 외침에 공명한 많은 이들이 가까운 홈에버를 피해 다른 곳으로 갔다. 내가 일하던 노조는 이랜드노조 관계 없는 한국노총 소속 노조였는데도 매년 6회나 조합원 행사를 치르던 속초 렉싱턴호텔을 피해 더 불편한 곳으로 장소를 옮겼다. 공정무역 제품 소비가 늘어난 것도 작지만 분명한 사례다.

사실 정용진이 레드컴플렉스 가득 담아 이념적 소비라 표현한 윤리적 소비라는 것이 반드시 진보적인 것은 아니다. 윤리=가치 라는 것 자체가 개인마다 집단마다 다르게 형성되므로 그 형태와 목표도 다양한다. 예를 들어, 국산품 애용 운동 같은 ‘이념적 소비’ 운동은 결코 좌파적이지 않다. 일부러 미국산 쇠고기를 사 먹겠다는 정신나간 우익들이 몇 있었는데...

한편, 정용진이 속한 계급[각주:2]의 개인 소비는 실질적 소비일까. 부유층의 명품 소비를 보자. 누구나 알다시피 명품은 비싸야 명품이다. 아무나 살 수 없고 아무나 사용할 수 없다는 바로 그 가치를 구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명품으로 부러움은 사겠지만, 그것만으로 무엇을 공짜로 사용할 수 있을리도 없고, 자동으로 국회의원이나 장관이 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비용 측면에서 명품은 완전한 낭비적 소비다.

그런데 정용진의 신세계그룹 스스로 고가 명품 마케팅을 하는 신세계백화점[각주:3]과 서민용 이마트를 분리 운영하고 있다. 부유층의 이런 소비는 이념적인가, 아닌가.

내가 볼 땐. 진정으로 이념적 소비는 바로 이것이다. 명품은 계급 구분을 명확히 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명품이 뭔지도 모르는 우리야 바로 앞에 서서도 구분 못 하겠지만, 그들은 간단한 악세사리만으로 상대의 계급 지위를 알아채는 ‘혜안’을 갖게 되는 것이다[각주:4].

아, 피할 수 없는 “이념적 소비”의 덫이여. ‘이것이 다 좌파들의 음모다!’


그렇다면 정용진이 4가지가 없어 완전히 협박성 구라를 친 걸까. 나는 그건 아니라고 본다. 정용진은 무의식 중에 신세계 자본의 인격화로서 자본의 이해를 솔직히 고백했을 뿐이다.

미국산 쇠고기를 예로 들어보자. 2008년 수입 재개 후 미국산 쇠고기는 소매 판매가 계속 부진하다. 대통령이 나서서 값싼 쇠고기 드립을 쳤는데도 그렇다. 서민들이 괘씸하게 좌파의 광우병 소동에 속아서 이념적 소비를 하는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막상 수입을 결정한 당사자들은 비싼 한우를 먹는다는 것이다. 청와대, 경찰청 고위직식당, 국회 식당, 조선일보 식당 등. 그러면 이들의 쇠고기 소비는 이념적 소비인가, 아닌가.  참 난감한 일이다.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이마트 같은
대형마트(와 유통·판매 자본)는 판매자기도 하지만, 생산자본에게는 자신도 구매자=소비자라는 것이다[각주:5]. 기업의 처지에서 보면, 식품 안전이고, 공정 거래고, 지랄이고, 최대한 싸게 사서 시장 점유율을 높일 만큼의 수준에서 적당히 싸게 파는 것이 최고의 선이고 가치다.

그래서 이마트 같은 대기업 할인 마트들이 미국산 쇠고기도 팔고, 가끔 불량식품도 팔다 단속되기도 하며, 노동자들을 저임금에 부려 먹고 쉽게 해고하는 것이다. 여기서 소비자에 대한 고려 기준은 어느 수준의 판매 가격이 제일 많이 팔면서도 이윤을 늘릴 수 있냐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까 신세계 정용진이 트위터에서 한 말은 자기 가문이 소유한 신세계의 소비(구매) 원칙, 즉 신세계 자본의 화신(身)[각주:6]로서 자본의 목표를 말한 것 뿐이다. 특히 새로운 가치 생산 없이 가치의 이전 과정에 참여하는 것으로 수익을  올리는 유통자본에게는 구매비용의 감소(‘실질적 소비’)가 매우 강박적인 목표일 것이다.

종합하면, 정용진은 이 발언을 통해 자신이 속한 계급의 속내 두 가지를 털어 놓은 셈인데, 하나는 자본의 노골적 목표이고, 하나는 지배계급의 레드컴플렉스다. 우리는 그가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를 이념적 소비라 바꿔 표현하는 걸 보면서 레드컴플렉스와 좌파에 대한 적의가 일부 몰상식한 이데올로그와 무식한 대중에게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이 나라 최고 지배자들에게 뿌리깊은 사고라는 것을 보여줬다. 

정용진의 생각을 나름 해부하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두 가지 쟁점이 생기는데,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담론과 ‘윤리적 소비’(착한 소비)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 쟁점으로 조국·공병호·김규항 등의 논자들이 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이것이 기업과 시장의 자유에 의심을 품는 사람들에게 피할 수 없는 쟁점인 것은 정용진 말이 아무리 4가지 없어도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어느 기업의 것이든 자본에게서 소비재를 구입해야 하는 현실, 소비를 하려면 돈이 있어야(어딘가에서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이 문제는 곧이어 다뤄 보련다.

  1. 값싼 미국산 소고기 먹으라는 이명박도 이런 천박한 이해의 대표적 사례다. 공병호는 조국의 정용진 비판을 다루며 “친척 것도 싸야 산다”는 말로 조국을 비판했다. 사실, 주류경제학에서 이것은 공리다. 즉, 주류경제학으로는 정용진과 공병호의 논리를 비판하기 어렵다. [본문으로]
  2. 정용진의 이건희의 조카로, 이건희의 여동생인 신세계 회장 이명희의 외아들이다. 주류 중 주류인 것이다. 재벌 3세 치고는 사회적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당대 최고 여배우였던 고현정과 결혼했기 때문이다. 고현정은 이 왕귀족 가문에서 꽤나 박대를 받았다고 알려졌는데, 그 이유는 역시 출신신분 때문이었다고 한다. 고현정의 시누이들이 외국어로 대화하며 그녀를 따돌렸다는 얘기는 지금도 유명한 소문이다. 소문의 시작이 하도 오래되서 출처는 기억도 안 난다. 사실이든 아니든 중요한 것은 이런 얘기들이 지금도 사실처럼 떠도는 것은 사람들이 이 계급의 생활상을 이렇게 이해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3. 파는 물품과 가격, 인테리어가 완전히 다르다. 신세계백화점 본점을 가보라. [본문으로]
  4. 가격 자체가 하층 계급의 접근성을 막는 도구다. 이들이 사는 주거지의 가격도 이런 구실을 한다. [본문으로]
  5. 제조업 대기업에게는 동맹과 경쟁을 오가는 관계겠지만, 이마트 정도 되면 더 약한 기업에게는 가장 무서운 소비자일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관계는 대상의 정치·경제적 지위에 따라 강자·약자가 달라진다. 대형 유통 업체가 시장을 장악한 상황에서 또는 시장 전체에서 나같은 저소득층 소비자는 판매자보다 약자다. [본문으로]
  6. 사전을 보면, 화신(化身)을 ‘어떤 추상적인 특질이 구체화 또는 유형화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르크스는 자본가들을 추상적인(눈에 보이지 않는) 자본의 이해관계를 현실에서 실행하고 추구하는 인격체라고 묘사한 바 있다. 즉 임노동-자본의 관계에서 자본가는 자본의 화신으로 행동한다. 이를 거부하는 순간, 해당 개인 인격체는 임노동-자본 관계 또는 자본끼리 경쟁하는 시장 관계에서 더는 자본가로서 기능을 하기 어렵게 된다. [본문으로]
Posted by 단도직입[單刀直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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